우리우리 사랑은 운명같아요

우리우리 사랑은 숙명같아요

하늘만이 우리사랑 알고 있을거예요

불타오른 사랑이 너무나 뜨거워

떠오르던 저 태양도 놀라워 숨어버렸네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난 두 사람은

몸을 태워 말하리 사랑한다고

타라 타라 타라

아낌없이 모든 것을 태워라

우리사랑 불타는 사랑

 

 

‘불타는 사랑’의 가사이다. 사람이 이렇게 불타는 사랑을 할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이 없을 것 같다. 수원 화성을 배경으로 옥상 무대에서 신나게 노래를 하는 가수 정은. 10세 꼬마부터 80세 할머니까지 신이나 손뼉을 친다. 메들리까지 사람들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다음 일정이 있다고 총총히 걸음을 옮기는 정은.

 

그녀는 2003년 KBS 도전 주부가요 스타와 KBS 전국 노래자랑에 잇따라 참가하여, 놀라운 음색을 선보이며 가수활동을 시작해 벌써 5집을 낸 가수이다. 그동안 불타는 사랑을 비롯해 화성팔경, 무정한 사람, 춘천막국수 등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었으며, 이번 6집은 양평군 홍보대사답게 ‘두물머리 사랑’이란 노래를 준비했다고 한다.

 

트롯가수 정은과의 대담

 

- 가수활동은 언제부터?

한 10년 정도 된 듯하네요. 10년 전에 첫 앨범을 내고, 이번에 6집이 나오니까요

 

- 수원에 정착하신지는 얼마나 되었는지?

수원으로 온지는 한 15년 정도 되었어요. 그동안 파장동 노래교실 등에서 주민들에게 노래를 가르치기도 하고요.

 

- 노래교실 회원들은 몇 명이나 되는지?

한 30여 명 정도 되는 듯합니다. 회원들과 함께 많은 곳에 위문공연을 하기도 했어요, 그런 봉사로 인해 제17회 대한연예예술인 사회봉사상과 한국연예스포츠 아름다운 가요제 대상을 수상했고요.

 

 

 

- 위문공연은 주로 어디로 다니시는지?

고아원과 어르신들이 계시는 양로원, 그리고 교도소 등을 다니고요. 지역에 있는 요양병원은 매달 두 번씩 찾아뵙고 있어요. 어르신들이 기다리고 계시거든요. 한 번에 한 두 시간 정도 노래를 들려드리고 오죠.

 

- 위문공연을 다니시면서 느끼신 점은?

요즈음 사람들은 물질에 너무 집착하는 듯해요. 저희들은 그런 것을 떠나 저희 노래를 좋아하는 분들과 만나 살가운 정을 느끼는 것이죠. 물론 저희들은 노래봉사를 하러 가지만, 사실 그 분들에게서 심적으로 얻어오는 것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노래를 부르게 되고요.

 

- 양평군 홍보대사가 되셨던데?

예 지난 양평군 9월 월례회 때 홍보대사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저에게는 의미 있는 날이기도 했고요. 앞으로 더 많은 곳을 다니면서 노래로 재능기부를 하려고요.

 

- 봉사를 하기 위해 콘서트를 열었다고 하는데?

예, 여주와 남양주에서 콘서트를 가졌어요. 여주에서는 수익금 전체를 장학금으로 기부를 했고요. 올해 세 번째 콘서트를 생각하고 있는데 여러분들이 수원에서 했으면 하시데요. 여러분들이 도와주시면 이번에는 꼭 수원에서 하려고요(웃음)

 

 

잠시 동안 시간을 이용해 만나 본 봉사하는 가수 정은. 또 다른 무대가 있어서 급히 가야한다는 말을 남기고 총총히 옥상을 떠난다. 늦깎이 가수지만 앞으로 많은 활동을 기대해 본다.

 



5일장이라고 하면 누구나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시끌벅적 한 것을 생각한다. 그러나 오래된 5일장이 장사꾼 10여 명에, 찾는 사람도 한가하다고 하면 이해가 안 될 것이다. 그런 5일장인 여주 대신장을 찾아갔다. 4일과 9일에 서는 대신장은 대신면사무소 앞에 선다. 고작 장사꾼 몇 사람과, 장을 찾는 이 몇 사람이 장터 안에 있는 모두이다. 다 합해보아야 20명 남짓하다. 5일장의 한가한 모습이다.

 

한 때 중단했던 대신장

 

장이라고 돌아볼 것도 없다. 한 눈에 다 들어온다. 장에서 만난 이창호(70·여주군 대신면 율촌1리) 어르신은 대신장이 한 때 중단 되었었다고 하신다.

 


 

"대신장은 중단 되었다가 다시 시작한 지가 한 60년 되었네. 내가 소학교(초등학교) 다닐 때 몇 년 장이 서지 않다가 다시 시작했지."

"그 때는 지금보다 장이 컸나요?"

"그 때도 지금보다 별로 크지 않았지. 그래도 5일장이라 살만한 것들은 다 나와."

 

장을 둘러보니 젓갈 등 찬을 파는 노점, 과일, 건어물, 옷, 채소, 양말 등을 파는 노점, 생선, 이불, 그리고 한 쪽에 뻥튀기가 다다. 5일장치고는 정말 규모가 작다.

 

"항상 이 정도였나요?"

"백중장은 꽤 크게 서지. 씨름판을 벌이기도 하니까. 그 외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어"

"장사하시는 분들은 항상 오시는 분들인가요?"

"그럼, 이 인근에 사시는 분들이지. 양평, 양수리, 지평 등에 사시고."

 

장꾼들의 사는 곳까지 훤히 꿰고 계시다. 그만큼 작은 장이다. 한창 장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한 편에서 '뻥'소리와 함께 자욱한 김이 일어난다.

 

 

대를 이은 뻥튀기 아저씨

 

5일장에서 그래도 인기가 최고인 것은 뻥튀기다. 뻥튀기를 하는 장창근(49·양평군 지평면)씨는 대를 이어서 5일장마다 다니며 뻥튀기를 한단다. 딴 곳은 한가한데 비해, 뻥튀기를 하는 곳만 사람들이 늘어선다. 쌀이며 누룽지를 갖고 와 뻥튀기를 해가려는 것이다. 간식으로는 역시 튀밥이 최고라고 한다.

 

"얼마나 뻥튀기를 하셨어요?"

"제가 초등학생 때부터, 노는 날과 방학을 하면 아버지를 따라 다니면서 했어요. 2대 째 하고 있죠."

"꽤 오래 하셨겠네요?"

"벌써 한 30년 넘게 했어요."

 

깡통에는 쌀과 누룽지를 담은 것들이 순서를 기다리며 줄을 서 있다. 뻥튀기 기계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고 한다. 이 곳 대신장을 장날마다 오래 다니다가 보니, 주변 사람들과도 흉허물이 없이 지낸다. 맞은편에서 젓갈을 팔고 있는 아주머니가 한 마디 거든다. 장창근씨의 형님도 뻥튀기를 하는데, TV에도 나왔다는 것이다.


 

대를 이은 뻥튀기, 그래도 자랑스럽다

 

많이 튀길 때는 하루에 100번 정도 뻥튀기를 했다고도 한다. 그러던 것이 점차 줄었다가 한 4~5년 전부터 다시 늘었다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사 먹이는 과자가 믿음이 가질 않는다는 어머니들이, 튀밥으로 간식을 마련하기 때문이란다.

 

"기계가 오래 묵은 것 같아요."

"아버님이 쓰시던 것이죠. 이 기계는 처음 나온 것이라는데, 쇠가 지금 것들 하고는 달라요. 단단하고 좋죠.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다는 것이 좋기도 하고요. 골동품이죠 이제는."

"장마다 매번 나오시나요?"

"아닙니다. 봄, 가을, 겨울에는 장에 나오고, 여름에는 덥기도 해서 건축 일을 하고 다니죠. 여름에는 뻥튀기도 잘 안되고요."

"몇 분에 한 번씩 튀기나요?"

"처음에 기계가 열을 받지 않으면 10분 정도 걸리고요. 그 다음에는 한 7~8분 정도 돌려요. 요즘에는 하루에 한 30~40번 튀기죠."


 
아버지의 뒤를 이어 뻥튀기를 하면서 5일장을 다니지만, 자랑스럽다고 한다. 주로 여주 대신장, 양평 지평장과 용문장을 다니면서 뻥튀기를 한다는 뻥튀기 아저씨 장창근씨. 장을 찾는 사람들은 참 근면한 사람이라고 칭찬들을 한다. 5일장마다 뻥튀기를 하기 위해 기다린다는 사람들. 이야기를 하다가 다시 "뻥"하고 자욱한 흰 김을 내면서 튀밥이 나온다.

 

"저 사람은 남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이지. 저렇게 튀겨서 부풀러 주잖아.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저 돈도 저 기계에 넣고 한번 튀겨보았으면 좋겠어."

 

너털웃음을 웃는 어르신들의 웃음이 있어, 더욱 좋은 5일장이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소고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줄 위에 오르니 돈 쏟아진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바람결에 잘도 떠나가네

 

안성 지역에 구전되는 전설의 남사당패 꼭두쇠인 바우덕이의 노래 사설이다. 바우덕이의 이름은 박우덕, 또는 ‘김암덕(金岩德)’이라고 전해진다. 남사당패는 여사당패와 구별을 하기 위해 조직된 과거의 유랑집단의 한 유파이다. 굳이 ‘남사당’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도, 남자들로 연희패가 구성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남사당패의 꼭두쇠 바우덕이

 

안성 남사당패의 근원지는 안성시 서운면 청룡사 일대이다. 이곳에는 칠사당, 혹은 팔사당이라고 하여서, 예전 유랑집단인 남사당패들이 한 겨울을 나곤 했던 곳이다. 유랑집단은 봄서부터 가을까지는 전국을 순회하며 기예를 보여주는 대가로, 돈이나 곡물들을 받아 생계를 유지했다.

 

이들은 겨울이 되면 청룡사 인근으로 돌아와 기예를 연마하고는 했다고 전해진다. 이 남사당패 중에서 가장 명성을 떨친 것은, 역시 바우덕이가 꼭두쇠로 있는 ‘개다리패’였다. 안성 남사당의 풍물패는 기(旗)에 옥관자를 붙이고 다녔다. 이는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시에 안성의 남사당패들이 참여를 하여 노역자들을 위로한데서, 대원군이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옥관자를 하사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남사당패들은 늘 풍물패의 위에 있었다.

 

피지도 못한 채 숨져간 바우덕이

 

당시 바우덕이는 꽃다운 나이의 처녀였다. 그 자태가 남자들을 녹일 만큼 아름다웠다고 하는데, 바우덕이가 이끄는 남사당패가 노역장에 들어서면 당연히 뭇 사내들의 눈길이 바우덕이에게 꽂혔을 것이다. 안성의 남사당패는 바우덕이가 이끄는 개다리패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원육덕패, 복만이패, 이원보패 등도 바우덕이와 비슷한 연대에 활동을 하였다.

 

 

 

이렇게 자태와 기예에 출중한 바우덕이는 꽃다운 나이로 폐렴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나에게 바우덕이는 남다른 존재이다. 1987년인가 안성시(당시는 안성군)에서 의뢰를 받아 ‘안성남사당풍물놀이도보’라는 소책자를 쓰기위해, 안성에서 오랜 시간을 기거하면서 청룡사를 20여 회나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에도 안타까운 것은 바우덕이에 대한 사람들의 무지였다. 다행히 바우덕이에 대해 높은 식견을 가진 토민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그것을 작은 서책이지만 하나하나 정리를 할 수가 있었다. 꽃다운 나이에 채 피어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하직한 바우덕이, 안성을 들릴 때마다 늘 마음 한편이 짠한 이유였다.

 

오랜만에 다시 안성을 찾다

 

한참이나 안성을 찾지 못했다. 9월 7일, 안성남사당 바우덕이 풍물단의 공연장이 있는 안성시 보개면 복평리를 찾았다. 그런데 10여 년 전에 들렸을 때와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실내 공연장이 새로 자리를 틀고 있는가 하면, 앞으로는 테마공원이 한창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 세계민속축제가 열리기 때문이다.

 

공연장 앞으로 가보니 남사당패의 자랑인 칠무동 상이 서있고, 그 뒤편으로는 각 잽이들의 모습을 담은 동상들이 줄을 지어 있다. 그런데 공연장 입구에 서 있는 바우덕이 상을 보고 훔칫 놀랐다. 이 바우덕이의 상과 닮은 여인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영란(여, 36세. 바우덕이 풍물단 상임단원), 바로 이 여인을 닮았다는 생각이다.

 

바우덕이의 환생, 하영란

 

하영란은 초등학교 4학년 때인 10살에 안성남사당풍물단에 입단을 했다. 당시는 나이가 어려 당연히 무동을 맡았다. 하영란이 남사당풍물단에 입단을 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서운면은 바로 남사당패들의 근거지가 있던 청룡사가 있는 곳이다. 그곳 서운초등학교에 다니던 하영란은 풍물소리를 듣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나이가 지긋한 풍물패들이 하는 모습을 보고, 그것에 한 눈에 반해버렸다. 날이 저무는 것도 모르고 그 풍물패를 따라 다닌 것이다. 그들을 놓치면 다시는 보지 못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 다음날, 전날 끝까지 따라가 보아둔 풍물패들의 모이는 곳으로 달려가, 그날부터 남사당패와 인연을 맺게 된다. 그것이 벌서 2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바우덕이의 동상과 참 많이도 닮았다. 장고를 메고 마당에 나와 장고놀이를 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당시의 바우덕이의 모습도 저랬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딸 둘을 둔 아이엄마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몸이 마치 새털 같다. 그 모습을 보면서 30년 가까이 속 앓이를 하던 바우덕이에 대한 아픔이 조금은 가실 것만 같다.

 

풍물단 상임단원 하영란 대담

 

- 25년이란 오랜 시간 풍물단에 속해 있으면서 힘들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지?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저는 아침마다 생업을 위해 출근을 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당연히 내가 이곳에 와서 나의 생활을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마치 배낭을 메고 등산을 가는 기분으로 집을 나섭니다. 풍물을 하는 것은 나의 일상입니다. 밥 먹고 잠자고 하는 것과 같이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 때문에, 25년 동안 행복하다고 생각을 하고 살았습니다.

 

- 그렇게 오랫동안 활동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저는 공연을 할 때 관객들과 일일이 눈을 마주치며 교감을 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이제 저희가 이렇게 시립 풍물단이 된지 10여 년이 되었는데, 그동안 공연을 하면서 팬들도 생겨났죠. 그분들이 늘 ‘다시 보러 오겠다’거나 혹은 ‘정말 좋은 공연을 볼 수 있도록 해주어 고맙다’라는 인사를 합니다. 어떤 분은 커다란 사진을 빼다가 직접 갖다 주시기도 하시고, 몸에 좋다고 하는 것을 갖다 주기도 하십니다. 그런 교감이 활력이 되는 것 같습니다.

 

- 활동을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일은?

처음에 아버님의 반대가 심하셨을 때, 몰래 배우면서 공연 등을 하느라 애를 먹은 일이 힘들었죠. 그리고 서울예술대학에서 공부를 할 때 매일 안성서부터 서울로 학교를 다녀야 하기 때문에, 늘 차 시간에 쫓겨 다녔을 때인 듯합니다. 차를 놓치면 기차를 타고 평택까지 와서 다시 안성으로 오면 새벽에 집에 들어오고, 새벽 5시면 또 일어나 준비를 하고 학교를 가야 했으니까요.

 

- 아이 둘을 키우면서 활동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대개는 아이가 둘이면 이곳을 떠납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바로 나의 삶이란 생각을 하고 살았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첫 애를 낳고나서 몸무게가 15kg이나 쪘는데, 여기서 내가 무너지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남들보다 2시간을 먼저 출근해 걷고 또 뛰고는 했죠. 나를 이기는 싸움을 한다는 생각으로요. 아마도 그런 열정 때문에 견딜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 그동안 해외공연도 많이 했을 텐데 기억할 만한 일은 없었는지?

일 년이면 3~4회 정도 해외공연을 하니까, 그동안 30~40회 정도 해외공연을 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2008년에 헝가리 세계민속축제에 개인 자격으로 참가를 해, 대상을 받고 월계관을 썼죠. 아마 그것이 제 개인적으로도 가장 영광스런 일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 앞으로의 계획은?

서운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전교생이 다 합니다. 도시처럼 잘하는 아이들을 뽑아서 할 수 없는 일이죠. 실내 연습장이 없어 무더위에 운동장에서 하는데, 이 남사당풍물 만은 꼭 대를 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통은 한 번 사라지면 다시 되살릴 수가 없기 때문이죠. 그리고 올해 제가 풍물을 시작한지 25년이 되는 해라서 작은 공연이라도 무대에 올리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둘째를 낳는 바람에 이루지 못했죠. 그래서 착실히 준비를 해 30년이 되는 해 개인공연을 하려고 합니다.

 

- 오랜 시간 고맙습니다. 궁금한 것이 너무 많은데 너무 시간이 흘렀네요. 끝으로 하고 싶은 말씀은?

사실은 저희 남편(강규원, 46세. 건축 감리사)에게 늘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공연을 보고 늘 서포터를 해주고는 합니다. 아마 남편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오랜 시간 이어가기가 힘들었을 것 같아요. 항상 마음속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고마운 마음을 전달하고 싶습니다.

 

- 고맙습니다. 30년 기념무대를 기대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꼭 부끄럽지 않은 바우덕이의 후예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요즈음이야 고령사회가 되었으니, 60년이란 세월이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 분야에서 60년을 외길로 걸어왔다고 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손은 그렇게 곧추세우지 말고 비스듬히 해서 아름답게 끌어 올려”

 

음악에 맞추어 제자들과 함께 춤을 추고 있는 김진옥 선생은 벌써 춤을 시작한지 50년이 훌쩍 넘었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께 이끌려 처음으로 춤을 추기 시작한 것이 어느새 강산이 5번이나 뒤바뀐 세월이 되었다. 땀이 등줄기를 따라 흥건히 흐르고 있는 날이지만 가르치는 선생도 배우는 제자도 모두 열심이다.

 

“교방춤은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흥과 한을 동시에 갖고 있는 춤이다. 먼저 마음으로 춤을 추어야 제대로 된 교방춤을 출 수가 있어”

 

 

부채를 쥔 손 하나하나를 지적을 하면서 제자들에게 타이른다. 그렇게 쉬지 않고 열심을 하는 길만이 제대로 된 춤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고려 때부터 전해진 교방춤

 

교방무는 고려 문종 때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관기제도에 따라 교방청에서 전해진 춤을 말한다. 교방청은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나 외국의 사절을 맞이할 때, 관에서 특별히 기예를 익힌 ‘예기(藝妓)’들로 하여금 연희에 참석을 하게 하였는데, 그들을 가르치는 관의 한 기구였다.

 

교방은 고려 때부터 제도적으로 곤에 속해 예기들을 가르쳐 왔으며, 조선조 광무 4년인 1900년에 궁내부에 교방사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조산왕조의 몰락과 함께 관기제도가 폐지됨으로써 1905년에 폐지되었다. 이후 교방에 속해있던 예기들은 ‘기녀조합’을 결성하게 되었고, 악가무(樂歌舞)로 생업을 이어가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단단한 기본으로 다져진 춤꾼

 

현재 정민류교방춤보존회 회장을 맡고 있는 김진옥 선생(여, 65세)은 남다른 열정을 갖고 춤을 추는 춤꾼이다. 어릴 때부터 시작한 춤은 이제는 선생에게서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삶의 한 부분이다. 하루에도 몇 곳을 돌며 제자들을 가르치지만, 아직도 한 사람이라도 더 가르쳐야 한다며 늘 바쁜 걸음을 걷는다.

 

김진옥 선생의 이력은 일일이 열거할 수가 없다. 춤을 춘 세월도 오래지만, 그만큼 많은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제자를 키워내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국내외를 돌면서 한 공연 횟수만 해도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이다.

 

“그동안 참 숨 가쁘게 달려왔네요. 지금은 저희 교방춤 보존회가 국내는 물론이고, 일본과 미국에 까지 지부를 두고 있을 정도입니다. 외국 공연도 활발하게 하였죠. 이제는 한 숨 돌리고 경기도에 교방춤의 뿌리를 내리고 싶어요.”

 

경기도에 교방춤의 뿌리를 내릴 것

 

경기도와는 이미 1990년부터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1990년에 사단법인 대한어머니회 경기도지회에 무용부가 발족이 되면서 지회장인 김동숙으로 부터의 부탁을 받아 회원들을 가르친 것이 경기도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는 것이다. 벌써 경기도에서의 20년 세월이 훌쩍 지났다. 100여 명의 회원을 가진 무용부는 1994년 문화의 전당 대공연장에서 공연을 가질 만큼 열심들을 냈다.

 

2001년에는 국악협회 경기도지회 이사를 맡기 시작하면서, 경기도의 춤꾼들에게 본격적으로 교방춤을 가르쳤다. 무용을 전공한 제자들만 하여도 수십 명에 이르고 일반인들 제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아 수백 명이 넘는다고 한다.

 

“경기도는 화성재인청(수원)이 있던 곳으로 제인청의 춤이 문화재로 지정을 받는 등 많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옛 선생님들 말씀을 들으면 교방 또한 경기도의 여러 곳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정조의 화성행차시나 혜경궁 홀씨의 연례에도 교방에 속한 예기들이 연희를 한 것을 알 수가 있죠. 하기에 경기도는 교방춤에 대한 재해석을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경기도에 적을 두고 있으면서 안성 국립한경대학을 비롯하여 명지대학교 예술종합원, 경기국악당 등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경기도에도 교방춤보존회 경기지회(지회장 심규순)을 비롯해 화성, 수원, 용인, 안성, 평택 등에 지부를 두고 있다.

 

그동안 춤을 가르친 선생님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교방춤을 가르친 고 정민선생을 비롯하여 전 진도씻김굿의 보유자인 고 박병천 선생, 그리고 벽사 한영숙 선생의 전통춤도 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늘 마음이 바빠진다.

 

“이제는 저도 나이가 있으니 제자들과 함께 무엇인가 경기도를 위한 공연을 무대에 올리고 싶은 생각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한국의 명인명무전 등에 초청이 되어 춤을 추면서도 늘 경기도에서 큰 무대를 한 번 만들고 싶었거든요. 내년쯤에는 경기도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한지 20년을 넘긴 기념으로 교방춤의 제전을 한 번 열었으면 합니다. 그것이 제가 선생님들께 그동안 배워 온 것에 대한 보답이라는 생각이기도 하고요”

 

 

선생은 몇 년 전에 mbc TV 일일연속극 ‘왕꽃선녀님’에서 탤런트 사미자와 이다해에게 한국무용을 지도하여, 극중 문화센터 한국무용강사로 직접 출연하여 한국무용을 지도하는 장면이 여러 회 방영 된 바도 있다. 대담을 하면서도 연신 제자들의 연습을 하는 곳으로 눈길을 보내고 있는 김진옥 선생. 아마도 그런 열정이 있는 한 경기도에 멀지 않아 교방춤의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 583번지. 구 구이면사무소에 새롭게 문을 연 '대한민국 술 박물관'. 겉모습부터가 예사롭지가 않다. 옛 청사 마당 안으로 들어가니 커다란 석비 하나가 보인다. '술타령'이라고 적힌 시비다.

 

날씨야

네가

아무리 추워봐라

내가

옷 사입나

술 사먹지

 

 

관장님 호가 '주당'이라네

 

우리 술꾼들이 즐겨 찾는 시의 한 구절이다. 아무리 추워도 옷을 사 입지 않고, 술을 사 먹는다는 구절이 일품이다. 관리를 하는 분에게 박물관 안을 촬영하겠다고 헸더니,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고 한다. 취재를 왔다고 명함을 건네자, 박영국 박물관 관장이 직접 밖으로 나와 안내를 하신다.

 

명함을 받아보고 한참이나 웃음을 참았다. 명함에 쓰인 관장의 호가 '주당'이다. 1층 안으로 들어가니 술에 대한 모든 것이 나열되어 있다. 예전 술을 빚는 기구부터 시대별 술병. 누룩을 분쇄하는 기구며 각종 술독. 그리고 시대에 따른 변천을 알 수 있는 소주병. 아주 오래 전 양조장의 간판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술에 대한 것들이 진열되어 있다.

 

 

 

 

현재 1만4000점 정도가 진열되어 있는 술 박물관. 박 관장이 소장하고 있는 것은 모두 5만 여 점인데, 그 중 일부만 진열을 했다는 것이다. 이곳에 대한민국 술 박물관이 개관을 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구이면 모악산 대원사에는 조선 중기에 진묵 스님이 기거를 하고 계셨다. 예전에 전주에서 순창으로 나가는 길목인 구이면은 주막거리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진묵 스님이 이 주막거리에서 술을 드시면서 '곡차'라고 하셨다고 하니, 결국 이곳이 우리 술의 본향이 아니었을까?

 

방대한 자료, 테마공원 만들고 싶어

 

이층으로 올라가면 자료실이 있다. <향음주례홀기>를 비롯해 술에 대한 수많은 자료들이 진열되어 있고, 시대별로 구분된 성냥갑이며 병따개. 그리고 술에 붙이는 상표와 휴대용 술통 등 다양한 것들이 전시되어 있다.

 

 

 

전주는 예향의 도시다. 술과 가무는 떨어질 수가 없다. 그래서 박 관장은 이곳 어딘가에 술에 대한 테마공원을 만들고 싶어한다. 30년간이나 모은 수많은 자료 전시와 함께, 직접 술을 빚어보고, 자신이 빚은 술을 먹을 수 있는 그런 곳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1968년에 이미 ‘세계주당대회’도 열어보았다고 한다. 전주에는 막걸리촌이 조성되어 있고, 막걸리 축제를 연다. 그것과 연계해 세계적인 주당들의 축제를 열어 보았다는 것이다. 30년간이나 모은 방대한 자료, 그것을 돌아보면서 내심 박 관장의 소원이 이루어지길 빌어본다. 결코 단순히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닌, 세계에 우리 술을 알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연한 기회에 시작한 술에 관한 자료

 

박관장이 술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게 된 동기는 참으로 우련하다. 슈퍼를 운영하고 있는데,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모두 천차만별이었다는 것. 사람들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술이란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게 여기게 되었고, 그래서 술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것이 자료를 수집하게 된 계기가 되었고, 그런 관심이 박물관을 열게 되었다고 한다.

 

 

 

박관장의 고향은 수원이다. 처음에는 박물관도 안성에 개관을 했다가, 완주군 구이면으로 이관을 한 것. 모악산의 대원사는 ‘곡차’라는 말로 유명하신 진묵스님께서 계셨던 곳이기 때문이다.

 

"술은 한마디로 '물'이라고 생각을 한다는 박관장. 그저 '술은 물이요, 물은 술이다'라는 생각을 한다고 한다. 술을 술이라고 마시면 탈이 나지만, 물이라고 마시면 절대로 탈이 나질 않는다고 한다. 물이라고 생각한다면 많이 마실 수가 없으니, 정신 줄을 놓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술을 술이라고 생각지 않고 물이라고 생각을 한다는 ‘대한민국 술 박물관’의 주당 박영국 관장. 그의 명함에 쓰인 대로 세계 주당들이 함께 모이는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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