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에 가면 조각공원이 있다. ‘뚜라조각공원’, 아마 이 공원을 조성한 것은 동학혁명을 주도한 전봉준장군의 상을 만들기 위한 작업을 하는 조각가가 조성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 공원이 소재한 곳이 바로 전봉준 장군의 생가지 옆이기 때문이다. 전봉준 장군의 유적지는 장군이 출생한 고창과 이사를 하여 산 정읍 두 곳에 있다.

뚜라조각공원 안으로 들어가려면 알아서 입장료를 내면 된다. 저팔계가 버티고 있는 입구에 돈 통을 놓고 성의껏 내라고 되어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성의를 보일지는 모르겠다. 입구부터 쓰러져 가는 판자로 막은 오두막에 기대있는 여인상으로 시작해, 넓은 마당에 여기저기 수백 점은 될 만한 크고 작은 조각들이 널려있다.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곳

안으로 들어가면 수많은 조각품들이 널려있는 곳. 조각공원이라고 하기보다는 조각박물관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당할 것 같다. 작가가 일일이 만든 것인지, 아니면 따로 수집을 해 놓은 것인지는 몰라도 각양각색의 모습들이 눈에 띤다. 그 중에는 정말 재미있는 작품들이 많이 보인다. 마당은 잔디를 조성해 놓고, 여기저기 조각품들을 늘어놓았다.

그 중 눈에 띠는 것은 줄을 타고 오르는 작은 작품들이다, 처마에도 나뭇가지에도 그리고 철봉 틀에도 매달려 줄을 타고 오르는 작은 군상들. 그리고 테라코타로 조성된 흙기둥에 새겨진 수많은 사람들. 그 중 눈을 끄는 것은 커다랗게 조형에 된 아이들 모습이다. 앞에는 욕조가 있고 그 안에 오줌을 싸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는 자지러질 뻔 했다.



조각공원 입구에는 저팔계가 입장료는 성의껏 달라고 한다(위) 잔디로 조성한 광장에 늘어 놓은 작품들
 
오랜 시간 준비를 해온 것인지 벌써 칠이 벗겨지고, 여기저기 파손이 된 작품들도 보인다. 그리고 새로 칠을 한 것들도 보이고 있어, 이 조각공원의 작품은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것 같다. 고창을 찾아간다면 아이들과 함께 역사공부를 겸해 찾아가볼만 한 뚜라조각공원. 오늘 그 안에서 또 다른 조각공원의 재미를 느낀다.



테라코타로 조성한 흙기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조각되어 있다. 이러한 작품이 공원 내 곳곳에 보인다.(위) 그리고 벽돌로 만든 벽을 부수고 나오는 남자. 이런 힘찬 남성상들도 여기저기 보인다(아래)



색을 입혀 눈에 띠는 조각품. 남자 아이 셋이서 욕조에 오줌을 싸고 있는 모습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위) 복분자의 고장 고창다은 모각품도 보인다(아래) 이 두 가지의 조각품들은 최근에 새로 색을 입힌 것으로 보아 새롭게 보여진 작품인 듯 하다.




줄을 타고 오르는 군상들. 공원 안 여기저기에 보면 줄에 매달려 오르는 작은 조각상들이 널려있다. 처마 밑에도 나뭇가지에도, 철봉 틀에도 이렇게 많은 군상들이 줄을 타고 오르는 것을 보면서, 인간들이 더 높은 곳으로 오르기 위한 안간힘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각양 각색의 조각들이 나열되어 있는 뚜라조각공원. 아마 아이들과 함꼐 찾아본다면 또 다른 재미를 줄만도 하다. 더욱 옆에는 전봉준 장군의 생가지가 자리하고 있어, 역사적인 공부를 함께 시킬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 길을 나서 찾아보면 많은 볼거리들이 있다. 그것을 어떻게 찾아보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내가 무엇을 느꼈는가가 중요하다. 꼭 유명한 곳을 가야만 좋은 구경이 아니다. 문화란 그것을 보고 느끼는 자만을 환영한다.  

중국의 소주시는 비단장수들이 집단으로 기거를 하던 곳이다. 전주시 완산구 중앙동과 다가동이 만나는 길목에는 ‘소주가(蘇州街)’가 있다. 이 거리는 100여 년 전에 소주 상해 등에 살던 벽돌공들이 전주에 있는 성당을 신축하기 위해, 100여명이 이주를 해오면서 생긴 거리이다.

지금은 몇 집 남지 않았으나 이곳에 정착한 중국인들은 소주의 유명한 포목점을 이곳으로 옮겨 개설을 했다. 지금도 4대째 포목점을 하던 집이 그대로 보존이 되어있을 정도로, 중국인 거리는 유명했다. 아직도 화교소학교가 자리하고 있는 곳이지만, 정작 남아있는 중국인은 많지가 않다.


소주시 인민정부가 세운 문

이 중국인거리라는 곳의 입구에는 커다란 문이 있다. 우리의 건축물과는 다른 중국풍의 문이 서 있다. 처마는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듯 위로 치켜져 있고, 양편에 용은 물고기 형상에 가깝게 조각이 되었다. 용마름의 끝에는 원숭이 인 듯한 작은 동물이 있으며, 조각은 복잡하단 생각이다. 우리의 건축물보다 더 복잡하게 느껴지는 문 하나. 현판에는 ‘소주가’라고 쓰여 있다. 소주에서 성당에 쓰일 벽돌을 만들기 위해 온 사람들이 집단으로 모여 살던 거리이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붙였다.

문을 들러보다가 한편 기둥아래 글씨가 보인다. <소주시인민정부 증. 공원 2002년 5월>이라고 적혀있다. 이 문을 소주의 인민정부가 이곳에 세운 것이다, 그래서 중국풍의 이러한 문을 세우고, 이 일대를 ‘차이나거리’라고 이름을 붙였나보다. 차이나거리에는 현재 중국인들이 몇 집이 살고 있다고 한다. 100여 년 전에 이곳에 정착을 한 소주 벽돌공들의 4대 후손들이다.



우리와는 다른 건축물의 지붕과 용의 모습. 그리고 소주인민정부가 기증을 했음을 알리는 글귀

한 때 이곳은 중국인들이 거리에 넘쳤다고 한다. 먼 이국으로 벽돌을 찍으러 온 소주사람들이 가족과 동행을 했고, 이들은 이곳에 보금자리를 틀었을 것이다. 이들 100여명이 왔다고 하면 그 때 생긴 중국인들의 집이 백여 집에 이르렀을 테고, 그 사람들을 상대로 한 식품점이며 포목상 등 많은 상점들이 따라 들어섰을 것이다. 이런 소주가를 중국인거리로 명명을 하였다.

전주시에서는 이 거리를 2003년 3월 21일 중화인민공화국 소주시와 자매결연을 한 기념으로 ‘차이나거리’로 명명을 하였다. 소주가의 문이 세워진 뒤 일년 후의 일이다. 소주가에는 중국풍의 가로등을 세웠고 바닥의 마감재를 화강암으로 하였는데, 움직이는 용을 형상화 하였다고 한다.



100여 년 전에 집단으로 이주 한 중국인들이 모여살 던 차이나거리

이 소주가가 끝나는 곳에 다가동우체국이 있고, 그 옆에는 보건소가 있다. 그런데 그 앞쪽에 작은 석비 하나가 눈에 띤다. ‘약전거리’라는 것이다. 이 길이 예전 약전거리였다는 것을 적고 있다. 조선조 효종 2년인 1651년에 시작하여 1943년까지 약 300년 동안 진주, 청주, 대구, 공주와 더불어 5대 약령시 중 한 곳이었다.

중국인거리와 약전거리를 끼고 있는 소주가. 소주시인민정부가 기증을 한 이 낯선 문에 대해서 사람들은 관심조차 없는 듯하다. 그저 이곳이 예전 성당을 짓기 위해 먼 이국땅으로 옮겨 온 소주벽돌공들의 애환이 담겨있는 거리라는 것이나 알고 있으려는지. 이 문 하나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들은 그렇게 차량의 소음 속으로 묻혀버리고 만다.


소주가와 맞물려 있는 약전거리와 이곳이 있는 한의원들 

요즈음은 학교에서 무엇을 가르치고 있을까? 예전에는 그래도 기본적인 예의정도는 선생님들이 입에 달고 다니셨다. 무엇은 어떻게 하면 안된다거나, 어른들을 보면 인사를 잘 하라거나 하는 식으로 학생들이 해야 할 행동거지에 대한 이야기다. 이런 교육이 요즈음이라고 없지는 않을 것이다. 중학생들에게는 '도덕'시간이 있으니 기본적인 예절을 가르칠 것이다.

음력 초하루라 아침 일찍 산사에 올랐다. 오전 10시 40분부터는 '사시예불'이라고 하는 예불시간이다. 절에서는 하루 중 중요한 가장 중요시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아침 9시 경에 중학교 학생들이 산사로 올라왔다. 가을 소풍이라도 온 것인가 보다. 아이들이 산사 마당에 가득하다 보니, 절 안이 소란하다. 웃고 떠들고 뛰어다니는 소리가 산사 안에 가득하다.

아이들이 내려 간 후 산사 여기저기 쓰레기들이 널려있다.

떠드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선생님


예불시간이 되었는데도 아이들의 소란은 그치지를 않는다. 예불을 드리는 분들은 시끄럽게 한다고 하면서도 밖을 향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선생님들이 함께 계시니 어련히 알아서 조용히 시키겠지 하는 생각에서다. 그런데 에불이 시작되었는데도 소란은 그치지를 않는다. 심지어는 법당 앞 계단까지 와서 사진을 찍는다고 난리들이다. 더 화가나는 것은 선생님들이 함께 사진을 찍으면서도 아이들을 제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공놀이를 하는 아이들까지 있다. 예불시간 내내 한 번도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조용히 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는지, 한 시간 내내 그렇게 시끄럽다, 에불을 마치고 나와서 아이들에게 그렇게 시끄럽게 하면 안된다고 하면서 주변을 살펴보니 쓰레기가 여기저기 널려있다.

가고난 뒤 산사는 온통 쓰레기 천지

아이들이 모두 내려갔다. 선생님과 함께 사진을 찍는 아이들을 보고, 내려갈 때는 쓰레기를 모두 되가져 가라고 이야기를 한다. 아이들은 들은 체도 하지 않는다. 그 말을 들은 선생님들께서 아이들에게 쓰레기를 가져갈 것을 이야기를 한 것일까? 그러나 아이들이 내려 간 뒤 마당을 돌아보니, 온통 쓰레기 투성이다, 정말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다.

휴대폰으로 찍어 화질이 엉망이다. 물병이며 과자껍질. 여기저기 날려있는 쓰레기들

아이들과 함께 온 선생님들은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는 것인지 모르겠다. 가장 기본적인 것조차 가르치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을 가르치는 것일까? 산사를 내려오면서 보니 산길 여기저기도 쓰레기가 널려있다. 글쎄다 좋은 상급학교를 가는 것만이 중요한 것일까? 그런 교육만 잘 시키면 그 다음은 아무래도 괜찮다는 것인지. 요즈음 선생님들께 묻고 싶다. 무엇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계시는 것인가를. 
아침 일찍 산사로 오르기 위해 길을 나섰다. 산행을 시작하기 전에 밑에 있는 상점에서 물을 한 병 사들고 뒷짐을 지고 산을 오르다보면, 계곡 물에 노니는 작은 물고기들과 산새소리에 절로 마음이 맑아진다. 바쁠 것이 없다는 생각이다. 늘 그렇듯 천천히 호흡을 해가면서 숨을 들이킨다. 그렇게 산을 오른지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산을 오르는 길은 늘 새롭다.

그렇게 오르는 산에는 오늘따라 한가하다. 딴 때 같으면 복잡하게 사람들이 앞을 다투듯 오르는 산길이다. 그런데 오늘은 시간이 이른 이유도 있겠지만, 단풍철에 오르기 위해 사람들이 기다리는 것만 같다. 산사의 단풍은 정말 아름답다. 마치 터널을 이루듯 하는 단풍이 있기 때문이다, 산을 오른다는 것은 힘이들기도 하지만, 그 주변에 아름다운 경치를 보기 위해 오르고는 하기 때문이다.


큰 소리 나는 이유를 듣고보니

천천히 계곡을 들여다보면서 오르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서 큰 소리가 난다. 큰 소리로 고함을 치는 남자 목소리만 들린다. 남의 일에는 관여를 하지 않는터라 그냥 못본체 하고 지나치려는데, 남자가 어떻게 한 것인지 여자가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앉아있다. 울기라도 하는가 보다. 무슨 일일까?

"내 하도 이상해서 뒤를 따랐다. 어째 날마다 산을 간다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서는 것이 이상하다고 했지"

무슨 이야기일까? 이어서 하는 남자의 소리에 대충은 짐작이 간다.

"애들 떼어놓고 미치지 않았으면 산에가서 서방질을 해"

정말 그런 것일까? 이야기를 듣고보니 여자가 아침에 일찍 친구들과 산을 오르겠다고 집을 나갔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울면서 매달리는 것도 떼어놓고, 서둘러 나가는 것이 이상해 뒤를 밟았고 낯선 남자와 만나 같이 산을 오르는 것을 보고, 여자를 혼내고 있는 것이다.

여자는 아니라고 극구 부인을 한다. 친구들과 약속을 했는데 늦어서 길을 몰라 길 안내를 받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남의 가정 일에 참견을 할수는 없지만, 곁에서 보고 있자니 정말 답답하다. 시소한 오해로 인해 자신의 아내를 부정한 여자로 몰아가는 남자도 그렇고, 어린아이를 떼어놓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선 여자도 그렇다. 문제는 이런 불신이 처음 시작된 것은 아닌 것만 같다.

남자의 실직에서 온 불안감이 의심병으로

이 부부에게 길에서 그렇게 다투지 말고, 집에가서 조용히 해결을 하시라고 한 마디 했다. 그랬더니 남자가 하는 말이 자신이 실직을 하고 난 뒤에 여자의 행동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돈을 벌어야한다고 전과 다르게 바깥출입이 잦은가 하면, 가끔은 술 냄새를 풍기고 집을 들어오기도 한다는 것이다.


듣고보니 이 부부의 문제는 여자가 아닌 남자에게 있음을 알 수 있다. 해고로 인한 무력함이 결국은 부인에 대한 불신으로 커진 것은 아닐까? 집에서 부인의 눈치를 보아야만 하는 남자로서는 여자의 바깥출입이 불안했을 테고, 그런 것이 결국은 여자를 의심하는 증세까지 보인 것은 아니었을까?

산에 다니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이 없다는 것을 남자에게 이야기를 했지만, 남자는 믿지 않는 눈치이다. 같이 산으로 오르던 남자가 도망을 갔다는 것이다. 자기 부인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한다면 사실을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도망을 간 것을 보면 무엇인가 있다는 것이다.


더 이상은 남의 일에 관여하고 싶지가 않다. 사람들이 많이 올라오는 시간이니 망신 당하지 말고, 집에 가셔서 두분이 조용히 해결을 하라고 거듭 당부를 하고 길을 돌아 선다. 부부가 티격이면서 산을 내려가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남자의 실직에서 오는 문제가 의외로 심각한 듯하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날마다 만난다. 그러다가보면 인사를 하고 다닐 수도 있다. 나 역시 산사에서 만나는 사람 중에는 반갑게 인사를 하고 지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문제는 여자가 산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남편의 실직으로 인한 무력증에서 온 것 같다.    

이 부부의 앞날이 걱정이 된다. 앞으로 여자는 바깥출입이 불안할 것이고, 남자는 그 의심병이 점점 짙어져 갈 것만 같다. 부부가 함께 산이라도 다닌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더 큰 불행이 올갓 같기도 하다. 모처럼 일찍 길을나서 오른 산행에서 보지 않았으면 좋았을 남의 이야기로 기분이 찝찝하다. 

조금 신경을 쓴 탓일까? 아니면 비가 오는 날, 비를 맞고 무리한 답사를 계속해서일까? 열이 나면서 한기가 돈다. 주사라도 한 대 맞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병원을 찾았다. 진료신청을 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곁에 있는 분들의 이야기에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정말이지 우리 애들이 너무 불행하다는 생각도 들더라구요.”
“정말예요. 세상에 어째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어요.”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사람취급도 못 받아요"

도대체 무슨 이야기들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병원을 데려 온 아이는 이제 유치원에 다닐 만한 나이이다. 5~ 6세나 되었을까? 그런 아이가 왜 측은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일까?

영어조기교육을 받지 않아도 자기개발로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기사의 특정내용과 관계없음)

영어유치원이 어머니들의 울분을 자아내게 해

듣고 보니 이해가 간다. 뉴스에서 보도를 했다는 영어유치원 이야기다. 서울과 수도권에 집중적으로 문을 연 영어유치원이 어머니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수업료가 한 달에 백만 원은 족히 들어가고, 어느 곳은 160만 원 정도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웬만한 봉급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꿈도 꾸지 못할 곳이다.

같은 또래의 어머니들에게는 그런 곳을 보낼 수 없는 아이들이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가 보다. 그도 그럴 것이 경쟁의 사회에서 어려서부터 영어교육을 받지 못한 아이들이, 혹여 뒤처지기라도 한다면 좋은 직장을 들어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아니 어떻게 한 달에 그 많은 돈을 들여 유치원에 보낼 수가 있어요.”
“그 뉴스보고 정말로 화가 치밀었어요. 도대체 이 나라는 돈 없고 백없는 사람은 살지 말라는 이야기인지”
“맨 날 선진교육이 어떠니저떠니하면서 이럴 때는 왜 아무 말도 안하나 모르겠네요.”
“그 높은 분들도 그런 유치원에 보내니까 그런 말을 하고 싶지 않겠죠.”

곁에서 듣고 있으려니 정말로 속이 불편하다. 이어 나오는 말이 특급유치원을 들여보내려고 돈을 먹였다는 이야기다. ‘교육이 썩었다’라는 표현으로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럼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하지

그 말을 듣다가보니 우리 아이들이 떠오른다. 어린이 구호단체 NGO 일을 하고 있는 나에게는 돌보아야 할 어린이들이 있다. 매달 많지는 않지만 일정액을 지원하는 아이들이다. 물론 그 아이들에게 더 많은 것을 주고 싶은 것이 내 마음이다. 하지만 후원자들이 내는 후원금을 갖고 살림을 하다 보니, 그렇게 듬뿍 줄 수가 없다. 그리고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아이들에게 혜택을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다.

그 아이들에 비하면 저 어머니의 아이들은 그래도 행복한 편이다. 조금만 아파도 저렇게 부모님들이 걱정을 하고 병원을 데려온다. 그렇게도 하지 못하고 나날을 보내는 아이들은 누가 걱정을 해주어야 할까?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정말 화가 치민다. 어떻게 세상은 이렇게 불공편한 것일까? 그러나 난 항상 자신을 한다. 영어유치원을 다니지 못했어도, 돈을 내고 특급유치원을 들어가지 못했어도 우리 아이들은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

기사의 특장내용과 관계없음

그것 하나만으로도 행복하다. 그저 건강하게 잘 자라주기만 한다면, 그보다 더 바람직한 일은 없다는 생각이다. 이어지는 소리에 볼 맨 소리를 한마디 한다. “그래도 어머님들 아이들은 따듯한 보살핌이 있어 행복하죠. 몸이 아파도 병원문도 못 들어가 본 아이들이 허다해요” 그 한마디를 남기고 진료를 받으러 들어갔다.

알고 보면 이런 교육의 차이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예전에도 반가의 자손들은 교육을 제대로 받았지만, 민초들의 자식들은 서당 문턱에도 가보질 못했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다 제대로 세상을 살지 못했을까? 그렇지는 않다. 어찌 보면 이 어머니들과 아이들은 가장 행복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이는 불행한 것이 무엇인지도 모를 것이다.

영어만 잘한다고 해서 그 아이가 이다음에 꼭 성공을 하는 법도 없다. 영어를 배우지 못했어도, 명문이라는 특급 유치원을 다니지 못했어도, 어려서부터 일찍 자기개발을 하여 성공한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일찍 교육을 받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린이는 어린이다워야 귀엽다. 우리 교육이 이대로 잘 굴러가기는 가려는지 걱정이 앞선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