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회관 앞 서호공원 자연학습장을 돌아보다

 

바람이 심하다. 거기다 미세먼지와 송화가루까지 심하게 날린다. 나들이를 하기에는 좋지 않은 날이다. 그래도 사무실에서 글만 쓴다는 것이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어 잠시 바람이라도 쏘일 겸 밖으로 나왔다. 이렇게 바람이 심하게 불고 미세먼지가 나쁨 수준일 때는, 숲이 좋다고 했으니 나무가 무성한 옛 농촌진흥청 자리를 찾았다.

 

팔달구 화서동 436-3에 소재한 농민회관 앞은 서호가 있고, 주변에 아름드리 가로수들이 있는 곳이다. 물과 숲, 거기다가 차를 한 잔 마실 수 있는 공간까지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으랴 싶다. 그동안 수원에 거주하면서 나름 좋다는 곳을 다 다녔지만 이곳은 딴 곳에 비해 볼 것이 많은 곳이다.

 

우선 옛 농촌진흥청 안쪽에 자리한 여기산은 선사유적지이다. 특히 여기산에는 화성 축성 당시 성돌을 뜨던 자리가 남아있고, 안으로 들어가면 토성의 흔적이 있는 곳이다. 거기다 서호는 낙조로 유명한 곳이다. 서호 산책로를 한 바퀴 돌아보는 것 민으로도 별천지란 느낌이 든다. 일몰시간에 찾아갔다면 절경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세먼지와 송화가루까지, 그래도 좋다

 

농민회관에 도착하니 주차장에 차들이 꽉 들이찼다. 6일 토요일 오후에 농민회관 웨딩홀에서 결혼을 하는 젊은 부부들이 많은 모양이다. 카페도 온통 사람들로 들이찼다. 이건 카페가 아니라 완전 시장바닥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공공장소에서 목소리를 왜 그렇게 높이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간단한 식사를 시켜놓고 주변을 둘러본다. 바람에 흙먼지와 함께 송화가루, 민들레 씨앗까지 함께 날려 검은 옷이 금방 하얗게 변해버린다. 하지만 이곳 숲을 걷기위해 찾아오지 않았든가? 길을 건너 서호 방향으로 발길을 옮긴다. 순간 이곳이 이렇게 아름다웠나? 하고 눈을 이심하지 않을 수 없다. 눈앞에 연분홍 영산홍 단지가 펼쳐진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 나뭇잎이 모두 한편으로 기울었는데, 그런 것보다는 눈앞에 펼쳐진 꽃밭의 장관 때문에 그런 모든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저 수원 곳곳을 그렇게 다녔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직도 이곳을 몰랐다는 것이 후회가 된다. 서호 위를 날고 있는 새들도 바람에 날개 짓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

 

그래도 좋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서호 주변에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행복하다. 서호공원에서는 이 먼지에도 무슨 행사를 하는 것인지 사람들이 모여 있다. 그곳으로 가다보니 서호공원 자연학습장이라 쓴 석물이 보인다. 그리고 그 뒤편으로는 텃밭들이 있다. 언제 이런 텃밭이 이곳에 생겼을까?

 

                        

 

살기좋은 수원, 아름다운 길이 많아 좋다

 

작은 텃밭에는 갖가지 야채들을 심었다. 대파, 마늘, 고추, 토마토, 참외, 쪽파 등. 정성들여 가꾼 텃밭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다. 한 편에 쉼터에 다리를 뻗고 앉아 서호를 바라다본다. 서호의 본래명칭은 측만제이다. 축만제는 조선 정조 23년인 1799년 농업용 저수지로 축조됐다. 당시에 만석거와 만년제, 축만제 세 곳에 저수지를 조성했는데, 그 중 서쪽에 있어서 서호라고 불렸다.

 

예전부터 서호는 낙조와 겨울철새 들이 찾아드는 곳으로 유명했으며, 잉어가 많이 잡히는 곳으로 명성을 얻었다. 아마 화성유수 박기수도 이곳 서호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넘어가는 해를 보면서 시 한 구절을 짓지는 않았을까? 그만큼 수원에는 아름다운 길과 명소가 즐비하다. 언제 찾아가도 나름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그런 수원이 있어 좋다. 오랜만에 찾아 온 서호. 그 주변에 늘어선 숲과 꽃길, 그리고 새들의 소리가 즐거운 곳. 서호가 있어 행복하다. 올해가 가기 전에 항미정에 올라 지는 해를 바라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미세먼지가 나쁨이라는 날 찾아간 서호 주변. 난 그곳에서 또 다른 아름다운 길을 만났다.

 

 

수원천 발원지 지정 조건 갖추지 못해

 

강이나 하천의 발원지(發源地)는 어느 곳이나 지정을 할 때 몇 가지의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이런 조건을 갖추지 못하면 발원지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첫째는 반드시 물이 솟는 용천수라야 한다. 흐르는 물이 고이고나 주변의 물이 고이는 현상으로 물이 모이는 곳은 발원지가 될 수 없다. 발원지란 발 그대로 물이 처음 나오기 시작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1365일 물이 마르지 않아야 한다. 만일 가뭄이 들어 물이 마른다고 하면 그런 샘은 발원지가 될 수 없다. 한강의 발원지인 강원도 태백시 검룡소 옆으로는 커다란 물줄기가 위에서 흘러내린다. 하지만 그곳을 발원지로 정하지 않고 검룡소로 정한 것은, 그 물이 가뭄이 들면 말라버리기 때문이다.

 

셋째는 가장 높은 곳과 가장 먼 곳을 지정한다. 하기에 발원지의 지정 조건은 물이 땅에서 솟는 용천수며, 일 년 동안 마르지 않는 곳을 발원지 지정의 기본적인 조건으로 삼게 된다. 한강의 발원지인 검룡소, 금강의 발원지 뜸봉샘, 낙동강의 발원이 황지, 섬진강의 발원지 데미샘 등은 모두가 이런 조건을 갖추고 있다.

 

 

 

수원천의 발원지는 어디일까?

 

20133월 수원시에서는 일 년 동안 물이 마르지 않고 샘솟는 광교산 절터약수터를 놓아두고, 통신대방향으로 오르는 광교산의 고도 425m, 위도(3720‘ 57“ N), 경도(1271’ 1” E)골짜기를 수원천 발원지로 지정을 했다. 수원하천유역 네트워크와 전문가들이 이곳을 수원천 발원지로 선정했다는 것이다.

 

수원천 발원지 표지판을 세우던 날도 이곳은 발원지가 될 수 없음을 이야기를 했다. 발원지의 조건을 하나도 갖추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 한 방을 솟아오르지 않아 기포조차 생겨나지 않는 곳을, 어떻게 이곳에서 물이 솟는 발원지로 볼 수 있다는 것인가? 그럼에도 수원시는 절터약수터를 놓아두고 이곳을 발원지로 지정을 했다.

 

 

 

 

발원지에 물 한 방울도 보이지 않아

 

24일 오후, 수원천 발원지를 찾아 광교산을 올랐다. 지난주에 연이어 비가 오는 바람에 개울에는 물이 흐르는 소리가 정겹게 들린다. 이 정도 물이 흐르면 발원지에도 물이 고여 흐르겠지 하고 미끄러운 길을 조심스레 올라 발원지를 찾았다. 그러나 이게 무슨 일일까? 발원지 인근에는 흐르는 물도 보이지 않고, 안내판 아래는 물 한 방을 찾아볼 수가 없다. 발원지라는 안내판이 무색하다.

 

, 쌓인 낙엽 안에 물길이라도 있을까 싶어 낙엽을 해쳐보았다.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저 물에 젖어 흙만 축축할 뿐 고여 있는 물조차 없다. 그런데도 이곳을 발원지라고 우길 것인가? 발원지의 지정 조건을 하나도 갖추지 못하고 있는 발원지. 수원시는 이곳에 세운 발원지 안내판을 절터약수터로 옮기고, 발원지 지정을 해제해야 한다. 물이 없는 발원지는 어떤 설명으로도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대송리 동쪽 해안에 있는 간절곶. 곶이란 내륙이 바다 쪽으로 돌출된 부분을 말한다. 간절곶이 유명한 것은 새천년을 맞는 200011일 동북아 대륙에서 가장 먼저 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시 해가 뜬 시간은 오전 73117초였다.

 

부산 광안리를 떠나 해운대를 거쳐 기장을 지나고, 31번 국도를 이용해 도착한 간절곶. 시간은 이미 점심을 지나고 있었다. 정자를 찾아 떠난 길에 정자는 찾지 못하고 대신 간절곶의 등대가 반기는 듯하다. 간절곶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띠는 것은 바로 등대다. 등대야 어느 곳이나 있겠지만 그래도 저 등대 자리에서 새천년의 해를 제일 먼저 보았다니, 그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

 

 

 

소망우체통에 편지를 쓰다

 

사소한 것에도 의미를 두기를 좋아하는 우리네로서는 아마 그만한 의미도 없을 것이란 생각이다. 등대 앞 길 건너 바다 쪽에는 커다란 우체통이 하나 서 있다. 간절곶 소망우체통이란다. 높이가 5m에 무게가 7톤이나 되는 거대한 것이다. 뒷문을 열고 들어가면 안에 엽서가 준비되어 있어, 그 자리에서 엽서를 써서 우체통 안에 넣으면 매일 오후 1시에 걷어간단다.

 

물론 토요일과 일요일 휴일에는 거두지를 않지만. 우체통 안을 들여다보니 한 남자가 여자의 허리를 감싸 안고 무엇인가 열심히 쓰고 있다. 참 좋을 때다. 부럽다. 우리는 자랄 때 저렇게 해보지를 못했으니 더욱 부럽다.

 

바닷가 쪽으로는 소망을 담은 돌무지가 몇 개 서 있고, 옆으로는 조각상들이 보인다. 바다를 향해 팔을 힘차게 내뻗은 남정네며, 새천년의 비상이라고 음각한 비도 보인다. 그 옆 한편에는 남녀가 바위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대느라 부산하다. 그런데 그 앞에 두 딸을 데리고 서 있는 어머니의 상이 있다.

 

 

 

 

설명을 보니 박제상의 처란다. 예전 글을 쓸 때 자주 이름을 올리던 박제상의 처라니. 그럼 여기서 치술령이 얼마나 떨어져 있다는 말인가. 신라의 재상인 박제상은 충신이었다. 신라 눌지왕(재위 417~458)의 두 동생은 고구려와 왜국에 볼모로 잡혀갔는데 박제상이 먼저 고구려에 가서 눌지왕의 동생인 복호를 구해냈다.

 

그 뒤 왜국으로 간 박제상은 미사흔도 구출해 내어 신라로 보냈지만, 정작 자신은 탈출을 하지 못했다. 이 사실을 안 왜국의 왕은 박제상에게 신하가 될 것을 강요했지만 박제상은 끝내 거절을 하여 불에 태워 죽임을 당했다. 왜국으로 떠난 후 박제상의 처는 두 딸을 데리고 날마다 치술령 위에 올라 남편을 기다리다가, 결국은 그 자리에 망부석이 되고 말았단다. 그 뒤 박제상의 처는 치술령의 신모(神母)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치술령의 산신이 되었다는 설화다.

 

 

호랑이 꼬리 호미곶에 도착하다

 

간절곶을 돌아보는 사이에 날이 심상치가 않다. 금방이라도 비가 뿌릴 것만 같은데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가 않는다. 그래도 어찌하랴 만행을 떠난 길이니 여정을 재촉하는 수밖에. 절집은 이미 세 곳을 다녔으니, 정자 하나라도 찾아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포항으로 올라와 처음 만난 곳이 바로 호랑이 꼬리라는 호미곶이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호미곶은 호랑이의 꼬리라 하여, 한반도의 정기가 서려있는 곳이다.

 

조선 명종 때 풍수지리학자인 남사고선생은 산수비경(山水秘境)에서 한반도는 백두산 호랑이가 앞발로 연해주를 할퀴는 형상으로, 백두산은 호랑이 코이며, 호미곶(虎尾串)은 호랑이 꼬리에 해당한다고 기술하면서 천하의 명당이라 하였다. 영일만의 끝부분(포항에서 38)인 호미곶 앞바다는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는 해역으로 각종 물고기의 회유지이다.

 

 

 

 

간절곶을 떠나면서 빗방울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호미곶에 도착하니 제법 빗방울이 거세졌다. 바람까지 불어 사진을 촬영하기도 힘들다. 포항시 대보면 대보리 호미곶도 2004년에 가장 먼저 해가 뜬 곳으로 기록이 되고 있다. 호미곶 광장에는 기념조형물(상생의 손), 성화대, 영원의 불씨함, 채화기 (천년의 눈동자), 캐릭터상품특판장, 공연장, 주차장, 관리소 등이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한편에는 200411일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뜬 것을 기념하기 위해 2만 명분의 떡국을 끓이려고 준비한 거대한 가마솥이 있다.

 

 

이왕 왔으니 사진 몇 장이라도 건져야 하지 않겠는가. 만행에 동행을 한 스님은 비가 오니 아예 차에서 내릴 생각도 안한다. 혼자 우산 하나를 받쳐 들고 이리저리 다니면서 사진을 찍어대지만, 비가 계속 내리고 바람까지 불어 사진을 찍기가 만만치가 않다. 그래도 겨우 사진 몇 장을 담아낸다. 호랑이 꼬리라는 호미곶. 참으로 오랜만에 들려본 곳이다. 그동안 많이도 변했다.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뜬다고 서로 내세우는 간절곶과 호미곶. 오늘 여정은 아무래도 이곳에서 접어야만 할 것 같다. 비가 오는 날 정해진 일정을 취소할 때마다 늘 마음만 바쁘다. 정작 바닷가에 정자는 아직 한 곳도 찾아보지를 못했는데.

 

 

남의 부녀자를 빼앗아 간 죄 그 얼마나 클까.

네가 만일 거역하고 내놓지 않으면

물로 사로잡아 구워 먹고 말테다.

 

해가(海歌)라는 신라 때부터 전해진 노래로 구지가와 같은 계통의 향가이다. 이 노래의 시원은 신라 성덕왕 때 수로부인이 동해의 해룡(海龍)에게 잡혀 가자 남편인 순정공이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서 불렀다고 하는데서 전해진다.

 

김해에 전하는 가야국의 구지가가 건국 신화 속에서 창출된 신군(神君)을 맞이하는 주술적 요소가 강한데 비해, 해가는 신라시대 민간에 널리 전승이 되어, 액을 막고 소원성취를 비는 기원성이 짙은 노래였다는 점이 다르다. 그러나 두 노래 모두 집단가무로 많은 사람들이 함께 불렀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이로 보아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즐겨 모여 부르는 이러한 노래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해가사에는 한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삼국유사(三國遺事) 2, 가락국기에 보면 가락국 시조인 김수로왕의 강림 신화 속에 삽입된 노래인 <구지가>가 있다. 이 구지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龜何龜何(거북아 거북아) 首其現也(머리를 내어라)

若不現也(내어 놓지 않으면) 燔灼而喫也(구워서 먹으리)

 

 

구지가와 다른 삼척의 해가사

 

이와는 달리 삼척지방에 전하는 해가사는

구호구호출수로(龜乎龜乎出水路)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어라.약인부녀죄하극(掠人婦女罪何極) 남의 아내를 앗은 죄 얼마나 크냐.여약패역불출헌(汝若悖逆不出憲) 네 만약 어기어 내 놓지 않으면입망포략번지끽(入網捕掠燔之喫) 그물을 넣어 잡아 구워 먹으리.

 

라고 되어있다. 해가사의 창출근거를 보면 삼국유사 기이 제2 수로부인조에 전하는 내용으로 신라 제33대 성덕왕(聖德王) 때에 순정공(純貞公)이 명주(지금의 강릉)태수로 부임하는 도중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곁에 바위 산봉우리가 있어 병풍과 같이 바다를 둘렀다. 높이가 천 길이나 되고, 그 뒤에 철쭉꽃이 만발하게 피어 있었다. 공의 부인인 수로가 좌우를 향해 "누구 꽃을 꺾어 올 사람이 없느냐?" 하였다. 모시던 사람들은 그 말에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마침 그 때 한 늙은이가 암소를 끌고 지나가다가 부인의 말을 듣고 그 절벽을 타고 올라가 꽃을 꺾어,‘자줏빛 바위 가에 잡은 손 암소 놓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라는 헌화가(獻花歌)와 함께 부인에게 바쳤다. 일행은 명주를 향해가다가 그 이틀 뒤에 임해정(臨海亭)이라는 곳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문득 바다에서 용이 나타나서 부인을 끌고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순정공도 허둥지둥 발을 구르나 계책이 없었다. 그 때 또 한 노인이 말하되 옛날 말에 여러 입은 쇠도 녹인다고 하니, 이제 바다 속의 미물인들 어찌 여러 입을 두려워하지 않으리오. 경내의 백성을 모아서 노래를 지어 부르고 막대기로 언덕을 치면 부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오.’ 라고 하였다. 공이 말대로 하였더니 용이 부인을 받들고 나와 도로 바치었다.

 

공이 부인에게 바다 속일을 물으니 부인이 말하기를 칠보(七寶)로 꾸민 궁전에 음식이 맛이 있고 향기로우며, 깨끗하여 속세의 요리가 아니다.’고 하였다. 부인의 옷에서는 세상에서 일찍이 맡아보지 못한 특이한 향기가 풍기었다. 수로부인은 절세의 미인이라 깊은 산과 큰못을 지날 때마다 여러 번 신물(神物)에게 붙들림을 당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용은 임금을 상징하기 때문에 입에 올리지 못해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수로부인을 바다 속으로 끌고 들어간 것도 용이고, 노래를 듣고 다시 수로부인을 놓아준 것도 용인데, 왜 거북이를 구워먹는다고 했을까? 난 속 좁은 소견으로 이렇게 유추해본다. 첫째는 우선 용은 임금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용을 구워먹는다는 것은 곧 임금을 해하려는 음모로 역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둘째로는 우리 설화 등에 보면 거북이는 용왕의 사자로 많이 표현이 되고 있다. 별주부전 등을 용왕의 병을 고치기 위해 토끼를 잡으러 거북이가 뭍에 오른다. 즉 용왕의 충실한 사자인 거북이를 해하는 것이 두려운 용왕이, 수로부인을 다시 되돌려 보냈다는 생각이다. 이런 향가 한수에도 당시 사람들의 심성을 알 수 있으며, 우리 선조들의 올곧은 마음가짐을 엿볼 수 있지 않은가.

 

 

 

동해시에서 삼척을 향해 7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보면 좌측으로 삼척MBC가 보인다. 이곳을 지나 증산해수욕장과 수로부인공원이라는 이정표를 따라가면 고가도로 밑을 통과해 좌회전을 하게 된다, 약간 경사진 길을 오르다가 보면 우측에 성황당사가 있고 조금 더 가면 시원한 동해가 펼쳐진다.

 

사기에 적힌 임해정(臨海亭)2004년 동해를 바라보는 자리에 조그맣게 꾸며져 신라 때 이곳을 지나던 수로부인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 미모가 얼마나 출중했으면 가는 곳마다 신물(神物)들이 나타나 수로부인을 취하려 했을까? 작은 임해정에 올라 동해를 바라다보니, 마침 바람이 부는 날이라서 동해의 작은 파도들이 앞 다투어 밀려든다.

 

 

 

백사장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갈매기 떼들은 한 곳을 바라보며 파도가 밀려들어도 요동도 하지 않고 있다. 흡사 당시 막대기로 언덕을 치던 사람들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저 편에 서 있는 추암해수욕장의 촛대바위는 그 때 수로부인을 끌고 바다 속으로 들어간 용의 화신은 아닐는지.

 

이곳을 경주에서 명주(강릉)로 가는 길목 중에 해가사의 장소로 여기는 것은 설화를 배경으로 유추한 것이다. 삼국사기 어느 곳에도 헌화가와 해가를 불렀던 장소가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곳에서 멀지 않은 임원해수욕장 근처에는 마을 사람들이 수리봉, 혹은 수로봉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고 한다. 앞으로 지역에 대한 연구가 더 이루어지면 그때는 좀 더 근접한 장소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아무튼 수로부인과 해가의 장소인 임해정은 그렇게 동해를 바라보며 다소곳 자리하고 있었다.

 

인천광역시 옹진군 영흥면 선재도는 신석기시대부터 어느 정도의 정착생활이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고려시대부터 조선후기까지 소우도라고 불린 이 섬은 1871년 전후부터 선재도로 개칭되었다. 선재는 목장지로 조선초기부터 남양도호부에 예속되었으며, 대부도에 진이 설치되면 대부진에 속하였고 대부진이 폐지되면 다시 남양도호부와 남양군으로 편입되기도 했다. 1914년에는 영흥도와 함께 부천군에 편입되었다. 1973년 옹진군에 속해 있다가 1995년 인천광역시에 통합되었다.

 

선녀가 내려와 춤을 추었던 곳

 

영흥면 선재리는 선재도 전체를 관할하는 행정리로 섬의 주변에 아름다운 곳이 많고 물이 맑아서 선녀가 내려와 춤을 추던 곳이라 하여 선재리라 하는 이 지역은 원래 남양부 영흥면 지역에 속했던 곳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안도, 호도, 칙도, 주도를 병합하여 선재리라 하여 부천군에 편입되었다.

 

 

지난 4일에 찾아갔던 선재도와 영흥도. 경기도 안산 대부도에서 다리로 연결되어 있는 선재도와, 선재도와 다리로 연결되어 있는 영흥도는 한가한 서해의 모습 그대로였다. 마침 썰물 때라 그런가 갯벌에는 배들이 한가하게 쉬고 있고, 선재도 길 한편에서 만난 작은 강아지 한 마리는 사람들의 손길이 그리운 듯하다.

 

고려의 왕족이 살던 곳 영흥도

 

인천광역시 옹진군 영흥도. 이 섬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시대부터라고 한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에 속하였으나, 고구려와 신라가 한강유역을 장악하는데 따라 여러 나라에 속하였다. 고려 현종9년인 1018년에는 수주(수원)의 속군이 되었다가, 인주(인천)로 편입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남양도호부에 속하였으며 1914년에 부천군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지금의 옹진군에 편입되었다. 1995년 옹진군이 인천광역시로 통합됨에 따라 인천으로 편입되었다. 영흥도의 명칭은 고려가 망하자 고려 왕족의 후예인 왕씨가 영흥도에 피신 정착하면서 살면서 고려가 다시 부흥할 것을 신령께 기원하기 위해 국사봉에 올라 나라를 생각했다고 해서 영흥도(靈興島)’라 불리게 되었다고 전한다.

 

영흥도가 아름다운 관광지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은 영흥대교 개통 때부터이다. 선재도와 함께 뭍과 이어진 영흥도는 인천 앞바다에서 백령도 다음으로 큰 섬이다. 다리가 놓이기 전까지는 뱃길로 1시간이나 떨어진 외로운 섬이었던 영흥도. 영흥대교가 개통이 되기 전에는 인천 연안부두나 인근 선재도에서 배를 타고 이 섬을 드나들었다.

 

 

영흥도는 섬 전체 둘레가 15km 남짓해 자동차로 30분 정도면 둘러볼 수 있다. 영흥도에서 입구에 조상한 진두선착장. 영흥대교를 건너자마자 우측으로 보이는 진두선착장은 섬의 활기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선착장 한편에서는 굴, 소라, 해삼 같은 어물을 진열해놓고 흥정을 벌이는 장사꾼들을 쉽게 만날 수가 있다.

 

하지만 찾아갔던 날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겨 한가함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진두선착장을 한 바퀴 돌아 십리포 해수욕장으로 찾아들었다. 소사나무 숲과 물 빠진 갯벌에서 조개 등을 캐는 아낙네들의 모습이 정겹다. 그저 마음 편하게 돌아본 선재도와 영흥도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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