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오는 날 떠나는 답사 길은 아무래도 힘이 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아무리 힘이 든다고 해도 답사를 멈출 수는 없으니, 내친 김에 몇 곳을 둘러보고는 한다. 충북 증평군 증평읍에 있는 남하리 사지 마애불상군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97호로 지정이 되어 있으며, 남하리 3구 염실마을 뒤편의 남대산을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다.

 

안내판 없는 문화재 찾기가 힘들어

 

도로변에 적혀있는 남하리 사지 마애불상군의 표지를 보고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눈이 쌓인 길을 찾아들어가는 것도 힘들지만, 입구에만 안내판이 있는 경우에는 온 마을을 샅샅이 뒤져야만 한다. 한 시간 넘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찾다가 마을주민들에게 길을 물었다. 우리가 찾는 곳과는 전혀 동떨어진 곳에 마애불상군이 있다는 것이다.

 

 

마을이 끝나는 곳에 차를 놓고 걸어 올라간다. 눈길에 발목까지 빠지고 길도 질척거린다. 그래도 전각이 보이는 곳에 마애불이 있다는 생각에 힘이 든 것도 모른다. 앞에 전각 안에는 마애불이 있고, 그 옆에는 바위 위에 선 삼층석탑이 보인다. 발걸음을 재촉해 가까이 다가간다. 이렇게 문화재를 찾아가는 길은 늘 가슴이 뛴다. 어떠한 모습으로 나를 반길 것인가가 늘 궁금하기 때문이다.

 

신라 말의 마애불상군에 반하다.

 

남하리 사지로 밝혀진 이곳에는 1954년 까지도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 이후 절은 폐사가 되어 없어지고 충북 유형문화재 제197호인 마애불상군과, 유형문화재 제141호인 삼층석탑만이 이곳이 절터였음을 알려준다. 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마애삼존불. 중앙에는 부처를 새기고 양 옆에 협시보살을 입상으로 새겼다. 처음에는 이 마애삼존불로만 알았다고 한다. 그 후 정밀 조사를 하면서 삼존불 좌우로 여래입상과 반가사유상이 밝혀졌다.

 

 

모두 두 덩이의 바위에 새겨진 5구의 마애불. 중앙 정면에 삼존불이 있고, 그 우측으로 돌아서 여래입상 1기가 새겨져있다. 그리고 좌측의 떨어진 바위에 반가사유상이 새겨져 있으나, 흐릿해서 구별조차 하기가 어렵다. 중앙 3기의 삼존불은 형태를 알아볼 수 있으나, 좌우에 새긴 반가사유상과 여래입상은 자세히 들여다보아야만 한다.

 

하지만 당당의 체구로 새겨진 점과 목에 삼도가 생략된 것 등으로 보아서는, 신라 말이나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5기의 마애불상군은 거의 같은 시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지방의 장인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보여

 

마애불상군이 새겨진 바위 위로는 최근에 새로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전각이 서 있다. 삼존불이 새겨진 뒤로는 작은 통로가 보인다. 통로는 바위를 돌아 나올 수 있을 정도의 간격으로 떨어져 있다. 삼존불과 반가사유상 앞을 보니 누군가 초를 켰던 흔적이 보인다. 많은 초들이 타다 남은 것으로 보아, 여러 차례 누군가 치성을 드렸음을 알 수 있다.

 

 

삼존불의 아래는 발을 표현하느라 움푹 양편을 파 놓았다. 전체적인 모습은 당당하다. 늘 여기저기 다니면서 문화재 답사를 하지만, 보는 것마다 다 새로운 느낌이 든다. 증평읍 남하리 사지에서 만난 5기의 마애불상군. 그 당당한 모습이 반갑다. 그리고 눈길에 발을 빠트리며 몇 번인가 미끄러졌지만,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는 생각이다. 지방 장인의 손길에 의해서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남하리 사지의 마애불상군. 오늘 답사 길에 만난 마애불상군은 천년 지난 세월 그렇게 서 있었다. 그 당당함에 반하다.

안성시 금광면 상중리, 서운산 북동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석남사. 서운산은 남으로는 서운면 청룡사가 자리를 하고 있고, 북동으로는 석남사가 자리를 하고 있다. 석남사는 가파른 경사에 층계를 놓고, 전각을 계단식으로 꾸며 놓은 운치 있는 절이다. 석남사는 신라 문무왕 19년인 680년에 승려 담하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문성왕 18년인 876년에 염거화상이 석남사에 머물면서 절을 중건했다고 하며, 고려 광종의 아들인 혜거국사가 후에 크게 중건을 했다. 석남사는 오랜 역사를 지닌 절로, 이름 높은 스님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고 전한다. 당시에는 수백 명의 스님들이 선방에 머물렀던 수행도량이었다는 것이다.

 

서운산의 마애여래입상을 찾아 헤매다

 

마애불이 있음을 알리는 이졍표

 

석남사에서 좌측으로 다리를 건너 서운산 정상으로 오르다가 보면,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가 나온다. 석남사까지는 300m, 정상까지는 1.8km라는 안내판이 있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마애불이 있다는 표시도 보인다. 금광면 상중리 산22에 해당하는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마애여래입상. 높이 5.3m의 이 마애불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9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석남사를 한 바퀴 돌고 종무실에 가서 마애불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다리를 건너 산 위로 가면 마애불이 있다는 대답이다. 다리를 건너기 전에 마애불이 500m 앞에 있다는 표시가 보인다. 다리를 건너기는 했는데, 이런 낭패가 있나. 우측으로도 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그리고 직진을 해도 역시 산정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있어야 할 마애불을 안내하는 표시가 없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다리를 건너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우측으로 난 다리를 건너 산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런데 500m 이상을 더 걸었을 것 같은데도, 마애불이 나타나지 않는다. 어느새 산 정성이 바로 앞에 있다. 길을 잘못 들었나. 마침 등산을 하고 내려오는 등산객을 만나, 마애불의 위치를 물었다. 반대편이라는 것이다. 다리 건너에 작은 이정표 하나만 세워주었어도, 이런 낭패는 당하지 않았을 것을.

 

통일신라시대의 마애여래입상   

 

석남사의 마애여래입상. 통일신라시대에 석남사를 창건하면서 조성한 것으로 추정한다.

 

석남사 마애여래입상은 석남사에서 약 350m 정도 떨어진 곳의, 자연암벽에 입상을 돋을새김으로 처리를 하였다. 길이 갈라지는 마애불의 밑에서부터 돌로 탑을 군데군데 쌓아놓았다. 조금 올라가니 소나무 가지 사이로 마애불이 보인다. 이 지역의 마애불들이 일부만 돋을새김을 하고 나머지는 선각으로 처리를 한 것에 비해, 석남사의 마애불은 전체를 돋을새김 하였다.

 

앞으로 다가가 두 손을 모으고 잠시 머리를 숙인다. 그리고 암벽에 돋을새김 한 마애불을 찬찬히 훑어본다. 전체적으로는 육중한 느낌이다. 암벽에 꽉 차게 조각이 된 마애불. 3중의 원형 두광을 둘러놓았는데, 그 모습이 투박하다. 그리고 몸에도 신광이 표현이 되어있다. 천년이란 오랜 세월을 비바람에 씻겼을 텐데, 아직도 뚜렷하게 형태가 남아 있다.

 

발가락이 시리겠네요

  

얼굴부분은 많이 훼손이 되었다. 그러나 두광과 삼도가 뚜렷하다.

두 손은 가슴께로 들어, 오른손은 검지를 펴고,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다.

연화대 위에 올라선 마애불, 법의 밖으로 발가락이 돌출이 되어있다.

 

석남사 마애여래입상은 연화대 위에 올라 서 있는 형태이다. 그런데 발가락 부분을 보다가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불경스런 행동이라고 하겠지만, 양 발가락의 표현이 순간적으로 웃음이 나게 만든다.

 

돌출이 된 연화대 위에 법의에서 벗어난 발. 그리고 한 편에 다섯 개씩의 발가락. 이렇게 표현을 해 놓았는데 사실적이다. 법의 속에서 삐죽이 내민 열 개의 발가락. 전체적으로 무거운 마애불을 이 발가락이 희석시키고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얼굴 부분은 많이 훼손이 되었다. 얼굴은 넓적하고 풍만하다. 그리고 이목구비가 모두 큼직하게 표현이 되어 있고, 육계는 낮고 어깨는 넓게 표현을 하였다. 목에 보이는 삼도는 필요 이상으로 두텁게 해, 마애불의 인상이 투박하면서 무겁게 보인다.

 

법의는 통견으로 양 어깨를 덥고 있다. 밑으로 내려오면서 U 자형의 주름을 이룬다. 주름은 복부 밑까지 내려오다가, 다리에서 갈라지고 있다. 이러한 형태로 보아 이 마애여래입상은 통일신라시대 석남사를 창건할 때, 조성한 것으로 추정한다.

 

천년 세월 그 모습 그대로

 

내의의 가슴께 묶은 매듭. 투박한 모습이며 밑으로 잡은 주름도 투박하다.

 

가슴에는 내의를 매듭으로 묶었으며, 밑으로는 주름이 두텁게 표현되어 있다. 매듭이나 주름도 상당히 투박해 보인다. 두 손은 가슴께로 들어, 오른손은 검지를 펴고,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다. 내영인과 같은 형태의 수인이지만, 한 팔을 아래로 하지 않아 내영인은 아니다. 일설에는 법설을 할 때의 수인과 같다고 한다. 양 팔에도 법의가 팔에 걸쳐있는 형태다.

 

비바람에 씻겨 많이 마모가 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석남사 마애여래입상. 산을 한 바퀴 돌아 찾아와서인가, 저녁 햇살이 비치는 마애불의 모습이 유난히 자비로워 보인다. 인간세상 고통을 지금이라도 다 가져갈 듯한 미소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찾아오는 것인지. 누군가 다녀간 지 얼마 안 된 듯, 향이 연기를 허공에 퍼트리고 있다.

이천시 모가면 소고리 마을에서 마국산 줄기가 있는 부처박골로 들어가는 길. 마을을 지나 하천을 따라 500m 정도를 지나면 동물의 분뇨를 갖고 비료를 생산하는 공장을 만난다. 이곳에서 500m 정도를 작은 내를 건너 산 쪽으로 오르다가 보면 '문화재 관리소'란 작은 가건물이 있고, 숲길 안에 커다란 바위가 보인다.

 

떨어진 나뭇잎이 발밑에서 바스락거린다.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곳이어서 그런가, 떨어진 낙엽들이 그대로 쌓여있다. 밟는 촉감이 좋아 이리저리 길을 벗어나 낙엽을 밟아본다. 마을에서 '부처바위'라고 부르는 커다란 바위가 보인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냥 바위인줄만 알 정도로 희미한 선각처리가 된 마애불. 현재 이 마애여래좌상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9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바위 주변에는 누가 쌓은 것인지 여기저기 돌탑이 쌓여져 있고, 하천도 큰 돌을 이용해 잘 정비가 되어있다. 마애여래좌상에서 조금 떨어진 우측에는 돌로 쌓은 작은 네모난 돌집 안에 부처를 모셔놓기도 했다. 그동안 누군가가 이곳을 관리를 잘 해온 듯하다. 커다란 바위는 주변에 보호책을 쳐놓았다. 불상은 높이 7m 가 넘고 동편을 바라보는 편편한 바위를 다듬어, 부조 한 후 선각처리를 하였다.

 

  
부처바위에 선각한 마애여래좌상. 얼굴 주변에는 7겹의 두광이 있고,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다.

  
결가부좌한 모습.

 

수인으로 보아 아미타여래상으로 보이는 이 마애여래좌상은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세월이 지난 탓일까? 육안으로도 잘 식별이 되지 않을 만큼 선이 마모가 되어 흐릿하다. 오른손의 수인은 육안으로는 판단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희미해졌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다. 두광은 머리주위를 일곱 겹으로 동심원을 둘러놓았고, 몸 주위에도 두 겹의 신광을 표시하였다. 얼굴이 둥글고 눈은 가늘며 입술이 엷다.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어 자애로운 아미타여래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왜 이곳에 들어와 커다란 바위를 다듬어 이런 마애불을 조성한 것일까? 어떻게 이 호젓한 산중에 이런 커다란 마애불을 새겼을까? 늘 그런 질문을 하게 된다. 무엇이 그리도 간절했기에, 아무도 찾지 않는 깊은 산중에 들어와 이런 작품을 조성한 것일까? 쉬지 않고 질문을 해보아도, 알 수가 없다.

 

  
부처바위라 부르는 이 바위에 고려 초기에 선각을 한 마애여래좌상이 있다
 

  
가까이 가서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확연하게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뛰어난 장인의 솜씨를 보이는 이 마애불을 찾아본 것은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인가 이곳에 들려 마애불을 찾겠다고 비료공장까지 왔다가, 갑자기 내리는 비로 길을 돌아간 적이 있다. 이렇게 선각처리를 해서 육안으로도 확연히 볼 수가 없었다면, 차라리 그때 비를 맞더라도 올라올 것이라는 후회를 한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것일까? 그때 비를 맞더라도 부처바위 마애불을 보기 위해 올라왔으며, 좀 더 정확한 선을 볼 수 있었을 텐데. 비를 맞으면 선이 더 확연하게 들어나 보이기 때문이다. 답사를 하면서 여러 곳을 다니다가 보면, 늘 후회를 하는 일이 생긴다.    

 

  
누군가 마애불 가까운 곳에 돌로 집을 짓고 부처를 모셔놓았다


부처바위에 선각을 한 마애여래좌상. 천년이 넘는 세월을 이 산중에 있었다. 1979년 이천문화원에서 답사를 할 때까지, 이 산중에서 누구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수많은 시간을 이렇게 바위벽에 앉은 채로 기다려온 마애불을 만나기 위해, 이 호젓한 산중을 찾은 나그네에게 진정 인연을 알려주고 싶어서일까? 엷은 미소를 띠는 미소가 한없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경기도 이천시 마장면 표교리에서 서이천 IC 방향으로 난 도로를 따라가다가 보면, 우측에 약수터 가든이라는 음식점이 나온다. 조금 지나면 U턴을 할 수 있고, 내려가다가 우측으로 난 소로에 <보물 제982호 태평흥국명 마애보살좌상>이라는 문화재 안내판이 있다.

 

그 길을 따라 들어가면 논이 나오는데, 이들을 '넘어새말들'이라고 한다. 길 좌측에 바위가 하나 서 있는데, 마을사람들은 이 바위를 '미륵바우'라고 부른다. 화강암의 재질에 조형된 이 마애불은 도드람산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보물 제982호 마애보살좌상은 이 바위에 옅은 부조로 새긴 3.2m의 보살좌상이다.   

 


자연석을 최대한 이용한 걸작

 

넓적한 화강암에 새긴 이 보살상은 고려 경종 6년인 980년에 조성이 되었다. 마애불에 조성 연대가 새겨진 것은 흔치가 않다. 이 마애보살좌상은 바위 뒷면에 '太平興國 六年 辛巳 二月 十三日...'이라고 명문이 음각되어 있어서, 조성연대가 밝혀졌다. 그런데 이 마애보살상을 보면 얼굴의 부분이 돋을새김을 하였다. 턱 부분이 돋아있고. 남은 부분은 굵게 선각처리를 하였다. 오른발은 밑으로 내려 앙련좌 위에 놓고, 왼발은 오른쪽 무릎 위에 올린 반가상의 형태로 조성되었다.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중앙에 화불을 새겨넣었다

  
손에는 연꽃을 들고 있어 관음보살상임을 알 수 있다

  
오른발은 밑으로 내려 앙련좌 위에 놓고, 왼발은 오른쪽 무릎 위에 올린 반가상의 형태로 조성되었다


이 발을 올린 부분을 보면 이곳 역시 턱이 져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 턱을 그대로 이용해 반가자세를 취한 마애불을 조성한 것이다. 그렇다면 아마 저 턱도 돌이 돌출된 부분을 다듬어 이용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화강암을 절단한다고 하여도 지금처럼 칼로 무를 베듯 그렇게 절단할 수가 없었던 지난 시절, 그 돌의 생김새를 그대로 이용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이 마애불을 조성한 당시의 석공은 최고의 작품을 만들었다는 생각이다.

 

보관 위에 구멍은 무엇일까?

 

장암리 마애불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다. 가운데는 화불을 새겼고, 오른손에는 연꽃을 들고 있다. 이런 형태로 보면 관음보살이다. 얼굴은 사각형에 가깝고 전체적으로 조형이 잘 맞지 않는 듯도 하다. 그런데 보관의 양편 끝에 작은 구멍이 보인다. 이 구멍은 도대체 언제 뚫은 것이며, 무슨 용도로 사용된 것일까?

 

보관의 양편 끝에 작은 구멍이 굵은 나무젓가락이 들어갈 만한 크기다. 그렇다면 이것은 처음부터 뚫려 있었고, 아마 이곳에 쇠막대 등을 집어넣은 후 그곳에 보관의 장식을 하였을 것 같다. 즉 보관을 아름답게 치장을 하기 위해, 막대에 구슬 등을 달았을 가능성이 있다. 더욱 이곳 장암리의 옛 지명 이름이 '장수왕리'라는 명칭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지명과 관계되는 것도 연구할 만하다. 

 

  
보관 양편 끝에 두 개의 구멍은 무엇일까? 아마 그 곳에 쇠막대 등을 끼워 장식을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측면에서 보면 얼굴의 턱 부분이 돋을새김으로 조성하였고, 다리부분도 돌출이 되어있다.

 

마애불 앞에 놓인 돌의 용도는

 

마애불 앞에는 커다란 돌이 두 개 놓여 있다. 그 중 하나는 네모난 구멍이 나있다. 이 돌들이 어디에 쓰였던 것인지는 몰라도, 마을주민의 이야기로는 처음부터 그 근처에 굴러 다녔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전각에 사용한 돌은 아닐까? 혹은 마애불의 앞에 석등의 받침돌은 아니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해본다. 어디에도 이 돌들에 대한 설명은 보이지를 않는다. 다만 중앙에 구멍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석등보다는 마애불이 전각으로 보호를 받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마애불의 앞에 있는 두개의 사각형 돌의 용도는 무엇일까? 전각을 지었던 돌이나 석등의 받침돌 등으로 보인다.

 

보물이라고 해도 보호각이나 주변에 특별한 설치물이 없이, 길 가에 놓여있는 마애보살좌상. 바위 뒷면에 새겨져 있다는 명문은 아무리 둘러보아도 찾기가 힘들다. 아주 희미하게 흔적만 남아있어, 그동안 마모가 된 것으로 보인다. 보관 위 양편에 뚫린 두 개의 구멍에 자꾸만 눈이 간다. 명문으로 인해 조성연대가 밝혀진 보물 제982호 태평흥국명 마애보살좌상. 그 앞에서 마음 속에 서원을 빌어본다. 제발 보통 사람들이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불교유적의 제작연대를 가늠하는데는 그 생김이나 재질, 모습의 특징 등을 보아서 제작연대를 추정한다. 그래서 불교유적의 제작시기를 대개는 몇 세기경이나 삼국시대, 혹은 통일신라, 또는 고려 초기 등으로 기록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보물 제159호 함안 방어산 마애불은 유일하게 그 제작연도를 새겨놓아, 통일신라 불상조각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함안 방어산 마애불을 찾아갔을 때는 꽤 더운 날이었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다. 자료 정리를 하다가 함안 방어산 마애불을 보는 순간, 아스름한 옛 기억이 되살아 난다. 아마도 마애불을 만나기 위해 흘린 땀이 족히 수건 몇 장을 적실만한 양이었기 때문인가 보다. 한낮의 더위는 그리 녹록지가 않은 날 산을 오른다는 것은 정말로 고통이다.

 

 

시작부터 문제였던 문화재 답사 길

 

 

거기다가 방어산을 오르는 날은  넥타이에 구두까지 신었으니, 현장답사를 하기에는 적합한 차림새도 아니다. 마애불을 오르는 길에 있는 마애사를 찾았다가, 보물이 있다는 소리에 찾아보리라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이렇게 생각지도 않게 문화재를 답사하는 날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고생을 한다. 

 

그러나 출발을 한지 채 20분도 안되어서 후회를 시작했다. 길은 계단으로 잘 만들어져 오르는데 문제는 없었지만, 이정표가 500m라고 적힌 것을 보고 우습게 안 것이 불찰이다. 입구에서 잡화를 파는 분에게 마애불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니 '조금만 가면 된단다' 그래서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500m가 그리 멀 줄이야. 도대체 문화재 측정거리를 실 거리로 표시하지 않고, 직선거리로 표시를 해 놓다니. 답사를 하는 나로서는 이런 경우 정말로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게 된다.  

 

고된 문화재 답사를 기억해내다

처음에는 그저 오르면서 이것저것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한참을 올랐는데도 마애불이 보이지를 않는다. 작은 물병은 이미 바닥이 나고, 손수건은 그냥 손에 힘만 주어도 닦은 땀이 주루룩 흐른다. 오르는 길에 쉼터가 보인다. 앉아서 쉬고 있으려니 사람들이 내려온다.

 

"마애불이 어디쯤 있어요?"  

"예, 꼭 반 왔네요"

"반이요?  500m라고 되어 있는데요"

 

가까운 거리인줄 알고 오르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멀다니 앉아서 고민을 한다. 올라가야하나, 아님 포기를 하고 내려가야 하나. 그러나 절반을 왔는데 그냥 내려갈 수는 없다. 아무리 땀이 흐르고 힘이 들어도 보물이 있다는데 하면서 다시 산을 오른다.

 

그저 땅만 내려다보면서 묵묵히 오른다. 위를 보고 오르면 더 빨리 지칠 것 같아서다. 오르다가 보니 앞에 산 날망이 보인다. 그런데 마애불은 보이지를 않는다. 결국 능선 위를 다 가서야 마애불을 볼 수 있었다. 500m를 오르는데 무더운 날씨 덕에 엄청난 땀을흘리며 한 시간은 걸린듯 하다. 문화재 하나를 만나기 위한 고통은 때로는 상상을 초월하기도 한다. 미끄러운 길을 걷다가 발을 겹질린 것만 해도 아마 수십 번은 넘을 것이다. 깨지고 찢어지고, 흉터가 생기는 험난한 여정이 바로 문화재 답사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결국엔 그 많은 땀을 흘리고 마애불 앞에 섰다. 산 정상 바로 아래서 만난 방어산 마애불. 널직한 바위에 선으로 음각을 한 마애불은. 그저 바라다만 보아도 절로 탄성이 나온다. 이 산중에 도대체 왜 오랜시간 공을 들여 마애불을 조성했을까? 아마 그 선 하나 하나를 파면서 스스로 피안의 세계를 그리던 것은 아니었을까?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니까짓 것들이 문화재의 소중함을 알기나 하는겨?

 

방어산 마애불의 조성년대는 신라시대인 801년이다. 중앙에 본존은 약사여래이며, 좌 우의 협시보살은 각각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새겨넣었다. 왼편은 일광보살로 남성적이며 오른편은 월광보살로 눈썹사이에 달무늬가 그려진 여성상이다.

 

문화재를 찾아다니는 길은 결코 순탄하지가 않다. 평지에 있는 경우도 있지만, 몇시간을 산을 올라야 탑 하나를 찍을 수도 있다. 날씨가 매번 좋은 것도 아니다. 때로는 비가 쏟아져 바로 코 앞이 보이지 않을 떄도 있고, 눈이 쌓여 미끄러지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문화재는 우리의 정신이란 생각이다. 그래서 하루라도 더 많이, 또 한 점이라도 더 많이 찾아보고 싶은 욕심이다.

 

언젠가는 이 답사도 끝이 날 것이다. 그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올들어 급작히 체력의 한계를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걸을 수 있고 체력이 받쳐만 준다면, 모든 것을 보고 싶은 것이 마음이다. 욕심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이럴 때마다 속으로 하는 말이 있다. 나 스스로에게 힘을 얻기 위한 자구책이다.

 

"니까짓 것들이 문화재의 소중함을 알기는 하는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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