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 정철(1536 ~1593)은 담양 어디를 가나 그 흔적이 보인다. 정철은 조선 중기의 시인이자 정치가이다. 송강은 가사문학의 대가로 『성산별곡』,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훈민가』 등 많은 가사와 한시, 단가 등을 남겼다.
 
담양군 남면 지곡리 산 75 - 1 에는 명승 제57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식영정 일원이 자리하고 있다. 입구에는 <송강 정철 가사의 터>라고 쓴 비가 보이고, 정자와 사당 등이 자리하고 있다. 이 명승의 좌측 낮은 동산 위에는 크지 않은 정자가 서 있다. 바로 전라남도 기념물 제1호로 지정이 되었다가, 2009년 9월 국가지정 명승으로 승격이 된 식영정이다.

국가지정 명승 제57호로 지정이 된 식영정 일원

식영정은 서하당 김성원이 장인인 임억령을 위해 지은 정자라고 한다. 김성원은 이 식영정 옆에 자신의 호를 따서 서하당이라는 아름다운 정자를 지었다고 하는데, 최근에 복원을 하였다. 정자의 주인 석천 임억령은 이곳에서 '식영정 20영'을 지었으며, 김성원, 고경명, 정철 등의 제자들이 운차를 하였으며, 이 네 사람을 합해 <식영정사선>이라고 일컬었다.



굽은 나무를 그대로 사용해 운치를 살린 식영정의 대들보

송강문학의 산실 식영정

식영정
은 이곳을 중심으로 성산별곡 등을 지어 <송강문학의 산실>이라고 부른다. 식영정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집으로 지어졌다. 한편에는 한 칸의 방을, 그리고 그 남은 부분은 누마루를 깔아 시원하게 조성을 하였다. 온돌방과 마루가 반씩 차지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동편 중앙에 방을 들이고, 방 앞뒤에는 툇마루 형태의 마루가 있어 공간적 여유를 보인다.

『서하당유고』에 따르면 이 식영정은 명종 15년인 1560년에 지어졌다고 하니. 지금부터 450년 전에 이 정자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식영정 위에 오르니 앞쪽으로는 광주호가 펼쳐진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광주호가 있어, 식영정의 아름다움을 한층 배가 시킨다.

앞으로는 넓은 광주호가 자리를 잡아 아름다움을 더한다.
 
노송과 어우러진 식영정은 가히 명승이로세

마루에는 각종 싯귀가 적힌 게판들이 걸려있고, 옆으로는 노송 두어 그루가 서 있다. 노송과 어우러진 식영정은 신선이라도 머물만한 절경이다. 이 식영정을 지으려고 마음을 먹었을 때, 서하당 김성원은 얼마나 많은 곳을 찾아다녔을까? 아마 담양 곳곳을 누비면서 이만한 장소를 찾아 정자를 지었다고 생각을 하니, 새삼 식영정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다.

사람들은 연신 식영정에 오른다. 주변을 한 바퀴 돌아 내려가는 사람들. 도대체 우리들은 이만한 경치에, 이 정자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것일까? 그저 오르기가 무섭게 우르르 몰려 사진 몇 장을 찍어대고는 내려가 버린다. 아무도 이곳의 아름다움에 감탄을 하지 않는다.



  
450년이란 세월 동안 그 자리에 서서 이 땅의 문학의 산실로 자리를 잡은 식영정. 푸른 나무가지 위에서 지저귀는 한 마리 이름모를 새가 고요함을 깬다. 아마 저 새도 식영정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것은 아닐까? 멋 없이 사진 몇 장을 남기고 떠나가는 사람들이 야속하게 느껴진다.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아들었을 곳인데도, 아무것도 모르는지. 세월의 무상함이란 그래서일까?   

 

봉황정, 봉황이 날아와 춤을 추었다고 한다. 정자가 서 있는 밑으로는 물이 흐른다. 저 멀리 내 건너 보이는 사람들은 그 물에 발을 담구고 앉아 이곳을 바라보고 있을까? 아님 두 사람이 주변 시선에 정신을 뺏기지 않고 사랑을 속삭이고 있을까? 봉화정에서 내려다보는 냇가에는 손 장난을 치는 연인들의 모습이 아름답다.

 

봉황정은 용문면 소재지에서 44번 도로를 따라 횡성군 방향으로 3.5㎞ 지난 오른쪽 길가에 서 있다. 양평군 용문면 광탄리. 물이 맑고 주변 경치가 아름답다. 봉황이 춤을 추는 형상이라고 하여 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아들어 봉황정의 아름다움을 글로 남겼다. 일반 정자와는 달리 담이 처져있고, 계단을 따라 위로 오르면 정자가 서 있다. 대문 입구에는 일붕 서경보 큰 스님의 통일을 염원하는 시비가 한편에 서 있다.

 


계단을 오르면 정자 안편에는 람휘정이라고 쓴 현판이 보인다. 그리고 밑으로 흐르는 내 흑천 쪽으로 정자를 돌아가면 구성대라는 또 하나의 현판이 걸려있다. 한 정자에 세 개의 이름을 붙인 봉화정.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하기야 한 정자에 네 개의 이름을 갖고 있는 정자도 있다.'九成'은 태평성대가 아홉 번 이루니 봉황이 와서 춤추는 형상을 뜻하고, '覽輝(남휘)'는 봉황이 천리 길을 날아가다 덕이 빛나는 것을 보고 내려앉았다는 뜻을 지닌 말이라고 한다.

 

봉황정이 처음 건립된 것은 인조 2년인 1624년에 이조참의 양응청과 의해 건립되었다. 그 후 정조 14년인 1791년에 후손들이 중건하였으나, 철종 1년(1850)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고, 다시 1967년에 남원양씨 종중에서 옛 규모대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봉황정은 당대의 시인묵객들이 시와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여한구대가(麗韓九大家)의 한 사람으로 지평에 은거하였던 이식, 명시인 유희경, 김창흡, 이중하 등이 봉황정에 올라 봉황정의 아름다움을 글로 남겼다. '봉황정'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암긴 사람들은 이항복, 유희경, 김창흡의 시가 전한다.  봉황정은 팔작지붕에 겹처마 건물로서 내부에는 누마루를 놓았다. 규모는 정ㆍ측면 각각 3칸으로 정방형이다. 정자 안에는 '봉황대남휘정중수기'부터 최근에 만든 시문현판까지 모두 7개의 글을 적은 게판이 걸려있다.

 

  
▲ 현판 정자 안에는 람휘정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서 시 한 수 적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선조들. 우리는 그들의 마음을 잊고 산지 오래되었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서도 '아름답다'라는 표현조차 할 수 없는 지금의 날들이 참 바보같다는 생각이다. 누군가 이 봉황정에 올라 스스로를 시인이라 했다면, 글 한 수 남겨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속 좁은 사람도 정자에 오르면 저 아래 흐르는 광탄에 세속에 더럽혀진 마음을 씻어버릴 수 있을텐데, 그저 덧없는 세월만 탓한들 무엇하리. 오늘 이 봉황정에 올라 엣 선인들의 마음을 읽어본다.  (출처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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