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덕암리 도로변에 커다란 노송 숲이 있다. 그 안에 자리를 하고 있는 낮은 담이 둘러쳐진 고풍스런 정자 하나. 고려 말기의 문신인 덕곡 조승숙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태조 7년인 1398년에 세운 교수정이다. 처음 이곳에 정자를 세운지가 벌써 600년이 지난 정자이다.

조승숙(1357~1427)은 고려 말 우왕 7년인 138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그러나 역성혁명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두문동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고향인 함양으로 내려와 이곳에 교수정을 짓고 후학들을 가르쳤다. 두문동 72현의 한분인 조승숙 선생의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이 배어있는 정자 교수정. 그곳에는 학동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소나무 숲속에 선 교수정

교수정은 주변이 소나무 숲이다. 지나는 길에도 눈이 띠는 것은, 고목으로 변한 소나무들 때문이다. 낮은 담장을 둘러친 교수정은 정면 삼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집이다. 정자는 그리 화려하지는 않다. 그러나 그 안에 정자를 지은 이의 마음이 담겨져 있다. 지금이야 도로변이지만, 아마 이 정자를 처음 지었을 때는 주변이 숲이었을 것이다.

정자 앞으로는 내가 흐르고 있다. 뒤편에 있는 작은 능선을 생각한다면, 이 정자의 처음 모습이 떠오른다. 마을을 내려다보면서 있는 산 밑, 냇가 곁에 이 정자를 지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을의 아이들이 글을 배우러 오는 것을 먼발치에서 보고, 선생은 일어서 미소를 띠우며 어서 오라고 손짓을 했을 것이다.





성종이 내린 사제문

교수정을 바라보면 좌측 뒤편에 방을 드렸다. 정자에 방을 놓을 때는 중앙에 놓거나, 아니면 뒤편 중앙에 놓는다. 그러나 교수정의 방은 뒤편 한 편으로 몰아놓았다. 정면으로 두 칸, 측면에 한 칸 방을 놓고 이곳에서 기거라도 했던 것일까? 방 앞에서 마을을 바라다본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들녘이 시원하다.

여기저기 걸린 편액에서 이 정자의 모습을 본다. 밖으로 나와 냇가에 보니 비가 한 기 서 있다. 비에는 음각을 하고 붉게 칠을 한 글이 적혀있다. ‘수양명월율리청풍(首陽明月栗里淸風)’이란 글이 있다. 이 글은 그의 행적이 알려지면서 이 사실을 알게 된 성종이 <사제문(賜祭文)>을 내렸는데, 그 중에서 뽑은 글귀라는 것이다.



비는 정자의 담 밖, 냇가 바위 위에 서 있다. 자연 암반 위에 세운 비를 보려고 내려가다가 발을 헛딛고 말았다. 그래도 겨우 비문을 찍고 돌아선다. 그런데 이 비 앞에서 보는 정자의 운치가 남다르다. 그래서 이곳에 비를 세운 것일까? 넘어지지 않았으면 알지 못했을, 또 다른 정자의 멋. 그래서 세상은 ‘새옹지마’리고 한 것일까?

정자를 한 바퀴 더 돌아본다. 참으로 작지만 풍취가 있다. 화려하진 않아도 무엇인가 표현할 수 없는 기품이 있다. 노송과 어우러진 작은 정자 하나.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져 내려오는 것일까? 잘 정리가 된 주변이 돌아보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일각문을 나서면서 뒤돌아보니, 선생의 웃으며 아이들을 맞이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정자를 돌아보면서 느끼는 또 하나의 감흥이다.

함양군처럼 장자와 누각이 많은 곳은 우리나라 전역을 돌아보아도 한 두 곳에 불과하다. 그만큼 가는 곳마다 만날 수 있는 것들이 바로 누각이다. 답사를 하는 나로서는 그보다 바람직한 마을은 없다. 짧은 시간에 여러 곳을 돌아볼 수 있으니까.

이번 답사 길에서는 두 곳의 누각을 돌아보았다. 함양읍 운림리 함양군청 앞에 서 있는 경남 유형문화재 제90호인 학사루와, 안의면 금천리 금호강변에 소재한 제92호인 광풍루이다. 두 곳의 누각은 모두 정면 5칸 측면 2칸의 누각으로 모두가 관아에 속해 있던 건조물로 보인다. 이 중 학사루의 창건연대는 신라 때부터라고 추정하고 있으며, 광풍루는 조선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최치원이 올라 시를 읊었다는 학사루

학사루의 창건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다만 신라시대 최치원이 이 지방 태수로 재직시, 학사루에 올라 시를 읊은 곳이므로 후세 사람들이 학사루라 불렀다고 전한다. 그런 연유로 학사루의 건축 년대를 신라 때로 본다. 학사루의 서쪽에 객사가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이 건물이 이곳 동헌의 부속건물이지 않았을까 추론도 해본다. 학사루는 무오사화를 일으키게 한 원인을 제공한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조선조 연산군 때 영남파의 종조였던 김종직이 이곳 군수로 부임하여, 학사루에 걸린 유자광의 시판을 철거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그것이 두 사람의 감정이 고조되어 연산군 4년인 1498에 무오사화를 불러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재의 학사루는 당시의 건물은 아니다. 왜구의 침입으로 사근산성이 함락될 때 학사루가 함께 소실되었으며, 조선조 숙종 18년인 1692년에 정무가 중수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면, 현재의 학사루는 320년 정도가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인 학사루는 2층 누각기둥에 주련을 달아 고풍스러움을 더하고 있다.



학사루. 비가 오는데도 답사를 강행하였다.

정여창이 명칭을 지은 광풍루

광풍루는 안의면 소재지 진입로 입구 금호강변에 서 있다. 광풍루의 원 이름은 선화루였다. 선화루, 선화당이란 명칭은 동헌의 누각이나 전각에 많이 붙이는 것으로 보아, 이 누각은 동헌의 건물이었다고 본다. 광풍루는 조선조 태종 12년인 1412에 당시 이안(현재의 안의면)의 현감 전우가 창건하여 한다.

그 후 조선 세종7년인 1425년에 김홍의가 현재의 위치로 이건 하였고, 조선조 성종 25년인 1494년에 안의 현감 일두 정여창 선생이 중건하고 광풍루로 개칭 하였다. 그 뒤에도 소실과 복원 등을 거친 광풍루의 현 건물은, 숙종 9년인 1683년 현감 장세남이 중건한 건물로 340년 정도의 세월을 지낸 누각이다.



광풍루. 금호강가에 서 있는 운치있는 누각이다.

꽁꽁 닫아라, 머리카락 보일라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가장 답답한 것은 바로 꽁꽁 닫힌 문이다. 전국의 서원이나 향교 등을 말할 것도 없지만, 그 많은 문화재들이 문을 잠그고 있다. 특히 이런 문을 닫아놓는 현상은 전각에서 심하게 나타난다. 그렇게 문을 잠그는 것은 바로 훼손을 막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학사루 계단 위 닫힌 문에는 낙서가 가득하다. 어딜가나 낙서로 몸살을 잃는다. 그래서 문을 잠갔다는 것은 이해가 된다. 


학사루 이층으로 올라가는 문에는 잠을통이 걸려있다.

하지만 문을 닫아 걸어놓는다고 훼손이 되지 않을까? 요즈음 들어 각 지자체들마다 정자나 누각 등을 개방을 한다. 마루를 깨끗이 손질하고 사람들이 신을 벗고 들어가 쉴 공간으로 활용을 하는 것이다. 여름이면 많은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가 쉬기도 하고, 독서를 하거나 담소를 나누기도 한다. 누각이나 정자 등이 바람이 잘 통하게 구조가 되어있어, 시원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누각인 촉석루 등도 모두 개방을 하고 있다.


광풍루에도 계단에 문을 달아 막아놓았다. 문 밖에서 본 이층

하지만 함양군의 두 곳 누각은 모두 잠가놓았다.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에 잠을 통을 잠가 놓아 위로 오를 수가 없다. 문화재 답사를 하는 나로서는 꼼꼼히 살펴보아야 하는데, 이렇게 닫혀있는 것을 보면 정말 짜증스럽다. 그렇다고 문화재 보존이 잘 되는 것일까? 오히려 사람들에게 개방을 하였더니, 더 조심스럽고 보존이 잘 된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이야기다.

광풍루 이층 누각은 잠겨 있는데 저 소주병은 신선이 내려와 마시고 갔을까?

가는 곳마다 잠겨있는 누각. 정말 바람직하지 않다. 이것은 관리자들이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이란 생각이다. 그렇다고 그 안에 못 들어갈까? 광풍루 이층 누각 마루에 소주병을 보면서, 이런 일이 얼마나 덧없는 관리인가를 묻고 싶다. 만일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을 했다면, 저렇게 소주병이 그곳에 있었을까?

‘천령’은 ‘하늘재’라는 소리이다. 지금의 경남 함양군이 바로 신라 때 명칭이 천령이었다. 신라 때는 속함군(速含郡), 또는 함성이라 칭하였으나, 신라 경덕왕 16년인 757년에 천령군으로 개칭하였다. 당시는 이곳이 육로를 이용해 다니기가 힘들었던 모양이다.

골이 깊으면 산이 높다고 했던가? 함양군에는 어느 곳 보다도 많은 정자들이 있다. 그만큼 이 곳의 산천경계가 좋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함양군의 곳곳에는 수많은 정자가 즐비하게 서 있다. 물이 있고 산이 아름다우면, 그곳에는 반드시 정자가 서 있기 마련이다. 함양군에는 정말 아름다운 정자가 많지만, 그 중에서도 손으로 꼽자면 난 당연 거연정을 머리에 둔다.


바위 위에 홀로 서 있는 거연정

거연정은 1872년에 지어졌으니, 130년 정도가 지난 정자이다. 정자의 연륜은 오래되지 않았으나, 화림재 전시서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7세손인 전재학, 전민진 등이 건립을 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지어진 거연정은 ‘내가 자연 안에 거하고, 자연이 내안에 거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팔정팔담(八亭八潭)이라고 했던가.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 거연정 앞을 흐르는 내에는 8개의 정자와 8곳의 소가 있었다는 곳이다. 그만큼 바위 암벽을 타고 흐르는 내는 절경을 만들고 있다. 중층 누각으로 지어진 거연정은 내부에 판방을 두고 있으나, 뒷벽의 판재만 남아있고 삼면의 문은 모두 없어져 버렸다.




바위에 부딪는 물소리, 선계가 따로 없어

비는 줄기차게 쏟아진다. 전날 밤에 많은 비가 내렸는지, 계곡을 차고 흐르는 물이 잿빛이다. 바위에 부딪는 물은 금방 밖으로 튕겨져 나간다. 저만큼 거연정이 보인다. 암벽 위에 홀로 서 자태를 자랑하고 있는 정자. 겹처마에 합각지붕을 이고, 자연 암반위에 그대로 올려놓았다. 건너편에서 구름다리로 연결해 건널 수 있도록 한 거연정. 멀리서 사진을 찍고 나서 다리를 건넌다.




물소리가 더욱 거칠다. 정자 뒤편 낮은 암반을 타고 흐른 물이, 깊은 소에서 춤을 추며 맴돈다. 빗소리가 절로 흥취를 자아내게 만든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발길을 멈춘 것이나 아닌지. 정자 안에는 여기저기 편액이 걸려있다. 저편 바위에는 붉은 글씨로 각자를 해놓았다. 정자 밑으로 내려가니, 이런 멋을 어디서 또 볼 것인가?

마음에 여유를 본다. 높고 낮은 바위를 그대로 이용해 많은 기둥을 세웠다. 기둥이 서기 힘든 곳은 층이 나게 주추를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올렸다. 앞뒤, 사방으로 물길이다. 그 물길 안에 거연정이 바람처럼 홀로 서 있다. 누구랴 이 아름다움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저만큼 한줄기 거센 물살이 몰려온다. 아마 저 위 바위틈에서 거연정의 경치에 반해, 길을 멈추고 있었나보다. 그 물길이 거연정으로 몰려들어, 소리를 내며 소 깊숙이 빨려 들어간다.



지금은 비록 낡고 퇴락한 정자. 그 흔한 단청 하나 하지 않은 맨살을 들어내고 있는 정자. 거연정은 경남 유형문화재 제433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비가 오는 날 찾은 거연정은, 그렇게 스스로를 물 위에 내보이고 있었다.


비가 오는 날은 답사를 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비가 오는 날이라고 해서 답사를 떠났는데, 그냥 쉬고 있을 수는 없다. 우비를 하나 구해 입었더니 온 몸에 땀이 흐른다. 바람이라고는 들어올 수 없는 비닐이고 보니, 온몸이 후끈거리고 금방이라도 몸에서 쉰내가 날 듯하다.

함양군은 정자가 많은 고장이다. 정자뿐 아니라 수많은 문화재가 자리하고 있다. 하루에 몇 곳을 돌아본다는 것은 쉽지가 않지만, 이곳을 둘러본 블로거 ‘바람 흔적 김천령’님이 동행을 해주는 바람에, 짧은 시간에 여러 곳을 돌아볼 수 있었다. 비는 내리고 전날 과음을 한 탓에 몸은 무겁지만, 그래도 쉴 틈 없이 돌아다녔다.


일두 정여창을 생각해 지은 군자정

군자정, 군자가 머무르던 곳이라 해서 붙여진 정자 이름이다. 군자란 일두 정여창을 말하는 것이다. 정여창(1450~1504)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요 학자이다. 1498년 무오사화에 연루가 되어 경성으로 유배되어 죽었으며, 1504년 사후에 갑자사회가 일어나자 부관참시를 당했다. 그러나 광해군 10년인 1610년에는 조광조, 이언적, 이황 등과 함께 5현의 한 사람으로 문묘에 배향되었다.

군자정은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에 소재한 경남 문화재자료 제380호이다. 이 정자는 정여창의 처가동네로, 이곳에 들려 유영을 할 때는 군자정이 있는 영귀대를 자주 찾았다고 전한다. 정선 전씨 입향조인 화림재 전시서의 5세손인 전세걸이, 일두 정여창을 기념하기 위해 1802년 군자정을 지었다고 하니 벌써 200년이 지난 정자이다.


자연암반을 그대로 주추로 삼아 정자를 지었다.

자연암반을 그대로 이용한 군자정

군자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자이다. 아래는 자연 암반위에 그대로 기둥을 놓았다. 주추를 사용하지 않고 암반을 주추로 삼은 것이다. 팔작지붕으로 지어진 군자정은 아래를 조금 높은 기둥을 세우고, 짧은 계단을 이용해 정자로 오를 수 있도록 하였다. 정자로 다가가니 앞으로 흐르는 내는, 비가 온 뒤라 물이 불어 소리를 내면서 흐른다. 주변은 온통 바위로 되어 있는데, 이런 아름다운 풍광을 즐겼던 것 같다.

정자 안에는 여기저기 작은 편액들이 걸려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나 많은 시인묵객들이 거쳐 갔을 것이다. 정자는 난간을 둘러놓았으며, 계단은 오래도록 보수를 하지 않은 듯 아래쪽이 다 썩어버렸다. 기둥에는 음식물을 반입하지 말라고 적혔는데, 주변 음식점들이 이곳에서 손님을 받는다고 귀띔을 해 주는 사람이 있다.



정자 안에는 많은 편액들이 걸려있다.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군자정은 아름답다.

문화재주변에 늘어놓은 술병 불쾌해

주변 경관이 아름다운 군자정. 가까이 다가가보니 참 가관이랄 밖에. 주변에 음식점이 있는데 이곳에서 손님이라도 받았는지, 재떨이로 썼을 그릇들이 정자 밑에 보인다. 한편에는 바위에 빈 술병을 늘어놓았다. 여기가 아니라고 해도 술병을 모아놓을 공간은 얼마든지 있는데, 하필이면 문화재 옆에다가 놓은 것일까?


군자정 옆에 빈 술병들이 늘어서 있어 볼썽사납다. 계단도 보수가 시급한 편이다.

문화재는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보존해야 한다. 꼭 담당을 하는 공무원들만이 보존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저렇게 많은 술병들이 늘어서 있다면, 어제 오늘 놓아 둔 것이 아닐 텐데 아무도 관리를 하고 있지 않은 것일까? 하루 빨리 이런 볼썽사나운 모습이 사라졌으면 한다. 말로만 하는 ‘문화대국’이나 ‘문화국민’이란 소리가 이젠 듣기조차 역겹다.

 

문경시에서 59번 도로를 따라 김룡사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문경시 산북면 이곡리라는 마을을 만나게 된다. 고갯길을 넘어서 내려가다가 보니 다리를 건너 삼거리가 나오고, 그 전 좌측에 정자가 서 있다. 주변은 숲이 울창하고 정자의 앞과 옆으로는 내가 흐르고 있다.


지금은 도로가 발달하는 바람에 이 정자의 운치가 감소되었겠지만, 예전에는 나름대로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차에서 내려 내를 건너 정자 가까이 다가갔다. 정자 앞면에 붙인 현판에는 <석문정(石門亭)>이라고 적혀있다.



구곡원림에 서 있는 정자

문경의 구곡원림 가운데 하나인 ‘석문구곡’은 아름다운 경치를 지니고 있는 곳을 말한다. 그 중에서 가장 마지막인 제9곡은 도화동을 뜻하며 석문구곡의 옛 지명은 ‘문경 대도촌 아천 상류’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이 아천 상류가 바로 현재 문경시 산북면 이곡리 일원이라는 것이다.


내를 건너 석문정으로 돌아가는 길에 커다란 석비 한기가 서 있다. <이곡마을 숲>이라고 적힌 석비 앞으로는 맑은 냇물이 소리를 내고 흐르고 있다. 숲과 암벽이 어우러진 냇가는 일품이다. 정자로 올라가니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지어진 정자는 규모는 크지 않으나 나름대로 운치가 있다.





정자는 비탈진 경사면에 지어 앞쪽으로는 밑기둥을 세워 올려놓았다. 높은 난간을 두르고 두 칸의 방을 마련했다. 방 앞과 옆면에는 누마루를 깔았으며, 팔작지붕으로 멋을 더했다. 정자 안에는 중수기를 비롯해 두어 개의 게판이 걸려있다.


길손 잃은 정자

방은 온돌을 놓을 것을 보니 정자는 사시사철 주인에 의해 이용이 되었을 것이다. 주변 경관으로 보나 정자의 형태로 보나 꽤 세월이 흐른 것 같은데, 아무런 설명을 한 간판이 서 있지 않다. 문경시 홈페이지에 들어가 찾아보아도 자료가 나오지를 않는다. 결국은 문화재로 지정을 받지 못해 이렇게 방치를 한 것이려니 생각하니, 조금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예전에는 이곳을 찾은 많은 사람들이 시 한수라도 읊었을만한 곳이다. 그런데 주인 잃은 정자 석문정은 찾아드는 길손도 없는 것일까? 정자 한 동을 지으려면 많은 예산이 들어야 하거늘, 이렇게 좋은 풍광에 자리한 정자가 점점 퇴락되어 간다는 것이 마음이 아프다. 처음 이 정자의 주인은 석문정을 짓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였을까? 단청도 되지 않은 정자는 그 나름대로 단아한 멋을 지니고 있건만, 이제는 시인도 나그네도 찾아들지 않는 것만 같다.


많은 사람들은 문화재로 지정이 된 것에만 관심을 갖는다. 하지만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곳에는 이러한 정자 하나쯤은 반드시 있었다. 문화재로 지정을 받지 못한 많은 정자와 누각들이 망가져 가고 있는 현실이 마음이 아프다. 오늘 석문정은 그렇게 길손마저 끊긴 채 외로이 서 있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