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이 다섯 그루의 괴목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하여 이름을 ‘오괴(五槐)’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인지. 주변으로는 잎을 다 떨군 오래 묵은 괴목들이 서 있다. 그저 지금은 그리 절경도 아니고, 아름다운 정자도 아니다. 하지만 이 정자는 처음에 이곳에 정자를 이룩한 이후 벌써 5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전북 임신군 삼계면 삼은리에 있는 오괴정(五槐亭)은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67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오괴정은 조선조 명종즉위년인 1545년에 처음으로 오양손이 지었다. 그 후 후손들이 1922년에 고쳐지었다.

 

 

사화를 피해 낙향한 오양손

 

전국 이곳저곳을 답사하다가 보면 만나게 되는 수많은 정자들. 그 정자 하나같이 사연이 없는 정자는 없다. 모두 다 그럴만한 사연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정자 하나가 다 소중한 것이다. 물론 그 정자를 짓는 사람들이나, 어느 누구를 생각해 후에 정자를 짓기도 한다.

 

오괴정 또한 그럴만 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해주 오씨로 처음 삼계리에 들어온 오양손은 김굉필의 문인으로 참봉을 지냈다. 오양손은 중종 14년인 1519년 기묘사화 때 조광조 등 많은 문인들이 화를 입는 모습을 보고, 경기도 수원과 남원 목기촌으로 은거하였다가, 중종 16년인 1521년에 삼은리로 들어왔다.

 

후학을 가르치고 술과 시로 벗을 삼아

 

삼은리로 낙향한 오양손은 이곳에 오괴정을 짓고, 시와 술을 벗 삼으며, 후학들을 가르쳤다. 오괴란 다섯 그루의 괴목을 심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오괴정은 보기에도 고풍스럽다, 정자 주변에는 커다란 괴목들이 있어, 이 정자의 예스러움을 더욱 느끼게 해준다. 또한 정자 벽에 걸려있는 게판들은 칠이 벗겨져 있어, 오랜 시간이 지난 정자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전라북도 지역의 정자들이 다 그러하 듯, 오괴정 역시 정자 가운데는 방을 두어 운치를 더했다. 이 지역의 정자들은 대개가 이렇게 한 칸의 작은 방을 들였다. 아마도 정자와 집을 따로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정자에 오르면 앞으로 흐르는 작은 내와 펼쳐진 밭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절경은 아니라고 해도, 주변 괴목이 우거지면 한 폭의 그림과 같을 것이다. 오양손은 이곳에서 술과 시를 벗 삼고, 후학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아마 권력의 회오리 틈에서 모든 것을 다 놓아버리고, 마음 편하게 일생을 자연과 더불어 살았나보다.

 

 

세월은 흘러도 주인의 이야기는 남는 법

 

세월의 무상함은 마음을 비워버린 정자 주인을 읽고, 봄날 스쳐가는 바람만 괴목가지를 흔들고 있다. 우리 선조들이 유난히 정자를 좋아한 것도, 알고 보면 먼 훗날 자신의 이야기를 남기고 싶은 것은 아니었을까? 수많은 정자들이 간직하고 있는 사연을 보면, 그 정자를 지은 이들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으니 말이다.

 

그저 절경도 아니고, 그렇다고 특별하게 지어진 정자도 아니다. 오양손이라는 인물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양손은 중종이 경연을 별설하여 그와 더불어 강론을 할 정도로 문장덕행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오양손의 자는 계선, 호는 둔암이다. 한양에서 출생하여 한훤당 김굉필의 문인으로 사재 김정국과 동문수학하였다. 일생동안 경의를 논하고 성리학에 참잡했다. 사림파간에도 그의 문장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졌으며, 조정에도 그의 실력이 알려져 순릉참봉에 제수되었다.

 

정자 하나가 아름답다는 것만으로도 찾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 정자에 얽힌 수많은 사연들이 있기에 찾아가는 것이다. 정자의 아름다움만 이야기를 한다고 하면, 그 무슨 의미가 있으리오. 오늘도 길가에 오롯이 서 있는 작은 정자 하나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은, 그 정자에 얽힌 사연 때문이다.

개울가에 자리를 잡은 정자 하나. 그저 바라다만 보아도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지붕을 보니 돌을 편을 떠 만든 너와지붕이다. 정자를 수도 없이 보아왔지만, 너와지붕은 좀처럼 보기가 힘들다.

 

그것도 나무가 아닌 점판암 판돌을 이용한 너와지붕 정자는 아마 처음인 것 같다. 그 돌의 무게를 버티기 위해서 작은 정자 안에 기둥이 더 촘촘히 서 있어, 오히려 그런 점이 이 정자의 멋을 더한다. 앞으로 흐르는 개울물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영모정은 그렇게 한가한 모습이었다.

 

 

효행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정자

 

진안군 백운면 노촌리 개울가에 자리를 잡고 있는 영모정은 전면 4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을 이루고 있다. 효자 신의연의 효행을 기리고 본받기 위해서 고종6년인 1869년에 세워졌다. 그 뒤 몇 차례 중수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나, 자세한 내역은 알 수 없다.

 

현재는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5호로 지정이 되어있다.정자 안으로 들어가니 누정의 남쪽내부 중앙에는 永慕亭과는 달리 '永碧樓'라고 쓰인 현판이 걸려있어, 이 정자의 아름다움에 많은 사람들이 취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상량문은 가선대부 이조참판을 지낸 윤성진이 지었으며, 『진안군지』에 영모정기가 게재되어 있다.

 

 

귀부를 주추로 산은 영모정

 

영모정 아래로 내려가다가 보니 정자의 아랫부분 네 기둥에는, 거북머리 모양의 원형주춧돌을 사용하고 있다. 아마 물가에 있기 때문에도 그리했겠지만, 장수를 기원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음이 아니겠는가? 개울가로 향한 정자 정면에 있는 4개의 평주는,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건립된 까닭에 다른 것 보다 1m정도 더 내려와 있다.

 

개울을 건너 영모정을 바라다본다. 개울 물속에 또 하나의 영모정이 드리워져 있다. 건너편에서 바라본 영모정은 주변 경관과 어울러져 더욱 아름답다. 이런 절경 속에서 정자에 올라 그 아름다움에 취해다보면, 저절로 마음이 편안해질 것 같다. 그래서 신의현의 효행을 본받을 수 있지는 않았을까? 녹음이 짙게 드리워지면 이곳을 다시 한 번 찾아보아야겠다. 아마 지금보다 더 멋진 영모정이 기다리고 있지 않겠는가?

 

차가운 바람에 개울물에 빠지다

 

답사를 하다가 보면 아주 가끔은 황당한 일을 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곤욕을 치루기도 한다. 영모정을 찾았을 때도 참으로 민망한 꼴을 당한 셈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저 웃어버릴 수 있는 일이었지만, 당시는 보는 이들도 없는데도 낯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마도 한 겨울이었다고 한다면, 다시는 답사를 하지 않겠다는 이야기까지 나왔을 것이다.

 

영모정을 촬영하다가 보니, 괜한 욕심이 난다. 바로 내를 건너가서 물과 함께 사진을 찍겠다는 욕심을 낸 것이다. 가을이라면 개울물에 아름답게 단풍이 함께 느리고 있어서 그렇다고 하겠지만, 삭막한 가지에 잎도 없는 모습을 찍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인지. 주변을 둘러보아도 마땅히 건널 길이 보이지 않는다.

 

 

할 수 없이 물이 조금 흐르고 있는 방둑처럼 생긴 위로 조심스럽게 건너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이런 곳엔 상당히 미끄럽다. 조심을 한다는 것이 오히려 긴장이 되었나보다. 그만 발이 미끄러지면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것도 물속으로. 그 중에도 카메라가 젖었을까봐 걱정을 하고 있었다니. 참 답사는 가끔 사람을 이렇게 이상하게 만드는가 보다.

 

영모정을 아마 앞으로도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만 같다. 물속에 비친 그림자며, 귀부처럼 생긴 주춧돌이며, 또 돌로 뜬 너와지붕까지.

앞으로는 맑은 물이 흐르고, 바위와 각종 꽃나무들이 함께하는 정자 광제정.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30호인 광제정은 임실군 삼계면 세심리에 자리하고 있다. 광제정은 조선 초기에 양돈(1461∼1512)이 후천리 광제마을에 처음 지었으며, 지금 건물은 양돈선생의 후손 양성모가 1871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광제는 양돈선생의 호다. 양돈선생은 서울에서 생원, 진사를 지내다가 무오사화를 피해 아산방(현재, 봉현리)에서 은거하였는데 문장과 덕행이 뛰어났다고 전한다. 성종 9년인 1478년에 소과에 합격한 양돈선생은 남효온 등이 천거하여 조정에서 여러 차례 관직을 내렸으나, 모두 사양하고 이곳에서 자연을 벗 삼으며 여생을 보냈다.

 

 

벼슬도 마다한 광제 양돈선생

 

양돈선생이 죽자 마을 사람들은 그의 학식과 덕망을 추모하기 위해 정조 12년인 1788년에 아계사(阿溪祠)를 지어 위패를 모셨다고 한다. 그만큼 당시 선비들은 양돈선생의 덕목을 흠모하였던 것 같다. 정자 안에 걸린 게판에는 김인후, 기정진 등이 남긴 글이 걸려 있다.

 

광제정을 찾은 것은 요즈음 세태에 젖어든 마음을 씻기 위해서다. 이제 대선이 며칠 밖에 남지 않았다. 새 내각을 구성하게 되면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높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자신의 허물까지 억지로 덮어가면서 난리를 피우는 모습을 보일까 궁금하다.

 

 

양돈선생은 그렇게 주변사람들이 그 문장과 덕행이 아까워 벼슬길에 오를 것을 종용하였으나, 끝내 사양을 하였다고 하지 않던가? 더욱 이곳이 ‘세심리’라니. 마음을 깨끗이 닦아내어, 그런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물질과 권세에 초연하고 싶어서였나?

 

요즘 사람들이 배워야 할 덕목

 

사람들은 누구나 다 출세를 지향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자리에 앉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적당히 배를 불릴 수 있으면 마다하지 않고, 주변 것들을 먹어치운다. 참 그 배는 많이도 들어가는가 보다. 그러나 오늘 광제정의 주인 양돈선생은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이룰 수 있는 자리를 준다고 하는데도 마다하지 않았던가.

 

 

요즘 사람들은 이런 선생을 바보라고 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세상이 변했으니 그것과는 관계가 없노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양돈선생은 그러한 모든 것이 부질없는 것임을 일찍 알고 계셨던 것이 아니었을까? 아마도 한창 열을 올리며 대선후보 주변에서 얼굴굳히기에 들어간 많은 사람들이, 양동선생의 마음만 같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전라북도 지역 정자의 특징 그대로 지녀

 

광제정을 한 바퀴 돌아본다. 크지 않은 정자는 바위 곁에 올려놓았다. 정자의 가운데 방을 마련하고, 사방을 마루로 놓았다. 천정은 중앙부분이 아래로 돌출되었는데, 양편에서 달려드는 용머리가 그 속으로 들어갔다. 희한한 것은 그 용의 몸 등에 붙어있는 거북이다. 왜 거북이를 이곳에 두었을까?

 

 

세상사 싫어지면 그 거북이 등에 올라타 멀리 떠나고 싶은 것이었을까? 아니면 자연을 벗 삼아 더 오래 살고 싶어서였을까? 광제정 곁을 흐르는 냇물은 맑기만 한데, 냇가에 커다란 노거수 위에 한 마리 이름 모를 새가 퍼덕이며 날아간다. 아마 곧 닥칠 눈보라를 피해 어디 깊은 산속으로라도 들어가려는 것인가 보다.

정자(亭子)는 아름답다. 정자라는 것은 대개가 세도하는 사람들이나, 동계(洞契)모임 등에서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곳에다가 짓기 때문에, 주변과 어우러진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나라의 절경에는 많은 정자가 있고, 그 정자에는 이런저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몇 년간 정자 기행을 하면서 참으로 아픈 역사를 가진 정자를 만났다. 갑오농민혁명의 현장을 취재하면서 보니 두 곳의 정자가 있다. 그 외에도 많은 정자가 있으나, 이곳은 오래전에 세운 것이 아니라고 해도 뜻이 깊은 곳이기에 더욱 마음에 닿는다.

 

 

그저 그곳에 있어야 할 만석정

 

그 중 하나는 이평면 예평마을에 있는 만석정이다. 만석정은 갑오농민혁명을 일으키는 불씨가 되었던 곳이다. 만석보터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좌측으로 안길수의 만석보혁파비가 서 있다. 만석보혁파비는 1892년 고부군수로 부임을 한 조병갑이 만석보를 만들고, 농민들에게 무리한 조세를 수취한 장소이다.

 

배들평야의 농민들은 이것에 불만을 품고 고부관아를 습격하였는데, 이것이 갑오농민혁명의 발단이 되었다. 그 후 광무 2년인 1898년 고부군수로 부임한 안길수가 만석보를 완전히 혁파시켰다. 농민들은 그 뜻을 감사히 여겨 9월에 만석보혁파비를 세웠다.

 

만석정은 그 혁파비 바로 곁에 서 있다. 그저 단청도 하지 않은 정자. 그리고 지은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수수히 서 있는 모습이지만, 그 안에는 농민들의 정감어린 마음이 있다. 그리고, 그 정감어린 마음속에는, 1894년 갑오농민혁명을 일으킨 끓는 피가 있어 더욱 애틋한 마음이 드는가 보다.

 

 

갑오농민혁명의 장서에 선 말목정

 

또 하나의 정자는 바로 정읍시 이평면 면사무소 곁에 있는 말목정이다. 말목정은 만석정과는 달리 단청이 되어 있고, 잘 가꾸어진 모습이다. 말목정은 원래 현재 전라북도 기념물 110호인 말목장터와 감나무 곁에 서 있었던 것을, 70m 정도를 옮겨 현재의 자리에 지어 놓았다. 말목정은 삼강오륜의 정신 계승과 실천으로, 살기 좋은 고장을 만들기 위한 뜻을 갖고 세워졌다고 한다. 현재의 말목정은 원형 그대로를 옮겨놓은 것으로, 2002년 7월에 이전하였다.

 

말목정은 옮겨지기 전에 감나무 곁에 서 있었다. 이곳은 1894년 1월 전봉준 선생이 농민군수 천명을 모아 놓고, 고부군수 조병갑의 비리와 포악한 실상에 관해 일장 연설을 한 곳이다. 전봉준 선생은 이곳에서 농민봉기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고부관아를 습격하였다. 말목정은 그러한 곳에 1994년 지어진 정자이다.

 

전봉준 생가

 

고부농민혁명의 자리에 선 두 곳의 정자. 아름다운 곳에 서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말목정과 만석정은 깊은 뜻을 갖고 있다. 비록 그 서 있는 곳이 장터 앞과 만석보터 앞이긴 하지만, 어느 정자보다도 의미가 깊다고 하겠다. 갑오농민혁명을 찾아 떠난 길에 만나 두 곳의 정자. 정자 위에 오르니 감회가 새롭다.

 

지난날의 피의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어린 아이 두서넛이 모여 맴을 돌며 뛰어다닌다. 그래, 그곳에서 너희 선조들은 피를 흘리며 이 땅과 삶을 지켜내었으니, 너희들이야 말로 그렇게 뛰놀 자격이 충분하지 않겠느냐? 앞으로 또 너희 중에 누가 이곳에서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이곳을 근거지로 농민운동을 할지도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한 해의 끝자락이 가까워 오는 날에 만난 정자, 높다란 하늘에 뭉게구름 한 덩이가 한가로운 날이다.

 

전주천에 걸린 남천교가 허름한 옛 모습을 버리고 새롭게 태어났다. 차량들이 통행할 수 있는 다리 한편에, 커다란 팔작지붕의 정자를 올려놓아 새롭게 조성을 한 것이다. 총 연장 82.5m의 길이에 왕복 4차선으로 조성을 한 남천교. 그 다리 위에 지어진 정자는 멀리서보면 마치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무지개다리(홍예교)로 조성한 남천교는 동서학동과 교동을 잇는 전주천에 걸린 다리다. 이 다리는 한옥마을의 관문으로 앞으로 전주의 새 명소가 될 것으로 보인다.

 

홍예교로 조성한 남천교는 가운데로 전주천이 흐르고, 양편으로는 산책로가 나 있다.

자연천으로 조성한 전주천. 남천교 위에서 바라본 정경이다.

 

누각을 떠받들고 있는 남천교는 길이 82.5m에 폭 25m 크기로, 옛 오룡홍교의 모습을 담은 전통성과 한옥마을 초입의 관문성, 조망성, 공간 효율성을 반영한 3경간 아치교량 구조로 가설했다. 중앙으로는 전주천이 흐르고, 양편으로는 전주천을 걸을 수 있는 산책로를 내어놓았다. 가을이 되면 전주천 주변을 가득채우는 억새와 함께 더욱 아름다운 모습을 보일 듯하다.

 

남천교 위에 자리한 정자는 지난해 10월초 12억6천만 원을 들여 길이 27.5m에 폭 4.8m, 높이 6.53m 규모에 팔작지붕 형태로 건립되었다. 누각에 사용한 기둥과 지붕, 석가래 등 모든 재료는 국내산 육송을 사용했다.

 

남천교 위에 조성한 정자. 길이 27.5m나 되는 웅장한 정자이다.

팔작지붕으로 조성한 정자는 기둥과 지붕, 석가래 등 모든 재료는 국내산 육송을 사용했다.

 

옛 남천교는 한국전쟁 이후인 1957년 12월 전주천 상류에 준공된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교량으로, 완산구 교동~서학동은 물론 인근 임실, 순창, 남원 등지로 오가는 가교로 자리해왔다. 그러나 가설된 지 50여년이 지나면서 낡고 오래돼 최근 한옥마을 일대 관광객과 주민, 차량 통행이 날로 늘어나자 이를 철거하고 새로운 교량의 건설에 나섰던 것이다.

 

4일 오후, 갑자기 무더워진 날씨에 사람들도 늘어지고 있는데, 남천교 아래에는 일가족인 듯한 사람들이 전주천에서 열심히 무엇인가를 잡고 있다. 자연천으로 깨끗하게 조성한 전주천에서 올갱이를 잡고 있다고 한다. 맑은 전주천과 남천교, 이제 또 다른 전주의 명소로 자리를 할 수 있을지 기대가 된다.

 

 남천교 밑을 흐르는 전주천에서 가족들이 올갱이를 잡고 있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