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시 읍내동 159번지에 소재한 온주아문 및 동헌은 조선시대 온양군의 관아 건물이다. 동헌의 뒤로는 낮은 남향의 야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문은 동헌의 문을 말하며, 현판에는 「온주아문(溫州衙門)」이라고 써 놓았다. 이렇게 명칭을 붙인 것은 신라 문무왕 3년인 663년에 이 군의 명칭을 온주라 붙인 데서 비롯한 것이다.

 

온주아문의 문루는 이층의 누각으로 되어 있다. 문은 모두 장대석으로 기단을 깔고, 그 위에 사각형의 기초석을 갖춘 높이 1.5m 정도의 주형 주초를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웠다.

 

고종 8년인 1871년에 중건한 아문은 모두 세 칸으로 마련을 하였으며, 우측으로는 누대 위로 오를 수 있는 계단을 놓았다. 그러나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로, 이 곳 누대로 오르는 계단 위도 자물통이 채워져 있다. 문화재의 보존을 위함이지만, 차라리 관리자를 두고 위로 오를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듯하다.

  

▲ 온주아문 온주아문에 걸린 현판. 이곳이 신라때 온주였기 때문에 그 명칭을 그대로 사용한 듯하다.

 
▲ 잠긴 문 이층 누각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자물통으로 잠겨있다.

 

원형 복원을 마친 동헌

 

동헌은 아문을 들어서면 뒤편에 서 있다. 현재 이 문화재 지역 안에는 동헌건물과 아문 두 동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이 동헌의 건물은 조선조에는 온양군의 동헌으로 쓰이다가, 일제 때인 1928년부터는 일제의 주재소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광복 후에는 파출소로, 1986년 시 승격 후에는 20년 간 온주동 동사무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렇게 많은 이용을 하면서 그 원형이 심하게 훼손이 되었다.

 

정면 6칸 측면 2칸의 동헌은 장대석을 쌓아 기단을 마련하고, 동헌을 바라보면 좌측 한 칸은 돌출된 방을 놓았고, 다음 두 칸의 방과 두 칸의 대청, 그리고 한 칸의 방을 두었다. 좌측의 한 칸의 방을 빼면 대청 앞으로 낸 툇마루로 모두가 연결이 되어 있다. 그동안 동헌은 여러 차례 중수를 하였으며, 1993년 4월 예산을 들여 1995년 5월에 원형대로 복원을 하였다고 한다. 

 

『여지도서』 온양군 공해조에 보면 동헌 10칸, 아사 23칸, 객사 37칸, 무학당 3칸, 향청 12칸 등 건물이름과 칸수가 기록되어 있어, 온주 동헌의 옛 모습이 상당한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 동헌 원래는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아문과 동헌 두 동만이 남아있다

 
▲ 경고문 동헌의 방문 등에 하얀쪽지가 경고문구다. 여기저기 많이도 보인다.

 
▲ 들어가십시오 '들어가지 마십시오'란 문구를 글자를 지워놓아 '들어가십시오'가 되었다.

 

문화재 훼손이 징역 2년 이상이면, 관리 소홀은?

 

동헌을 한 바퀴 돌아보니, 여기저기 보수를 해야 할 곳들이 보인다. 겨우내 손을 보지 않았는지 동헌 뒤편 배수로의 축대 돌들은 무너져 내리고, 문을 바른 창호지는 누군가 일부러 찢었는지 모두 너덜거린다. 마루에 '들어가지 마십시오'리고 쓴 푯말은 '지'와 '마'를 지워놓아 '들어가 십시오'란 푯말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이렇게 훼손이 된 창호의 밑에 무엇인가가 안팎으로 붙어 있다. 글씨를 보니 건조물 파괴, 창살문, 창호지 훼손 등 문화재를 파손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징역 2년 이상에 처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관리소홀인 담당자는 어떻게 처벌을 해야 할까? 물론 사람들이 드나들면서 양식 없이 하는 행동이 문화재를 훼손한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이렇게 경고성 문구를 여기저기 수도 없이 붙여놓은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훼손이 징역 2년 이상이라는 문구를 적었다면, 관리 소홀도 그와 상응하는 처벌을 해야 하지 않을까?

 

▲ 무너진 배수로 배수로의 축대가 무너져 내렸다. 겨우내 한 번도 관리를 하지 않았는지.

▲ 창호 심하게 찢어져 걸레가 된 창호

▲ 경고 관람객들에게만 경고를 할 것이 아니라, 관리소홀을 한 사람들이 먼저 경고를 받아야 할 판

 

소중한 우리의 문화재를 온전히 관리보존을 하기 위해서는, 경고성 문구나 무조건적인 잠그기보다는, 온전히 관리를 할 수 있도록 인원배치가 우선이다. 매번 들어가는 보수비용만 갖고도, 그런 지킴이 한 명 정도의 인원을 쓸 수 있는 예산은 충분하단 생각이다. (출처 : 오마이뉴스 / 2010, 3, 7)


괴산군 청안면 효근리 385 보안사 대웅전 안에 자리한, 충북 문화재자료 제22호인 보안사 석조여래좌상. 1957년 경에는 노천의 석단에 모시고, 사람들이 찾아와 불공을 드리고는 했단다. 1997년 현재의 법당을 짓고 그 안에 주존불로 모셔놓았다. 보안사를 찾아 안으로 들어가니 석불에 금분을 입혀, 원래의 석불로서의 상태가 아니라 조금은 아쉬움이 든다.

 

얼굴에 비해 어깨가 왜소해 보이는 이 석조여래좌상은 턱을 내리는 등 조금은 위축된 듯한 표현을 하고 있다. 반가사를 착용한 점 등으로 볼 때 그 시기가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정신없는 문화재 주변

 

▲ 문화재 앞 문화재 주변에 늘어놓은 소불들이 문화재의 가치를 반감시키지는 않는지

 

석불좌상의 앞으로는 작은 소불들이 놓여있다. 주변에 즐비한 이런 소불들이 막혀있어, 정작 문화재를 찬찬히 훑어보기에는 난감하다. 문화재 답사를 다니다가 보면 가끔 이런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정작 소중한 문화유산을 보기 위해 찾아갔는데, 이런저런 것들을 늘어놓아 정신이 없을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보안사 석조여래좌상은 높이가 117cm이다. 금분을 입히지 않았으면 더 정확한 모습을 볼 수 있을 텐데, 이렇게 금박을 입혀놓아 오히려 문화재의 가치가 떨어지지 않았는지 우려가 된다. 광배나 연화대는 없으나 석불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문화재인 보안사 석조여래좌상. 법의를 반가사로 입은 것도 특이하다.

 

약사여래불로 보이는 석불좌상

 

▲ 얼굴 육계와 백호가 뚜렷하다. 얼굴은 둥근편으로 위엄이 있다. 그러나 금박을 두텁게 입히고 그려넣어 본래의 모습은 알기가 어렵다.

▲ 수인 수인으로 보아 약사여래불로 추정한다.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보안사 석불좌상은 미간의 백호가 뚜렷하다. 안면은 칠을 하고 눈썹과 입술 등을 그려 넣어 정확한 모습을 가늠할 수가 없다. 하지만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귀는 길게 내려져 어깨에 닿았고, 코는 큼지막하다. 얼굴은 전체적으로 크고 둥근 편이며, 훼손이 되지 않았다. 법의는 우견편단으로 반가사로 표현을 하였고, 왼쪽 가슴에서 내려진 옷의 주름은 무릎까지 덮고 있다.

 

법의가 끝나는 곳에 양쪽 발바닥이 노출이 되어있으며, 전체적으로 보면 위엄을 보이고 있다. 다만 금칠이 너무 두터워 무겁고 탁한 감을 준다. 수인은 오른손은 무릎 위에 놓고, 왼손을 펴서 손바닥을 위로 향하고 있다. 손바닥이 이렇게 위로 올려진 것은, 손바닥 위에 물체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아마 약병을 든 약사여래불로 추정된다.

 

문화재의 원형보존은 절대적으로 중요해

 

▲ 귀 귀는 길게 느려트려 어깨까지 닿았다. 전체적으로 육중한 느낌을 준다.

▲ 가사 반가사를 입은 모습이 특이하다.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소중한 문화재의 원형보존은 중요하다. 문화재가 어느 시기에 일부 훼손이 되었다고 하면, 철저한 고증을 거쳐 훼손이 된 부분을 보수해야만 한다. 그러나 답사를 다니면서 보면 전혀 고증을 거치지 않은 이상한 형태로 보수를 하고 있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보는 문화재임을 감안할 때, 이러한 형태는 보존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문화재를 더 가치 없게 만드는 행위라는 생각이 든다.

 

소중한 우리의 문화재보존. 물론 보안사의 석불좌상도 허락을 받고 금분을 입힐 것이겠지만, 이렇게 원형을 바꾸어 놓는다면, 참다운 문화재 보존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소중한 문화재의 주변에 어지럽게 진열한 많은 전시품들이, 오히려 문화재의 가치를 훼손한다면 과감히 법적 제도를 만들어서라도 막아야 할 것이다. 소중한 보안사의 석불좌상이 오히려 그 가치가 반감이 되기 때문이다. (출처 : 오마이뉴스 / 2010, 2, 27)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옥천리 479번지 작은 사랑이라는 집골목에는, 당간지주 하나가 서있다. 원래 당간지주는 두 개가 한 쌍이지만, 이곳 당간지주는 한 개만이 외롭게 서 있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나머지 한 개는 일제강점기에, 당시 일인 경찰서장이 당간지주 중 한 짝을 양평읍 양근리 소재 갈산으로 옮겨, 자기네의 황국신민서사를 새겨 세웠다고 한다. 마을주민들의 증언에 따라 갈산 일대를 찾아보았으나, 아직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또 일설에는 일본으로 가면서 가져갔다고도 이야기들을 한다.

 

아직도 길에 눈이 많이 쌓여있어 미끄럽다. 앙평군의 사나사를 찾아보고, 옥천면에 들려 문화재의 위치를 확인하고 길을 나섰다. 그러나 두 개의 당간지주가 서 있어야 하는데, 영 찾을 길이 없다. 마침 지나는 마을 분에게 물으니 친절하게 안내까지 해주신다. 원래는 옥천리 논 가운데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는 것이다.

 

당간을 보는 순간 화가 치밀어

 

그런데 당간을 보는 순간 참으로 어이가 없다. 당간은 현재 양평군 향토유적 재8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그런데 안내판 앞에 개를 매어 놓아 안내판이 가려졌다. 안내판 전체를 읽을 수가 없다. 더구나 하나 남은 당간에는 눈이 밑 부분의 원공까지 덮어버렸다. 길을 치우면서 당간에 눈을 쌓아놓은 것이다. 눈을 치우고 나서 원공을 찍으려는데, 묶어놓은 개가 허연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린다. 이래서야 어디 문화재 답사를 제대로 할 수나 있을까?

   

현재 하나뿐인 당간지주도 원래의 간대와 기단은 소멸이 되었단다. 최근에는 시멘트와 석축으로 보수를 해 놓았다고 하는데, 눈이 쌓여 확인할 수가 없다. 옥천리의 당간지주는 높이가 305cm, 폭 50cm, 두께 36cm 정도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이곳 옥천리와 인근 용천리에 신라 말과 고려 초에 대원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대로라면 이 당간지주는 신라말 고려초에 세운 가치 있는 문화재라는 것이다.

 

▲ 안내판 개집을 당간과 문화재 안내판 사이에 놓아 안내판을 읽을 수가 없다. 어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을까?

 
▲ 안내판 개집을 당간과 문화재 안내판 사이에 놓아 안내판을 읽을 수가 없다. 어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을까?

 

소홀한 문화재관리 마음 아파

 

문화재 안내판과 당간지주 사이에 놓인 개집, 그리고 치운 눈을 가득 쌓아올린 당간. 참으로 어이가 없다. 한 개의 당간을 잃어버린 것도 마음이 아픈데, 꼭 이렇게 문화재 옆에다가 개까지 묶어놓아야만 했을까? 새삼 우리 문화재의 현실에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문화재이거나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그런 소중한 문화재를 이렇게 홀대하고 있다니. 세상 어느 나라가 이렇게 자신들의 문화재를 함부로 방치하고 있는지, 아마 아무데도 이렇게 방치를 하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이다.

 

▲ 원공 당간지주의 가운데 뜷려있는 원공. 당간을 고정시키는데 쓰인다.

▲ 개와 당간 당간의 안내판에는 게집을 놓고, 눈은 당간지주에 쌓아 놓았다.

 

치운 눈을 쌓아놓아, 당간의 지주부분은 확인조차 할 수가 없다. 문화재의 소중함을 생각한다면, 딴 곳과는 달리 이곳의 눈부터 치워야함에도 불구하고, 눈을 갖다가 쌓아올린 모습. 마음이 아프다. 우리는 어쩌다가 이렇게 소중한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뒤떨어진 것일까? 추운 날 서둘러 나선 답사 길에서 마음만 아파 돌아온다. (출처 : 오마이뉴스 / 2010, 1, 8)



여주 고달사지의 동쪽으로 가면 산을 오르는 계단이 있다. 이 돌 계단을 오르면 국보 제4호인 고달사지 부도를 만난다. 이번까지 3번을 이 부도를 보았지만, 볼 때마다 놀라움으로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고달사지 부도는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팔각원당형의 이 부도는 천년 세월을 제 모습 그대로 지켜내고 있는 소중한 문화재다.

 

난 이 고달사지 부도를 만날 때마다 우리 조상들의 예술적 감각에 늘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것은 이 부도가 아직도 완전한 모습을 지켜내고 있기 때문이다. 팔각으로 된 하대석의 연꽃무늬와, 중대석의 용과 구름은 아직도 생생한 모습 그대로다. 중대석의 용은 힘차게 부도를 감고 있다. 용의 무늬 중 불꽃이 타오르는 여의주를 두발로 감싸고 있는 조각은 가히 압권이다. 두 마리의 용이 꼬리를 서로 감고 있는 모습도 생동감이 넘친다. 많은 부도를 보았지만 이런 멋진 조각을 해놓은 것은 그리 많지가 않다.

 

  
▲ 고달사지 부도 중대석에 새긴 용머리에서 고려 초기 부도의 특징이 보인다

  
▲ 부도 부도에 새겨진 용의 조각. 발로 불꽃이 이는 여의주를 잡고 있다

  
▲ 용꼬리 부도 중대석에 새겨진 용의 조각 중 꼬리 부분. 두 마리의 용꼬리가 힘차게 감고 있다

부도의 전면에 돌출이 된 용의 머리 역시 고려 초기 부도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상대석으로 올라가면 연촉이 표현되어 있으며, 몸돌에는 자물쇠 문양인 문비와 영창이 서로 반대편에 조각이 되어 있다. 자물쇠 문양과 영창 사이에는 사천왕상이 힘있게 조각되어 있다.        

 

머릿돌은 상대적으로 몸돌보다 크게 만들었다. 난 이 고달사지 부도에서 가장 주의 깊게 보는 것이 바로 머릿돌의 밑면에 조각이 된 비천상이다. 금방이라도 승천을 할 것 같은 이 비천상에서 부도는 마무리가 된다는 생각이다. 아마 이 부도를 조각한 공인도, 이 부도의 주인이 하늘로 오르기를 바랐나보다. 또한 스스로도 하늘로 올라 비천인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 자물쇠 문양 상대석에 조각된 자물쇠 문양인 문비.

  
▲ 영창 부도의 상대석은 상징적으로 사리가 있는 곳이다. 자물쇠 문양인 문비와 그 반대편에 조각된 영창이 하나로 어우러진다.

  
▲ 사천왕상 상대석 8면 중 사면에는 사천왕들이 부도를 지키고 있다

너무도 생생한 모습으로 조각이 되어 있는 국보 제4호 고달사지 부도.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고달사지의 제일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이 부도는, 고려 광종 대에 전성기를 누리던 고달사가 폐사가 되면서도 멀리 떨어져 있어 피해를 당하지 않은 것인가 보다. 고달사에 남아있는 보물 제7호인 원종대사혜진탑과 비교를 해도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국보와 보물의 차이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좋은 예이기도 하다.

 

  
▲ 비천상 고달사지 부도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각은 역시 비천인상이다. 하나하나가 섬세하게 표현이 되어 있다

  
▲ 비천인상 머릿돌의 밑면에 새겨진 비천인상. 국보 제4호 고달사지 부도를 완성시킨 아름다움의 결정체다


천년 세월 한 자리에 서서 온갖 풍상을 다 이겨내며 제 모습을 지켜 낸 고달사지 부도. 그래서 고달사지를 찾을 때마다 일부러 계단을 오르는 것도, 그러한 아름다운 탑을 보기 위해서다. 더욱 이 부도를 눈여겨보는 것은, 앞으로 또 천년을 그렇게 사람의 발길을 기다리고 서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출처 : 오마이뉴스 / 2009, 11, 10)


저녁시간 한참 이것저것 자료 정리를 하고 있는데, 친근한 아우 녀석이 전화를 했다.

 

"형, 갓바위에 가면 소원이 이루어지나요?"

"무슨 소리야 그것이, 뜬금없이. 글쎄, 가서 빌어보지를 않았으니 알 수가 없지. 그런데 왜?"

"아이가 저희 엄마한테 딴 아이 엄마들은 갓바위를 가는데, 저희 엄마도 다녀오라고 볼멘소리를 하더래요."

 

 

갓바위, 팔공산 관봉을 갓바위라고 부른다. 관봉이 유명한 것은 이 관봉에 보물 제431호인 관봉석조여래좌상이 있기 때문이다. 이 석조여래좌상은 해발 850m의 험준한 팔공산 관봉에 둘러쳐진 암벽을 배경으로 조성된 단독 원각상이다.

 

이 갓바위의 석조여래좌상은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지 오래다. 관봉 석조여래좌상은 원광법사의 수제자인 의현대사가 돌아가신 그의 어머니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선덕여왕 7년인 638년에 조성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보다 더 유명한 것은 이 갓바위 석불을 조성하는 동안 밤마다 큰 학이 날아와 그를 지켜주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 갓바위 부처님은 많은 사람들의 원을 들어주고 지켜준다는 것이다.

 

2009년 11월 12일(목)은 수능을 보는 날이다. 올해 재수를 하는 조카뻘 되는 녀석이 어디서 들었는지 갓바위를 다녀오라고 저희 어머니에게 볼멘소리를 했다는 것이다. 하기야 갓바위는 요즈음 들어설 자리가 없을 것 같다. 한 2년 전인가 시험을 보는 아이 부모들이 갓바위를 같이 좀 가자고해서, 함께 다녀온 적이 있다. 어차피 나야 올라가서 답사를 할 작정이니 싫다고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 동전 바위 벽에 동전을 붙이면 시험에도 딱 붙는다고 했는지 모르겠다. 사람들이 동전을 붙이느라 애를 쓴다

  
▲ 오르는 길 갓바위를 오르다가 보면 많은 조형물들이 바위 위에 있다. 이 모든 것이 다 자식들을 위하는 부모님들의 마음이다.

갓바위에 올라가니 빈자리가 없다. 연신 사람들이 올라오고, 일찍 기도를 마친 사람들은 내려간다. 오르기가 쉬운 곳이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염원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 때문이다. 이왕 내친 김에 나도 108배를 했지만 딱히 마음속에 염원을 두지는 않았다. 그저 함께 동행을 한 분들의 아이가 좋은 결과가 있기를 빌어주었다. 그래서인가는 몰라도 그 학생은 좋은 결과가 있었다.

 

아침과 저녁 심지어는 밤늦도록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는 갓바위. 석조여래좌상이 있는 옆 벽에는 누가 붙였는지 동전들이 붙어있다. 이 암벽에 동전이 잘 붙으면 시험도 붙는다는 이야기 때문인가 보다. 부모들이야 아이들을 위해서 못할 것이 없다. 그저 아이가 잘 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런 마음을 자식들은 과연 알고나 있는 것일까? 허리가 아파서 제대로 구부리지도 못하는 부모들이, 자식들을 위해서 아픈 허리를 연신 만져가며 절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대단한 모성애라고 느낀다.

 

"이번 주말에 가보고 싶은데, 얼마나 올라가요?"

"한, 한 시간 반 정도 걸릴듯 한데. 산이 가팔라서 힘이 들 거야."

"힘이 들어도 아이가 붙기만 한다면야 무엇인들 못하겠어요."

 

  
▲ 기도하는 사람들 수능 일이 가까워지면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오직 하나 자식들을 위해서 힘든 산행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미 한번 실패를 한 아이다 보니, 부모나 아이나 수능 일자가 다가오면서 조급한가보다. 엄마를 졸라 갓바위를 갔다오라는 아이도 힘들고. 아이를 위해 가깝지 않은 거리를 다녀와야 하는 부모도 힘이 들것이다. 그러나 어느 부모가 아이가 원하는 것을 마다할 것인가? 꼭 갓바위에 가서 빌었기 때문에 아이 점수가 좋아진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그렇게까지 해서 좋은 대학을 가야만 출세를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니, 어쩔 수 없지 않겠는가? 교육에 일관성이 없이 해마다 다른 정책이 더 어렵게 만든다고들 한다.  

      

"일찍 출발해야 할 거야. 단풍철이라 교통도 막힐 테고."

"가서 열심히 빌어보아야죠. 그래서 좋은 결과가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 보물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431호 석조여래좌상은 통일신라 때의 걸작품이다.

이제 보름도 남지 않았다. 갓바위 석불이 큰 영험을 보여 많은 아이들이 좋은 성적을 내었으면 좋겠다. 먼 길 떠나는 아우 녀석도 마음 편히 다녀왔으면 한다. 엄마에게 갓바위라도 다녀오라는 조카 녀석도 그저 편하게 시험을 보기를 갈망한다. 마음 편하게 아이들이 살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고 보면 정작 갓바위를 다녀올 사람은 나인 듯하다. (출처 : 오마이뉴스/2009,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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