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시대에 처음 창건된 남원 실상사에는, 통일신라 후기의 대표적인 작품인 실상사 철조여래좌상이 있다. 이 철조여래좌상은 창건 당시부터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는 철불이다. 통일신라 후기에는 지방의 선종사원을 중심으로 철로 만든 불상이 활발하게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이 불상 역시 당시의 불상 양식을 잘 표현하고 있다.

통일신라 때 처음으로 실상사를 짓고 난 뒤 모셔졌다는 철조여래좌상. 당시 선종사찰에서는 직접 철불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높이 2.69m의 이 철불은 그 중 가장 오래된 철불이다. 현재는 전각을 새로 짓느라 임시 전각에 모셔놓았다. 보물 제41호인 이 철조여래좌상은, 머리에는 소라 모양의 고수머리로 조성해 놓았다. 머리의 중앙인 정수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육계가 아담한 크기로 자리 잡고 있다.

보물 제41호 실상사 철조여래좌상

균형 잡힌 몸매가 당시 철불의 조형미를 알게 해

이 찰조여래좌상의 귀는 어깨에 닿을 듯하지만, 석불처럼 길게 늘어지지는 않았다. 목에는 삼도가 표현되어 있으나, 목이 짧아 조금은 답답한 모습이다. 이렇게 목이 짧게 표현된 것이 철조여래좌상의 흠이다. 이마와 초승달 모양의 바로 뜬 눈이나, 굳게 다문 입 등의 묘사가 뛰어나지만, 짧은 목으로 인해 근엄함이 조금은 가시는 듯한 모습이다.

통일신라 이전의 모습은 활기차고 부드러운 모습이 많이 나타나는데 비해, 통일신라 후기의 실상사 철불은 조금은 딱딱하게 표현이 되었다. 양 어깨에 갈친 법의는 아래로 내려가면서 육중한 느낌이 든다. 아마도 철불이란 특성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틀을 만들어 조형을 해야 하는 철제조형물이라 조형이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손과 발을 새로 제작해

철불의 어깨선은 부드럽고 가슴도 적당하게 처리되었다. 몸을 감싸고 있는 옷 주름은 가슴 밑에서부터 시작하지만, 한편으로 치우치면서 U자 형으로 주름진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비교적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당시 철불의 조형에서 나타나는 형태이다.

이 철조여래좌상은 무릎아래는 새로 복원을 한 것이다. 발은 모두 발바닥이 위로 보이게 가부좌를 하고 않았으며, 손도 근래에 찾아 원래대로 복원을 한 것이다. 실상사 철조여래좌상은 활력이 넘치던 8세기의 불상에서, 조금은 느슨해진 9세기의 불상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조형된 것으로 의미를 있다고 하겠다.

전북 유형문화재 제137호 실상사 동종

또 하나의 철제문화재, 동종

실상사 경내에는 또 하나의 철제문화재가 있다. 높이 123㎝, 입 지름 83㎝의 동종으로 현재 전북 유형문화재 제137호이다. 이 동종은 조선조 숙종 20년인 1694년에 제작된 것으로, 현재 실상사 보광전 안에 자리한다. 이 동종은 머리 부분인 용뉴에는 용이 발톱을 세워 종을 붙잡고 있는 형상이 있으며, 소리의 울림을 돕는 용통은 간략화 되어 용의 꼬리를 감은 모습이다.

종의 어깨선을 따라가면서 유곽을 새겼으며, 몸통 위쪽에는 ‘육자대명왕진언’이란 글을 새겨 넣었다. 네 개의 유곽에는 각각 꽃무늬를 세 줄씩 아홉 개를 새겨 넣었다. 유곽 사이에는 꽃가지를 손에 든 보살입상을 새겨 넣어, 조선조에 나타나는 일반적인 동종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용뉴와 몸통에 새겨진 보살입상

몸통 위쪽에는 원안에 범자를 양각한 문양을 12곳에 배치하였다. 그리고 흔히 동종에서 나타나는 넝쿨을 둘러쌓은 문양들은 보이지가 않는다. 아마 이런 형태의 모습은 조선조 후기로 넘어가면서, 범종의 구성이 많이 간략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몸통 중간에 새겨진 비천인상을 보아도, 이전의 동종에서 보이는 부드러움이 사라지고 딱딱한 느낌을 준다.


종에 새겨진 비천상 등이 딱딱한 느낌을 준다.

실상사에 있는 두 점의 철제문화재. 그 나름대로 소중한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석조나 소조에 비해 흔하지 않은 철조라는 점에서, 그 가치를 더할 수 있을 듯하다. 이렇게 많은 문화재가 전하고 있는 실상사이기에, 몇 번을 찾아갔어도 또 둘러볼 것이 있는 것이나 아닌지.

범종은 절에서 쓰는 종을 말한다. 범종의 ‘범(梵)’이란 범어에서 ‘브라만(brahman)’을 그대로 옮긴 것으로, ‘청정’이라는 뜻이다. 순수한 우리말로 ‘인경’이라고 하는 범종은 은은하게 울려 우리의 마음속에 잇는 모든 번뇌를 씻어주기에 충분하다. 범종의 소리는 우리의 마음 속 깊이 울려 어리석음을 버리게 하고, 몸과 마음을 부처님에게로 이도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종을 울리는 이유는 지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함이기도 하다.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에 가면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2호로 지정이 된 마애종이 있다. 마애종이란 바위에 종을 치는 모습을 조각하여 놓은 것이다. 이 마애종은 쇠줄로 달아 매단 종을, 스님이 치는 모습을 묘사한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마애종이다. 이 종을 자세히 보면 유두와 유곽 등을 표현하고 있는데, 형태로 보아 신라 말이나 고려 초기에 작품으로 보인다.

경기도 유형문화재인 안양 석수동 소재 마애종(2004, 2, 26 답사)

범종은 왜 울리는가?

절에서 종을 칠 때는 그저 치는 것이 아니다. 새벽예불 때는 28번, 저녁예불 때는 33번을 친다. 새벽에 28번을 치는 것은 ‘욕계(慾界)’의 6천과 ‘색계(色界)’의 18천, ‘무색계(無色界)’의 4천을 합한 것이다. 즉 온 세상에 범종 소리가 울려 중생들의 번뇌를 가시게 해준다는 의미가 있다. 저녁에 33번을 울리는 것은 도솔천 내의 모든 곳에 종소리를 울린다는 뜻이다. 지옥까지도 그 소리가 들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느 절이나 범종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그 종이 얼마나 오래 되었는가는 중요하지가 않다. 그것은 그 종소리를 듣고 지옥에 있는 영혼들이, 지옥에서 나올 수가 있다는 것이다. 하기에 안성 청룡사의 종에는 ‘파옥지진언(破獄地眞言)’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지옥을 깨트릴 수 있는 범종의 소리. 그 소리만으로도 세상은 달라진다.


보물 제11-3호인 사인비구가 제작한 안성 청룡사 동종(2008, 12, 31 답사)

아름다운 범종, 그 세계에 빠져들다.

전국의 사찰을 답사를 하면서 종에 빠져 든 것은, 그 종의 문양이나 조각 때문이기도 하다. 종이야 함부로 칠 수가 없으니, 그 소리야 많이는 듣지를 못했다. 그러나 그 종에 새겨진 각종 문양 등은 가히 불교미술의 꽃이라고 표현을 할 수 있다. 쇠에다가 그려 넣은 문양 하나하나가 어찌 그렇게 살아있는 듯 생동감이 있을 수가 있을까?

누군가 상원사 종을 들여다보다가 흐르는 눈물을 닦지를 않았더니, 나에게 신이 왔느냐고 우스갯소리를 한다. 그렇게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절마다 있는 흔한 범종을 들여다보다가 눈물을 흘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종에 새겨진 각종 문양을 보고 있노라면, 그 종을 만든 장인의 예술세계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어찌 쇠붙이에 저런 아름다움을 표현 할 수가 있을까? 만든 장인이 다르고 시대가 다르다고 하지만, 그 안에 녹아있는 예술혼은 청동도 녹일 수 있는 마음이 아니던가.


보물 제11-4호인 홍천 수타사의 사인비구가 제작한 범종과 용뉴(2009, 6, 12 답사)

불교금속미술의 꽃, 숨이 막히다

조선조 현종 11년인 1670년에 사인비구가 제작한 보물 제11-3호인 수타사 동종은, 그 종을 붙들고 있는 용뉴가 힘이 있다. 그보다 4년 뒤인 1674년에 사인비구가 만든 안성 쳥룡사 동종(보물 제11-4호)는 종 표면에 ‘파옥지진언’ 이라고 적어, 이 종으로 인해 지옥에 빠진 영혼을 구하고자 하는 염원을 그려냈다.

같은 보물 제11호인 청계사 동종에는 보살상이 표면에 그려져 있다. 그런데 그 보살상의 표정까지도 완벽하게 표현을 하였다. 어떻게 이렇게 쇠붙이에 표정까지 그려낼 수가 있었을까? 국보로 지정된 범종은 어떠한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범종인 신라 성덕왕 24년인 725년에 제작된, 국보 제36호 상원사 동종을 보면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상이 표현이 되어있다. 그런데 그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인이 금방이라도 살아서 나올 것만 같다. 또 위에 달린 용뉴는 어떠한가?


보물 제11호 청계산 청계사의 동종(2004, 11, 6 답사)

어찌 쇠를 녹여 만드는 범종에 이렇게 세세한 표현을 할 수 있었을까? 지금처럼 공구를 갖고 하는 것도 아니다. 거푸집 하나를 갖고 만든 종들이다. 그 아름다움의 끝은 화성 용주사의 국보 제120호 범종에 새겨진 비천인이다. 복대를 하늘로 날리며 내려앉는 비천상. 이 아름다움에 숨이 막힌다. 전국에 산재한 수많은 범종. 지금이야 더 아름다운 범종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 종들이 이렇듯 생명이 있을까?


국보 제36호인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신라 때 제작된 상원사 동종(2006, 5, 18 답사)

딱딱하고 찬 쇠붙이에서 받는 느낌이 이리도 따스할 줄이야. 이 어찌 마음의 수양이 없이 만들 수가 있을 것인가? 아마 이 종 하나를 만들면서 많은 중생을 번뇌에서 구하고자 하는 수행이 없이는 불가능 했을 것이다. 종을 바라보면서 눈물이 나는 까닭은, 바로 그러한 고통 속에서 만들어진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범종소리. 오늘 전국에서 일제히 울린다면, 이 답답함이 가시려나 모르겠다.

국보 제120호인 화성 용주사 동종의 비천상(2004, 5, 21 답사)

당간이란 절에 행사가 있을 때 그 입구에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놓은 장대를 말한다. 이 당간을 세우기 위해서는 양편에 지주를 세우게 되는데, 이를 당간지주하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신라와 고려를 거치면서 조성 된 수많은 당간지주가 남아있다. 그러나 당간이 남아있는 곳은 그리 흔하지가 않다. 그 중에서도 철로 만들어 진 당간은 공주 갑사와 안성 칠장사, 그리고 청주 등이다.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 2가 번화가에는 철 당간이 한 기 서 있다. 국보 제41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철 당간은 그 모양부터가 웅장하며, 아직도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한 편이다. 이 철 당간이 서 있는 곳은 예전 고려 광종 13년인 962년에 창건된 용두사가 서 있던 자리라고 한다. 용두사는 고려 말의 잦은 전쟁으로 폐사가 되고, 남은 것은 이 당간 한 기뿐이다.


예전 모습 그대로 남아있어

청주 여기저기를 돌아보고 나서 찾아간 철 당간. 앞으로는 젊은이들의 거리가 있다. 여기저기 젊은이들이 길을 메우고 있고, 예전 극장자리라는 곳에 철 당간이 서 있다. 철 당간은 길의 높이보다 조금 낮게 되어있으면 주변은 보호책을 쳐 놓았다. 아마 이렇게 깊게 서 있는 것은, 당시의 높이를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서 인 듯하다.

용두사지 철 당간은 밑을 받치고 받침돌이 있고, 양편을 지탱하는 두 개의 지주가 나란히 서 있다. 두 기둥의 바깥 면에는 단조로움을 벗어나기 위해 선으로 돋을새김 하였다. 지주의 윗부분에는 빗장과 같은 장치를 쇠로 둘러 당간을 고정시켰다. 현재 남아있는 철 당간은 원통모양의 철통을 위로 올라갈수록 좁게 만들어 서로 맞물리게 20개를 쌓았다.



현재는 20개의 당간의 높이가 12.7m에 달하지만, 처음 이 철 당간을 제작했을 때는 30개를 연결하여 세웠다고 한다. 청주 용두사지 철 당간은 밑에서부터 셋째 번의 원형철통 표면에 <용두사철당기>라는 명문이 양각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건립 년대가 준풍 3년, 곧 고려 광종 13년인 962년 3월 29일이라는 것이다.

홍수를 막기 위해 세운 당간이 용두사지 당간은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 온다. 예로부터 청주는 홍수가 잦았다고 한다. 백성들이 잦은 홍수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게 되었는데, 어느 점술가가 말하기를 ‘청주는 배의 형상이라 높은 돛대를 세워 놓아야 재난을 면할 수 있다’고 하였단다. 그래서 돛대 구실을 하는 이 철 당간을 세웠더니, 그 때부터 재난이 닥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청주를 ‘주성(舟城)’이라 불렀다고 한다.



당간의 전체 높이 12.7m, 철제 원통당간의 높이는 63cm이며, 지주의 높이는 4.2m이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원래 이 용두사지 철 당간의 높이는 19m에 이른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거대한 철 당간의 모습을 그나마 간직하고 있는 용두사지 당간.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둘러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젊은 사람들이라 그런가, 이 당간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는 듯하다. 그 옆에 앉아 침을 뱉고 담배를 피워대는 것을 보면.




아무리 세상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이런 모습은 정말로 짜증이 난다. 더구나 요즘 젊은이들은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 아니던가? 괜한 소리 한 마디를 해보지만, 미안한 기색도 없다. 가면 될 것 아니냐는 그런 표정이다. 그 잘 붙여놓는 금연문구 하나쯤 만들어 놓았다면 하는 아쉬움이 인다. 꼭 그래야만 조심하는 사람들이 더 문제지만. 철에 매연은 상극이라는데 말이다. 주변에서 뿜어나오는 각종 매연도 당간에 영향을 줄텐데, 그 주위에 둘러앉아 억세게 담배를 피워대니 국보의 안전이 온전할까 걱정이 된다.

선원사는 전라북도 남원시 도통동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의 절이다. 선원사는 신라 헌강왕 1년인 875년에 도선국사가 처음으로 창건을 했다고 전해진다. 도선국사는 남원의 지형이 주산인 백공산이 객산인 교룡산에 비해 지세한 허약한 것을 알고, 백공산의 지세를 높이고자 만복사와 대복사, 그리고 선원사를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선원사는 초창기에는 70~80명의 승려들이 상주하던 절로, 만복사에 버금가는 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597년 정유재란 때 만복사와 함께 소실이 되어버렸다. 현재 선원사는 남원 시내 한 복판에 자리한다. 선원사에는 보물 제422호인 철조여래좌상과 지방문화재 제119호인 약사전, 지방문화재자료 제45호인 대웅전, 그리고 동종이 전한다.


선원사 일주문과(위) 경내. 좌측 전각이 철불여래상이 모셔진 약사전이고, 우측에 대웅전이다.

남원팔경 중 제5경인 선원모종(禪院暮鐘)

해질녘에 은은히 들려오는 범종소리. 예전 남원성의 동문 밖에 자리한 선원사에서는 저녁예불을 알리는 범종이 울려 퍼졌을 것이다. 그 소리에 대한 기록은 『신증판 남원지』에 전하는 남원팔경에 기록되어 있다. 저녁예불 시간에 울리는 범종소리, 전북유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이 된 그 범종은 어떻게 소리를 내었기에, 팔경 안에 들었을까? 선원사를 찾아 범종을 둘러보았다.




사진 위로부터 약사전, 약사전 뒤편에 걸린 괘불함, 대웅전과 대웅전의 용조각

문화재 안내판에는 선원사 대웅전 안에 범종이 있다고 적혀있다. 그러나 안에 들어가 확인을 하니, 대웅전 안에 있는 범종은 최근에 제작이 된 것이다. 선원사 운천 주지스님께 물으니, 범종은 약사전에 있다고 한다. 약사전 안으로 들어가니 한 편에 범종이 보이는데, 그리 크지가 않다. 높이 66cm, 입 지름 47cm의 조선시대의 범종이다.

그러나 종의 모습은 작다고 하지만, 얼핏 보기에도 여느 종이 아니다. 종의 맨 위에 종을 매다는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한 마리 용이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용의 각 부분은 따로 제작을 해 붙여서 완성한 듯하다. 종의 몸체에는 4줄의 가로선을 긋고 맨 위에는 작은 원 11개를 나열하였다. 그 밑으로는 보살상을 4곳에 놓고, 보살상 사이에는 꽃과 덮게, 관을 나열하였다.


조선시대에 제작된 선원사 범종과 용뉴(아래)

종을 울려보고 싶은 마음

중앙에 배가 부른 부분은 4개의 사각형 모양의 유곽을 만들어 둘레를 파도무늬로 장식하였다. 아래 부분에는 연꽃과 덩굴무늬를 새기고, 위와 아래에는 글자를 남겼다. 종으로서도 작고 거친 모양이지만, 문양이 다채롭고 특이하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 종을 주조한 사람이 전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남원 출생인 최연은 선조 36년인 1603년에 진사에 합격하고, 같은 해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최연은 광해군 2년인 1610년에 예조좌랑이 되었으나, 이이첨 등의 모의에 반대하다가 대북파에 의하여 파직을 당했다. 고향으로 낙향한 최연은 12년 동안이나 은거를 하였는데, 그 때 지은 시 중에 이런 가사가 전한다.

(전략)
千年石色帶方城 천년 묵은 돌 색깔은 대방성이 틀림없다.
主人有酒客忘發 주인이 권한 술에 객은 일어설 줄 모르더니
醉伴沙驅眠蓼汀 말을 몰아가던 취한 벗, 요천가에 잠이 드네.

아마 이 시에서 ‘십리 먼 곳 신라시대 종소리’란 바로 선원사가 아니었을까? 남원팔경에 들어가 있는 선원모종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얼마나 그 종소리가 맑고 청아했으면, 선원모종이라 했을까? 불현 듯 종소리가 듣고 싶다. 그래서는 안되지만 손바닥으로 조심스럽게 범종을 울려본다. 폐부를 흔드는 듯한 은은한 종소리. 살짝 쳤는데도 그 소리의 여운이 상당하다.




그랬다. 이렇게 맑은 종소리가 저녁예불 시간에 울렸을 것이다. 남원성 동문 밖을 나서면서 이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 감탄을 했을 것이고, 그 소리에 취했을 것이다. 작은 종소리 하나에도 혼을 담아낸 우리의 선조들. 그저 머리가 절로 숙여질 뿐이다


남원시 도통동 392-1 선원사 약사전에 모셔진 철조여래좌상은, 보물 제422호로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철조여래좌상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이 촘촘히 돋아 나있고, 이마 위쪽에는 고려시대 불상에서 유행하던 반달 모양을 표현하였다.

선원사(禪院寺)는 남원 시내 한 복판에 자리하고 있는 절이다. 신라 헌강왕 원년인 875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절로 1,135년이나 지난 고찰이다. 원래 객산인 교룡산의 지기를 누르고, 주산인 백공산의 기운을 돋우어야 남원이 발전한다고 하여 지어진 절이다. 선원사는 만복사에 버금가는 큰 절이었으나, 정유재란 때 소실이 되었다. 그 뒤 영조 30년인 1754년에 남원부사 김세평이 복원을 하였다.

보물 제422호 선원사 철조여래좌상

뛰어난 주조기법이 돋보이는 철불

선원사는 평지에 자리하고 있다. 남원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가람이 펼쳐 있으며, 앞으로는 주공 1, 2단지가 자리하고 있다. 도로변에 접하고 있는 선원사는 도심 한 복판에 자리하고 있으면서도, 고즈넉한 산사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그것은 유형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는 약사전과 문화재자료인 대웅전 때문인가 보다.

약사전 안에 모셔진 철조여래좌상은 전통적인 고려 철불의 형태로 주조 되었다. 삼각형의 얼굴은 일반적인 불상에서 보이는 인자함이나 유연함은 보이지 않는다. 날카로운 코와 꽉 다문 입, 조금은 앞으로 내민 턱 등에서 보이는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다. 법의는 양 어깨에 걸쳐 얇게 표현이 되었는데, 넓은 옷깃을 오른쪽으로 여민 것은 마치 한복을 입은 것처럼 표현되어 매우 독특하다.



철조여래좌상을 모신 선원사 약사전(좌측)과 대웅전(우측) 맨 위사진 

팔과 다리에 나타난 옷 주름은 V자 모양으로 간략하게 처리를 하였다. 신체는 어깨가 넓고 반듯해 당당한 느낌을 주며, 잘록한 허리에는 두 팔이 붙어 있다. 현재 철조여래좌상의 손은 최근에 다시 만들어 붙인 것이라고 하는데, 팔의 형태로 보아 원래는 오른손을 무릎에 올리고 손끝이 땅을 향하고 왼손은 배 부분에 놓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 가지만 서원을 빌어야 해요”

남원을 답사한 이유도 바로 이 선원사 철조여래좌상을 보기 위함이었다. 주변의 절을 다니시는 많은 불자들이 선원사의 철조여래좌상에 대한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딱히 무슨 효험을 보았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그런 것을 과다하게 소문을 내고는 하지만, 이상하게 선원사 철조여래좌상에 대해서는 웃음으로 말을 피하고는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 것이 더 궁금해서 찾아간 선원사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지 않는 절집이다. 그러나 약사전 안으로 들어가니, 철조여래좌상의 표정에서 위엄이 느껴진다. 고려시대의 불상이라면 이미 천년 세월을 훌쩍 넘었다. 그 많은 세월동안 철불 앞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원을 했을까? 아마 그 기운만으로도 알 수 없는 신비함이 있을 듯하다.




“세 번만 찾아와 엎드리면 알음이 있다”
“한 가지 서원을 빌어보세요. 딱 세 번만 와서요. 그러면 정말로 그 서원이 이루어져요”

멀리서 일부러 신원사 약사전을 찾았다는 어느 분의 이야기다. 정말일까를 의심할 필요는 없다. 약사전에 좌정하고 계시니, 사람들의 병을 고치는데 영험함이 있는 것일까? 그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 지성으로 빌어본다면, 그도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다. 근엄한 부처님의 얼굴에서 무엇인가 기운이 뻗쳐 나오는 것만 같다.


천년세월을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정성 속에서 지켜 낸 신원사 철조여래좌상. 고려 시대에 주조가 된 철조여래좌상, 그 소중함이야 어디다가 비길 것인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 마음속으로 빌어보는 것은, 이 땅에 아픈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인가 보다. 세 번만 찾아가면 정말로 마음 아픈 사람들의 그 아픔이 가셔질 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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