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안에 옛날 나의 얼굴은 없는 것일까?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분원길 3-69(남종면 분원리 68)에 소재한 얼굴박물관. 남종면 소재지를 들어서 좌측 골목 안에 자리하고 있는 얼굴박물관은 한 마디로 각종 얼굴을 다 모아놓은 곳이다. 이곳은 연극 연출가 김정옥이 지난 40여 년간 수집해온 우리의 옛사람들이 만든 석인, 목각인형, 도자기 등과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의 도자인형과 유리로 된 인형들을 모아놓은 곳이다.

 

또한 사람의 얼굴을 본 딴 와당과 가면 등, 그들의 풍부하고 다양한 표정 속에 담겨있는 장인의 예술적 감수성과 시간의 흐름이 만나 무엇이라 형언할 수 없는 창조적 손길을 느끼게 하는 조화를 한자리에 모아 <사람과 얼굴>의 공간을 구상함으로서 얼굴 박물관을 탄생하였다고 한다.

 

김정옥이 반세기에 걸쳐 모은 1000점이 넘는 얼굴의 조형은 다양하다. 석인, 옛돌사람 (벅수, 문관석, 무관석, 동자석, 선비석, 민불 등)300여점, 목각인형 (상여나 꼭두극 또는 불교미술)200여점, 도자기나 테라코타의 인형(한국의 명기, 당나라, 일본 등) 50여점, 와당 (한국, 중국) 50여점, 가면 100여점, 초상화나 무속화의 인물화 100여점, 현대작가의 회화와 조각 100여점, 그밖에 민속품, 도자기 100여점 등 총 1000여점이 넘는 얼굴박물관. 그 안에 혹 나의 전생 얼굴이 있지는 않을까? 궁금하다.

 

 

얼굴을 만나러 가다

 

11, 전날부터 가을비가 추적거리고 내린다. 비가 오는 날은 가급적이면 답사를 나가지 않지만 한가위 연휴동안 단 하루도 쉬지 못하고 일을 한 터라 잠시라도 머리를 식힐 겸 광주시 남종면에 있다는 얼굴박물관을 찾아갔다. 매년 특별전을 하고 있는 얼굴박물관에서 올해 특별전으로 527일부터 1029일까지 무속화(巫俗畵) 특별전인 ()과 사()를 연기하다라는 전시를 열고 있기 때문이다.

 

입구에 차를 대고 안으로 들어가니 매표소가 따로 있지 않다. 사람을 찾으니 자료정리를 하고 있던 관리자가 나온다. 이야기를 하고나서 관람료를 물으니 성인은 4천원, 65세 이상은 경로우대를 해서 3천원이라고 한다. 두 사람 몫인 7천원의 관람료를 지불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서부터 심상치 않다. 몇 발 들어서지도 않았는데 무신도가 벽에 걸려있다.

 

 

저 많은 무신의 얼굴을 모두 어디서 들고 온 것일까? 실내 여기저기 쌓여있는 각종 얼굴들을 보고 있노라니 정신이 없을 정도이다. 수집한 자료들에 비해 공간이 좁아 보인다. 하나하나 잘 정리 하려고하면 아마 현재의 공간보디 몇 배는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할 듯하다. 그렇게 자료들이 쌓여있다 보니 차분히 관람을 하기가 힘들 정도이다.

 

입구에서 관리인이 일층을 돌아보고 이층을 본 후 밖으로 나오라고 한 말이 생각나 이층으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일층과는 또 다른 얼굴들이 기다리고 있다. 각종 얼굴들을 보고 있다가 우연히 물구나무를 서 있는 재인(才人)이라는 설명이 붙은 얼굴을 만난다. 그리고 그 뒤편으로 상여에 올려 진 또 다른 많은 얼굴을 만난다. 이런 상여는 지금은 보기도 힘든 자료이다. 그 한옆에 상여의 앞뒤에 붙여 위엄을 더한 정자용(丁字龍)’을 만났다. 정말 희귀한 자료를 만난 것이다.

 

 

전라도 강진에서 이건한 관석헌을 보다

 

실내에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100여년이 지난 고택이 한 채 서 있다. ‘관석헌(觀石軒)’이라는 이 집은 말 그대로 돌을 보는 집이다. 관석헌 아래 앞뜰에는 많은 석물들이 줄지어 서있다. 이 관석헌은 시인 김영랑의 고향이자 고려청자로 유명한 전라남도 강진에서 옮겨 온 한옥이라고 한다.

 

누마루와 한편에 정자각이 서 있는 이 집은 김영랑 시인의 문중인 김홍배씨의 증조부가 100여 년 전 백두산 적송을 뗏목으로 옮겨와 경복궁을 중건했던 도편수 김춘엽, 허균 등을 동원하여 지은 5동의 건물 중 안채만을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관석헌은 고택의 품위를 지키고 있는 집이다. 현재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안쪽으로는 덧창을 달았지만 고택의 품격은 그대로 지키고 있다.

 

 

집 옆에 산으로 오르는 길을 따라 올라본다. 멀리 팔당호의 물이 보인다. 관석헌의 상량문애는 장춘실(長春室)’로 적혀 있었지만 얼굴박물관으로 옮겨와 그 앞에 많은 돌이 서 있어 관석헌으로 명칭을 바꾼 듯하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얼굴박물관은 또 다른 형태의 멋을 풍긴다. 아마 관석헌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많은 얼굴을 만나기 위해 찾아갔던 광주 얼굴박물관. 짧은 시간에 그 많은 자료를 살펴보기에는 역부족이다. 다음에 시간을 내어 다시 한 번 찾아보기로 하고 풀구를 나서는데 관리인이 이곳에서 만신을 모셔 굿을 한다고 알려준다. 다음에 이곳을 찾을 때는 굿을 함께 관람하면서 좀 더 찬찬히 둘라보아야겠다.

 

수원화성박물관 소장 정도전의 국내 유일본

 

“<조선경국전>은 조선초기 삼봉 정도전(1342~1398)이 조선이라는 국가의 틀을 세우기 위해 기본 강령을 저술하여 조선 초기인 1394(태조 3) 530일 태조에게 바친 책입니다. 이 책은 삼봉 정도전 집에도 수록되지 않은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고 1485년에 발간된 '경국대전(經國大典)'의 모본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중요한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17일 수원화성박물관 한동민 관장은 문화재청이 16일 수원화성박물관 소장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1924호로 최종 확정한데 대한 소감을 피력하면서 수원화성박물관 소장본인 '조선경국전'1책으로 모두 79장이며 현전하는 국내 유일본이라고 했다.

 

조선경국전은 조선초기의 치전·부전·예전·정전·형전·공전 등 6전으로 구분하고 관제·군사·호적·경리·농상·진휼·종묘·사직··학교·과거 등 각 분야의 제도를 기술하여 조선의 건국이념과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대한 기본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가치를 갖는 것이죠. 이 조선경국전은 20145KBS ‘TV쇼 진품명품에서 그동안 출품되었던 고문헌 전적류 중에서 가장 높은 감정평가액을 판정받기도 했습니다

 

 

조선 초기 삼봉의 조선경국전이 모태가 되어 <삼봉집>(1465)을 비롯해 <경제육전(經濟六典)>(1397, 1412)<육전등록(六典謄錄)>(1426) 등이 편찬되었고 최종적으로 조선의 기본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1485)이 편찬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보아 조선경국전은 경국대전의 모본이며 삼봉집에도 기록되지 않은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는 데서 그 가치를 높이 평가받고 있다.

 

수원화성박물관은 2013년 문화재청에 <조선경국전>의 문화재 지정신청을 했으며 2014년에는 '조선경국전'을 주제로 역사, 서지, 법제 분야 전문가(문철영 단국대학교 교수, 옥영정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정긍식 서울대학교 교수)와 함께 삼봉 정도전과 조선경국전학술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조선경국전은 조선초기 나라의 틀을 세우는 기본법전으로 그 가치가 매우 크다고 생각합니다. 조선경국전이 보물로 지정이 되었지만 학계에서는 국보로서의 가치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수원시에서는 조선경국전의 국보 지정을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한동민 관장은 그동안 많은 노력으로 소중한 서책이 보물로 지정되었지만 그 가치는 국보급에 해당한다고 하면서 앞으로 꾸준한 학술연구 등으로 수원시의 유일한 국보문화재 지정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한다.

 

경기도 민속문화재 제3호 삼막사 남녀근석

 

 

전국을 다니면서 만나는 조금은 해괴한 것들을 보면 처음엔 다들 낯을 붉히고는 한다. 참 묘하게 남녀의 성기를 닮은 나무나 바위, 아니면 인위적으로 깎아 만든 형상들이기 때문이다.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산10-1, 삼막사 경내에 소재한 경기도 민속문화재 제3호 ‘삼막사남녀근석(三幕寺男女根石)’이 바로 그런 자연암석이다.

 

삼막사 대웅전이 있는 곳에서 남쪽 산 위로 500m 정도를 올라가면 삼막사 칠성각 서북편에 있는 2개의 자연 암석을 만날 수 있다. 그저 무심히 보면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겠지만 그럴 염려는 없다. 근처에 가면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들여다보며 연신 사진을 찍어대기 때문이다. 두 기의 바위의 모양이 남자와 여자의 성기 모양과 닮았다고 하여 ‘남, 녀 근석’이라 부른다.

 

지금은 이 남 녀 근석으로 오르는 길이 말끔하게 돌계단으로 정리가 되어있어 다니기에는 편리하지만, 그래도 옛 흙길을 터벅거리며 다녔을 때를 생각하면 오히려 그 때가 더 자연 속을 걷는 것 같아 좋지 않았었나 하는 생각을 한다.

 

 

 

다산과 풍요의 상징 삼막사 남녀 성기석

 

일반적으로 남녀의 성기석을 만들어 풍요와 다산을 기원할 때는 돌을 다듬어 조성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삼막사의 남녀근석은 자연적인 바위가 성기를 닮았다. 이러한 성기 숭배 사상은 풍농과 풍어, 다산과 무병장수를 목적으로 하여 선사시대부터 행해져 왔던 민속신앙의 하나이다.

 

성기숭배 풍속은 고려, 조선시대는 물론 현재까지도 무속과 풍수신앙, 마을의 각종 제의식과 미륵신앙 등에 이어지고 있다. 삼막사의 남, 녀 근석은 신라 문무왕 17년인 677년에 원효대사 등이 삼막사를 창건하기 이전부터 토속 신앙의 대상으로 숭배해 왔다고 전해진다. 이 바위를 없애지 않고 그 옆으로 칠성각을 둔 것은 불교와 민간 신앙이 어우러진 우리나라 민간 신앙의 한 형태가 불교와 습합되는 과정을 볼 수 있는 좋은 예가 된다.

 

이 삼막사 성기석은 사실적으로 성기를 닮은 바위이다. 지금도 민간에서는 이 바위를 만짐으로써 다산과 출산에 효험이 있다고 믿어 4월 초파일이나 7월 칠석이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공을 드린다고 한다. 그 기원의 방법으로 동전을 바위에 문질러 붙이는 의식을 행하기도 하는데 남근석은 높이 1.5m 정도이며 여근석은 높이 1.1m 정도이다.

 

 

 

남근석에 성혈이 있었네

 

자고로 남자는 뿌리가 깊어야 한다는 속설이 있다. 그 뜻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다. 사실 문화재답사를 하면서 그동안 중점적으로 조사를 했던 것도 학술적인 것보다는 그 문화재에 숨겨져 있는 주변의 이야기에 더 매료를 당했다. 문화재를 보고 주변의 토민들에게 이야기를 들으려고 노력을 했던 것도 남들이 모르고 있는 숨겨진 이야기 때문이다.

 

남근석의 높이가 땅 위로 솟은 부분은 1,5m 정도이지만, 실제로 그 높이는 4m 정도나 된다. 그 밑으로 이어지는 바위의 높이가 상당하다. 그 바위의 뿌리 부분이다. 그런 뿌리가 있어 다산의 상징이 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데 이 남근석에 두 개의 성혈이 보인다. 오느 시기에 누가 무슨 이유로 조성을 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성혈을 팠다는 것을 보아도 이 남근석은 오래전부터 신앙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성혈이란 마음속에 염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 돌로 돌을 갈아 그곳에 둥그런 구멍을 파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많은 바위나 건조물의 기단 등에는 이 성혈이 새겨져 있다.

 

 

 

 

여근석에 물이 마르면 무슨 일이 날까?

 

삼막사의 여근석을 보면 참 묘하게도 생겼다는 생각을 한다. 옆에서 보면 그리 실감이 나지 않지만 위에서 내려다볼수록 더 묘하다는 생각이 깊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이 여근석의 중앙에 깊게 골이 나 있는데 그 가운데 고여 있는 물이다. 몇 번을 이곳에 와 보았지만 항상 이렇게 물이 고여 있었다. 일부러 이곳에 누가 물을 부어 놓은 것일까?

 

유난히 가물었던 해에도 여근석 파인 부분에는 물이 고여 있었다. 안양 인근에 비가 내린지가 꽤 되었다고 하는데 왜 이곳에만 물이 고여 있는 것일까? 삼막사 남녀근석을 찾아갔을 때는 한 낮의 더위가 며칠 째 30도를 넘나들었다. 아무리 산이라고 해도 벌써 말라버렸어야 할 바위에 고인 물이다. 이곳에 물이 마르면 불행한 일이 벌어진다고 들은 적이 있다. 그런 것을 막기 위해 누가 일부러 물을 갖다 붓지는 않았을까?

 

의학적으론 잘 모르겠다. 들은 바로는 여성의 질이 마르면 생산성이 그만큼 사라진다고 하는데 그래서일까? 만일 이것이 누가 일부러 물을 부은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니겠는가?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별별 생각을 다 해본다. 삼막사 남녀근석, 이곳에 물이 마르면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다는 전설 하나쯤 있을 법도 하다. 다음 이곳을 찾아오를 때는 그 연유를 한 번 알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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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 외미거북진놀이’, 어떤 놀이일까?

 

뚫어라 뚫어라 물구멍을 뚫어라. 물줍쇼 물줍쇼 사해용왕 물줍쇼

 

거북이를 몰고 나온 질라래비가 우물 앞에서 하는 덕담이다. 놀이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그 말을 따라한다. “물주쇼 물주쇼, 사해용왕 물주쇼거북놀이는 우리나라 한수 이남의 놀이로, 정월 대보름이나 추석에 연희되던 놀이이다. 수수잎과 짚 등을 이용해 만든 거북놀이의 거북이는 두 사람이 그 안에 들어가 연희를 한다.

 

경기도 이천의 거북놀이는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50호인 이천 거북놀이로 지정이 되어있다. 본 기자는 이천 거북놀이를 직접 이천시(당시 이천군) 전역과, 근동 안성, 평택, 용인, 광주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발굴 해, ‘이천의 민속 거북놀이라는 책을 펴낸 지가 벌써 30년이 지났다. 아마 이 조사보고서 형식으로 꾸며진 소책자가, 그동안 써온 20여권의 책을 엮게 된 기폭제가 되었는가 보다.

 

거북놀이는 기원성민속이다. 가내의 안과태평과 풍농 등을 기원하는 놀이이다. 거북놀이는 정월 대보름이나 추석날에, 마을의 청소년들이 짚과 수수깡으로 거북이 모양을 만들어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즐기던 놀이이다. 거북이는 장수동물이요 부귀를 상징하기 때문에, 놀이의 주체가 되었을 것이다.

 

 

 

가내의 안과태평을 기원하는 놀이

 

거북놀이는 마을의 집집마다 다니면서 연희를 하는데, 집 대문 앞에서는 문굿을 먼저 치고, 마당에 들어서면 우물굿(용왕굿)과 마당굿을 한다. 마당에서 굿을 하는 도중 거북이가 쓰러지면 사람들은 거북이 곁으로 몰려들게 된다. 이때 질라래비는 이 거북이가 동해를 건너(지역에 따라서는 서해를 건넌다고도 한다) 여기까지 오느라 배가고파 쓰러졌으니, 먹을 것을 좀 주십쇼하고 소리를 치면 주인이 먹을 것을 내준다.

 

그렇게 밤새도록 집집마다 다니면서 축원을 해준다. 대개 정월에 하는 거북놀이가 갖고 있는 내적사고가 풍농과 가내의 안과태평을 기원한다고 하면, 추석에 하는 거북놀이는 풍농에 대한 감사로 행해진다. 경기도 남부 일원에서 연희가 되던 거북놀이가 거개가 동질의 형태로 나타났었다.

 

 

 

 

오산 외미거북진놀이가 궁금하다

 

이번 18일과 19일 오산에서 열리는 제20회 경기도민속경연대화에 참가하는 오산 외미거북진놀이’. 오산에서는 서랑동, 금암동, 금곡리, 내삼미동 등 에서 정월 초하룻날부터 대보름날, 추석전후로 하여 마을의 각 가정에 거북이와 남생이 옷을 입고 돌아다니며 복을 빌었다고 한다.

 

그러나 놀이문화가 점차 사라지면서 그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어지고, 금암동과 서랑동에서만 소수로 추석전후로 거북놀이가 행해져 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오산외미걸립농악보존회에서는 잊혀져가는 우리의 놀이 문화를 다시금 복원하기 위하여, 마을별 어르신들을 찾아가 얘기를 듣고 연구 및 발굴하여 오산만의 특징을 지닌 거북진놀이를 재현시켰다고 한다.

 

 

오산외미거북진놀이는 걸립과 농악이 한데 어우러진 것이 가장 큰 특징이며, 거북이 5마리와 남생이 4마리가 노는 모습은 마을의 안녕과 무병장수를 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농악에 쓰이는 다양한 진을 이용하여 팔괘진, 오방진, 십자진, 가새치기 등 신명의 한마당을 만든다고 한다.

 

오산외미거북진놀이에 쓰이는 악기로는 꽹과리3, 2, 장구3, 3명이 있으며, 거북놀이를 위한 편성은 거북이, 남생이, 양반, 마님, 아낙, 기수, 법고, 남정네, 동네아이들 등 40~50명의 인원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경기도남부 지역의 거북놀이는 거의 같은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거북놀이를 하기 위해서는 풍물은 기본적으로 구성이 된다. ‘오산 외미거북진놀이에 대한 기본적인 자료를 받아보고 궁금한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다. 민속경연대회는 그 특성상 철저한 고증이 제일 중요하다. 오산 거북놀이를 눈여겨 보아야하는 이유이다.

 

 

 

수원시 팔달구 창룡대로 236-54(우만동)에 자리하고 있는 천년고찰 봉녕사. 비구니 사찰인 봉녕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 2교구 용주사의 말사로서 광교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고려시대인 1208년에 원각국사가 창건하여 성창사라 하였고, 조선시대 1469년 혜각국사가 중수하고 봉녕사라 사명을 개칭하였다.

 

봉녕사는 1971년 묘엄스님이 주석하신 이후, 40여 년 동안 비구니 승가교육의 요람으로 발전을 거듭하였다. 1974년도 봉녕사 강원(승가대학)을 개원하였으며, 19996월 세계 최초로 비구니 율원인 금강율원(금강율학승가대학원)을 개원하였다. 봉녕사는 승가교육과 율학연찬을 통한 수행도량으로서 사격을 갖추고 대가람을 이룩하였다.

 

23일 오후 봉녕사를 찾았다. 일주문을 지나 조금 안으로 들어가면 양편으로 막 피기 시작한 꽃들이 환영을 한다. 경내로 들어서면 그야말로 꽃 잔치를 벌이고 있다. 여기저기 잘 가꾼 꽃밭에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있어 마치 연화세계에 들어온 듯하다. 피안이 따로 있을까? 이곳이 바로 부처의 세계란 생각이 든다.

 

 

 

 

문화재를 찾아 봉녕사를 가다

 

봉녕사를 찾은 것은 꽃구경을 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봉녕사의 중심인 대적광전을 바라보고 좌측에는 약사보전이 자리하고 있고, 우측에는 용화각이 자리하고 있다. 봉녕사에는 두 점의 문화재가 있다. 용화각에는 경기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51호인 석조삼존불이 자리하고 있으며, 약사보전에는 경기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52호인 봉녕사 불화 2점이 일괄 지정되어 있다.

 

약사보전에 보존되어 있는 문화재는 바로 신중탱화와 현왕탱화이다. 봉녕사를 찾은 것은 바로 이 현왕탱화를 보기 위함이다. 탱화란 불교의 신앙 대상이나 내용을 그린 그림을 말한다. 약사전 안의 탱화들은 약사 정토의 특성을 그대로 도설화하고 있다. 약사 신앙은 <불설약사여래본원경>에 의한 신앙이다.

 

봉녕사 약사보전의 신중단에는 신중탱화가 모셔져 있다. 조선 고종 28년인 1891년 화사 광조가 그린 신중탱화는, 가로 168, 세로 178의 크기로 비단 바탕에 채색하였다. 그림은 위쪽에 제석과 범천이 무리를 거느리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아래쪽에는 중앙의 위태천을 중심으로 팔부신장과 용왕, 금강상 등을 그려놓았다.

 

 

 

 

염라대왕인 현왕탱화를 만나다

 

현왕은 염라대왕을 말한다. 염라대왕은 사람이 죽어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가면 3일 만에 재판을 받게 되는데, 그때 현왕 앞에 나아가 재판을 받는다고 한다. 현왕탱화는 주로 19세기 이후에 유행했던 그림으로 명부전 벽화 등으로 나타나는 시왕도와 비슷한 배열을 하고 있다. 다만 지옥도가 생략되었다는 점이 다르다.

 

고종 15년인 1878년 화사 완선이 제작한 봉녕사 현왕탱화는, 가로 131cm, 세로 104cm의 크기로 비단에 채색하였다. 중앙에 현왕(염라대왕)을 중심으로 좌우와 아래편에 판관, 녹사 등을 배치하였다. 현왕탱화에는 염라대왕을 비롯하여 모두 12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어, 일반적인 탱화와는 구도 등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염라대왕은 저승 10대왕 중 다섯 번째 왕이다. 흔히 염라대왕을 여래화한 보현왕여래의 그림들도 전하는데, 일반적으로 보현왕여래와 권속 4명 등을 그려놓는다. 그에 비해 봉녕사 현왕탱화는 많은 인물을 묘사하였다.

 

불교에서는 시왕(十王)’이라고 해서 사람이 죽으면 시왕 앞에 차례로 나아가 생전에 지은 죄의 경중을 따져 심판을 받고 그에 해당하는 벌을 받는다고 한다. 저승 10대왕은 제1전에 진광대왕, 2전에 초강대왕, 3전에 송제대왕, 4전에 오관대왕, 5전에 염라대왕, 6전에 변성대왕, 7전에 태산대왕, 8전에 평등대왕, 9전에 도시대왕, 10전에 오도전륜대왕이 관장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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