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게도 고성에 있는 건봉사의 능파교를 찾을 때는 꼭 날씨가 추웠다. 지난 118일부터 23일 일정으로 돌아 본 강원도. 그 첫날 건봉사를 찾은 날도 갑자기 날이 쌀쌀해졌다. 바람까지 불어 체감온도는 더 떨어졌는데도 불구하고, 통일전망대를 돌아본 후 건봉사로 향했다. 그곳에서 불이문을 건너 산영루로 들어가는 길에 만나는 다리가 바로 능파교이다.

 

금강산의 한 봉우리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절의 앞 계곡으로 맑은 물을 흘려보낸다. 그 위에 석재로 된 다리는 우리나라의 많은 홍예교 중에서도 아름답다고 소문이 나 있다. 보물 제1336호인 능파교’.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이 다리는,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38 건봉사 경내로 들어가는 다리이다.

 

 

다리가 있는 곳은 신라 법흥왕 7년인 520년에 아도스님이 창건을 해 원각사라고 이름을 붙였다는 절이다. 그 뒤 신라 말에 도선국사가 절 서쪽에 봉황새처럼 생긴 돌이 있다고 하여, 서봉사라고도 불렀다. 현재의 명칭인 건봉사는 고려 공민왕 7년인 1358년에 나옹스님이 붙인 이름이다.

 

여러 번 수난을 당한 능파교

 

118일 찾아간 고성에서 만난 다리. 능파교는 건봉사의 대웅전 지역과 극락전 지역을 연결하는 무지개 모양의 다리이다. 다리는 한 칸의 홍예를 조성한 것으로는, 그 규모가 상당히 크다. 폭이 3m에 길이는 14.3m에 이른다. 다리 중앙부의 높이는 5.4m이다.

 

능파교는 조선 숙종 34년인 1708년에 건립된 능파교신창기비(凌波橋新創記碑)가 남아있어, 축조된 시기 및 내력에 관해 자세히 알 수 있다. 비문에 따르면 숙종 30년인 1704년부터 숙종 33년인 1707년 사이에 처음으로 축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영조 21년인 1745년에 대홍수로 인해 붕괴가 된 것을, 영조 25년인 1749년에 중수하였다. 고종 17년인 1880년에 다시 무너져, 그 석재를 대웅전의 돌층계와 산영루를 고쳐 쌓는 데에 이용하기도 하였다.

 

2003년에는 능파교 홍예틀과 접하는 호안석 중 변형을 해체하여 원형을 찾아 보수를 하였다. 그러나 보수를 하던 중에 능파교가 훼손되어, 문화재 전문가의 도움으로 200510월에 원형 복원을 하여 오늘에 이른다.

 

 

뛰어난 조형미를 보이는 홍예교

 

능파교는 다리의 중앙부분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를 틀고, 그 좌우에는 장대석으로 쌓아서 다리를 구성하였다. 홍예는 하부 지름이 7.8m이고 높이는 기석의 하단에서 4.5m이므로, 실제 높이는 이보다 조금 더 높다.

 

고성지역을 답사하면서 찾아간 능파교. 날이 쌀쌀한데도 많은 사람들이 능파교를 건너 산영루 밑을 통과한다. 능파교 밑으로 흐르는 물은 맑기만 하다. 능파교의 교각 밑으로 들어가 본다. 밑에서 바라보니 능파교의 양편으로 삐죽이 고개를 내민 산영루의 처마가, 마치 능파교에 날개를 달아놓은 듯하다. 장대석으로 고르게 쌓은 홍예를 바라보고 있자니, 과거 석재를 이용한 조상들의 조형술에 감탄이 절로 터져 나온다. 어떻게 이렇게 반듯하니 돌을 쌓아올려 서로 버티는 힘을 이용할 수가 있었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그 다리를 지나 대웅전을 향하고 있지만, 그 많은 무게를 버틸 수 있도록 축조를 하였다니 그저 놀랍기만 하다. 다리 밑으로 흐르는 맑은 물에 손을 넣어본다. 폐부 깊숙이 한기가 전해진다. 한 여름에도 이곳은 물이 차가워 오래 물속에 있지를 못하는 곳이다. 그만큼 자연이 살아 숨 쉬는 곳이기도 하다.

 

 

자연을 벗어나지 않는 석조조형물

 

석재를 이용해 조성한 다리 하나가 갖는 의미. 그저 다리라는 것이 사람들이 건너기 위한 조형물이려니 생각을 하겠지만, 그 다리가 결코 자연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과거 우리의 모든 건축물은 결코 자연을 넘어선 적이 없다. 그것이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될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능파교를 건너본다. 그저 그 위에서 11월의 찬바람을 맞으며 한 없이 서 있고 싶다. 오랜 세월 그렇게 자리를 지켰을 능파교에 대한 예의를 차리고자 함이다. 사람들에게는 다리이겠지만 30년 세월 문화재를 찾아 전국을 돌아본 나에게는, 능파교는 다리가 아닌 그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내년 봄 산수유가 계곡에 흐드러지게 필 때, 다시 한 번 찾아보아야겠다.

 

충남 보령시 동대동 809-1에 소재한,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39대천한내돌다리’. 한내돌다리는 조선시대 남포, 비인, 서천지역의 사람들이 보령현을 거쳐 한양으로 가는 길목에 조성되었던 12간 돌다리이다. 동국여지지, 여지도서, 신안읍지 등의 기록에는 고려 원종 15년인 1274년에 축조된, 전라도 함평의 고막천석교와 같은 비슷한 유형으로 조성되었다 전하고 있다.

 

이 돌다리는 사람들과 우마차등이 통행하였고, 일제초기까지 주 교통로로 이용했다고 한다. 규모는 폭 2.38m, 길이 50m 정도였다고 하니 적은 다리는 아니다. 다리를 조성한 석재는 거대한 화강암으로 인근 왕대산의 돌과 같아, 채석 후에 뗏목을 이용하여 이곳으로 운반 한 것으로 짐작된다. 1970년대 초까지도 20m 정도가 남아 있다가 붕괴되었다.

 

 

우마차 통행에 적당한 돌다리

 

대천한내다리는 대천천 하류에 있었던 다리로, 예전에는 남포와 보령을 이어주는 중요한 교통로였다고 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물살에 쓸려 떠내려가거나, 하천 제방공사를 하면서 파손되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1978년 수습하여 옮겨 두었다가, 1992년에 대천천 강변에 옮겨 일부만 복원해 놓았다고 한다.

 

다리의 몸체를 받치는 기둥은 거칠게 손질한 23개의 돌을 쌓아 이루게 하여, 모두 6개의 기둥이 불규칙하게 배치되어 있다. 그 위로 넓적한 판돌인 시렁돌을 걸쳐서 다리를 완성하였는데, 원래는 12칸 돌다리라 하나 적어도 22칸은 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다리의 높이는 낮은 편이어서 바닷물이 밀려오거나 홍수가 질 때면 물에 잠기고, 보통 때에도 가끔 잠기었다고 한다.

 

 

다리의 구조는 1.5~2m 정도의 지대석을 묻고, 그 위에 다듬은 받침돌 3단을 횡으로 놓았다. 이것으로 다리기둥과 멍에를 대신 한 다음, 그 위에 길이 3~4.5m, 70~90cm, 두께 30~40cm의 시렁돌 3개를 얹어 다리바닥을 구성하였다. 바닥이 3개의 시렁돌로 이루어져 우마차 통행에 적당하게 설계된 다리이다.

 

한내돌다리를 밟아보다

 

지난 6일 찾아간 보령시 문화재 답사. ‘한내돌다리는 그동안 몇 번이나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전국에 산재한 많은 돌다리들을 돌아보는 재미 또한 쏠쏠하기 때문이다. 돌다리마다 갖가지 사연도 많지만, 돌다리들의 모습들이 하나 같이 독특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개 우리나라의 돌다리들이 무지개모양의 아치 모형으로 구성을 하고 있는데 비해, 한내돌다리는 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기 때문에 꼭 들려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빗방울이 간간히 떨어지지만, 그것이 대수랴. 대천천 한 옆에 복원을 해 놓은 한내돌다리. 주변 정리를 해놓고 다리 밑으로는 수초가 자라났다. 물의 깊이를 보니 옆으로 흐르는 대천천과 비슷한 수위를 갖고 있어, 대천천과 연결이 된 것은 아닌지. 돌다리를 여기저기 돌아보다가 다리 위로 올라갔다.

 

다리 위에 얹은 시렁돌 틈 사이로 물이 보인다. 다리 위를 걸어본다. 예전 이 다리를 건너 한양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간 것일까? 아마도 괴나리봇짐을 둘러메고, 짚신 두 켤레 덜렁거리며 한양으로 올라간 사람들. 소고삐를 잡고 불어난 물에 조심스럽게 다리를 건너던 사람들. 그런 많은 것들을 그려본다.

 

 

그렇게 대천한내다리에 빠져있는데, 빗방울이 후드득거리며 떨어진다. 구경도 좋지만 카메라가 젖으면 그보다 큰 낭패는 없다. 그동안 많은 카메라를 망가트리면서 다닌 문화재답사이다. 비록 몸이야 젖어도 카메라만은 젖지 말아야 한다. 좀 더 자세히 돌아보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컸지만, 우선은 비를 피하는 수밖에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2에 소재한 백제시대의 고찰인 성주사가 자리했던 절터. 성주사지를 찾은 6일 아침에는 서해 바닷가가 가까워서인가 바람이 차갑다. 그래도 성주사지를 찾은 것은 많은 문화재를 한 자리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벌써 몇 년 째 찾아보지 못한 성주사지. 멀리서도 보이는 탑들의 상층부반 보아도 가슴이 뛴다.

 

성주사 터에는 국가와 충청남도에서 지정한 문화재들 말고도 많은 석조물들이 있다. 발굴을 마친 성주사지 여기저기에는 금당터 등 주초들이 남아있어, 옛 성주사지의 가람배치와 그 위용을 가늠하기란 어렵지가 않다.

 

 

붉은 말이 3일이나 울었다는 성주사

 

전하는 말에 의하면 성주사는 백제시대 사찰로, 백제멸망 직전에 붉은 말이 이 절에 나타나 밤낮으로 여섯 번이나 절을 돌면서 백제의 멸망을 미리 예시해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왜 붉은 말이 하필이면 성주사를 돌면서 그렇게 울어댄 것일까? 성주사는 백제 법왕이 왕자일 때인 599,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을 위해 건립한 사찰이라고 전한다.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할 것을 붉은 말이 알려주었다고 전하는 성주사. 이 무렵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궁중의 홰나무가 사람처럼 울었다든가 우물물이 핏빛으로 변했다든가 하는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승자의 기록에서 보이는 것들이기 때문에, 흉흉한 민심을 바로잡기 위해 백제멸망의 당위성을 만들기 위함인지도 모르겠다.

 

 

신라말 <숭암사 성주사 사적>에 보면 성주사의 규모가 놀랍기만 하다. 불전 80, 행랑 800여 칸, 수고 7, 고사 50칸으로 거의 천여 칸의 거대한 규모를 가진 사찰이었다. 현재 발굴 후 잘 정비가 된 성주사지는 9천여 평의 대지를 낮은 석축 담으로 둘러싸고 있다. 성주사 절터에는 건물의 주춧돌을 포함한 많은 석물이 남아 있는데, 그 중 가장 눈길을 붙드는 것은 바로 성주사지석계단이다.

 

도난당한 사자상도 복원 해

 

성주사 금당은 백제가 멸망한 후인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되었다. 백제에서 가장 웅장한 가람이었던 성주사에 신라는 왜 금당을 새롭게 조성한 것일까? 금당 터에 앉아 하염없이 고뇌에 빠져보지만, 시원한 답변을 얻을 수가 없다. 통일신라시대에 금당을 조성했다면, 금당터를 오르는 돌계단도 이 시기에 만들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성주사지에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40호인 성주사지석계단(聖住寺址石階段)’이 있다. 계단은 잘 다듬은 널찍한 돌을 이용하여 5단으로 쌓아 올렸다. 금당 터 사면에는 금당을 오르는 계단이 있지만, 이 중앙오층석탑에서 금당으로 오르는 계단은 남다르다. 정면이기 때문에 양쪽 소맷돌에 사장상을 조각해 앉혀놓았다. 이 사자상은 1986년에 도난을 당한 것을 다시 복원한 것이다.

 

석불좌 하나만으로도 훌륭한 석조각예술

 

금당의 한 가운데는 석불좌가 남아있다. 넓게 석재를 이용해 2단으로 조성한 석불좌는 조형미기 뛰어나다. 큼지막하게 사각형으로 조성한 석불좌. 일반 석불좌처럼 높지가 않은 것은, 아마도 이 부분이 하층기단부이고, 위에는 상층기단부가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불좌는 장대석으로 네모나게 두르고 난 뒤, 그 위에 연꽃잎을 크게 조각한 앙련을 새긴 4장의 석재를 이용해 위 기단을 올렸다. 네 장의 석재를 가변부분을 둥그렇게 조형하였으며, 그 중심을 도드라지게 하였다. 아마도 이 부분에 상층기단인 좌대를 올렸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남은 석불좌만 보아도 훌륭한 석조각임을 알 수가 있다.

 

남들은 그저 무심히 지나칠 수도 있는 성주사지 금당 터. 하지만 이 석계단과 석불좌 하나에도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그 이야기의 가운데에서 머리를 쥐어짜 보지만,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난 뒤 이곳 성주사에 다시 금당을 조성하고 아름다운 석조각을 한 것일까라는 질문에는 시원한 답이 나오지를 않는다. 무심한 바람만 지나치는 천년 고찰 터인 성주사지. 언제나 시원한 답을 찾을 수 있을까?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석현리 산126-1에 소재한 각화사는 신라 때 최초로 건립이 된 절이다. 현재 각화사에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9호인 ‘화사 각화사 귀부’가 자리하고 있다. 이 부도는 각화사에 놓여 있는 비받침돌로, 고려 전기 문신인 좌간의대부 김심언이 세웠던 ‘통진대사비(通眞大師碑)’의 일부로 전하고 있다.

 

비 받침인 각화사 귀부는 바닥돌과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등 중앙에 마련된 비좌(碑座:비몸을 꽂아두는 네모난 홈)는 약간 파손되긴 하였으나 거의 본 모습을 갖추고 있다. 등 무늬는 6각형이 전면에 덥혀 있고, 그 안에 ‘王’자와 ‘佛’자를 돋을새김으로 새겨 넣었다. 대체로 조각의 수법은 그리 뛰어난 편은 아니다.

 

 

 

효대사가 창건 한 각화사

 

각화사는 신라 신문왕 6년인 686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절로 전해지고 있다. 그 뒤 고려 예종 때 계응이 중건하였으며, 1926년에 달현이 중수하였다. 영주-봉화-울진으로 이어지는 36번 국도의 봉화 동쪽 방향 21km 지점인 춘양삼거리에서, 998번 지방도를 따라 북쪽으로 약 9km 정도를 가면 각화사 입구가 나온다. 각화사는 이 입구에서 2km쯤 올라가면 된다.

 

각화사는 원래 춘양고교 교정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사찰의 명칭도 남화사였다고 한다. 이 절을 새로 옮겨 지으면서 각화사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각화사에는 한때 800여명의 승려가 거주하였으며, 국내 3대 사찰의 하나로 손꼽혔다. 각화사는 조선시대에는 태백산 사고의 수호사찰이었다. 태백산 사고는 선조 39년인 1606년에 지어져, 1913년까지 약 300년간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해왔다.

 

 

균형미를 잃어 안타까워

 

현재 각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고운사의 말사이다. 이 각화사 절 입구 오른족애 놓인 비 받침돌이다. 이 각화사 귀부는 대체적으로 고려 전기의 정교하고도 웅대한 조각솜씨를 이어받고 있으나, 몸통에 비해 머리가 작은 감이 든다. 한 마디로 균형미가 갖춰지지 않은 고려 때의 작품이다.

 

하지만 이 각화사 귀부는 소중한 고려 전기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현재는 이 귀부에 비의 몸돌과 머릿돌을 새로이 만들어 그 위에 세워놓았다. 오히려 그렇게 후에 제작해 올린 비문과 머릿돌로 인해 중요한 문화재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할까 보아 걱정스럽다. 각화사 귀부는 폭은 190cm에 높이는 92cm이다.

 

30년 세월 만나본 문화재, 하지만 난 아직 초보자

 

문화재를 답사하기 시작한 지 벌써 30년 가까운 세월이다. 그간 숱하게 많은 문화재를 만났고, 그 문화재에 대한 기사를 썼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 문화재에 대해서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아마 이제 겨우 발걸음을 땐 초보에 불과하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만큼 문화재는 많은 지식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내가 문화재 전문가도 아니고, 그저 우리 문화재의 소중함을 깨달아 전국을 다니면서 만난 문화재들이다. 혼자만 그 아름다움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 조금은 아쉬워, 많은 사람들과 공유를 하겠다고 쓰기 시작한 기사가 꽤나 쌓였다. 그러나 아직 돌아볼 문화재가 너무 많다는 것을 느낀다. 한 마디로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한 가지 원이 있다면, 이제는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온전히 문화재를 찾아보고 글을 쓰는 데만 전념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물론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더욱 마음이 아플 뿐이다. 소중한 우리문화재에 대한 소개와 땀을 흘리며 찾아보기. 정말 누군가 이 일을 계속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150에 소재한 보원시지. 보물 제12호인 서산 보원사지 석조 (瑞山 普願寺址 石槽)’는 서산 보원사 터에 위치한 석조이다. 보원사는 고란사라고도 하며 사찰에 대한 역사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1959년 국보 제84호인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이 발견되면서 큰 관심을 끌었던 곳이기도 하다.

 

석조는 승려들이 물을 담아 쓰던 돌그릇으로, 원형과 팔각형, 장방형 등이 있다. 이 석조는 화강석의 통돌 일석을 파서 만든 직사각형 모양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인 석조의 형식을 보인다.

 

 

크기가 거대한 보원사지 석조

 

보원시지 석조는 규모가 거대하며 표면에 아무 장식이 없어 장중해 보인다. 내부 각 면에도 조각한 흔적이 없으며, 밑바닥 면은 평평하고 한쪽에 약 8정도의 원형 배수구가 있을 뿐이다. 이 석조는 안쪽과 위쪽에만 정교하게 다듬고, 바깥쪽에는 거칠게 다듬은 자국이 그냥 남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석조는 땅에 묻어두고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사적 제316호인 보원사지는 상왕산 보원마을에 있는 절터이다. 보원사는 창건 연대는 확실치 않지만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 사이인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백제의 금동여래입상이 발견되어, 백제 때의 절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이 석조는 고려 경종 3년인 978년에 창건된 보원사의 석조이다.

 

 

다양한 용도로 사용한 석조

 

석조란 승려들이 물을 담아 쓰던 용기를 말하는데, 그 용도는 여러 가지가 있다. 금당 앞에 자리를 한 석조는 승려들이 예불을 들이기 위해 금당에 오를 때 손을 정갈하게 씻기 위한 것으로 사용했으며, 그 외에도 목욕을 하거나 마실 물을 담아두기도 했다. 또는 음식을 조리하기 전에 씻을 때 사용하기도 했다.

 

보원사지 석조는 장방형의 것으로, 길이 3.48m, 너비 1.75m, 높이 0.65m의 크기이다. 이 석조는 당시 보원사라는 사찰의 규모를 알려주는 좋은 유물이다. 석조의 벽 두 곳에 커다란 갈라짐 현상이 일어 깨어져 있는 보원사지 석조. 오랜 세월 속에서 자연스런 훼손이 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프다. 좀 더 일찍 우리 문화재에 대해 신경을 썼더라면 더 완벽한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으려나? 하는 생각에서이다.

 

 

각종 보물들이 즐비한 보원사지

 

보원사지에는 몇 기의 보물이 남아있다. 그 중 법인국사 보승탑비의 기록에 보면 승려 1,000여명이 머물렀다고 했다. 그런 기록을 유추해 볼 때 보원사 당시에는 매우 큰 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보원사지에는 보물 제102호인 석조를 비롯하여, 보물 제103호 당간지주, 보물 제104호 오층석탑과 보물 제105호 법인국사보승탑 등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다.

 

 

보원사지 가까이에는 국보인 서산 마애삼존불을 비롯해 불교유적이 집중 분포하고 있어 불교사 연구에 중요한 유적으로 손꼽힌다. 석조 하나가 주는 고찰의 의미. 문화재란 그것으로 인해 그 문화재가 갖는 역사적인 면들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에 상당히 소중하다. 그런 문화재를 작 보존하는 일이야말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책임이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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