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제136호인 경주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慶州 南山 彌勒谷 石造如來坐像)’, 경북 경주시 배반동 산66-2에 소재하고 있다. 신라시대의 보리사 터로 추정되는 곳에 남아 있는 이 석조여래좌상은 전체 높이 4.36m, 불상 높이 2.44m의 석불좌상으로, 현재 경주 남산에 있는 신라시대의 석불 가운데 가장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이 석조여래좌상은 뒤편에 조성한 광배의 뒷면에도 선각으로 된 약사여래불을 조성했다. 광배 뒤편에 새긴 약사여래불이 처음부터 조성을 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이렇게 앞으로는 석조여래좌상을 조각하고 뒤편에도 선각으로 약사여래불을 조성한 경우는 보기 드문 예이다.

 

마귀를 쫓는 항마촉진인의 내력

 

이 석조여래좌상의 머리칼은 작은 소라 모양을 하고 있으며,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인 육계가 높게 솟아 있다. 얼굴은 둥근 편인데 은은한 웃음을 띤 표정이 사람의 마음을 푸근하게 만든다. 법의는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나 힘없이 축 늘어진 느낌이며, 군데군데 평행한 옷 주름을 새겨 넣었다.

 

결기부좌를 한 형태로 좌정한 석조여래좌상의 손모양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아래로 향하고 왼손은 배 부분에 대고 있다. 이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인데 다소 연약해 보인다. 옛날 석가모니가 성불하기 전에 정각산의 선정굴에서 내려와, 보리수 아래 앉아 결가부좌하고 다시 선정에 들어갔다.

 

 

선정에 든 석가모니를 본 제6천의 마왕 파순은, 만약 석가모니가 성불하여 부처가 된다면 일체의 중생이 구제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석가모니가 성불을 하고나면 마왕의 위력이 중생들에게 못 미친다고 생각을 해, 염욕, 능열인, 가애락이라는 3인의 미녀를 보내어 석가모니를 유혹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가 번번이 성공하지 못하자 마계의 모든 군사를 동원했다. 마왕 파순은 칼을 석가모니에게 겨누면서 "비구야, 나무 아래 앉아서 무엇을 구하는가. 너는 신성한 금강보좌에 앉을 자격이 없는 자이다." 라고 소리쳤다. 이 말을 들은 석가모니는 "천상천하에 이 보좌에 앉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 한 사람뿐이다. 지신(地神)이여 이를 증명하라." 고 하면서 선정한 오른손을 풀어서 오른쪽 무릎 위에 얹고 손가락으로 땅을 향했다.

 

그러자 지신이 땅에서 튀어나와 마왕 파순을 물리치며 석가모니의 말을 증명하였는데, 이 때의 수인이 바로 항마촉지인이다. 항마촉지인은 항마인, 촉지인 등의 명칭으로도 불리고 있는데, 이 수인은 오직 석가모니만이 취하는 수인이다.

 

마귀는 쫓고 중생은 고치고

 

불상의 뒤편에 조성한 광배는 장식적이다. 광배에는 작은 부처상인 화불과 보상화, 넝쿨무늬 등을 화려하게 조각을 하였다. 광배 뒤편에 선각으로 약사여래불을 조성한 경우는 밀양 무봉사와, 남원 만복사지 석불입상 등에서 보이는 특이한 경우이다.

 

 

경주 남산 미륵곡 보리사 터에 소재한 석조여래좌상. 전면은 항마촉지인을 한 여래좌상이 세상의 악한 기운을 쫓고, 뒤편에는 약사여래불을 조성해 중생을 질병에서 구제하고 있다. 이렇게 앞뒤로 조성한 석가여래와 약사여래로 인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편해지기를 바란 것일까?

 

내년 봄, 꽃이 피는 계절이 돌아오면 날을 잡아 경주일대를 한 번 돌아보리라 마음을 먹는다. 남산 여기저기 산재해 있는 수많은 부처님들을 만나보기 위해서.

 

충북 충주시 가금면 중앙탑길 112-28에 소재한 국립충주박물관. 국보인 중앙탑 앞쪽에 위치한 충부박물관의 야외에는 많은 석조물이 전시가 되어있다. 이곳에는 충주댐 수몰지역에서 옮겨온 신매리 선돌을 비롯하여, 율능리 석불입상, 장성리 삼층석탑과 석불좌상, 용탄동 석탑, 신만리 부도 등 많은 불교관련유물과 각종 묘비, 문인석과 동자석, 촛대석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성불사 석불좌상. 높이 98cm 정도인 이 석불좌상은 괴산군 불정면 성불사에 있던 곳을 옮겨 온 것이다. 고려시대의 석불좌상으로 추정하는 불신에 덧칠을 하여, 정확한 모습을 알아보기는 어렵지만 원래의 모습을 짐작할 수는 있다.

 

 

도식화된 느낌을 주는 석불입상

 

불정면은 행정구역상 괴산군에 속하지만, 예전에는 충주에 포함되었던 곳이다. 이 석불좌상은 머리위에 상투 모양인 육계를 너무 과장되게 크게 조성했으며, 오른쪽 손목 이하 부분은 시멘트를 사용해 보수를 한 것으로 보인다. 머리가 신체에 비해 유난히 크게 조상하였으며, 마모가 심해 눈, , 입 등의 윤곽을 알아보기가 어렵다.

 

이목구비를 분간하기는 어렵지만, 어깨의 선은 당당하다. 이렇게 어깨의 선이 당당한 것으로 보거나 법의의 형태 등으로 보아, 이 석불좌상은 통일신라 말기나 고려 초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목 아래에는 여러 개의 장식을 곁들인 목걸이를 하고 있으며, 법의는 우편견단이다.

 

법의는 평행사선으로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법의는 도식화 되어있으며, 양 다리와 후면의 들 뒤에도 주름을 조성했다. 전체적으로는 신체의 표현감각이 뛰어난 석불좌상이다.

 

 

지방의 장인이 조성한 불상인 듯

 

이 성불사 석불좌상은 통일신라시대의 전성기 때 석조불상의 양식을 그대로 따른 듯하지만, 도식화 된 경향이 짙은 것으로 볼 때, 고려 초기의 석불좌상으로 보인다. 육계가 너무 크게 표현을 하는 바람에 마치 머리 위에 투구를 뒤집어 쓴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석불좌상. 그러나 신체의 비례는 안정감이 있다.

 

오른손은 손바닥을 아래로 하여 무릎 위에 올려놓았으며, 왼손은 배 아래편에 대고 있지만, 손의 형태가 떨어져 나간 듯 정확한 손의 형태는 파악하기가 어렵다. 왼편 무릎은 금이기고 쪼개진 것을 맞추어 놓았다.

 

등 뒤편에는 법의를 굵게 틀어 모아 세 줄을 만들었다. 그 중 두 줄은 좌측 어깨에서 오른쪽 허리로 사선으로 내려갔으며, 한 줄은 꼬듯이 모아 밑으로 처트렸다. 우리나라에서 보이는 많은 석불좌상이나 입상의 경우 광배가 있을 때는 뒤편에 이렇게 조각을 하지 않는데 비해, 성불사 석불좌상은 뒤편에까지 조각을 해 놓았다.

 

육계가 필요이상으로 크게 조성이 되었다든가, 손의 모습이 자연스럽지 않은 것들로 보아 지방의 장인에 의해서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성불사 석불좌상. 비록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지 않은 비지정 석조물이긴 하지만, 천 년 세월을 그렇게 자리를 지켜 온 것으로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주) 그동안 전국을 다니면서 답사를 한 많은 자료들을 일일이 소개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점이 아쉬워 앞으로는 현재의 답사 자료와 함께 오래 전에 답사를 했던 자료들을 함께 올리려고 합니다 이점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전북 장수군의 문화재를 답사하다가 만난 거대석불입상. 장수군 산서면 마하리 477번지 원흥사 미륵보전 안에 모셔진, 전북 문화재자료 제41호로 지정된 원흥 석불입상이다. 이 석불은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나, 그 형태로 보아서는 고려시대의 거대석불입상에 속하는 것 같다.

 

원흥 석불입상은 현재 이곳에 있는 원흥사 미륵보전 안에 소재하고 있는데, 그 전체 높이가 4m나 되는 거대석불이다. 이 석불은 문화재청 소개에는 삼국시대의 석불, 장수군청의 소개에는 고려 중엽에 조성된 것으로 소개를 하고 있다. 또한 이외에도 석불입상의 무릎 아랫부분이 땅에 묻혀 있다고 소개를 하고 있어,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땅속에 묻힌 부분이 또 있다는 것인지

 

문화재청 안내에도, 장수군청의 소개와 절에 세워진 문화재 안내판에도 현재 1m 정도가 땅 속에 묻혀 있다라고 소개를 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이 원흥 석불입상은 땅 속에 묻힌 부분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서로가 맞지 않는 이러한 문화재 안내문들 때문에, 종종 혼란을 겪기도 하는 것이 우리 문화재의 현실이다.

 

 

이 석불입상을 보려고 원흥사를 찾아가 사진을 좀 찍겠다고 부탁을 했다. 절의 공양주 인 듯한 분이 나와 곤란하다는 듯 이야기를 한다.

 

우리 스님은 부처님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세요.“

신문에 내려고 하는데, 사진 몇 장만 찍을게요.”

지금까지 수도 없이 그런 소리를 들었어요. 홍보를 해주겠다고

그랬나요?. 저는 꼭 소개를 하겠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너무하지. 사진만 찍어가고 나온 대는 없어요.‘”

 

이런 경우는 참 난감하다. 요즈음은 문화재답사를 다니는 사람들이 꽤 많아 진듯하다. 답사를 하다가 보면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이곳에도 그동안 꽤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듯한데, 소개가 되지 않아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다니. 이런 경우 내 잘못은 아니지만, 괜히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둔탁한 느낌이 드는 거대석불

 

원흥 석불입상은 머리가 큰 편이다. 소발에 이마에는 백호가 있고, 목에는 삼도가 있으나 분명하지가 않다. 큰 얼굴에 비해 눈과 입은 작고 코는 큰 편이다. 귀는 어깨까지 닿을 듯 늘어져 있다. 이 석불입상은 노천에 방치가 되어 있던 것을, 1904년 마을에 사는 이처사 부부가 꿈을 꾼 뒤 전각을 조성해 모셨다고 한다.

 

그 뒤 1972년 주지 김귀수씨가 법당 중앙에 위치하도록 설계하여 안치하였는데, 석불의 머리 위에는 모자가 얹혀 있었다고 한다. 현재의 석불은 모자가 없으며, 몸에 비해 얼굴이 큰 편이다. 신체의 어깨와 몸의 너비가 같은 것이 전체적으로는 둔해 보인다. 더욱 목이 매우 짧게 표현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더 드는 것만 같다.

 

 

고려시대 거대석불로 추정되는 입상

 

어깨에 걸친 법의는 통견으로 옷 주름이 다리부분까지 늘어져 있다. 양 어깨를 감싼 법의는 가슴이 거의 노출되었고, 양 소매와 배 아래쪽으로는 형식적인 옷주름을 표현하였다. 배 부분에 댄 손은 양 소매에 넣어 감추고 있으며, 배 아래쪽으로 표현한 옷 주름은 양편으로 갈라져 있다.

 

형식적으로 표현한 옷 주름은 무릎 아랫부분에서 마무리를 하였고, 그 밑으로는 안치마를 겹쳐 입었다. 현재 놓여있는 발은 원래의 것이 아닌 듯하다. 석불입상의 크기나 표현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거대석불로 추정되는 원흥 석불입상. 찍을 수 없다고 하면서도 문까지 열어주는 바람에 촬영을 할 수 있었지만, 바로잡지 않은 안내판으로 인해 썩 기분이 좋지는 않다. 그래도 부처님의 마음으로 이해를 하고 다녀야 하는 것인지.


 

문화재청 설명

전라북도 장수군 산서면 마하리 팔공산 기슭에 있는 원흥사 법당 안에 모셔져 있는 높이 4m의 거대한 석불입상이다. 원래 노천에 방치되어 있었는데, 1904년 이 마을에 살던 이처사 부부가 꿈을 꾼 뒤 불상을 만들어 모셨으며, 그 뒤 딸 청신과 손자 김귀수가 현재의 원흥사를 세웠다고 한다.

 

얼굴은 살찐 모습이며 눈과 입이 작은 편이나 코는 큰 편이다. 목은 매우 짧게 표현되었으며 3개의 주름인 삼도(三道)는 분명하지 않다. 신체는 어깨와 하부의 너비가 같아 둔한 느낌을 준다.

 

양 어깨를 감싼 옷을 입고 있는데 가슴이 거의 노출되었고, 양 소매와 배 아래쪽으로는 형식적인 옷주름을 표현하였다. 손은 양 소매에 넣어 감추고 있으며, 무릎 이하는 땅속에 묻혀 있다. 머리 위에 모자가 얹혀져 있었다고 하는 이 불상은 손모양이 특이하며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전해진다.

 

홍양사터라고 전하는 홍천 물걸리 사지. 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보물 5점이 옛 절터를 지키고 있다. 19674월에 이 절터를 발굴하면서, 출토 유물로는 통일신라시대의 금동여래입상 1, 고려시대 철불 파편 4, 철쇄 파편 2, 암막새 4, 수키와 조각 6, 암키와 조각 6점 등이 발굴되었다.

 

또한 청자 조각 4, 토기 조각 5, 조선시대 백자 조각 7점이 있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51호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542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보물 제543호 대좌, 보물 제544호 대좌 및 광배, 그리고 보물 제545호인 삼층석탑이 옛 절터에 보존되어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물걸리 사지는, 신라 때부터 조선조까지 이곳에 절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이곳은 사지 앞에 대승사라는 절이 들어서 관리를 하고 있다.

 

통일신라 말의 석조여래좌상

 

이 물걸리 사지 동편에 마련한 전각. 그 안에는 4기의 보물이 보관되어 있다. 그 중 보물 제541호로 지정이 된 물걸리 석조여래좌상얼굴은 마멸이 심해 세세한 표현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전체적은 형태의 모습에서 이 여래좌상이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이 되었음을 쉽게 알 수가 있다.

 

이 석조여래좌상의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은 듯하다. 정수리 부분에 있는 상투 모양의 머리 묶음인 육계가 펑퍼짐하게 솟아있다. 법의는 양 어깨에 걸치고 있고, 가슴에는 띠 모양의 매듭을 단정하게 묶은 것이 보인다. 어깨는 둥글지만 두텁고 투박하게 보인다.

 

 

광배가 사라져버린 이 석조여래입상은 상체는 8세기 불상에 비해 평판적이고 왜소한 편이다. 그런 표현을 하다가 보니, 당당한 양감이 사라져버린 모습이다. 손은 오른손을 무릎위에 올려 손끝이 아래를 향하고, 왼손은 손바닥이 위로 향하게 하여 무릎 위에 올렸다. 이런 수인은 항마촉지인으로 부처가 깨달음에 이른 순간을 상징한다. 이러한 수인으로 보아 이 석조여래좌상은 석가모니 부처임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얼굴은 마모가 심해 자세히는 알 수가 없으나, 눈과 코, 입이 적게 표현되었다. 이러한 형태의 얼굴모습은 통일신라 후기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통일신라 전기에 비해 양감면에서 뒤처지고 있다.

 

 

여러 마리의 팔부중상과 가릉빈가로도 부족했소?

 

불상이 앉아있는 불대좌는 비교적 보존이 잘 되어있다. 오랜 세월 풍상에 씻기면서 조금은 마모가 되기도 했지만, 문양 등을 정확하게 알아볼 수가 있다. 이 불대좌는 상, , 하대로 구분되어 있다. 8각형으로 조성된 하대에는 각 면마다 무늬가 있고, 향로와 상상의 새인 가릉빈가가 새겨져 있다.

 

가릉빈가와 향로는 안상을 새기고 그 안에 부조로 조각하였다. 중대석은 아랫돌에는 커다란 앙화의 끝에 귀꽃을 새겨 넣어 멋을 더했다. 그리고 8각의 각 면에는 팔부중상을 돋을 새김하였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팔부중상의 흔적은 많이 마모가 되어, 정확한 표정이나 행동등을 이해하기가 쉽지가 않다.

 

 

상대에는 활짝 핀 모양의 여러 장의 연꽃무늬를 겹쳐 새겨져 있다. 마모로 인해 신체표현을 자세하게 알 수 없으나 둥근 얼굴에 눈, , 입이 작고 신체가 두텁고 투박한 점과, 불대좌에 많은 장식을 한 점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 중엽 이후의 전형적인 석불의 양식을 보여주고 작품이다.

 

가릉빈가와 팔부대중, 그리고 향로와 연꽃 등. 비록 섬세한 표현은 아니라고 해도, 많은 문양 등을 이용한 물걸리 석조여래좌상. 아마도 광배가 남아있었다고 한다면, 그곳에는 화불과 넝쿨문양 등을 조각했을 것이다. 사라진 한 부분이 상당히 아쉽게 느껴지는 것은, 역시 문화재란 처음 모습 그대로를 만날 대 가장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경기도 용인시 이동면 묵리 55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11호인 용덕사 석조여래입상이 있다. 이 불상은 이동면 천리 75번지 적동저수지 입구 저수지 하단 제방 좌측 안쪽에 있었던 것이다. 1960년대 초 저수지 축조 공사를 시작하면서, 저수지 입구 좌측으로 옮겨 정측 1칸의 전각을 짓고 안치 했었다. 후에 용덕사로 이전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약수가 좋은 절 용덕사

 

용덕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이다. 용인시 이동면의 성륜산 서쪽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용인에서 45번 도로를 이용해 이동면에서 318번 지방도를 이용하면 찾아갈 수가 있다. 용덕사 뒤편 산언덕으로 오른 곳에 있는 극락전 뒤 바위에, 암굴이 있어 일명 굴암절이라고도 한다.

 

용덕사가 위치한 성륜산은 용인의 남쪽, 안성과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주변은 높은 산들이 연달아 이어지고 있는 높고 깊은 산이다. 절은 이 산의 중턱에 위치하여 맑고 깨끗한 공기와 탁 트인 시원한 풍광, 그리고 맑은 약수를 자랑으로 삼고 있다. 절 안 곳곳에는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석축과 유물들이 있어 유서 깊은 사찰임을 보여준다.

 

절에 전해지는 기록에는 용덕사가 신라 문성왕 때 염거(廉居)화상에 의해 창건되었고, 신라 말에 도선국사에 의해 중창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기록에는 전하지 않고 있으나 절에 전하는 유물들로 미루어 보아 고려시대에는 상당히 번창했던 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절 아래 이동면 일대의 땅 대부분이, 용덕사에 속해 있었을 정도의 사세를 자랑했다고 한다.

 

 

통일신라 말의 석조여래입상

 

용덕사 석조여래입상은 머리에는 육계의 흔적이 있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다. 법의는 통견이며 양쪽 팔에서 흘러내린 천의는 발끝에 닿아있다. 가슴 앞에서 둥글게 원호로 나타나는 의문(衣文)이 길게 처지면서 하반신에서 양 다리에서 타원형의 주름을 만들면서 흐른다. 도식화된 이러한 형태의 옷주름 표현은 8세기 이후의 불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수결은 시무외여원으로 보이나 오른손에는 보주를 쥐고 있다. 수인과 옷주름 등으로 볼 때 전체적으로 옷주름이 도식화된 경향을 일부 보이고, 신체는 부피감 없이 다소 경직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런 형태는 통일신라 불상양식을 계승하면서 고려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작품으로 보인다.

 

 

지용화수화형의 수인이 이채로워

 

용덕사의 석조여래입상은 미륵전 안에 모셔져 있다. 예전 신라시대에는 거밀현의 관아에 모셔졌던 석조불상으로 추정된다. 이 여래입상은 거창 양평동 석불입상, 예천 동본동 석불입상에서 나타나는 장신화 경행을 보이고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시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 속조여래입상은 지용화수화형의 수인을 하고 있어 이채롭다. 왼손은 여원인을 취하고 있으며 오른손은 가슴까지 끌어올려 만개하지 못한 꽃봉오리를 잡고 있다. 이 불상은 미륵도상 연구에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 석조여래입상이 왜 관아에 있었을까? 이래저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너무 많아 문화재답사는 늘 궁금증이 커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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