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하나를 복원하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가 된다. 한 부분이 사라졌던 것을 제 모습으로 되돌리기 때문에 그만큼 많은 노력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419 일대에 자리하고 있는 고달사지. 사적 제382호인 고달사지에는 국보 고달사지 승탑을 비롯해 보물과 유형문화재 등이 자리하고 있다.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인 764년에 창건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창건 당시에는 봉황암이라는 불렸다는 고달사는 혜목산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 이 고달사지에 분포가 되어있는 발굴된 유적지를 돌아보아도 당시에 얼마나 큰 절이었는가를 가늠할 수 있다. 또한 신털이봉이라고 전해지는 곳에 쌓인 흙더미라는 작은 산을 보아도 이 곳에 얼마나 많은 사부대중이 생활을 했는가를 알 수가 있다.

 

 

고려시대에는 왕실의 비호를 받았다는 고달사. 고려 고종 20년에는 혜진대사가 주지로 취임을 했고, 원종 1년인 1260년에는 절을 크게 중창을 했다. 원종대사는 신라 경문왕 9년인 869년에 태어나, 고려 광종 9년인 958년에 90세로 입적하였다. 원종대사가 입적하자 광종은 신하를 보내어 그의 시호를 원종이라 하고 탑 이름을 혜진이라 내리었다.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갈 때의 귀부

 

대개 탑비 등에서 보이는 귀부의 머리는 시대에 따라 약간 차이가 난다. 보물 제6호로 지정 되어있는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의 귀부의 머리는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바로 거북이의 몸에 용의 머리를 하고 있는 형태이다.

 

 

받침돌인 귀부에 조각된 머리는 눈을 부릅떠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눈 꼬리가 길게 치켜 올라가 매우 험상궂은 모습이다. 눈은 부라리고 콧구멍에서는 금방이라도 불이 뿜어져 나올 것만 같다. 앞다리는 마치 땅을 박차고 나가려는 듯 힘이 있어 보이며, 발톱은 사실적으로 표현을 해 땅을 누르고 있는 듯하다. 마치 당장이라도 앞으로 나아갈 기세이다.

 

목은 길지 않아 머리가 등에 바짝 붙어 있는 듯하다. 등에는 2중의 6각형 귀부모양을 정연하게 조각되었으며, 중앙부로 가면서 한 단 높게 소용돌이치는 구름을 첨가하여, 비를 끼워두는 비좌를 돌출시켜 놓았다. 이 원종대사탑비에 기록된 비문에 의해 975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탑비의 거북의 머리가 험상궂은 용의 머리에 가깝고, 목은 짧고 두 눈방울이 둥그렇게 부라리고 앞을 바라보고 있는 점. 그리고 귀두의 표현이 격동적이며 구름무늬의 번잡한 장식 등으로 볼 때,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로 넘어가는 전형적인 시대적 특징을 지닌 귀부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깨어져 사라졌던 몸돌을 복원시켜

 

원종대사 탑비의 비문에는 원종대사의 가문과 출생, 행적과 고승으로서의 학덕 및 교화, 입적 등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고 한다. 이렇게 소중한 기록을 담아 놓은 비가 일찍이 무너져 비신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져 있으며, 이곳 절터에는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 있었다. 그런 귀부와 이수의 중간에 사라진 몸돌인 탑비가 이번에 복원이 된 것이다.

 

그동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었던 몸돌의 비문은 부러진 부분을 제외하고는 상태가 양호하여 글자의 판독이 가능했다고 한다. 탑비에는 원종대사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는데, 비문은 김정언이 짓고, 장단열이 전액을 썼다. 또한 비문은 해서로 바둑판같은 선이 그어진 네모 칸 안에 썼으며, 글자는 이정순이 새겼다.

 

 

이렇게 원종대사 탑비의 몸돌이 복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부러진 부분의 상태가 양호했다는 점이다. 다시 원형으로 복원이 되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원종대사탑비. 비록 그 색깔이 달라 조금은 어색한 점도 있지만, 이렇게 복원이 되어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감출 수가 없다.

 

830일 찾아간 고달사지. 이렇게 복원이 된 원종대사탑비를 돌아보니 눈물이 흐른다. 얼마나 많은 우리의 문화제들이 훼파가 되었나? 사고가 틀리다고 종교성향이 틀리다고, 거기다가 나라가 부실한 탓에 수많은 문화제들이 제 자리를 떠났다. 앞으로 훼손이 되어있던 더 많은 문화재들이 이렇게 제 모습을 찾아갔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다.

 

서유린(1738(영조14)~1802(순조 2))은 조선의 문신으로 자는 원덕(元德), 호는 영호(潁湖) 교리 효수의 아들이다. 영조 42년인 1766년에 정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1768년 부교리를 거처 도승지, 충청도 관찰사에 이어 대사헌을 지냈다. 1781년에는 호조판서에 제수되었다.

 

정조 12년인 1788년에는 공시당상으로 국경무역을 관장하고, 1790년에는 왕의 명령으로 <증수무언록>을 번역했다. 그 뒤 선혜청 당상과 판의금 부사, 한성판윤, 수원부 유수 등을 지냈다. 순조 1년인 1801년에 집권한 벽파에 의해 경흥에 유배되어 이듬해에 유배지에서 죽었다.

 

화성박물관 앞에 늘어선 선정비

 

선정비란 백성들을 위한 좋은 정치를 베푼 지방 수령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으로, 송덕비 혹은 불망비라고 부른다. 수원시 팔달구 창룡대로 21에 소재한 수원화성박물관 경내에는 10여기의 선정비가 서 있다. 리 선정비는 중동 사거리를 비롯한 수원시내 곳곳에 서 있던 것을 이곳에 모아 놓은 것이다.

 

그런데 리 선정비를 보면 이상한 비가 하나 서 있다. 바로 화성 유수 서유린의 선정비이다. 1831년에 건립된 이 선정비는 1797년부터 1800년까지 화성 유수를 재임할 때 선정을 베푼 것을 기리는 비이다. 그런데 이 선정비의 받침돌에는 무수한 성혈이 보인다. 왜 이 비에만 성혈을 이렇게 파 놓은 것일까?

 

 

서유린의 선정비는 무엇인가 특별한 것이 있다?

 

서유린의 선정비 받침돌에는 사방으로 돌려 크고 작은 성혈이 20여 개나 보인다. 어떤 것은 깊게 파여져 있고, 또 어떤 것은 조금 파다가 만 것도 있다. 성혈이란 선사시대부터 전해오는 것으로 자신이 서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파놓은 기원성 표시라고 한다. 성혈은 커다란 바위나 선돌 등 다양한 곳에 나타나고 있다.

 

수원의 대문격인 장안문의 기단석에도 무수한 성혈이 보인다. 아마도 한양으로 향하는 관문인 장안문에 성혈을 파는 것으로 많은 기원을 한 것 같다. 하지만 왜 유독 많은 선정비 중에서 화성 유수 서유린의 선정비에만 많은 성혈을 판 것일까? 역사의 기록에서 서유린에 대한 내용을 찾아보았다. 정조와의 관계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정조와 서유린의 기록을 살펴보니

 

정조 17년인 1793년 수원을 화성으로 개칭하고, 수원부사를 유수 겸 장용외사 행궁정리사로 겸직을 시키고 채제공을 화성유수로 임명한다. 정조는 1794년에는 화성 성역을 착공하고, 정조 22년인 1798년에는 당시 화성유수인 서유린이 조세를 면죄해 줄 것을 아뢰자 이를 승낙한다.

 

1797924일 화성유수 서유린은 정조에게 시흥과 과천도 화성유수부에 속해야 한다고 건의를 한다. 용인과 진위, 안산은 화성에 속읍으로 있었기 때문에, 군사들이 화성 장용외영에 속해 있고 세금도 화성유수부로 납입됐다. 하지만 시흥과 과천은 총융청에 속해 있어 모든 세금을 총융청이 다스리는 남양부로 세금을 내야 했다.

 

 

지금의 화성시 남양동이 당시는 남양도호부라고 하는 화성유수부로부터 독립된 지방 고을이었다. 정조는 상대권력이 장악하고 있는 총융청의 병사들을 서유린의 주청에 의해 화성유수부로 편입을 시킨다. 이로써 화성 인근 5읍인 용인, 진위, 안산, 시흥, 과천이 화성유수부에 속하면서 이곳에 있는 부대 역시 장용외영으로 모두 속하게 됐다.

 

특히 용인과 진위, 안산의 3읍 협수군 12, 새로 이속된 시흥, 과천 속오군 5, 안산과 시흥 장초군 2, 용인, 진위, 안산 수어아병 8초 등, 도합 27초 병력을 확보해 기존의 화성유수부의 25초와 합쳐져 42초로 조선 최대의 정예부대가 됐다. 당시는 군제는 1초에 125명으로 이뤄졌으니 화성을 지키는 군사가 무려 5,250명에 이르는 막강한 병력을 갖게 된 것이다.

 

정조는 마지막으로 아버지 사도세자의 현륭원에 참배를 하고자 화성 행궁으로 행어를 한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뜨기 28일 전에 화성 유수 서유린을 부른다. 정조는 서유린에게 화성을 건설한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서유린이 대답을 하지 못하자 정조는 화성을 만든 목적을 설명한다.

 

정조는 농업의 활성화 등 다양한 정책들을 화성에서 만들어서, 실험하고 성공시켜 전국 8도에 보급해서 새로운 조선을 만들겠다고 생각을 말한다. 하지만 환궁을 한 정조는 28일 후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렇게 정조는 화성 유수인 서유린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음을 알 수 있다.

 

 

벽파의 눈에는 가시 같았을 서유린

 

이 외에도 사초에는 서유린과 정조의 대화가 상당수가 기록되어 있다. 이런 서유린이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 순조가 등극을 하자 벽파에 의해 귀향길에 올랐다. 화성유수는 정조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측근을 임명했을 것이다. 그런 점으로 보면 벽파의 눈에는 서유린이 가시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800년 정조가 화성 행궁에서 환궁을 한 뒤 세상을 뜨자, 순조 2년인 1802년 집권 벽파는 시파의 군사기반인 장용영 외영의 군제를 없애고, 대신 규모가 훨씬 축소된 총리영을 둔다. 이로써 정조와 함께 강한 국권의 상징인 장용외영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서유린의 선정비에 많은 성혈이 있음은 결코 우연히 아니란 생각이다.

 

1800년 정조가 죽고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자 벽파가 정국을 주도하면서 시파가 큰 탄압을 받았다. 벽파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며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과 혜경궁 홍씨의 동생인 홍낙임, 정조의 측근이었던 윤행임 등을 처형하였다.

 

하지만 시파의 김조순의 딸이 순조의 비로 간택이 되자 시파 탄압의 선봉이었던 이안묵을 유배시키는 것을 필두로, 김조순의 딸과 순조의 혼인을 반대했던 권유, 김노충 등 벽파 쪽의 수많은 선비들을 모조리 처형, 유배시켰다. 이로 인해 1807년 이경신의 옥사를 계기로 벽파는 지방으로 흩어져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화성유수 서유린의 선정비는 딴 비가 유수를 마친 이듬해나 수년 내에 조성을 한데 비해, 30년이란 세월이 지난 후에 선정비를 세운 것도 벽파의 눈치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서유린의 선정비 받침돌에 무수히 새겨진 성혈. 사람들은 서유린의 선정비를 세우고 정조가 드나들던 장안문에 많은 성혈을 판 것처럼, 정조가 운명을 할 때까지 화성유수로서 선정을 베푼 화성유수 서유린을 남다르게 생각하고 성혈을 판 것은 아니었을까?

 

아마도 무수히 많은 성혈을 그에 비 받침돌에 새기면서 화성유수 서유린의 충정을 기억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백성을 사랑한 정조와 그에게 신임을 받고 백성에게 선정을 베푼 서유린의 마음을 기억해 내고자 한 것이나 아니었을까? 말없는 선정비가 아쉽기만 하다.

 

경주 서악동에 있는 신라 태종무열왕릉의 동쪽에 보면 보물 제70호인 서악리 귀부와, 경상북도 기념물 제32호인 김인문의 묘가 있다. 김인문의 묘 곁에 있는 이 거북모양의 받침돌은 김인문의 묘비를 세웠던 것이다. 현재는 비문과 머릿돌은 사라지고 받침돌만 남아있다.

 

이 거북모양의 받침돌은 국보 제15호인 태종무열왕의 귀부와 쌍벽을 이루고 있다.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조각기법이 뛰어나, 7세기 귀부모양의 변화를 잘 보이고 있다. 귀부의 모양이 몸체는 거북이에, 머리는 용의 모습으로 변하기 이전에 원형의 모습으로 남아있어, 한국 석비 받침돌의 초기 모양이라 할 수 있다.

 

 

사실적인 조각 뛰어나

 

무열왕비의 거북이가 앞발가락은 다섯 개, 뒤는 네 개인데 비해, 보물 제70호인 서악리 귀부는 앞뒤가 모두 다섯 개다. 목에 새긴 다섯 가닥의 주름은 사실적이며, 거북의 등에 새긴 6각모양의 무늬도 조각솜씨가 뛰어나다. 등에는 비를 받쳐 세웠던 네모난 구멍이 뚫려져 있다.

 

앞발에는 깊은 주름이 새겨져 있어 이 거북이가 매우 사실적으로 조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앞발과 뒷발의 발가락은 금방이라도 땅을 움켜잡고 앞으로 나아갈 듯 힘차게 표현하였다. 등에 새겨진 귀갑문도 통일신라 말기와 고려 초에 나타나는 귀갑문보다 화려하게 조각을 했다.

 

 

김인문은(629~694) 무열왕의 둘째 아들이며, 문무왕의 친동생이다. 23세 때에 당나라에 가서 벼슬을 하다가 돌아와, 무열왕을 도와 김유신과 함께 삼국을 통일하는데 기여를 하였다. 1931년 서악서원에서 김인문의 비석조각을 발견하여, 이곳이 김인문의 무덤임을 확인하였다. 무덤은 흙을 둥글게 쌓아올린 형태로 무덤의 밑 둘레가 82m, 지름이 29,9m에 높이는 6,5m이다.

 

귀감이 되는 옛 선인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던가. 벌써 천 4백년이 지난 후이지만, 그의 이름은 아직도 우리 후대에 전하고 있다. 요즈음 세상을 사는 사람들은 그런 이름을 남긴다는 것에 대해서 무의미하다는 생각인가 보다. 스스로의 이름을 더럽히는 행동들을 서슴지 않고 하는 것에 대해, 참으로 안타깝다.

 

 

아마 선대인 조상님들이 이런 자손들을 본다면, 죽어서나마 올바로 눈을 감을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역사는 언젠가는 올곧은 평가를 하기 때문이다. 살아생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린 사람들이 얼마나 사후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수 있겠는가? 후세에 사가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요즘사람들이 참으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방에 산재한 많은 문화재들을 만나다가 보면 그 문화재가 갖고 있는 속 깊은 의미를 되새길 수 있어서 좋다. 그런 문화재를 답사한다는 것이 행운이란 생각이 든다. 문화재를 만나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물 제70호인 김인문의 묘비인 서악리 귀부. 이곳에서 다시 세상의 지혜를 배운다.

 

 

'등공'

 

이란 육신이 살아있는 그대로 허공으로 날아오르면서, 몸은 벗어버리고 영혼만 부처님의 연화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등공은 염불만일회에서 이루어진다. 염불만일회란 일념으로 염불을 목적으로, 살아서는 마음을 편안히 하고, 죽은 후에는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법회를 말한다.

 

염불만일회의 시작은 신라 경덕왕 17(758, 무술년)에 발징화상께서 원각사를 중수하고 염불만일회를 베푸니, 이것이 한국불교 염불만일회의 효시이다. 이 때 발징화상이 정신, 양순 등 스님 31명과 염불을 드렸는데, 뜻을 같이하는 신도 1,820명이 환희심이 일어 자원을 하였다.

 

 

그 가운데 120명은 의복을, 1,700명은 음식을 시주하여 주야로 쉬지 않고 기도를 하였는데, 신라 원성왕 3년인 787년 염불만일회에서 선행을 닦던 스님 31명이 아미타불의 가피를 입어 극락정토에 다시 태어났으며, 시주를 하던 신도들도 모두 극락왕생을 하였다고 전한다.

 

건봉사 북쪽 금강산에 자리한 등공대

 

건봉사 북쪽에 위치한 등공대는 만일(275개월)동안 기도하시던 스님들이 원성왕 3년인 787년 회향을 할 때, 건봉사를 중심으로 사방 허공으로 몸이 그대로 떠올라 날아가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1.5km 정도를 날아오른 스님들은 육신의 허물은 그대로 땅에 떨어트리고, 맑고 밝은 정신만 등공을 한 것이다.

 

 

그 후 세월이 흘러 1900년인 광무4년에 들어, 스님들의 다비식을 거행한 곳을, 몸을 살랐다고 하여 <소신대(燒身臺)>라고 하였다. 소신대는 많은 사람들이 와서 그 뜻을 기려 기도에 정진을 하였는데, 오랜 세월 풍화작용으로 부서지고 허물어져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이곳에서 기도를 하던 양씨 성을 가진 연대월 보살이 이를 안타깝게 여겨 백원을 희사하고, 기념탑을 세워 봉안할 것을 서원하였다. 이를 가상히 여긴 스님들과 신도들이 동참하매, 순식간에 모인 돈이 천원이 모였다. 갑인년(1914) 4월에 역사를 시작하여, 을묘년(1915) 5월에 역사를 마치고 등공탑을 세워 그 뜻을 만천하에 알렸다. 그 후 소신대를 등공탑이 있다고 하여서 <등공대>라고 불렀다.

 

'휴거'는 건봉사에서 이루어졌다?

 

 

건봉사 등공대는 이렇게 31명의 스님들이 살아있는 몸을 그대로 허공으로 올랐다는 기록이 있어 유명하다. 신라 때부터 많은 스님들이 금강산 건봉사를 수행처로 삼은 점이나, 우리나라의 4대 사찰에 건봉사가 들어가는 것도 다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1915년 세워진 등공탑 비문에 보면(운고 김일우 지음) 절 북쪽 5리쯤에 아직도 몸을 불사른 대가 있는데, 오랜 세월을 겪다보니 꽃이피고 잎이지는 변천을 겪었다. 많은 시일을 보내자니 바람에 닳고 비에 씻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폐허에 돌을 포개놓고 구경하게 두매, 산도 이로 인해 무안해 하고, 물도 이 때문에 소리를 삼킬 지경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만일(萬日)의 정진으로 인해 살아있는 육신 그대로 몸이 떠올라, 1.5km나 위로 올랐다는 기록에 아연할 수밖에 없다. 신라 때에 그러한 일이 일어나 아직도 그 뜻을 기리는 건봉사. 그래서 부처님의 진신사리도 한 때 이곳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것은 아닐까? 오늘 등공대에서 합장을 한다.

 

한 겨울 눈이 쌓였을 때 답사는 예측을 하기가 어렵다. 단순히 눈이 쌓인 것이 아니고 그 눈 속에 돌도 있고, 물도 흐르기 때문이다. 하기에 겨울철 답사는 늘 여기저기 멍이 들고 깨어지기가 십상이다. 그래도 겨울철에 답사를 나가는 것은 딴 계절과 또 다른 경치 속에 있는 문화재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어성전리 488번지에 자리하고 있는 명주사.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신흥사의 말사이다. 만월산에 자리하고 있는 명주사는 고려 목종 12년인 1009년에 혜명과 대주스님이 창건하여 비로자나불을 모신 화엄종 계통의 사찰이다. 명주사라는 사명도 혜명과 대주스님의 법호에서 기인했다고 한다.

 

 

몇 차례의 화재로 아픔을 겪은 명주사

 

명주사는 지금처럼 작은 사찰이 아니었다. 고려 인종 1년인 1123년에는 청련암과 운문암이, 그리고 조선조 숙종 2년인 1673년에는 향로암이 부속암자로 창건되었다. 정조 20년인 1781년에는 명주사 츨신의 고승인 인파스님이 원통암을 창건하였다. 그 후 헌존 15년인 1849년과 철종 4년인 1853년에 원통암이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중건하였다.

 

명주사는 철종 11년인 1860년 명주사가 있는 산 전체를 화재가 뒤덮여 명주사와 인근 암자들이 전소가 되었던 것을, 월허스님이 명주사를 1861년에는 인허스님이 운문암과 향로암을 중건하였다. 1864년에는 학운스님이 원통암을 중건하였다. 그러나 고종 15년인 1878년 다시 명부사가 소실되었고, 그 뒤 중건하였으나 대한 광무 원년인 1987년에 다시 소실이 되는 화마의 아픔을 겪은 절이다.

 

 

조선 후기의 뛰어난 부도군

 

명주사를 들어가기 전에 만날 수 있는  양양군 현북면 어성전리 산58에 소재하고 있는 명주사 부도군.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16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부도군은 모두 12기의 부도를 한꺼번에 아울러 문화재자료로 지정을 하였다. 부도란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며,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두는 곳이다. 명주사에 마련된 이 부도 밭에는 모두 12기의 부도가 자리하고 있으며, 4기의 비석도 함께 남아있다.

 

양양 명주사를 찾아간 날은 눈이 쌓여있던 날이다. 길은 말끔하게 눈이 치워져 있었지만 부도 탑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길에서 치워놓은 눈으로 인해 무릎까지 눈이 빠진다. 걸음을 옮기기조차 쉽지가 않지만 그래도 답사를 하지 않을 수는 없다. 눈밭을 겨우 들어가는데 미끄러지고 말았다. 다행히 눈이 많이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하필 그 눈 속에 돌이 있을 줄이야. 정말 눈물이 찔끔난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보는 사람은 없지만 왜 그리 창피하던지.

 

 

명주사 부도군에 있는 12기의 부도 중에서 7기는 3단을 이루는 기단 위로 탑 몸돌 및 지붕돌을 갖추었는데, 사각의 바닥돌과 둥근 탑 몸돌을 제외한 각 부분이 8각을 이루고 있다. 나머지 5기는 받침돌 위로 종 모양의 탑 몸돌을 올린 모습으로, 꼭대기에는 꽃봉오리 모양의 큼지막한 머리장식을 두었다. 5기의 비는 낮은 사각받침위로 비의 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갖춘 구조이다.

 

원래 이 명주사 부도들은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는데, 1994년 지금의 자리로 모두 모아 놓았다고 한다. 명주사 부도군은 역대 명주사에서 입적을 한 고승들의 부도로, 조선 후기 강원도 내의 부도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조각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원당형이 7기 석종형 5기와 비석 4기가 전해진다.

 

 

이 중 연파당 부도는 짝을 이루고 있는 탑비에 기록된 내용으로 보아 조선 순조 18년인 1818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함께 서 있는 4기의 비석은 순조 12년인 1812년에서 고종 20년인 1883년 사이에 세워진 것이다. 눈이 쌓인 날 찾아간 명주사 부도군. 눈이 쌓여 기단을 볼 수가 없어 아쉬웠지만, 또 다시 찾아가리라 마음을 먹는다. 문화재란 늘 찾아보고 보듬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