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월 첫 번째 답사는 강원도 최북단의 고성군 현내면으로 정했다. 이곳은 아름다운 화진포를 비롯하여 김일성별장과 전 이승만, 이기붕의 별장 등이 있는 곳이다. 또한 이곳에는 인근에 건봉사를 비롯해, 여러 가지 문화재들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 중 둘째 날인 16일 오전에 찾아간 곳은, 바로 화진포 일대에 자리하고 있는 고인들 들이다.

 

강원도 고성군 화진포 일대에는 5기의 고인돌이 있다. 북방식 고인돌인 이 지석묘들은 문화재로 지정을 받지 못했지만, 그 규모가 크고 이 일대에서 많은 선사시대 유물이 발견이 된 것으로 보아 대단위의 주민들이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까지의 선사유적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모두 5기의 고인돌이 분포 해

 

화진포 일대에는 패총과 마제석기 등 유물이 주변 곳곳에 산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은 고대 집단 주거지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에 산재한 지석묘를 찾아보기 위해 화진포 콘도 지역 안으로 들어갔다. 첫 번째 만난 지석묘는 건물 출입문에서 30m거리에 있는, 이른바 '장평리 지석묘'라고 부르는 고인돌을 처음으로 만났다.

 

이 지석묘의 덮개돌은 긴 각진 타원형인데 동남쪽 일부가 파손되었다. 덮개돌의 길이는 2.5m×2,4m 정도이고 두께는 30~40cm 정도이다. 남북방향으로 자리를 하고 있는 이 지석묘는 석실의 장축인 동벽과 서벽 그리고 단벽인 남벽은 각각 1매의 판석으로 되어 있고, 북벽은 소실되었다. 남벽의 지석은 1m정도만 남아있고 북벽의 지석은 소실되어 없어졌다.

 

 

바닥에서 덮개돌까지의 높이는 약 50cm 정도이다. 석실 동쪽의 높이는 15cm밖에 되지 않고 고인돌 동쪽 바로 옆에 있는 나무뿌리에 돌이 박혀 있는 상태로 지상에 노출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이 지석묘는 묘실이 지하에 있다가 모래가 없어지면서 석실 지상에 노출되어 보이는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 석실 바닥과 주변 지역에는 천석(자갈돌)들이 산재하였다.

 

이승만 별장 기념관 주변에 3기가 있어

 

화진포 앞에서 만난 안내판에는 모두 5기의 고인돌이 있는 곳으로 표시가 되어있다. 그 하나는 앞서 언급한 화진포 콘도 옆에 1. 그리고 이승만 별장 기념관 위편 도로 양편에 3, 그리고 마지막 1기는 화포리에 자리하고 있다. 두 번째로 3기가 있는 이승만 별장 기념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장소를 확인하고도 정확하게 어디에 지석묘가 있는지를 알 수 없어, 이승만 별장 기념관 앞에 있는 매표소에 가서 고인돌이 어디에 있는가를 물어보았다. 그런데 돌아오는 답변이 의외였다.

 

가끔 사람들이 고인돌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는데 정확한 위치를 모르겠어요. 그분들도 찾아보다가 없다고 하고 그냥 돌아가셨거든요

 

어디에도 이곳에 고인돌이 있다는 안내판 하나가 없다. 할 수 없이 주변을 뒤져보는 수밖에. 도로를 따라 위로 오르는데 커다란 돌이 보인다. 얼핏 보아도 고인돌의 윗돌이다. 차에서 내려 올라가 보았더니 두 기의 고인돌이 자리하고 있다. 또 한 기는 길 건너편 비탈 위에 자리하고 있다. 안내판의 설명대로 그대로 자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곳에 고인돌을 찾지 못했을까? 아마도 여름철이라면 풀이 자라 고인돌이 가려져 있었을 수도 있다. 1월에는 다행히 풀이 마르고 쓰러져 있어 고인돌이 들어나 있는 것이다. 세 기의 고인돌은 모두 북방식의 고인돌로 그 규모가 상당히 크다.

 

비지정문화재는 이렇게 관리해도 되나?

 

매표소를 지나 길 좌측 위에 있는 두 기를 돌아보고 건너편 비탈 위에 있는 고인돌로 향했다. 길 좌측에 있는 고인돌은 밑에 굄돌이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에 비해 비탈 위에 고인돌은 그보다는 굄돌이 제대로 되어있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인가? 소주병과 쓰레기들이 주변에 널려있다.

 

 

고인돌 사이에는 불을 놓은 흔적 같은 것도 보인다. 도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누가 이곳에 와서 술을 따라놓고 치성이라도 들인 것일까? 아니면 술을 먹으며 날이 추우니까 군불이라도 지핀 것일까? 고성군 지역은 유난히 선사유적인 지석묘가 많이 분포되어 있는 곳이다.

 

그런데 이 화진포 주변 다섯 기의 고인돌이 제대로 관리가 되어있지 않다. 문화재로 지정된 것만이 소중한 것이 아니다. 이 지역의 문화를 연구하는데 있어 소중한 자료인 고인돌이 이렇게 함부로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 부아가 치민다. 이제라도 이 옛것의 소중함을 사람들에게 일깨 울 수 있는 안내판을 설치하고, 조금 더 많은 신경을 써야할 것만 같다. 첫 번 째 답사에서 만난 불쾌함은 오래도록 가시지 않을 것만 같다.

여주읍에서 신륵사 입구를 지나 북내면 소재지를 지나면 양평으로 가는 길이 있다. 이 구불거리는 지방도를 따라가면, 우측으로 금당천에 놓인 다리를 건너게 된다. 다리를 건너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다가 보면 <석우리 선돌>이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꺾어 장암리 방향으로 600m 정도를 들어가면, 양어장 안에 큰 나무들이 서 있는 곳이 있다. 그 안쪽에 서 있는 것이 경기도 기념물 제 132호인 석우리 선돌이다.

 


 

석우리 선돌이 무슨 용도로 사용이 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이곳이 1895년도까지 도계(道界)였기 때문에 '경계석'으로 세웠을 가능성이 짙다는 것이다. 석우리는 1895년까지 강원도 원주군 지내면에 속해 있었다. 1895년 여주군에 편입이 되고, 1914년 일제에 의해 실시된 대대적인 행정통폐합에 따라 석장, 입석, 장우동을 병합하여 석우리라 하였다. 일제의 문화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시행된 행정통폐합은, 우리나라 마을의 고유한 이름을 모두 잊어버리고 뜻도 없는 마을이름으로 바뀐 것들이 대부분이라는 점은 지금도 안타깝다.

 

이곳이 1895년도까지 도계(道界)였기 때문에 ‘경계석’으로 세웠을 가능성이 짙다

  
선돌은 높이 2.45m, 너비가 0.8m, 두께가 0,6m 정도의 장방형으로 되어있다

 

선돌이 서 있는 근처의 마을이름이 북쪽 마을은 '담모랭이' 라 하고, 남쪽 마을은 '돌담'이라 부르는 것도 이 선돌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전 경계 표시로 선돌을 세우면 주변을 돌담으로 쌓기 때문에, 그 돌담 근처에 있다고 해서 담모랭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으로 볼 수가 있다. 돌담은 아마 남쪽마을이 담을 끼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석우리 선돌은 양어장이 길 쪽을 제외한 삼면을 둘러싸고 있다. 선돌이 선 곳은 큰 나무들이 서 있으며, 마을에서는 최근까지도 정월 대보름에 선돌 앞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선돌은 높이 2.45m, 너비가 0.8m, 두께가 0,6m 정도의 장방형으로 되어있다. 윗부분은 손질을 한 흔적이 있으며 재질은 화강암이다. 앞으로 남한강의 지류인 금당천이 흐르고 있다.

 

  
윗부분은 손질을 한 흔적이 있으며 재질은 화강암이다

  
최근까지도 마을에서 정월 대보름에 위하는 마을의 ‘신석(神石)’의 기능을 가졌다.


예전에 이 선돌의 기능이 어떠했는가는 확실히 알 수가 없지만, 최근까지도 마을에서 위하는 마을의 '신석(神石)'의 기능을 가졌던 석우리 선돌. 대개는 경계표시로 세웠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위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신앙적 거석문화로 볼 수도 있다. 단순히 경계표시로만 세웠다면, 마을에서 굳이 위하지는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다. 석우리 선돌의 주변에 있었다는 지석묘를 보아도, 이 선돌은 마을의 신앙물의 한 형태에 가깝다는 생각이다. 여름철 주변 숲이 무성할 때 다시 찾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이다. 지금보다는 좀 더 운치 있는 모습을 찍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에서 10km 정도 떨어져 있는 구암마을. 부안군 하서면 석상리 707번지인 이곳에는 사적 제103호인 부안 구암리 지석묘군이 있다.

 

지석묘란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무덤으로서 고인돌이라고도 하며, 그 형태에 따라 북방식과 남방식으로 구분한다. 북방식은 책상처럼 세운 탁자식을 말하며, 남방식은  큰 돌을 조그만 받침돌로 고인 바둑판식을 말한다.

 


 

10기의 지석묘가 남아

 

구암리에는 1956년 조사 때 고인돌이 총 13기가 있었다고 하나, 1982년 사적으로 지정이 될 당시에는 민가의 울타리 안에 있던 것인데 현재는 10기만 남아있다. 구암리에는 여러 곳에 고인돌 무덤떼가 있는데, 고인돌은 대체로 자연암석을 떼어내 덮개돌로 사용한 바둑판식 지석묘이다.

 

이곳 고인돌의 뚜껑돌인 상석은 큰 것이 길이가 6.35m, 너비 4.5m, 높이 70 ∼ 100㎝에 달하며 받침돌 8개가 이를 받치고 있다. 일반적으로 고인돌은 보통 4개의 받침돌을 이용하는데 반해, 8개의 받침돌을 받쳐 다른 지역 고인돌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다. 작은 것들은 길이 3 ~ 4m에 너비가 2 ~ 3m 정도이다.

 

남방식 지석묘인 바둑판식이다. 상석을 작은 몇 개의 굄돌 위에 올려 놓았다.

 

독특한 구암리 지석묘군

 

구암리 지석묘군은 딴 곳에서는 보기 힘든 독특한 모습이다. 부안의 딴 곳에 있는 지석묘를 보아도 구암리 지석묘와는 형태가 다름을 알 수 있다. 현재는 사적으로 지정이 되어 있어, 이곳을 문화재 보호지역으로 정하고 울타리를 쳐놓고 보존을 하고 있다. 가장 큰 것은 그 크기가 어마어마하다, 첫 눈에 보기에도 그 크기가 남다름을 알 수 있다.

 

주변을 돌면서 굄돌을 살펴보니 굄돌의 크기도 모두 다르다. 가장 큰 고인돌은 8개의 굄돌로 받치고 있는데, 주변의 고인돌의 굄돌보다 크다. 아마 위에 올린 뚜껑돌인 상석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인듯하다. 굄돌의 개수도 다 다르다. 큰 것은 8개, 그 외에는 6개, 5개, 4개 등 다양하다. 아마 그 돌의 무게에 따라 적당한 굄돌을 받쳐 놓은 것인가 보다.  


 

 

이 구암리 지석묘의 밑에서는 돌칼과 돌화살촉 등이 발견이 되었다고 한다. 고창지역과 부안지역은 북방식 고인돌인 탁자식 고인돌이 군데군데 분포하고 있는데 비해, 이곳 구암리 지석묘는 모두 남방식 지석묘이다.   

 

거북모양 등 다양한 형태의 고인돌

 

구암리 지석묘의 뚜껑돌인 상석의 형태는 다양하다. 거북이 웅크리고 있는 모양도 있고, 어느 것은 막돌을 갖다 올린 듯한 것들도 있다. 굄돌을 받친 형태도 일정하지가 않다. 이렇게 다양한 크기의 고인돌은, 당시 이 지석묘의 주인들의 신분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크고 작은 고인돌의 형태가, 이곳 주변에 살던 부족 중에서 나름의 위치를 알려주는 듯하다.

 

당시에 어떻게 이렇게 큰 돌들을 잘라낼 수가 있었을까? 그리고 굄돌을 놓고 그 위에 이 무거운 상석을 어떻게 올려놓은 것일까? 지석묘를 볼 때마다 늘 궁금하다. 지금처럼 장비가 있지도 않았던 시절에, 이렇게 큰 돌을 이용해 지석묘를 만들었다는 것이 놀랍다.


 

뚜껑돌인 상석이 큰 것은, 길이가 6.35m, 너비 4.5m, 높이 70 ∼ 100㎝에 받침돌 8개를 돌려 세웠다.

 

그 가운데 작은 것 하나가 유난히 눈에 띈다. 길이는 1.5m 정도일까? 저런 지석묘는 혹 어린 아이가 죽었을 때 쓴 지석묘였을까? 구암리 지석묘를 보면서 쉽게 뒤돌아 설 수 없었던 것은 수많은 의문 때문이다. 그래서 문화재 답사는 힘이 들기는 하지만, 수많은 해답을 얻어내는 재미가 있다.

흔히 고인돌이라고 부르는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이다. 고인돌은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놓은 탁자식과, 땅 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경기도 오산시 금암동은 바위가 많아 ‘묘바위’, ‘검바위’, ‘금암’ 등으로 불렀으며, 이곳에는 모두 11기의 지석묘가 확인되었다. 그 중 9기의 고인돌은 경기도기념물 제112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곳의 고인돌들은 덮개돌은 땅 위에 드러나 있지만 하부구조는 흙속에 묻혀 있어 자세하게 알 수 없다. 고인돌 가운데 규모가 큰 것은 덮개돌의 길이가 6m 정도이다.

 

 

고인돌에 파인 성혈, 쇠붙이로 조형한 듯해

 

고인돌 덮개돌의 윗면에는 수직으로 파인 알구멍(=성혈(性穴))이 있다. 금암동의 고인돌 중에서 2호 고인돌에도 성혈이 나 있는데, 구멍의 파인 모양으로 보아 쇠붙이를 이용하여 만들어진 것 같다. 이 성혈은 풍년을 빌거나 자식 낳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만들었다고 하지만 정확하게는 알려져 있지 않다.

 

오산시 금암동에 분포한 9기의 지정 고인돌은 금암동 일대의 야트막한 구릉지대와 논에 분포하고 있던 것을, 현재는 공원으로 조성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운동을 하고 있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다.

 

 

 

고인돌 중에서 덮개돌만 땅 위에 올려놓은 것을 개석식이라고 하는데, 전문가들은 금암동의 고인돌 군이 바둑판식이라고도 하지만(문화재청 설명) 이곳의 고인돌은 모두 개석식으로 보인다. 덮개돌 가운데 가장 큰 것은 길이가 6m에 이른다. 각 덮개돌의 둘레에는 돌을 다듬은 흔적이 잘 남아 있다.

 

공원으로 조성한 금암동 고인돌군

 

5월 2일 찾아간 금암동 고인돌 무리. 공원 입구로 들어서면 제일먼저 바위 위에 조성한 한 기의 고인돌이 보인다. 6호 고인돌은 바위 위에 커다란 덮개돌 하나를 올려놓은 형태이다. 화강암 계통의 장방형 돌로 조성한 덮개돌이다. 그 곳을 지나 산길로 접어들면 제5호 고인돌을 만나게 된다.

 

 

 

5호 고인돌은 덮개돌이 두 조각으로 깨어져 있고, 돌의 형태는 장타원방형에 가깝다. 그곳에서 고인돌 무리가 모여 있는 아래편으로 내려가면, 여러 기의 고인돌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이 중에서 경사가 완만한 비탈에 놓여있는 4호 고인돌은 덮개돌이 장방형에 가깝고, 덮개돌 남쪽과 동쪽 부분의 단면을 다듬은 흔적이 남아있다.

 

현재 공원으로 조성한 이곳 금암동의 고인돌 무리군에는 할아버지바위와 할머니 바위가 있으며, 7기의 고인돌이 펼쳐져 있다.

 

 

 

 

사적 지정 서둘러야

 

고인돌군이 펼쳐진 곳은 정비가 잘 되어있어, 학생들이 찾아와 고인돌에 대해 알아볼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한편으로는 고인돌의 역사와 모양, 분포 등을 알아볼 수 있도록 설명판을 붙여놓은 구조물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운동을 하면서 걷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다.

 

 

고인돌군이 펼쳐진 동편으로는 할아버지바위와 할머니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들은 마을을 위하는 돌이라고도 한다. 모두 9기의 개석식 고인돌이 자리를 하고 있는 오산시 금암동 고인돌군. 현재 경기도기념물로 지정이 되어있지만, 개석식고인돌이 무리를 지어 있는 점 등을 감안한다면 ‘사적’으로 지정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를 위해 더 많은 연구가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지석묘, 혹은 고인돌이라고 부르는 돌무덤은 우리나라 전역에 걸쳐서 나타난다. 전 세계에 고인돌은 모두 6만 여기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그 중 3만 여기가 우리나라에 소재한다. 고인돌은 모두 3종류가 있으며 탁자식, 바둑판식, 개석식 등으로 구 유형을 갖고 구분을 짓는다.

 

탁자식이란 평평한 굄돌을 세워서 땅위에 네모꼴의 방을 만들고, 그 위에 덮개돌을 올려서 탁자식으로 조성을 한 것이다. 바득판식은 땅 위에 3~6개의 받침돌이 덮개돌을 받치고 있으며, 지하의 무덤방은 돌놀, 돌덧널, 구덩 등의 형태가 있다. 개석식은 지상에는 커다란 덮개돌만 드러나 있으며, 남방식 고인돌 혹은 무지석식 고인돌이라고 부른다.

 

 

오산 외심미동의 고인돌

 

오산시 외삼미동 384에 소재하고 있는 경기도 기념물 제211호 고인돌. 이 지석묘는 숲으로 둘러싸인 구릉에 위치한 2기의 고인돌이 자리한다. 이 고인돌은 시민들의 요구에 의하여 한양대 박물관장겸 경기도 문화재 위원인 김병모 교수가 현지에서 조사를 하였다.

 

이 지석묘는 확인결과 청동기 시대 후기에 속하는 유적으로, 북방식과 남방식이 혼재되어 있는 희귀한 예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 고인돌을 ‘거북바위’ 또는 ‘장수바위’리고 부른다. 이 고인돌은 선사시대 생활상을 연구할 수 있는 문화사적 가치를 높은 것으로 보인다. 이 고인돌의 덮개돌은 화강편마암으로 크기는 260×230×90cm 정도이다.

 

 

 

굄돌이 누워있는 형태의 고인돌

 

이 고인돌은 덮개돌의 중앙을 손질하여서 마치 거북등과 같은 형태로 되어있다. 덮개돌의 위에는 지름 6~7cm 정도의 성혈이 15개 정도가 있다. 이 고인돌의 특징은 바로 덮개석을 받치고 있는 굄돌이다. 일반적으로 굄돌은 사방에 세워 묘실을 만드는 것이 일반적인 고인돌의 형태이다.

 

그러나 외삼미동의 고인돌은 굄돌이 처음부터 누여져 있는 형태이다. 이러한 모습의 고인돌의 형태인 황구지천의 상류인 화성 병점과 수기리 유적에서도 조사가 된 바 있다. 굄돌을 세우지 않고 누운 채로 그냥 사용하였다는 것은 고인돌의 처음의 이른 형태였을 것으로도 생각한다. 이 고인돌의 남쪽 옆에는 개석식 고인돌의 덮개석으로 보이는 넓적한 돌이 놓여있다.

 

 

 

고인돌을 찾아 거리를 방황하다.

 

오산시 외삼미동에 있는 고인돌을 찾아 길을 나섰다. 요즈음은 멀리 장거리 답사를 나가지 못하는 편이라, 시간이 날 때마다 주변을 다니면서 답사를 하는 편이다. 외삼미동 안으로 들어가 북오산IC 입구로 가다보니 외삼미동 고인돌이 있다는 안내판이 보인다. 그런데 거리는 적혀있지 않고 앞으로 가라는 화살표만이 보인다.

 

그리고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으로 차를 몰았다. 그 다음에 안내판이 나올 것이란 생각을 하고 갔지만, 화성 동탄 끝까지 갔는데도 어느 곳에도 고인돌 안내판이 보이지가 않는다. 오산시 문화체육과에 전화를 걸어보았다. 안내판이 있는 곳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우측으로 굴다리가 있다고, 그 안으로 들어가면 고인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들어가는 입구에도 안내판이 없고, 굴다리 안에는 또다시 좌측으로 굴다리가 있는데도 안내판이 없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굴다리 안으로 들어가니, 그 안에 고인돌이 자리하고 있다. 문화재 안내판이란 초행길인 사람들도 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달랑 길가에 하나 서 있는 안내판. 화살표 하나로 문화재 안내를 다 했다는 생각을 한, 담당부서의 무책임한 처사에 울화가 치민다.

 

들어가는 입구에 안내판 하나만 더 설치를 했다면, 20km정도를 더 돌아다닐 이유가 없었는데 말이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문화재를 찾아다닌다. 내 고장의 자랑거리들을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게 하기 위해서는 이런 세심한 배려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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