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에는 의병대장인 ‘신돌석장군’의 생가지가 있다. 이 생가지에는 작은 초가 한 동이 서 있는데, 이 집이 바로 신돌석장군이 태어난 집과 같이 지어진 집이다. 집은 고택과 생가, 가옥 등으로 구분한다. 이 중에서 생가는 태어난 곳이고, 가옥은 현재 사람이 거주하는 집을 말한다.

생가지란 그 사람이 태어났으나 현재의 집은 태어날 당시의 집이 아니라는 것이다. 영덕에 있는 신돌석장군의 집도 태어난 곳이기는 하나, 그 당시의 집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기에 그 집터에 지은 집일뿐이다. 하지만 옛 기억을 더듬어 그대로 지었으니, 전혀 무관하다고는 볼 수가 없다.


의병장 신돌석은 누구인가?

신돌석(申乭石, 1878 ~ 1908년)은 구한말의 의병장이다. 당시의 의병장들이 대개는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일어났으므로, 신돌석은 우리나라 최초의 평민의병장이 된다. 영덕 축산면의 평범한 농가에서 태어난 신돌석은 본명은 신태호이다. 19세의 어린 나이로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켰으며,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강제로 체결이 되자, 동생 신우경과 함께 재차 의병을 일으켰다.


신돌석장군은 울진 등에서 일본 선박을 여러 척 침몰시켰다. 그리고 강원도 동해안과 경상북도의 내륙지방, 지금의 원주까지 넘나들면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일본군들은 그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그의 별명은 ‘태백산 호랑이’로 불릴 정도였다.

신돌석장군의 이강년의 의병과 순흥(영주시)을 공격하기도 하는 등 여러 곳의 의병들과 연합전선을 펴면서 활약을 하였다. 경기도 여주 출신 이인영의 13도 창의군이 결성되자, 영남지방을 담당하는 교남창의대장이 되기도 했다.




신돌석장군에 대한 설화 한 토막

이렇게 전국적으로 전공을 세운 신돌석장군은 설화가 많기로 유명하다. 어려서 고래산에 나무를 하러 간 신돌석은 ‘천서(天書)’를 얻었다고 한다. 그는 힘이 장사였으며 달리기를 잘해, 하룻밤 사이에도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힘이 센 신돌석은 도둑을 잘 잡기도 했고, 호랑이와 싸워 물리치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신출귀몰한 신돌석장군이 죽은 것은 왜군들의 치졸한 방법 때문이었다고 한다. 총을 쏘아도 죽지를 않는다고 전해지자, 왜병은 신돌석을 잡아오는 자에게는 후한 상을 내리겠다고 하였다. 그런 왜병의 속임수에 넘어간 김상렬이 형제인 김상태, 김상호와 함께 집에 찾아 온 신돌석장군에게 독주를 먹인 후 도끼로 살해를 했다고 한다. 이 삼형제는 신돌석장군의 머리를 잘라 왜병에게 가져갔으나, 산채로 잡아오지 않았다고 하여 상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단출한 네 칸의 초가에서 영웅이 태어나

신돌석장군의 생가지에는 현재 네 칸짜리 초가가 한 채 있다. 1940년에는 일본군이 독립의지를 꺾는다는 핑계로 불을 질러 태워버린 것을, 1942년에 기와로 복원을 하였으며, 1995년 8월 19일에 생가지 정비를 하면서 원래의 형태로 복원을 했다고 한다. 집은 동편에 부엌을 두고 방 한 칸과 대청, 그리고 건넌방을 두었다.

집은 단출하며 부엌만 앞으로 돌출을 시켰고, 방과 마루는 앞으로 처마를 빼고 뒤로 물려서 비가 들이치지 않도록 하였다. 방과 방 사이에 있는 대청에는 마주보고 문을 내어 통할 수 있도록 하였다. 장독은 부엌 뒤편에 놓았으며, 앞마당에 돌우물을 있다. 평범한 농민의 집인 이곳에서 왜병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신돌석장군이 태어난 곳이다. 그리고 보면 13도 총 의병대장이었던 이인영장군의 집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생각이다. 왜 의병장들의 생가는 이리 초라한 것인지.



400년이 나 된 집이 있다면, 먼저 어떻게 아직도 그런 집이 보존이 되어 있을까하고 궁금해 할 것이다. 물론 그 동안 여러 차례 보수를 하였겠지만, 더 놀라운 것은 이집이 신라 때는 절터에 세워졌다는 것이다. 또한 집안에 잇는 석물들도 신라 때의 것이 아직도 있다고 하니 놀랍기만 하다.

경주시 탑동 633번지에 소재하는 중요민속자료 제34호인 ‘김호장군 고택’은 장군이 태어났다는 집이다. 이 집은 개인의 집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전해지는데, 김호장군은 임진왜란 때 부산첨사로 큰 공을 세운 분이다.


생각 밖으로 조촐한 가옥

중요민속자료라고 하면 우선은 그 규모가 상당하리란 생각을 한다. 그러나 김호장군의 고택은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앞으로 안채가 있고, 그 우측으로는 뒤편에 사당이 자리한다. 그리고 좌측으로는 초가로 마련한 아래채가 서 있을 뿐이다. 그저 평범한 남부지방의 전형적인 공간구성으로 마련한 가옥이다.

안채도 그리 크지가 않다. 임진왜란 당시의 첨사면 이보다는 더 큰 집에 살 것이란 생각을 하고 들어간 것이 내 한계였다. 집을 들어보는 순간 ‘참으로 조촐한 집이로구나’를 먼저 생각한다. 그리고 큰 집일 것이란 생각을 한 나 자신이 부끄러움을 먼저 느낀다. 장군의 단아한 심성을 보는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린다.



솟을대문과 안채의 부엌(가운데) 그리고 초가로 된 아래채(아래)

5칸의 안채는 마루조차 없어

안채는 솟을대문과 마주하고 있는 - 자형의 구조이다. 모두 5칸으로 구성이 된 안채는 측면도 한 칸으로 지어졌다. 서쪽부터 부엌과 방, 대청과 방으로 꾸며진 단출한 집이다. 건물은 옛 남부지방 가옥의 특징을 그대로 갖고 있으며, 대청에도 문을 달았다. 현재는 추위를 피하기 위해 조금은 안으로 손을 본 듯하다.

장군의 집을 찾아들어 갔을 때는, 마침 무슨 모임이라도 있는 날인가 보다. 집을 좀 촬영하겠다고 이야기를 했지만, 사람들이 있어 여간 조심스럽지가 않다. 안채가 이렇게 단순한데 그 외에 건물이라고 특별한 것이 있을까 싶다. 부엌을 뺀 안채는 모두 4칸으로 툇간조차 달지 않았다.



안채 동편과 안방, 장독대

솟을대문은 후에 다시 복원을 하였는지, 양 옆으로는 한 칸씩을 달아냈다. 한편은 곳간으로 사용하고 한 편은 방을 드렸다. 아래채는 정면 3칸, 측면 한 칸으로 초가집이다. 두 개의 방을 드리고, 안채 쪽에 한 칸의 부엌을 달아냈다. 뒤편으로 돌아가니 음식을 준비하는 듯 분주하다.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 더 이상은 돌아다니기가 미안스럽다.


우물과 사당(아래)

오랜 시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우물

이 집안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바로 우물이다. 아주 오래된 것 인양 고풍스럽다. 돌로 주변을 놓고, 가운데를 좁게 오므려 놓은 특이한 우물이다. 안에는 맑은 물이 있는데, 이 우물은 이 집에서 원래 있던 자리라는 것이다. 이 집이 신라 때의 절터였다고 하면, 저 우물의 역사는 도대체 얼마나 된 것일까?

사람들이 집안에 있는데도, 마치 비어있는 집인 듯 조용하다. 집안에 모인 분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하다. 다과를 들고 있는 듯하다. 집을 한 바퀴 돌아보니 담장이 특이하다. 돌로 만든 담장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고택답사를 하면서 참으로 조촐하고, 운치 있는 집을 보았다는 생각이다. 집은 주인을 닮는다고 했는데, 장군의 절제된 마음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운치가 있는 돌담

요즈음 들어 많은 사람들이 우리 것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이는 고택만이 아니고, 각종 문화재나 먹거리, 심지어는 우리의 정서가 그대로 남아있는 길과 동, 식물 등 다양한 방면에서 관심을 갖고 글을 쓴다. 이렇게 무궁한 소재를 갖고 있는 것 중에서, 아무래도 문화재라는 것은 약간의 전문성을 필요로 한다.

우리나라 전역에 산재해 있는 고택. 그것이 사적이던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던 간에, 그저 찾아가 보는 것보다는 이모저모를 따져보는 것이 한결 재미있다. 무엇을 어떻게 볼 것이냐를 먼저 생각하고 그 집의 특징을 살펴보면, 시간이 지나면서 집이 눈앞에 그려지기도 한다. 경남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에 소재한 경남유형문화재 제407호 오담 고택을 돌아보면서, 우리 고택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살펴본다.



함양 오담고택은 사랑채와 안채가 깉은 형태로 구성이 되어있다. 건축물을 볼 때 그 형태를 보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 그리고 주변의 대지(아래)를 살펴보면 과거 그 집의 가세를 판단 할 수 있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
  
종가에서 분가한 양반저택인 오담 고택

오담 정환필(1798~1859) 선생은 일두 정여창 선생의 12대손이다. 선생은 종가에서 분가해 와 정여창 선생의 고택 멀지 않은 곳에 집을 짓고 살았다. 종두리에 기록된 상량문을 보면 사랑채는 1838년에, 안채는 1840년에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사랑채와 안채는 모두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지었으며, 자연석을 3~4단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집을 지었다.

오담 고택은 종가에서 분리해 온 영남 양반집의 전형적인 주택으로, 조선 후기 주거건축의 양식과 가구기법을 볼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오담 고택은 최근 복원과 보수를 한 듯한데, 이런 면을 찬찬히 살펴보면 우리 고택이 좀 더 자세히 보인다.

1) 먼저 집의 전체적인 구조를 알아보자




집의 전체적은 구조란 와가인지 초가인지를 본다. 이런 형태야 한 눈에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와가에도 팔작지붕, 맞배지붕, 합각지붕 등 그 종류가 다양하다. 위 오담 고택은 맞배지붕에 부섭지붕을 벽에 달아낸 형태로 자칫 팔작지붕으로 볼 수도 있다. 초가의 경우에도 그 이엉을 얶어 용마름을 앉는 방법이 약간씩 차이를 보이고 있어,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좋다.


다음으로는 그 집의 툇마루나 대청, 방의 꾸밈과 기단, 기둥 등을 자세히 살펴본다. 기단은 장대석을 사용했는지, 아니면 일반 부정형의 돌을 사용했는지를 본다. 기둥은 배흘림기둥인지, 팔각이나 사각,혹은 원형기둥인지를 꼼꼼히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한 집의 구성고 알아보아야 한다. 대개 고택에는 수 많은 집이 있다. 사랑채를 비롯해 안채, 행랑채, 대문채, 아래채, 광채, 별당채 등 그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다.


2) 집의 뒤편도 꼼꼼히 살펴야 한다.




고택에는 많은 문들이 있다. 대문을 비롯해 중문, 협문, 쪽문 등 큰 집의 경우에는 집 안에 문에 10여 개가 되는 수도 있다. 하기에 그 문은 어떻게 생겼으며, 어느 용도로 사용이 되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중문의 경우에는 바깥 중문과 안 중문이 있고, 때로는 담에 쪽문을 내어 사용하기도 한다. 하기에 그 문의 특징을 살펴보고 그 쓰임새를 알아보아야 한다.


오담 고택에는 문이 그리 많지는 않다. 최근에 보수를 한 것으로 보이는 사랑에서 안채로 통하는 협문은 나무로 꾸몄다. 대문의 경우에는 소슬대문 옆에 쪽문을 달아낸 경우도 있다. 이러한 문은 대개 대문을 열지 않고, 집안의 식솔들이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우리 고택은 문 하나라도 그냥 내는 것이 아니다. 문을 낼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고, 거기에 따른 내적 사고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집 뒤편을 돌아보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대개는 정면을 많이 보는데, 집 뒤편에는 굴뚝을 비롯해 벽의 형태, 배수로 등 볼 것이 많다. 또한 굴뚝은 어떤 형태로 만들어 졌는지도 꼼꼼히 따져보아야 한다.

3) 볼품 없는 작은 것 하나도 글이 된다.





고택을 둘러보면 가재도구가 있다. 실생활에 사용했을 이런 것들은 고택을 둘러보면서 가장 눈여겨 보아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툇돌은 어떻게 놓았는지, 마르 밑의 공간은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도 보아야 한다. 부엌은 창문을 어떻게 내었으며, 환기를 돕는 까치구멍은 어떤 형태인지도 살펴보자. 그리고 시렁은 어디에 놓았는지, 시렁 위에는 무엇을 올려 놓았는지도 빠트리지 말아야 한다.


그 외에도 여기저기 널려있는 많은 가구들과 문짝의 형태, 또는 난간은 어떻게 꾸며졌는지도 보아야 하다. 그런 것을 하나하나 찾아보다가 보면, 집집마다 나름대로 특징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4) 제대로 꾸민 집인지를 알아보자



오담 고택을 돌아보면서도 그렇지만 복원을 하면서 정확하게 하지 못할 경우가 있다. 복원이란 말 그대로 예전에 형태를 원형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 복원이 되었다는 집을 찾아가 보면, 황당할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오담 고택의 경우에 사랑채와 안채 중간 한편에 장독대를 마련하였다. 시멘트로 바른 것은 그렇다치고 장독대에 담장을 둘러 놓았다. 보기가 좋은 수도 있지만, 문화재란 항상 원형을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담장을 둘러 놓은 것도 보기가 껄끄러운데, 사랑채 뒷방을 보면 앞쪽 방보다 방바닥이 낮게 되어있다. 그리고 방의 층 간격이 넓어 오르내리기도 버겁게 보인다. 원래 이런 형태였는가를 알아보니, 복원을 하면서 형태가 달라졌다고 한다. 고택 답사를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렇게 원형이 변형이 되었는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소중한 문화유산을 돌아보면서, 그 소중함을 먼저 깨우치지 않으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 이런 문화재 답사는 단지 사진을 올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사고를 알아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본다. 쉽지 만은 않은 문화재 답사. 앞으로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생각한다. 답사를 하시는 분들에게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고택답사를 하면서 나름 정해진 바가 있다. 좋은 집은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칭찬을 하지만, 잘못된 것은 아낌없이 파헤친다는 생각이다. 이는 고택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재에 동일하게 적용시키는 나만의 답사 방법이기도 하다.

전국을 돌면서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있는 고택을 100채 이상을 돌아보았다. 그 중에는 정말 살고 싶은 집이 한두 채가 아니다. 그러나 그 중 가장 마음에 든 것은, 역시 이번 답사 길에 만난 함양군의 일두 정여창의 고택이다. 중요민속자료 제186호인 이 고택의 사랑채는 미적 감각을 마음껏 자랑하고 있다. 안주인의 위엄을 보이게 구성을 한 안채.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집에는 아랫사람을 생각하는 따듯한 마음이 있어 좋다. 이 집의 주인과 같은 분이,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아닐는지.



450년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한 고택

우선 이집을 돌아보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일일이 설명을 할 수가 없다. 집의 구성은 길에서 들어가면 만나는 솟을대문 위로 홍살문이 마련되어 있다는 점이 다르다. 5개의 효자와 충신의 정려패가 문 위에 걸려있어, 이 집의 범상치 않은 내력을 알게 한다.

집의 구성은 대문과 사랑채, 행랑채, 안사랑채, 중문채, 아래채, 광채, 사당 등으로 꾸며져 있다. 조선 오현 중의 한 분인 문헌공 일두 정여창(1450~1504) 선생의 고택으로, 정작 이 집은 선생의 사후인 선조 무렵인 1570년대에 지어진 집이다. 정여창 고택의 특징은 당시의 집의 구조뿐만 아니라 세간까지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당시의 생활상을 연구하는데 소중한 자료가 된다.
 



고택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에 깔아진 돌과 솟을 대문(가운데) 그리고 효자와 충신의 정려(아래)

뛰어난 사랑채의 멋스러움

골목길을 들어서면서부터 예사롭지가 않다. 골목길의 바닥을 돌로 깔아 운치를 더했다. 이 돌길은 새롭게 조성한 것이 아니고 집을 처음 지을 때부터 놓여있었다고 하니, 당시에도 이 집이 남달랐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광채와 중문의 담으로 연결이 된 사랑채가 보인다.

장대석을 3단으로 놓고 그 위에 자리한 사랑채. 정말로 눈이 부시다고 해야 할까? 사랑채 하나만 갖고도 하루 종일 글을 써도 부족할 듯하다. ㄱ자로 꺾인 부분에 개방된 마루를 놓아 정자로 만들고, 그 밑은 물건을 넣어둘 수 있는 광으로 구성을 하였다. 대문채와 광채에도 이런 물건을 둘만한 공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채의 밑에 별도의 공간을 마련했다는 것은 아랫사람들의 동선구성을 신경을 썼다는 뜻이다.



사랑채는 장대석을 쌓고 그 위에 놓았다. 꺾인부분은 판벽으로 마감을 하고 앞을 개방해
정자와 같은 기능을 갖는다(가운데), 개방마루 밑은 물건을 넣어놓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사랑채는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 같다. 담 너머로 사랑채를 보니 커다란 노송과 어우러지는 광경이 그대로 그림이다. 어찌 이런 사랑채를 꾸밀 수가 있었을까? 모든 것 하나하나가 마치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어야만 했던 것일까?

안주인의 위엄을 보이는 안채의 구성

사랑채와 중문을 사이로 구별이 되는 안채는, 정여창 선생이 돌아가시고 난 뒤 100년이 지난 후 후손들이 지은 건물이다. 350년의 세월이 지난 안채는, 앞으로는 중문채를 놓고 우측으로는 아래채, 좌측으로는 사랑채의 뒤가 막고 있어 튼 ㅁ 자로 구성하였다. 사랑채의 대청은 집안의 대소사를 마련할 수 있도록 넓게 구성이 되었으며, 오른편에는 며느리의 방을 따로 마련한 것도 이 안채의 특징이다.

안채에서 벌어지는 일은 전적으로 안주인이 맡아서 할 수 있도록 집안의 동선을 꾸며 놓았다. 심지어는 결혼을 한 후 일정기간이 지나면, 남자는 뜰아래채로 내려가 생활을 하게 하였다고 하니 이 집의 엄한 가풍을 알만하다.



안채와 뜰아래채(위), 중문채(가운데)와 안채의 정원

아랫사람을 생각한 집 구조와 동선

정여창 고택의 백미는 역시 아랫사람을 생각하는 집주인의 배려가 곳곳에 묻어있다는 점이다. 수많은 집을 다녀보았지만 이렇게 아랫사람을 생각하고 집을 지은 것은 볼 수가 없었다. 왜 오현 중의 한 분으로 선생을 꼽았는지를 알 수 있다. 안채 앞뜰 우물곁에는 절구를 땅 속에 묻어놓았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안채에서 여자들이 절구질을 할 때, 땅에 묻힌 절구가 힘을 덜 들이고도 작업을 편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엌으로 들어가니 환기를 시키는 까치구멍 대신 벽에 창문을 내었다. 까치구멍은 사시사철 공간이 열려있어, 한 겨울이 되면 바람이 심하게 들어와 춥다. 하지만 까치구멍이 있어야 할 곳에 창문을 내어 열고 닫음으로써, 추위를 막을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집에서만 볼 수 있는 배려의 마음이다.


땅속에 파묻어 힘이 덜 들도록 한 절구(위)와 까치구멍 대신 창을 내어 추위를 막았다(아래)

정여창 고택만이 갖고 있는 마루측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중문채 밖으로는 사랑채의 뜰로 나가는 공간이 있다. 곳간을 두고 일각문으로 향하는데, 중문채 뒤편에 마루가 보인다. 그런데 그 마루의 한편이 판벽으로 막혀있다. 무엇인가 하여 다가가 보았더니, 세상에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판벽 안으로는 소의 여물통을 이용해 소변을 볼 수 있도록 마련하였다.

중문채는 집안에서 가장 바쁜 사람들이 사용하는 공간이다. 그러다보면 제 시간에 소변조차 마음대로 볼 수가 없다. 그런 사람들을 위하여 마련해 준 마루측간. 이것이 바로 윗사람의 가져야 할 마음이 아닐까? 정여창 고택을 최고의 집으로 꼽는 데는 한 치의 주저함도 필요치가 않았다. 어디 이런 윗분 없을까?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분 같은데.


일각대문 안으로 들어가면 중문채의 바깥 툇마루가 있다.(위) 그 우측이 바로 마루측간이 있는 곳이다.
소의 여물통을 이용한 마루측간. 정여창 고택의 정점이다.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가장 쓰기 싫은 글은 ‘문화재가 훼손이 되었다’ 혹은 ‘복원이 잘못 되었다’라는 글 등이다. 나는 그냥 우리 문화재가 소중하고, 그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한 사람의 여행자일 뿐이다. 그런데 전국을 발품을 팔며 다니는 것도 힘이 버거운데, 문화재의 잘못된 모습이라도 보게 되면 자연 열이 뻗칠 수밖에 없다.

경상남도 함양군은 문화재가 많기로 유명하다. 거기다가 내가 좋아하는 고택과 정자가 많은 곳이니, 들려보지 않을 수가 없다.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는 한옥마을이다. 고려 때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니, 그 역사 또한 만만찮다. 잘만 관리를 했다고 하면, 전국 어디에서도 빠지지 않을 그러한 마을이다.


아름다운 정원과 솟을대문의 안쪽

하동정씨 고가의 아름다움

지곡마을이라고 하는 개평리에 들어서자,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카메라를 옷 안에 감추고라도 답사를 다닐 수밖에. 이 마을에는 경남 문화재자료 제361호로 지정이 된 하동정씨 고가가 있다. 솟을대문 안으로 들여다보이는 너른 정원이 눈길을 끈다. 보기에도 아름다운 집이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넓게 펼쳐진 정원에 나무 몇 그루가 운치 있게 서 있다.

뒤편에 멀찍이 서 있는 - 자형의 고택이 바로 이 집의 안채이다. 1880년에 지은 이집은 사대부가의 저택답게 사랑채를 비롯한 여러 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이 안채만 남아있다. 보존상태도 양호한 이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의 - 자형으로, 남도의 특징인 개방형 건물이다. 지붕은 맞배지붕이지만 한편에 부섭지붕을 달아 멋을 더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팔작지붕으로 오해를 살만도 하다.



- 자형의 6칸 안채와 벽에 달아낸 부섭지붕(가운데), 그리고 부섭지붕 아래 툇마루(아래) 


부섭지붕은 서까래의 윗머리를 다른 벽에 지지시켜 달아낸 지붕을 말한다. 대개 부섭지붕은 측면에 놓고 그 밑을 좁은 마루를 놓는다. 하지만 이 부섭지붕을 달아 전체적인 집의 모양새를 아름답게 꾸민다. 지곡마을에는 이 부섭지붕을 단 집들이 보인다.


정말 울고 싶은 심정입니다.

집을 한 바퀴 돌아본다. 참으로 정갈하게 정리가 된 집이다. 툇돌 아래에는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수에 땅이 패지 않도록, 기와로 마감을 한 것이 정겨워 보인다. 시원한 두 칸 대청은 뒷문이 열려 돌담이 보이는 것이 운치가 있다. 집은 좌측에 건넌방을 두고 두 칸 대청을 내었다. 그리고 두 칸 방과 한 칸 부엌이 있다. 간결하게 꾸며진 집이 선비의 단아함을 보는 듯하다.



대청 뒷벽에 시원하게 낸 문과 툇돌아래 낙수가 떨어지는 곳(가운데) 그리고 안방의 외벽(아래)

뒤로 돌아가 본다. 안방의 벽이 남다르다. 기둥을 여러 겹으로 가로 질러, 그것이 그대로 문양이 되었다. 어떻게 집을 지을 때 이런 생각을 한 것일까? 동편 부섭지붕 밑으로는 마루를 놓아 시원하게 바람을 쏘일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또한 남부지역의 특징 있는 가옥구조이다.

반대편 서편 벽에도 부섭지붕이 달려있다. 그런데 무엇인가 조금은 어색해 보이기까지 한다. 벽 위로 까치구멍이 있는데, 안을 모두 발라놓았다. 사람이 사는 것 같지는 않은데, 왜 까치구멍을 막아놓았을까? 문을 열고 보니 그 안을 보일러실로 개조를 하였다. 그리고 안에는 부엌의 벽이 보인다. 그렇다면 이 부섭지붕은 후에 달아낸 것일까?



세상에 이럴 수가. 부엌문 안을 벽으로 발라버렸다.
그리고 부엌 밖 부섭지붕은 언제부터 있었을까?
 
부엌문을 열어본다. 이게 무슨 일인가? 부엌문 안에 담이 있고, 위는 창으로 막혀있다. 그렇다면 이 부엌은 어떻게 출입을 할 수 있을까? 방 앞으로 난 툇마루 끝에 달린 문으로 출입은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부엌문의 안이 벽으로 막혀있다니. 말이 안 나온다. 이렇게 아름다운 집에 이게 무슨 황당한 일인가? 집을 고친지가 얼마되지 않은 듯한데, 이렇게 된 곳이 있다면 제대로 해 놓아야 하지 않았을까?

어이가 없어 정말로 울고 싶은 심정이다. 어째 이런 일이 있을까? 온몸에 힘이 다 빠진다. 돌아서 나오려는데 솟을대문 안에 새로 지은 집이 있다. 뒤편을 보니 굴뚝이 이상하다. 이건 또 무슨 굴뚝일까? 굴뚝이야 마음대로 형태를 할 수 있으니, ‘이렇게도 하나보다’라며 스스로를 위안한다. 우진각지붕을 올린 세 칸짜리 집 한 채. 이 자리에 서 있어야 했을까? 집안의 전체적인 분위기로 보아도 사랑채가 있을 장소는 아닌 듯하다.


솟을대문 안 우측에 새로지은 우진각 지붕의 집. 사랑채인 듯하다. 뒤편의 굴뚝

문화재의 복원은 철저한 고증을 거쳐, 제 모습을 찾아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이 아름다운 고가가 이렇게 여기저기 제 모습을 잃어버린 것에 대해, 어떻게 마음의 위로를 받아야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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