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남원시 도통동 392-1에 소재한 선원사. 만행산 자락에 지어진 절로. 헌강왕 1년인 875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절이다. 선원사는 한창 사세가 번성할 때는 전각이 80동이나 있을 정도로 큰 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선조 30년인 1597년, 정유재란 때 완전히 불타 전소가 되어버렸다.

영조 30년인 1754년에 김세평이 약사전과 명월당을 재건하였으며, 창건 당시의 철불을 약사전에 안치하였다. 선원사 약사전에 봉안된 보물 제422호인 철조여래좌상은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철불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흔히 이 철불을 설명하면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설명에는 창건 당시 조성한 철불이라고 한다. 선원사가 창건된 것은 신라 헌강왕 때인데, 창건당시 조성한 철불이 어떻게 고려 철불이 될 수가 있는지 의아스럽다.


선원사 정경과 보물인 철조여래좌상이 있는 약사전

약사전 앞에 배를 묶는 석주는 무엇인고?

조계종 제17교구 금산사의 말사인 남원선원사는 전형적인 비보사찰이다. 풍수비보사찰인 선원사는 남원을 구하는 절이다. 도선국사는 남원을 가로질러 흐르는 요천을 보면서, 남원의 지세가 물 위에 떠 있는 배와 같다고 생각을 하였다. 도선국사는 선원사를 창건하면서 약사전 앞에 두 개의 석주를 세워놓았다.

이 석주는 바로 남원이라는 배가 떠내려 갈 것을 걱정해, 배를 묶어놓기 위한 것이다. 이 입석이 없다면 남원은 그대로 물에 정처 없이 떠도는 배에 지나지 않아, 결국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래서 아직도 선원사 약사전 앞에는 배를 묶어두는 입석이 서 있다. 이 작은 입석 하나가 남원이라는 커다란 배를 묶어놓고 있는 것이다.


 

약사전 앞에 놓여있는 배를 묶는 석주

칠성각에 수궁가는 무엇인고?

선원사는 현재는 남원 시내 한 복판에 자리한다. 그런 선원사가 예전에는 꽤나 운치가 있었나보다. 아마도 남원팔경 중에 끼어있는 ‘선원모종’도 선원사가 남원의 상징이었을 것만 같은 느낌이다. 해가 떨어질 때쯤 요천 냇가를 거닐면, 은은히 들려오는 선원사의 범종소리. 아마도 그 무엇보다 푸근하지 않았을까?

<아니리>

그때여 어사또 농부들이 모심는 구경을 허시고 게서 떠나 남원 구중을 들어갈제

<진양조>

박석티를 올라서서 좌우산천 둘러보니 산도 옛 보던 산이요 물도 보던 물이다 마는 물이야 흐르난 것이니 그물이야 있겄느냐 광한루야 잘 있드냐 오작교도 무사헌가 동림 숲을 바라보니 춘향과 나와 둘이 서로 꼭 붙들고 가느니 못 가느니 이별허든 곳이로 구나

선원사 저녁 종성 옛 듣던 소리로 구나 북문 안을 들어서니 서리역졸 문안커날 명일사 거행을 분부허시고 춘향집을 찾어갈 제 일락서산 황혼이 되야 집집마다 밥짓노라 저녁 연기 자욱하야 분별헐 길 전히 없다 차즘 차즘 찾어 갈 제 춘향 문전 당도 허여 동정을 살펴보니 그때여 춘향어미난 후언의 단을 뭇고 두손 합장 무릎 꿇어 하나님 전의 축수를 허는디

비나니다 비나니다 천지지신 일월성신 오방신장 후토신령 화위동심 하옵시오 임자생 성춘향은 낭군 위하여 수절을 허다가 석문삼청 옥중으서 명재경각이 되었으니 삼청동 이몽룡씨 어서 수이 급제허여 전라 감사나 전라 어사로나 양단간의 수이 허여 오늘이라도 남원을 내려와겨 내 딸 춘향 살려주오


수궁가에 등장하는 토끼와 거북이 선원사 삼성각에 있다

선원사의 저녁 종소리는 남원 사람들한테는 꽤나 마음 속 깊이 각인이 되어있었나 보다. 판소리 춘향가에도 선원사의 저녁 범종 소리가 나오는 것을 보면. 이 대목은 이도령이 과거에 급제를 한 후 박석티고개를 넘어서 춘향의 집으로 향하는 대목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선원사 삼성각에 보면 자라가 토끼 한 마리를 등에 태운 형상이 문설주 위에 조각이 되어있다. 도대체 왜 삼성각 문 위에 자라가 있는 것일까? 그 해답이 궁금했는데, 이제야 조금 빛이 보이는 듯하다. 그것은 바로 약사전 앞에 서있는 배를 묶는 석주 때문이다.


선원사는 물에서 남원을 지키는 사찰.

즉 선원사 앞에 도선국사가 절을 처음으로 이룩하면서, 배의 형태인 남원을 지켜내기 위해 세웠다는 배를 묶는 석주가 있다. 그곳에 남원이라는 배를 묶어, 남원이 좌초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약사전 뒤에 자리한 칠성각 문 위에, 별주부인 자라와 토끼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물에 빠진 토끼 같은 약한 사람들을 구하는 것을 상징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래저래 남원 선원사는 물과 연관이 지어진다. 즉 물이 차면 좌초될 수밖에 없는 남원을 꽁꽁 붙들어 매어놓고, 그래도 물난리가 난다면 자라가 토끼를 구하 듯, 모두 구해내라는 뜻일 것이다. 아마도 남원이 물로 인해 큰 피해를 당하지 않은 것도, 도선국사의 석주와 삼성각의 별주부 때문은 아닐까?

남원 선원사의 알 수 없던 두 가지 물건. 늘 지나칠 때마다 ‘무엇에 쓴 물건일꼬?’를 생각했는데, 그 의문이 풀린 듯하다. 그래서 선원사는 늘 남원 사람들에게는 어머니의 품 같은 곳인가 보다.

순창에서 담양읍을 향해 가다가 보면, 읍 조금 못 미쳐 삼거리가 나온다. 이 삼거리 우측에는 ‘남산2구 동정자’라는 오석으로 된 마을 이정표가 있다. 그 옆에 보물 제505호인 ‘담양읍 석당간’ 1기가 서 있다. 전체 높이가 15m나 되는 이 석당간은, 지주의 높이가 2.5m에 달하며 곁에는 당간의 조성내력을 적은 비가 서 있다.

이 석당간은 절의 행사 때 사용하는 당을 다는 것으로, 단층 기단 위에 지대석을 겸하는 장방형의 지주를 두고 있다. 지주는 윗면이 약간 경사졌을 뿐, 측면에는 아무런 문양을 마련하지 않았다. 정면 중앙에는 장방형으로 1단의 받침을 마련하여, 당간대좌와 양 지주를 받치고 있다. 지주는 방형 석주로 약 80cm의 사이를 두고 남북으로 마주하고 있다.


바람으로 인해 나무로 세웠던 것을 다시 조성하다.

이 담양읍 석당간은 그 조성시기가 명확하다. 바람으로 인해 당간이 무어진 것을 나무로 우선 세웠다가, 다시 훼손이 되어 헌종 5년인 1839년에 중건하였음을 비석에 기록하고 있다. 담양읍 석당간은 가늘고 긴 8각 석주 3개를 연결하였으며, 그 위에 원형 당간을 올려 마디의 표식이 뚜렷하다.

석주의 연결방법은 통식으로 상하석이 만나는 부분을 반으로 깎고, 중간석의 양단을 또한 반으로 깎아 서로 밀접 시킨 후 각기 철제를 이용해 둥글게 만든 환으로 고정시키고 있다. 그리고 연결부분에는 또 상하에 원형의 구멍을 관통시켜 더욱 단단하게 조성을 하였다. 당간의 상단부에는 금속제의 보륜이 이중으로 장식되고, 풍향과 같은 장식이 부착되었으나 현재는 두 개만 남아있다.



비석에 새겨진 기록을 보면 석당간은 큰 바람으로 넘어진 것을, 다시 복원한 것이다. 그러나 양편의 지주는 그 양식이 고려시대 것으로 추측되며, 또한 인근 오층석탑이 고려시대의 조성한 석탑임을 감안할 때, 이 석당간도 고려시대에 오층석탑과 같은 시기에 처음으로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석도를 세운 연대를 알 수 없지만 대개 읍을 처음 설치한 때부터이다. 갑인년에 큰바람으로 꺾여 나무로 대신 세웠다가 작년 봄에 또 훼손되어 중건한 것이 기해 3월이다. 숭정기원후 4기해 3월 일 부사 홍기섭 기록하다(石棹之立年不可攷 盖自設邑始幾, 年至甲寅爲大風折以木代立昨春 又頹今則如初重建歲己亥三月也, 崇禎紀元後四己亥三月日知府洪耆燮記)」라고 기록되었으며 후면에는 당시 유사(有司), 호장(戶長), 읍리(邑吏) 등 이 비석 건립의 관계자의 직책과 성명이 음각되어 있다.



석탑이 서 있는 곳이 대웅전 자리

삼거리에서 도로를 따라 조금 안으로 들어가면 좌측에 오층석탑 한 기가 서 있다. 탑의 형태는 1층 기단에 오층석탑으로 일반형과 약간 다른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탑이 서 있는 자리는 담양군 담양읍 남산리 342번지이며, 현재 이 탑은 보물 제506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오층석탑은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높이는 7m에 이른다.


이 탑은 백제탑인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모방하여 조성을 하였으며, 기단부는 여러 장의 석재를 이용하여 꾸몄다. 상층의 몸돌을 받치고 있는 지대석은 1석으로 구성하였고, 중석은 중앙에 탱주가 생략된 채, 양편에 양 우주만 조성하였다. 기단부의 높이는 다른 오층석탑에 비해 매우 낮게 조성되었음이 특이하다.

백제계 석탑을 모방한 오층석탑

갑석의 상면은 위편에 몸돌을 받을 수 있게 도드라지게 조성을 하였다. 탑신부는 몸돌과 옥개석이 각각 1석인데, 몸돌과 지붕돌인 옥개석 사이에 괴임을 별석으로 마련하여 몸돌을 받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1층의 몸돌에는 별다른 조각은 보이지 않는다. 양편에 모서리기둥인 우주만 나타냈을 뿐이다.



몸돌을 덮고 있는 옥개석은 두꺼운 편이며, 처마의 끝은 위로 솟구쳐 있다. 옥개석의 사방 끝에는 풍경을 달았던 흔적이 보인다. 처마의 밑은 수평으로 조성을 했으며, 옥개석의 밑면 받침은 3단으로 5층까지 동일하다. 2층 이상은 알맞게 체감이 되어있어, 오층석탑이기는 하지만 안정감을 준다. 고려 중기를 넘기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는 이 오층석탑은, 상륜부는 모두 유실되었다.

이 담양읍의 석당간과 오층석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는 고려 때 절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아마도 석당간이 서 있는 곳 근처에 일주문이 있었을 테고, 현재 오층석탑이 있는 곳 주변에 대웅전이 있었을 것이다.



수많이 세월이 지나간 지금, 그 절의 존재는 알 수가 없다. 언제 지어진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소멸이 되었는지. 다만 이 석당간과 오층석탑만 남아, 한 때 이곳이 번창했던 절터였음을 추정할 뿐.

진주시 수곡면 효자리 산139번지에는, 주변이 송림으로 쌓인 곳에 옛 고묘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가야시대의 토기 등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옛날부터 묘역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효자리에 있는 고분은 경상남도 기념물 제42호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조선 태종 때 사온서 직장을 지낸 하현의 무덤이다.

수곡면에 있는 효자리 고분군은 수곡초등학교로 향하는 도로 옆에 형성된 요산마을의 서남쪽에 있다. 해발 70m 전후의 낮고 평평한 구릉에 있는 이 고분은, 계단을 조성해 놓아 오르기에 편하다. 6월 10일 오후, 진주에 들릴 때마다 찾아가고 싶었던 곳이다. 진주 수곡은 진양 하씨들의 유적이 많은 곳이기 때문이다.


조상들의 유적을 돌아보다.

개인적으로는 조상의 고묘이다. 하기에 기대를 걸고 계단을 올랐다. 오르는 계단 주변에는 잡풀이 무성해, 자손으로서 낯이 뜨겁다. 시간만 허락한다면 풀이라도 베어내 정리를 하고 싶은 생각이다. 저만큼 고분이 보이는데 여기저기 계단 주변에 석재들이 널려있다. 어디에 쓰였던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이곳에는 예전부터 많은 고분들이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그런 곳에 쓰였던 석재들이 아닐까?

이곳에 있는 분묘는 조선조 태종 때 사온서직장을 지낸 하현과 부인 포산 곽씨의 묘이다. 하현(河現)의 묘는 화강암을 이용하여 높이 15cm, 길이 210cm의 지대석을 쌓고, 둘레돌인 갑석을 갖춘 팔각형의 호석을 마련하였다. 그 위에 흙으로 봉토를 완성한 형태를 하고 있다. 묘의 앞에는 비석과 상석, 좌우에는 높이가 170cm 정도의 문인석이 배치되어 있다.



‘사온서’란 고려시대에 궁중에서 쓰는 술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었다. 고려 문종 때 설치된 ‘양온서’를 충렬왕 34년인 1308년에 사온서로 고쳤으며, 직장이란 정7품의 벼슬을 말한다. 공민왕 5년인 1356년에 그 명칭을 다시 양온서로 고치는 등, 여러 번 이름이 바뀌면서 조선시대로 이어졌다.

조선조 초기에 마련한 유례가 드문 분묘

이 고묘는 팔각형으로 조성을 하였다는 것도 특이하지만, 특히 갑석의 모서리마다 반전된 귀를 나타내고 있다. 이런 형태는 마치 석탑의 옥개석과 같은 형태이다. 외형이 이러한 형태의 분묘는 유례가 드물 뿐 아니라, 축조연대가 조선조 초기가 확실하기 때문에 이시기 묘제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먼저 머리를 조아려 조상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고 난 뒤, 주변을 찬찬히 살펴본다. 고묘 주변의 마을은 진양 하씨들의 세거촌이다. 이곳에는 이 고묘 외에도 몇 기의 고묘가 더 있다고 한다. 주변을 돌담으로 둘러치고 앞으로는 트여있는 고묘 주위에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다. 그저 모르는 사람의 눈으로 보아도 명당이란 생각이다.

비석 앞에 놓인 두 개의 상석 측면에는 탱주와 같은 중앙 기둥을 새겨 넣었다. 그리고 앞쪽의 상석은 화려한 문양이 새겨져 있다. 모든 것들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고묘에서 볼 수 있는 형태와는 많은 차이가 난다. 왜 조상님들은 이렇게 팔각으로 된 고묘를 이곳에 조성했던 것일까? 당시의 묘라고 해도 이런 형태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다시 찾아와 조상님께 대한 예를 올려야겠다.

진주시 수곡면 효자리는 많은 문화재가 전하고 있는 곳이다. 500년 세월을 그렇게 자리를 지키고 눈앞으로 펼쳐지는 들판을 내다보고 있는 선조. 이곳을 찾아오다가 보니 마을에 양조장 하나가 있었는데, 사온서 직장을 지내셨다는 것을 알았다면 막걸리라도 한 병 사들고 올라올 것을 그랬다고 뒤늦은 후회를 한다.

오래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답사길. 다음에는 꼭 술 한 병 사들고 찾아와, 조상님에 대한 예의를 갖추겠다고 다짐을 한다. 내려오는 길에 자꾸만 뒤를 돌아다보는 것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후손으로서의 예가 부끄럽기 때문이다.

고려 말 어머니 한 분이 아홉 명의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현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백산리라는 곳이다. 순창에서 담양 방면으로 나가다가 보면 좌측으로 청소년 센터가 보인다. 그리고 그 조금 못 미쳐 우측으로 경천이라는 내를 건너 ‘대모암’이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그 길을 따라 300m 정도를 오르면 이 부인이 쌓았다는 성이 있다.

이 산성은 ‘대모산성’ 또는 ‘백산리산성’ 등으로 불리는데, 두 산봉우리를 배 모양으로 감싼 형태를 하고 있다. 이 성은 현재 ‘홀어머니 산성‘이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이 성을 아홉 명의 아들을 둔 양씨 부인이, 아들들과 함께 쌓았다고 전하기 때문이다. 이 성에는 양씨부인에 대한 애틋한 전설이 전하고 있다.


설씨 총각의 구애에 죽음으로 답한 양씨부인

홀어머니 산성은 양씨 부인이 아홉 명의 아들과 함께 쌓았다고 전해지는 성이다. 양씨부인을 흠모하던 같은 마을에 살고 있던 설씨총각은, 은근히 양씨부인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설씨총각이 양씨부인에게 구애를 했다는 것이다. 아들들과 함께 살고 있던 부인은 딱히 거절을 할 명분이 없었다. 그러다가 생각을 해 낸 것이.

“총각이 나막신을 신고 서울을 다녀올 때까지, 내가 성을 다 쌓지 못하면 결혼을 허락하겠다.”

고 하였다. 총각은 서울로 떠나고 부인은 아들들과 함께 열심히 성을 쌓았다. 아홉 명의 아들들과 성을 쌓는 부인은, 지아비의 생각을 해서라도 결혼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성을 쌓고 있던 부인이, 마지막 성 돌을 채 올리기 전에 설씨총각이 먼저 돌아왔다.

 

대모암과 산성 오르는 길

성을 쌓기 위해 돌을 나르던 치마를 뒤집어 쓴 양씨부인은, 성벽 위에서 몸을 날려 자결하여 정절을 지켰다는 이야기이다.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외간남자와 결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결혼을 앞둔 신부는 이 성 잎을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아마도 이 산성 이름이 홀어머니 산성이기 때문에, 홀로될 것을 염려해서 인가보다.

군창으로 사용했던 홀어머니 산성

홀어머니 산성을 찾아보리라 몇 번을 별렀다. 그 앞을 지나치면서도 벌써 몇 번째 길을 돌리지를 못했기 때문이다. 6월 5일 일요일, 약속이 깨어지는 바람에 잠시 답사 길에 나섰다. 그동안 보고 싶었던 홀어머니 산성을 찾아갈 생각에서이다.



내를 건너면 좌측으로 대모암 이정표가 나온다. 대모암은 원래 절이 있던 곳이 아니었다. 이곳에는 작은 산당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토속신앙을 섬기던 장소였다. 그러다가 1935년에 학성스님이 인법당을 신축하고 대모암을 창건하였다.

대모암 대웅전 뒤편으로 난 길을 천천히 오른다. 높지 않은 등성이 위에서는 길이 좌우로 갈라진다. 좌측으로 조금 걷다가 보니 산성이 보인다. 최근에 일부는 복원을 한 듯하다. 원래 이 성은 백제 때 쌓은 산성이라고 한다. 성벽은 그리 높지가 않으며, 동쪽으로 향한 물이 흘러나가는 수구는 직선으로 단을 쌓았다.



이 산성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초기까지는 군창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길이는 700m 정도라고 하지만, 현재 찾아볼 수 있는 성의 길이는 100여 m 정도인 것 같다. 남은 부분은 넝쿨이 우거져 들어갈 수가 없다. 성벽은 가파른 언덕 위에 쌓았는데, 성벽의 넓이는 1.3m ~ 4m 정도가 된다.

홀어머니 전설은 언제 시작이 되었을까?

복원을 한 성벽 끝으로는 옛 성벽인 듯한 곳이 아직 남아있다. 성벽 위로 한 바퀴 돌아본다. 아마도 이 성이 과거에는 천혜의 요새였을 것이다. 군창을 두었다고 하면 사방에서 몰려드는 적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산성에 왜 고려 시대의 홀어머니 전설이 전하는 것일까? 그것이 못내 궁금해 수소문을 해보았지만, 시원한 대답을 들을 수가 없다.



대모암과 대모산성. 아마도 성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던 산당과 연결이 된 전설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산당에 모셨다는 신격이 혹 홀어머니는 아니었을까? 성벽 위에 걸터앉아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본다. 그저 답사를 다니면서, 이런 이야기라도 들을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해지는 날이다.

 

서당은 기본적인 학문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이다. 나라에서 운영하는 항교 등과는 달리, 서당은 지방의 선비나 백성들이 자녀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교육의 장소로 설립을 한다.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갈계리에는 경남 유형문화재 제295호로 지정이 된 ‘갈천서당’이 자리하고 있다.


서당은 대개 7 ~ 8 세의 어린 학동들인 남자 아이들이 입학을 하여, 15 ~ 16세가 될 때까지 공부를 하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현재 초, 중급 정도의 학습과정인 유교 경전을 주로 공부하게 된다. 19세기에 들어 근대교육이 도입되면서 점차 쇠퇴의 길을 걷던 서당은, 그 기원을 삼국시대부터로 보고 있다.



임훈이 세운 갈천서당


서당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시기는, 사림파가 등장하여 향약을 보급하고 마을마다 지역민의 교화에 힘쓰던 16세기 초반부터이다. 갈천서당은 선조 6년인 1573년에 갈천 임훈이 처음 문을 연 서당이다. 임훈은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인 이곳 갈계리로 내려와, 아우인 임운과 함께 갈천서당을 열고 학동들을 가르치는데 여생을 바쳤다.


처음으로 갈천서당이 문을 연 것은 1573년이지만, 현재의 건물은 고종 15년인 1878년에 후손들이 다시 지은 것이다. 지난 5월 20일 무주, 거창의 답사 길에 만난 갈천서당. 옆으로 내가 흐르는 곳에 세우진 갈천서당은 참으로 단아한 모습이다. 크지 않은 이 서당에서 글을 배우는 학동들은 자연을 만끽하며 살았을 것이다.




아마도 공부를 하다가 머리라도 식히고자 했다면, 냇가에 발을 담구고 앞으로 펼쳐진 갈계숲을 거닐지는 않았을까? 강당과 대문으로 구성된 이 서당은 참으로 아담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절로 학습의 효과가 뛰어날 것만 같다.


조선시대 서당연구에 좋은 예


갈천서당은 조선시대 서당연구에 좋은 예로 꼽힌다. 정면 다섯 칸, 측면 한 칸 반의 크지 않은 맞배지붕으로 꾸며진 서당은, 앞으로 솟을대문을 두고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좌측에 두 개의 비가 보인다. 임훈과 임운 두 형제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후손들이 세운 신도비이다.





서당을 바라보면서 좌측으로 한 칸의 방을 드리고, 두 칸 대청과 두 칸의 방이 이어진다. 집은 참으로 간소하고 장식을 하지 않아 겸손함이 배어있다. 자연석 주초를 이용하고 사각의 기둥을 세운 건물은, 역시 자연석으로 몇 단의 기단을 쌓았다. 지금은 주변이 너른 평지에 있어, 지나는 사람들이 찾기에 용이하다.


두 칸 대청의 뒤로는 판문을 달아냈으며, 몇 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대청 좌측 위에는 향약과 서책 등을 보관하는 나무로 짠 보관함이 보인다. 방 정면 밑으로는 연도를 내고, 굴뚝이 없는 연기구멍을 내었다. 아담하고 선비의 모습처럼 단아한 갈천서당. 아마도 이곳에서 글을 읽던 학동들의 마음도 이처럼 단아하지 않았을까?





서당을 한 바퀴 돌아 나오면서 뒤를 돌아본다. 바쁜 농사철이라 그런지, 앞으로 지나는 경운기의 소리가 마치 학동들의 글 읽는 소리처럼 들린다. 예전 이곳에서 학습을 하던 학동들은 솟을삼문 앞 들판에서 모심기를 하던 농부들을 바라보며, 절로 글이 떠올랐을 것만 같다. 처음 문을 연지 450년, 지금의 서당이 지어진지 130여년. 갈천서당은 지금도 아이들이 공부를 하기에 딱 어울릴 듯한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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