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팔경 중에는 용지대월이 있다. 바로 이 용연 위에 달이 떠 비치는 아름다움을 그린 것이다. 동북각루에 걸린 편액에는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라 하였으며, 참판이었던 조윤형이 썼다고 한다. 화홍문에서 용연으로 가는 징검다리를 건너다보면, 못의 서쪽에 석각 이두를 설치하였다. 이는 용연에 물이 많이 차면 이 이두로 물을 화홍문 밖으로 뿜어낼 수가 있는 시설이다.

 

용연은 모양이 반달처럼 생겼다고 했다. 둘레가 210, 깊이 6척이고, 못의 가운데에는 작은 섬이 있다. 못 위 성의 모퉁이에는 방화수류정이 있고, 정자 아래에 있는 바위는 옛날부터 용머리라 하여 낚시터로 삼을 만하다고 하였다. 이곳에서 해가 지기를 기다린다. 일몰 후 14분이 지나면 화성은 온통 불빛으로 아름답게 채색을 한다.

 

방화수류정은 조선 정조 18년인 1794년에 완공되었으며 화성의 동북각루이다. 방화수류정은 전시를 위해 화성에 축조한 건물이지만 정자의 기능을 함께 갖고 있는 건물로 석재와 목재, 전돌을 사용해 축조하였다. 방화수류정은 송나라 정명도의 시 운담풍경오천(雲淡風經午天), 방화류과전천(訪花隨柳過前川)”에서 따왔다.

 

방화수류정은 평면은 자형을 기본으로 하고, 북측과 동측은 형으로 돌출되게 조영하여 사방을 관망하는데 있어 어느 한 곳도 빠트리지 않도록 축조한 건축물의 백미로 알려져 있다. 정조대왕이 축성한 수원 화성의 시설물 중 한 곳인 방화수류정은 조선 헌종 14년인 1848년에 중수하였고, 일제강점기 이후 여러 차례 부분적으로 수리를 한 것으로 전해진다.

 

수원 화성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을 들라고 하면 당연히 방화수류정이다. 수원에서 8년 동안 살면서 가장 많이 가본 곳이기도 하다. 이 방화수류정은 화성의 네 곳에 있는 각루(角樓) 중 하나로 동북각루이다. 방화수류정은 179494일 터 닦기를 시작으로 그 해 1019일에 완성을 하였으니, 200년이 지난 역사를 갖고 있다.

 

 

주변 경관이 가장 아름다운 정자

 

화성은 자연을 최대한으로 이용한 가장 큰 조형물이라고 한다. 화성의 아름다움이야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이지만, 어느 곳 하나 자연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더욱 놀랍다. 방화수류정은 꽃을 쫒고 버들을 따라간다는 아름다운 정자다. 성벽 밑으로는 용연을 파서 나무를 심어 운치를 더하고, 옆으로는 흐르는 버드내 위에 화홍문을 세워 그 주변 경관과 함께 아름다움을 더했다. 누마루로 깐 정자에 올라서면 사방의 경관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한 것도 방화수류정의 또 다른 멋이다.

 

방화수류정의 동편 바로 옆으로는 북암문이 있어, 쉽게 용연을 다닐 수 있도록 하였다. 화성의 암문은 깊고 후미진 곳에 설치한 비밀 문으로, 적이 모르게 가축이나 사람들을 통용할 수 있도록 낸 문이다. 그러나 이 북암문을 이용하면 방화수류정에서 용연까지 가장 짧은 거리로 이동할 수가 있다. 용연은 방화수류정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주고 있다. 용연의 가운데는 인공 섬을 만들어 놓았으며, 전체적인 조화를 보이는 이 용연과 방화수류정은 한 폭의 그림과 같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원화성 중에서 가장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2단의 벽돌담으로 쌓은 위에 지은 정자

 

방화수류정은 정자의 모양도 특이하지만, 그보다는 전체적인 조화다. 성벽이 높게 오르기 시작하는 산중턱에 지어진 방화수류정은, 그 서 있는 장소마저 눈에 잘 띄는 곳이다. 정자는 이단의 기단위에 세워졌는데, 기단을 벽돌로 쌓아올렸다. 일단의 벽돌을 쌓은 후 장대석 계단을 놓고, 그 위에 정자의 기둥을 세웠다. 그런 다음 다시 벽돌을 높여 정자를 지었다. 이곳에 모든 기운이 모여든다고 하는 말이 빈말은 아닌 듯하다.

 

좌측에는 문을 달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했는데, 그 문 또한 아름답다. 그 문 안에로 들어간 병사들이 적을 향해 화살을 쏠 수 있도록 하였다. 적과 교전을 하는 성곽의 건물이면서도 가장 아름다운 정자. 그리고 정자로의 기능만이 아니라 본연의 성곽 기능을 갖고 있는 정자가 바로 방화수류정이다.

 

방화수류정의 아름다움은 정자만이 아니다. 정자 밑에 있는 쪽문을 돌아서면 벽면이 십자모양의 문양을 넣었다. 이런 조선시대 건축에서 많이 나타나는 문양이기도 하다. 이런 문양 하나가 방화수류정을 지으면서 얼마나 자연경관과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가를 생각한 것이라고 본다. 이런 벽면이 사방을 둘렀다면 그 또한 지금과 같이 아름답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한 벽만 그렇게 처리한 것이 더욱 돋보이는 미가 아닐까? 아마 방화수류정을 축조한 공인이 그런 것 하나까지 모두 계산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일단의 기단을 오르면 정자가 한편으로 서 있게 된다. 정자는 남쪽은 쪽문의 위까지 돌출이 되고, 북쪽은 중앙으로 돌출을 시켜 용연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게 했다. 그저 넘길 수 있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철저하게 계산이 된 아름다움이다. 일단의 기단 위 공백은 네모난 흑색으로 된 돌을 깔았다. 그런 것 하나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쓴 방화수류정이다.

 

아마 방화수류정만큼 많은 용두가 지붕 위에 올려 진 건물은 없을 것이다. 방화수류정은 정자가 여기저기 돌출이 되어있고, 그 돌출이 된 곳의 지붕이 서로가 엇물려 있다. 그 양편에 모두 용머리를 올렸다. 또한 한 가운데는 절병통과 같은 모양도 있다. 이렇게 많은 용머리를 올린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방화수류정의 위치는 정조가 직접 잡았다고 한다. 그리고 45일 만에 공사가 끝난 이 정자에서 활을 쏘기도 했다. 방화수류정은 정조 자신이 왕권을 상징하는 마음을 알린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상징적인 정자이기 때문에, 그 많은 용두를 지붕 위에 올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방화수류정의 지붕 위에 유난히 많은 용두들. 아마 정조가 끊임없이 추구해 온 힘이 있는 왕조를 상징하는 듯하다.

 

 

수원 팔경의 하나인 '용지대월'이 용연에

 

보름달이 뜨면 방화수류정에는 네 개의 달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하늘에, 또 하나는 바로 용연에 뜬단다. 그리고 세 번째의 달은 술잔에, 네 번째의 달은 사랑하는 님의 눈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멋진 말은 우리나라 전역에 걸쳐서 나타난다. 강릉 경포호에도 있다. 그러나 화성의 방화수류정 아래 용연은 그것과는 뜻이 다르다. 그래서 용연위에 달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용지대월(龍池大月)'이라고 하여 수원 팔경 중 하나로 꼽았다.

 

사실 이 용연은 화성의궤에 나타난 용연과는 다르다. 지금의 용연은 당시의 용연보다 많이 형태가 달라졌다. 화성성역의궤를 보면 처음 용연을 조성했을 때는 반달 모양의 연못에서 낚시를 즐겼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원형의 모양을 하고 있다. 당시의 용연은 둘레가 250m에 깊이가 185cm라고 적고 있다. 지금의 연못보다 오히려 크다. 그 연못 가운데 인공 섬을 만들고 아름다운 소나무를 한 그루 심었다고 했으니 그 운치가 어떠했을까?

 

아름다운 용연이 제 모습으로 되돌아 올 수 있다면 방화수류정의 아름다움도 한결 더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아름다운 방화수류정, 찬바람도 마다않고 찾아간 곳에서 그 아름다움에 빠져 시간을 잃어버렸다.

 

화성 안에는 독립구역 몇 개소가 자리한다. 이 독립구역들은 같은 화성에 있으면서도 철저하게 방비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독립구역은 바로 봉화를 올리는 봉돈과, 공심돈이다. 이 독립지역은 화성 안에 또 다른 작은 성과 같은 기능을 갖고 있다. 봉돈은 봉화를 올리는 신호의 기능을 갖고 있는 곳이다.

 

봉돈은 외부와 차단되어 있다. 봉돈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성 안쪽으로 난 문을 들어서야 하며, 사방은 벽돌로 쌓아 막혀있다. 하기에 이 봉돈을 출입할 수 있는 곳은 오직 앞쪽에 난 문 뿐이다. 한 때는 화성관람을 하는 일반인들이 관람을 할 수 있도록 개방을 해놓았기 Eians에 당시의 자료를 이용하여 봉돈을 돌아본다.

 

 

일반적인 봉수대와 다른 봉돈

 

화성의 봉돈은 1796617일에 완성이 되었다. 화성 봉돈은 일반적인 봉수대와는 다른 형태이다. 일반적인 봉수대는 주변을 잘 살필 수 있는 산 정상부의 높은 곳에 자리한다. 그러나 봉돈은 화성의 몸체 위 성벽에 맞물려 축조하였다. 봉돈의 재료는 벽돌을 활용하였으며, 우리나라 성곽 형식에서는 색다른 형태이다.

 

이 봉돈은 예술작품처럼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평상시에는 남쪽 횃불구멍인 첫 번째 화두(火頭)’에서 횃불이나 연기를 피워 신호를 한다. 화성 봉돈에서 신호를 보내면 용인 석성산과 흥천대로 신호를 보내는데, 다른 4개의 화두에는 위급한 일이 없으면 불을 피울 수 없도록 철저하게 방지를 하였다.

 

 

 

문 안으로 들어가면 좌우에 방이 있다. 좌측의 방은 무기고로 사용하고, 우측의 방은 봉돈을 지키는 병사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이다. 계단식으로 축조를 한 봉돈의 내부 벽은 모두 4층으로 구성됐다. 각 층마다 성벽으로 타고 오르는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총안이나 기름 등을 부을 수 있는 구멍이 있다.

 

봉돈이 독립된 구조물이라는 것은 성 안의 벽쪽으로도 총안이 나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성이 일부 적에게 열려도 봉돈은 지켜야만 하기 때문이다. 성의 계단마다 안으로 들어쌓기를 하고, 그 위편에 통로를 내어 군사들이 다닐 수 있도록 만든 것도 화성 봉돈만이 갖고 있는 특별한 구성이다.

 

 

봉화의 신호체계는 어떻게 구별할까?

 

봉돈에는 모두 5개의 불을 피우는 화두가 있다. 일반적인 봉수대가 단 한 개의 화구를 이용해 적의 침입을 알리는 것과는 달리 화성 봉돈은 숫자부터 사뭇 다르다. 봉화는 낮에는 연기를 피우고, 밤이 되면 횃불을 올린다. 총 다섯 개의 화두를 통해 상황을 전달하는데 그 방법은 다음과 같다.

 

평상시에는 밤낮으로 봉수 1개만을 올린다

적이 국경 근처에 출몰하면 봉수가 2개가 오르고

적이 국경선에 도달하면 3개의 봉수가 오른다

봉수 4개가 오르면 적이 국경을 넘었다는 신호이며

적과 교전이 벌어지면 5개의 봉수에 신호가 모두 올라간다

 

 

예전에는 이 봉돈의 연기나 횃불이 아마도 가장 빨리 상황전달을 할 수 있는 신호였을 것이다. 멀리서보면 아름다운 하나의 축조물과 같은 봉돈. 그러나 이 봉돈이 갖는 중요성은 화성의 그 어느 구조물보다도 중요한 것이었다. 하기에 화성의 봉돈은 와전히 독립괸 구조물로 치 위에 올려놓았다.

 

사람들은 화성을 구경하러 와서 안으로 돌아본다. 물론 시설물 등을 보기 위해서는 안으로 돌아보아야 맞다. 하지만 성이라는 것이 안보다 밖에 더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터. 성은 밖으로 겉돌아보아야 진가를 알 수가 있다. 밤에 만나게 되는 화성, 그것은 또 다른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봉돈에 봉화라도 보였으면

 

봉돈은 돌로 쌓아올린 성의 치 위에, 다시 벽돌로 높게 쌓은 구조물이다. 성 밖으로 18척이나 튀어 나온 봉돈은 마치 치처럼 생겼으면서도 그 보다 크다. 외면의 돌로 쌓은 것이 5, 벽돌로 쌓은 것이 62층으로 전체 높이 25, 너비 54척이나 된다. 봉돈은 그 봉화의 숫자로 신호를 하게 된다.

 

봉돈은 안에서는 또 하나의 작은 성처럼 견고하다. 하지만 밖에서 보는 봉돈은 그 자체만으로도 걸작이다. 성밖에서 봉돈을 관람하고 있는데 봉돈 안에서 사람들의 소리가 난다. 위를 올려다보니 사람들의 발이 보인다. 저 다리가 보이는 곳에서도 장용영의 군사들이 성벽으로 달라붙으려는 적들을 향해 화살과 총을 쏘아댔을 것이다.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의 또 다른 독립공간인 봉돈. 지금은 연기도 피우지 않아 안내판을 보고서야 봉돈임을 알 수 있다. 언젠가 수원화성문화제 때 봉돈에 불을 피운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생각이 난다. 봉돈에 다만 한 달에 한 번이라도 불을 올릴 수는 없는 것일까?

 

세계문화유산이자 국가사적 제3호인 수원화성에는 모두 3개소의 공심돈이 있었다. 보물로 지정된 서북공심돈과 팔달문과 남수문 사이에 유실된 남공심돈, 현재 남아있는 또 하나의 공심돈인 동북공심돈이다. 동북공심돈은 연무대와 동문인 창룡문 사이에 세워져 있다. 둥근 원형으로 조성을 한 동북공심돈은 성곽 안으로 들어와 성벽의 여장과 사이를 두고 조성하였다. 작은 문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는 동북공심돈은 통로가 나선형으로 위로 오르게 되어있어 소라각이라고도 부른다.

 

세계문화유산 화성 가운데서도 가장 특별하게 조성된 동북공심돈. 동북공심돈은 기단석은 돌로 놓고 그 위에 벽돌을 이용해 축조를 하였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우측으로는 잠겨 있는 곳이 있다. 아마도 무기고 인듯하다. 그리고 좌측으로는 공심돈 위로 오르는 나선형의 통로가 있다. 맨 위에는 역시 전각을 지었는데 사람들이 올라 주변을 살피고는 했다.

 

지금은 출입할 수 없는 동북공심돈은 수원 화성의 또 하나의 작은 고성(古城)이다. 화성을 돌아보면서 만날 수 있는 많은 구조물 중 이렇게 독단적으로 조성된 구조물이 상당히 보인다. 화성만이 갖고 있는 공심돈은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화력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층마다 개인 화기인 불랑기를 지참한 병사들이 공심돈 안에서 쏘아대는 화포만으로도 근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만큼 견고한 구조물이 바로 공심돈이다.

 

 

공심돈 위에서 보는 화성은 절경

 

공심돈 위로 오르면 주변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화성의 공심돈을 처음으로 짓고 난 당시에도 이렇게 공심돈의 위에 올라 주변을 살폈을 것이다. 그리고 나선형으로 돌아 오르는 길 벽면에는 총안이 나 있다. 주변 어디로도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천혜의 작은 요새이다. 공심돈은 그렇게 그 자리에서 창룡문과 동장대(연무대)를 지키는데 일조를 했을 것이다.

 

동북공심돈은 정조 20년인 1796719일에 완공되었다. 화성은 그 짜임새나 둘레에 비해 빠른 공정을 보이고 있는 것 또한 특이하다. 아마도 많은 기물을 사용하여 축성을 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지금은 들어갈 수 없는 서북공심돈과 마찬가지로 동북공심돈도 일반인들의 출입을 재한하고 있다. 나선형의 통로를 따라 위로 오를 수 있었던 동북공심돈. 개방을 했을 당시 그 위에 올라 주변을 살펴본 적이 있다. 모든 것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공심돈 위에서서 주변을 돌아보며 당시에도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이 공심돈 하나를 갖고도 화성은 천하무적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공심돈을 축조할 수 있었던 당시의 선조들이 그저 감사할 뿐이다. 전쟁을 하기 위한 성곽이지만, 그 아름다움에 빠져 길을 떠나지 못한다. 동북공심돈 위에 서면 성 밖은 물론 성 안의 연무대, 창룡문 등과 멀리 멀리 주변이 모두 내려다보인다. 오직 수원화성에서만 만날 수 있는 공심돈. 이 아름다운 구조물의 막강한 화력을 얼마나 대단했을까?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다.

 

총안으로 빛이 들어오게 만든 과학적 구조

 

동북공심돈은 노대의 서쪽 60보쯤 되는 거리에 자리한다. 성탁(城托)의 위 성가퀴 안에 요동(遼東)에 있는 계평돈(平墩)을 본떠서, 벽돌로 쌓아서 둥그렇게 돈()을 만들었는데 겹으로 둘렀다.

 

동북공심돈의 높이는 175, 바깥 원 둘레 122 , 벽돌로 된 부분의 두께 4, 안쪽 원 둘레 71, 내원과 외원 사이에 가운데 45촌의 공간을 비워두고, 2층 덮개판으로 둘렀다. 아래 층 높이는 73, 가운데 층 높이 65촌인데, 모두 군사들의 몸을 숨길 수 있게 하였다.

 

바깥쪽으로 총안을 뚫어서 밝은 빛을 끌어들이는 구실을 겸하게 한 것도 봉돈의 또 다른 고학적 방법이다. 위 구멍은 26, 아래 구멍은 14[사방 각각 1]이다. 위아래 덮개판 위는 진흙과 회를 섞어 쌓았다. 아래 층 공심에서 구불구불한 벽돌 사닥다리를 거쳐 위로 올라가면 위층에 이르게 되어 있다.

 

그 규모는 기둥 6개를 세웠는데 길이 12척이고 너비 10척이며, 단청은 3토를 사용하였다. 평평한 여장을 둘렀는데 높이 5, 위아래에 포혈 23개와 누혈 6개를 뚫어 놓았다. 아래 층 안 쪽에는 벽돌로 만든 홍예 모양의 작은 문을 설치하였다. 또한 문 동쪽으로 공심을 막아서 온돌 한 간을 지어 놓았는데 방안(方眼)을 창으로 삼아 군사들이 출입하게 하였습니다.

 

공심돈의 기능은 또 다른 작은 요새

 

지난 날 공심돈이 관광객들에게 공심돈 안까지 출입을 허용했을 때 몇 번인가 공심돈 위까지 오른 적이 있다. 그 당시 공심돈 안을 꼼꼼하게 촬영해두고 몇 번은 위 정자까지 올라 주변을 돌아보기도 했다. 공심돈 안 소라모양의 계단과 복도를 지나 위로 오르는 작은 직사각형의 출구를 벗어나면 정자에 오른다.

 

공심돈의 상부에 정자를 지어 비를 피할 수 있게 만든 것도 수원화성이 얼마나 대단한 성인가를 알 수 있다. 그 당시 위에 올랐을 때는 관광객들에게 출입이 허용되어 꽤 많은 사람들이 정자위에 올라 주변을 돌아보면서 감탄을 하고는 했다. 한 마디로 공심돈 그 자체만으로도 요새와 같고 대단한 작품이라는 평을 했다.

 

밖에서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에 정말 놀랐습니다. 소라각이라는 이름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고요. 정말 수원화성은 단순히 성을 축성했다기보다 거대한 자연에 조성한 미술품이라는 말이 어울릴 것 같습니다. 성에 조성한 구조물 하나하나가 모두 대단한 아름다움이라고 생각듭니다

 

당시 동북공심돈을 함께 올랐던 일본인 관광객이 한 말이다. 우리나라를 자주 들린다고 하는 이 사람은 통역을 통해 수원화성을 칭찬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조금도 빈틈이 보이지 않는 대단한 성이라고 하면서 한국에 나올 때마다 수원화성을 들리고는 하지만 볼 때마다 새로운 것을 느낀다고 한다. 그만큼 호성에 푹 빠져들었다고 한다. 우구나 화성을 돌아보면 빠져들 수밖에 없다고 하는 관광객들. 그들의 칭찬이 아니라고 해도 수원화성은 역시 대단한 상이었다.

 

화성의 가을은 가는 곳마다 한편의 시화(詩畵)

 

누군가 수원화성의 가을은 성을 따라 걸어보아야 제멋을 안다고 했다. 그만큼 가을 화성의 경치는 남다르다. 해가 바뀌면 그만큼 훌쩍 자라버린 나무들이 화성의 성벽을 넘나들며 성을 한 바퀴 도는 사람들과 조우한다. 성안으로 걷는 사람은 성밖 나무들을 만나고, 성밖을 도는 사람들은 성위로 삐죽이 고개를 내밀고 있는 성안의 나무를 만난다.

 

화성은 자연이다. 자연과 가장 잘 어우러진 수원화성은 국가의 안위를 지키기 위한 단순한 축조물이 아니라 자연을 이용한 거대한 작품이라고 한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과 동화되어 아름다움 그대로를 지켜내고 있는 자연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수원화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되었다.

 

아름다운 화성은 그 하나만으로도 국가 사적 3호로 지정이 되었다. 그런 화성 안에 4기의 보물을 간직하고 있다. 팔달문과 화서문, 그리고 서북공심돈과 방화수류정이 바로 보물이다. 하나의 사적인 성곽 안에 또 다시 4기의 보물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수원화성이 뛰어난 선조들의 지혜로 만들어진 거대한 조형물이기 때문이다.

 

 

가을을 만나기 위해 화성을 걷다

 

4일 오전, 카메라를 챙겨들고 잡을 나섰다. 가을을 만나기 위해 화성을 찾아나선 것이다. 그동안 수도 없이 돌아본 화성이다. 각 계절별로 화성의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를 이제는 집안에 놓아둔 물건처럼 알고 있다. 이 계절에 화성이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 아름다움을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선 것이다.

 

가을의 화성은 자연이다. 자연이 만들어 낸 거대한 조화는 화성을 끼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절로 감탄을 하게 만든다. 창룡문을 지나면 성곽 위로 고개를 내민 감나무 가지에 감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잎 하나 제대로 붙어있지 않은 나뭇가지에 어떻게 저렇게 많은 감이 떨어지지 않고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일까? 자연의 조화로움은 이해만으로는 부족하다.

 

성 밖으로 돌아보면서도 정말이지 이런 자연이 고맙기만 하다. 이 계절에 어느 곳을 찾아간 들 이보다 더 아름다운 자연을 만날 수 있을까? 동북공심돈을 지나치면 억새들이 하얗게 피어있다. 그리고 그 한편 동장대 외벽을 끼고 노란 나뭇잎을 떨어트리고 있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화성을 걸으면서 어디에 어느 계절에 아름다운 것들이 자리하고 있는지 알기 때문에 망설이지 않고 돌아볼 수 있다는 것 또한 행복이다.

 

 

가을, 화성의 절경은 방화수류정에서 정점에 달한다.

 

방화수류정에도 가을이 왔다. 보물로 지정된 방화수류정은 동북각루이다. 방화수류정은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닌다'라는 말이다. 독특한 건축미가 돋보이는 방화수류정은 201133일에 보물 제1909호로 지정되었다. 방화수류정 앞 연지와 함께 화성이 건축물 가운데 당연히 으뜸으로 치는 곳이다.

 

17941019일 완공을 한 방화수류정은 '화성의 백미'라고 칭찬한다.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그 모습이 달라 보이는 방화수류정은 주변감시를 하고 군사들이 쉬기도 하는 기능을 함께 갖고 있다. 그 방화수류정 인근에도 가을이 내려앉았다. 한편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아직 잎을 잔뜩 품고 있다. 그곳을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자세를 취하고 사진촬영을 한다.

 

 

방화수류정을 지나 장안문을 거쳐 장안공원으로 접어들었다. 바람에 날리는 잎들이 마치 눈이 내리는 듯하다. 이 아름다운 모습을 보기위해 지금까지 참고 기다려온 것이 아닌가? 걸음을 뗄 수가 없다. 한참이나 그곳에서 나 스스로가 낙엽이 되어 바람 부는 대로 날아가고 싶다. 가을 화성에서 느낄 수 있는 나만의 비밀스런 느낌이다.

 

화서문 건너편 팔달산으로 오르는 길에 억새들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 가을이 되면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 중 한 곳이다. 오는 사람마다 사진 찍기에 바쁜 이곳이다. 이 아름다운 계절에 사람들의 혼을 빼놓기에 충분한 화성의 아름다움. 3시간이나 걸었지만 피곤하지도 힘들지도 않다. 가을 화성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화성능행도 8폭 병풍 낙남헌방방도(국립고궁박물관 소장본)에 보면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찾은 정조는 윤211일 화성에서 문무 양과에 걸친 과거 시험을 본 뒤 낙남헌에서 합격자를 발표하고 시상하는 장면이 담겨 있다.

 

1795년 윤211일 정조대왕이 수원향교에서 성묘 전배를 마치고 유생들을 시취한 뒤 낙남헌에서 거행한 방방 장면은 8폭 그림 중 한 폭에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과거 시험 합격자 시상식은 화성(華城) 능행차 기념 과거 시험 중 별시(別試)에 해당된다. 이날 문과(文科) 5, 무과(武科) 56명이 합격하였다.

 

이날의 시험 문제는 근상천천세세수부(謹上千千世歲壽賦)”로 혜경궁(惠慶宮)60세 생일 기념 별시였으므로, 정조의 모친인 혜경궁의 장수를 기원하는 부를 작문하는 것이었다. 정조대왕이 직접 출제를 한 문과와, 무과의 실기 시험은 활쏘기로 정조대왕이 직접 통제하고 채점했다. 이날 무과 합격자는 양인(=平民)이 많았다. 방방도에 보면 어사화를 꽂고 도열한 인원은 문과 5, 무과 56명보다 더 많은 인원이 도열해 있다. 이는 친림 문·무과 시험 외에도 딴 별시 급제자들에게도 이날 시상한 것으로 보인다.

 

 

친림무과시험연무대 국궁터에서 선보여

 

55회 수원화성문화제 3일 째인 7. 국궁터를 찾았다. 수원문화재단 홈페이지 수원화성문화제 일정표에는 6일과 7일 오후 2시에 각 한 차례씩 친림무과시험 연시를 한다고 했다. 6일 오후 2시에 국궁터를 찾았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국궁터 관계자들도 모른다는 대답이다. “바닥에 물이 고여 있어 오늘은 할 수 없을 것이라는 대답이다. 나중에 연락을 받은 내용은 6일 친림무과시험 연시는 취소되었다는 것이다.

 

태풍 콩레이로 인해 수원화성문화제 프로그램이 상당히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문자로 취소가 되었다고 알려준 프로그램이 다시 시간을 변경해 진행한다는 연락이 오는가하면, 다음날로 변경해 두 차례를 여는 등 발 빠르게 변경소식을 알려주어야 할 프로그램 변경사항을 제시간에 알려주지 못해 헛걸음을 치는 일도 생겼다. 수원의 가장 큰 축제인 수원화성문화제 소식을 알려야 할 관계기관이 제대로 알려주지 못해 많은 사람들을 헛걸음치게 만들었다는 것은 어떤 변명으로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

 

 

7일 오후 2시에 여는 친림무과시험 시연을 보기 위해 국궁터를 찾았다. 이미 3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리에 앉아 환호한다. 무예24기 시범을 보이는 어린아이들의 기예가 출중하다. 그리고 시간이 되자 정조대왕()이 국궁터 무과시험장에 도착하고 곧 이어 다양한 무과시험 종목들이 선보였다.

 

정조는 재위 24년 동안 식년시 8, 중광시 3, 각종별시 30회 등 총 42회이 무과시험을 쳤다. 식년시는 3년에 한 번 정기적으로 치루는 과거시험으로 초시에는 지방에서 190명을 선발하고, 복시에는 한양에서 28명을 선발하며 전시에는 임금입회하에 28명을 선발했다. 이 외에 중광시나 별시는 식년시 이외에 비정기적으로 시행된 과거시험이다.

 

 

 

다양한 종류의 무술시험인 친림무과시험

 

정조시대 친림무과시험의 종목은 다양했다. 무과 전시에서는 목전은 3발을 240(288m) 거리에서 쏘았으며, 철전은 3발을 80(96m)애서 과녁을 향해 쏘았다. 유엽전은 5발을 120(144m) 거리에서 쏘고, 편전은 3발을 130(156m) 거리에서 쏘았다. 이 외에도 기사(기추) 1, 관혁 5130(156m), 기창 11, 조총 31, 편추 12중 등 다양한 종류의 무기를 다루는 시험을 쳤다.

 

이 외에도 마상재 시연으로 주마입마(달리는 말 등에 서는 행위), 마상도립(달리는 말에 거꾸로 서기) 등 달리는 말과 함께 뛰면서 땅을 차고 다시 말 등에 오르기나, 달리는 말에서 좌우로 땅을 차고 뛰어오르기, 달리는 말에서 몸을 돌려 뒤로 타기 등 다양한 마상재의 기능들이 시험 종목에 있다고 한다.

 

 

친림과거시험 무과재현을 관람하다보니 극적인 요소들을 가미한 것이 보인다. 정조가 무관시험을 치르는데 민국(民國)을 건설하기 위해 평민 등을 과거시험을 볼 수 있게 제도를 바꿨다고 하면서 성공할 수 없을 것이란 대사를 한다. 그리고 어린여자아이가 과거를 치르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정조는 양반(=士足)중심의 국가운영을 탈피하여 소민(민초)을 보호하는 민국(民國=백성의 나라) 건설에 목표를 두었다. 정조는 그러한 정책을 완수하기 위해 강력한 정치기구를 원한다. 왕권강화를 필요로 한 정조는 반대세력을 제압할 수 있는 친위부대의 필요성을 절감하였으며 이로 인해 만들어진 군사들이 바로 장용영(壯勇營)이라는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부대였다.

 

 

강한 군사력이 필요했던 정조의 친림무과시험

 

정조는 강한 군사력이 필요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노비제도를 철폐하고 민국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지신을 믿고 따르는 무관들이 필요했던 것이죠. 낙남헌방방도에 보면 문과급제자보다 몇 배나 많은 무과급제자들이 보입니다. 그들은 정조의 민국건설에 동참하는 자들이었죠. 정조가 무과시험을 치르면서 가장 중요하게 본 것이 바로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무과급제자들이었습니다

 

7일 저녁에 창룡문 앞에서 시연될 야조의 연출자인 최형국 박사는 정조의 친림무과시험에 대해 설명하면서 조선조 어디에도 여자가 무과시험을 본 기옥은 없다면서 화성문화제 때 보여주는 친림과거시험 무과재현에 어린여자아이를 등장시킨 것은 하나의 설정이라고 설명한다.

 

친림과거시험 무과재현을 보면서 한 가지 걱정이 되는 것은 그런 극적인 설정을 잘 모르는 관람객들이 혹여 모든 사람은 공평하다는 민국건설을 위해 노력한 정조이기 때문에 평민만이 아니라 여자도 무과시험을 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착각을 할 수 있다는 잠이다. 역사는 언제나 정확한 가운데 극적인 요소가 필요하다. 이런 설정은 앞으로 좀 더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수원도 어린무사들 키워내 미래에 대비해야

 

마상재를 선보이는 어린친구들이 지금 초등학교 4학년생인 10살짜리 꼬마들입니다. 저들이 마상재를 하는 것을 보세요. 어른들처럼 훌륭히 소화해냅니다. 화성시에서 훈련을 하고 있는 아이들인데 수원도 마상재 등을 연마할 수 있는 어린무사들을 키워내야 합니다. 저들이 기능을 다 익힌 다음에 무예24기 시범단에 들어오고 싶다고 합니다. 수원에는 화성시보다 더 많은 인적자원을 갖고 있잖아요. 저런 마상재를 익힐 수 있는 어린이들과 말을 키울 수 있는 장소를 마련했으면 하는 바람이죠

 

야조 연습 때문에 긴 시간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마상재를 하는 어린이들을 눈여겨보라는 말을 마치고 길을 건너는 최형국 박사. 말을 타고 달리면서 보여주는 마상무예를 실현하다 부상을 입어 공상기간인대도 하루도 쉬지 못하고 화성문화제 야조 연출을 하고 있다고 하면서 친림무과시험에서 마상재를 보여주는 어린이들이 부럽다고 한다.

 

정조 때 치러진 친림과거시험 무과재현. 연무대 옆 국궁터에서 벌어진 무과시험의 다양한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즐겁지만은 않다. 정조의 민국의 뜻을 이루기 위해 치러진 무과시험인데 수원이 아닌 타지에서 온 사람들의 시연이라는 점 때문이다. 수원도 말을 키우고 어린이들에게 무예24기와 마상재 등을 연마시켜 앞으로 정조의 민국건설의 뜻을 이어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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