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행궁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장헌세자라 하였고, 1899년에 의황제로 봉해졌다) 혜경궁홍씨(사도세자가 의황제가 된 후 혜경궁홍씨도 의황후가 되었다)의 묘인 융릉에 전배하기 위하여 행행 때에 머물던 임시 처소이다.

평상시에는 부사(뒤에는 유수)가 집무하는 부아(관청)로도 활용하였다. 정조는 13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부터, 정조 24년 1월까지 12년간 13차례에 걸친 원행을 정기적으로 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왕권강화 정책의 상징인 화성행궁

현재 사적 제478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화성행궁은, 그 일부만이 남아 있던 것을 복원하였다. 화성행궁은 화성축조가 완공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576칸 규모의 웅장한 건물이 되었다. 화성행궁은 화성과 더불어 단순한 건축조형물이 아니라, 개혁적인 계몽군주 정조가 지향하던 왕권강화정책의 상징물이기도 하다.

화성행궁 이외에도 한양의 궁궐에서 현륭원에 이르는 원행의 노정에도, 왕의 주필하는 행궁이 건립되었다. 즉, 초기의 '과천로' 때는 과천행궁과 사근참행궁을 건립하였고, 정조 18년 '시흥로'가 새로 개척됨에 따라, 이 해 시흥행궁 114칸과 안양행궁, 이듬해인 정조 19년인 1795년에는 안산행궁 등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이들 과천이나 시흥, 안양과 안산, 사근참 등 속읍에 건축된 행궁은, 원행의 노정에 잠시 쉬어가는 주필소에 불과했다. 또 그 규모와 활용면에서도 화성행궁과의 비교가 안될 정도였다.

화성행궁을 돌아보다

화성행궁에는 현재 어떠한 건물이 있으며, 그 전각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현재 복원이 된 행궁은 정조 당시와는 비교가 안되지만, 그 행궁의 곳곳을 돌아보는 것 또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그냥 구경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각에 얽힌 이야기들을 풀어가고자 한다.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은 화성 행궁의 정전건물이자, 화성 유수부의 동헌 건물로 <장남헌(壯南軒)>이라고도 한다. 정조 19년인 1795년에 정조는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진찬례를 이 건물에서 거행 하였다. 이 때 정조는 혜경궁의 장수를 기원하며 '만년의 수를 받들어 빈다'는 뜻의 <봉수당>이라는 당호를 지어, 조윤형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하였다.

이 건물은 원래 정조 18년인 1789년 8월 19일 상량하고, 9월 25일 완공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파괴가 된 봉수당은, 1997년에 복원 되었다.

내포사에 오르다

이 봉수당 뒤로는 팔달산이다. 팔달산으로 오르는 곳에 작은 1평 남짓한 전각이 한 채 서 있다. 그저 행궁을 돌아보는 사람들도 이곳은 눈여겨보지를 않는다. 내포사(內鋪舍), 이 작은 전각은 성 밖의 위험을, 성 안에 알리는 신호를 하는 곳이다. 화성에 포루(鋪樓)가 있다면, 행궁 안에는 포사(鋪舍)가 있다.



화성 안에는 원래 서남포사, 증포사, 내포사 등 세 곳에 포사가 있었다. 이 내포사는 화성 행궁의 뒤편 높은 곳에 자리를 하고 있다. 화성 행궁 밖에서 알려주는 신호를 받아, 깃발을 흔들거나 목어를 쳐서 방어태세를 갖출 수 있게 한 것이다. 이 내포사 역시 일제에 의해 파괴가 되었던 것을 2006년에 복원을 하였다.

소나무 길을 조금 걸어 올라가면 만나게 되는 내포사. 행궁 쪽으로 목어를 걸어두었다. 목어를 건 반 칸은 개방이 되었으며, 그 뒤편으로 작은 온돌방이 있다. 사시사철 이곳에서 경계를 서는 병사가 지키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행궁은 화성 내에서도 가장 중요한 곳이다. 이곳에 빠른 신호를 보내야 하기 때문에, 행궁 바로 뒤편에 자리를 한 듯하다.



작은 건물 하나가 얼마나 큰일을 감당하고 있는 것일까? 내포사 위로 오르면 소나무 사이로 행궁이 한 눈에 들어온다. 화성 행궁을 돌아보는 걸음을 이 내포사로부터 시작을 한다. 2012년 1월 29일, 갑자기 날씨가 차가워졌다. 바람이 부는 날 찾아간 행궁의 뒤편 내포사를 아이폰으로 촬영을 하였다.

화성 행궁 옆에 있는 정조의 어진을 모신 운한각. 풍화당은 이안청과 담을 사이로 그 뒤편에 자리한다. 협문을 들어서면 팔작집으로 조성한 정면 5칸, 측면 2칸의 풍화당이 있다. 이 풍화당은 재실이다. 정조의 제를 올리는 날이면 제관들이 와서 묵던 집이다. ‘풍화당(風化堂)’이란 사회의 풍속과 기강과 교화시킨다는 뜻이다.

사적 제115호인 화령전은 조선 제22대 임금이었던 정조(재위 1776∼1800)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순조가 해마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지은 전각이다. 조선조 제23대 임금인 순조는 아버지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본받기 위하여, 순조 1년인 1801년에 수원부의 행궁 옆에 건물을 짓고 화령전이라 하였다.



처음 지어질 당시의 화령전은 정조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정전인 운한각을 비롯하여, 이안청, 재실(풍화당), 전사청, 향대청, 제기고, 외삼문, 내삼문, 중협문이 있었다. 이 중 남쪽에 있었던 향대청과 제기고 건물은 남아있지 않다. 정전 현판의 글씨는 순조가 직접 쓴 것이다. 이곳에 속하는 건물들은 대부분이 정전인 운한각의 건축규범에 따라 지어졌다.

재인이 살았던 풍화당

화성 행궁은 사적 제478호로, 화령전은 사적 제115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1920년 정조의 어진이 일본인에 의해 창덕궁으로 옮겨진 후, 화령전은 운한각과 이안청, 그리고 풍화당 만이 남아있었다.




중요무형문화재 발탈의 보유자인 고 이동안옹은 재인청 출신이다. 재인청은 수원을 중심으로 모인 예능인들의 집단이었다. 재인청에 회원이 많을 때는 3만 여명이나 되었다고 하니, 거대한 예능집단이었나 보다. 한 때는 재인청에 속해있지 많은 사람은 기예조차 펼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한 고 이동안옹이 처음에 수원으로 내려와, 제자들을 가르친 곳이 바로 운한각 옆에 이안청에 기거를 하면서 운한각에서 가르쳤다고 한다. 어찌되었거나 당시 문화재를 바라보는 시각이 어이가 없단 생각이다. 어릴 적부터 이동안 옹에게서 춤을 전수받은 고성주(남, 56세. 팔달구 지동 거주)는 “처음에는 운한각에서 춤과 소리 등을 배웠는데. 겨울에 난로를 피우다가 불이 났어요. 그래서 문화재를 태운다고 쫓겨나 풍화당으로 옮겨, 그곳 마루에서 배우고는 했죠.” 라고 한다.



고 이동안 옹의 딸인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8호 승무 살풀이 보유자였던 고 정경파 선생은 이동안 선생이 서울로 올라가자, 풍화당으로 들어가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고 정경파 선생의 첫 제자인 박경현 무용학원 원장은, “저희들도 운한각 안에서 춤을 배우고는 했어요. 그러다가 문화재를 보존한다고 해서, 선생님께서 풍화당으로 나와 기거를 했죠. 돌아가시는 날까지 풍화당에서 기거를 하셨어요.” 라고 한다.


단아한 5칸 건물 풍화당

풍화당은 단아하게 지어진 - 자형 전각이다. 장대석으로 기단을 놓고, 중앙에 세 칸은 마루방으로 꾸미고, 양편에 한 칸씩은 온돌방이다. 온돌방의 앞에는 높임마루를 놓고, 그 밑에 아궁이를 내어 불을 땔 수 있도록 하였다. 복도의 양편은 판벽으로 막았다. 마루방 세 칸의 뒤편으로는 판문을 내었고, 앞으로 낸 문은 열어 올려 위로 걸 수 있도록 하였다.



풍화당의 주추는 네모나게 조성을 하였으며, 앞에 낸 협문을 통해 제를 지내러 드나들 수 있도록 하였다. 풍화당은 재실로 지어졌지만, 딴 곳의 재실에 비해 화려하지가 않다. 아마도 전각의 이름인 풍화당이란 뜻 때문인가도 모른다. 한 때 재인들의 풍각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풍화당. 역사는 그렇게 아픔을 놓고 이어가는가 보다

화성행궁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장헌세자라 하였고, 1899년에 의황제로 봉해졌다.) 혜경궁홍씨(사도세자가 의황제가 된 후 혜경궁홍씨도 의황후가 되었다)의 묘인 융릉에 전배하기 위하여 행행 때에 머물던 임시 처소이다.

평상시에는 부사(뒤에는 유수)가 집무하는 부아(관청)로도 활용하였다. 정조는 13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부터, 정조 24년 1월까지 12년간 13차례에 걸친 원행을 정기적으로 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조가 승하한 뒤 순조 1년인 1801년에는, 행궁 곁에 화령전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을 봉안하였다. 그 뒤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화성행궁을 찾아 이곳에 머물기도 했다. 화성 행궁은 행궁과 그 북쪽에 정조 사후에 건립한 화령전으로 구분이 되어있으며, 행궁은 사적 제478호로, 화령전은 사적 제115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행궁이야기를 시작하며

사적 제47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화성행궁은, 조선조 정조 때(1794~1796년) 축조되었다. 역대 임금이 화성시 융릉(사도세자 부부무덤)과, 건릉(정조 무덤)으로 행차할 때 묵었던 곳이기도 하다. 일제에 의해 의도적으로 멸실이 되어버린 이 화성 행궁 옆에는, 화령전이라는 별궁이 있다. 화령전 역시 일제에 의해 멸실이 되었지만, 화령전의 정전인 운한각과 풍화당이 원형을 유지한 채 남아있었다.

화령전은 정조가 살아생전 지어진 것이 아니고,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승하하고 난 뒤에,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서 지어진 어진 봉안각이다. 수원 화성의 이야기에 이어 행궁과 화령전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정조의 마음을 이곳에서 읽어보리라 마음을 먹는다. 바람이 불고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날 찾아간 행궁과 화령전. 먼저 화령전의 이야기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재인(才人)의 기능 전수장소로 변했던 화령전

화령전은 화성 행궁이 복원을 하기 전에는, 어진을 모신 화령전의 정전인 운한각과 풍화당이 남아있었다. 운한각은 1801년에 건립된 조선 후기의 가장 대표적인 건물이기도 하다. 화성행궁이 멸실되고 난 뒤, 이 화령전에는 재인인 무형문화재 발탈의 기능보유자였던 고 이동안옹과 그의 딸인 고 정경파가 이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기도 했다.

만일 행궁의 복원이 되지 않았다면, 정조의 어진을 모셨던 화령전은 영원히 재인들의 춤과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을 뻔 했다.



운한각은 정조의 어진을 모신 전각이다. 화령전의 정전인 운한각의 앞쪽에는 악공들이 제사를 지낼 때 연주를 할 수 있는 월대가 있고, 장대석으로 쌓은 기단에는 세 곳의 계단이 놓여있다. 이 중 가운데 계단은 혼백만이 사용하는 계단이지만, 요즈음은 그저 아무나 이 계단을 오르내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만큼 우리는 역사적인 인물에 대한 경외감이 사라져 버린 것일까?

살창으로 꾸며진 외삼문의 특별함

화령전에서 또 하나 특이한 것은 바로 외삼문이다. 화령전의 운한각 앞으로는 내삼문이 있고, 그 밖으로 양편에 작은 골방을 드린 외삼문이 있다. 양편에 작은 방은 이곳을 지키는 병사들이라도 묵었던 곳인가 보다. 그런데 이 외삼문은 어떠한 전각에서도 보기가 힘든 모습으로 꾸며 놓았다.



모두 세 칸으로 되어있는 외삼문은 솟을대문이 아니다. 지붕은 모두가 - 자로 평형하게 되어있다. 그리고 문의 밑 부분은 판자문으로 막고, 그 위를 살창으로 꾸민 살문이다. 일반적인 궁이나 별궁의 문들이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도록 폐쇄적인 방법을 쓴데 비해, 화령전의 문은 왜 이렇게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만들었을까?

아마 그 뜻을 모르긴 해도 평소 백성들을 사랑했던 정조대왕이, 운한각에서 지나는 백성들을 볼 수 있도록 배려를 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이 외삼문 앞을 지나는 백성들이, 정조대왕의 어진을 알현하도록 한 것은 아니었을까? 행궁의 한편에 지어진 화령전은 그래서 오랜 시간 발길을 붙들고 있다.


[세계문화유산 화성(華城)을 걷다(15)] - 사라진 것들

  
▲ 복원 중인 남수문 현재 남수문은 복원 중에 있다. 수원천에 걸린 두 개의 수문 중 하나이다.(2011, 12, 24)
ⓒ 하주성
남수문

 

수원화성은 축조 이후 조선조 말의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 되었으나 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복원했다.

세계문화유산이자 사적 제3호인 수원 화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다.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砲)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이 있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41개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다.

 

  
▲ 성곽 잇기 그동안 끊어져 있던 동남각루 아래편의 성곽이 이어져 남수문까지 연결이 된다.(2011, 12, 24)
ⓒ 하주성
남수문

 

이 중 남수문은 현재 복원 중에 있어 6개 시설물이 사라지고, 남수문의 복원과 함께 42개의 시설물을 만날 수가 있게 되었다.

사라진 시설물들이 아쉬워

일제는 강점기에 팔달문 인근의 성곽을 의도적으로 파손하였다. 그 결과 은구와 남공심돈, 암문 등이 일제에 의해 사라지게 되었으며, 그 파손한 부분에 상가 등을 건립하였다. 현재 복원 중인 남수문의 경우 아홉 개의 무지개 수문으로 축조한 '구간수문(九間水門)'이다. 북수문인 화홍문이 일곱 개의 무지개 수문을 가진데 비해, 9라는 숫자는 상당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남수문 화성성역의궤에 나타난 남수문의 외도
ⓒ 화성성역의궤
화성성역의궤

  
▲ 옛 남수문 1907년 헤르만 산더에 의해 촬영된 남수문
ⓒ 국립민속박물관
남수문

 

남수문은 1846년의 대홍수 때 부서진 것을, 2년 후 다시 지었다. 그러나 1922년의 대홍수 때 또 다시 떠내려 간 후 복원이 되지 않다가, 이번에 성곽 일부를 잇는 공사를 하면서 복원을 하고 있다.

'은구(隱溝)'란 말 그대로 숨어있는 도랑이라는 뜻일 것이다. 성곽 밑으로 물길을 만들어 흘러 들어온 물을 연못을 만들어 저장을 하였다. 은구는 수원천과 함께 성안에서 사용할 물을 준비하는데 상당히 소중한 시설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두 곳에 있었다는 은구의 흔적은 현재 단 한 곳도 남아있지 않다.

 

  
▲ 은구도 화성성역의궤에 그려진 은구도와 연못
ⓒ 화성성역의궤
은구

 

은구와 연못 복원 서둘러야

<화성성역의궤>에 따르면 은구를 통한 물길 중 팔달산이 시작되는 곳에 남쪽의 남지가 자리를 하고 있었는데, 상남지와 하남지로 구분이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 상남지는 너비가 사방 40보(약 48m)에 깊이 6척이고, 가운데에 작은 섬을 만들었으며 홍련과 백련을 심었다. 하남지는 너비 40보, 길이 60보(약 72미터) 깊이는 7척이고, 가운데에 섬 둘을 두었는데, 연못의 둘레에는 모두 버드나무를 심고 섬에는 소나무를 심었다.

 

  
▲ 남공심돈 일제에 의헤 파손된 남공심돈 일대. 아직도 복원을 하지 못하고 있다(1907년 헤르만 산더 촬영/국립민속박물관)
ⓒ 국립민속박물관
남공심돈

화성에는 이러한 연못이 5개소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하나도 없어 아쉬움이 크다. 그리고 또 하나의 시설물은 바로 남공심돈이다. 현재 두 곳에 남아있는 공심돈은 모두 북쪽 가까이에 자리를 하고 있다. 팔달문을 보호하기 위한 남공심돈은 일제에 의해 파괴가 되어, 아직도 복원이 되지 않고 있다. 1907년 '헤르만 산더'의 사진자료(국립민속박물관 소장)에 보면 남공심돈은 팔달문에서 동쪽으로 곧게 뻗어난 성곽이 북쪽을 향해 꺾일 때, 그곳에 자리하면서 남수문과 팔달문을 보호한 것으로 보인다.

사라진 화성의 시설물들. 끊어진 성곽이 이어지고, 사라진 구조물들이 제 모습을 찾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고대한다. 그것만이 이산 정조의 뜻을 지키고, 강력한 국가로의 힘찬 비상을 위한 날갯짓을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끝)


[세계문화유산 화성(華城)을 걷다(14)] - 포루(砲樓)

 

  
▲ 동포루 포루는 화성 중에서 가장 강력한 화기인 포를 설치한 곳이다. 화성에는 모두 5곳의 포루가 있다. (2011, 12, 24)
ⓒ 하주성
포루

화성에서 가장 중요한 공격 시설은 성 5곳에 조성한 '포루(砲樓)'이다. 화성의 포루는 성벽의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켜, 치성과 유사하게 축조하면서 내부를 공심돈과 같이 비워 놓았다. 이는 그 안에 화포 등을 감춰 뒀다가 위·아래와 삼면에서 한꺼번에 공격할 수 있도록 한 시설이다.

화성에는 벽돌을 사용해 모두 5개의 포루(남포루·서포루·북서포루·북동포루·동포루)를 조성했다. 이 중 서포루는 약간 작고, 남은 네 곳의 포루는 동일한 규격이다. 포루는 3층으로 축조가 되었는데, 지대 위에는 대포를 발사하기 위해 뚫어 놓은 구멍인 '혈석(穴石)' 을 전면에 2개, 좌우에 3개씩 놓았다.

 

  
▲ 입구 5곳의 포루는 모양이 모두 같게 조성하였다
ⓒ 하주성
포루

  
▲ 포루의 안 포루는 포를 썰 수 있는 판문과 총안, 전안 등을 복합적으로 마련하였다
ⓒ 하주성
포루

 

벽돌로 쌓아올린 포루

지대 위에는 벽돌을 쌓고, 안쪽으로는 판자를 잇대어 2층으로 구분했다. 또한 포루에는  총혈 15개를 만들었는데, 지대 위에 뚫은 혈석은 포루에서만 볼 수 있는 시설이다. 맨 위에는 성안에서 들어갈 수 있는 높이로, 세 칸의 문루를 만들어 총안과 전안을 뚫어 놨다. 문루 바깥 면에는 짐승그림을 그려놓아 위엄을 표했으며, 처마는 납도리 홀처마에 우진각 지붕이다.

포루는 벽돌을 사용해 만들었는데, 아래 넓이나 위의 줄어든 넓이가 모두 옛날 제도의 재돌(再突)하는 형세를 따랐다. 안쪽은 성탁(城托)에 의지해 전부를 돌로 쌓고, 그 위에 판문을 설치했다. 문지방 안의 청(廳) 끝은, 사방 4척쯤 비워서 별도로 덮개판을 설치했다. 이는 문을 밀고 당겨 여닫게 한 것이다. 거기에다 나무 사닥다리를 대어서 아래쪽 공간으로 통하게 만들어 놨다.

 

  
▲ 포루 3단으로 마련한 포루는 지단석 위에 벽돌을 쌓아 올려 축조하였다
ⓒ 하주성
포루

  
▲ 포루 포루의 위에는 판문을 내었다
ⓒ 하주성
포루

 

5곳에 마련한 화성의 포루

[동포루] 동포루는 화성의 5개 포루 중, 동쪽 동일치와 동이치 사이에 있다. 치성의 발전된 모습인 포루는 강력한 공격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정조 20년인 1796년 7월 16일에 완공된 동포루는 동문인 창룡문과 봉돈을 보호할 수 있도록 한 시설물이다.

 

  
▲ 동포루 화성의 동편에 소재하고 있는 동포루
ⓒ 하주성
포루

 

[남포루] 남포루는 팔달문에서 화양루(서남각루)에 이르는 방어 임무를 수행했으며 현재 팔달산 남쪽 중턱에 있다.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에서 팔달산으로 오르는 성벽을 따라 오르다가 보면, 그 중턱에 돌출이 된 남포루를 만나게 된다. 남포루는 용도로 올라가는 적과 팔달문을 공격하는 적을 막기 위한 시설물이다.

 

  
▲ 남포루 안 남포루의 안 모습. 2004년 8월 자료이다. 판문을 위로 올려 걸어 놓았다
ⓒ 하주성
남포루

 

[서포루] 서포루는 화성의 5개 포루 중 서북각루와 서장대 사이에 있다. 정조 20년인 1796년 5월 30일에 완공된 서포루는, 화성의 전투 지휘소인 서장대의 근거리에 위치하고 있기에 5개의 포루 중 가장 중무장한 포루다.

 

  
▲ 서포루 포루의 처마는 납도리 홀처마에 우진각지붕이다.
ⓒ 하주성
서포루

 

[북서포루] 북서쪽에 위치한 북서포루는 검정 벽돌을 쌓아 치성과 같이 성 밖으로 돌출시키고, 내부는 나무판을 이용하여 3층으로 구획했다. 포혈을 만들어 화포를 감춰 두고, 위와 아래에서 한꺼번에 공격할 수 있도록 했으며 서북공심돈과 화서문을 가까이 두고 있다.

 

  
▲ 북서포루 2011년 8월 자료
ⓒ 하주성
북서포루

 

[북동포루] 북동포루는 화홍문 서쪽 124보 3척쯤 되는 거리에 있다. 북동포루는 북수문인 화홍문과 북문인 장안문의 사이에 자리한다. 북동포루는 장안문과 수문인 화홍문으로 밀려드는 적을 섬멸할 수 있는 곳이다. 

 

  
▲ 북동포루 2011년 8월 자료.
ⓒ 하주성
북동포루

적이 성벽으로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한 강력한 공격소인 포루. 5곳에 설치한 포루는 삼면으로 포를 발사할 수가 있어, 주변의 중요한 시설물을 보호하고 밀려드는 적을 향해 강력한 공격을 할 수 있도록 마련한 곳이다. 어느 곳으로 적이 밀려들든지 화성은 적들을 향해 강력한 화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가 된 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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