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사라져 버린 안내판. 도저히 문화재를 찾아 들어가는 길이 어디인지 구별도 되지 않게 들어선 다세대 주택들. 요즈음 들어 갑자기 문화재 주변이 바뀌면서 점점 답사가 어려워진다. 길이 바뀔 때마다 안내판을 부착해 놓았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근처를 배회하기 일쑤이다.

 

용인시 처인구 역북동 산 3-12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6호 채제공 선생 뇌문비가 자리하고 있고, 그 위편에는 역북동 산 5번지에 경기도 기념물 제17호인 채제공 선생 묘가 자리하고 있다. 16일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에 서둘러 길을 나섰다. 몇 번이고 찾아보고 싶었던 채제공 선생의 유적을 만나보기 위해서였다.

 

큰 길 입구에는 안내판이 서 있어 그나마 초입 길을 찾아 들어가는 것 까지는 수월하다. 그런데 정작 안으로 들어가니 좁은 길만 남겨놓고 이리저리 건물들이 들어차 있어 난감하다. 거기다가 안내판도 사라져버렸다. 휴대폰을 이용해 겨우 길을 찾아들어 골목 안쪽 산 밑에 자리하고 있는 유적지로 올랐다.

 

 

 

화성의 모든 설계 및 경영을 지휘한 채제공

 

채제공 선생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자는 백규 호는 번암, 시호는 문숙이다. 평강 채씨인 선생은 충주에서 태어나 영조 19년인 1743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채제공 선생은 화성 성역의 주역이었다. 선생의 묘를 찾아가 보아야겠다는 생각도 선생의 화성 성역에 대한 남다른 식견과 정조대왕과의 깊은 인연 때문이다.

 

선생은 영조 34년인 1758년 도승지 시절, 사도세자의 폐위에 죽음을 무릅쓰고 반대를 하였으며 정조가 왕세손으로 대리청정한 뒤에는 호조판서 등으로 중용되었다. 채제공 선생은 정조의 특명을 받아 절의 노비를 폐하는 <사노비절목(寺奴婢節目)>을 마련하여 후에 순조 1년인 1801년에 사노비 혁파를 가능하게 하였다.

 

 

 

홍국영의 몰락과 더불어 관직에서 물러나기도 한 채제공 선생은 정조 12년인 1788년 국왕의 명으로 우의정에 올랐으며, 정조 14년 천주교의 박해가 시작되자 천주교 신봉의 묵인을 주장하였다. 정조 17년인 1793년 영의정이 된 후 10여 년간은 천주교의 박해가 없었다. 그 후 정조의 큰 꿈을 실현시킬 수원화성 축성의 모든 설계 및 경영을 지휘하여 가장 짧은 공기 안에 화성 축성을 완공하였다.

 

정조의 채제공 선생에 대한 믿음은 남다르다. 정조가 즉위한 후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책임자들을 벌할 때 채제공 선생은 형조판서로 옥사를 처리하였다. 정조 23년인 1793년 별세하니 정조는 친히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선생의 묘 아래 쪽에 자리하고 있는 뇌문비가 바로 정조가 보낸 뇌문이다. 500여 마디의 글로 지어진 이 뇌문비의 글은 체재공의 명복을 신에게 비는 일종의 제문이다.

 

 

 

채제공 선생의 공적을 기린 뇌문비(誄文碑)

 

뇌문비는 정조가 채제공 선생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글이다. 팔작지붕의 전각 안에 자리한 뇌문비는 영, 정조 시대의 명신인 채제공(1720~1799) 선생의 장례에 정조가 직접 지어 보낸 뇌문을 새긴 비이다. 오석에 해서로 적은 이 뇌문비는 화강암으로 된 직사각형의 비좌와 팔작지붕형의 지붕돌을 올려놓았다.

 

비문의 내용은 채제공의 공적을 기리고 애도를 표현한 글로 조정에 노성(老成)이 없다면 국가를 어찌 보존하랴. 또한 어버이에게 효도를 한다는 소문이 자자하니 경 같은 이는 매우 드물도다라고 적혀있다. 비문 말미에는 기미삽월이십육일이라는 명문으로 보아 이 비문은 정조 23년인 1799326일에 지어 새긴 것임을 알 수 있다.

 

뇌문비를 보존하기 위한 전각을 돌아보고 난 뒤 산 위편에 있는 채제공 선생의 묘소에 올랐다. 일국의 재상으로 수많은 일을 해결한 채제공 선생의 묘소는 의외로 단출하다. 묘역에는 봉분과 상석, 망주석이 있고 석양이 한 쌍 배열되어 있다. 채제공 선생의 봉분 앞에는 묘표가 없는데, 이는 묘소 아래 뇌문비가 자리하기 때문이다.

 

 

 

묘소 앞에 서서 잠시 머리를 숙인다. 환란의 시대에 두 임금을 보좌하며 할 일을 다 하고 간 채제공 선생. 선생의 삶처럼 봉분도 화려하지 않다. 봉문 앞에서면 앞으로 펼쳐진 대자연의 능선이 보인다. 선생의 꿈이 펼쳐진 것일까? 다만 그 대자연에 너무나 많은 건물들이 들어서 자연의 풍광을 막아버린 것이 죄스럽기만 하다. 선생의 묘소 한편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들이 4월의 햇살에 잎을 반짝인다. 잠시 심호흡을 하고 묘소에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일대를 풍미하던 채제공 선생. 만일 선생이 없었다면 지금 수원 화성의 축성이 가능했을까? 바보같은 생각이지만 선생이 계셨기에 오늘 우리가 화성을 만날 수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선생의 묘소에 하직인사를 하고 뒤돌아선다. 오를 때 이마에 맺혔던 땀방울이 시원한 바람에 사그라진다. 그 바람이 선생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모든 사람을 포용했던 선생의 마음 말이다.

 

 

당성 진위논란 잠재울 결정적 증거로 밝혀져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산32번지에는 사적 제217호인 '당성(唐城)'이 자리하고 있다. 이 당성이 소재하고 있는 남양 지역은, 신라 경덕왕 때는 '당은군'이라 불린 중국과의 교통 요지였다. 신라 후기에는 이곳에 '당성진'을 설치하여 청해진과 함께 신라 해군의 근거지로 삼은 중요한 곳이었다.

 

당성은 계곡을 둘러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성은 남북으로 기다란 네모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다. 현재 당성은 동문과 남문, 북문 터와 우물터, 건물터가 남아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당성은 현재 복원 중이다. 성을 한 바퀴 돌다가 보니 세 곳 정도로 나누어서 복원을 하고 있는 듯하다.

 

 

 

당성은 화성 남양반도의 서신, 송산, 마도면의 3개면이 교차되는 중심부 가까이 위치한 구봉산에 자리하고 있다. 동남향으로 경사진 계곡을 이용하여 석루를 돌려 축성을 하였다. 전장이 1.148m 정도가 되는 이 당성은, 처음에는 백제의 영역이었다가, 한때 고구려의 영토로 당성군이라 불렀다.

 

후일 신라가 이 지역을 점령하게 되자 당항성이라 했다. 바다를 건너 중국과 통하는 길목의 역할을 하던 곳이다. 당성은 그 쌓은 시기를 달리하는 3중의 성벽으로 구성되었다. 처음 이 당성의 성벽은 테뫼식으로 쌓은 토축 산성이었다, 그 길이는 336m이다.

 

 

 

이러한 당성 일대를 한양대 문화재연구소가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 '화성 당성 3차 발굴조사'를 시행한 결과 삼국시대 축조된 1차 성벽, 망해루, 집수시설, 연못지 등 유구와 유물 1천여 점을 발견했다고 14일 밝혔다. 이반 발굴조사에서는 ''()자가 새겨진 기와 등 유물 1천여 점이 출토됐다.

 

이러한 당성을 학계 일각에서는 해당 성이 진짜 당성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부족하다며 진위 논란이 일기도 했다. 연구소는 "이번에 출토된 ''자문이 찍힌 기와는 당성의 역사적 사실을 확실하게 입증하는 대단히 희귀한 자료"라면서 "삼국시대에서부터 이 성이 당성으로 불렸을 가능성을 확인해준다"고 설명했다.

 

 

 

앞으로 당성에 관한 연구는 더 많이 이루어져야하겠지만 연구소 관계자는 이번 발굴유물로 인해 당성이 힌국 내 실크로드의 관문이었음을 확실하게 해준다.”면서 실크로드 세계문화유산 지정 구간 안에 포함시킬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 것으로 평가된다고 했다.

 

 

세마대(洗馬臺)’, 명칭 그대로라면 말을 씻긴 곳이다. 선조 26년인 1593년 임진왜란 당시 수만의 왜군이 이곳 독산성으로 몰려들자, 전라도 관찰사 겸 순변사인 권율장군은 말을 끌어다 그 위에 쌀을 부었다. 성 안에는 물이 귀해 군사들이 마실 물도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물 대산 쌀로 물처럼 보이게 한 것이다.

 

권율장군은 전라도에 주둔하고 있던 병사 2만여 명을 데리고 이곳 독산성에 주둔하면서 왜군이 물러가게 하여 성을 지켰다는 것이다. 그러한 설이 전해오자 말을 씻긴 곳을 세마대라고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독산성의 지리를 보아 말을 씻긴 이곳은 아마 성내에 군사들을 지휘하던 전각이 자리했던 곳이었을 것이다.

 

 

 

 

깊어가는 가을에 오른 세마대

 

오산 독산성과 세마대지는 사적 제140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독산성의 둘레는 3,240m이고 문이 4곳에 있다. 독산성 안에는 물이 부족한 것이 큰 결점이었다. 이런 결점 때문에 이 곳 에는 세마대(洗馬臺)의 전설이 생긴 것이다.

 

가을이 깊어가는 1022일 오후 늦게 독산성에 올랐다. 낮은 성곽에 난 문을 지나 산성 가장 높은 곳으로 오르니, 떨어진 낙엽들이 발밑에서 바스락하며 부서지는 소리가 난다. 아마 이런 소리 때문에 사람들은 가을 산을 찾는 것은 아닌지. 천천히 걸어 세마대에 오른다. 세마대는 독산성 안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권율장군이 근왕병 2만을 이끌고 독산성으로 오른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임진왜란 중 전사를 살펴보면 삼도의 근왕병 5만이 이광을 주축으로 하여 용인에 집결한다. 713(음력 65) 이광과 운선각 등이 이끄는 남도근왕군이 이곳 용인전투에서 1600명의 일본군에게 대패를 하고 만다.

 

 

 

 

삼도근왕병 독산성에 모였을까?

 

1592426일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소서행장이 이끄는 왜병에게 명장 신립이 이끄는 군사들이 패하고 신립이 전사하자, 전라도 관찰사 이광과 전라도 방어사 곽영, 충청도 순찰사 윤선각, 경상도 순찰사 김수 등이 전라, 충청, 경상도에서 모은 군사 5만 명을 이끌고 이광을 중심으로 삼도근왕병이라 칭했다.

 

이광은 병마절도사 최원을 전라도를 지키라 명하고, 자신은 4만의 관군을 이끌고 충청도 임천역에 도착한다. 전라도 방어사 곽영은 2만여 명의 관군을 이끌고 광주목사 권율을 중위장으로 삼아 여산대로를 지나 금강을 건넜다. 경상도 관찰사 김수가 이끄는 군사들과, 충청도 관찰사 윤선각이 이끄는 수만의 군사도 합세했다.

 

이 모든 군사가 선조 25년인 1592526일 평택 진위에 모이니 삼도에서 모인 군사들의 위세가 등등했다. 이들은 63일 독산성으로 옮겨 주둔한다. 64일 첫 전투에서 적을 물리치고 승리를 하게 되는데, 이 전투는 경상도 순찰사 김수와 경상도 병사 50여 명이 이끌어낸 승리였다.

 

광주목사 권율은 이광에게 사기를 축적하면서 조정의 명을 따를 것을 고하자 이광은 권율의 계책을 따르지 않고 선봉장 이지시와 전라도 방어사 곽영, 방어사 백광언의 군사 1천여 명과 합세해 65일 왜군을 공격했다가 백광언과 이지시, 그의 동생 이지례가 왜군의 조총에 맞아 전사한다.

 

 

 

 

독산성 전투는 언제 있었나?

 

다음날인 66(양력 713) 권율은 다시 신중하게 전투를 치를 것을 이광에게 전했으나 이광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밥을 지어 먹을 때 왜군이 산골짜기를 따라 급습해 크게 패해 이광과 김수, 곽영은 도망을 치고, 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권율의 휘하 군사만이 온전히 남을 수 있었다.

 

이런 기록으로 보면 권율장군의 군사들은 독산성에서 나오지 않고 용인전투에도 참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용인전투에서 패전을 한 이광의 삼도근왕병 중 전라도에서 올라와 독산성에 머문 군사들이 2만여 명이라는 것은 전라도 방어사 곽영과 권율이 이끌고 온 군사들의 숫자와 일치한다.

 

임진왜란 전투 중 권율은 선조 25년인 159278일 이치전투에서 왜군을 격퇴한다. 그리고 선조 26년인 1593212일 행주대첩을 벌인다. 또한 96일과 7일에는 소사에서 왜군을 격파한다. 시기적으로 권율이 전라도 군사들을 이끌고 계속해서 인근 충청도와 경기도를 다니면서 전투를 벌여 승리를 하게 된다.

 

 

 

 

임진왜란 중 과연 독산성에서 머물렀던 권율장군과 그 휘하 근왕병들은 언제 있었나? 또 그들은 어떤 전투를 누구와 벌인 것일까? 적은 장수는 누구였으며 그들은 어느 경로를 통해 독산성으로 오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들은 독산성에서 얼마나 피해를 입었나? 그리고 그들은 어디로 향했나?

 

역시교과서 국정화 문제로 인해 시끄러운 나라를 보면서, 이제 우리지역의 역사도 제대로 정리가 되어야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전해오는 이야기가 아닌, 독산성과 권율에 대한 제대로의 역사가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요즈음 오산시에 걸린 현수막 중에 시민들과 함께 독산성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겠다.’라는 현수막이 눈에 띤다. 경기도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수원 화성과 광주 남한산성, 두 곳의 성곽 세계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이런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국가적인 자랑만이 아니라, 그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로서는 자긍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오산에는 독산성이 있다. 독산성은 처음 백제 때 축성을 시작하여 조선조까지 주변의 경계를 맡아오던 산성이다. 이런 독산성은 권율장군의 기지로 많은 왜적을 물리쳤으며, 삼남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어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하다. 오산 독산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좋은 일일까?

 

유네스코가 요구하는 세계문화유산 등재조건은 보존성이다. 처음 그 성곽이 축성되었을 때의 원형을 얼마나 잘 보존하고 있는가를 중요시한다. 또한 등재신청을 한 성곽의 주변 환경까지도 보존되어야한다. 그것이 유네스코가 요구하는 가장 큰 조건이다. 과연 독산성은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으며, 주변 환경은 잘 지켜지고 있는 것일까?

 

 

 

 

 

성안 구조물 등 원형 복원 서둘러야

 

문제는 독산성이 산 위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주변 환경이야 별 어려움이 없어 보인다. 근자에 들어선 성곽 주변의 건축물 정도만 정리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원형의 보존이다. 독산성을 축성했을 때 각 문 위에 문루는 어떤 모습으로 있었는지, 그리고 성벽 위에 여장은 있었는지, 높이는 어떠했는지 등 많은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독일의 드렌스덴 엘베계곡은 지난 200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었다. 하지만 독일정부가 계곡주변에 인공조형물인 다리를 건설하느라 자연경관의 원형을 훼손한 것이 문제였다. 2010년 유네스코는 엘베계곡의 세계문화유산 지정을 취소시켜버렸다. 원형보존과 주변 경관의 보존이 이만큼 중요한 것이다.

 

현재 독산성은 어떤 모습인가? 과연 권율 장군 시대의 산성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가? 성안에는 어떤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는가? 또한 성의 형태는 제대로 갖추고 있는 것일까? 성문위의 전각은 어떤 형태로 건축이 되었었는가? 성안 병사들의 목마름을 해결하던 우물은 어디에 있었는가? 이 모든 것을 먼저 복원을 해야만 한다.

 

 

 

 

 

 

문화유적, 개인이나 집단의 이용은 안된다.

 

문화유적이란 오랜 세월 우리의 역사를 함께 지켜 온 유산이다. 그러한 소중한 문화유산은 어떤 이유로던지 개인이나 집단이 자신들의 실리를 위해 이용하면 안된다. 문화유적이란 우리의 역사이자 정신적인 지주이기 때문이다.

 

독산성이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될 수만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있을까? 요즈음 한창 중, 고등학교 역사교과서 문제로 세상이 시끌벅적하다. 한편에서는 역사교과서가 한편으로 치우쳤다고 하고, 한쪽에서는 친일 등으로 도배를 할 것 같다고 한다. 참 시끄럽기 짝이 없는 나라다.

 

그런데 과연 등재를 시민들과 함께 추진하겠다는 당사자들은, 독산성이 등재에 합당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등재를 추진하기 전에 먼저 복원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치 위마다 놓인 조망을 위한 불필요한 의자들부터 정리해야 한다. 복원이 된 후에 등재를 생각해야 정답이다.

 

 

 

 

오산시민이라면 누구나 독산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되기를 바랄 것이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요원한 희망일 뿐이다. 현재의 독산성의 상태로는 누구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등재를 위해 애를 쓰겠다니 감사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독산성은 사적으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자신들의 실리를 위한 이용은 삼가야 한다. 그리고 모두가 힘을 합해 원형복원에 앞장서야 한다.

 

 

오산시 세마동은 조선조 정조 13년인 1789년까지는, 시봉면과 산성면, 삼미면의 일부가 속했었다. 정조 17년인 1793년에 발간된 <수원부읍지>의 지도를 살펴보면, 산성(山城)이라는 명칭이 나온다. 또한 정조 13년인 1789년의 인구수를 보면 산성면에는 지곶리와 양산리가 있는데, 249가구에 남자가 363, 여자가 424, 합계 787명으로 기록이 되어 있다.

 

순조 31년인 1831년에 발간된 <화성지>에 의하면, 산성면에는 5개리로 서리, 남리, 지곶리, 신촌리, 양산리 등이 있다. 현재 독산성이 속해있는 지곶동은 과거 산성면의 지역이다. ‘산성(山城)’이란 이곳에 성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지곶동에는 현재 사적 제140호인 독산성과 세마대지가 있다.

 

 

 

종이를 생산하던 조지소(造紙所)가 있던 지곶동

 

행정동 세마동에는 외삼미동, 세교동, 양산동, 지곶동, 서랑동의 법정동을 갖고 있다. 이 중 지곶동이라는 지명유래는 원래 종이(한지)를 만들던 마을이라는 한자 풀이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본다. 마을 뒤에 있는 독성산에 닥나무가 많아서 이것을 이용해 한지는 생산하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1789년에 발간된 <수원부읍지>에 산성면 지곶리(紙串里)’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종이고지, 조꼬지, 지곶동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한국지명총람>에 따르면 지곶리라는 명칭은 종이를 뜨는 조지소(造紙所)’가 이곳에 위치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 독성산성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사적 제140호 오산 독성산을 오르다.

 

주변을 둘러보면 거칠 것이 없다. 어느 한 곳도 시야를 가리는 곳이 없는 곳이다. 독성산성(혹은 독산성)은 성을 한 바퀴 돌아보아도 눈앞을 가리는 어떤 것도 없는 곳이다. 그야말로 가파른 비탈의 산 정상부를 둘러 성을 쌓았다. 현재의 성은 그리 높지는 않지만, 일부 남문지 등을 보면 성벽이 높이가 7~8m에 달하는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견고한 성으로 보인다.

 

독성산성은 백제 때 처음으로 축성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후 통일신라와 고려, 조선조 임진왜란 때까지 이 성은 상당히 중요한 거점으로 활용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광주의 남한산성, 용인의 석성산성과 함께 도성방어를 위한 삼각체계를 형성한 곳이기도 하다. 조선조 선조 27911일부터 14일까지 불과 4일 만에 백성들이 힘을 합해 성을 새로 쌓았다고 전한다.

 

 

 

하지만 이렇게 4일 만에 축성을 완성했다고 하는 것은, 성곽의 무너져 내린 곳을 보수했다고 보아야 한다. 한 때는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독성산성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정조는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온양온천에 행차했다가 장마 때문에 이곳에 묵었었다고 하여 정조 16년인 1792년과 20년인 1796년에도 수개축을 하여 오히려 독성산성을 더 견고하게 쌓았다고 한다. 지금의 독성산성은 정조 당시의 축성 형태라는 것이다.

 

독성산성을 따라 걷다

 

가파른 길을 따라 오르면 숨이 턱에 닿는다. 독성산성을 오르는 길은 그렇게 가파르다. 차로 오른다고 해도 만만치가 않은 가파른 길이다. 차도가 끝나는 성곽 입구에는 아이들의 뛰노는 소리가 시끄럽다. 성안에 있는 보적사를 찾아 온 아이들인 듯하다. ‘해탈문이라는 나무판을 단 동문으로 걸음을 옮긴다.

 

 

 

 

보적사를 돌아보니 새로 여기저기 신축을 하고 있다. 전통사찰인 보적사는 그동안 이곳을 오를 때마다 협소하고 답답하다고 느꼈는데, 절 양편으로 전각을 더 짓느라 분주하다. 보적사 화장실 앞에서 만나는 치성 위에는 의자가 놓여있다. 관람객이 편하게 앉아 멀리 내다보라고 이곳을 의자를 놓았겠지만, 사적의 치성이라는 생각을 하진 못한 것일까?

 

그러고 보니 독성산성을 돌면서 이렇게 치성 위에 의자를 설치한 곳이 이곳 외에도 만날 수가 있다. 사람들을 편하게 배려를 한 것은 좋지만, 이곳은 엄연한 사적이고 치는 성곽의 중요한 구조물 중 한 곳이다. 굳이 그곳에 의자를 놓아 치성을 감상하는데 방해를 했어야만 했을까? 좀 더 성숙한 문화재 보존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난공불락의 요새인 견고한 독성산성

 

독성산성의 둘레는 3,240m이다. 성에는 네 곳에 문을 내었으며, 한 곳에 암문을 내고 있다. 하지만 독성산성의 4대문지와 암문지를 비교하면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예전에는 성벽 위에 여장을 둘러쳤을 것 같은데, 한 곳도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산성을 오르는 길에 현수막에는 독성산성 복원비용이 확정이 되었다고 한다. 독성산성을 제대로 복원하려면 500억 이상이 소요되지만 그 절반 정도가 확정이 되었다는 것이다.

 

성은 자연을 이용해 축성을 하였다. 성곽은 자연적인 지형에 맞게 구불거리면서 축성을 한 형태이다. 그리고 4대문 주변에는 치성을 돌출시켜 성문을 보호할 수 있도록 하였다. 권율장군이 쌀을 부어 말을 씻겼다는 세마대첩이 일어날 때, 성내에는 근왕병 2만여 명이 있었다고 한다. 물이 부족한 독성산성 안을 돌아보니 배수구가 한 곳 밖에 보이지 않는다.

 

 

 

최적의 지세를 갖고 있으면서 적의 침입을 방어할 수 있는 독성산성. 한 바퀴를 사진을 촬영하면서 돌아보아도 한 시간 남짓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그 한 시간을 걷다가보면 이 성이 얼마나 대단한 성이었나는 가늠할 수 있다. 26일 오후에 돌아본 독성산성. 언제 성곽의 복원을 마칠 수가 있을까? 그 때를 고대해 본다.(출처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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