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철이 되면 무엇보다 바다로 피서를 떠나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한다. 그 중에도 물이 깨끗하고 시원한 동해안이 가장 사람들이 선호하는 곳이며,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에 소재한 최북단 화진포 해수욕장을 시작으로 동해안을 끼고 가는 곳마다 해수욕장이다. 여름철이 되면 방을 구하기조차 힘들다고 하는 동해안 고성의 해수욕장은 사람들로 넘쳐나야 하지만 워낙 뜨거운 날씨 때문인지 정작 해수욕장을 찾는 피서객들은 예전만 못하다고 한다.

 

화진포 해수욕장은 수원을 비롯한 경기도를 출발해 영동고속도로와 국도를 이용하거나, 2영동고속도로를 이용해 고속도로와 국도 등, 속초를 경유해 고성으로 들어갈 수 있다. 수원에서 어느 도로를 이용하던 간에 3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물론 한 여름 피서철에는 그보다 시간이 더 걸린다는 것은 감안해야 한다.

 

나는 여름철 고성을 갈 때는 주로 국도를 이용하는 편이다. 여주에서 양평을 거쳐 강원도로 들어서 홍천, 인제, 원통, 진부령을 넘는다. 찾아가는 길에 절경을 만날 수도 있고 여기저기 볼 것이 많아 구경도 하고 중간에 먹을거리도 찾아보며 천천히 간다. 피서라는 것이 더위를 피하는 것인데 굳이 마음 급하게 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화진포의 성 등 볼거리 많아

 

화진포를 찾아가면 주차장 안쪽 동해를 바라보는 돌로 축조한 건물이 보인다. 바로 김일성별장이라고 하는 화진포의 성이다. 언제나 사람들로 붐비는 이곳은 김일성 일가가 이곳으로 피서를 다녀갔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지만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인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원산에 있는 외국인 휴양촌을 화진포에 강제 이주시킨 것이다. 화진포의 성은 독일건축가 H. Weber1938년에 건립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했던 곳이다.

 

화진포 해수욕장 한편소나무 숲 속에 자리하고 있는 화진포의 성은 1948년 이후 북한이 귀빈휴양소로 사용하였고, 당시 김일성과 그의 처 김정숙, 아들 김정일과 딸 김경희 등이 묵고 갔다고 하여 김일성 별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 건물은 애초 독일의 선교사 셔우드 홀 부부에 의해 지어진 건물로 5,25 한국전쟁 때 훼손이 된 것을 20053월 옛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강원도 고성 화진포는 일 년이면 적어도 5~6번 정도는 찾아가는 곳이다. 화진포 인근에 볼일이 생기기 때문에 찾아가면 일부러 화진포를 한 바퀴 돌아오는 것도 이곳의 경치도 일품이지만 주차장 주변으로 펼쳐진 노송 숲과 화진포의 성 등 만나기 힘든 경관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화진포 해수욕장 인근에는 이승만의 별장과 이기붕 별장도 자리하고 있어 이곳의 경관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알 수 있다.

 

 

금구도 광개토태왕의 무덤일까?

 

화진포 해수욕장 앞쪽인 초도리 앞 500m 정도 해상에 1,000여 평 면적을 가진 금구도라는 섬이 있다. 이 섬은 금구농파라고 하여 금구도의 파도치는 모습이 아름다워 화진포팔경 중 한 곳에 해당한다. 고구려의 제19대 태왕인 광개토태왕은 이름이 담덕이며 374년에 탄생했다. 386년에 고구려의 태자로 책봉된 후, 391년 고구려 제19대 태왕에 등극했다. 광개토태왕은 고구려 최초로 연호를 제정해 사용하였으며 즉위년에 관미성을 비롯한 백제의 10개의 성을 빼앗았다. 392년에는 황해도지역에 있는 백제 북쪽 10개 성을 함락시켰으며, 고구려 북쪽 거란을 정복하였다.

 

396년에는 수륙 양쪽으로 군사를 동원하여, 백제의 성 58개를 함락시키고 한강유역을 차지했다. 400년에는 백제의 요구를 받아들여 신라를 침략한 왜구를 격퇴하였으며, 404년에는 남쪽국경에 침입한 백제와 왜의 연합군을 격퇴했다. 407년에 후연이 망하고 북연이 등장하자, 북연을 고구려에 굴복시켰다. 그 해 백제를 다시 공격하여 6개의 성을 함락시켰다. 410년에는 동부여와 연해주를 공격하여 64개의 성을 획득하였다. 4123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고성문화원 향토사학자 김광섭에 의하면 고구려 연대기에 광개토태왕 3년인 3048월 경 이곳 거북섬이라는 금구도에 왕릉 축조를 시작했으며, 188월에는 화진포의 수릉 축조현장을 왕이 직접 방문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광개토태왕이 서거 후 2년 뒤인 414(장수왕 2) 929일 광개토태왕의 시신을 화진포 앞 거북섬인 금구도에 안장했다고 한다.

 

문자명왕(고구려 제21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491~519) 2년에는 이곳에서 광개토태왕의 망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섬에는 와편과 주초석 등이 남아있어, 이곳이 광개토태왕의 망제를 지낸 사당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이곳이 광개토태왕의 무덤으로 추정한다.

 

화진포 앞 동해에 있는 금구도는 섬 위에 대나무가 가을이 되면 금빛을 띤다고 하여 금구도라고 한다. 금구도는 여러 문헌 기록상으로 볼 때,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 초기까지는 '초도(草島)‘라는 지명으로 불린 것으로 보인다. 초도라는 지명이 일제강점기 중 후반 무렵에 이르러 지금의 '금구도(金龜島)'라는 지명으로 변경되어 오늘날까지 사용하고 있다.

 

 

화진포 팔경을 느껴볼 수 있는 곳

 

1997년 고성군문화원에서 발행한 자료에 의하면 화진포 팔경 제1경은 원당리 마을 앞에 호수에 비친 반달 그림자와 누런 가을곡식, 단풍나무가 어우러진 풍광이 아름다워 '월안풍림(月安楓林)'이라 했으며, 2경은 화포리 찻골에서 저녁밥을 짓는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모습이 한 폭 그림 같다하여 '차동취연(次洞炊煙)'이라 했다.

 

3경은 호수 주변 모래밭에 피는 빨간색 해당화가 봄에 피는 모습이 영롱하여 '평사해당(平沙海棠)', 4경은 호수동편에 있는 장평부근에 찾아오는 많은 기러기의 울음소리가 청명하여 '장평낙안(長坪落雁)', 5경은 화진포 앞바다에 떠있는 금구도(金龜島)의 모습이 한가로워 '금구농파(金龜弄波)', 6경은 화진포 호수의 물이 바다로 빠지면서 바닷물과 부딪치며 물길이 솟아오르는 모습이 마치 용()이 물을 차는 듯하여 '구용치수(龜龍治水)'로 정했다.

 

7경은 풍암별장에서 보이는 돛단배가 한가로이 노니는 모습이 정겨워 '풍암귀범(楓岩歸帆)'이라 했으며, 8경은 모화정리(茅花亭里:지금의 죽정1)의 호수변의 모래밭에 아름다운 정자가 있어 '모화정각(茅花亭閣)'이라 칭하는데 조선시대의 풍류시인인 김삿갓이 화진포에 머무르는 동안 이를 읊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곳 금구도는 신라시대 수군기지가 있었단 곳으로 밝혀졌다.

 

 

시인묵객이 사랑한 곳, 화진포

 

만경창파 맑은 호수 그 가운데 자리하고 봄바람에 잔물결 출렁이네.

살구꽃 물가를 뒤덮었고 버들은 휘늘어졌다네.

비구름 걷히고 하늘이 맑아지니, 붉은 석양 출렁이며 햇살을 쏟아내네.

 

위 시를 지은 채팽윤(1669(현종 10)1731(영조 7))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평강이며 자는 중기, 호는 희암, 은와이다. 현감 시상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신동이란 소리를 들었다. 특히 시문과 글씨에 뛰어나 해남의 두륜산 대화사중창비와 대흥사사적비의 비문을 찬하고 썼다. 저서로는 <희암집> 29권이 있으며, <소대풍요 昭代風謠>를 편집하였다.

 

채팽윤이 3월 어느 봄날에 화진포를 찾아 읊은 시이다. 화진포는 동해안 일대에서 가장 큰 석호로 많은 이름을 갖고 있다. 고려 말의 문집에서는 열산호(列山湖)’라고 하였으며,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열산호(烈山湖)부터 화진포(花津浦), 화진호(花津湖),화진포(和眞浦), 화진포(華津浦), 포진호(泡津湖) 등의 이름이 전하고 있다.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인 최유해의 영동산수기(嶺東山水記)에서도 간성에는 영랑(永郞)이라고 하는 호수와, 화진(花津)이라고 부르는 두 호수가 있다고 한다. 모두 다 거울처럼 맑은 호수인데 영랑은 기이한 바위들이 있고, 화진은 기이한 나무들이 많아 두 곳 다 빼어나다고 할 만한 경개들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사랑한 곳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화진포. 이곳 해수욕장에 널린 백사장을 밟아보면 밀려드는 파도로 인해 폭염의 햇볕과는 달리 동해바다의 시원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지금이야 오고가는 길이 조금 버겁기는 하지만, 이 여름 화진포를 찾아가면 아름다운 경관과 함께 시원한 동해의 너른 바다를 만날 수 있다.

 

최북단 고성군 현내면 ‘화진포의 성’ 방문

 

정말 모처럼 꿈같은 휴가를 맞이했다. 단 며칠이지만 처음에는 어디 제주도라도 다녀올 생각이었지만 무더위가 계속되자 장소를 바꿔 1박 2일로 다녀올 수 있는 강원도로 향했다. 우선은 그곳에 꽃 필요한 볼일이 있기 때문에 겸사겸사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화진포의 성을 찾아가기로 했다.

 

화진포의 성은 ‘김일성 별장’으로 유명하다. 잠시 김일성 일가가 이곳으로 피서를 다녀갔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지만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인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원산에 있는 외국인 휴양촌을 화진포에 강제 이주시켰다. 화진포의 성은 독일건축가 H. Weber가 1938년에 건립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하였던 곳이다.

 

 

화진포 해수욕장 한편소나무 숲 속에 자리하고 있는 화진포의 성은 1948년 이후 북한이 귀빈휴양소로 사용하였고 당시 김일성과 그의 처 김정숙, 아들 김정일과 딸 김경희 등이 묵고 갔다고 하여 ‘김일성 별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 건물은 애초 독일의 선교사 셔우드 홀 부부에 의해 지어진 건물로 5,25 한국전쟁 때 훼손이 된 것을 2005년 3월 옛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화진포의 성을 찾아간 것은 13일이다. 해수욕장은 징검다리 연휴로 해서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지만 정작 바다에는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고 금강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하천에 모여 더위를 피하고 있다. 커다란 파도가 넘실대면서 해안가로 밀려드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이 들 정도이다.

 

 

금구도 광개토대왕의 무덤일까?

 

화진포 해수욕징 앞쪽 동해바다를 보면 500m 정도 앞 해상에 1,000여평 면적을 가진 금구도라는 섬이 있다. 이 섬은 ‘금구능파’라고 하여 금구도의 파도치는 모습이 아름다워 고성팔경에 해당한다. 고구려의 19대 태왕인 광개토대왕은 이름이 담덕이며 374년에 탄생했다. 386년에 고구려의 태자로 책봉된 후, 391년 고구려 제19대 태왕에 등극했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최초로 연호를 제정하여 사용하였으며 재임 당시 수많은 적을 물리치고 성을 함락시켰다.

 

고성문화원 향토사학자 긴광섭에 의하면 고구려 연대기에 광개토왕 3년인 304년 8월 경 거북섬에 왕릉 축조를 시작했으며 18년 8월에는 화진포의 수릉 축조현장을 왕이 직접 방문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광개토왕이 서거 후 2년 뒤인 414년(장수왕 2년) 9월 29일 광개토왕의 시신을 화진포 앞 거북섬에 안장했다고 한다.

 

문자명왕(고구려 제21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491~519) 2년에는 이곳에서 광개토왕의 망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섬에는 와편과 주초석 등이 남아있어, 이곳이 광개토왕의 망제를 지낸 사당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이곳이 광개토왕의 무덤으로 추정한다.

 

파도가 치는 날 찾아간 김일성 별장

 

금구도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소나무숲을 걸어 화진포의 성이라는 김일성 별장으로 향했다. 먼 길을 달려 예까지 왔는데 정작 바닷물에 발로 담그지 못하고 돌아서야만 했다. 휴일을 맞아 마지막 피서를 즐기는 많은 사람들이 김일성 별장으로 몰려들어 북적인다. 맨 위에서 내려다보는 화진포는 가히 절경이다.

 

아름다운 경치를 좋아하는 것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원하고 있다. 그래서인가 이곳 화진포에는 이승만 정 대통령의 별장과 이기붕의 별장도 자리하고 있다. 그곳에도 소나무숲이 우거져있지만 김일성 별장만큼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지는 않는다. 경치가 떨어지기 때문인 듯하다.

 

모처럼 맞은 휴가를 이용해 찾아 온 고성군 화진포. 그곳에서 올 여름 바닷바람으로 맞으며 피서를 즐긴다. 그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인지. 앞으로 남은 3일간을 또 어디를 향해 길을 나서야할지 깊은 생각에 빠진다.

 

농민회관 앞 서호공원 자연학습장을 돌아보다

 

바람이 심하다. 거기다 미세먼지와 송화가루까지 심하게 날린다. 나들이를 하기에는 좋지 않은 날이다. 그래도 사무실에서 글만 쓴다는 것이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어 잠시 바람이라도 쏘일 겸 밖으로 나왔다. 이렇게 바람이 심하게 불고 미세먼지가 나쁨 수준일 때는, 숲이 좋다고 했으니 나무가 무성한 옛 농촌진흥청 자리를 찾았다.

 

팔달구 화서동 436-3에 소재한 농민회관 앞은 서호가 있고, 주변에 아름드리 가로수들이 있는 곳이다. 물과 숲, 거기다가 차를 한 잔 마실 수 있는 공간까지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으랴 싶다. 그동안 수원에 거주하면서 나름 좋다는 곳을 다 다녔지만 이곳은 딴 곳에 비해 볼 것이 많은 곳이다.

 

우선 옛 농촌진흥청 안쪽에 자리한 여기산은 선사유적지이다. 특히 여기산에는 화성 축성 당시 성돌을 뜨던 자리가 남아있고, 안으로 들어가면 토성의 흔적이 있는 곳이다. 거기다 서호는 낙조로 유명한 곳이다. 서호 산책로를 한 바퀴 돌아보는 것 민으로도 별천지란 느낌이 든다. 일몰시간에 찾아갔다면 절경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세먼지와 송화가루까지, 그래도 좋다

 

농민회관에 도착하니 주차장에 차들이 꽉 들이찼다. 6일 토요일 오후에 농민회관 웨딩홀에서 결혼을 하는 젊은 부부들이 많은 모양이다. 카페도 온통 사람들로 들이찼다. 이건 카페가 아니라 완전 시장바닥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공공장소에서 목소리를 왜 그렇게 높이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간단한 식사를 시켜놓고 주변을 둘러본다. 바람에 흙먼지와 함께 송화가루, 민들레 씨앗까지 함께 날려 검은 옷이 금방 하얗게 변해버린다. 하지만 이곳 숲을 걷기위해 찾아오지 않았든가? 길을 건너 서호 방향으로 발길을 옮긴다. 순간 이곳이 이렇게 아름다웠나? 하고 눈을 이심하지 않을 수 없다. 눈앞에 연분홍 영산홍 단지가 펼쳐진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 나뭇잎이 모두 한편으로 기울었는데, 그런 것보다는 눈앞에 펼쳐진 꽃밭의 장관 때문에 그런 모든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저 수원 곳곳을 그렇게 다녔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직도 이곳을 몰랐다는 것이 후회가 된다. 서호 위를 날고 있는 새들도 바람에 날개 짓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

 

그래도 좋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서호 주변에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행복하다. 서호공원에서는 이 먼지에도 무슨 행사를 하는 것인지 사람들이 모여 있다. 그곳으로 가다보니 서호공원 자연학습장이라 쓴 석물이 보인다. 그리고 그 뒤편으로는 텃밭들이 있다. 언제 이런 텃밭이 이곳에 생겼을까?

 

                        

 

살기좋은 수원, 아름다운 길이 많아 좋다

 

작은 텃밭에는 갖가지 야채들을 심었다. 대파, 마늘, 고추, 토마토, 참외, 쪽파 등. 정성들여 가꾼 텃밭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다. 한 편에 쉼터에 다리를 뻗고 앉아 서호를 바라다본다. 서호의 본래명칭은 측만제이다. 축만제는 조선 정조 23년인 1799년 농업용 저수지로 축조됐다. 당시에 만석거와 만년제, 축만제 세 곳에 저수지를 조성했는데, 그 중 서쪽에 있어서 서호라고 불렸다.

 

예전부터 서호는 낙조와 겨울철새 들이 찾아드는 곳으로 유명했으며, 잉어가 많이 잡히는 곳으로 명성을 얻었다. 아마 화성유수 박기수도 이곳 서호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넘어가는 해를 보면서 시 한 구절을 짓지는 않았을까? 그만큼 수원에는 아름다운 길과 명소가 즐비하다. 언제 찾아가도 나름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그런 수원이 있어 좋다. 오랜만에 찾아 온 서호. 그 주변에 늘어선 숲과 꽃길, 그리고 새들의 소리가 즐거운 곳. 서호가 있어 행복하다. 올해가 가기 전에 항미정에 올라 지는 해를 바라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미세먼지가 나쁨이라는 날 찾아간 서호 주변. 난 그곳에서 또 다른 아름다운 길을 만났다.

 

 

수원천 발원지 지정 조건 갖추지 못해

 

강이나 하천의 발원지(發源地)는 어느 곳이나 지정을 할 때 몇 가지의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이런 조건을 갖추지 못하면 발원지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첫째는 반드시 물이 솟는 용천수라야 한다. 흐르는 물이 고이고나 주변의 물이 고이는 현상으로 물이 모이는 곳은 발원지가 될 수 없다. 발원지란 발 그대로 물이 처음 나오기 시작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1365일 물이 마르지 않아야 한다. 만일 가뭄이 들어 물이 마른다고 하면 그런 샘은 발원지가 될 수 없다. 한강의 발원지인 강원도 태백시 검룡소 옆으로는 커다란 물줄기가 위에서 흘러내린다. 하지만 그곳을 발원지로 정하지 않고 검룡소로 정한 것은, 그 물이 가뭄이 들면 말라버리기 때문이다.

 

셋째는 가장 높은 곳과 가장 먼 곳을 지정한다. 하기에 발원지의 지정 조건은 물이 땅에서 솟는 용천수며, 일 년 동안 마르지 않는 곳을 발원지 지정의 기본적인 조건으로 삼게 된다. 한강의 발원지인 검룡소, 금강의 발원지 뜸봉샘, 낙동강의 발원이 황지, 섬진강의 발원지 데미샘 등은 모두가 이런 조건을 갖추고 있다.

 

 

 

수원천의 발원지는 어디일까?

 

20133월 수원시에서는 일 년 동안 물이 마르지 않고 샘솟는 광교산 절터약수터를 놓아두고, 통신대방향으로 오르는 광교산의 고도 425m, 위도(3720‘ 57“ N), 경도(1271’ 1” E)골짜기를 수원천 발원지로 지정을 했다. 수원하천유역 네트워크와 전문가들이 이곳을 수원천 발원지로 선정했다는 것이다.

 

수원천 발원지 표지판을 세우던 날도 이곳은 발원지가 될 수 없음을 이야기를 했다. 발원지의 조건을 하나도 갖추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 한 방을 솟아오르지 않아 기포조차 생겨나지 않는 곳을, 어떻게 이곳에서 물이 솟는 발원지로 볼 수 있다는 것인가? 그럼에도 수원시는 절터약수터를 놓아두고 이곳을 발원지로 지정을 했다.

 

 

 

 

발원지에 물 한 방울도 보이지 않아

 

24일 오후, 수원천 발원지를 찾아 광교산을 올랐다. 지난주에 연이어 비가 오는 바람에 개울에는 물이 흐르는 소리가 정겹게 들린다. 이 정도 물이 흐르면 발원지에도 물이 고여 흐르겠지 하고 미끄러운 길을 조심스레 올라 발원지를 찾았다. 그러나 이게 무슨 일일까? 발원지 인근에는 흐르는 물도 보이지 않고, 안내판 아래는 물 한 방을 찾아볼 수가 없다. 발원지라는 안내판이 무색하다.

 

, 쌓인 낙엽 안에 물길이라도 있을까 싶어 낙엽을 해쳐보았다.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저 물에 젖어 흙만 축축할 뿐 고여 있는 물조차 없다. 그런데도 이곳을 발원지라고 우길 것인가? 발원지의 지정 조건을 하나도 갖추지 못하고 있는 발원지. 수원시는 이곳에 세운 발원지 안내판을 절터약수터로 옮기고, 발원지 지정을 해제해야 한다. 물이 없는 발원지는 어떤 설명으로도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남의 부녀자를 빼앗아 간 죄 그 얼마나 클까.

네가 만일 거역하고 내놓지 않으면그물로 사로잡아 구워 먹고 말테다.

 

해가(海歌)라는 신라 때부터 전해진 노래로 구지가와 같은 계통의 향가이다. 이 노래의 시원은 신라 성덕왕 때 수로부인이 동해의 해룡(海龍)에게 잡혀 가자 남편인 순정공이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서 불렀다고 하는데서 전해진다. 김해에 전하는 가야국의 구지가가 건국 신화 속에서 창출된 신군(神君)을 맞이하는 주술적 요소가 강한데 비해, 해가는 신라시대 민간에 널리 전승이 되어, 액을 막고 소원성취를 비는 기원성이 짙은 노래였다는 점이 다르다. 그러나 두 노래 모두 집단가무로 많은 사람들이 함께 불렀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이로 보아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즐겨 모여 부르는 이러한 노래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해가사에는 한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삼국유사(三國遺事) 2, 가락국기에 보면 가락국 시조인 김수로왕의 강림 신화 속에 삽입된 노래인 <구지가>가 있다. 이 구지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龜何龜何(거북아 거북아) 首其現也(머리를 내어라)

若不現也(내어 놓지 않으면) 燔灼而喫也(구워서 먹으리)

 

이와는 달리 삼척지방에 전하는 해가사는

구호구호출수로(龜乎龜乎出水路)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어라.

약인부녀죄하극(掠人婦女罪何極) 남의 아내를 앗은 죄 얼마나 크냐.

여약패역불출헌(汝若悖逆不出憲) 네 만약 어기어 내 놓지 않으면

입망포략번지끽(入網捕掠燔之喫) 그물을 넣어 잡아 구워 먹으리.

 

라고 되어있다. 해가사의 창출근거를 보면 삼국유사 기이 제2 수로부인조에 전하는 내용으로 신라 제33대 성덕왕(聖德王) 때에 순정공(純貞公)이 명주(지금의 강릉)태수로 부임하는 도중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곁에 바위 산봉우리가 있어 병풍과 같이 바다를 둘렀다. 높이가 천 길이나 되고, 그 뒤에 철쭉꽃이 만발하게 피어 있었다. 공의 부인인 수로가 좌우를 향해 "누구 꽃을 꺾어 올 사람이 없느냐?" 하였다. 모시던 사람들은 그 말에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마침 그 때 한 늙은이가 암소를 끌고 지나가다가 부인의 말을 듣고 그 절벽을 타고 올라가 꽃을 꺾어, ‘자줏빛 바위 가에 잡은 손 암소 놓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라는 헌화가(獻花歌)와 함께 부인에게 바쳤다. 일행은 명주를 향해가다가 그 이틀 뒤에 임해정(臨海亭)이라는 곳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문득 바다에서 용이 나타나서 부인을 끌고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순정공도 허둥지둥 발을 구르나 계책이 없었다. 그 때 또 한 노인이 말하되 옛날 말에 여러 입은 쇠도 녹인다고 하니, 이제 바다 속의 미물인들 어찌 여러 입을 두려워하지 않으리오. 경내의 백성을 모아서 노래를 지어 부르고 막대기로 언덕을 치면 부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오.’ 라고 하였다.

 

공이 말대로 하였더니 용이 부인을 받들고 나와 도로 바치었다. 공이 부인에게 바다 속 일을 물으니 부인이 말하기를 칠보(七寶)로 꾸민 궁전에 음식이 맛이 있고 향기로우며, 깨끗하여 속세의 요리가 아니다.’고 하였다. 부인의 옷에서는 세상에서 일찍이 맡아보지 못한 특이한 향기가 풍기었다. 수로부인은 절세의 미인이라 깊은 산과 큰못을 지날 때마다 여러 번 신물(神物)에게 붙들림을 당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수로부인을 바다 속으로 끌고 들어간 것도 용이고, 노래를 듣고 다시 수로부인을 놓아준 것도 용인데, 왜 거북이를 구워먹는다고 했을까? 난 속 좁은 소견으로 이렇게 유추해본다.

첫째는 우선 용은 임금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용을 구워먹는다는 것은 곧 임금을 해하려는 음모로 역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둘째로는 우리 설화 등에 보면 거북이는 용왕의 사자로 많이 표현이 되고 있다. 별주부전 등을 용왕의 병을 고치기 위해 토끼를 잡으러 거북이가 뭍에 오른다. 즉 용왕의 충실한 사자인 거북이를 해하는 것이 두려운 용왕이 수로부인을 다시 되돌려 보냈다는 생각이다. 이런 향가 한수에도 당시 사람들의 심성을 알 수 있으며, 우리 선조들의 올곧은 마음가짐을 엿볼 수 있지 않은가.

 

동해시에서 삼척을 향해 7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보면 좌측으로 삼척MBC가 보인다. 이곳을 지나 증산해수욕장과 수로부인공원이라는 이정표를 따라가면 고가도로 밑을 통과해 좌회전을 하게 된다, 약간 경사진 길을 오르다가 보면 우측에 성황당사가 있고 조금 더 가면 시원한 동해가 펼쳐진다.

 

사기에 적힌 임해정(臨海亭)2004년 동해를 바라보는 자리에 조그맣게 꾸며져 신라 때 이곳을 지나던 수로부인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 미모가 얼마나 출중했으면 가는 곳마다 신물(神物)들이 나타나 수로부인을 취하려 했을까? 작은 임해정에 올라 동해를 바라다보니, 마침 바람이 부는 날이라서 동해의 작은 파도들이 앞 다투어 밀려든다.

 

 

 

 

백사장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갈매기 떼들은 한 곳을 바라보며 파도가 밀려들어도 요동도 하지 않고 있다. 흡사 당시 막대기로 언덕을 치던 사람들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저 편에 서 있는 추암해수욕장의 촛대바위는 그 때 수로부인을 끌고 바다 속으로 들어간 용의 화신은 아닐는지.

 

이곳을 경주에서 명주(강릉)로 가는 길목 중에 해가사의 장소로 여기는 것은 설화를 배경으로 유추한 것이다. 삼국사기 어느 곳에도 헌화가와 해가를 불렀던 장소가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곳에서 멀지 않은 임원해수욕장 근처에는 마을 사람들이 수리봉, 혹은 수로봉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고 한다. 앞으로 지역에 대한 연구가 더 이루어지면 그때는 좀 더 근접한 장소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아무튼 수로부인과 해가의 장소인 임해정은 그렇게 동해를 바라보며 다소곳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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