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왕족이 살던 곳이라는 옹진군 영흥도를 가다

 

인천광역시 옹진군 영흥면은 섬이다. 이 섬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시대부터라고 한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에 속하였으나 고구려와 신라가 한강유역을 장악하는데 따라 여러 나라에 속하였다. 고려 현종9년인 1018년에는 수주(수원)의 속군이 되었다가 인주(인천)로 편입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남양도호부에 속하였으며 1914년에 부천군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지금의 옹진군에 편입되었다. 1995년 옹진군이 인천광역시로 통합됨에 따라 인천으로 편입되었다. 영흥도의 명칭은 고려가 망하자 고려 왕족의 후예인 왕씨가 영흥도에 피신 정착해 살면서 고려가 다시 부흥할 것을 신령께 기원하기 위해 국사봉에 올라 나라를 생각했다고 해서 영흥도(靈興島)’라 불리게 되었다고 전한다.

 

영흥도가 아름다운 관광지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은 영흥대교 개통 후부터이다. 선재도와 함께 뭍과 이어진 영흥도는 인천 앞바다에서 백령도 다음으로 큰 섬이다. 다리가 놓이기 전까지는 뱃길로 1시간이나 떨어진 외로운 섬이었던 영흥도. 영흥대교가 개통이 되기 전에는 인천 연안부두나 인근 선재도에서 배를 타고 이 섬을 드나들었다.

 

 

십리포 해수욕장을 찾아가다

 

영흥도는 섬 전체 둘레가 15km 남짓해 자동차로 30분 정도면 둘러볼 수 있다. 10일 간간히 비가 뿌린다. 메주 목요일이면 인근 문화재 등을 답사하는 것이 한 주간 중 유일하게 쉬는 날이다. 아침 일찍 영흥도로 향했다. 간간이 비가 뿌리지만 마침 날도 선선하고 답사를 하기 딱 좋은 날씨이다.

 

영흥도를 찾아간 것은 십리포 해수욕장에 방풍목으로 심었다는 소사나무를 보기 위함이다. 그동안 영흥도를 몇 번인가 찾아갔지만 여름철에는 한 번도 찾아가지 못했기 때문에 소사아무의 상태도 궁금하고 더구나 막바지 더위가 한물 가시는 계절에 해수욕장 분위기라도 느껴보고 싶어서이다.

 

영흥도는 인신 대부도에서 연육교로 선재도를 가쳐 들어가지만 경기도가 아닌 인천광역시 옹진군 영흥면에 속한다. 가는 길은 대부도를 거쳐야하는데도 불구하고 인천광역시라는 것이 선뜻 이해가 가질 않지만 우리나라 행정구역의 모순이 어디 한두 가지던가? 그저 가는 길은 경기도를 통해야하지만 행정구역상 인천광역시하고 하니 괜히 멀게 느껴지지만 그러려니 해야지.

 

소사나무에 빠지다

 

소사나무는 중부이남 해안과 섬 지방에서 자란다. 나무는 다 자라도 수고 15~20m에 지름이 한두 뼘 정도가 고작이다. 소사나무의 매력은 똑바로 선 나무가 없다는 점이다. 구불구불 비틀어지고 군데군데 소금덩어리가 매달린 것 같은 옹이가 달려있다. 그래서 이 나무가 더 매력에 있는지도 모른다.

 

소사나무는 소금기에 강해 줄기가 잘려져도 새싹이 잘 나오는 등 척박한 조건에 잘 적응하는 나무로 유명하다. 하기에 소사나무는 바닷가 방풍목으로 식재한다. 소사나무는 빨리 자라지 않고 생명력이 강해 소금기가 많은 바닷가 등 척박한 곳에서도 잘 자란다. 영흥도 소사나무숲은 350그루 정도가 자라고 있으며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으로 19971230일 지정되었다.

 

이곳 영흥도 소사나무숲의 나무들은 수령이 100~150년 정도 되었으며 영흥면 내리 신91-4에 소재한다. 이곳의 소사나무 군락지에는 수고 20~30m 정도에 나무둘레 0,7~1.5m 정도이다. 피서철이라 그런지 소사나무 숲에는 피서객들이 천막을 치고 여기저기 더위를 피하고 있다.

 

 

숲으로 들어가니 시원하다. 소사나무숲은 여름에는 에어컨처럼 시원하고 겨울이 되면 따듯하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사나무가 자라고 있는 이곳 영흥도 십리포 해수욕장을 찾아온다. 예전과 달리 요즈음은 소사나무숲 앞에 주차장이 마련되고 카페며 각종 음식점들이 즐비하게 들어섰다.

 

십리포 해수욕장으로 밀물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소사나무숲에서 더위를 피하고 있던 사람들이 앞 다투어 바닷가로 달려간다. 물이 빠지면 갯벌에 나가 각종 조개며 낙지 등을 잡고 물이 들어오면 수영을 할 수 있는 곳. 이곳 소사나무숲이 있는 십리포 해수욕장을 사람들이 선호하는 이유이다. 조금의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면 물에 발이라도 담그고 싶었지만 소사나무를 본 것으로 만족하고 발길을 돌린다. 내년에는 여름에 꼭 이곳을 다시 찾아보겠다고 다짐을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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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산나무 인근에 당집 건축해 보존해야

 

오산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재인무대를 마치고 난 뒤 오산은 더 이상 정체성을 찾는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 정체성이란 행사를 위한 일회성 동선으로 창출되는 것이 아니다. 시민들이 스스로 노력해야하고 무엇인가 태동의 움직임이 보여야 한다. 쉬지 않고 이어나가는 끈질김만이 정체성을 찾는 길이다.

 

현재 부산동에는 주민들이 모여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던 당집이 있다. 당집 인근에는 당제에 사용하던 우물이 있어 이곳에서 물을 길어 제를 올렸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부산동 당집 인근에 아파트가 건설 중에 있고 앞으로도 더 많은 건물이 지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럴 경우 당집은 자연히 사라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주민들의 대다수가 이주하고 있다는 소식까지 들리고 있어 부산동 당제가 이어질 수 있을지 의문이다.

 

문제는 이 당집이 남아있기 때문에 부산동과 경기재인청을 연결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만일 이 당집이 사라지고 당제가 소실된다고 하면 경기재인청의 존재는 그야말로 전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당집은 어떻게 해서든지 지켜져야 한다. 당집을 지키는 일만이 전국의 모든 재인을 관장하던 오산의 정체성을 지켜내는 길이기 때문이다.

 

 

당산나무 사이에 당집 건축하고 재인청 복원 서둘러야

 

부산동에 소재하고 있는 왕버드나무 두 그루는 무속인들이 정월 등 기도를 드릴 때 찾아드는 신목(神木)이다. 이 부산동 도로 가운데 서 있는 왕버드나무는 부산동 마을 동산의 소나무 숲 등에 300년이 넘었다고 전해지는 도당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신 당가리와 연관이 있는 나무이기도 하다. 과거 부산동에 거주하던 화랭이 이용우 가문의 선대들이 주축이 되어 당굿을 열면 이 나무까지 내려와 돌돌이를 돌았다고 전한다.

 

한 마디로 이 왕버드나무는 단순한 나무가 아니라 도당신을 상징하는 신목이었다는 점이다. 지금도 정월이 되면 무속인들이 찾아와 나무에 정성을 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들은 왕버드나무를 할아버지나무 할머니나무라고 하여 나무에 오색천을 두르고 이곳에서 서낭제를 올리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수시로 이 나무를 찾아와 불을 밝히고 기원을 한다.

 

이 왕버드나무 두 그루는 지난해 오산시의회 김영희 의원이 왕버드나무의 생육상태의 정확한 판단을 위해 우리나라 최고의 나무박사인 경북대학교 박상진 교수를 개인적으로 특별히 초빙해 왕버드나무의 보존가치를 확인했다. 그리고 시 집행부 관계 공무원과 함께 현장에 나가 실태 점검을 실시하는 등 그동안 방치되어 왔던 왕버드나무 보호의 체계적 관리를 추진했다.

 

김영희 의원은 시 집행부 관련 부서(건설도로과/농식품위생과)와 연계하여 생육에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버드나무 주변 아스콘 제거와 도로선형 변경과 주변 휀스 설치공사를 2개월간의 걸쳐 실시하여 버드나무 생육을 위한 최적의 환경을 조성한 것이다. 당산나무인 이 왕버드나무를 당할아버지, 당할머니나무라 부르고 았는 것으로 보아 이 왕버드나무는 도당굿을 하던 부산동 산이들이 이곳까지 돌돌이를 돌고 당으로 올라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집을 지키는 일 오산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다

 

문제는 당집이 사라진다고 하면 결국 부산동의 근거가 없어지는 것이 되며 이 왕버드나무 역시 무속인들이 위하는 의미없는 나무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이다. 시에서는 현재 부산동 마을 뒤편 산중턱에 있는 당집을 이곳 왕버드나무 사이에 기와팔작집으로 조성하고 이곳에서 매년 중요무형문화재 경기도당굿 남부지부(지부장 승경숙)를 당집과 당산나무를 보호할 수 있는 단체로 고지를 하였으면 하는 생각이다.

 

그럴 경우 오산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길이 되는 것은 물론 300년 예인의 가문을 지켜 온 이용우 일가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통은 지켜져야 한다. 그리고 전통을 지키는 길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관련행정 기관과 오산시민 모두가 힘을 합해 지키려고 노력할 때야 비로소 오산이 전국 재인들을 총괄하던 위상을 다시 찾게되는 것이다. 오산의 뿌리를 지키는 일에 오산시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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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 이상 묵은 소나무와 석실 안 성황지신 민속적 가치 높아

 

흡사 벅수처럼 석주형 돌기둥 안면을 돌을 쪼아내듯 조각을 했다. 복판에는 흐릿하게 성황지신(城隍)이라고 음각을 해 놓았다. 네모난 돌에 벅수형태로 조형을 한 성황지신의 얼굴에는 흡사 면사포를 씌우듯 한지로 가려놓았다. 이 돌 성황을 석실 안에 모셔놓고 매년 정월 초정일(初丁日)에 마을주민들이 정성을 다해 음식을 차리고 마을의 안녕을 빌었다.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산학리. 마을회관 뒷산에는 수령 400년이 지났다는 커다란 소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이 마을에서는 매년 정월 초정일이 되면 음식을 마련해 이 나무에 정성으로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이 두 그루의 소나무가 바로 성황나무인 것이다. 그러던 것을 70여 년 전에 주민들이 석실을 마련하고 그 안에 석주로 된 성황신을 모셨다고 한다.

 

 

13일 오후, 고성군 현내면 산학리에 수백 년이 지난 석실이 있다는 제보를 받고 산학리로 향했다. 마침 그곳에 도공 김원주(, 54)가 작업을 하고 있어서 함께 동행하여 나지막한 신을 올랐다. 기온이 35도에 육박하는 무더운 날씨지만 사진으로 보내준 석실의 정확한 용도를 알아보기 위해서이다.

 

날이 워낙 덥다보니 사람을 만날 수가 없다. 마을회관 뒤편 소로를 이용해 산을 오르니 커다란 소나무 두 그루가 서 있고, 그 옆에 돌을 쌓아 만든 석실이 보인다. 얼핏 예전의 고분인 석실을 연상케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돌의 재질이 옛 것이 아니다. 석실 안으로 들어가니 석주에 성황지신의 안면을 새겨 놓았다.

 

이런 형태의 조각은 처음예요. 투박하긴 하지만 우리 정서를 그대로 갖고 있는 듯합니다. 정성을 드린 흔적도 넘어있고요

 

도공 김원주는 지리산 삼성궁에서 수년 째 돌 작업을 해왔기 때문에 석실 안에 놓인 석주형 성황지신을 보고 투박하지만 우리의 전통을 잘 지키고 있다고 한다. 그렇게 석실이 궁금해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마을 어르신 한분이 밭을 지나가다가 무엇을 하느냐고 묻는다.

 

 

70여 년 전에 석실을 조성했다는 증언

 

마을 어르신은 자신이 산학리 마을에서 가장 연세가 많다고 하신다. 올해 79세라는 것이다. 다행히 어르신은 이 성황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계셨다.

 

그 소나무는 400년이 지났다고 어른들이 말씀하셨어요, 매년 정월 초정일에 그 나무아래서 성황 제사를 모셨는데 내가 어릴 적 저 석실을 마련하고 그 안에 성황신을 모시는 작업을 한 것을 내가 본 것을 기억해요

 

마을어르신이 증언대로라면 이 석실을 조성한 것은 70년이 조금 지났다. 하지만 성황목인 소나무에서 성황제를 지낸 것은 이미 400년이 지났다는 것이다. 그렇게 긴 시간 이곳 산학리는 성황지신이 지켜온 마을이라는 것이다. 한 마을의 구심점인 공동체가 형성되어 온 이유는 바로 산학리 선황지신이라고 볼 수 있다.

 

 

단절된 위기에 있는 400년 전통의 성황제

 

우리 마을 건너편 산학산성 마루턱에 서 있는 소나무 아래도 성황이 있어요. 그곳도 이곳처럼 성황이 있는데 석굴은 없어졌죠. 그리고 이 산 너머에도 이목나무라는 부르는 성황나무가 있어요

 

마을 어르신이 증언해 준 이곳의 성황제는 온 주변에서 다 함께 치러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종 제대로 된 모습을 지키고 있는 것이 바로 산학리의 성황제 당산이다. 이런 정도의 역사를 지키고 있는 성황제 당산이라면 향토유적으로라도 지정하여 지켜가야 할 것이란 생각이다. 더욱 요즈음 들어 마을에서는 이 성황지신 터를 지켜갈 수 있을까를 걱정하고 있다.

 

마을어르신들이 말씀을 하시는데 이제 성황제를 모시는 것을 더 이상 계속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하시네요. 젊은이들이 어르신들 대까지 모시고 나면 더 이상 성황제를 모실 것을 강요하지 말라고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어르신들이 걱정을 하시는 것도 마을의 전통이 자꾸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운 모양입니다

 

 

 

마을의 한 주민이 전해 준 이야기에 찾아간 산학리 성황지신 터. 커다란 소나무 두 그루에서부터 전해진 성황제가 이미 400년을 넘었다. 현 시대에 그런 제가 무슨 필요 있느냐고 하지만 그 제로 인해 마을주민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공동체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시대가 바뀌고 사람들이 모두 나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에 팽배해 있을 때 유일하게 공동체를 버텨낼 수 있는 매개체가 바로 400년을 이어 온 성황제이다.

 

전통은 지켜지면서 세월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것이다. 산학리의 성황제는 그렇게 주민들을 하나로 결속시키는 역할을 하면서 오랜 세월을 지켜냈다. 고성군에서는 이 성황지신의 석실과 석주형 성황, 그리고 소나무 등을 좀 더 정밀하게 조사한 뒤 향토유적이라도 지정을 해 보존하는 것이 마땅하다. 한번 사라진 전통을 다시 되살린다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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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기념물 노송지대 소나무가 위험하다

 

경기도 기념물 제19호로 1973년 7월 10일에 지정된 파장동 노송지대. 이곳 노송지대에 식재되어 있는 소나무들은 정조의 효심이 가득 담고 있다. 요즈음 이 노송지대 소나무들이 주변이 더럽혀지고 많은 차량들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다. 파장동에서 길게 지지대비로 향하는 약 5km 정도의 이 길은 예전 정조대왕이 능침에 잠들어 있는 아버지인 장헌세자(사도세자)를 만나러 다니는 길목이었다.

 

정조대왕은 아버지 장헌세자의 원침인 현릉원 식목관에게 내탕금 1천량을 하사하여 이 길에 소나무 500주와 능수버들 40주를 심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수령 200여년을 넘는 소나무들이 줄을 지어 있는 노송지대는 정조대왕의 효행의 길이다. 2차선 도로를 따라 자라고 있는 소나무들은 하나같이 오랜 수령을 자랑하 듯 기묘한 형상을 하고 있다.

 

 

 

하지만 정조대왕 당시에 료심으로 심은 소나무들은 대개가 고사하고 지지대고개에서 약 5km에 걸쳐 식재되어 있던 소나무 중 현재 38주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 효행기념관 부근에 9주, 삼풍가든 부근에 21주, 그리고 송정초등학교 부근에 8주 정도의 소나무만이 남아 있다.

 

노송지대는 경기도 지정 기념물이다. 이는 이 지역일대가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다는 것을 뜻한다. 문화재보호법에서 규정하는 문화재란 인위적이거나 자연적으로 형성된 유산을 말하며, 역사적이나 예술적, 혹은 학술적 가치가 큰 것으로 유형문화재, 무형문화재, 기념물 및 민속자료 등을 포함한다.

 

 

 

노송지대 소나무 관리해야

 

3월 2일 이른 시간에 노송지대를 찾아가보았다. 노송지대 사이로는 2차선 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소나무들은 자동차 매연에 약하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이곳 노송지대 소나무들은 상태는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정조대왕 당시 식재를 했다고 하면 벌써 200년 이상의 수령을 갖고 있는 소중한 나무들이다.

 

이곳 소나무들은 그 의미가 깊다. 노송지대의 소나무를 보호해야 한다고 그동안 입이 닿도록 주장을 했다. 이 소나무들이 갖고 있는 뜻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이곳에 번호표를 달고 있는 소나무들은 정조대왕의 효심의 발로이다. 하기에 이 나무들은 교육적으로 상당한 가치를 갖는다.

 

시에서는 이곳 기존의 차선 옆으로 다시 도로를 개설했다. 아직 개통은 하지 않았지만 모든 공사가 마무리 작업을 서두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기존의 도로인 노송지대 사이를 통과하는 차량들은 이 소나무의 가치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속도를 줄일 생각도 하지 않고 달린다. 차에서 뿜어내는 매연 또한 적지 않다. 이 길은 근처 소나무와 숲에서 발생하는 피톤치드로 인해 걸으면 상쾌해야 할 텐데 매캐하기만 하다.

 

 

노송지대 공원으로 조성해야

 

지금 노송지대의 소나무들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이 나무들을 관리해야 하는 방법 중 하나는 이곳을 공원화 하는 방법이다. 노송지대 사이로 난 아스팔트를 모두 걷어내고 사람들이 맨발로 걸을 수 있는 길로 만들어야 한다. 길 좌우에 지저분한 건물들을 모두 철거하고 쾌적한 길로 조성해야 한다.

 

그리고 공원에는 정조대왕의 효심을 알릴 수 있는 시설물이나 간단한 교육을 시킬 수 있는 공간도 마련해야 한다. 2일 돌아본 노송지대 입구 한편에는 축대 위에 쓰레기들이 너저분하게 깔려있다. 한편에는 중고차매장이 있어 문화재보호구역의 의미를 퇴색하게 만든다. 이러한 것이 우선 정리되어야 한다.

 

걸으면서 정조의 효심을 기억하고 우리 문화재의 중요성과 건강을 생각할 수 있는 노송지대 소나무길.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은 이곳을 문화재공원이나 소나무공원 등으로 지정하고 주변 정리를 먼저 해야 한다는 점이다. 의미 있는 문화재구역을 나 몰라라 한다면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이 소재하고 있는 수원시로서는 명성에 누가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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궐리사 은행나무가 주는 교훈

 

경기도 기념물 제147호인 오산 궐리사는 오산시 궐1147에 소재한 조선 후기의 사당이다. 궐리사는 공서린(孔瑞麟) 선생의 사당으로, 원래 조선 중종 때의 문신으로 경기도관찰사 등을 지낸 공서린 선생이 서재를 세우고 후학들에게 강의를 하였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공서린 선생은 당시 뜰 안 은행나무에 북을 달아놓고 문하 제자들에게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도록 깨우치며 교수하였는데, 그가 죽은 뒤 그 나무가 자연 고사하였다고 한다. 그 뒤 정조대왕이 화산에서 남쪽 멀리 바라보니 많은 새들이 슬피 울며 모여들므로, 괴이하게 여겨 그곳에 행차해 보니 죽었던 늙은 은행나무에 싹이 트고 있었다.

 

정조 16년인 1792년 이 곳에 사당을 짓게 하고, 이곳의 지명을 궐리로 고치게 하였다. 또한 공자의 영정을 봉안하게 하고 궐리사(闕里祠)’라는 사액을 내렸다. 궐리는 노나라의 곡부(曲阜)에 공자가 살던 곳을 본떠 지은 이름이다.

 

수세가 당당한 궐리사 은행나무

 

무덥던 날 찾아간 궐리사. 솟을삼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하늘 높게 솟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것을 볼 수있다. 보기에도 당당한 것이 나무의 생김새로 보아 수령이 꽤 되었을 것만 같다. 공서린 선생이 식재했다고 하는 이 은행나무는, 공서린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중종 36년인 1541년에 함께 고사했다고 한다.

 

은행나무를 심고, 이곳에 북을 매달아 놓고 제자들에게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는 공서린 선생. 그가 죽은 후 200여년이 지나 옛 은행나무 그루터기에서 새싹이 돋아나, 일 년에 수 길씩 자라났다는 것이다. 이미 500여 년 전에 심었던 은행나무가 죽고 살기를 반복한 것이다.

 

 

 

사람들을 일깨워주는 은행나무

 

날이 무덥다. 잠시 나무 옆에 마련한 의자에 걸터앉는다. 땀을 닦고 있으려니 어디선가 바람 한 점이 불어온다. 이런 바람 한 점도 고마운데, 은행나무 그늘이야 더욱 고맙지 아니한가? 잠시 은행나무의 푸른 잎들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고 만다. 은행나무를 보면서 인간이 참 간사하다는 것을 느낀다.

 

이 잠시의 더위를 참지 못해 나무그늘로 찾아들고, 그리고 바람 한 점과 그늘에게 다시 감사를 한다는 것이 참으로 표리부동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매사에 감사를 한 뒤에도 언젠가는 돌변하기도 한다. 그래서 은행나무보다 못한 인간들이 세상천지에 깔려 있는 모양이다.

 

요즈음 세 살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 서로 마주하고 웃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엔가 얼굴을 붉히고 으르렁댄다. 자신에게 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 가차 없이 내민 손도 거절해버린다. 이것이 요즈음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법이다. 주변에 들리는 이야기마다 한심한 사람들 이야기뿐이다.

 

 

 

 

하지만 궐리사 은행나무는 달랐다. 공사린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함께 고사했다. 말 못하는 한 그루 나무에 불과하지만, 선생에 대한 예의를 다한 것이다. 그리고 200년이 지난 후 다시 소생을 했다. 그 나무는 지금 사람들에게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다. 죽고 살기를 반복했지만 나무 본연의 책무를 다하고 있는 것이다.

 

궐리사 은행나무 옆 비문에 적혀있는 글을 읽으면서 괜히 낯이 뜨거워진다. 부끄러운 것이다. 나무보다 못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남을 폄훼하고 말을 만들기 전에, 먼저 궐리사 은행나무를 찾아보기를 권한다. 그곳에 가서 사람답게 사는 도리가 무엇인가를 먼저 깨달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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