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회관 앞 서호공원 자연학습장을 돌아보다

 

바람이 심하다. 거기다 미세먼지와 송화가루까지 심하게 날린다. 나들이를 하기에는 좋지 않은 날이다. 그래도 사무실에서 글만 쓴다는 것이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어 잠시 바람이라도 쏘일 겸 밖으로 나왔다. 이렇게 바람이 심하게 불고 미세먼지가 나쁨 수준일 때는, 숲이 좋다고 했으니 나무가 무성한 옛 농촌진흥청 자리를 찾았다.

 

팔달구 화서동 436-3에 소재한 농민회관 앞은 서호가 있고, 주변에 아름드리 가로수들이 있는 곳이다. 물과 숲, 거기다가 차를 한 잔 마실 수 있는 공간까지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으랴 싶다. 그동안 수원에 거주하면서 나름 좋다는 곳을 다 다녔지만 이곳은 딴 곳에 비해 볼 것이 많은 곳이다.

 

우선 옛 농촌진흥청 안쪽에 자리한 여기산은 선사유적지이다. 특히 여기산에는 화성 축성 당시 성돌을 뜨던 자리가 남아있고, 안으로 들어가면 토성의 흔적이 있는 곳이다. 거기다 서호는 낙조로 유명한 곳이다. 서호 산책로를 한 바퀴 돌아보는 것 민으로도 별천지란 느낌이 든다. 일몰시간에 찾아갔다면 절경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세먼지와 송화가루까지, 그래도 좋다

 

농민회관에 도착하니 주차장에 차들이 꽉 들이찼다. 6일 토요일 오후에 농민회관 웨딩홀에서 결혼을 하는 젊은 부부들이 많은 모양이다. 카페도 온통 사람들로 들이찼다. 이건 카페가 아니라 완전 시장바닥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공공장소에서 목소리를 왜 그렇게 높이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간단한 식사를 시켜놓고 주변을 둘러본다. 바람에 흙먼지와 함께 송화가루, 민들레 씨앗까지 함께 날려 검은 옷이 금방 하얗게 변해버린다. 하지만 이곳 숲을 걷기위해 찾아오지 않았든가? 길을 건너 서호 방향으로 발길을 옮긴다. 순간 이곳이 이렇게 아름다웠나? 하고 눈을 이심하지 않을 수 없다. 눈앞에 연분홍 영산홍 단지가 펼쳐진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 나뭇잎이 모두 한편으로 기울었는데, 그런 것보다는 눈앞에 펼쳐진 꽃밭의 장관 때문에 그런 모든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저 수원 곳곳을 그렇게 다녔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직도 이곳을 몰랐다는 것이 후회가 된다. 서호 위를 날고 있는 새들도 바람에 날개 짓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

 

그래도 좋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서호 주변에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행복하다. 서호공원에서는 이 먼지에도 무슨 행사를 하는 것인지 사람들이 모여 있다. 그곳으로 가다보니 서호공원 자연학습장이라 쓴 석물이 보인다. 그리고 그 뒤편으로는 텃밭들이 있다. 언제 이런 텃밭이 이곳에 생겼을까?

 

                        

 

살기좋은 수원, 아름다운 길이 많아 좋다

 

작은 텃밭에는 갖가지 야채들을 심었다. 대파, 마늘, 고추, 토마토, 참외, 쪽파 등. 정성들여 가꾼 텃밭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다. 한 편에 쉼터에 다리를 뻗고 앉아 서호를 바라다본다. 서호의 본래명칭은 측만제이다. 축만제는 조선 정조 23년인 1799년 농업용 저수지로 축조됐다. 당시에 만석거와 만년제, 축만제 세 곳에 저수지를 조성했는데, 그 중 서쪽에 있어서 서호라고 불렸다.

 

예전부터 서호는 낙조와 겨울철새 들이 찾아드는 곳으로 유명했으며, 잉어가 많이 잡히는 곳으로 명성을 얻었다. 아마 화성유수 박기수도 이곳 서호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넘어가는 해를 보면서 시 한 구절을 짓지는 않았을까? 그만큼 수원에는 아름다운 길과 명소가 즐비하다. 언제 찾아가도 나름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그런 수원이 있어 좋다. 오랜만에 찾아 온 서호. 그 주변에 늘어선 숲과 꽃길, 그리고 새들의 소리가 즐거운 곳. 서호가 있어 행복하다. 올해가 가기 전에 항미정에 올라 지는 해를 바라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미세먼지가 나쁨이라는 날 찾아간 서호 주변. 난 그곳에서 또 다른 아름다운 길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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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케라톱스 화성엔시스는 어떤 공룡인가?

 

화성시 송산면 고정리 일대에 소재한 천연기념물 제414화성 고정리 공룡알 화석산지를 처음 찾아갔던 것은 2004년으로 기억난다. 이곳은 공룡알 화석이 발견된 곳으로 주말이면 공룡알 화석을 보기 위해 어린이를 동반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이다. 9일 번잡한 때를 피해 고정리 화석산지를 찾아갔다.

 

넓은 공룡알 화석산지는 사람하나 찾을 수 없다. 공룡알 화석산지 입구에 마련한 방문자센터에도 근무자를 제외하면 관람자는 우리 일행뿐이다. 방문자센터도 4년 전 방문했을 때와는 많은 것이 변했다. 외관부터 새롭게 조형을 하고 화석산지는 철제문을 달아놓고 시간을 정해 사람들에게 개방을 한다는 안내표시를 걸어놓았다.

 

  

 

한반도 최초의 뿔공룡이 발견된 화석산지

 

화성 고정리는 예전에 바다였던 곳이다. 옛 지도를 보면 송산면 천등산까지는 육지였고 현재는 육지로 연결된 우음도와 닭섬 등은 섬이었던 곳이다. 이런 곳이 시화호 물막이 공사가 끝나고 난 뒤 공룡알 화석산지가 육지가 된 곳이다. 물막이 공사를 마치고 난 뒤 이곳에선 현재까지 공룡알 200여개와 둥지 30여개가 9개 지점에서 발견되었다.

 

고정리 공룡알 화석산지는 20003월 천연기념물 제414호로 지정되었다. 고정리의 공룡알화석 산출지는 중생대 백악기에 형성된 퇴적층(83008500만년 전으로 추정)으로 이전에는 섬이었던 곳에서 공룡알화석 및 알둥지가 발견된 것이다. 세계적으로 공룡알 화석이 발견된 곳은 대부분 중국과 몽고 지역이었으나 고정리처럼 많은 공룡알화석이 한꺼번에 발견된 것은 매우 드문 경우이다.

 

 

뿔공룡 코리아케라톱스 화성엔시스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보고된 뿔공룡이다. 2008330일 화성 전곡항에서 열렸던 제1회 세계요트대회를 준비하던 중 화성시 공무원인 김경하에 의해서 화석이 발견되었고 화성에서 발견된 한국 뿔공룡이란 뜻에서 코리아케라톱스 화성엔시스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코리아케라톱스 화성엔시스는 중생대 백악기인 약 11000년전에 한반도에 살았으며 전체길이는 1.7~2.3m 정도로 추정된다. 코리아케라톱스 화성엔시스는 이족보행에서 사족보행으로 진화과정을 거친 뿔공룡으로 꼬리뼈에 척주뼈보다 5배나 긴 신경배들기와 독특한 모양을 가진 복사뼈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뿔공룡의 넓적한 꼬리는 물속에서 헤엄을 치는데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찬바람을 맞으며 화석산지를 걷다

 

갑자기 날씨가 쌀쌀해진 주말이다. 방문자센터를 돌아보고 난 뒤 화석산지로 향했다. 벌써 10여 번 이상을 들러본 화석산지이다. 화성시는 화석산지를 찾아오는 관람객들을 위해 방문자센터에 간단한 소개책자를 마련해 관람자들을 돕고 있다. 너른 벌판에 갈색으로 물든 풀들이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잎을 한편으로 뉘이고 있다. 조형으로 만들어 놓은 공룡 한 마리가 찬바람에 더 웅크리고 있는 것만 같다.

 

화석산지 관람은 정해진 관람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곳은 아직도 더 많은 공룡알 화석이 발견될 가능성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관람로를 만들어 사람들이 쉽게 공룡알 화석을 만날 수 있도록 조성을 해놓았다. 3개구간으로 구분되어 있는 공룡알 화석산지 관람은 방문자센터 - 전망데크를 1구간으로, 전망데크 - 상한염 - 중한염 - 누드바위를 2구간으로, 누드바위 - 래식동굴 - 하한염 - 무명섬을 3구간으로 정해놓고 있다.

 

 

불어오는 바람을 막을 곳이 없는 공룡알 화석산지를 찾을 때는 찬바람을 막을 수 있는 두툼한 외투는 필히 갖추어야 한다. 옷깃 사이로 파고드는 바람으로 인해 걷기조차 힘든 날이다. 그래도 이왕 이곳을 찾았으니 예전과 얼마나 달라졌는지 궁금하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곳이기 때문에 화석산지 자체는 달라진 것이 없다. 다만 주변경관과 방문자센터가 예전보다 관람자를 위한 여러 가지 편의시설이 늘었을 뿐이다.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자료를 남기고 시간이 얼마간 지난 다음에 다시 찾아가는 것은 문화재보존에 필수과정이란 생각이다. 그렇게 비교함으로써 훼손이 된 곳은 없는지 문화재 보존에 문제는 없는지 등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남겨놓은 자료가 후일 정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기에 문화재답사란 걸을 수 있을 때까지는 계속해야 할 나의 일이라고 늘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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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산나무 인근에 당집 건축해 보존해야

 

오산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재인무대를 마치고 난 뒤 오산은 더 이상 정체성을 찾는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 정체성이란 행사를 위한 일회성 동선으로 창출되는 것이 아니다. 시민들이 스스로 노력해야하고 무엇인가 태동의 움직임이 보여야 한다. 쉬지 않고 이어나가는 끈질김만이 정체성을 찾는 길이다.

 

현재 부산동에는 주민들이 모여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던 당집이 있다. 당집 인근에는 당제에 사용하던 우물이 있어 이곳에서 물을 길어 제를 올렸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부산동 당집 인근에 아파트가 건설 중에 있고 앞으로도 더 많은 건물이 지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럴 경우 당집은 자연히 사라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주민들의 대다수가 이주하고 있다는 소식까지 들리고 있어 부산동 당제가 이어질 수 있을지 의문이다.

 

문제는 이 당집이 남아있기 때문에 부산동과 경기재인청을 연결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만일 이 당집이 사라지고 당제가 소실된다고 하면 경기재인청의 존재는 그야말로 전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당집은 어떻게 해서든지 지켜져야 한다. 당집을 지키는 일만이 전국의 모든 재인을 관장하던 오산의 정체성을 지켜내는 길이기 때문이다.

 

 

당산나무 사이에 당집 건축하고 재인청 복원 서둘러야

 

부산동에 소재하고 있는 왕버드나무 두 그루는 무속인들이 정월 등 기도를 드릴 때 찾아드는 신목(神木)이다. 이 부산동 도로 가운데 서 있는 왕버드나무는 부산동 마을 동산의 소나무 숲 등에 300년이 넘었다고 전해지는 도당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신 당가리와 연관이 있는 나무이기도 하다. 과거 부산동에 거주하던 화랭이 이용우 가문의 선대들이 주축이 되어 당굿을 열면 이 나무까지 내려와 돌돌이를 돌았다고 전한다.

 

한 마디로 이 왕버드나무는 단순한 나무가 아니라 도당신을 상징하는 신목이었다는 점이다. 지금도 정월이 되면 무속인들이 찾아와 나무에 정성을 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들은 왕버드나무를 할아버지나무 할머니나무라고 하여 나무에 오색천을 두르고 이곳에서 서낭제를 올리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수시로 이 나무를 찾아와 불을 밝히고 기원을 한다.

 

이 왕버드나무 두 그루는 지난해 오산시의회 김영희 의원이 왕버드나무의 생육상태의 정확한 판단을 위해 우리나라 최고의 나무박사인 경북대학교 박상진 교수를 개인적으로 특별히 초빙해 왕버드나무의 보존가치를 확인했다. 그리고 시 집행부 관계 공무원과 함께 현장에 나가 실태 점검을 실시하는 등 그동안 방치되어 왔던 왕버드나무 보호의 체계적 관리를 추진했다.

 

김영희 의원은 시 집행부 관련 부서(건설도로과/농식품위생과)와 연계하여 생육에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버드나무 주변 아스콘 제거와 도로선형 변경과 주변 휀스 설치공사를 2개월간의 걸쳐 실시하여 버드나무 생육을 위한 최적의 환경을 조성한 것이다. 당산나무인 이 왕버드나무를 당할아버지, 당할머니나무라 부르고 았는 것으로 보아 이 왕버드나무는 도당굿을 하던 부산동 산이들이 이곳까지 돌돌이를 돌고 당으로 올라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집을 지키는 일 오산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다

 

문제는 당집이 사라진다고 하면 결국 부산동의 근거가 없어지는 것이 되며 이 왕버드나무 역시 무속인들이 위하는 의미없는 나무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이다. 시에서는 현재 부산동 마을 뒤편 산중턱에 있는 당집을 이곳 왕버드나무 사이에 기와팔작집으로 조성하고 이곳에서 매년 중요무형문화재 경기도당굿 남부지부(지부장 승경숙)를 당집과 당산나무를 보호할 수 있는 단체로 고지를 하였으면 하는 생각이다.

 

그럴 경우 오산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길이 되는 것은 물론 300년 예인의 가문을 지켜 온 이용우 일가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통은 지켜져야 한다. 그리고 전통을 지키는 길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관련행정 기관과 오산시민 모두가 힘을 합해 지키려고 노력할 때야 비로소 오산이 전국 재인들을 총괄하던 위상을 다시 찾게되는 것이다. 오산의 뿌리를 지키는 일에 오산시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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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 이상 묵은 소나무와 석실 안 성황지신 민속적 가치 높아

 

흡사 벅수처럼 석주형 돌기둥 안면을 돌을 쪼아내듯 조각을 했다. 복판에는 흐릿하게 성황지신(城隍)이라고 음각을 해 놓았다. 네모난 돌에 벅수형태로 조형을 한 성황지신의 얼굴에는 흡사 면사포를 씌우듯 한지로 가려놓았다. 이 돌 성황을 석실 안에 모셔놓고 매년 정월 초정일(初丁日)에 마을주민들이 정성을 다해 음식을 차리고 마을의 안녕을 빌었다.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산학리. 마을회관 뒷산에는 수령 400년이 지났다는 커다란 소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이 마을에서는 매년 정월 초정일이 되면 음식을 마련해 이 나무에 정성으로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이 두 그루의 소나무가 바로 성황나무인 것이다. 그러던 것을 70여 년 전에 주민들이 석실을 마련하고 그 안에 석주로 된 성황신을 모셨다고 한다.

 

 

13일 오후, 고성군 현내면 산학리에 수백 년이 지난 석실이 있다는 제보를 받고 산학리로 향했다. 마침 그곳에 도공 김원주(, 54)가 작업을 하고 있어서 함께 동행하여 나지막한 신을 올랐다. 기온이 35도에 육박하는 무더운 날씨지만 사진으로 보내준 석실의 정확한 용도를 알아보기 위해서이다.

 

날이 워낙 덥다보니 사람을 만날 수가 없다. 마을회관 뒤편 소로를 이용해 산을 오르니 커다란 소나무 두 그루가 서 있고, 그 옆에 돌을 쌓아 만든 석실이 보인다. 얼핏 예전의 고분인 석실을 연상케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돌의 재질이 옛 것이 아니다. 석실 안으로 들어가니 석주에 성황지신의 안면을 새겨 놓았다.

 

이런 형태의 조각은 처음예요. 투박하긴 하지만 우리 정서를 그대로 갖고 있는 듯합니다. 정성을 드린 흔적도 넘어있고요

 

도공 김원주는 지리산 삼성궁에서 수년 째 돌 작업을 해왔기 때문에 석실 안에 놓인 석주형 성황지신을 보고 투박하지만 우리의 전통을 잘 지키고 있다고 한다. 그렇게 석실이 궁금해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마을 어르신 한분이 밭을 지나가다가 무엇을 하느냐고 묻는다.

 

 

70여 년 전에 석실을 조성했다는 증언

 

마을 어르신은 자신이 산학리 마을에서 가장 연세가 많다고 하신다. 올해 79세라는 것이다. 다행히 어르신은 이 성황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계셨다.

 

그 소나무는 400년이 지났다고 어른들이 말씀하셨어요, 매년 정월 초정일에 그 나무아래서 성황 제사를 모셨는데 내가 어릴 적 저 석실을 마련하고 그 안에 성황신을 모시는 작업을 한 것을 내가 본 것을 기억해요

 

마을어르신이 증언대로라면 이 석실을 조성한 것은 70년이 조금 지났다. 하지만 성황목인 소나무에서 성황제를 지낸 것은 이미 400년이 지났다는 것이다. 그렇게 긴 시간 이곳 산학리는 성황지신이 지켜온 마을이라는 것이다. 한 마을의 구심점인 공동체가 형성되어 온 이유는 바로 산학리 선황지신이라고 볼 수 있다.

 

 

단절된 위기에 있는 400년 전통의 성황제

 

우리 마을 건너편 산학산성 마루턱에 서 있는 소나무 아래도 성황이 있어요. 그곳도 이곳처럼 성황이 있는데 석굴은 없어졌죠. 그리고 이 산 너머에도 이목나무라는 부르는 성황나무가 있어요

 

마을 어르신이 증언해 준 이곳의 성황제는 온 주변에서 다 함께 치러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종 제대로 된 모습을 지키고 있는 것이 바로 산학리의 성황제 당산이다. 이런 정도의 역사를 지키고 있는 성황제 당산이라면 향토유적으로라도 지정하여 지켜가야 할 것이란 생각이다. 더욱 요즈음 들어 마을에서는 이 성황지신 터를 지켜갈 수 있을까를 걱정하고 있다.

 

마을어르신들이 말씀을 하시는데 이제 성황제를 모시는 것을 더 이상 계속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하시네요. 젊은이들이 어르신들 대까지 모시고 나면 더 이상 성황제를 모실 것을 강요하지 말라고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어르신들이 걱정을 하시는 것도 마을의 전통이 자꾸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운 모양입니다

 

 

 

마을의 한 주민이 전해 준 이야기에 찾아간 산학리 성황지신 터. 커다란 소나무 두 그루에서부터 전해진 성황제가 이미 400년을 넘었다. 현 시대에 그런 제가 무슨 필요 있느냐고 하지만 그 제로 인해 마을주민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공동체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시대가 바뀌고 사람들이 모두 나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에 팽배해 있을 때 유일하게 공동체를 버텨낼 수 있는 매개체가 바로 400년을 이어 온 성황제이다.

 

전통은 지켜지면서 세월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것이다. 산학리의 성황제는 그렇게 주민들을 하나로 결속시키는 역할을 하면서 오랜 세월을 지켜냈다. 고성군에서는 이 성황지신의 석실과 석주형 성황, 그리고 소나무 등을 좀 더 정밀하게 조사한 뒤 향토유적이라도 지정을 해 보존하는 것이 마땅하다. 한번 사라진 전통을 다시 되살린다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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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립장군의 한이 서렸다는 바위에 전하는 전설하나

 

곤지암(昆池岩)’은 광주시 곤지암읍 곤지암로 72 2필지에 소재한 경기도문화재자료 제63호로 지정되어 있는 바위 한 기를 말한다. 원래 이 바위 주변엔 연못이 있었다고 하며 그 연못도 이 바위가 생긴 내력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소하천과 연결되었었다는 이 바위는 현재 주변이 복개되어 학교 담장과 주변 주택가로 변하였다. 바위 위에는 수령 400년도 된향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어 신비함을 더해준다.

 

지난 2일 비가 온 뒤 습한 날. 무던히도 찌는 듯한 더위에 찾아간 광주시 곤지암읍. 도척면 추곡리 태화산에 소재한 백련암 부도를 돌아보고 찾아간 곳이 바로 곤지암이었다. 옛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곤지암은 광주시 실촌읍 곤지암리였는데 현재는 곤지암읍으로 바뀌었다. 옛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바위이기에 인근을 지날 때마다 한번 씩 들리고는 하는 곳이다. 전설만큼이나 기묘한 향나무의 안위가 궁금해서이기도 하다.

 

경기도는 이 바위를 문화재자료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곤지암의 주변은 보호철책을 둘러놓았고, 화강암의 큰 바위와 작은 바위 두 기가 조금 떨어져 있는 곤지암의 큰 바위는 높이 3.6m에 폭이 5.9m이고, 작은 바위는 높이 2m에 폭 4m 크기다. 큰 바위 중간에 뿌리를 내리고 자란 향나무가 이 바위가 예사롭지 않음을 알려주고 있다.

 

명장 신립과 임진왜란

 

곤지암은 조선 선조 때 원통하게 죽은 명장 신립(15461592)장군에 얽힌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신립은 여진족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운 명장으로 선조 즉위년인 1567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다. 선조 16년인 1583, 그는 두만강을 넘어온 여진족을 적은 수의 군사를 이끌고 나가 격퇴해 육진을 지킨 명장이다.

 

 

 

여진족의 장수 니탕개는 선조 16년인 15831월에 인근의 여진족을 모아 진장의 대우가 좋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경원부로 침입했다. 조정에서는 신립을 시켜 니탕개를 토벌할 것을 명했고, 신립은 기병 500명을 이끌고 첨사 신상절과 함께 토벌에 나서 적을 격파했다. 이 전투에서 니탕개가 이끄는 여진족 반란군의 수는 1만여 명이나 되었다.

 

선조 25년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일본의 20만 병력이 부산진에 도착했고 무방비였던 부산은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 초토화되었다. 조정에서는 이일을 순변사로 상주에 내려 보낸 뒤 여진족과의 실전 경험이 있는 신립을 삼도순변사에 임명했다. 왕은 신립에게 직접 보검을 하사한 뒤 충주로 파견했다. 충주는 한양으로 향하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중요한 요충지였다.

 

 

 

<새벽에 적병이 길을 나누어 대진은 곧바로 충주성으로 들어가고, 좌군은 달천 강변을 따라 내려오고, 우군은 산을 따라 동쪽으로 가서 상류를 따라 강을 건넜다. 적의 병기가 햇빛에 번쩍이고 포성이 천지를 진동시키니 이를 본 신립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곧장 말을 달려 주성으로 나아가니 군사들이 대열을 이루지 못하고 점점 흩어져버렸다. 성중의 적이 나각 소리를 세 번 발하자 적이 일시에 나와서 공격하니 신립의 군사가 크게 패했으며 적이 사면으로 포위하므로 신립이 말을 돌려 진을 친 곳으로 달려갔는데 사람들이 다투어 물에 빠져 흘러가는 시체가 강을 덮을 정도였다. - 선조실록 권 26>

 

왜적의 침략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선조로부터 왜군을 물리치고 오라는 명을 받고 김여물과 함께 싸움터로 향한 신립은 충주 달천평야에서 고니시 유키나가가 지휘하는 수만 명의 왜군과 싸우다 참패를 당한 것으로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흔히 탄금대 전투라고 알려진 이 전투는 달천평야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신립의 한이 서린 곤지암

 

곤지암에 전하는 전설은 달천평야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병사들이 물에서 신립 장군의 시신을 건졌을 때 장군은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고 한다. 얼마나 원통하고 분했으면 눈을 뜨고 죽은 시신이 당장이라도 호령을 할 것 같았다는 것이다. 병사들이 장군의 시체를 이곳 광주로 옮겨 장사를 지냈는데 그 후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신립장군의 묘는 경기도기념물 제95호로 지정이 되었는데 곤지암에서 멀지 않은 곤지암읍 곤지암리 산1-1에 소재한다. 신립장군의 묘가 있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고양이처럼 생긴 바위가 하나 있는데 누구든지 이 앞을 말을 타고 지나려고 하면 말발굽이 땅에 붙어 움직이지 않으므로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했다고 한다.

 

 

 

그런 일이 계속되자 한 장수가 이 앞을 지나다가 왜 오가는 행인을 괴롭히느냐고 소리를 쳐 핀잔을 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갑자기 뇌성벽력이 치면서 벼락이 때려 바위를 내리쳐서 바위의 윗부분이 땅에 떨어지고 두 쪽으로 갈라지면서 그 옆에 큰 연못이 생겼다고 한다. 그 후로는 괴이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고 사람들은 이 바위를 '곤지암'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충주 달천 전투에서 패해 죽은 신립을 광주 곤지암에 묘를 쓰게 되었는데, 충주에는 신립이 탄금대에서 패하게 된 이유가 한 처녀의 원혼 때문이라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신립이 어느 민가에 묵었다가 우연한 기회에 그 집 처녀를 도와준 일이 있었다. 그러자 그 처녀가 신립에게 자신을 배필로 삼아 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신립이 이를 거절했다. 총혼을 거절당한 처녀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자살을 해서 귀신이 되었는데, 그 처녀 귀신이 신립의 꿈에 나타나 탄금대로 가라고 했다>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어 충장(忠將)’이라는 시호까지 하사받은 신립. 탄금대전설이나 곤지암전설이나 어찌 보면 당대를 풍미하던 한 장군의 죽음이 안타까워 만들어진 이야기들은 아니었을까? 언젠가는 한 낮 뜨거운 뙤약볕 아래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400여년을 지키고 있는 저 향나무에 대한 전설이 생겨나지는 않을까? 곤지암을 떠나면서 괜한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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