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철이 되면 무엇보다 바다로 피서를 떠나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한다. 그 중에도 물이 깨끗하고 시원한 동해안이 가장 사람들이 선호하는 곳이며,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에 소재한 최북단 화진포 해수욕장을 시작으로 동해안을 끼고 가는 곳마다 해수욕장이다. 여름철이 되면 방을 구하기조차 힘들다고 하는 동해안 고성의 해수욕장은 사람들로 넘쳐나야 하지만 워낙 뜨거운 날씨 때문인지 정작 해수욕장을 찾는 피서객들은 예전만 못하다고 한다.

 

화진포 해수욕장은 수원을 비롯한 경기도를 출발해 영동고속도로와 국도를 이용하거나, 2영동고속도로를 이용해 고속도로와 국도 등, 속초를 경유해 고성으로 들어갈 수 있다. 수원에서 어느 도로를 이용하던 간에 3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물론 한 여름 피서철에는 그보다 시간이 더 걸린다는 것은 감안해야 한다.

 

나는 여름철 고성을 갈 때는 주로 국도를 이용하는 편이다. 여주에서 양평을 거쳐 강원도로 들어서 홍천, 인제, 원통, 진부령을 넘는다. 찾아가는 길에 절경을 만날 수도 있고 여기저기 볼 것이 많아 구경도 하고 중간에 먹을거리도 찾아보며 천천히 간다. 피서라는 것이 더위를 피하는 것인데 굳이 마음 급하게 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화진포의 성 등 볼거리 많아

 

화진포를 찾아가면 주차장 안쪽 동해를 바라보는 돌로 축조한 건물이 보인다. 바로 김일성별장이라고 하는 화진포의 성이다. 언제나 사람들로 붐비는 이곳은 김일성 일가가 이곳으로 피서를 다녀갔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지만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인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원산에 있는 외국인 휴양촌을 화진포에 강제 이주시킨 것이다. 화진포의 성은 독일건축가 H. Weber1938년에 건립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했던 곳이다.

 

화진포 해수욕장 한편소나무 숲 속에 자리하고 있는 화진포의 성은 1948년 이후 북한이 귀빈휴양소로 사용하였고, 당시 김일성과 그의 처 김정숙, 아들 김정일과 딸 김경희 등이 묵고 갔다고 하여 김일성 별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 건물은 애초 독일의 선교사 셔우드 홀 부부에 의해 지어진 건물로 5,25 한국전쟁 때 훼손이 된 것을 20053월 옛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강원도 고성 화진포는 일 년이면 적어도 5~6번 정도는 찾아가는 곳이다. 화진포 인근에 볼일이 생기기 때문에 찾아가면 일부러 화진포를 한 바퀴 돌아오는 것도 이곳의 경치도 일품이지만 주차장 주변으로 펼쳐진 노송 숲과 화진포의 성 등 만나기 힘든 경관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화진포 해수욕장 인근에는 이승만의 별장과 이기붕 별장도 자리하고 있어 이곳의 경관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알 수 있다.

 

 

금구도 광개토태왕의 무덤일까?

 

화진포 해수욕장 앞쪽인 초도리 앞 500m 정도 해상에 1,000여 평 면적을 가진 금구도라는 섬이 있다. 이 섬은 금구농파라고 하여 금구도의 파도치는 모습이 아름다워 화진포팔경 중 한 곳에 해당한다. 고구려의 제19대 태왕인 광개토태왕은 이름이 담덕이며 374년에 탄생했다. 386년에 고구려의 태자로 책봉된 후, 391년 고구려 제19대 태왕에 등극했다. 광개토태왕은 고구려 최초로 연호를 제정해 사용하였으며 즉위년에 관미성을 비롯한 백제의 10개의 성을 빼앗았다. 392년에는 황해도지역에 있는 백제 북쪽 10개 성을 함락시켰으며, 고구려 북쪽 거란을 정복하였다.

 

396년에는 수륙 양쪽으로 군사를 동원하여, 백제의 성 58개를 함락시키고 한강유역을 차지했다. 400년에는 백제의 요구를 받아들여 신라를 침략한 왜구를 격퇴하였으며, 404년에는 남쪽국경에 침입한 백제와 왜의 연합군을 격퇴했다. 407년에 후연이 망하고 북연이 등장하자, 북연을 고구려에 굴복시켰다. 그 해 백제를 다시 공격하여 6개의 성을 함락시켰다. 410년에는 동부여와 연해주를 공격하여 64개의 성을 획득하였다. 4123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고성문화원 향토사학자 김광섭에 의하면 고구려 연대기에 광개토태왕 3년인 3048월 경 이곳 거북섬이라는 금구도에 왕릉 축조를 시작했으며, 188월에는 화진포의 수릉 축조현장을 왕이 직접 방문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광개토태왕이 서거 후 2년 뒤인 414(장수왕 2) 929일 광개토태왕의 시신을 화진포 앞 거북섬인 금구도에 안장했다고 한다.

 

문자명왕(고구려 제21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491~519) 2년에는 이곳에서 광개토태왕의 망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섬에는 와편과 주초석 등이 남아있어, 이곳이 광개토태왕의 망제를 지낸 사당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이곳이 광개토태왕의 무덤으로 추정한다.

 

화진포 앞 동해에 있는 금구도는 섬 위에 대나무가 가을이 되면 금빛을 띤다고 하여 금구도라고 한다. 금구도는 여러 문헌 기록상으로 볼 때,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 초기까지는 '초도(草島)‘라는 지명으로 불린 것으로 보인다. 초도라는 지명이 일제강점기 중 후반 무렵에 이르러 지금의 '금구도(金龜島)'라는 지명으로 변경되어 오늘날까지 사용하고 있다.

 

 

화진포 팔경을 느껴볼 수 있는 곳

 

1997년 고성군문화원에서 발행한 자료에 의하면 화진포 팔경 제1경은 원당리 마을 앞에 호수에 비친 반달 그림자와 누런 가을곡식, 단풍나무가 어우러진 풍광이 아름다워 '월안풍림(月安楓林)'이라 했으며, 2경은 화포리 찻골에서 저녁밥을 짓는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모습이 한 폭 그림 같다하여 '차동취연(次洞炊煙)'이라 했다.

 

3경은 호수 주변 모래밭에 피는 빨간색 해당화가 봄에 피는 모습이 영롱하여 '평사해당(平沙海棠)', 4경은 호수동편에 있는 장평부근에 찾아오는 많은 기러기의 울음소리가 청명하여 '장평낙안(長坪落雁)', 5경은 화진포 앞바다에 떠있는 금구도(金龜島)의 모습이 한가로워 '금구농파(金龜弄波)', 6경은 화진포 호수의 물이 바다로 빠지면서 바닷물과 부딪치며 물길이 솟아오르는 모습이 마치 용()이 물을 차는 듯하여 '구용치수(龜龍治水)'로 정했다.

 

7경은 풍암별장에서 보이는 돛단배가 한가로이 노니는 모습이 정겨워 '풍암귀범(楓岩歸帆)'이라 했으며, 8경은 모화정리(茅花亭里:지금의 죽정1)의 호수변의 모래밭에 아름다운 정자가 있어 '모화정각(茅花亭閣)'이라 칭하는데 조선시대의 풍류시인인 김삿갓이 화진포에 머무르는 동안 이를 읊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곳 금구도는 신라시대 수군기지가 있었단 곳으로 밝혀졌다.

 

 

시인묵객이 사랑한 곳, 화진포

 

만경창파 맑은 호수 그 가운데 자리하고 봄바람에 잔물결 출렁이네.

살구꽃 물가를 뒤덮었고 버들은 휘늘어졌다네.

비구름 걷히고 하늘이 맑아지니, 붉은 석양 출렁이며 햇살을 쏟아내네.

 

위 시를 지은 채팽윤(1669(현종 10)1731(영조 7))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평강이며 자는 중기, 호는 희암, 은와이다. 현감 시상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신동이란 소리를 들었다. 특히 시문과 글씨에 뛰어나 해남의 두륜산 대화사중창비와 대흥사사적비의 비문을 찬하고 썼다. 저서로는 <희암집> 29권이 있으며, <소대풍요 昭代風謠>를 편집하였다.

 

채팽윤이 3월 어느 봄날에 화진포를 찾아 읊은 시이다. 화진포는 동해안 일대에서 가장 큰 석호로 많은 이름을 갖고 있다. 고려 말의 문집에서는 열산호(列山湖)’라고 하였으며,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열산호(烈山湖)부터 화진포(花津浦), 화진호(花津湖),화진포(和眞浦), 화진포(華津浦), 포진호(泡津湖) 등의 이름이 전하고 있다.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인 최유해의 영동산수기(嶺東山水記)에서도 간성에는 영랑(永郞)이라고 하는 호수와, 화진(花津)이라고 부르는 두 호수가 있다고 한다. 모두 다 거울처럼 맑은 호수인데 영랑은 기이한 바위들이 있고, 화진은 기이한 나무들이 많아 두 곳 다 빼어나다고 할 만한 경개들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사랑한 곳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화진포. 이곳 해수욕장에 널린 백사장을 밟아보면 밀려드는 파도로 인해 폭염의 햇볕과는 달리 동해바다의 시원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지금이야 오고가는 길이 조금 버겁기는 하지만, 이 여름 화진포를 찾아가면 아름다운 경관과 함께 시원한 동해의 너른 바다를 만날 수 있다.

 

지역주민들 매년 단오 날 나무인근서 성황제 등 지내는 신목(神木)

 

수원시에는 모두 24주의 보호수가 있다. 그 중 영통구 단오어린이공원 안에 서 있던 수령 530년 된 느티나무가 26일 강우와 강풍을 이기지 못하고 가지가 찢겨지면서 쓰러졌다. 영통구 느티나무는 26일 오후 3시께 내내 불어온 비바람을 버텨내지 못하고 나무 밑동 부분부터 찢기듯 부러졌다.

 

나무 높이 3m 부분에 자리한 큰 가지 4개가 원줄기 내부 동공(洞空)으로 인해 힘을 받지 못하고 바람에 한꺼번에 무너져 내린 것으로 보인다. 사고 직후 현장을 찾은 염태영 수원시장은 “500년 넘게 우리 시와 함께해온 느티나무가 한순간에 쓰러져버린 처참한 모습에 비통함을 금할 수 없다면서 불과 열흘 전 영통청명단오제에서 본 모습이 마지막이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며 안타까워했다.

 

염태영 시장은 이어 전문가들과 함께 복원 가능 여부를 확인하고, 보존 방안을 강구하라영통청명단오제 위원 등 지역 주민 의견을 수렴해 사후 수습방안을 마련하고, 안전에 문제가 없도록 조치하라고 주문했다.

 

 

수원시는 사고 직후 지역 주민과 함께 느티나무를 위로하는 제()를 올리고, 주민 안전을 위해 부러진 가지 등 잔해 수거에 나섰다. 밑동의 부러진 날카로운 부분도 당일 내 다듬어 안전에 문제가 없도록 계획이다. 또한 수원시는 쓰러진 느티나무 밑동은 보존할 계획이다. 밑동 주변에 움트고 있는 맹아(萌芽)를 활용하는 방안과 후계목을 육성하는 방안 등을 포함해 느티나무 복원 대책을 준비하고 있다. 나무병원 전문가 자문과 주민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하기로 했다.

 

또 시에 있는 나머지 보호수 23주에 대해서도 유사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전문가 현장 점검을 진행하고, 안전대책을 마련할 계획이다. 수령(樹齡)530년 이상인 영통구 느티나무는 198210월 보호수로 지정됐다. 나무 높이가 33.4m, 흉고(胸高)둘레는 4.8m에 이른다. 이 느티나무는 1790년 수원화성을 축조할 때 나뭇가지를 잘라 서까래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또 나라에 큰 어려움이 닥칠 무렵 나무가 구렁이 울음소리를 냈다는 전설이 있다.

 

영통동 주민들은 매년 단오에 나무 주변에서 영통청명단오제를 열고 있다. 축제는 청명산 약수터에서 지내는 산신제로 시작돼 느티나무 앞 당산제로 이어진다. 영통구 느티나무는 20175대한민국 보호수 100()’에 선정되기도 했다.

 

 

음력 단오는 설날과 추석, 한식과 함께 우리나라 4대 명절 중 한 날이다. 단오는 천중절(天中節), 중오절(重五節), 단양(端陽)이라고도 하는데 이 날은 양수가 겹치는 날로 가장 양의 기운이 강한 날이라고 한다. 단오를 수릿날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수리란 수레의 바퀴를 뜻하는 것으로 농경사회인 우리나라에서는 수레의 중요성 때문에 붙여진 명칭으로 추정한다.

 

경도잡지(京都雜誌)’에는 단오를 술의일(戌衣日)’이라고도 불렀는데 술의는 우리 발음으로 수레의 뜻이고, 이날 속가에서는 쑥잎을 찧어서 팥가루를 넣고 푸른빛이 돌게하여 수레바퀴 모양으로 둥글게 떡을 만들어 먹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도 이와 같은 내용이 전한다.

 

단오가 되면 마을주민들이 이곳에 모여 정성으로 각종 제수를 마련해 제를 올렸다. 요즈음이야 청명단오제라는 명칭으로 지역 축제화 되었지만 우리나라의 거목에 지내는 목신제나 거리제, 성황제 등은 모두 마을의 안녕과 가내 안과태평을 기원하던 의식이었다. 영통 느티나무에서 지내던 청명단오제 역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던 의식이다.

 

 

요즈음처럼 일기가 불순하고 강한 비바람이 불어 닥치면 거목(巨木)들은 언제 어떻게 화를 당할지 모른다. 사전에 방비를 한다고 해도 가지에 철주로 버팀기둥을 만들어 놓는 것이 고작이다. 하지만 영통 느티나무는 지난 15일과 16일 이곳에서 단오청명제를 지낼 때도 푸름을 잃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첫 장마에 화를 당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수원시는 영통 느티나무 밑동에 자라고 있는 맹아를 이용한 복원계획을 세우겠다고 했다.

 

령 천년 반룡송의 위엄과 매애보살의 자비를 만나다

 

그동안 한참이니 잊고 있었던 문화재답사가 나에게 얼마나 큰 즐거움을 주는 일인지 모처람 깨닫는 시간이었다. 지난해 봄까지 그래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문화재답사를 했지만 근 1년 여 동안 문화재를 찾아 길을 나서지 못했다. 328일 이천시 백사면 도립리 산수유마을에 산수유가 피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몇 명이 함께 길을 나섰다.

 

도립리는 46일부터 산수유축제를 열지만 벌써부터 사람들이 찾아와 사진을 찍고 있다. 남들보다 먼저 산수유 소식을 전하고 싶은 사람들인 듯하다. 산수유마을을 돌아보고 이천시 백사면 도립리 201-11에 소재한 천연기념물 제381호 반룡송을 찾아갔다. 신라 말 도선이 심었다고 전하는 나무인 반룡송은 이곳을 지날 때마다 찾아보는 나무지만 올해 나무는 그동안 보던 때와는 다르다. 생육이 실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벌써 반룡송을 둘러보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반룡송은 신라 말기의 승려이며 풍수설의 대가인 도선이 심었다고 전하는 나무이다.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15세에 출가하여 월유산 화엄사에서 승려가 되었다. 국사의 속성은 금씨이며 통일 신라 시대 김천 지역의 청암사를 창건한 승려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반룡송을 도선국사가 함흥, 서울, 강원도, 계룡산 등에서 장차 큰 인물이 태어날 것을 예언하면서 소나무를 심었는데 그 중 한 그루라고 한다. 그런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이미 이 소나무의 수령은 1,100년이 지났다는 것을 뜻한다. 반룡송은 용이 승천하는 것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소나무의 껍질이 마치 용비늘 같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도 한다.

 

 

만년을 산다는 뜻으로 만년송(萬年松)’이라고도 불러

 

천연기념물인 이 나무를 반룡송이라는 부르는 이유는, 하늘에 오르기 전에 땅에 서리고 있는 용과 같다는 뜻이라고 한다. 또는 일 만년 이상 살아갈 용송(龍松)’이라 하여 만년송(萬年松)’이라고도 부른다. 몇 번이고 이곳을 찾아 반룡송을 보았지만 올해처럼 솔잎이 푸른 색을 띠고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런 반룡송을 보면서 우리나라에 좋은 일이 생기려나 보다고 생각한다. 수령이 오래된 나무들은 대개 나무에 얽힌 설화가 전하고 있는데 반룡송 또한 구전에 의하면 껍질을 벗긴 사람이 병을 얻어 죽었다거나, 반룡송 밑에 떨어진 솔잎을 긁어다가 땠는데 온몸에 두드러기가 돋았다는 이야기 등이 전한다. 그렇기에 아무도 반룡송에 해를 가하거나 함부로 손을 대지 않는다.

 

 

반룡송의 솔잎 색이 푸르다는 것은 그만큼 좋은 일이 있을 것이란 것을 뜻한다. 함께 답사에 동행한 사람이 묻는다.

선생님은 왜 같은 문화재를 반복해서 답사하세요?”

문화제는 늘 관심을 갖고 보아야 해요. 계절별로 다르고 주변 환경의 변화에 따라서도 달라지니까요

그렇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인가요?”, 신경을 쓰면 쓸수록 문화재에 대한 마음이 깊어지니까요

 

30년 세월 문화재답사를 하고 다니면서도 늘 안타까운 마음을 가져야 했다. 지난번에 멀쩡하던 문화재가 길지 않은 시간 돌아보지 않아 훼손된 모습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화재는 지나칠 때마다 쉬지 않고 찾아보고 살펴보아야 한다. 그 길만이 우리 문화재를 온전히 지킬 방법이기 때문이다.

 

 

태평흥국명마애보살좌상을 다시 만나다

 

반룡송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태평흥국명마애보살좌상. 마애보살의 뒷면에 음각으로 '太平興國 六年 辛巳 二月 十三日(고려 경종 6980)'이라고 명문이 음각되어 있어서 그 조성연대가 확실한 경우이다 조성년대를 확실하게 기록해놓아 명마애보상좌상이라 이름을 붙였다. 이천시 마장면 서이천로 577-5 (장암리)에 소재한 고려 때 마애불인 보물 제982호인 이 마애불은 큰 길에서 안으로 들어가 논길 한 옆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쪽 논을 마을 사람들은 넘어새말들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마애불이 조각되어 있는 큰 바위를 미륵바우라 부른다,

 

마애불은 바위의 한 면을 음각으로 깎아내 부조로 조성하였다. 장암리 마애불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다. 가운데는 화불을 새겼고 오른손에는 연꽃을 들고 있다. 이런 형태로 보면 관음보살이다. 마애보상좌상은 인근의 누군가 관심을 갖고 돌보고 있는 듯하다. 갈 때마다 주변정리가 잘 돼있다. 이런 점으로 보면 문화재담당부서나 관리청보다 오히려 지역에서 관심을 갖고 돌보는 사람들이 우리 문화재 보존에 대해 더 공이 크다고 할 것이다.

 

 

화강암의 재질에 조형된 이 마애불은 도드람산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보물 제982호 마애보살좌상은 이 바위에 옅은 부조로 새긴 3.2m의 보살좌상이다. 동행한 일행들에게 마애보살좌상에 대한 설명을 해주면서도 더 많은 것을 알려줄 수 없음에 마음 한편이 아쉽다. 많은 것을 자세히 설명하려면 더 많은 공부를 해야 하는데 말이다. 봄날 산수유 꽃을 보기 위해 떠난 길이 답사가 되었지만 예전처럼 혼자가 아닌 일행이 함께였다는 점에 마음이 들뜬다. 앞으로 더 많은 문화재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 대문이다.

 

최북단 고성군 현내면 ‘화진포의 성’ 방문

 

정말 모처럼 꿈같은 휴가를 맞이했다. 단 며칠이지만 처음에는 어디 제주도라도 다녀올 생각이었지만 무더위가 계속되자 장소를 바꿔 1박 2일로 다녀올 수 있는 강원도로 향했다. 우선은 그곳에 꽃 필요한 볼일이 있기 때문에 겸사겸사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화진포의 성을 찾아가기로 했다.

 

화진포의 성은 ‘김일성 별장’으로 유명하다. 잠시 김일성 일가가 이곳으로 피서를 다녀갔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지만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인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원산에 있는 외국인 휴양촌을 화진포에 강제 이주시켰다. 화진포의 성은 독일건축가 H. Weber가 1938년에 건립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하였던 곳이다.

 

 

화진포 해수욕장 한편소나무 숲 속에 자리하고 있는 화진포의 성은 1948년 이후 북한이 귀빈휴양소로 사용하였고 당시 김일성과 그의 처 김정숙, 아들 김정일과 딸 김경희 등이 묵고 갔다고 하여 ‘김일성 별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 건물은 애초 독일의 선교사 셔우드 홀 부부에 의해 지어진 건물로 5,25 한국전쟁 때 훼손이 된 것을 2005년 3월 옛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화진포의 성을 찾아간 것은 13일이다. 해수욕장은 징검다리 연휴로 해서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지만 정작 바다에는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고 금강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하천에 모여 더위를 피하고 있다. 커다란 파도가 넘실대면서 해안가로 밀려드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이 들 정도이다.

 

 

금구도 광개토대왕의 무덤일까?

 

화진포 해수욕징 앞쪽 동해바다를 보면 500m 정도 앞 해상에 1,000여평 면적을 가진 금구도라는 섬이 있다. 이 섬은 ‘금구능파’라고 하여 금구도의 파도치는 모습이 아름다워 고성팔경에 해당한다. 고구려의 19대 태왕인 광개토대왕은 이름이 담덕이며 374년에 탄생했다. 386년에 고구려의 태자로 책봉된 후, 391년 고구려 제19대 태왕에 등극했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최초로 연호를 제정하여 사용하였으며 재임 당시 수많은 적을 물리치고 성을 함락시켰다.

 

고성문화원 향토사학자 긴광섭에 의하면 고구려 연대기에 광개토왕 3년인 304년 8월 경 거북섬에 왕릉 축조를 시작했으며 18년 8월에는 화진포의 수릉 축조현장을 왕이 직접 방문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광개토왕이 서거 후 2년 뒤인 414년(장수왕 2년) 9월 29일 광개토왕의 시신을 화진포 앞 거북섬에 안장했다고 한다.

 

문자명왕(고구려 제21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491~519) 2년에는 이곳에서 광개토왕의 망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섬에는 와편과 주초석 등이 남아있어, 이곳이 광개토왕의 망제를 지낸 사당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이곳이 광개토왕의 무덤으로 추정한다.

 

파도가 치는 날 찾아간 김일성 별장

 

금구도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소나무숲을 걸어 화진포의 성이라는 김일성 별장으로 향했다. 먼 길을 달려 예까지 왔는데 정작 바닷물에 발로 담그지 못하고 돌아서야만 했다. 휴일을 맞아 마지막 피서를 즐기는 많은 사람들이 김일성 별장으로 몰려들어 북적인다. 맨 위에서 내려다보는 화진포는 가히 절경이다.

 

아름다운 경치를 좋아하는 것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원하고 있다. 그래서인가 이곳 화진포에는 이승만 정 대통령의 별장과 이기붕의 별장도 자리하고 있다. 그곳에도 소나무숲이 우거져있지만 김일성 별장만큼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지는 않는다. 경치가 떨어지기 때문인 듯하다.

 

모처럼 맞은 휴가를 이용해 찾아 온 고성군 화진포. 그곳에서 올 여름 바닷바람으로 맞으며 피서를 즐긴다. 그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인지. 앞으로 남은 3일간을 또 어디를 향해 길을 나서야할지 깊은 생각에 빠진다.

 

고려의 왕족이 살던 곳이라는 옹진군 영흥도를 가다

 

인천광역시 옹진군 영흥면은 섬이다. 이 섬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시대부터라고 한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에 속하였으나 고구려와 신라가 한강유역을 장악하는데 따라 여러 나라에 속하였다. 고려 현종9년인 1018년에는 수주(수원)의 속군이 되었다가 인주(인천)로 편입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남양도호부에 속하였으며 1914년에 부천군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지금의 옹진군에 편입되었다. 1995년 옹진군이 인천광역시로 통합됨에 따라 인천으로 편입되었다. 영흥도의 명칭은 고려가 망하자 고려 왕족의 후예인 왕씨가 영흥도에 피신 정착해 살면서 고려가 다시 부흥할 것을 신령께 기원하기 위해 국사봉에 올라 나라를 생각했다고 해서 영흥도(靈興島)’라 불리게 되었다고 전한다.

 

영흥도가 아름다운 관광지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은 영흥대교 개통 후부터이다. 선재도와 함께 뭍과 이어진 영흥도는 인천 앞바다에서 백령도 다음으로 큰 섬이다. 다리가 놓이기 전까지는 뱃길로 1시간이나 떨어진 외로운 섬이었던 영흥도. 영흥대교가 개통이 되기 전에는 인천 연안부두나 인근 선재도에서 배를 타고 이 섬을 드나들었다.

 

 

십리포 해수욕장을 찾아가다

 

영흥도는 섬 전체 둘레가 15km 남짓해 자동차로 30분 정도면 둘러볼 수 있다. 10일 간간히 비가 뿌린다. 메주 목요일이면 인근 문화재 등을 답사하는 것이 한 주간 중 유일하게 쉬는 날이다. 아침 일찍 영흥도로 향했다. 간간이 비가 뿌리지만 마침 날도 선선하고 답사를 하기 딱 좋은 날씨이다.

 

영흥도를 찾아간 것은 십리포 해수욕장에 방풍목으로 심었다는 소사나무를 보기 위함이다. 그동안 영흥도를 몇 번인가 찾아갔지만 여름철에는 한 번도 찾아가지 못했기 때문에 소사아무의 상태도 궁금하고 더구나 막바지 더위가 한물 가시는 계절에 해수욕장 분위기라도 느껴보고 싶어서이다.

 

영흥도는 인신 대부도에서 연육교로 선재도를 가쳐 들어가지만 경기도가 아닌 인천광역시 옹진군 영흥면에 속한다. 가는 길은 대부도를 거쳐야하는데도 불구하고 인천광역시라는 것이 선뜻 이해가 가질 않지만 우리나라 행정구역의 모순이 어디 한두 가지던가? 그저 가는 길은 경기도를 통해야하지만 행정구역상 인천광역시하고 하니 괜히 멀게 느껴지지만 그러려니 해야지.

 

소사나무에 빠지다

 

소사나무는 중부이남 해안과 섬 지방에서 자란다. 나무는 다 자라도 수고 15~20m에 지름이 한두 뼘 정도가 고작이다. 소사나무의 매력은 똑바로 선 나무가 없다는 점이다. 구불구불 비틀어지고 군데군데 소금덩어리가 매달린 것 같은 옹이가 달려있다. 그래서 이 나무가 더 매력에 있는지도 모른다.

 

소사나무는 소금기에 강해 줄기가 잘려져도 새싹이 잘 나오는 등 척박한 조건에 잘 적응하는 나무로 유명하다. 하기에 소사나무는 바닷가 방풍목으로 식재한다. 소사나무는 빨리 자라지 않고 생명력이 강해 소금기가 많은 바닷가 등 척박한 곳에서도 잘 자란다. 영흥도 소사나무숲은 350그루 정도가 자라고 있으며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으로 19971230일 지정되었다.

 

이곳 영흥도 소사나무숲의 나무들은 수령이 100~150년 정도 되었으며 영흥면 내리 신91-4에 소재한다. 이곳의 소사나무 군락지에는 수고 20~30m 정도에 나무둘레 0,7~1.5m 정도이다. 피서철이라 그런지 소사나무 숲에는 피서객들이 천막을 치고 여기저기 더위를 피하고 있다.

 

 

숲으로 들어가니 시원하다. 소사나무숲은 여름에는 에어컨처럼 시원하고 겨울이 되면 따듯하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사나무가 자라고 있는 이곳 영흥도 십리포 해수욕장을 찾아온다. 예전과 달리 요즈음은 소사나무숲 앞에 주차장이 마련되고 카페며 각종 음식점들이 즐비하게 들어섰다.

 

십리포 해수욕장으로 밀물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소사나무숲에서 더위를 피하고 있던 사람들이 앞 다투어 바닷가로 달려간다. 물이 빠지면 갯벌에 나가 각종 조개며 낙지 등을 잡고 물이 들어오면 수영을 할 수 있는 곳. 이곳 소사나무숲이 있는 십리포 해수욕장을 사람들이 선호하는 이유이다. 조금의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면 물에 발이라도 담그고 싶었지만 소사나무를 본 것으로 만족하고 발길을 돌린다. 내년에는 여름에 꼭 이곳을 다시 찾아보겠다고 다짐을 하면서 말이다.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