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 받은 지인의 도움을 그 자손에게 갚았다

 

마애불이란 바위나 암벽 등에 새긴 불상을 말한다. 30여 년 동안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만난 수많은 마애불들. 언젠가는 마애불에 관한 작은 책자를 하나 내야겠다는 생각으로 계절을 구분하지 않고 마애불이 있다고 하면 찾아다녔다. 마애불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험한 길을 걸어야 하기도 하고 복중 더위에 비지땀을 흘리며 산길을 기어오르기도 했다. 많은 문화재 중에 마애불을 만나러 가는 답사는 어렵고 고통스런 길이었다.

 

그렇게 마애불을 찾아다니면서 감동을 받은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도대체 장인은 왜 이런 험산준령에 마애불을 조성한 것인지? 지금처럼 장비도 발달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 높은 암벽을 타고 내려와 저렇게 바위에 그 거대한 마애불을 조각한 것이지? 마애불을 만날 때마다 그런 질문은 점점 늘어만 가고 결국 대답 없는 마애불의 조성을 생각하면서 그 어떤 불교미술품보다 몇 배의 정성이 들어가지 않았을까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인가, 내가 답사를 하다가 마애불을 만나게 되면 꼭 한 가지 치루는 의식이 있다. 바로 그 앞에 머리를 조아려 마음속에 서원하는 바를 간절히 간구하는 것이다. 그 간구가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확인은 필요치 않다. 그저 내가 마애불을 만났고 그 마애불을 조성한 장인의 정성을 느끼고 있기에 마애불 앞에서 간절히 서원을 간구하면 막연히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마애불에 대한 나의 믿음은 답사를 계속하고 더 많은 마애불을 만나게 되면서 확고해져만 갔다. 그것은 마애불에 전해지는 많은 이야기 때문이기도 하다. 만나는 마애불마다 마애불에 읽힌 이야기는 우리들의 믿음을 초월하는 것들이다. 결국 마애불은 우리가 상상하는 정성을 뛰어넘는 장인의 노력을 요하고 있고, 그런 노력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의 서원을 들어주었다는 점이다.

 

 

, 나는 마애불을 조성할 생각을 했니?

 

20168월은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었다. 그런 날씨를 피해 간 곳이 바로 고성군 현내면 산학리 금강산 노인봉 아래 자리하고 있는 정수암이라는 암자다. 이곳 주지스님은 벌써 20여년 가까운 시간을 늘 마음을 더하고 살아온지라 마음 편하게 찾아갔다. 정수암 한편에 자리한 요사에서 하루를 묵고 일어나 문을 열고 나오는데 인법당 앞에 바위에 마애불이 보였다.

 

그 전날까지도 볼 수 없었던 마애불을 언제 누가 저렇게 조성을 한 것일까? 그런데 그만 헛것을 본 것이다. 그저 덩그마니 자리한 바위인데 왜 마애불이 보인 것일까? 법당 안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예를 올리는데 마애불을 조성하자라는 생각이 든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바위를 깎아 마애불을 조성하는 것이 쉬운 일인가? , 마애불을 조성하려면 그 경비 또한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한 달을 쉬지 않고 노력을 해야 살아갈 수 있는 나로서는 그 마애불을 조성한다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때 내가 정수암을 찾아간 것은 마음속에 서원하는 간절함이 있기 때문이다. 젊었을 때 낯 모르는 분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데 정말 우연히 그 지인을 수십 년이 지나 만난 것이다. 그리고 몇 차례인가 술자리를 함께하기도 했다. 그 자리에서 그 지인은 나중에라도 자신의 딸을 만날 기회가 생기면 딸처럼 아껴주라는 부탁을 했다. 사람이 술김에 하지 못할 약속이 어디 있겠는가? 또한 그 딸을 만날 일도 없으니 말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지? 우연일까? 공덕일까?

 

사람이 남에게 도움을 받으면 반드시 갚아야 한다고 옛 어른들이 말씀을 하신다. 갚기 싫어도 갚아야 할 때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런 일이 나에게 생기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우연히 만나게 된 한 사람이 어떻게 이 넓은 세상에 그 도움을 준 지인의 딸일 수가 있겠는가? 영화에서니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일어났다는 것에 소름이 돋는다.

 

그 따님에게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그저 내가 진 빚을 갚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 따님의 자제가 몸이 불편해 몇 차례인가 수술까지 받았다는 이야기에 그 무더운 복중에 절을 찾아다니면서 나름 간절히 기원을 하고는 했다. 내가 찾아다닌 절은 대개 마애불이 인근에 소재한 곳이고 가급적이면 마애불을 찾아가 기원을 한 것이다. 그런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그 바위가 마애불로 보였나보다.

 

결국 스님과 상의를 하고 여주에 살고 있는 의동생인 작가에게 당부를 했다. 마애불을 조성하는데 의형제들이 조금씩 경비를 마련해 조성하자고. 선뜻 마애불을 조각하겠다고 나선 여주아우나 함께 동참하겠다고 나선 주변의 지인들. 아마 내가 마애불을 조성해 받는 공덕이상으로 도움을 준 지인들이 더 많이 받을 것이란 생각이다.

 

그렇게 마애불의 조성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20169월 연화대를 뺀 부분이 조성이 되어 점안식을 가졌다. 그리고 17개월이 흘렀다. 그동안 연화대 조성을 하지 못해 늘 마음이 불편했는데 이번에 아우가 바쁜 일정에서도 며칠 시간을 내 연화대 조성을 마무리했다고 연락을 취해왔다.

 

 

선생님 덕에 우리 애가 달라졌어요. 이제 스스로 운동도 하고 취직자리도 알아보고요

아우가 고성으로 17개월이나 미완으로 남아있던 마애불의 연화대를 조성하기 위해 떠난다고 연락을 취하던 날 만난 지인의 따님이 전해준 말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세상에 이런 일이 있나?’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동안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미안한 마음이 사라지는 듯하다. 마애불을 조성할 때 크던 작던 도움을 준 지인들의 이름을 마애불을 조성한 바위 한 면에 각자하는 모습을 보면서 남들은 콧방귀를 뀔지 모르지만 나의 간절함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다. 마애불을 조성한 수많은 장인들이 그 믿음 하나로 그 높은 바위를 정 하나를 이용해 쪼아냈을 것이다. 돌아오는 4월초파일(522)엔 힘들게 조성한 마애불을 찾아가 감사의 공양물이라도 올려야겠다.

 

국보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불을 만나던 날

 

20041212, 해질녘 찾아간 서산시 용현리 마애여래삼존불. 일부러 벡제의 미소라는 삼존불을 보기 위해 찾아갔지만 실망만 가득 안고 뒤돌아서야 했다. 해가 기울기에 따라 미소가 달라진다는 말에 찾아갔는데 보호각을 만들어 놓아 해가 들지 않는 삼존불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 당시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불은 보호각을 지어놓고 삼존불 주변에 붉은색이 도는 흙으로 발라놓고 아래편 삼존불을 조각한 바위까지 흙칠을 해놓아 도대체 국보를 이렇게 훼손해도 되는가에 대해 분노마저 느꼈다. 물론 그렇게 만들어놓은 당사자들은 국보인 마애여래삼존불을 보호한답시고 해 놓은 짓이었겠지만 말이다.

 

 

44일 오전. 서산시 은산면 용현리를 찾아갔다. 처음에는 삼존불을 오르는 길을 가로 질러 내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너야 했는데 이번에 찾아가보니 전혀 낯선 곳이 되었다. 주변에는 음식점들이 여기저기 자리를 잡았고 마애여래삼존불로 오르는 길은 내에 다리를 놓고 돌계단을 놓았다. 사람들이 오르기 쉽게 조성을 했지만 난 그것도 너무 인위적인 듯해서 달갑지가 않다.

 

문화재란 조성 당시의 형태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고 주장하는 사람이기에 이렇게 주변을 말끔하게 정리해 놓은 것이 오히려 부담스럽기조차 하다. 내에 걸린 다리를 지나고 돌층계를 따라 오른다. 높지 않은 층계는 가파르다. 처음 왔을 때는 보이지 않던 화장실이며 관리사까지 지어놓았다. 국보를 관리·보존해야 하니 이해를 할 수밖에.

 

 

불이문을 지나 마애여래삼존불을 만나다

 

관리사에서 마애여래삼존불을 만나러 가는 길에 불이문을 조상해 놓았다. 불이문 앞에 멈춰서 마음을 다스린다. 이제 이곳을 지나면 피안의 세상이다. 부처의 세계로 들어가는 이 문에서 지금까지 의심으로 가득찼던 마음을 내려놓는다. 천천히 마애여래삼존불로 다가가 앞에 보이는 삼존불을 항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머리를 숙인다.

 

바위에 돋을새김을 한 국보 제84호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불. 바로 이 모습을 보기 위해 찾아왔다가 상처만 가득 안고 돌아갔던 곳이다. 바위에 덧칠해 입혀놓았던 흙더미도 깨끗하게 정리를 하고 바닥에 높이 쌓였던 흙도 제거해 제 모습 그대로 사람을 맞는다. 중앙에 석가여래입상을 비롯해 오른편에는 가부좌를 틀고 있는 미륵반가사유상이, 왼편에는 제화갈라보살입상이 서 있다.

 

이 모습 그대로를 보기 위해 벌써 15년 전에 이곳을 찾았지만 아제야 훼손되지 않은 백제의 미소를 만난다. 삼존상은 불상의 광배까지 생생하게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중앙 본존의 연꽃과 불꽃 무늬 광배가 꽃이 피어나는 듯 살아 있는 백제 후기의 작품이다. 그 앞에서서 어디다 눈을 두어야 할지 모르겠다. 괜히 가슴 한편이 뜨거워지면서 눈시울이 붉어진다. 이 모습을 보기 위해 얼마나 기다려온 것인가?

 

 

 

백제의 미소’, 그 모습에 반하다

 

삼존불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것은 세상을 살아오면서 처음처럼 마음이 맑지 않아서일 것이다. 다시 두 손을 합장하고 눈을 감는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마음속으로 간구한다. “남은 시간이라도 제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서원이다. 그동안 숱한 시간을 문화재를 만나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지만 정작 만나야 할 마애여래삼존불을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찾았다는 것 또한 죄스럽다.

 

날이 잔뜩 흐린 날 찾아간 용현리 마애여래삼존불. 해가 나오질 않아 해의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달라진다는 백제의 미소를 보기는 어렵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이랴. 이미 제 모습을 찾았다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속에 미소가 가득 차 있는데 말이다. 삼존불 앞에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인 후 뒤편에 있던 석불좌상을 찾아보니 보이지 않는다.

 

 

얼마 전에 누군가 가져 간 것 같아요. 언제 사라졌는지도 잘 모르고요

마애여래삼존불 관리사에 있는 분의 이야기다. 잊어버렸다고 한다. 국보를 지키기 위해 사람까지 두고 관리를 했다고 하는데 언제 들고 간 것일까? 꼭 문화재로 지정을 해야 중요한 것은 아니다. 역사 속에서 조형된 모든 것들이 다 문화재라는 생각이다.

 

그 석불좌상 한 기를 마련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을까?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늘 마음이 아픈 것이 제대로 보존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나마 제 모습을 찾은 마애여래삼존불을 다시 만났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앞으로는 이런 마음 아픈 이야기를 다시는 듣지도 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향토유적도 소중한 문화재라는 사실 인식해야

 

문화재란 늘 관심을 갖고 지켜보아야 한다. 마치 문화재는 그저 한 곳에 영원히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무지(無知)’라는 생각이다. 문화재는 각종 주변의 문제에 의해 민감하게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다. 수원에는 세계문화유산인 수원 화성이 자리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수원 화성을 자랑만 할 줄 알았지 정작 그 문화재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문화재 중에는 국가에서 지정하는 사적이나 국보, 보물, 천연기념물, 중요민속문화재 등이 있고 광역지자체에서 지정하는 유형문화재나 무형문화재, 기념물, 민속자료 등이 있다. 하지만 그 과중은 다르다고 해도 문화재로 지정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다만 그 조성 연대나 정확성, 희귀성 등에 따라 차등 지정이 될 뿐이다.

 

국가나 광역지자체에서 지정을 한 문화재 외에도 중요한 것은 지자체에서 향토유적(鄕土遺蹟) 으로 지정하기도 한다. 향토유적은 정확한 조사를 마친 후 지자체나 국가의 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한다. 향토유적 자체가 그 지역의 문화재이기 때문에 그 역시 모든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문화재이다.

 

 

 

수원의 향토유적 보존은 잘 되고 있을까?

 

수원에는 모두 22기의 향토유적이 있다. 그 중 1호는 수원시 권선구 수인로 126(서둔동)에 소재한 항미정이다. 항미정은 서호에 있는 정자로 본래는 화성을 쌓을 때 서호 동북쪽에 세웠는데, 순조 31년인 1831년에 당시 화성유수였던 박기수가 현재의 자리에 건립하였으며 그 뒤 유수 신석희와 관찰사 오익영이 중수 했다고 전한다.

 

이와 같이 역사적인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각종 유무형문화재 중 국가나 광역지자체에서 지정받지 못한 문화재를 향토유적으로 지정해 보존을 하게 된다. 영통구 창룡대로 265(이의동)에 소재한 수원박물관 경내 입구에는 수원시 향토유적 제13호인 동래정씨 약사불이 자리하고 있다. 이 약사불은 바위에 새긴 마애불로 우리 민속문화를 알 수 있는 문화유적이다.

 

동래정씨 약사불은 팔달구 화서동에서 2008년 수원박물관으로 옮겨온 마애불이다. 이 동래정시 마애불은 최근까지 동래정씨 집안 여인들에 의해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에 제의가 이루어졌었다고 한다. 삼존상으로 조성 된 마애불은 본존 여래좌상과 좌우협시 보살입상으로 구성되었으며, 본존상의 머리 뒤쪽에는 원형 두광이 표현되었다.

 

고려 중기 이후에 지방의 장인에 의해 조성된 것을로 보이는 이 마애삼존불은 전체적으로 불상의 몸 부분 곳곳에 채색한 흔적이 남아있다. 동래정씨 마애불은 큼직한 이목구비에 미소를 머금은 듯한 표정은 원만한 인상을 주고 있으며 생략된 옷주름과 마애불이 좌정하고 있는 앙련과 복련으로 이루어진 연화대좌의 소박한 형태 등이 세련되지는 못했지만 나름 중요한 문화재이다

 

 

 

문화재에 더 많은 관심 필요해

 

2일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수원박물관에 들려보았다. 늦은 시간이긴 하지만 야외에 젖시가 되어있는 동래정씨 약사불의 보존상태를 확인해 보고 싶어서이다. 본존불이 약사여래불인 이 심존상은 한 개의 돌에 나란히 조성을 한 삼존상으로 본존불 좌우에는 같은 형태의 협시불을 조각하였는데 머리에 쓴 보관으로 보아 관음보살을 새긴 듯하다.

 

한 개의 석재에 이렇게 삼존불을 조성한 것은 보기 드문 예로 이 동래정씨 약사불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람이 치성을 드려 삼형제를 낳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효험이 있다고 한다. 그런 약사불은 보호전각을 짓고 수원박물관 입구에 새롭게 조성한 것이다. 그런데 보존불 안면에 새가 똥을 쌌는지 여기저기 흔적이 남아있다.

 

야외에 전시한 문화재의 경우 지연적인 이런 피해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저 늘 관심을 갖고 신경을 써야 조금이라도 더 온전한 형태로 보존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보존불과 우측협시불의 안면에 남아있는 하얀 분비물을 제거할 생각은 하지 않은 것일까? 새들의 분비물은 산성이기 때문에 문화재에는 치명적이라고 한다.

 

누군가 관심을 가졌다면 이렇게 더럽혀진 문화재의 안면부분을 치우지 않았을까? 하얗게 더렵혀진 동래정씨 약사불을 보면서 앞으로 문화재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문화재란 늘 관심을 갖고 지켜보지 않는 한 언제 우리의 곁에서 사라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경기도 안양시. ‘안양(安養)’이라는 말은 안양사(安養寺)라는 절에서 기인한 이름이라고 한다. 안양사는 신라 효공왕 3(900)에 고려 태조 왕건이 남쪽을 정벌하러 지나다 삼성산에 오색구름이 채색을 이루자 이를 이상히 여겨 가보던 중 능정이란 스님을 만나 세워진 사찰이 안양사로 전해진다.

 

안양이란 불가에서 아미타불이 상주하는 청정한 극락정토의 세계를 말하며 현세의 서쪽으로 10만억 불토를 지나 있다는 즐거움만 있고 자유로운 이상향의 안양세계를 말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 때 최영장군이 7층 전탑을 세우고 왕이 내시를 시켜 향을 보냈으며 승려 천명이 불사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어 옛 안양사의 규모를 짐작케 하여준다.

 

 

 

이렇게 볼 때 안양사는 불국정토를 상징하는 곳이다. 그런 안양시는 이제 인구 60만인 도시이다. 숱하게 많은 종교건물들이 여기저기 들어차 있는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산32번지에는 마애종이라는 바위벽에 범종을 양각해 놓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2호가 자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마애불은 상당수가 있지만, 마애종은 석수동 마애종이 유일한 것이다.

 

이 안양의 마애종은 고려 초기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마애종을 보면 종을 걸 수 있도록 고리 구실을 하는 용뉴와 음통을 포함한 높이가 126, 종 몸통의 높이는 101정도이다. 종을 양각한 왼편에는 당목을 잡고 종을 치는 스님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상단의 보 중앙에 쇠사슬을 달아 종을 걸어 둔 모양을 새겨 표현하였는데, 용뉴와 음통이 확연하게 조각되었다. 상단에는 장방형 유곽을 2개소에 배치하고 그 안에 각각 9개의 원형 유두가 양각되어 있다. 우리가 범종에서 만날 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다. 종신의 중단에는 연화문이 새겨진 당좌를 표현하고 하단에는 음각선으로 하대를 표시하였다. 종의 양편에는 기둥을 세우고, 보를 가로질러 종을 매달아 놓은 모습을 형상화 한 형태로 새겨놓았다.

 

그런데 이 마애종은 도대체 왜 이곳에 있는 것일까? 안양이라는 불국정토를 마련하고, 아마 많은 중생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염원이 아닌지 모르겠다. 1,000년 세월을 그렇게 묵묵히 바위에 새겨져 소리 없는 종소리를 낸 마애종. 그리고 당목에 힘을 주어 종을 울리는 스님.

 

 

 

언젠가 이 마애종의 소리가 이 땅에 울려 퍼질 때 정녕 이 땅의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이제는 오랜 풍상에 마모되어가는 마애종에 숨은 깊은 뜻은 도대체 무엇인지. 어지러운 세상에 그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를 간구한다. 병신년 새해 마애종을 울릴 수만 있다면 이 땅이 바로 불국정토일 것이다.

 

오늘 2015년의 끝날. 디시는 돌아올 수 없는 이 해에 안양 석수동 마애종을 소개하는 것은 이 곳을 들리시는 모든 분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 어떠한 작은 아픔과 고통도 당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모두가 다 마애종의 소리를 마음으로 듣고 2016년 병신년에는 더 좋은 일들만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며칠간 계속되는 연휴를 맞아 몸이 좋지 않다고 해서 답사를 멈출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극도로 불편해진 몸을 이끌고 며칠을 보냈더니 몸살, 감기 기운까지 겹쳐 이틀이나 고열로 움직일 수 없을 정도다. 그래도 이왕 답사를 나섰으니 무엇인가 하나 정도는 소중한 우리 문화재를 보고가야 할 것만 같아 몸을 추스르고 길을 나섰다.

 

하남시 교산동 55 -1에 소재한 선법사 경내에 소재한 태평2년명 마애약사불 좌상을 찾아 하남으로 향했다. 날씨도 쌀쌀하고 고열로 인해 몸은 움직이기가 버거울 정도이다. 길에는 어제 밤 내린 눈이 녹지 않아 미끄럽기도 하다. 그래도 숨을 몰아쉬며 선법사로 향했다. 계단을 올라가니 경내 좌측에 삼각형으로 솟은 바위가 보인다. 그리고 그 바위 면에 정교하게 조각한 마애약사불 좌상이 새겨져 있다.

 

 

 

고려 경종 2년인 977년에 조성한 마애불

 

약사불은 질병에서 모든 중생을 구제해 준다는 부처이다. 이 약사불을 형상화한 마애불은 바위 남쪽 면에 전체 높이 93정도로 새겨져 있다. 태평 2년 정축 729이라는 글을 통해, 이 마애약사불 좌상을 조성한 시기가 고려 경종 2년인 977년임을 알 수 있다.

 

마애약사불은 세모난 바위에 그 윗부분 돌을 쪼듯이 파내면서 양각을 한 형태로 조성이 되었다. 높이가 1m도 채 안 되는 크지 않은 이 마애약사불 좌상, 광배와 대좌를 갖추고 있으며 조각수법이 정교하고 비례가 뛰어나다. 신체는 비교적 장대하고 얼굴은 부드러운 편이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편단의 법의를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고 있으며 옷 주름의 표현은 가지런함이 엿보인다.

 

 

 

 

 

뛰어난 조형기법에 빠져들다

 

몸 뒤편에 있는 광배는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계단식의 3중 원으로 새기고 있으며, 주위에는 불꽃무늬인 화염문이 둘러져 있다. 대좌의 하대석에는 연꽃잎이 아래로 향한 복련의 모양이 하대석 위에 4개의 짧은 기둥으로 이루어진 중대석이 있다. 상대석은 다섯 잎의 활짝 핀 앙련이 마애여래불의 무릎을 감싸듯 조각이 되어 있다.

 

마애여래 좌상의 우측에는 태평 2(고려 경종 2, 977) 729일 옛 석불을 중수하며, 황제의 만세를 기원한다.(太平 二年 丁丑 七月 二十九日 古石佛在如賜之重修爲今上皇帝萬歲願)이라고 음각을 해 놓았다. 그러나 이 마애약사불 좌상에는 새로 고친 부분이 없는 듯하다. 그런 점으로 보면 불감이나 가구 등을 새로 조성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돌을 쪼아낸 듯한 조형기법

 

이 하남 교산동 마애약사불 좌상은 현재 보물 제981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크지 않은 이 마애불은 손바닥을 위로 한 왼손에는 약그릇이 놓여있으며, 오른손은 손바닥이 정면을 향하고 손가락을 위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마애약사불을 조성한 모습을 보면 특이하다. 아주 정교한 쇠꼬챙이 같은 것으로 무수히 돌을 찍어내어 안으로 파들어 가면서, 좌상의 형태를 돋을새김한 것 같이 보인다.

 

마애약사불이 크지가 않아, 이렇게 쇠꼬챙이 같은 것으로 쪼아내 듯 조각을 한 것일까? 전체적으로 보아도 무수하게 쪼아낸 듯한 형태를 볼 수가 있다. 교산동 마애약사불 좌상은 비교적 보존 상태가 좋다. 더욱 이 마애불 좌상은 만들어진 연대에 대한 확실한 기록이 남아 있어 고려 초기 불상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 받고 있다. 이 마애불의 옆에는 조금 더 큰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면도 칼로 잘라낸 듯 말끔히 정리가 되어 있다. 이곳에도 또 하나의 마애불을 조성하기 위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교산동 마애약사불 좌상 앞에 서서 두 손을 모은다. 추위에 떨다가 생긴 몸살, 감기라도 얼른 나아 훌훌 털고 답사를 할 수 있기를 서원한다고 마음속으로 간구한다. 그리고 새해에는 모든 민초들이 다리 뻗고 살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구를 한다. 없는 사람들이 살기가 버거워 점점 초췌해져만 가는 모습이 마음 아프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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