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만에 e수원뉴스 최초로 2천개 기사 송고

 

시민기자가 어떻게 5년 만에 2천개의 기사를 씁니까?”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시민기자라서 쓰지 못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시민기자이기 때문에 2천개의 기사를 쓰면 안된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왜 시민기자는 기사를 많이 쓰면 안되는 것일까?

 

기자는 시민기자가 되었던지 신문사의 기자가 되었던지 취재를 하고 기사를 작성하는 것은 다를 바가 없다. 시민기자라고 해서 취재를 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일반기자라고 해서 모두 기사를 잘 쓰는 것도 아니다. 얼마나 많은 기사를 썼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떤 기사를 현장에서 얼마나 빠르게 소식을 전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지난 5년 동안 치열하게 살았다는 생각이다. 2012813일 처음으로 e수원뉴스에 기사를 송고했다. 지인으로부터 e수원뉴스에 시민가자 제도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사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부터 만 5년이 조금 남았다. 앞으로 20개 정도의 기사를 더 송고하면 2,000개의 기사를 쓰게 된다.

 

 

시민기자 최초로 2천개 기사 송고

 

내가 e수원뉴스에 시민기자로 활동하기 전부터 e수원뉴스에는 많은 시민기자들이 활동을 하고 있었다. 2007년에 시작한 e수원뉴스 시민기자들의 활동은 이미 당시 500여개의 기사를 송고한 시민기자들도 있었으니, 그들보다 더 많은 기사를 쓰기 위해서는 더 많은 취재를 하고 기사를 써야했다. 하기에 남들은 이미 10년이 지났어도 이루지 못한 것을 5년만에 최초로 이루었다는 점이다.

 

수원시는 행사가 많은 곳이다. 어떤 행사가 되었던지 행사가 열리는 곳은 빠트리지 않고 찾아다녔다. 시민기자들은 한 달에 기사를 10개까지만 허용이 된다. 으뜸기자가 되어야 한정된 기사의 숫자가 풀리게 된다. 처음엔 그렇게 기사 송고숫자가 정해져 있다는 것을 모르고 무조건 기사를 썼다. 한 달이 지난 다음에야 시민기자들에게는 정해진 기사의 송고횟수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기사료를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기사를 써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소식을 알릴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생각을 했다. 5년 동안 2,000개의 기사 송고. 하루에 한 개 이상의 기사를 써야 가능한 숫자이다. 현장기사 위주로 기사를 쓰는 나로서는 계절과 시간에 관계없이 현장을 뛰어다녔다. 그렇게 노력을 한 대가가 바로 2,000개의 기사를 쓸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생각해보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2천개의 기사는 하루에 한 개 이상 5년이란 시간동안 쉬지 않고 기사를 써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처음 기사를 쓰기시작하면서 5년 안에 2천개의 기사를 송고하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했고, 스스로 약속한 것을 지키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그런 결과가 시민기자 최초로 2천개의 기사를 송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기자의 가치는 자료에서 결정된다

 

지금까지 많은 기사를 쓸 수 있었던 것 중 하나는 바로 꼼꼼히 챙기는 자료덕분이다. 시민기자를 하기 전부터 모든 자료를 정리하고 있는 나로서는 그 자료가 상당히 소중한 자원이 되었다, 언제 어디서 어떤 행사가 열리던지 그에 대한 자료를 소장하고 있기 때문에 수월하게 기사를 쓸 수 있었다.

 

살아가면서 자료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자료는 정리하여 모아놓는다. 그런 습관이 기자생활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된 것이다. 만일 그런 자료가 없었다고 하면 2천개의 기사를 쓰기까지는 지금보다 몇 배나 더 힘들었을 것이다. ‘시민기자 최초 2,000개 기사 송고’. 나로서는 스스로의 역속을 지켰다는 것이 무엇보다 가쁜 일이다.

 

누구나 2천개의 기사를 송고할 수 있다. 다만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오늘 이렇게 시민기자 최초로 2천개의 기사를 송고했다는 기사를 쓰는 것은, 앞으로 3천개의 기사, 4천개의 기사를 쓰는 시민기자가 나오길 바라서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가장 먼저 달성했다는 것은 기분좋은 일이다. 앞으로 이 기록을 누군가가 하루빨리 뛰어넘는 날이 오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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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만나는 다정한 이웃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인생을 논할 수 있는 지인들이 주변에 있다는 것은 커다란 행복이다. 난 세상을 살아가면서 항상 하는 생각이 만일 나에게 어려운 일이 달칠 대 다만 몇 명의 지인들이라도 끝가지 나와 함께 할 수 있다면 세상살이를 성공적으로 살았다고 생각한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정도 인원은 내 주변에 있다는 생각이다.

 

세상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 사회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늘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내가 더 소유하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저 생활을 함에 있어 조금 부족하더라도 나누며 살아가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가 늘 사람들과 모여 함께 나누고 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 하는 것을 즐긴다.

 

내가 지인들과 오래도록 인연을 끊지 않는 것도 모두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다. 그런 사고를 갖고 있기 때문인지 내 주변에 정말 좋은 사람들이 많다. 늘 함께 만나면 웃고 떠들고 아무런 사심이 없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늘 외롭지가 않다. 그런 마음을 서로 나눌 수 있는 사람 중에는 남녀의 구별이 없다. 그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소중한 책 몇 권을 받아

 

아는 지인 중에 한 분이 연락을 했다. 꼭 전해줄 책이 있다는 것이다. 내가 우리 민속을 연구한다는 것을 아는 분이기 때문에, 가끔 술이라도 한 잔 나눌 때면 잊지 않고 책을 한 권씩 전해주신다. 책을 선물로 받았을 때의 기쁨이란 말로 표현 할 수가 없다. 더구나 그 책이 그렇게 구하려고 애를 써도 구하지 못했던 책일 때는 오죽하랴.

 

자주 뵙지는 못하지만 김재철 박사는 농촌진흥청 산하 국립식량과학원 연구관 출신으로 2006년 퇴임 했으며, 현재는 e수원뉴스 등에 칼럼 등을 연재하고 있다. 벌써 몇 년째 가뭄에 콩 나듯 술자리를 함께하는 김재철 박사는, 늘 느끼는 것이 평생청년이라는 생각이다. 그만큼 배울 것도 많아 늘 존경스러운 분이다.

 

그런 김 박사님이 전해줄 책이 있다고 한다. 민속연구를 하고 있으니 필요할 것이라면서 가방에서 꺼낸 책은 아끼바 다카시(村山智順)조선의 귀신이라는 책이다. 물론, 원판은 아니고 노성환 옮김으로 민음사에서 19907월에 펴냈으니 27년이 지났다. 이 책은 민속을 연구하는 나에게는 정말 필요한 책이기 때문에 몇 번이고 책을 구하기 위해 헌 책방을 뒤져야만 했다.

 

조선의 귀신은 일제 강점기 때 우리나라의 민속을 조사한 것이다. 이는 일본인이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실시한 연구조사의 성과물이다. 일본인이 조사 발간한 책이라고 해서 무시할 수 없는 것이 그 어떤 책보다도 많은 자료를 싣고 있다. 책에는 제1부 귀신, 2부 양귀로 나뉘어져 있으며 귀신을 퇴치하는 다양한 방법까지 소개하고 있다.

 

 

이런 이웃이 있어 행복하다.

 

김재철 박사를 만나면 행복하다. 김 박사님이 늘 농을 잘하기 때문은 아니다. 가끔 필요한 것을 받을 수 있기도 하지만, 길지 않은 시간을 웃어대느라 정신을 차릴 수 없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술 한 잔을 마시며 웃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사람들은 잘 모른다,

 

술을 마시면서 심각한 이야기를 한다거나, 필요이상으로 욕지거리를 해대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이해가 기질 않는다. 적당히 마시고 취하지 않을 정도에서 자리를 뜨는 것 또한 기분좋은 일이다. 집에 와 선물로 받은 책을 한 권씩 살펴본다. 그 중에 한 권은 정찬주 작가의 암자에는 물 흐르고 꽃이 피네라는 책이다. 불교문화재 답사를 하는 나에게는 일종의 지침서 같은 책이다.

 

좋은 사람들과 만나 술 한 잔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좋은 책까지 선물로 받았으니 이보다 즐거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살아가면서 이렇게 좋은 이웃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이다. 당분간은 그동안 구하지 못해 애를 태웠던 책을 읽는 재미로 시간을 보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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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 만에 얼굴을 마주한 반가운 사람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란 말이 있다. 여우가 죽을 때 제가 살던 굴이 있는 언덕 쪽으로 머리를 둔다는 뜻으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이르는 말이다. 사람은 나이가 먹어 세상을 하직할 때가 되면 고향을 그린다고 한다. 고향을 그리는 것은 그곳이 바로 자신이 태어나고 조상 대대로 살던 뿌리가 깊은 곳이기 때문이다.

 

26일 오후 6. 서울시 서초구 사평대로 160에 소재한 쉐라톤 서울팔레스 강남호텔 1층 로얄볼륨을 찾아갔다. 때 아닌 고문으로 추대가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갑자기 무슨 고문이냐고 의아해 하겠지만, 그 자리에서 35년 만에 반가운 얼굴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반가운 사람들을 만난 것이다.

 

이날 이곳에서는 사단법인 한국십이체장고춤보존회(이사장 한혜경) 자축연 및 출범식이 열렸다. 그 십이체장고춤보존회 출범식에 고문으로 추대가 되었으니 꼭 참석해야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월요일은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바쁜 날이다. 망설이다가 서울로 향했다. 비가 오는 길을 나선다는 것이 썩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약속을 했으니 어찌할 것인가?

 

행사장에는 원탁테이블에 사람들이 둘러앉아 있다 식이 시작한지가 30여분이 지났기 때문에 한창 축사가 이어지고 있다. 십이체장고춤보존회 한혜경 이사장을 만난 것은 꽤 시간이 흘렀다. 많은 우여곡절을 겪고 난 후 2017322일자로 서울특별시장으로부터 공식적인 시단법인 인가를 받았다고 한다.

 

 

장고춤의 원류를 찾기 위해 많은 시간 전국을 헤매

 

장고춤보존회가 처음으로 발족을 하고 연수회를 시작할 때부터 인연이 되었다. 그 후 한헤경 이사장의 장고춤의 원류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는데 함께 거들게 된 것이 인연이 되었다. 참으로 길고도 지루한 여행이었다. 오랜 시간을 전국을 답사하면서 그 원류를 찾아나섰기 때문이다.

 

장고춤을 우리는 농악에서 파생한 춤이나 신무용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하지만 장고춤은 불교 각종 미술작품에 나타나고 있어 이미 신라 때부터 전해진 것으로 추정한다. 또한 농악에서 파생한 춤으로 보기보다 불교의식 무용으로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불교미술에서 장고를 이용한 춤의 모습을 찾아보기란 어렵지 않다. 석탑이나 부도탑 등의 비천인이 연주를 하는 모습에서, 장고를 치는 비천인상을 쉽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오래된 비천인상을 찾을 수 있는 곳은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이다. 연기조사가 신라 진흥왕 5년인 544년에 창건하였다고 하는 화엄사 각황전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국보 제35호 사사자 삼층석탑의 기단부에 조각된 비천인상 중에, 장고를 치는 비천인상이 있다. 아마 이 때는 장고가 춤이 아닌 단순한 악기였을지도 모른다. 그 뒤에 나타난 보물 제85호 강릉 굴산사지 승탑에도 연화대 위에 앉아 장고를 치는 비천인의 모습이 보인다.

 

이 굴산사지 승탑은 고려 시대에 조성한 것이다. 중간받침돌에는 8개의 기둥을 세워 모서리를 정하고, 각 면에 비천인이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을 새기고 있다. 조각되어 있는 상은 8구 모두 서로 다른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데, 악기는 장고를 비롯해 훈, 동발, 비파, , 생황, 공후, 적 등 당시에 사용하던 악기의 모습들이 묘사되어 있다.

 

이런 비천인상이나 고분벽화 등에서 나타나는 장고춤의 형태를 보면 이미 고려조부터 장고춤은 완전한 춤의 형태로 발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장고춤을 실질적으로 묘사한 사찰의 벽화가 전라북도 완주군 송광사에 그려져 있다.

 

송광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7년인 867년에 도의가 처음으로 세운 절이다. 송광사의 대웅전은 기록에 따르면 조선 인조 14년인 1636년에 벽암국사가 다시 짓고, 철종 8년인 1857년에 제봉선사가 한 번의 공사를 더하여 완성하였다고 한다. 이 대웅전 상단 내벽에 보면 비천인상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비천인상에는 무당춤을 비롯해, 장고춤, 북춤, 승무, 바라춤 등의 그림이 보인다. 이 모든 춤들은 당시에 추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즉 벽화에 나타나는 그림들은 단순히 상상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당시 세속화된 풍물을 그린다는 점으로 볼 때, 고려 고분벽화에서 나타난 장고춤은 조선조에 들어서 상당히 격화되고 빠른 동작을 필요로 하는 경쾌한 춤으로 변화가 되었다고 추정한다. 벽화에 나타나는 그림을 보면 작은 소장고를 이용해 춤을 추면서 군관모자와 같은 관을 썼다. 화려한 장식에 힘이 있는 모습의 장고춤을 역동적으로 추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장고춤의 역사를 찾기 위해 많은 날들을 전국을 누볐다. 그 뿌리를 찾기 위함이다. 그런 노력을 할 수 있도록 뒷받침을 한 것이 바로 한혜경 이사장이다. 그런 연유로 인연이 되 보존회의 고문이라는 중책을 맡게 된 것이다.

 

5세부터 춤을 배우기 시작한 한 이사장은 구한말 대정권번의 명무 김취홍으로부터 전승된 한혜경류십이체장고춤 보존 전승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그 결실을 맺는 자리가 바로 시단법인 출범식 및 자축연인 셈이다.

 

반가운 사람들을 한 자리에서 만나

 

국립국악원 경연대회, 동아음악콩클, 국립무용단 정기공연, 대한민국 무용제, 인천시립무용단 창단공연 등 작곡과 무용음악을 창작하면서 관계를 맺은 부문들이다. 그리고 1982년 인천시립무용단의 창단공연작인 굴레야·굴레야라는 작품의 곡을 쓰고 무용음악작곡과 관계되는 모든 일을 접었다.

 

그렇게 35년이란 세월을 작곡이나 음악과는 담을 쌓고 산 것이다. 그러던 것이 우연히 지난 5월 팔달문시장 다문화가요제의 심사를 맡아본 후, 다시 한국십이체장고춤보존회의 고문으로 추대가 되었다. 이 나이가 먹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여우가 자신의 굴을 항해 고개를 향하듯 그렇게 음악과 다시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일까? 당분간은 혼란스럽겠지만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35년 만에 만난 반가운 얼굴들. 아직도 기억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며 수구초심이란 말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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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여부도 모르면서 무조건 싸잡아 욕

 

요즈음 사람들은 다혈질이다. 아주 사소한 일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런 성격들이 때로는 커다란 화를 불러오기도 한다. 세상은 상대적이다. 나에게 불필요한 이야기를 하거나 해를 가하면 누구나 먼저 이유를 따지기보다 욕지거리가 먼저 나온다. 요즈음 사람들의 습성이다. 남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행동, 그것이 문제다.

 

지난 주말 남문시장 팔달문 홍보관에 앉아있는데 누군가 문을 요란하게 두드린다. 점심시간이라 근무자가 없어 잠시 문을 닫고 쉬고 있었기 때문에 “근무자가 없어요”라고 했지만 문을 열라고 한다. 급한 일인 듯해 문을 열어주니 다짜고짜 화장실로 가잔다. 난 근무자가 아니라서 못간다고 했더니 “근무자도 아닌 사람이 왜 여기 있느냐?”는 것이다.

 

은근히 부화가 치밀었지만 연세가 드신 분이라 말을 못하고 따라나섰다. 홍보관에 딸린 공용화장실에 갔더니 전동휠체어를 탄 장애인 여성 한분이 30분이나 문을 못 열어 용변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화장실 근무자가 있기 때문에 주변을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점심시간이다. 여기저기 전화를 해 알아보려고 했지만 연락이 되지 않는다. 주말이라 사람들이 전화를 받지 않는 듯하다.

 

무조건 욕부터 하면 상수인가?

 

세상 사람들이 일이 일어나면 결과도 알아보지 않고 바로 욕부터 한다. 몇 번인가 장애인전용화장실 앞에 달린 개문장치 버튼을 눌러도 열리지 않는다. 근무자가 없으니 그 이유를 나라고 알 수 없다. 그런데 들으라는 듯 바로 욕을 한다. “근무자가 자릴 비우고 돌아다녀. 이런 놈들을 왜 세금으로 월급을 주나 모르겠네”란다.

 

계속 안좋은 소리를 한다. 난 먼저 분명히 이곳 화장실과는 관계없는 사람이라고 이야기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들으라는 듯 욕이다. “왜 욕을 하세요? 여기 홍보관 근무자는 화장실과 관계가 없다는 데” 그래도 화가 가시지 않는지 계속한다. 그러더니 들고 있던 카메라로 여성장애인을 찍어댄다. “찍지 마세요”라고 여성이 이여기를 해도 막무가내로 찍는다.

 

이 정도면 어이가 없다. 혼자만 애국자요 정의로운 줄로 아는가보다. 나이를 먹었으면 좀 더 산중하게 가려서 말을 해야 한다. 관계가 없다고 설명도 했고 문을 열기위해 여기저기 연락을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싸잡아서 욕을 하는지 모르겠다. 안 졸은 말로 나이가 무슨 벼슬인 듯하다.

 

작동방법 설명문이라도 붙여 놓았더라면

“돈만 받아쳐먹고 무엇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다. 이런 놈들에게 왜 세금으로 월급을 주어야하느냐”며 곁에서 이유를 묻던 또 한 사람도 욕을 한다. 안에 사람이 있기 때문에 안 열리는 것이라고 아는 체까지 한다. “불이 꺼져있는데 무슨 사람이 있느냐?” 고 했더니 바로 욕부터 한다.

 

여성 분은 변이 어지간히 급한지 “바지에 싸도 되느냐?”고 묻는다. 참으로 난감하다. 왜 그런 질문을 내게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결국 잠시라도 딴 생각을 하게 하려고 “어디서 왔느냐? 무엇을 타고 왔느냐?”고 질문을 하면서 개문스위치를 길게 눌렀더니 문이 열린다. 장애인 전용이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사용할까봐 길게 눌러야 문이 열린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다급해하는 장애인에게 문이 열렸으니 얼른 들어가 용변을 보라고 문을 닫아주었다. 그렇게 일러놓고 나니 울화가 치민다.

 

장애인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보고 한 건물에 있는 사무실에 와서 부탁을 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욕부터 해대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기분이 썩 좋지 않다. 왜 관계가 없다고 설명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욕부터 하는 것일까? 나이를 먹었으면 더 많은 생각을 하고 좋은 말로 이야기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

 

요즈음 세상살이를 하다보면 이유없이 욕부터 하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다. 한 마디로 사람들이 점점 강퍅해져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세상을 오래 살았으면 그만큼 모든 것을 정확히 분간하고 아랫사람들에게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언행을 해야 한다. 결과도 모르고 무조건 관계없는 사람들을 싸잡아 욕하는 이런 폐단을 사라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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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는 신뢰로 쌓아가야 좋은 세상이 된다.

 

세상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사회란 공동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조직화된 집단이나 세계를 말한다. 이는 서로가 신뢰로 쌓아가는 사람간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인간답지 못하다라는 표현을 한다. 인간이 감사할 줄 모르거나 인간다운 행동을 하지 못할 때 빗대어 하는 말이다. 그런 사람들이 많을 때 사회는 와해되고 만다.

 

사람이 남에게 선의를 베풀 때, 그 대가를 바라고 하는 것은 도움이 아니다. 선의란 대가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적은 도움을 받은 것에 대한 고마움은 알아야 한다.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했다. 그저 고마움의 뜻을 전하기만 하면 되는 것을, 고맙다라는 말을 하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

 

사람들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자의든 타의든 남에게 도움을 받게 된다. 그렇게 도움을 받았다면 당연히 감사의 말을 해야 한다. 그저 상대방이 서운하지 않게 말 한마디만 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도와 준 사람의 뒤통수를 치는 일이 허다하다. 인간으로서 해서는 인될 일을 한 것이다.

 

어려울 때 도움을 주어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

 

나 역시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고 살았다. 그것이 꼭 경제적인 면이 아니라고 해도 사회를 살아가면서 도움을 받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도움을 받았다면 당연히 고마움을 표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도리이기 때문이다. 그저 고맙습니다라거나 감사합니다라는 말 한 마디만 하면 된다.

 

일전에 아는 지인이 한 사람 어려움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마음으로 의지할 곳이 없다고 하면 얼마나 외롭고 힘들겠는가? 그런 어려움을 이야기하는데 도와주지 않을 수가 없다. 천성이 남의 어려움을 보면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바쁜 시간을 쪼개고, 그 시간으로 인해 내 생활에 어려움이 닥치기도 했지만 도움을 준 것이다.

 

경제적으로야 큰 도움이 아니라고 해도 먼 길을 몇 번이고 다니다가 보면 이것저것 소소한 비용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그렇게 도움을 주었을 때는 일이 해결되고 나면 반드시 고마움을 표하겠다고 몇 번이고 이야기했다. 물론 대가를 바라고 도와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물질적인 보상을 받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일이 해결되고 나자 연락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훌쩍 떠나버린 것이다. 한 마디로 변소를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른그런 사람이란 생각이다. 도움을 준 것이야 내가 좋아 한 것이지만, 그렇게 인사 한 마디 하지 않는 사람에게 은근히 부아가 치민다. 고맙다라는 말 한 마디가 그렇게 힘들었을까?

 

세상엔 고마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문제는 그 뒤로 몇 번을 마주했는데도 단 한 마디도 감사의 표현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런 행동이 화가 나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주변에 정말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다.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남에게 도움을 받았다면 당연히 감사의 뜻을 전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자신은 도움을 받은 것이 없다고 큰소리를 치는 인간들도 있다.

 

한 마디로 사회구성원으로서 자격이 없는 인간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회는 병들어간다. ‘인간답지 못한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상처를 받지 않으려면 누가 곁에서 어려운 일도 당하거나 세상을 살면서 힘들어해도 도움을 주지 않으면 된다. 그렇게 무시하고 살아간다면 상처 받을 일이 없기 때문이다.

 

도움을 받고도 고마움을 모르는 사람들. 우리 주변에 이런 인간들이 너무 많다. 오히려 물에 빠진 사람을 도와주면 내 보따리 내 놓아라라고 할 사람들이다. 세상은 더불어 살아가는 곳이다.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받았다면 고마움을 아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모여사는 세상이길 바란다. "고맙습니다라는 말이 넘쳐나는 세상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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