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를 바라보고 서있는 관동팔경 청간정에 오르다

 

실로 100여일 만에 갖는 여유로움이다. 징검다리 연휴가 시작되는 29일 여주도자기축제장을 찾아 지인을 만난 후, 바로 우리나라 최북단이라는 고성군으로 향했다. 고성군 현내면 산학리에 지난해 조성하다 완성을 하지 못한 마애불을 올해는 어떻게 해서라도 제 모습으로 조성해 놓고 싶어서이다.

 

속초 시내를 접어드니 꼼짝할 수가 없다. 징검다리 연휴로 인해 전국각처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어 도대체 차를 움직일 수 없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속초시에서 볼 일을 포기하고 고성으로 향했다. 고성으로 가는 도중 관동팔경의 한 곳이라는 청간정을 들려볼 생각에서 서둘러 길을 잡았다. 청간정에도 모인 사람들도 여느 때와는 다르다. 그 동안 몇 번이고 이 정자를 찾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본적이 없었다.

 

청간정은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청간리에 소재한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2호로 지정되어 있는 청간정은, 조선조 명종 15년인 1560년에 군수 최천이 크게 수리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청간정은 고종 18년인 1881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28년 면장 김용집의 발의로 현재의 정자로 재건하였으나 한국전쟁 당시 전화를 입어 다시 보수하였다고 한다.

 

 

관동팔경의 한 곳으로 일출명소가 된 청간정

 

현재 청간정은 관동8경 중 한 곳이요, 설악일출 8경의 한 곳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천천히 청간정으로 오르는 계단을 오른다. 벌서 이곳을 몇 번이고 들렸지만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다. 주변정리를 말끔하게 해놓고 산책로까지 만들어놓았다. 관람을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좋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조금 어수선해도 옛 정취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 변화가 오히려 버겁게 느껴진다.

 

요즈음 어느 곳을 가던지 관광자원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아름다운 자연을 인위적으로 바꾸어 놓는 작업을 한다. 하지만 그런 작업이 과연 꼭 필요한 것일까? 자연은 자연 그대로일 때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이해가 가질 않는다. 자꾸만 바뀌고 달라지는 모습이 오히려 부담스럽기만 하다.

 

 

그런 나를 보고 세상에 뒤떨어진 사람이라고 하는 지인들도 있지만, 워낙 속이 좁은 것인지 이해심이 부족한 것인지 몰라도 난 있는 그대로가 좋다. 그저 파도소리도 예전 그대로요, 바람소리도 예전 그대로이다. 청간정 엎에 숲은 이루고 있는 산죽나무가 바람에 잎을 부딪치며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예전 그대로이다.

 

어디 그것뿐이랴 청간정을 오르는 길에 만나는 노송들의 모습도 예전 그대로이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사람들이 편하게 관람을 할 수 있도록 산책로를 내고, 바닥을 돌로 깔아 비가 내리는 날에도 질척거리지 않게 만들었을 뿐인데 왜 눈에 거슬리는 것일까? 울퉁불퉁 발바닥이 아프던 길이 가지런하게 바뀌었으면 오히려 반가워야 할 텐데, 나는 그것마저 부담스럽다. 흙냄새, 풀냄새가 없어져서인지, 아니면 잘 정리된 주변환경이 갑자기 낯설어서인지 모르겠다.

 

 

“아저씨, 사진 한 장만 찍어주세요”

 

청간정은 정자라고 하기보다는 누각이다. 중충으로 꾸며진 청간정의 원래 모습은 어땠을까? 도대체 감이 오질 않는다. 이 아름다운 동해안 바닷가에 지어진 정자. 이 청간정에 올라 시인묵객들은 어떤 노래를 한 것일까? 1953년 5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지시로 정자를 보수 하였다고 하는 청간정. 현재 청간정 전면에 게시된 현판도 이 전대통령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그 뒤 1980년 8월 최규하 전 대통령이 동해안 순시를 할 때 풍우로 훼손되고 퇴색한 정자를 보수토록 지시해, 동년 10월 1일 착공하여 다음해 4월 22일에 준공을 보았다고 하는 청간정. 당시 공사비 1억3천만원으로 정자를 완전히 해체하여 새로 건립하였다고 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인 청간정은 초석은 민흘림이 있는 8각 석주로 사용하였다.

 

 

2층 누각으로 오르는 계단을 오른다. 정자 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해안을 배경으로 사진촬영을 하느라 시끄럽다. 먼 곳에서 이곳을 찾아온 듯 40~50대 여인 몇 명이 이야기를 하느라 소란을 피우더니 “아저씨, 사진 한 장만 찍어주세요”라면서 휴대폰을 내민다. 누구에게든지 부탁하면 들어주지 않으면 안된다는 듯한 당당함이다.

 

문화재 답사를 다니면서 가장 싫어하는 것이 사진을 찍어달라는 부탁이다. 자신들끼리 돌아가며 찍어도 될 텐데, 한 사람이라고 빠지면 안되는가 보다. 카메라를 받아 동해안을 배경으로 사진 몇 장을 촬영해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그 자리에서 바로 확인을 하더니 “사진 잘 나왔네”라면서 정자를 떠나버린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다. 그런 말을 듣고 싶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예의도 없고 고마움도 모른다는 것이 더 화가 치민다.

 

이 아름다운 경관에 노여움이라니?

 

한무리의 사람들이 떠나간 청간정에 순간 적막이 찾아든다. 앞에 바라다 보이는 동해의 파도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그 소리를 듣고 싶어 찾아온 곳이 아니던가? 저 아름다움 때문에 이곳을 관동팔경이라고 했을까? 순간 노여움이 눈 녹듯 사그라진다. 이 아름다운 경관을 바라보며 노여움이 가당키나 한 것일까?

 

벌써 14~15년은 지났나보다. 동해안 7번국도로 따라 관동팔경 답사를 떠난 적이 있다. 3박 4일을 쉬지 않고 달려 관동팔경에 속해있는 정자를 모두 돌아보았다. 그 때 만났던 정자들이 아직 눈에 선하다. 청간정을 못 잊는 것은 바로 관동팔경 중 한 곳이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그 경치가 빼어나 ‘수일경’이라 부르지 않았는가?

 

이 정자를 떠나면 혹 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파도소리, 바람소리, 대나무 잎 소리를 꼼꼼히 기억해낸다. 정자를 돌아 나오는 길에 만나는 노송들의 모습까지 일일이 기억한다. 언제 또 다시 이곳을 들릴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달라지는 주변환경 때문에 다시 이곳을 찾았을 때, 또 다른 모습이 되어있지는 않을지 그도 걱정스럽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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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부여군 부여읍 중정리 537-4번지에는 중요민속문화재 제192호인 민칠식 가옥이 자리하고 있다. 이 가옥은 한옥체험을 하고 있는 집으로, 나지막한 뒷산을 배경으로 널찍한 터에 남향으로 자리 잡은 조선 후기의 주택이다. 민칠식 가옥은 사랑채 기와에서 숭정 871705년이라는 명문 기와가 발견이 되었고, 안채의 상량문을 보면 1829년에 크게 보수를 한 기록이 있다.

 

민칠식 가옥은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면, 19세기 후반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솟을대문은 자 모양으로 구성이 되었으며, 그 안으로 정침이 자리하고 있다. 정침의 앞쪽으로는 사랑채가 자리하고 있고, 사랑채에 붙은 중문을 들어서면 안채가 자리를 하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는 중문을 두고 연이어져 있어 자형태의 집이다. 그러나 뒷면이 좌우로 길게 삐져나와 있어, 이런 형태를 날개집이라고 부른다.

 

 

 

 

 

10칸의 자형인 대문채

 

민칠식 가옥은 대문부터가 색다르다. 자형으로 길게 뻗은 대문채는, 좌측에서 5번째 칸에 솟을대문으로 구성을 했다. 밖에서 보면 우측으로 네 칸이 광채와 대문채를 들여놓고, 좌측으로 다섯 칸을 역시 방과 광들을 마련하였다. 대문채는 자 맞걸이 집으로 솟을대문을 만들고 양끝을 박공으로 처리했다.

 

대문채는 동에서 서로 길게 나열을 하였으며, 밖의 담장은 밑에는 돌로 쌓고, 위에는 기와로 문양을 넣었다. 자칫 단조로운 담장을 돌과 기와를 이용하여 멋을 내었다. 담장의 대문 쪽에는 숨어 있는 듯한 낮은 굴뚝이 있다. 현재는 한옥체험을 하느라 그랬는지, 광으로 사용하던 일부의 칸을 화장실로 꾸며 놓았다.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좌측에 사무실을 두었는데, 안으로는 넓은 마당이 펼쳐진다.

 

 

 

 

작지만 쓰임새 있는 사랑채

 

민칠식 가옥의 전체적인 구성은 그리 작은집은 아니다. 그러나 대문을 들어서면서 정면으로 보면, 좌측으로 사랑채를 두고 그 옆에 담장을 이어 중문을 내었다. 중문을 들어서면 서쪽에서 동쪽으로 꺾어 안으로 들어가도록 구성을 하였다. 중문의 동편에는 사랑채의 아궁이가 있으며, 안채를 들어가는 곳에 다시 중문 안문을 두었다.

 

이 문이 예전부터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이런 것 하나서 부터가 특별한 집이다. 사랑채는 앞으로는 세 칸으로 구성을 하였다. 사랑채 내림마루 끝에는 숭정(崇禎) 87년인 1705년이라는 기명의 망와가 있어, 이 집을 처음 지은 년대가 아닌지 추측을 한다. 사랑채 앞에는 큼직한 판석으로 댓돌을 만들어서 위엄을 표현하였으며, 사랑마당에서 중문간까지도 장대석으로 쌓은 여러 단의 계단을 오르도록 하였다.

 

사랑채는 마름모형의 주추를 놓고, 그 위에 네모기둥을 새웠다. 좌측 두 칸은 방을 드리고, 동편 맨 끝 방은 누정과 같이 누마루방으로 구성을 하였다. 사랑방 앞에는 툇마루를 놓고, 사랑채 서남쪽 모퇴에는 볏광을 드렸다. 사랑의 측면은 두 칸으로 되어 있으며, 사랑채에서 안채로 들어갈 수 있는 일각문이 안채와 연결된 담장에 나 있다. 이 사랑채의 특징은 담으로 안채와 연결이 되었다는 것이며, 그 연결 선상이 단지 담장이 아니라, 방과 한데부엌 등으로 꾸며졌다는 점이다.

 

 

 

돌출된 안마루가 특이한 안채

 

중문을 들어서면 동쪽으로 꺾어서 안채를 들어가게 하였다. 안채는 왼쪽부터 부엌, 큰방, 대청, 작은방, 안마루 순으로 구성된 8칸 집으로, 오른쪽에 돌출하여 덧붙여진 안마루가 특이하다. 사랑채는 광과 중문간, 부엌, 사랑방, 마루로 배치하였는데, 안채와 비슷한 구조기법을 보이고 있지만 안채보다 높게 지어 위엄을 나타내고 있다.

 

안채의 구성은 사랑채를 제하고 나면 자 형태이다. 동편으로는 사랑채와 맞물리는 일각문이 있고, 일직선상에 놓인 안방의 뒤편으로는 담장을 쌓아 보호를 한 날개채가 자리하고 있다. 이 집을 날개집이라고 부르는 연유이다. 서쪽 끝에 놓인 부엌은 앞이 개방되어 있으며, 중문채와 구별을 하기 위해 담장에 일각문을 내었다.

 

 

 

 

그 앞으로는 방을 드렸는데, 이곳은 중문채를 사용하는 여인들의 거처로 보인다. 안채와 중문채가 접해지는 부분에는 다시 일각문을 두어 서쪽으로 나갈 수 있도록 하였다. 전체적으로는 자형태의 구조를 갖고 사랑채와 중문채, 안채가 하나로 구성이 되어있으며, 그 구분을 일각문으로 했다는 점도 특이하다.

 

이런 형태의 집은 대개 영남지방의 양반가에서 많이 보이는 형태이다. 그러나 충청지방의 집에서는 매우 드문 집의 구조이기 때문에, 민칠식 가옥이 갖는 의미는 상당하다고 하겠다. 고택답사를 하다가 이렇게 보존이 잘되고, 특이한 집을 만나면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고 보면 나도 이제는 집을 보는 안목이 조금은 생긴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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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반적으로 경관이 아름다운 곳에 지은 건물을 일컬어 정자라 표현을 한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정자의 종류는 정()과 누() 그리고 대() 등으로 구분이 된다. 정은 단층으로 지어지고 방을 마련하는 건물을 말한다. 이와는 달리 누()란 사방을 시원하게 트고 마루를 한층 높여 자연과 어우러져 쉴 수 있도록 경치 좋은 곳에 지은 건물을 말한다.

 

전북 남원시 천거동에 소재한 보물 제281호 광한루가 처음 지어진 것은 조선시대 이름난 황희 정승이 남원에 유배되었을 때이다. 처음에는 광통루(廣通樓)라 불렀다고 한다. 왜 하필이면 남원에 유배가 되었을 때 이러한 정자를 지었을까? 그리고 광한루(廣寒樓)라는 이름은 세종 16(1434) 정인지가 고쳐 세운 뒤 바꾼 이름이다.

 

 

 

 

황희 정승이나 정인지가 광통루나 광한루라는 이름을 붙인 것을 보면 그 안에 속내를 간직하고 있었을 것만 같다. 즉 임금을 그리는 마음을 님을 향한 춘향이의 마음에 비유한 것은 아니었을까? 지금 있는 건물은 정유재란 때 불에 탄 것을 인조 16(1638)에 다시 지은 것이며, 부속건물은 정조 때 세운 것이다.

 

광한루 앞에는 연못이 있다. 연못을 면해 남향으로 지어진 광한루는 그 위에 오르기만 해도 춘향이나 이몽룡의 마음을 조금은 읽을 수가 있을 듯하다. 광한루의 규모는 정면 5, 측면 4칸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누마루 주변에는 난간을 둘렀고 기둥 사이에는 4면 모두 문을 달아 놓았는데, 여름에는 사방이 트이게끔 안쪽으로 걸 수 있도록 해 놓았다.

 

 

 

 

 

호남제일루라 칭한 광한루에는 정조 때 붙여지은 건물이 있어 멋을 더하고 있다. 누의 동쪽에 있는 정면 2, 측면 1칸의 부속건물은 주위로 툇마루와 난간을 둘렀고, 안쪽은 온돌방으로 만들어 놓았다. 뒷면 가운데 칸에 있는 계단은 조선 후기에 만든 것이다.

 

춘향전의 무대로도 널리 알려진 광한루. 넓은 인공 정원이 주변 경치를 한층 돋우고 있어 한국 누정의 대표가 되는 문화재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는 이 광한루를 돌아보다가 괜한 생각을 해본다.

 

 

 

 

황희 정승(1363(공민왕 12)~1452(문종 2))은 역대 가장 뛰어난 재상으로 손꼽힌다. 조선 초기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노력한 유능한 정치가일 뿐만 아니라 청백리의 전형으로 알려졌다. 1416년 세자 양녕대군의 폐위에 반대했으며, 1418년에는 세자의 폐위가 결정된 후 태종의 미움을 사서 서인으로 교하에 유배되었다가 곧 남원으로 이배되었다.

 

광한루라는 명칭은 정인지가 붙였다고 했으니 춘향전이라는 소설이 그 뒤에 만들어진 것이란 생각이다. 광한루를 지은 황희 정승이나 광한루라는 이름을 붙인 정인지나 조선시대의 문인이자 정치가다. 이런 광한루에서 이몽룡이라는 걸출한 인물 하나가 나온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호남제일루인 광한루원에 첫눈이 내렸다. 명성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던가? 첫눈이 쌓인 광한루원은 영화촬영 한 장면이라도 찍었다면 그 아름다움을 더 자랑할 듯하다. 그래서 이곳은 늘 사랑이야기가 전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사진 남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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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를 놓쳐 더 아쉬운 청심루 복원

 

“4대강 정비를 할 때 청심루를 복원했어야죠. 이제 시기를 놓쳐 힘들게 되었습니다. 4대강 개발을 하면서 건설회사 한 곳이 2억을 들여 정자를 하나 여강 가에 지었는데 도대체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복원을 해야 할 것은 관심도 없고 말입니다.”

 

여주문화원 조성문 사무국장은 기회를 놓친 청심루의 복원이 못내 아쉽다고 한다.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글을 써 청심루의 아름다운 절경을 읊었기 때문이다.

 

청심루가 언제 지어졌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1200년대 초에 활동하던 이규보의 시에 강루가 나오고 있는 점이나, 1200년대 후반에 고려시대의 문인이자 지도첨의부사를 지낸 주열의 시에 청심루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800여 년 전에 지어진 정자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여주관아 안에 세운 청심루

 

청심루는 여주 관아 안에 있는 정자로 일반 백성들이 출입할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시문에 남아 있는 수많은 청심루에 대한 글도 모두 선비들의 작품들이다.

 

8세기 중엽에 제작된 <해동지도> 여주목 청심루 부분에 보면 동헌의 경내 남한강 가에 청심루가 있고, 누각의 양편에는 커다란 나무가 그려져 있다. 주열의 시에도 큰 나무가 서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청심루의 운을 써서 짓다(주열 : ? ~ 1287. 번역 조성문)

 

동그랗게 밝은 달이 구름 가에 나타나니

거울 속에서 예부터 친한 얼굴을 만나는 것 같네

쌍으로 선 나무는 보개의 그림자가 드리운 것이고

사화산은 수미의 무리가 드러누운 듯 하네

잉어는 아득한 저 너머로 처소를 전하고

검은 용은 어두움 속에서 명주를 숨기네

오경에 이르도록 시를 읊어도 시 더욱 기절하니

풍물로 인해 잠시라도 한가롭지 못하게 하네

 

여기서 풍물이라 함은 경치를 말하는 것이다. 청심루에서 바라다 보이는 경치가 얼마나 좋았기에 청심루의 운을 써서 시를 짓는 일이 새벽녘 오경(오전 3~5)까지 이어졌을까? 결국 밤을 새워 청심루의 절경을 읊었다는 것이다. 청심루에서 보이는 절경에 매료되어 글을 지은 사람들 중에는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역사의 인물들이 즐비하다.

 

 

 

수많은 명인들이 청심루를 시로 읊어

 

이규보, 이집, 이색, 정몽주, 이직, 서거정, 김종직, 성현, 김안국, 주세붕, 서산대사 등의 글에도 청심루의 경치를 노래했다. 가히 남한강 중 제일경이 아니라면, 200여 편이나 되는 청심루에 관한 시가 전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청심루는 도대체 어떤 모습으로 어디에 있었을까? 역사속의 자료에 남아 있는 청심루를 찾아보면 18세기 중엽에 제작한 해동지도여주목 부분에 청심루가 있다. 청심루는 강가에 자리하고 있으며, 동헌의 경내에 자리한다. 그리고 청심루의 양편에는 커다란 나무 두 그루가 있다. 주열의 시에 '쌍으로 선 나무'를 뒷받침하고 있다. 1796년 제작한 정수영의 한임강명승도에도 청심루가 그려져 있다.

 

 

 

조성문 여주문화원 사무국장은 그의 논문 팔대수와 청심루의 문화생태적 고찰에서 청심루가 지어진 시기를 1235 ~ 1236년으로 유추하고 있다.

 

고려시대 누정은 기념할 만한 일이 있을 때 해당지역 관아나 사찰부근에 세워지기도 했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여주사람 김약선의 딸이 태자비(뒤에 순경태후)로 뽑히던 1235년이나, 그 다음해인 1236년 충렬왕을 낳았을 때 축하의 의미로 청심루가 세워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만큼 청심루는 여주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누각이었던 것이다.

 

청심루와 관련이 있는 시는 200여 수가 넘게 전해지고 있다. 그 수많은 시 중에는 팔대장림, 신륵사, 마암, 동대, 양섬, 제비여울, 이릉 등 주변의 절경을 함께 그리고 있다. 이러한 청심루는 8.15 광복을 맞이하여 성난 민중들이 일본인 군수의 관사에 불을 놓았을 때, 곁에 있던 청심루까지 소실이 되고 말았다. 남한강 제일경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여주 남한강 가에 자리한 청심루 터를 알리는 비. 그리고 주변에 보이는 과거 속의 아름다움. 그런 것들이 다 사라지고 말았다. 고려 때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인들은 맑은 물 위를 한가롭게 노니는 돛배, 아름다운 여강의 낙조, 새벽 물안개 속의 모래톱, 동대의 휘영청 밝은 달, 배안에 떨어지는 신륵사의 종소리. 이런 아름다운 모습들을 읊으면서 저절로 시름이 가라앉는다고 했다. 이곳에 다시 청심루를 지을 수만 있다면. 또 얼마나 많은 시인들이 찾아들 것인가? 청심루 터를 떠나는 귓전에 서산대사의 시문이 울린다.

 

 

 

해질 무렵 여강에 배를 대다(서산대사 : 1520 ~ 1604)

 

落雁下長沙 낙안이 장사에 내리고

樓中人起舞 누 가운데 사람이 춤을 추네

淸秋一葉飛 청추에 한 잎 낙엽이 날리는데

客宿西江雨 객숙 서강엔 비가 내리네

 

남한강의 긴 모래밭에 겨울 철새들이 내려앉고, 청심루에는 어느 사람이 춤을 추고 있다고 했다. 맑게 갠 가을에 낙엽이 날리는데, 나그네가 묵을 여강 서쪽에는 비가 내린다는 이야기다. 청심루와 남한강의 어우러짐을 그리고 있다. 사라져버린 남한강의 절경 청심루, 그 모습을 다시 볼 수는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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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금강가에 소재한 공산성은 백제시대의 산성이다. 총 길이 2,200m의 공산성은 포곡형 산성으로 백제 문주왕이 475년에 웅진(공주)으로 천도하여 64년 동안 백제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인 공주를 보호하기 위해 쌓은 성이다.

 

공산성을 한 바퀴 돌다가 보면 금강 가에 접한 가파른 산성 길을 걷게 된다. 금강 쪽이나 성 안쪽 모두가 급격한 경사로 이루어져, 이곳의 성곽은 1m 남짓하게 쌓아올렸다. 금강을 이용해 적이 침입을 한다고 해도, 이렇게 험한 곳으로는 범접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다.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는 만하루

 

그 가파른 성 길을 따라 내려오면 밑에 정자가 보인다. 만하루는 공산성을 방비하는 군사적 시설과 경승을 관람하는 누각의 구실을 겸하고 있는 정자이다. 만하루를 지나면 다시 경사가 진 곳을 오르게 되기 때문에, 이 정자가 더 돋보이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만하루는 조선 후기인 영조 때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1982년에 홍수로 매몰되었던 터를 발견하면서 1984년에 측면 2, 정면 3칸의 건물로 복원하였다. 8각으로 다듬어진 초석이나 기단석, 디딤돌 등은 당시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였다는 만하루. 성을 한 바퀴 돌아 흐르는 땀을 주체할 수 없는데, 정자에 오르니 시원한 강바람이 불어온다. 때마침 주변에서 작업이라도 하는 것인지, 인부 10여명이 정자에 올라 휴식을 취하고 있다.

 

만하루에 오르면 금강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양편 성벽을 자리 잡아 고목 한 그루가 서 있다. 아마 이런 절경에서 금강을 바라보면서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글이라도 한 자 남겼을 터인데, 정작 정자 안에는 그러한 글 한귀를 찾아볼 수가 없음이 아쉽기만 하다.

 

 

 

 

금강의 물을 이용한 연지(蓮池)

 

만하루와 성내의 절인 영은사 사이에는 연지라는 못이 있다. 이 연지는 금강 가까이에서 물을 확보할 수 있는 지형상의 조건을 이용한 것이다. 연지를 보면 이 연못이 남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붕괴를 막기 위해 돌로 계단식의 축대를 쌓아 올렸다. 깊은 연못에 연꽃이라도 만개했었을까? 그 이름을 연지(蓮池)라고 부른 것을 보면.

 

연못의 북쪽과 남쪽에 계단을 놓아 수면으로 내려갈 수 있도록 한 것도 알고 보면 이 연못에 연꽃이 있었음을 그려 볼 수 있다. 만하루에서 내려다보는 연꽃이 조금은 아쉬워 직접 연못 수면으로 내려가 연꽃을 관람하였을 것이다.

 

 

 

요즈음 사람들은 아름다운 것을 눈으로만 보는 것은 아닐까?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보면 괜히 그런 생각이 든다. 아름다운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텅 빈 연못이지만, 옛 모습을 그려보면 절로 흥이 난다.

 

날도 더운데 땀 흘리며 왜 길을 나서느냐고 묻기도 한다. 그러나 마음으로 보는 문화재는 그 아름다움을 글로는 표현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조금은 답답하기도 하지만. 하지만 마음의 눈을 열고 보면 그 문화재의 이름다움을 보고, 그 소중함을 깨닫기 때문에 길을 나서게 되는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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