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주사 범종에 미쳐 자릴 못 떠나다

 

사람이 살면서 가끔은 미칠 때가 있다. 난 그렇게 내가 미칠 수 있다는 것이 즐겁다. 무엇엔가 미칠 때가 가장 행복하기 때문이다. 20년이 넘는 세월을 전국을 유람을 하면서 문화재를 만났다. 그런데 가끔은 정말 미칠 때가 있다. 난 문화재 전문가도 아니다. 그렇다고 문화재에 대해 해박한 지식이 있는 것은 더 더욱 아니다. 그저 우리 문화재가 소중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 오랜 시간 전국의 문화재를 찾아다녔다.

 

아마 그동안 길거리에 쏟아 부은 돈만 해도 엄청나다. 한 번 답사를 나가면 짧게는 12일이지만 길게는 몇 날을 길에서 보냈으니 말이다. 그동안 답사를 한다고 돌아다니면서 사용한 경비만 해도 넓은 아파트 한 채는 사고도 남을 만하다. 내가 미치지 않고서는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 그래서 주변에서는 곧잘 나에게 문화재에 미친 정신병자라고 놀려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소리를 들어도 내 미친병은 나아지지를 않았으니 미쳐도 곱게 미친 것은 아닌 듯하다.

 

며칠 전인가? 8일이었나 보다. 화성시 용주로 136(송산동)에 위치한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를 찾아갔다. 벌써 다녀온 지가 2년이 훌쩍 지났기에 그동안 무슨 변화라도 있을 듯해 찾아간 절이다. 절 입구에는 무슨 일이 있는지 현수막에 얼굴 붉힐만한 사연들이 적혀있다. 다시 이곳을 찾을 때는 자세한 내막을 알아보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절 안으로 향했다. 문화재를 찾아온 발길이기 때문이다.

 

오색 등과 함께 빛나는 용주사 범종

 

절 안으로 들어가니 절 마당에는 오색 등이 걸려있다. 부처님 오신 날 준비를 하느라 많은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다. 정면 중앙에 자리 잡은 대웅보전 계단 아래는 꽃으로 장식한 아기탄생불이 놓여있고 불자들은 그 앞에 머리를 숙여 합장을 한 후 물을 작은 바가지에 퍼 탄생불을 씻어내는 관욕 의식을 행하고 있다.

 

잠시 머리를 숙이고 난 뒤 계단을 올라 대웅보전을 바라보고 좌측 범종각으로 향했다. 늘 용주사를 찾을 때마다 둘러보는 범종이지만 볼 대마다 그 느낌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라보는 내 마음이 늘 같지 않음을 뜻한다. 어느 날은 종 앞에서면 평온한 종소리가 울리는 듯하고, 어느 날은 마른하늘에 벼락이 치듯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내 마음이 평온한 날과 번뇌가 가득한 날의 차이란 생각이다.

 

범종각 앞에 머리를 숙이고 잠시 생각을 한다. 왜 이 범종은 볼 때마다 느낌이 다른 것일까? 그동안 수많은 범종을 만나면서 꼭 이 범종 앞에만 서면 느낌이 달라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이날 역시 범종을 바라보고 섰지만 마음이 영 편치가 않다. 무슨 일일까? 절 삼문을 들어서기 전 눈에 띤 현수막 때문이었을까?

 

 

범종 하나가 주는 교훈

 

종각 안에 놓인 범종을 둘러본다. 종각을 몇 바퀴 째 돌면서 하나하나 훑어본다. 도대체 국보와 보물의 차이는 무엇일까? 오히려 이 종보다 더 멋진 종을 본 기억이 나는데 보물이었다. 그런데 이 종은 왜 국보로 지정된 것일까? 국보 제120호 용주사 범종이 다른 점은 무엇일까? 범종의 높이 1.44m, 입지름 87cm의 신라 범종의 양식을 따른 용주사 범종. 명문에는 신라 문성왕 16년인 854년에 주조한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으나 신라의 종과는 일치하지 않아 고려 전기의 종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맨 위에는 음통이 있고, 용 모양으로 조형한 종을 걸 수 있는 용뉴가 있다. 조형은 세심하게 되어있으나 다른 종과 다를 것은 없다. 종의 몸통에는 여의두문과 당초문이 조각되어 있다. 그 조각한 솜씨를 보니 그저 화선지에 그림을 그려놓은 듯 정교하다. 왜 지금까지 이런 정교함을 발견하지 못한 것일까?

 

다시 당초문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마치 금방이라도 종에서 자라난 당초문이 종각을 타고 위로 타고 오를 듯 생동감이 넘친다. 어떻게 쇠붙이에 이런 조각을 할 수 있었을까? 머리 띠 아래로는 4개의 유곽과 9개의 유두, 그 아래는 천의를 날리고 있는 비천상과 심존상, 그리고 종을 치는 자리인 당좌와 소용돌이 모양으로 새겨 넣은 연꽃문양, 신라 문성왕 때 주조했다는 명문 등이 있다. 몇 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종이 보인다. “~ 그래서 국보였구나?”

 

그런데 몇 바퀴를 종각을 돌아보다가 희한한 것이 보인다. 천의 자락을 날리는 비천상과 두광을 갖추고 결가부좌를 한 채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날고 있는 삼존상이 달라 보인다.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종을 벗어난 비천상과 삼존상이 하늘을 날고 있다는 느낌이다. 범종의 그 딱딱한 쇠붙이에서 어떻게 튀어 나온 것일까?

 

왜 늘 그 자리에 조각되어 있던 비천상과 삼존상이 갑자기 종 밖으로 날아오르는 느낌이 들었을까? 눈을 부비고 다시 들여다본다. 이번에는 자리가 달라진 듯하다. 분명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내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나보다라는 생각을 한다. 그동안 누구 하나 도와주는 이도 없었는데 너무 오랫동안 미친 짓을 했기 때문인가 보다.

 

 

아무래도 헛것이 보이기 시작한 것일까? 늘 답사를 떠날 때마다 마음을 졸이며 경비를 사용하려고 돈을 움켜잡고 있다가 며칠 만에 빈 털털이가 되어 돌아오는 답사를 계속하다 보니 이젠 헛것이 보이는 게 틀림없다. 20년이 넘는 세월을 길가에 뿌려댄 돈이 이젠 나를 미치게 만드는 것인가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범종에 새겨진 비천상들이 하늘을 날아오를 것인가?

 

처사가 이젠 보는 눈이 열린 게야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주변엔 아무도 없는데 말이다. 비용이 딸려 답사를 오래도록 하지 못했더니 이젠 정신까지 달아났는가 보다. 하지만 그런들 어떠하랴. 하늘을 나는 비천상과 종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말이다. 누가 믿고 안 믿고는 그들의 판단이다. 나는 이렇게 문화재에 미쳐 돌아가고 있는 것으로 족하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국보 제120호 용주사 동종의 조형에 반하다

 

경기도 화성시 용주로 136에 소재한 용주사. 일 년이면 4~5차례 이곳을 들린다. 용주사에 들리면 빠트리지 않고 돌아보는 것이 바로 국보 제120호인 용주사 동종이다. 용주사 동종은 신라의 종 양식을 보이는 종으로 고려시대 초기에 만들어졌다. 거대한 범종인 이 동종은 높이1.44m에 입지름 0.87m, 무게는 1.5톤이다.

 

용주사 경내로 들어가면 대웅보전의 계단을 올라 왼쪽에 범종각이 자리한다. 이 범종각은 1911년 무렵에는 ‘보신각(普信閣)’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종의 윗부분에는 신라 종에서 보이는 용뉴와 음통이 있다. 용뉴는 용이 정상부의 보주를 물고, 발톱을 세워 종의 상륜부 철판을 붙들고 있는 형태이다.

 

 

 

비천인들은 바로 날아오를 듯

 

용통은 연주문을 돌렸는데, 여섯 단으로 구분을 하고 당초문과 연꽃잎으로 장식하였다. 종의 어깨 부분은 구슬무늬로 테두리를 하고 있으며 아래 위가 서로 어긋나게 반원을 그리고 그 안에 꽃과 구슬문양을 새긴 넓은 띠를 두르고 있다. 이 띠는 사각형 모양의 유곽과 한 면이 붙어 있다.

 

사방에 조성한 유곽 안에는 9개의 돌출된 연꽃 모양의 유두를 조형했다. 종의 몸체 앞뒤에는 비천상을 좌우에는 삼존상을 새겨 넣고 사방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두었다. 비천상과 삼존상은 모두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 모습인데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 옷자락이 가볍게 날리고 있다.

 

상대의 경우 신라 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원권 아래위에 서로 교대로 배치하고 그 사이 사이에 당초문양으로 장식을 하였다. 종 밑 입구에 돌린 하대에는 구슬무늬로 테두리를 하고 어깨띠와는 다르게 연속 된 당초문양으로 장식하여 멋스러움을 더한 것이 이 동종의 특징이 되고 있다.

 

 

 

 

신라 때 조성했다고 후대에 새겨

 

종신의 비천상과 삼존불상의 사이에 추각한 명문에 의하면 이 종을 신라 문성왕 16년인 854년에 주조된 것이라 하는데 이는 종의 형태가 고려양식이라는 점에서 일치하지 않는다. 종에 새겨진 명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성황산(成皇山) 갈양사 범종 한 구 석(釋) 반야(般若)가 2만 5천근을 들여 조성하였다. 금상(今上) 16년 9월 일 사문 염거(廉居) 연기(緣起)

 

종에 새겨진 이 명문은 통일신라 문성왕 16년(854)에 조성된 것이라고 후대에 새긴 글로 추정하고 있다. 국보 제120호인 이 용주사 동종은 용통에 약간 금이 가고 유두가 부서진 것 외에는 보존 상태가 좋으며, 조각한 수법이 뛰어나 고려 종의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비천도인은 손목에 묶은 ‘표대’(혹은 복대라고도 한다)를 바람에 날리며 그 표대로 하늘을 날면서 바람의 방향과 이동하는 방향을 알 수 있게 만든다. 생명에 없는 차디 찬 금속에 새겨진 비천도로 인해 종이 생명을 얻는다. 아마 비천인들을 새겨 많은 화공이나 조각을 하는 장인들은 그들 스스로가 하늘을 날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비천도는 범종에 많이 장식되지만, 법당의 천정이나 석등, 부도, 불단, 또는 전각의 외부 단청 등에도 나타난다. 비천은 ‘불국(佛國)’을 날며,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춘다. 때로는 두 손에 공양물을 받쳐 들기도 하고 꽃을 뿌려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다. 천의(天衣) 자락을 휘날리며 허공에 떠 있는 비천상은 도교 설화 속의 선녀를 연상케 한다.

 

 

 

아름다움의 상징 비천인

 

한국민예미술연구소장인 허균의 글에 따르면(2005, 1, 14 불교신문) 2000여 년 전 불교가 인도로부터 중국으로 전래될 때 비천도도 그 뒤를 따랐다고 한다. 불교의 중국 전래의 통로였던 돈황 막고굴 벽에 그려진 비천상은 인도신화의 건달바나 긴나라의 괴이한 모습이 아닌 도교의 여신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상반신은 배꼽을 드러낸 나체이고 하반신은 비단처럼 부드러운 속옷 차림이다. 표정 또한 요염하고 손동작은 유연하고 섬세하다.

이렇게 매력적인 모습으로 변신한 비천상이 4세기 말경 우리나라 삼국 시대에 불교와 함께 전해졌다. 불교미술에 수용이 된 비천상은 약간의 양식적 변천을 거치며 한국적 비천상으로 정착됐다고 한다. 이후 한국 불교의 모든 곳에서는 비천상이 불교미술의 한 장르로 자리를 잡으면서 나름대로의 모습으로 정착한 것으로 본다.

 

나는 절마다 찾아다니며 비천도를 유심히 보고 사진에 담는 버릇이 생겼다. 그래서인가 절집에 들리면 먼저 벽화며 탱화에 그려진 비천도를 찾는 것이 일과처럼 되어 버렸다. 그것은 비천도를 잘 알아서가 아니라 그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 새 나 자신이 천인이 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이다.

 

 

 

비천인상에 빠져들다

 

음악을 전공한 나로서는 부처님을 찬양하는 천인상이라는 비천도가 마음에 와 닿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인가 요즈음 현실적으로 많이 발전한 비천도를 보면 비파를 타거나 횡적을 불거나 아니면 춤을 추는 비천도도 있다. 심지어는 무당춤을 추는 비천도까지 그려질 정도니 나날이 변화를 해가는 천인상인 비천도는 이제 종교의 굴레에서 벗어나 한 장르로 발전을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런 비천상을 만날 때마다 달라지는 기분은 스스로의 마음이다. 비천상을 바라보며 느끼는 당시의 느낌이 바로 나란 생각이다. 불교의 교리 하나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 그저 전각에 들어서면 절로 머리를 조아리고 참례를 한다. 그리고 비천상을 물끄러미 쳐다보기가 일쑤이다. 하늘을 날고 있는 그 비천인의 모습에서 굳이 내 모습을 그려보기도 한다.

 

불국토가 따로 있겠는가? 그 비천상을 따르는 마음 하나가 불국토가 아닐는지. 오늘도 마음 한 자락 허공에 띄워 비천인이 되고 싶은 마음이다. 세속의 답답함을 훌훌 떨쳐내고, 어디론가 겨울 찬바람에 실려 떠나고 싶은 마음이기 때문인가 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경기도 화성시 용주로 136에 소재한 용주사. 일 년이면 4~5차례 이곳을 들리고, 들리면 곡 돌아보는 것이 바로 국보 제120호인 용주사 동종이다. 용주사 동종은 신라의 종 양식을 보이는 종으로 고려시대 초기에 만들어졌다. 거대한 범종인 이 동종은 높이1.44m에 입지름 은 0.87m, 무게는 1.5톤이다.

 

용주사 경내를 들어가면 대웅보전의 계단을 올라 왼쪽에 범종각이 자리한다. 이 범존각은 1911년 무렵에는 보신각(普信閣)’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종의 윗부분에는 신라 종에서 보이는 용뉴와 용통이 있다. 용뉴는 용이 정상부의 보주를 물고, 발톱을 세워 종을 천판을 붙들고 있는 형태이다.

 

 

비천인들은 바로 날아오를 듯

 

용통은 연주문을 돌렸는데, 여섯 단으로 구분을 하고 당초문과 연꽃잎으로 장식을 하였다.종의 어깨 부분은 구슬무늬로 테두리를 하고 있으며, 아래 위가 서로 어긋나게 반원을 그리고 그 안에 꽃과 구슬문양을 새긴 넓은 띠를 두르고 있다. 이 띠는 사각형 모양의 유곽과 한 면이 붙어 있다.

 

사방에 조상한 유곽 안에는 9개의 돌출된 연꽃 모양의 유두를 조형했다. 종의 몸체 앞뒤에는 비천상을, 좌우에는 삼존상을 두었다. 사방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두었다. 비천상과 삼존상은 모두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 모습인데,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 옷자락이 가볍게 날리고 있다.

 

 

상대의 경우 신라 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원권 아래위에 서로 교대로 배치하고, 그 사이 사이에 당초문양으로 장식을 하였다. 종 밑 입구에 돌린 하대에는 구슬무늬로 테두리를 하고 어깨띠와는 다르게 연속 된 당초문양으로 장식을 하여 이 동종의 특징이 되고 있다.

 

신라 때 조성했다고 후대에 새겨

 

종신의 비천상과 삼존불상의 사이에 추각한 명문에 의하면, 이 종을 신라 문성왕 16년인854년에 주조된 것이라 하는데, 이는 종의 형태가 고려양식이라는 점에서 일치하지 않는다. 종에 새겨진 명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성황산(成皇山) 갈양사 범종 한 구 석() 반야(般若)25천근을 들여 조성하였다.금상(今上) 169월 일 사문 염거(廉居) 연기(緣起)

 

 

종에 새겨진 이 명문은 통일신라 문성왕 16(854)에 조성된 것이라고 후대에 새긴 글로 추정하고 있다. 국보 제120호인 이 용주사 동종은 용통에 약간 금이 가고 유두가 부서진 것 외에는 보존 상태가 좋으며, 조각한 수법이 뛰어나 고려 종의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문화재 답사를 다니다가 보면 가끔 문화재의 품격이 달라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대개는 격강이 되는 것이 원칙이지만, 어떤 때는 격하가 된 것들을 만나기도 한다. 그럴 때는 괜히 마음이 짠하다. 아마도 문화재에 문제가 있었던지 아니면 문화재 보관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경기도 가평군 하면 운악산에 있는 현등사의 동종은 예전에는 경기도 지정 유형문화재였다가 지난해 1227일 보물로 격상이 된 예이다. 이럴 때면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보물을 만났다는 것도 그렇지만, 그 문화재가 그만큼 소중하거나, 아니면 제작 연대 등이 밝혀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봉선사에 봉안되었던 동종

 

가평 현등사에 소재한 동종은 원래 현등사의 본사인 남양주 봉선사에 봉안되어 있었던 것이다. 봉선사에는 보물로 지정된 또 하나의 동종이 보관되어 있는데, 이 동종은 일제강점기에 현재의 현등사로 옮겨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등사 동종은 73.5cm의 아담한 크기로 종신을 여러 개의 구획선으로 나누고, 그 안에 연잎무늬, 당초무늬, 파도무늬 등을 화려하게 새겨 넣어 장식을 강조한 범종이다.

 

 

머리부분인 용뉴는 두 마리 용이 서로 등을 맞대어 몸을 꼬고 있어 안정감을 주고, 두발을 힘차게 내딛어 천판을 들어 올리는 모습에서 역동적인 표현력이 뛰어나다감. 비록 크기는 그리 크지 않지만, 둥근 곡면을 이루는 천판에서부터 종의 입으로 내려오면서 조금씩 그 폭을 넓힌 종의 형태도 아름답다.

 

주종기를 종에 기록한 소중한 자료

 

현등사 동종의 배 부분에 보면 해서체로 주종기를 돋을새김 하였다. 주종기는 광해군 11년인 1619년에 천보가 짓고 글을 새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이 동종을 만들게 된 연유와 종 제작에 사용된 재료의 양과 무게등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 뿐이 아니라 이종의 시용 용도와 참여한 사람 등도 함께 기록하고 있다.

 

 

주종기에 보면 주종장은 주종기를 작성한 천보로 보고 있는데, 그는 조선후기 승려 주종장 가운데 유일하게 임진왜란 이전부터 활동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어,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의 승장의 계보나 범종의 양식 흐름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인물이다.

 

현재 현등사에 보관되어 있는 이 종은 1619년에 조선 전기 궁중양식 범종의 전통을 계승하여 제작된 범종이며, 주조상태도 양호하고 역동적이다. 종에 새긴 문양은 생동감이 있는 무늬들을 조화롭게 배열한 점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조선후기 범종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중국종의 양식을 따른 종

 

현등사 동종은 고려 후기 연복사종에서 비롯된 중국 종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특히 종의 중심부를 세 개의 융기선으로 구획하고, 천판에서 종의 입 사이에 다양한 무늬를 시문하여 절로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작은 마름모꼴의 연곽에 구슬 모양의 연꽃봉우리라든가, 천판의 내림연꽃이 중앙을 향해 보상화문처럼 말려든 형태와 그 위로 표현된 구슬무늬 등이 아름답다.

 

 

또한 종의 블록한 배 부분에 크게 자리 잡은 역동적인 연화당초무늬와, 하대에 표현된 물거품이 일렁이는 파도무늬 등은 장엄의 극치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요소는 1469년 작 남양주 봉선사 동종(보물 제397)이나 흥천사명 동종(보물 제1460), 그리고 1491년 작 합천 해인사 동종(보물 제1253) 등 조선전기의 왕실발원 범종의 전통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원래 이 종을 소장했던 봉선사도 왕실의 원찰이었기 때문에, 이전에 만들어진 궁중양식 범종의 여러 가지 요소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에 소재한 전등사. 전등사가 창건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11년인 381년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것이 서기 372년이므로 지금은 그 소재를 알 수 없는 성문사, 375년에 창건한 이불란사에 이어 전등사는 한국 불교 전래 초기에 세워진 이래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사찰임을 알 수 있다.

 

처음에 전등사를 창건한 것은 진나라에서 건너온 아도 화상이었다. 당시 아도 화상은 강화도를 거쳐 신라 땅에 불교를 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도 화상이 강화도에 머물고 있을 때 지금의 전등사 자리에 절을 지었으니 그때의 이름은 진종사(眞宗寺)’라 하였다.

 

고려 왕실에서는 삼랑성 안에 가궐을 지은 후 1266년에 진종사를 크게 중창시켰으며, 16년이 지난 충렬왕 8년인 1282년에는 왕비인 정화궁주가, 진종사에 경전과 옥등을 시주한 것을 계기로 전등사라 사찰 명칭을 바꾸었다. 이때는 고려 왕실이 개경으로 환도한 뒤였고, 39년 동안 쓰였던 강화 궁궐터는 몽골군에 의해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삼랑성 안의 전등사는 꾸준하게 사세를 유지해나갔다.

 

중국 하남성 백암산 숭명사의 종

 

전등사 대웅보전 앞에 자리하고 있는 범종각 안에는 보물 제393호인 전등사 철종(傳燈寺 鐵鍾)’이 있다. 이 종은 우리나라의 범종과는 그 모습이 전혀 다르다. 이 쇠로 만든 철종은 일제강점기 말기에 금속류의 강제수탈로 빼앗겼다가, 광복 후 부평 군기창에서 발견하여 전등사로 옮겨 현재까지 보존하고 있다.

 

전등사 철종은 형태와 조각수법에서 중국종의 모습을 하고 있다. 종의 높이는 1.64m, 입지름 1m의 종으로, 종 꼭대기에는 두 마리의 용이 서로 등지고 웅크려서 종의 고리를 이루고 있고, 소리의 울림을 돕는 음통은 없다. 몸통 위 부분에는 8괘를 돌려가며 나열하고, 그 밑으로 종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각각 8개의 정사각형을 돌렸다.

 

 

겉에는 상하로 구획이 지어져 띠가 둘려 있는 형태를 보이고 있다. 또 표면에 8개의 네모진 구획이 마련되어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많이 마멸되어 판독하기가 어렵다. 이 정사각형사이에는 명문을 새겼는데, 이 명문으로 중국 하남성 백암산 숭명사의 종이라는 것과, 북송 철종 4, 곧 고려 숙종 2년인 1097년에 주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에 의해 강제 수탈되었던 종

 

이 종은 기하학적 무늬로 장중하고 소박한 중국 종의 솜씨를 보이며, 종소리가 맑고 아름다운 게 특징이다. 이 종은 일제 말기 군수 물자 수집에 광분한 일제가 공출이란 명목으로 빼앗아 가는 바람에 한때 전등사를 떠나기도 했다. 하지만 광복 이후 부평 군기창에서 발견되어 다시 전등사로 옮겨왔다.

 

 

전체적인 종의 형태가 웅장하고 소리가 청아하며, 중국 종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는 문화재로 평가를 받고 있는 전등사 철종. 이 종이 어떤 경로를 통해 전등사로 유입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일제에 의해 공출이 되었던 종이, 무사히 전등사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만한 일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