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자료 등 알릴 수 있는 전시공간 필요해

 

수원시 향토유적 제8호는 수원시 팔달구 화서동 688-4에 소재한다. 화서2동 주민센터 바로 앞에 자리하고 있는 꽃뫼 제사유적지는 수원시가 문화재 지정을 받지 못했지만 보호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인정되기 때문에 향토유적으로 지정한 것이다. 각 지자체마다 지역의 비지정 문화재 중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을 보존하는 방법이 바로 향토유적 지정이다.

 

꽃뫼 제사유적지는 수원 서북부 서호천 근처의 낮은 구릉에 위치하고 있다. 이 유적지는 택지개발지구로 예정되면서 1995년 수원대학교 박물관의 지표조사를 통해 알려지게 되었으며 1997년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유적에 관한 성격이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제사유적지란 이곳이 아주 오래전부터 마을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곳의 발굴조사에서 발견된 유구로는 석축과 토광묘, 옹관묘 등이었고, 유물은 토기류와 백자, 청자, 분청사기 등 자기류, 청동숟가락, 상평통보, 쇠칼, 각종 제시용구 등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유적지는 초기 철기시대인 BC300~0로 철기 전기부터 조선조까지 제사를 지냈던 흔적으로 보인다고 한다.

 

9일 오후 화서2동 주민센터 앞에 있는 꽃뫼 제사유적지를 찾아갔다. 쌀쌀한 날씨지만 이곳에서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 궁금했기 때문이다. 제사유적지임을 알리는 안내판 뒤로 낮은 구릉이 있고, 그 중심으로 오르는 비탈에 펜스가 쳐있다. 유적지치고는 상당히 좁은 면적이다.

 

 

낮은 구릉에 자리한 꽃뫼 제사유적지

 

유적지로 지정해 펜스를 쳐 놓은 곳을 한 바퀴 돌아본다. 이곳이 초기 철기시대의 제시유적지라고 하면 인근에 마을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예전에 마을의 형성에는 반드시 물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앞으로 흐르는 서호천을 끼고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발견이 되었다는 안내판 하나만 있을 뿐 그 어느 것도 찾을 수 없다.

 

구릉 중심에는 커다란 참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그 줄기 안에 누군가 보도블록을 끼어 놓았다. 도대체 나무에 왜 이렇게 몹쓸 짓을 한 것일까? 철책 안까지 들어가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을 치우지 않고 방치했다는 것은 이곳을 향토유적으로 지정만 해놓았지 아무도 관리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초기철기시대는 원삼국시대로 서기전 100년경부터 서기 300년경까지의 약 400년간의 기간을 이른다. 이 시대는 서기전 100년경 한반도 북부 및 중국 동북지방 일원에서 고대국가 고구려가 일어나고 한반도 서북부에 낙랑군이 설치된 시기이다. 남부에서 도구용 이 시기에 청동기가 소멸하고 철기가 본격 생산되는 가운데 삼한 소국들이 성립되는 시기였다.

 

이 시기에 나타나는 문화적 특징으로는 청동기의 실용성 소멸과 철기생산의 보급 및 확대, 농경(벼농사)의 발전, 지석묘의 소멸과 석곽묘의 발달 등이다. 이 시기는 한반도에 원삼국이 삼국시대로 본격적으로 변화하는 시기를 말하며 문물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고 마을의 구심점이 되는 제의가 이루어지는 시기이다.

 

 

제사유적지라고 알릴만한 자료 없어

 

과거 민족은 농사가 시작되기 전과 농사를 마친 후 하늘에 감사하는 의식을 가졌다. 흔히 맞이굿이라고 부르는 이 제사는 온 마을의 사람들이 모여 3일간 주야로 쉬지 않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음식을 나누는 답지저앙 수족상응의 형태를 즐겼다고 한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三國志 魏志 東夷傳) 고구려편에 以十月祭天, 國中大會, 名曰東盟(시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국중대회를 여는데, 이를 '동맹'이라고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이 시대의 고구려의 동맹이나 예의 무천, 부여의 영고 등은 모두 하늘에 감사하며 사람들이 어울려 춤추고 즐겼다는 것이다.

 

이곳 꽃뫼 제사유적지가 당시 하늘에 감사하던 제를 지내던 곳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이곳에서 발굴된 것들을 사진자료나마 보여줄 수 있는 안내판이 마련되어야 한다. 어떤 것들이 발굴당시 발견되었는지 알 수 있는 자료가 없다보니 단지 이런 것들이 발견되었고 이곳이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다는 것 외에는 알 길이 없다.

 

초기철기시대부터 조선조까지 제사가 이루어졌다는 꽃뫼 제사유적지.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 등을 진열해 놓을 수 있는 작은 전시관 하나라도 마련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단순히 제시유적지라는 소개만으로는 이곳이 문화재적 가치가 중요한 곳임을 알리기 부족하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을 이곳이 사람들이 살던 군락지임을 알리는 제사유적지의 가치는 상당하기 때문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용인시 이동면 서리 백자요지까지 찾아가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상갈로 6(상갈동)에 소재한 경기도박물관. 한 때는 이곳을 매주 드나들던 때도 있었다. 모 무형문화재 단체를 관리하면서 이곳 공연마당에서 매주 공연을 이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랬던 곳을 일부러 찾아간다는 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은 그만큼 사는 것이 바쁜지, 아니면 문화재에 대한 열망이 식어서인지 모르겠다.

 

지난 22일 경기도박물관을 찾았지만 아침부터 비가 내린 날이라 카메라를 소지하고 찾아가질 못했다. 날이 궂으면 민감하게 반응하는 카메라 때문에 아무래도 행동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6일 다시 찾아간 경기도박물관. 이곳을 찾아가면 평소 내가 좋아하던 장승이며 탑비, 고인돌, 초상 등 많은 문화유적의 진본 및 모형을 만날 수 있어 즐겁다.

 

하지만 이번에 경기도박물관은 찾은 것은 용인시 서리 백자요지에 관한 내용을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물론 나는 도자에 대해서 잘 모른다. 하지만 주변에 많은 지인들이 도공들이고 그들에게 들은 것들이 있기 때문에 공부도 할 겸 경기도박물관과 용인시 이동면 중덕로7(서리 산23-1)에 소재한 사적 제329호 용인서리 백자가마요지를 돌아보기 위해서이다.

 

 

광교산 창성사지가 가마터를 돌아보게 된 이유

 

예전에는 곳곳에 가마터가 있었다. 사찰 등에서는 사찰 한편에 가마를 만들어 그곳에서 직접 기와 등을 구워내 절을 짓는데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동안 여기저기 다니면서 꽤 많은 가마터를 만나고 다녔지만 그 중 가장 큰 가마터가 바로 용인시 이동면에 소재한 서리백자요지라는 것이다.

 

사실 가마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86년 수원시 향토유적 제4호로 지정됐다가 31년 만에 경기도 기념물로 승격된 장안구 상광교동 산41에 소재한 창성사지를 돌이보고 난 후부터이다. 이곳을 찾아갔을 때 유난히 많은 와편과 도자조각들을 보면서이다. 수원시는 한신대박물관과 함께 2014년부터 2016년까지 창성사지 발굴조사를 했으며 지난해 12월 수원화성박물관에서 고고학과 문헌을 통해 본 수원 창성사지의 역사적 가치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한 바 있다. 이 자리에서 연구원들은 고려말 진각국사 천희의 탑비가 있었던 터를 확인했고 중심 건물과 부속 건물터, 고급 청자와 백자 등 많은 유물을 발굴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더욱 경기도박물관 2층 전시실에서 만난 서리백자요지의 모형을 보고나서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는 직접 가마터를 돌아보고 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것이다. 서리가마는 벽돌로 된 가마와 진흙으로 지은 가마가 확인되었는데, 벽돌가마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밝혀진 것이고 진흙가마는 길이 83m의 대형가마로 출입구가 27개나 확인되었다고 한다.

 

더욱 이 가마터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가마터로는 가장 큰 대형가마이고 서리 백자요지를 찾아가면 옛 가마모형을 알아볼 수 있다는 말에 한 번에 돌아보리라 미음 먹고 길을 나선 것이다. 날은 바람이 불고 쌀쌀한데 가마터를 찾아가는 길도 쉽지 않았다. 몇 번이고 남의 집 울타리 안으로 들어갔다가 지청구를 듣기도 했다.

 

 

광교산에도 가마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용인은 일찍부터 요업이 발달한 지역으로 <세종실록지리지>에 영인에 도기소와 자기소가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려시대 전기부터 조선시대 말기까지의 가마터 72기가 용인시 전역에 걸쳐 분포하고 있었으며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에는 19개소의 가마터가 분포하고 있는데 서리일대의 중덕 가마터와 호암미술관 근처의 상반 가마터 등 여러 곳의 가마터가 발견되어 이 지역이 고려시대 백자 생산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이 가마터의 출토물로는 백자가 주종을 이루고 있지만 초기의 해무리굽 청자완층이 발견되어 이곳에서 고려청자의 생산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가마터의 발견으로 인해 고려청자가 10세기 후반에 생산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 가마터가 놓였던 자리에는 많은 자기편들이 보인다.

 

우리나라 청자와 백자를 주도했던 용인시. 하지만 현재 용인은 우리 도자사에 기록될 만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세계도자축제 등에서는 빠져있어 안타깝다. 수원 창성사지에서도 많은 고급 청자와 백자 등이 발굴되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89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하는 이곳 광교산 어디엔가 가마터가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내년 날이 풀리기를 기다려 광교산 일대를 돌며 가마터를 한 번 찾아보아야겠다는 생각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그 안에 옛날 나의 얼굴은 없는 것일까?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분원길 3-69(남종면 분원리 68)에 소재한 얼굴박물관. 남종면 소재지를 들어서 좌측 골목 안에 자리하고 있는 얼굴박물관은 한 마디로 각종 얼굴을 다 모아놓은 곳이다. 이곳은 연극 연출가 김정옥이 지난 40여 년간 수집해온 우리의 옛사람들이 만든 석인, 목각인형, 도자기 등과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의 도자인형과 유리로 된 인형들을 모아놓은 곳이다.

 

또한 사람의 얼굴을 본 딴 와당과 가면 등, 그들의 풍부하고 다양한 표정 속에 담겨있는 장인의 예술적 감수성과 시간의 흐름이 만나 무엇이라 형언할 수 없는 창조적 손길을 느끼게 하는 조화를 한자리에 모아 <사람과 얼굴>의 공간을 구상함으로서 얼굴 박물관을 탄생하였다고 한다.

 

김정옥이 반세기에 걸쳐 모은 1000점이 넘는 얼굴의 조형은 다양하다. 석인, 옛돌사람 (벅수, 문관석, 무관석, 동자석, 선비석, 민불 등)300여점, 목각인형 (상여나 꼭두극 또는 불교미술)200여점, 도자기나 테라코타의 인형(한국의 명기, 당나라, 일본 등) 50여점, 와당 (한국, 중국) 50여점, 가면 100여점, 초상화나 무속화의 인물화 100여점, 현대작가의 회화와 조각 100여점, 그밖에 민속품, 도자기 100여점 등 총 1000여점이 넘는 얼굴박물관. 그 안에 혹 나의 전생 얼굴이 있지는 않을까? 궁금하다.

 

 

얼굴을 만나러 가다

 

11, 전날부터 가을비가 추적거리고 내린다. 비가 오는 날은 가급적이면 답사를 나가지 않지만 한가위 연휴동안 단 하루도 쉬지 못하고 일을 한 터라 잠시라도 머리를 식힐 겸 광주시 남종면에 있다는 얼굴박물관을 찾아갔다. 매년 특별전을 하고 있는 얼굴박물관에서 올해 특별전으로 527일부터 1029일까지 무속화(巫俗畵) 특별전인 ()과 사()를 연기하다라는 전시를 열고 있기 때문이다.

 

입구에 차를 대고 안으로 들어가니 매표소가 따로 있지 않다. 사람을 찾으니 자료정리를 하고 있던 관리자가 나온다. 이야기를 하고나서 관람료를 물으니 성인은 4천원, 65세 이상은 경로우대를 해서 3천원이라고 한다. 두 사람 몫인 7천원의 관람료를 지불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서부터 심상치 않다. 몇 발 들어서지도 않았는데 무신도가 벽에 걸려있다.

 

 

저 많은 무신의 얼굴을 모두 어디서 들고 온 것일까? 실내 여기저기 쌓여있는 각종 얼굴들을 보고 있노라니 정신이 없을 정도이다. 수집한 자료들에 비해 공간이 좁아 보인다. 하나하나 잘 정리 하려고하면 아마 현재의 공간보디 몇 배는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할 듯하다. 그렇게 자료들이 쌓여있다 보니 차분히 관람을 하기가 힘들 정도이다.

 

입구에서 관리인이 일층을 돌아보고 이층을 본 후 밖으로 나오라고 한 말이 생각나 이층으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일층과는 또 다른 얼굴들이 기다리고 있다. 각종 얼굴들을 보고 있다가 우연히 물구나무를 서 있는 재인(才人)이라는 설명이 붙은 얼굴을 만난다. 그리고 그 뒤편으로 상여에 올려 진 또 다른 많은 얼굴을 만난다. 이런 상여는 지금은 보기도 힘든 자료이다. 그 한옆에 상여의 앞뒤에 붙여 위엄을 더한 정자용(丁字龍)’을 만났다. 정말 희귀한 자료를 만난 것이다.

 

 

전라도 강진에서 이건한 관석헌을 보다

 

실내에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100여년이 지난 고택이 한 채 서 있다. ‘관석헌(觀石軒)’이라는 이 집은 말 그대로 돌을 보는 집이다. 관석헌 아래 앞뜰에는 많은 석물들이 줄지어 서있다. 이 관석헌은 시인 김영랑의 고향이자 고려청자로 유명한 전라남도 강진에서 옮겨 온 한옥이라고 한다.

 

누마루와 한편에 정자각이 서 있는 이 집은 김영랑 시인의 문중인 김홍배씨의 증조부가 100여 년 전 백두산 적송을 뗏목으로 옮겨와 경복궁을 중건했던 도편수 김춘엽, 허균 등을 동원하여 지은 5동의 건물 중 안채만을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관석헌은 고택의 품위를 지키고 있는 집이다. 현재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안쪽으로는 덧창을 달았지만 고택의 품격은 그대로 지키고 있다.

 

 

집 옆에 산으로 오르는 길을 따라 올라본다. 멀리 팔당호의 물이 보인다. 관석헌의 상량문애는 장춘실(長春室)’로 적혀 있었지만 얼굴박물관으로 옮겨와 그 앞에 많은 돌이 서 있어 관석헌으로 명칭을 바꾼 듯하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얼굴박물관은 또 다른 형태의 멋을 풍긴다. 아마 관석헌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많은 얼굴을 만나기 위해 찾아갔던 광주 얼굴박물관. 짧은 시간에 그 많은 자료를 살펴보기에는 역부족이다. 다음에 시간을 내어 다시 한 번 찾아보기로 하고 풀구를 나서는데 관리인이 이곳에서 만신을 모셔 굿을 한다고 알려준다. 다음에 이곳을 찾을 때는 굿을 함께 관람하면서 좀 더 찬찬히 둘라보아야겠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수원화성박물관 소장 정도전의 국내 유일본

 

“<조선경국전>은 조선초기 삼봉 정도전(1342~1398)이 조선이라는 국가의 틀을 세우기 위해 기본 강령을 저술하여 조선 초기인 1394(태조 3) 530일 태조에게 바친 책입니다. 이 책은 삼봉 정도전 집에도 수록되지 않은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고 1485년에 발간된 '경국대전(經國大典)'의 모본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중요한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17일 수원화성박물관 한동민 관장은 문화재청이 16일 수원화성박물관 소장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1924호로 최종 확정한데 대한 소감을 피력하면서 수원화성박물관 소장본인 '조선경국전'1책으로 모두 79장이며 현전하는 국내 유일본이라고 했다.

 

조선경국전은 조선초기의 치전·부전·예전·정전·형전·공전 등 6전으로 구분하고 관제·군사·호적·경리·농상·진휼·종묘·사직··학교·과거 등 각 분야의 제도를 기술하여 조선의 건국이념과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대한 기본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가치를 갖는 것이죠. 이 조선경국전은 20145KBS ‘TV쇼 진품명품에서 그동안 출품되었던 고문헌 전적류 중에서 가장 높은 감정평가액을 판정받기도 했습니다

 

 

조선 초기 삼봉의 조선경국전이 모태가 되어 <삼봉집>(1465)을 비롯해 <경제육전(經濟六典)>(1397, 1412)<육전등록(六典謄錄)>(1426) 등이 편찬되었고 최종적으로 조선의 기본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1485)이 편찬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보아 조선경국전은 경국대전의 모본이며 삼봉집에도 기록되지 않은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는 데서 그 가치를 높이 평가받고 있다.

 

수원화성박물관은 2013년 문화재청에 <조선경국전>의 문화재 지정신청을 했으며 2014년에는 '조선경국전'을 주제로 역사, 서지, 법제 분야 전문가(문철영 단국대학교 교수, 옥영정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정긍식 서울대학교 교수)와 함께 삼봉 정도전과 조선경국전학술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조선경국전은 조선초기 나라의 틀을 세우는 기본법전으로 그 가치가 매우 크다고 생각합니다. 조선경국전이 보물로 지정이 되었지만 학계에서는 국보로서의 가치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수원시에서는 조선경국전의 국보 지정을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한동민 관장은 그동안 많은 노력으로 소중한 서책이 보물로 지정되었지만 그 가치는 국보급에 해당한다고 하면서 앞으로 꾸준한 학술연구 등으로 수원시의 유일한 국보문화재 지정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경기도 민속문화재 제3호 삼막사 남녀근석

 

 

전국을 다니면서 만나는 조금은 해괴한 것들을 보면 처음엔 다들 낯을 붉히고는 한다. 참 묘하게 남녀의 성기를 닮은 나무나 바위, 아니면 인위적으로 깎아 만든 형상들이기 때문이다.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산10-1, 삼막사 경내에 소재한 경기도 민속문화재 제3호 ‘삼막사남녀근석(三幕寺男女根石)’이 바로 그런 자연암석이다.

 

삼막사 대웅전이 있는 곳에서 남쪽 산 위로 500m 정도를 올라가면 삼막사 칠성각 서북편에 있는 2개의 자연 암석을 만날 수 있다. 그저 무심히 보면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겠지만 그럴 염려는 없다. 근처에 가면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들여다보며 연신 사진을 찍어대기 때문이다. 두 기의 바위의 모양이 남자와 여자의 성기 모양과 닮았다고 하여 ‘남, 녀 근석’이라 부른다.

 

지금은 이 남 녀 근석으로 오르는 길이 말끔하게 돌계단으로 정리가 되어있어 다니기에는 편리하지만, 그래도 옛 흙길을 터벅거리며 다녔을 때를 생각하면 오히려 그 때가 더 자연 속을 걷는 것 같아 좋지 않았었나 하는 생각을 한다.

 

 

 

다산과 풍요의 상징 삼막사 남녀 성기석

 

일반적으로 남녀의 성기석을 만들어 풍요와 다산을 기원할 때는 돌을 다듬어 조성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삼막사의 남녀근석은 자연적인 바위가 성기를 닮았다. 이러한 성기 숭배 사상은 풍농과 풍어, 다산과 무병장수를 목적으로 하여 선사시대부터 행해져 왔던 민속신앙의 하나이다.

 

성기숭배 풍속은 고려, 조선시대는 물론 현재까지도 무속과 풍수신앙, 마을의 각종 제의식과 미륵신앙 등에 이어지고 있다. 삼막사의 남, 녀 근석은 신라 문무왕 17년인 677년에 원효대사 등이 삼막사를 창건하기 이전부터 토속 신앙의 대상으로 숭배해 왔다고 전해진다. 이 바위를 없애지 않고 그 옆으로 칠성각을 둔 것은 불교와 민간 신앙이 어우러진 우리나라 민간 신앙의 한 형태가 불교와 습합되는 과정을 볼 수 있는 좋은 예가 된다.

 

이 삼막사 성기석은 사실적으로 성기를 닮은 바위이다. 지금도 민간에서는 이 바위를 만짐으로써 다산과 출산에 효험이 있다고 믿어 4월 초파일이나 7월 칠석이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공을 드린다고 한다. 그 기원의 방법으로 동전을 바위에 문질러 붙이는 의식을 행하기도 하는데 남근석은 높이 1.5m 정도이며 여근석은 높이 1.1m 정도이다.

 

 

 

남근석에 성혈이 있었네

 

자고로 남자는 뿌리가 깊어야 한다는 속설이 있다. 그 뜻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다. 사실 문화재답사를 하면서 그동안 중점적으로 조사를 했던 것도 학술적인 것보다는 그 문화재에 숨겨져 있는 주변의 이야기에 더 매료를 당했다. 문화재를 보고 주변의 토민들에게 이야기를 들으려고 노력을 했던 것도 남들이 모르고 있는 숨겨진 이야기 때문이다.

 

남근석의 높이가 땅 위로 솟은 부분은 1,5m 정도이지만, 실제로 그 높이는 4m 정도나 된다. 그 밑으로 이어지는 바위의 높이가 상당하다. 그 바위의 뿌리 부분이다. 그런 뿌리가 있어 다산의 상징이 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데 이 남근석에 두 개의 성혈이 보인다. 오느 시기에 누가 무슨 이유로 조성을 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성혈을 팠다는 것을 보아도 이 남근석은 오래전부터 신앙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성혈이란 마음속에 염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 돌로 돌을 갈아 그곳에 둥그런 구멍을 파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많은 바위나 건조물의 기단 등에는 이 성혈이 새겨져 있다.

 

 

 

 

여근석에 물이 마르면 무슨 일이 날까?

 

삼막사의 여근석을 보면 참 묘하게도 생겼다는 생각을 한다. 옆에서 보면 그리 실감이 나지 않지만 위에서 내려다볼수록 더 묘하다는 생각이 깊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이 여근석의 중앙에 깊게 골이 나 있는데 그 가운데 고여 있는 물이다. 몇 번을 이곳에 와 보았지만 항상 이렇게 물이 고여 있었다. 일부러 이곳에 누가 물을 부어 놓은 것일까?

 

유난히 가물었던 해에도 여근석 파인 부분에는 물이 고여 있었다. 안양 인근에 비가 내린지가 꽤 되었다고 하는데 왜 이곳에만 물이 고여 있는 것일까? 삼막사 남녀근석을 찾아갔을 때는 한 낮의 더위가 며칠 째 30도를 넘나들었다. 아무리 산이라고 해도 벌써 말라버렸어야 할 바위에 고인 물이다. 이곳에 물이 마르면 불행한 일이 벌어진다고 들은 적이 있다. 그런 것을 막기 위해 누가 일부러 물을 갖다 붓지는 않았을까?

 

의학적으론 잘 모르겠다. 들은 바로는 여성의 질이 마르면 생산성이 그만큼 사라진다고 하는데 그래서일까? 만일 이것이 누가 일부러 물을 부은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니겠는가?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별별 생각을 다 해본다. 삼막사 남녀근석, 이곳에 물이 마르면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다는 전설 하나쯤 있을 법도 하다. 다음 이곳을 찾아오를 때는 그 연유를 한 번 알아보아야겠다.

 

기사보러가기 => http://www.newstower.co.kr/news/articleView.html?idxno=33283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