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금>MBC 창사 40주년 특별기획드라마로 20039월부터 20043월까지 방송되었다. 한류 사극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드라마 대장금은 여러 곳의 촬영장소만으로도 중국인 유커들을 불러들이는 관광의 효자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한 때 촬영장소를 찾아온 중국 유커들은 드라마 대장금에서 만들었던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곳을 찾을 정도였다.

 

천민의 신분으로 궁녀로 들어와 최고의 요리사가 되고, 임금의 주치의가 되는 장금은 훗날 대장금이라는 호칭까지 부여받았다. 그런 조선조 의녀 장금의 일대기를 그린 대장금을 비롯해 주몽, 선덕여왕, 이산, 동이, 옥중화 등 수많은 MBC의 사극들이 이곳에서 제작되었으며 그 현장을 보관한 곳이 바로 용인시 백임면 용천리에 소재한 대장금파크이다.

 

드라마 <대장금> 촬영은 수원화성 행궁에서도 이루어졌다. 행궁을 찾아오는 많은 유커들도 대장금에서 보이는 요리를 주문하기도 해 유커들이 몰려올 때 그렇게 준비할 수 있는 식당을 주선하기도 했지만 당시 몰려드는 유커들로 인해 한꺼번에 많은 인원을 감당할 수 없어 무산된 적이 있기도 하다.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우리 행궁도 더 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일 수 있는 충분한 자원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지난 20일 바쁜 일정 중에도 이곳을 찾아간 것은 지인이 드라마 선덕여왕에 출연한 미실(고현정 분)’에게 푹 빠져 있었다고 하면서 선덕여왕의 드라마 세트장을 보고 싶다는 부탁에서였다. 사실 바쁘다는 것은 핑계일 뿐이고 나 역시 용천리에 소재한 MBC드라마 촬영장이 궁금했던 차라 선뜻 대답을 하고 길을 나섰다.

 

구봉산 자락에 마련한 대장금파크는 멀리서보면 그대로 옛 마을이 들어서있는 듯하다. 멀리서 전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대가 되는 것은 도대체 저 안에서 얼마나 많은 드라마가 제작되었으며 그 많은 배우들의 땀이 얼마나 흘렀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다. TV시청을 하면서도 사극드라마 외에는 시청을 하지 않는 나로서는 자연 이 대장금파크의 모든 것이 궁금할 수밖에 없다.

 

 

출입구부터 장애인을 배려하는 것에 마음 끌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매표소를 가니 입구서부터 기분좋게 만든다. 65세 이상은 경로우대를 한다는 것이다. 굳이 65세 이상이라는 이야길 하지 않고 다니지만 입장료 7천원을 3천원이나 할인을 해준다는 것이다. 거기다 장애인들도 3천원을 할인해 주는데 장애인과 동반한 보호자 한 사람은 무료입장이라고 한다.

 

이곳은 원칙적으로 애완동물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시각장애인 안내견과 청각 도우미견은 입장아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입구에 보면 장애인용 휠체어가 건물 안에 줄지어 대기하고 있다. 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그만큼 크다는 것이다. 말로만 떠들고 있는 장애인 우대가 아니라 실제로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표를 받아들고 안으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이 대장금 기념세트장이다. 대장금 기념세트장은 경기도 양주문화동산에 조성된 세트장의 일부를 가져와서 새롭게 조성한 곳이라고 한다. 넓은 세트장 전체를 돌아보려면 시간이 꽤 걸릴 듯하다. 오후 3시가 넘어 들린 곳이라 자연 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대장금파크를 돌아보면서 그에 못지않은 실젤적 문화유산을 갖고 있는 수원도 관광객을 맞이하는데 있어 좀 더 신경을 쓰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일반인들이 개인의 이익을 위한 목적만으로 영업을 한다면 관광객들의 구미를 제대로 맞춘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대장금파크처럼 공용화 된 휴게공간을 마련할 수 있다고 하면 수원화성과 행궁에 대한 더 좋은 인식을 관광객들에게 심어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가는 곳마다 정밀한 조형에 놀라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관람객들이 눈에 띤다. 동반한 지인은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미실이 나오던 곳을 보고 싶다고 몇 번을 이야기한다. 자신은 미실의 연기에 빠져 드라마를 보지 않지만 선덕여왕만은 보았다는 것이다. 그래도 볼 것은 보아야하지 않겠는가? 최우 사택은 드라마 <무신>을 보면서 꼭 한 번 돌아보아야겠다고 생각했던 곳이다.

 

고려시대 1170년부터 1270년까지 100년간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했던 무신정권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남겼다. ‘()’을 중시하던 우리 역사에서 ()’를 배경으로 노비출신인 김준이 최고 권력자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사극 세트장이라고 하기보다는 실제 건물과 같이 꼼꼼하게 꾸며진 조형물에 감탄을 한다. 이곳을 사람들이 찾아오는 이유를 알만하다. 전국에 산재한 많은 세트장을 다녀본 나로서도 이곳 세트장은 그와는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웅장하게 꾸며졌기 때문이다.

 

드라마 선덕여왕 주 촬영지인 연무장과 미실궁 등을 돌아본다. 한편에 마련된 포도청과 옥사는 <구가의서>외에도 <이산> <짝패> <해를품은달> <무신> <구암허준> 등 많은 사극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연출되었던 곳이다. 안을 한 바퀴 돌아보니 시간이 꽤 흘렀다. 요즈음 산자락에는 일찍 해가 떨어진다. 더 많은 것을 보고 싶지만 다음에 다신 합 번 찾아올 것을 약속한 후 아쉬운 발길을 돌릴 수밖에.

 

 

산 중턱에 서 있는 외로운 석탑 한 기

 

주차장으로 향하는데 건너편 산 중턱에 석탑이 한 기 보인다. 처음에는 이곳이 사극 세트장이기 때문에 그 탑도 세트의 일부인줄로만 알았다. 안내소에 물어보니 세트가 아닌 옛 탑이 맞다고 한다. 올라갈 수 있느냐 물으니 그곳도 경내이기 때문에 허락을 받아야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경비실에 문의를 하고 난 후 몇 사람과 대화를 거쳐 겨우 승낙을 받았다. 문화재를 답사하는데 이런 불편쯤이야 감당해야 않겠는가?

 

주변 정리가 잘되어 있고 커다란 노송까지 곁에 서 있는 오층석탑은 용인 향토유적 제66호인 고려시대 석탑인 용인 용천리 오층석탑이다. 원래 인근 절터로 추정되는 논바닥에 흩어져 있던 부재들을 모아 1979년에 복원한 것으로 용인시 지역의 석탑 중에서는 가장 큰 석탑으로 높이가 4.3m 정도이다.

 

역사의 한 장을 가늠했던 곳을 돌아보다가 우연히 만난 오층석탑. 현재는 오층석탑 몸돌 위 옥개석과 상륜부가 유실돼 5m를 넘지 않지만 탑의 형태로 보아 상륜부까지 제대로 형태를 갖추고 있다면 6m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뒤 늦게 만난 오층석탑의 조우로 인해 더 뜻깊은 대장금파크의 관람. 설핏 산등성이에 걸린 해를 바라보면서 건너편 산중턱에서 바라보는 대장금파크의 위용에 다시 한 번 감탄을 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용인시 향토유적 앞에 쌓인 쓰레기 부끄럽다

 

용인시에서 지정한 향토유적 앞에 쓰레기가 가득 쌓여있어 지나는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 향토유적이란 문화재로 지정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지역에서 보존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여 지정하는 제도이다. 비록 국가나 지방문화재로 지정은 되지 못했다고 해도 나름 선조들의 혼이 깃들어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우리는 국보나 보물, 민속문화재, 혹은 지방유형문화재나 문화재자료 등으로 지정돼야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향토유적은 그 지역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선조들의 유물로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사고는 어느 문화재와 다를 바 없다. 그런 향토유적 앞에 쓰레기가 쌓여있어 한심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향토유적도 문화재 명칭은 지정받지 못했다고 해도 선조들의 문화유산이다. 하기에 해당지자체에서는 도로변에 이정표를 내걸어 안내를 하고 있다. 그런 향토유적을 문화재 지정이 안 되어 있기 때문에 함부로 대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향토유적 역시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다만 지정 문화재에 비해 훼손이 되었거나 제작연대 등을 확실히 알기 어렵다는 점 등이 문화재지정을 받지 못했다는 것뿐이다.

 

모처럼 떠난 문화재답사로 들뜬 마음

 

20일 떠난 문화재답사. 모처럼 마음을 다잡아 거주지에서 가까운 곳이라도 돌아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길을 나섰다. 시간에 쫓겨 살다보면 문화재답사도 제대로 떠날 수가 없다. 작정을 하고 떠난 길이라 몇 기의 문화재라도 둘러보겠다고 나선 길이다. 먼 길을 갈 수 없으니 수원에서 가까운 용인으로 답사할 곳을 정했다.

 

부지런을 떨어 길을 나섰지만 오고가는 시간을 계산하면 정작 문화재를 둘러보는 시간을 그리 많지가 않다. 당연히 마음만 바빠질 수밖에. 한 곳을 둘러보고 찾아간 곳은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농촌파크로에 소재한 용인법륜사이다. 법륜사는 전통사찰로 최근 새롭게 조성을 하고 있는 절이다. 웅장한 대웅전을 비롯하여 화려하게 치장한 전각들이 우리 전통사찰이라기보다는 흔히 현대적인 면을 가미한 거대 작품같은 절이다.

 

그 안에 경기도문화재자료 145호로 지정된 용인법륜사 삼층석탑이 소재하고 있다.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삼층석탑은 서울시 구로구에 거주하는 이덕문씨 집에 소장하고 있던 것을 이운하여 건립하였다고 한다. 신라석탑의 형식을 계승한 일반적인 삼층석탑으로 조성시기나 유래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한다.

 

 

법륜사 삼층석탑은 단층기단에 올린 삼층석탑으로 탑신에는 양우주를 새기고 옥개석을 올려놓았다, 탑의 형태로 보아 고려 때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이 삼층석탑은 몸돌과 옥개석을 각각 1석으로 조성하였으며 탑신에는 양우주를 새기고 옥개석의 받침은 4단으로 조성되어 있는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석탑이다.

 

현재의 탑은 법륜사 경내에 소재하고 있으며 상륜부가 유실된 듯 새롭게 치장한 상륜부를 조형해 올려놓았다. 탑의 크기나 조형에 맞추어 상륜부를 제작한 듯하지만 밋밋한 탑에 비해 화려하게 조형한 상륜부가 조금은 어울리지 않는듯하다. 하지만 마음으로 위하는 삼층석탑이니 이렇게 아름답게 조형을 했다고 해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아름답게 상륜부를 치장한 법륜사 관계자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은 생각이다. 그 정도로 우리문화재에 관심을 갖고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동 중 만난 두창리 삼층석탑 화가난다

 

법륜사 삼층석탑을 돌아보고 난 후 다음 답사지를 향해 이동을 하던 중에 갈에 안내판이 보인다. 두창리 삼층석탑과 선돌이 있다는 안내판을 보고 가던 길을 돌려 먼저 답사를 하기로 정하고 심층석탑을 찾아갔다. 용인시 향토유적 19호로 지정되어 있는 두창리 삼층석탑은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두창리 1447-2에 소재한다.

 

두창리 삼층석탑은 뒤편에 두창저수지가 자리하고 앞으로는 도로가 나 있어 사람들이 접근하기 쉬운 곳이다. 길 건너 언덕에는 선돌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한 마을에 두 기의 향토유적이 소재하고 있다. 삼층석탑은 도로 아래편에 자리하기 때문에 길가에 커다란 안내판이 없었다면 그냥 지나치기 쉽다.

 

삼층석탑 옆으로는 간이의자와 간결하게 조성한 쉼터도 마련되어 있다. 농촌마을인 두창리를 들린다면 이 삼층석탑과 선돌을 돌아보면서 쉬어가기 딱 좋은 곳이다. 저수지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한 이곳은 탑 옆에 두 대 정도의 차량을 주차시킬만한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삼층석탑 앞에 마을에서 갖다 버린 듯 쓰레기더미가 수북이 쌓여있다. 버린 쓰레기들을 보니 하루이틀동안 버린 것들이 아니다. 자신들이 마신 술병이며 집에서 사용하다 내다버린 의자 등. 한 마디로 이 향토유적 앞 도로변의 공간을 마을주민들이 쓰레기를 버리는 곳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마디로 화가 치민다. 아무리 문화재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간판을 걸어 소개하고 있는 향토유적 앞에 수북하게 쓰레기를 쌓아놓을 수 있단 말인가? 용인시나 원삼면 관계자는 향토유적으로 지정을 할 줄 알면서 관리는 할 줄 모르는 것일까? 쓰레기를 쌓아 놓은 지 하루 이틀이 아닌 듯한데 한 번도 이런 것을 보지 못했단 말인가?

 

문화재란 지정만 하고 관리를 하지 않으면 누군가에 의해 훼손이 되기 일쑤이다. 관심을 갖고 꾸준히 관리해야 할 대상이 바로 우리문화재이다. 그런 문화재를 이런 식으로 방치하고 있다니. 지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지정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관리이다. 비록 향토유적이라고 해도 선조들의 문화유산이다. 삼층석탑 앞 도로변에 가득 쌓인 쓰레기를 보면서 관계당국이나 지역주민들의 의식수준을 알만하다. 용인시 관계자는 하루 빨리 이 쓰레기를 치우고 주변을 말끔히 정비하여 다시는 이런 볼썽사나운 꼴을 보지 않도록 해줄 것을 요구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보물 삼층석탑과 보물 영산전을 돌아보다

 

양산시 하북면에 소재한 통도사를 흔히 불지종가국지대찰 영축총림 통도사라고 칭한다. 구만큼 사세(寺勢)가 대단하다는 말이다. 통도사에는 국보와 보물, 그리고 많은 지정 문화재들이 있다. 통도사는 흔히 상로전, 중로전, 하로전으로 구분하는데 입구인 일주문부터가 하로전에 해당한다.

 

하로전은 보물 제1826호인 영산전, 보물 제1471호 삼층석탑, 경남 유형문화재 재197호 약사전, 경남 유형문화재 194호 극락보전, 경남 유형문화재 제250호 천왕문과 일주문, 호혈석 등이 이 하로전에 속해있다. 그 중 보물 삼층석탑 뒤편으로는 보물 영산전이 자리하고 있다. 삼층석탑은 통일신라 때 작품으로 보이며 영산전은 하로전의 중심 건물이다.

 

영산전은 숙종 39년인 1713년 봄에 화재로 인해 영산전과 천왕문이 소실되었는데 이듬해인 171433명의 목수와 천오 등 15명의 화승이 참여하여 중건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암막새 명문에는 강희 53甲年1714년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영산전이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던 것을 1714년 복원하였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실내벽화도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영산전

 

영산전은 정면 3, 측면 3칸의 다포계 맞배지붕 형식이다. 기단의 정면 중앙과 양 측면 앞쪽에는 계단이 놓여 있고 창호는 정면과 배면에만 두고 양 측면은 창호 없이 벽으로 폐쇄하였다. 정면에는 매칸 사분합 정자살문을 두고 배면에는 두 짝의 띠살문으로 달아냈다. 공포는 정면은 각 칸마다 3구를 배치하고 있으나 배면에는 2구가 놓은 것이 영산전의 특징적이다.

 

통도사 영산전과 같이 정면 각 칸에 3구씩의 공포를 두는 것은 매우 드문 사례이다. 통도사의 많은 전각들은 단청이 거의 지워져 있다. 오랜 시간동안 단청을 입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산전의 단청은 1715년에 총안스님이 단청을 시작해 1716년에 모든 공사를 마무리 지었다고 한다. 이런 기록으로 보면 영산전의 단청은 300년 전에 한번 올렸을 뿐이다.

 

단청이 퇴색하여 맨 건축목자재의 질감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영산전. 이렇게 단청이 지워진 것이 오히려 통도사를 더 고풍스럽고 무게있게 만들고 있다. 실내촬영을 금지한다는 안내판 때문에 실내에도 보물로 지정된 52점의 벽화(보물 제1711) 등이 있지만 촬영을 하지 않았다. 문화재는 누군가가 아니라 모두가 보존에 최선을 다해야 하기 때문이다.

 

 

신라 말의 삼층석탑은 보물 제1471호로 지정

 

영산전 앞에 놓인 보물 제1471호 삼층석탑은 원래 자리에서 1.5m 정도 이동을 했다. 이는 삼층석탑을 에워싸듯 놓인 영산전과 약사전, 극락전의 중심축에 맞추기 위함이라고 한다. 통일 신라의 작품으로 일려진 삼층석탑은 2층의 기단을 세우고 그 위에 삼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로 1987년 해체 수리 당시 자리를 옮겼다고 한다.

 

지난 1128. 벌써 통도사흫 다녀온 지 10일 가까이 지났다. 통도사를 찾아간 날은 휴일이라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탑 주변으로 몰려들어 사진촬영을 하기가 난감하다. 그렇다고 관람을 하거나 동행한 가족이나 지인들과 사진촬영을 하고 있는데 비켜달라고 할 수도 없다. 짧은 시간에 촬영할 곳은 많은데 무작정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순간순간 사람들이 삼층석탑 주변에서 떨어졌을 때 급하게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다.

 

 

내가 사진작가라면 도저히 찍을 수 없는 분위기거나 아니면 사람들과 어우러진 탑을 촬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사진작가가 아니기 때문에 탑의 온전한 형태만 전달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모든 문화재를 촬영할 때 항상 갖고 있는 생각이 한 부분씩이라도 더 자세히 소개를 하야한다고 늘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물 제1471호인 통도사 삼층석탑은 일반적인 석탑의 형태이다. 이 석탑을 신라 말이나 고려 초에 조형한 작품으로 보는 까닭은 석탑의 형태는 신라말기의 보편적인 탑 형식으로 조성을 했는데 기단석에 안상이 조각되어 있다는 점이다. 안상은 흔히 고려조의 탑에 나타나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석탑의 몸돌과 옥개석은 모두 한 장씩의 돌로 조형을 했으며 옥개석의 받침은 각층마다 4단으로 조성하였다. 천년이 지난 세월을 자리를 지키고 있는 통도사 삼층석탑. 그 앞에 서서 두 손을 모은 까닭은 국정농단으로 망가져버린 이 나라가 바로 서기를 바라는 간절함 때문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경북 포항시 북구 송라면 보경로 523 (중산리) 보경사 경내에는 고려시대 5층 석탑 한 기가 자리하고 있다. 이 탑은 보경사 적광전 앞에 서 있기 때문에 금당탑이라고 부른다. 높이 약 5m 정도의 오층석탑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03호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고려 현종 14년인 1023년에 건립하였다.

 

보경사는 내연산에 자리하고 있으며 602년 진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신라 지명법사가 진평왕에게 '동해안 명산에서 명당을 찾아 자신이 진나라의 도인에게 받은 팔명보경을 묻고 그 위에 불당을 세우면 왜구의 침입을 막고 이웃 나라의 침입도 받지 않으며 삼국을 통일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진평왕이 지명법사와 함께 내연산 아래에 있는 큰 못에 팔면보경을 묻고 못을 메워 금당을 건립하고 보경사라고 했다. 경내에는 보경사원진국사비(보물 252)와 보경사부도(보물 430)가 있으며, 조선 숙종의 친필 각판 및 5층석탑 등이 있다.

 

 

 

 

단아한 보경사 오층석탑

 

고려시대 탑의 특징은 화려하지 않다. 단아한 모습으로 석재를 올려 탑을 쌓는 것이 특징이다. 보경사 오층석탑 역시 탑이 단아하다. <보경사 금당탑기>에 보면 도인(道人) 각인(覺人), 문원(文遠) 등이 고려 현종 14년이 건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보경사 오층석탑은 지대석 위에 기단을 놓고 그 위에 오층석탑을 쌓았다.

 

 

보경사를 찾아간 날은 날이 잔뜩 흐려 금방이라도 비가 뿌릴 것 같은 날 오후였다. 일주문을 지나 사천왕문을 들어서니 늘어선 전각들이 눈에 들어온다. 먼저 대웅전에 들려 잠시 숨을 고른 후에 절 경내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입구에서부터 늘어선 소나무 향이 짙게 드리운 것이 곧 비가 내릴 모양이다.

 

멀리까지 나갔으니 길을 재촉하야만 했다. 날이 흐려 금방이라도 어두움이 내리 깔린 것만 같은 날이기 때문이다. 먼저 보물 252호인 보경사 원진국사비를 촬영하고 난 뒤,오층석탑 앞에서 잠시 머리를 숙인다. 절을 찾아다니면서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 보면 이렇게 귀한 문화재 앞에서면 절로 머리가 숙여지고는 한다.

 

 

 

 

중간에 보충이 된 보경사 오층석탑

 

보경사 오층석탑은 아래에 4매의 지대석을 놓았다. 그 위에 기단을 올렸는데 기단 받침은 새로 보충이 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인가 석재의 색이 다르다. 기단의 면석은 4매로 남쪽과 북쪽의 2개의 면석이 동서면석 사이에 끼여져 있다. 동서 면석 역시 새롭게 조형한 것이다.

 

1976년 이 오층석탑을 보수하였는데, 보수할 당시 기단과 4, 5층의 몸돌, 그리고 5층 지붕돌 등이 새로 보충이 되었다고 한다. 보경사 오층석탑은 비례가 잘 맞아 안정감이 있다. 높이가 5m에 달하는 석탑치고는 균형이 제대로 잡혀있는 형태이다. 1층 몸돌에는 잠을통이 새겨져 있는 모습이 보인다.

 

오층석탑은 그리 화려하지는 않지만 균형이 잘 맞고 단아한 형태로 서 있어 안정감이 있다. 만일 이 오층석탑이 제대로 보존이 되었었다고 하면 수준급의 석탑일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석탑의 층 받침은 3단으로 되어 있으며, 머릿돌의 처마는 약간 위로 치켜져 있다.

 

문화재는 소중한 유산이다. 그것이 어느 시대이건, 어느 종목에 해당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 문화재 하나가 그 자리에서 천년세월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 더욱 소중하단 생각이다. 보경사 오층석탑 역시 중간에 보수를 해서 지금에 이르고 있지만,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임에 틀림없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화성시 송상동 188에 소재한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16년인 854년에 창건된 갈양사로써, 청정도량이었으나 병자호란 때 소실된 후 폐사가 되었다. 그 후 조선조 제22대 임금인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절을 다시 일으켜 원찰로 삼았다.

 

조선전기에는 고려의 전통을 이어 왕이나 왕실의 무덤을 수호하고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한 사찰이 간혹 세워지기도 하였으나, 하지만 조선후기에 와서 사림세력이 국권을 흔들면서 왕실에서의 사찰건립이 쉽지 않았다. 용주사를 마지막으로 하여 조선왕조에서의 왕실의 원찰은 더 이상 세워지지 못했으며, 이처럼 사회적 여건이 좋지 못하던 시대에 거대한 왕실의 원찰이 세워지게 되었던 연유는 정조의 지극한 효성 때문이다.

 

 

현륭원을 수호하던 용주사

 

용주사는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을 수호하고, 그의 명복을 비는 것이 가장 중요한 기능 중에 하나였다다. 용주사는 창건이후 지금까지 가람의 구조가 크게 변모되지 않고, 창건당시의 상량문을 비롯하여 발원문등 용주사의 창건과 관련된 문헌 자료들이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용주사 매표소를 지나 경내로 들어가다가 보면 홍살문이 보인다. 원래 사찰에는 홍살문을 세우지 않지만, 이곳은 현륭원을 지키는 사도세자의 원찰이기 때문에 홍살문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이 홍살문을 바라보고 좌측으로 효행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효행박물관 앞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12호인 오층석탑이 자리한다.

 

 

용주사에는 두 기의 오층석탑이 있다. 사람들은 간혹 천보루 앞에 서 있는 높이 4m의 오층석탑을 유형문화재로 잘못 알고 소개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문화재로 지정이 된 오층석탑은 높이 4.5m의 이 화강암으로 조성한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위패형 제액을 마련한 특이한 오층석탑

 

효행박물관 앞에 서 있는 이 오층석탑은 간략화 된 기단부와, 탑신부의 탑신석과 옥개석 등의 양식과 치석 수법을 볼 때 고려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이 석탑의 기단부 면석부에 위패형 제액을 마련한 점은 드문 예에 속한다. 이 오층석탑은 딴 곳에서 옮겨온 것으로 전해진다.

 

이 오층석탑은 일반적인 석탑과는 차이가 난다. 오층의 지붕돌인 옥개석과 상륜부를 하나의 돌로 조성한 점이나, 처마가 수직으로 처리되었다는 점이다.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일석으로 조성한 것은 여느 탑과 다름이 없으나 1층 몸돌에는 문비가 새겨져 있다. 1. 2. 3층의 머릿돌의 옥개받침은 4단이나, 4층은 2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일 밑에는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하대석을 놓았다. 지대석에는 사방에 귀꽃모양의 인상을 3구씩 새겨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 올린 기단면석에는 위패형의 사각을 모각하였다. 부분적으로 훼손이 된 곳은 있지만, 고려시대의 석탑 중에서도 보기 힘든 형태로 조성하였다.

 

용주사를 찾아가 가장 먼저 만나게 된 오층석탑. 그 탑 앞에 서서 잠시 머리를 숙인다. 세상의 온갖 추악한 무리들을 벌하시고, 선한 사람들이 제발 마음 편하게 사는 날이 하루빨리 돌아오기를.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