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와 보물이 가득한 용인 호암미술관

 

호암미술관은 수원에서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3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영동고속도로를 이용해 마성IC로 나가면 바로 미술관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즈음처럼 멀리 문화재답사를 나갈 수 없을 때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호암미술관을 찾아간다. 호암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는 많은 전시작품들은 일반인들이 접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좋은 전시작품과 아름다운 경치, 어찌 이곳을 자주 찾아가지 읺겠는가?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에버랜드로 562번길 38에 소재한 호암미술관은 삼성그룹 창업자인 호암 이병철 선생이 30여 년에 걸쳐 수집한 한국미술품을 바탕으로 1982422일에 개관한 사립미술관이다. 호암미술관은 모든 사람들에게 문화 창조의 꿈을 심어주고 민족문화의 산 교육장이 되는 장소이기를 원했던 창업자의 설립취지에 따라 조성되었다고 한다.

 

호암미술관 앞으로는 1997년 개원한 전통정원 희원이 자리하고 있다. 미술관 안 1층에 유명화가들의 작품과 2층에 전시되어 있는 민화와 국보와 보물 등은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하기에 난 안에 있는 소중한 문화재를 찬찬히 살펴보는 것도 좋아하지만 누구나 마음대로 사진촬영을 할 수 있는 희원에 서 있는 석탑과 석조조형물 등을 더 좋아한다. 카메라에 담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희원에 늘어선 석조물과 가을의 만남

 

지난주에 이어 이번 주까지 2주 연속 호암미술관을 찾았다. 가을 경치가 아름다운 이곳 정원을 둘러보면 답답했던 마음이 싹 가시기 때문이다. 미술관 입구에서 입장권을 구입하면 50% 할인이 된다. 요즈음은 문화재를 감상하기 위해 전시관이나 박물관 등을 찾아다니면서 나이 먹은 덕을 톡톡히 보고 산다.

 

전통정원이라는 희원은 들어가면서부터 기분이 좋아진다. 양편으로 늘어선 석인들이 마치 사열을 받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옛 전통문양을 떠서 만든 보화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면 여기저기 석탑들이 서 있다. 고려시대와 조선조에 조성된 이 석탑들은 문화재 지정이 되어있지 않지만 탑 그대로가 주변 단풍과 함께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하게 만든다.

 

이곳 전통정원인 희원에서 만나는 국보를 묘사한 탑도 눈길을 끈다. 국보 제101호 모조현묘탑은 2012년도에 경복궁내에 서 있는 실제탑을 촬영한 적이 있기 때문에 갈 때마다 정감이 가는 탑이다.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法泉寺址 智光國師塔)’이라는 이 탑은 고려시대의 승려 지광국사 해린(9841070)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수난의 세월을 지내온 문화재다.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법천사지에 서 있던 현묘탑은 1912년 일본 오사카로 밀반출이 되었다가, 3년 후인 1915년 반환되어 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가 현재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문지로 132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옮겨졌다. 하지만 안내판에는 경복궁에 위치하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어 정정을 해야 할 듯하다.

 

정원을 돌다보면 우리 전통정원의 정겨움을 느낄 수 있다. 더구나 아름답게 물든 단풍으로 인해 최고의 멋진 정원을 산책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아름다운 정원을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가을을 감상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그런 호암미술관이 가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호암미술관 앞으로는 삼만육천지라는 명칭을 갖고 있는 인공호수가 있다. 그곳에도 가을이 깊었다. 호암호수로 불리는 삼만육천지는 1970년대 자연농원 개발 시절에 만들어진 인공호수로 면적이 36000평이라 삼만육천지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삼만육천지 주변에 조성된 700m 길이의 벚꽃터널과 호숫가 벚꽃 산책로에는 왕벚나무를 비롯해 가지를 길게 늘어뜨린 능수버들 등 1만 그루나 식재되어 있다.

 

이곳 삼만육천지를 끼고 걷는 산책길은 가을을 느끼기에 최적이다. 그저 걷기만 해도 상쾌해진다. 이런 가까운 곳에 소중한 문화재와 아름다운 우리 정원을 감상할 수 있는 곳. 30분이면 찾아갈 수 있는 이곳은 지금 아름다운 가을을 마음껏 음미할 수 있다. 가을이 그립거든 이곳을 찾아가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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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정수암 산신각 점안식이 열리던 날

 

4월 초파일은 부처님 탄생일이다. 부처님 오신 날또는 석가탄신일(釋迦誕辰日)’이라고 하는 초파일은 불교 연중행사 가운데 가장 큰 명절로 여기며, 이 날은 기념법회를 비롯하여 연등놀이, 관등놀이, 방생, 탑돌이 등 각종 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초파일은 각 절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날이다.

 

각 사찰에서는 법당과 경내, 거리에 등을 내달고 경내에 수많은 등을 밝히는 등 공양 행사를 이어 온다. 이날은 육법공양을 행하는데 '육법(六法)'이란 깨달음과 관련된 6가지 공양물로 정신적인 상징을 의미하는 것이다. 육법공양물은 쌀, , , , 과일, 차 등으로 이러한 공양물을 부처께 바치는 의식이다.

 

4월 초파일에 다는 연등은 그 의미가 깊고 오래되었다. 4월 초파일 연등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고려사에서 볼 수 있는데, 고려 의종 때 백선연이 48일에 점등했다고 적고 있다. 당시에는 초파일 연등을 열면 3일 낮과 밤 동안 등을 켜놓고 미륵보살회를 행했다고 한다. 이러한 연등회는 조선 태종 15년인 1415년 이후로는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초파일 법회를 위해 찾아간 고성 정수암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산학리에 소재한 정수암(주지 진관스님)을 찾았다. 벌써 다녀온 지가 며칠이나 지났다. 지난 1일 찾아갔다가 3일에 돌아왔으니 4일이나 지난 셈이다. 다녀오고 나서 수원 화성연극제며 많은 행사로 인해 제때 글을 쓰지 못하고 말았다. 무슨 일이나 바로 글을 써야 감이 잡히는데, 단 하루라도 늦어지면 처음에 들었던 생각이 무뎌지기도 한다.

 

정수암을 찾아간 것은 지난해 조성한 마애불 때문이다. 지난해 정수암을 찾아가 아침에 문을 열고 나오다가 법당 옆 바위에 마애불을 보았다. 분명 바위였는데 그 바위에 마애불을 조성한 것이다. 물론 착각이다. 하지만 순간 저 바위에 마애불을 조성하라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어, 몇 사람과 의논 끝에 마애불을 조성한 것이다.

 

지난 해 마애불을 조성하면서 정수암은 큰 불사를 했다. 절 입구에 일광보살과 원광보살 상을 마련해 불이문(不二門)을 삼고, 인법당 뒤편에 큰 바위를 세워 산신각을 조성했다. 원래 계획은 마애불과 신신각을 부조로 각인하기로 마음먹었지만, 조성을 맡은 여주시에 거주하는 김원주 작가의 일정으로 인해 산신각은 부조로 조성하지 못하고 그림을 그렸다.

 

 

마을 여인들이 지켜 낸 산신각바위

 

원래 저 산신을 그린 바위가 지금보다 더 컸다고 하네요. 그런데 돌이 워낙 좋으니까 조경업자가 저 바위를 산 후 쪼개서 가져가려고 했나 봐요. 바위를 쪼갠다는 소식을 들은 마을 분들이 막았데요. 저 바위가 예전에는 마을 여인들이 위하는 바위였다는 거예요

 

정수암 주지 진관스님이 전하는 이야기로는 그 바위에 치성을 드리고 난 후 아들을 낳은 여인이 있어 마을에서 신령한 바위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런 바위를 쪼개 가져간다는 소식에 여인들이 반대를 하고 나섰다고 한다. 바위는 일부 쪼개서 가져갔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세운 면의 높이가 2m가 넘는다.

 

그 바위가 마을에서 위하는 산신바위예요. 그런데 스님이 주지로 오시고 나서 그 비위에 산신도 그림을 저렇게 멋지게 그려놓아 이제 제 모습을 찾은 것 같아 여간 좋은 것이 아닙니다

 

초파일에 절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공양할 비빔밥에 들어갈 나물을 다듬고 있던 신도 한 분이 하는 말이다. 정수암 신도들은 연세가 드신 분들이 많은 것도 특징이다. 초파일이 되면 고성군 산학리만 아니라 속초와 서울, 구리, 남양주, 수원, 전주 등 먼 곳에 거주하는 신도들까지 모두 찾아오기 때문에 100인분의 비빔밥을 준비한단다. 그동안 정수암은 초파일이라고 해도 50여명의 신도들이 찾아왔을 뿐이다.

 

그래도 올해는 연등을 100개 넘게 달았어요. 초파일에 찾아올 순 없어도 많은 분들이 등 값을 보내주셨거든요

 

모든 이들이 마음을 합한 산신각 점안식

 

오늘 부처님 오신 날에 다들 예불을 마치고 공양을 하셔야하는데 신신각 점안식까지 다 마치고나서 공양을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다들 괜찮으세요?“

 

초파일 예불을 마치고난 뒤 신도들이게 시간이 조금 걸려도 신신각 점안식을 마친 후 공양을 해도 되겠느냐고 묻자, 다들 그렇게 하겠다고 한다. 이날 정수암을 찾아 온 신도들은 어림잡아 70여명, 그 모든 사람들이 산신도가 그려진 바위 앞에 나아가 점안식에 동참을 한다. 연세가 드신 분들은, 그동안 산신바위를 대우하지 못해 마음이 불편했는데 정말 다행이라고 한다. 이제 산신바위가 제 모습을 찾았다는 것이다.

 

정수암 주지 진관스님의 인도로 점안식에 참석한 신도들은 모두 손을 오색실을 잡고 산신바위를 에워쌓았다. 점안식 의식을 마치고 난 뒤 한 신도가 하는 말에 공감을 한다.

 

부처님이 어디 큰 절에만 계시겠어요. 난 우리 절에 참 부처님이 계시다고 생각해요. 요즘 종교가 제 몫을 못하고 있는데, 이 작은 정수암은 날마다 작은 불사를 계속하고 있잖아요. 이 산신바위는 정말 영험한 바위예요. 이 금강산 자락에 자리한 절도 그렇고 저 바위도 그렇고, 지난해 조성한 마애불도 그렇고. 그런 것을 보면 부처님이 정말 이 절에 계시다는 생각이 들어요. 신도들이 하나같이 이웃을 먼저 생각하고 있으니 이 절에 부처님이 계신것이죠

 

종교는 사람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어야 한다. “신도들에게는 어떠한 부담도 주지 않겠다는 정수암 주지 진관스님. “인연이 닿으면 누군가 불사를 하러 오지 않겠느냐며 웃는다. 강원도 고성군 작은 암자 정수암은 늘 그렇게 좋은 인연으로 만나는 사람들이 들리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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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보름 전에 각 마을마다 제를 지내던 신표

 

우리민족은 음력 정월이나 10월 상달이 되면 마을마다 반드시 하고 넘어가는 의식이 있다. 바로 대동의 안녕과 가가호호의 안택을 기원하는 마을제사를 지낸 것이다. 장승제, 성황제, 거리제 등은 모두 마을의 안녕과 풍농과 풍어, 그리고 가내의 안과태평을 기원하던 우리민족의 공동체 의식이었다.

 

4일 수원박물관에서 입춘을 맞이해 시민들에게 춘축을 선사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수원박물관을 찾았다. 입구에서 차를 내려 박물관으로 오르다 보면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이 돌을 쌓은 누석탑인 성황당이다. 그리고 그 뒤편에는 5기의 목장승이 눈을 부라리고 서 있다. 부라린 눈이 아무리 보아도 무섭기는커녕 오히려 정감이 있는 모습이다.

 

그동안 수원박물관은 내 집처럼 드나들었지만 이렇게 성황당과 장승이 서 있었음에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전국을 다니면서 워낙 많은 성황당과 장승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입춘이라서 그런가? 푹한 날씨에도 미쳐 눈이 녹지 않은 잔디 위에 서 있는 탑과 성황당을 그냥 지나치기에는 정유년 벽두부터 너무 소란스럽다는 생각이다.

 

 

돌로 쌓은 성황당, 전국 곳곳에서 만날 수 있어

 

돌을 쌓아올려 누석탑으로 조성한 성황당은 가장 보편적인 형태이다. 성황당은 마을의 안녕과 길손의 안녕을 위해 길거리나 마을의 입구 등에 세우는데 지나는 길에 돌을 이곳에 올려놓고 안전한 행로를 기원하기도 한다. 전국을 여행하다보면 지금까지 가장 많이 남아있는 것이 바로 상황당과 장승이다.

 

성황당은 건물로 축조했을 때는 명칭이 달라진다. 성황당을 당산(堂山)’ 혹은 서낭이라고도 부르는데 경기도와 충청도 지방에서는 산신당· 산제당 혹은 서낭당이라고 부른다. 영남과 호남 지방에서는 주로 당산이라고 한다. 성황당은 돌탑이나 신목, 혹은 조그마한 집을 지어서 신표로 삼는다. 집을 지었을 때는 그 안에 당신(堂神)을 상징하는 신표를 놓거나, ‘성황지신이란 위패를 모셔 놓는다.

 

당산은 내륙지방과 해안지방의 부르는 명칭 또한 다르다. 내륙에서는 신당, 당집, 당산 등으로 부르지만, 해안이나 도서지방에서는 대개 용신당이라고 부른다. 이 당산에서는 매년 정월 초나 보름, 혹은 음력 10월 중에 길일을 택해 마을 주민들이 정성을 드린다. 당산제를 지낼 때는 집집마다 추렴을 하여 제물을 마련하는데, 이런 이유는 마을 사람 모두가 똑 같이 복을 받게 하기 위함이다.

 

 

이빨 드러낸 장승군, 오히려 반갑소

 

수원박물관 초입에 서 있는 5기의 목장승. 장승은 나무나 돌로 만들어 세운다. 나무를 깎아 세우면 목장승이라 하고, 돌을 다듬어 세우면 석장승이라 한다. 장승만 세우는 경우도 있지만, 솟대, 돌무더기, 서낭당, 신목, 선돌등과 함께 동제의 복합적인 형태로 표현이 되기도 한다. 장승은 그만큼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장승의 기원에 대한 정설은 아직 명확하지 않다. 대개는 고대의 남근숭배설(男根崇拜說)’과 사찰이나 토지의 경계표지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등이 있기도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정확한 것은 아니다. 일설에는 솟대나 선돌, 서낭당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등도 전해진다. 일부 장승 중에는 거리를 알려주는 로표장승도 존재한다.

 

 

목장승의 경우에는 복판에 글을 써서 표시하는데 대개는 천하대장군이나 지하대장군, 혹은 지하여장군, 축귀대장군 등으로 표현한다. 수원박물관 입구에 서 있는 장승은 모두 축귀대장군(逐鬼大將軍)’으로 앞에 방위표시를 하였다. 그 중에는 여장군도 서 있어 나라를 지키거나 마을을 지키는 데는 남녀구별이 없음을 알려준다.

 

새해가 시작된다는 입춘. 수원박물관 앞에서 만난 성황당과 목장승 앞에서서 고개를 숙인다. “정유년 한 해 이 나라가 안정을 되찾고 서민들이 마음 편하게 두 다리 쭉 펴고 사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길 바란다는 간절한 마음을 전한다. 모처럼 성황당과 장승 앞에 서 머리를 숙였으니 올해 꼭 이루어질 것이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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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군 합강리 중앙단에서 한 맺힌 원혼을 위로하다

 

여단(厲壇)’이란 별여제(別厲祭)를 지내는 단을 말한다. 여단은 일반적인 제를 지내는 곳과는 다르다. 고을의 수령이 세상을 살다가 화를 당하고 세상을 떠난 원귀들을 달래기 위해 제를 지내던 곳을 말한다. ‘여단제(厲壇祭)’는 아이를 낳다 죽은 해탈귀, 총각처녀가 결혼을 하지 못하고 죽은 몽달귀와 각시귀, 칼에 맞아 죽은 검사귀, 물에 빠져 죽은 익사귀, 불에 타 죽은 화사귀, 어려서 죽은 동자귀 등 각종 귀신들을 달래는 제를 지내는 곳이다.

 

우리나라 각 고을에는 여단이 있었다. 조선조까지 이어지던 여단제는 각 고을의 수령들이 매년 청명, 음력 715, 101일 등 세 차례 이 여단에 나가 많은 한을 품고 죽은 원혼들을 달래는 제를 지냄으로써 고을이 안녕하고 백성이 편안하기를 빌었다. 현재 여단제는 사라졌지만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곳이 바로 강원도 인제군 합강리 산221-13에 소재한 중앙단이다.

 

 

중앙단은 인제에서 44번 국도를 따라 양양 속초로 나가는 방향에 소재하고 있다. 원통을 벗어나는 우측 소양강변에 마련한 이 여단을 중앙단이라 하는데 한편에는 합강정이 자리하고 있고 여단과 그 뒤편에 합강 미륵불이 소재하고 있다. 인제 중앙단은 조선초기부터 19세기 말까지 제를 지내던 곳으로 2001724일 복원되었다.

 

지난 4, 12일 동안 강원도 여행을 하면서 들린 중앙단.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여단의 흔적을 찾아 여러 곳을 다녔다. 그동안 여단터 등은 여러 곳에서 만날 수 있었지만 여단을 복원해 놓은 곳은 쉽게 만날 수 없었다. 그런 여단의 모습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인제군이다. 1901년 경 소실되어 터만 남아있었던 중앙단은 가로와 세로 6.51m, 높이 77.5cm의 정방현 사각형 형태의 화강석으로 조성 복원하였다.

 

 

각 고을의 수령이 모여 여단제를 지낸 인제 중앙단

 

인제 합강정 옆에 위치한 중앙단은 조선시대 각도의 중앙에서 전염병 등으로 억울하게 죽은 원혼들을 위해 제를 지내던 곳이다. 조선시대의 여단제는 국가에서 자연신에게 지내는 제사로 정종 2년인 1400년에 지방의 주현까지 행해졌으며 임금이 직접 제를 봉행하던 여제단은 궁성 밖 북교와 동교, 서교에 설치되었다.

 

각 지방의 여단은 주로 관아 북쪽의 민가에서 멀리 떨어진 구릉지에 자리를 마련하고 있으며 1년에 세 차례 정기적으로 지내던 여단제 말고도 역병이 돌거나 가뭄이 심할 때는 시기와 장소를 별도로 택해 고을의 수령이 직접 여단에 나가 제를 모시고는 했다. 인제 중앙단의 경우에는 <증보문헌비고><인제읍지>등에 그 기록이 보이고 있다.

 

 

<증보문한비고>에 의하면 영조 18년인 1742년에 왕명에 의하여 별여제가 각도의 중앙인 강원도 인제, 경상도 상주, 충청도 공주, 전라도 광주 등에서 시행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 보이는 영조 18년의 여단은 1843년에 발간 된 <인제읍지> 단묘조에 기록된 합강정 뒷쪽에 있는 중앙단이 바로 영조 때 전국에서 열린 여단제의 중앙단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외에도 1941년에 발간된 <강원도지><관동읍지>의 기록에 중앙단은 강원도의 중앙인 합강정 뒤쪽에 설치되어 1843년 전후까지 동서의 수령들이 모여 강원도의 별여제를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단이란 그저 일반적은 제사터가 아닌 원혼들을 위로하는 제사를 고을의 수령이 지냈다는 것에 그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합강정과 합강미륵불이 한 자리에

 

이곳 여단주변에는 합강정이 자리하고 있다. 합강정은 숙종 2년인 1676년 이세억 현감 재직시 건립된 중층누각이다. 합강정이라는 정자의 이름은 앞으로 흐르는 강이 동쪽의 오대산과 방태산 등에서 흐르는 내린천과 설악산과 서화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인북천이 홍진포의 용소에서 합류하여 흐르기 때문에 합강이라 했으며 그런 아름다운 지세를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자리한다 하여 합강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676년 인제읍민을 동원하여 건립한 합강정은 화재 등으로 소실된 것을 영조 32년인 1756년 현감 김선재가 디시 중수하였다. 1760년에 간행 된 <여지도서>에는 합강정은 십자각 형태의 누각으로 다섯칸이다라는 기록이 있어 1865년 재 중수 시에는 정자를 중수하면서 6칸으로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이후 한국동란 시 폭격에 의해 소실된 것을 1971년 합강 나루터 능선 위에 다시 지었으나 1996년 국도확장 공사로 철거된 것을 199862일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 2층 누각으로 복원한 것이다. 합강정에서 강쪽에 자리하고 있는 합강미륵불은 전형적인 지역 장인에 의해 조성된 미륵불이다. 누군가 미륵불 앞에 사탕봉지를 꽂아 둔 것으로 보아 이곳은 아직도 사람들이 찾아와 공을 들이고 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화재 답사를 다니다가 이렇게 한 자리에서 몇 기의 지정, 비지정문화재를 만나게 되면 그 날은 요즘말로 대박났다는 생각이다. 물론 그 문화재 하나하나를 자세히 기록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사로 연관을 짓고 있는 문화재들이기에 함께 소개를 한다. 합강정 옆에 복원된 원혼들을 위한 여단인 중앙단. 그곳을 들려 머리를 숙인다. 여단제를 지내지 않아 나라가 시끄러운 것일까? 그 앞에 서서 수많은 원혼들을 위한 간절한 마음을 합강에 띄워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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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양지면 양지리 산 6-1에 소재한 ‘세중(世中) 돌 박물관’. 20000년 6월에 설립자 천신일에 의해 개장한 세중 돌 박물관을 찾아가면 선조들의 혼이 깃든 석조 작품들을 만날 수가 있다. 입구를 들어서면서부터 각양각색의 표정들을 짓고 있는 석조물들은 그 하나하나가 모두 선조들의 마음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석조미술은 돌을 이용해 만든 작품을 말한다. 돌은 세월이 지나도 보존이 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수많은 석조작품들 중에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소중한 것들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그만큼 석조 미술품들은 우리의 주변에서 늘 우리와 함께 호흡을 했으며 우리 실생활 속에서도 함께 해왔다.

 

세계적인 추세로도 석조 조형물들은 역사의 한 면을 장식한 체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세계의 유수한 문화유적이 대개 석조물 위주로 형성되어 있는 것도, 석조의 재질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운간 석굴과 동문 석굴, 인도의 아잔타 석굴과 싼치탑, 인도네시아의 보로부드르, 캄보디아의 앙코르 와트 등은 모두 세계적인 미술품으로 각광을 받고 있으며 이들은 모두 석재 조형물이라는 것이다.

 

 

수많은 석조 문화유적

 

세중 돌 막물관 안으로 들어서면 마치 열병을 받는 듯한 기분이 든다. 5천여 평 너른 경내에 가득한 형형색색의 돌 조각품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돌 조각품들은 도시화, 산업화의 거센 물결 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으며, 일제치하를 비롯해 광복 후에는 외국으로 밀반출 되어 사라져버린 것이 부지기수이다.

 

세중 돌 박물관은 1만 여점의 다양한 석조미술품들을 연구보존하기 위하여 설립이 되었으며, 경내에 있는 수많은 석조작품들은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전국각지를 돌며 수집해 온 소중한 것들이다. 당시 설립자 천신일은 수많은 소중한 문화재가 해외로 밀반출 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우리 옛 돌조각의 예술성을 인식하고 유물의 방출을 막고자 돌 박물관을 개관하였다.

 

세중 돌 박물관은 우리나라 최초로 세워 진 돌 박물관으로 희로애락의 언덕, 탐라국의 동자들, 생활 속의 돌, 돌짐승과 함께, 민속신앙 속의 돌, 한국 불교와 돌, 벅수, 등대, 동자들의 마을, 십이지신상 조형탑 등 10개의 야외전시장을 마련했다. 실물로 전시된 돌조각 작품들은 보는 이들의 심미안을 만족시킴은 물론, 선인들의 숨결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돌 하나하나가 갖는 예술성 놀라워

 

돌은 말은 없으니 철학자에겐 철학으로, 음악가에겐 음악으로, 예술가에겐 예술로, 종교가에겐 종교로, 시인에겐 시로, 삶, 그 존재의 진리로 있나니

아, 그렇게 돌은 천년, 만년, 억년, 수억년, 세월없이 놓여있는 그 자리에서 침묵으로, 깊은 침묵으로, 삶, 그 존재의 말로 있나니...

 

 

박물관 경내에서 만난 석비에 시인 조병화가 지은 ‘돌’이란 시가 적혀있다. 그 시 한편으로도 돌 박물관 안에 있는 돌들이 갖고 있는 내면세계를 읽을 수가 있다. 내 마음이 편하면 석인(石人)들도 함께 미소를 띠우고, 내 마음이 편치 않으면 석인들도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다. 돌 박물관에서 만나는 많은 석조물들은 그렇게 나와 함께 울고 웃는다. 그래서 돌에는 생명이 있다고 하는가 보다. 봄 쳘, 온 들과 산이 초록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용인 세중 돌 박물관을 찾아 신록에 함께 물들어가는 돌들의 군상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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