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제군 합강리 중앙단에서 한 맺힌 원혼을 위로하다

 

여단(厲壇)’이란 별여제(別厲祭)를 지내는 단을 말한다. 여단은 일반적인 제를 지내는 곳과는 다르다. 고을의 수령이 세상을 살다가 화를 당하고 세상을 떠난 원귀들을 달래기 위해 제를 지내던 곳을 말한다. ‘여단제(厲壇祭)’는 아이를 낳다 죽은 해탈귀, 총각처녀가 결혼을 하지 못하고 죽은 몽달귀와 각시귀, 칼에 맞아 죽은 검사귀, 물에 빠져 죽은 익사귀, 불에 타 죽은 화사귀, 어려서 죽은 동자귀 등 각종 귀신들을 달래는 제를 지내는 곳이다.

 

우리나라 각 고을에는 여단이 있었다. 조선조까지 이어지던 여단제는 각 고을의 수령들이 매년 청명, 음력 715, 101일 등 세 차례 이 여단에 나가 많은 한을 품고 죽은 원혼들을 달래는 제를 지냄으로써 고을이 안녕하고 백성이 편안하기를 빌었다. 현재 여단제는 사라졌지만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곳이 바로 강원도 인제군 합강리 산221-13에 소재한 중앙단이다.

 

 

중앙단은 인제에서 44번 국도를 따라 양양 속초로 나가는 방향에 소재하고 있다. 원통을 벗어나는 우측 소양강변에 마련한 이 여단을 중앙단이라 하는데 한편에는 합강정이 자리하고 있고 여단과 그 뒤편에 합강 미륵불이 소재하고 있다. 인제 중앙단은 조선초기부터 19세기 말까지 제를 지내던 곳으로 2001724일 복원되었다.

 

지난 4, 12일 동안 강원도 여행을 하면서 들린 중앙단.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여단의 흔적을 찾아 여러 곳을 다녔다. 그동안 여단터 등은 여러 곳에서 만날 수 있었지만 여단을 복원해 놓은 곳은 쉽게 만날 수 없었다. 그런 여단의 모습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인제군이다. 1901년 경 소실되어 터만 남아있었던 중앙단은 가로와 세로 6.51m, 높이 77.5cm의 정방현 사각형 형태의 화강석으로 조성 복원하였다.

 

 

각 고을의 수령이 모여 여단제를 지낸 인제 중앙단

 

인제 합강정 옆에 위치한 중앙단은 조선시대 각도의 중앙에서 전염병 등으로 억울하게 죽은 원혼들을 위해 제를 지내던 곳이다. 조선시대의 여단제는 국가에서 자연신에게 지내는 제사로 정종 2년인 1400년에 지방의 주현까지 행해졌으며 임금이 직접 제를 봉행하던 여제단은 궁성 밖 북교와 동교, 서교에 설치되었다.

 

각 지방의 여단은 주로 관아 북쪽의 민가에서 멀리 떨어진 구릉지에 자리를 마련하고 있으며 1년에 세 차례 정기적으로 지내던 여단제 말고도 역병이 돌거나 가뭄이 심할 때는 시기와 장소를 별도로 택해 고을의 수령이 직접 여단에 나가 제를 모시고는 했다. 인제 중앙단의 경우에는 <증보문헌비고><인제읍지>등에 그 기록이 보이고 있다.

 

 

<증보문한비고>에 의하면 영조 18년인 1742년에 왕명에 의하여 별여제가 각도의 중앙인 강원도 인제, 경상도 상주, 충청도 공주, 전라도 광주 등에서 시행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 보이는 영조 18년의 여단은 1843년에 발간 된 <인제읍지> 단묘조에 기록된 합강정 뒷쪽에 있는 중앙단이 바로 영조 때 전국에서 열린 여단제의 중앙단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외에도 1941년에 발간된 <강원도지><관동읍지>의 기록에 중앙단은 강원도의 중앙인 합강정 뒤쪽에 설치되어 1843년 전후까지 동서의 수령들이 모여 강원도의 별여제를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단이란 그저 일반적은 제사터가 아닌 원혼들을 위로하는 제사를 고을의 수령이 지냈다는 것에 그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합강정과 합강미륵불이 한 자리에

 

이곳 여단주변에는 합강정이 자리하고 있다. 합강정은 숙종 2년인 1676년 이세억 현감 재직시 건립된 중층누각이다. 합강정이라는 정자의 이름은 앞으로 흐르는 강이 동쪽의 오대산과 방태산 등에서 흐르는 내린천과 설악산과 서화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인북천이 홍진포의 용소에서 합류하여 흐르기 때문에 합강이라 했으며 그런 아름다운 지세를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자리한다 하여 합강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676년 인제읍민을 동원하여 건립한 합강정은 화재 등으로 소실된 것을 영조 32년인 1756년 현감 김선재가 디시 중수하였다. 1760년에 간행 된 <여지도서>에는 합강정은 십자각 형태의 누각으로 다섯칸이다라는 기록이 있어 1865년 재 중수 시에는 정자를 중수하면서 6칸으로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이후 한국동란 시 폭격에 의해 소실된 것을 1971년 합강 나루터 능선 위에 다시 지었으나 1996년 국도확장 공사로 철거된 것을 199862일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 2층 누각으로 복원한 것이다. 합강정에서 강쪽에 자리하고 있는 합강미륵불은 전형적인 지역 장인에 의해 조성된 미륵불이다. 누군가 미륵불 앞에 사탕봉지를 꽂아 둔 것으로 보아 이곳은 아직도 사람들이 찾아와 공을 들이고 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화재 답사를 다니다가 이렇게 한 자리에서 몇 기의 지정, 비지정문화재를 만나게 되면 그 날은 요즘말로 대박났다는 생각이다. 물론 그 문화재 하나하나를 자세히 기록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사로 연관을 짓고 있는 문화재들이기에 함께 소개를 한다. 합강정 옆에 복원된 원혼들을 위한 여단인 중앙단. 그곳을 들려 머리를 숙인다. 여단제를 지내지 않아 나라가 시끄러운 것일까? 그 앞에 서서 수많은 원혼들을 위한 간절한 마음을 합강에 띄워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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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인시 양지면 양지리 산 6-1에 소재한 ‘세중(世中) 돌 박물관’. 20000년 6월에 설립자 천신일에 의해 개장한 세중 돌 박물관을 찾아가면 선조들의 혼이 깃든 석조 작품들을 만날 수가 있다. 입구를 들어서면서부터 각양각색의 표정들을 짓고 있는 석조물들은 그 하나하나가 모두 선조들의 마음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석조미술은 돌을 이용해 만든 작품을 말한다. 돌은 세월이 지나도 보존이 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수많은 석조작품들 중에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소중한 것들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그만큼 석조 미술품들은 우리의 주변에서 늘 우리와 함께 호흡을 했으며 우리 실생활 속에서도 함께 해왔다.

 

세계적인 추세로도 석조 조형물들은 역사의 한 면을 장식한 체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세계의 유수한 문화유적이 대개 석조물 위주로 형성되어 있는 것도, 석조의 재질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운간 석굴과 동문 석굴, 인도의 아잔타 석굴과 싼치탑, 인도네시아의 보로부드르, 캄보디아의 앙코르 와트 등은 모두 세계적인 미술품으로 각광을 받고 있으며 이들은 모두 석재 조형물이라는 것이다.

 

 

수많은 석조 문화유적

 

세중 돌 막물관 안으로 들어서면 마치 열병을 받는 듯한 기분이 든다. 5천여 평 너른 경내에 가득한 형형색색의 돌 조각품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돌 조각품들은 도시화, 산업화의 거센 물결 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으며, 일제치하를 비롯해 광복 후에는 외국으로 밀반출 되어 사라져버린 것이 부지기수이다.

 

세중 돌 박물관은 1만 여점의 다양한 석조미술품들을 연구보존하기 위하여 설립이 되었으며, 경내에 있는 수많은 석조작품들은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전국각지를 돌며 수집해 온 소중한 것들이다. 당시 설립자 천신일은 수많은 소중한 문화재가 해외로 밀반출 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우리 옛 돌조각의 예술성을 인식하고 유물의 방출을 막고자 돌 박물관을 개관하였다.

 

세중 돌 박물관은 우리나라 최초로 세워 진 돌 박물관으로 희로애락의 언덕, 탐라국의 동자들, 생활 속의 돌, 돌짐승과 함께, 민속신앙 속의 돌, 한국 불교와 돌, 벅수, 등대, 동자들의 마을, 십이지신상 조형탑 등 10개의 야외전시장을 마련했다. 실물로 전시된 돌조각 작품들은 보는 이들의 심미안을 만족시킴은 물론, 선인들의 숨결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돌 하나하나가 갖는 예술성 놀라워

 

돌은 말은 없으니 철학자에겐 철학으로, 음악가에겐 음악으로, 예술가에겐 예술로, 종교가에겐 종교로, 시인에겐 시로, 삶, 그 존재의 진리로 있나니

아, 그렇게 돌은 천년, 만년, 억년, 수억년, 세월없이 놓여있는 그 자리에서 침묵으로, 깊은 침묵으로, 삶, 그 존재의 말로 있나니...

 

 

박물관 경내에서 만난 석비에 시인 조병화가 지은 ‘돌’이란 시가 적혀있다. 그 시 한편으로도 돌 박물관 안에 있는 돌들이 갖고 있는 내면세계를 읽을 수가 있다. 내 마음이 편하면 석인(石人)들도 함께 미소를 띠우고, 내 마음이 편치 않으면 석인들도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다. 돌 박물관에서 만나는 많은 석조물들은 그렇게 나와 함께 울고 웃는다. 그래서 돌에는 생명이 있다고 하는가 보다. 봄 쳘, 온 들과 산이 초록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용인 세중 돌 박물관을 찾아 신록에 함께 물들어가는 돌들의 군상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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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고도 경주는 늘 그리운 곳이다. 젊었을 때 그곳에서 잠시 동안 아이들을 가르쳤던 나는,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마음 한편에 싸한 그리움이 샘솟는다. 지금이야 다들 어른이 돼서 벌써 손자, 손녀들을 본 나이이니 이제는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가 보다. 하기에 제자라고 해도 당시에 20대 초반이던 나에게는 불과 7~8세의 차이밖에 나질 않았던 제자들이다.

 

몇 년 전인가 경주에 들렸을 때 제자들을 잠깐 만나본 것을 끝으로 그 이후 연락을 하지 못했다. 살아간다는 것이 바쁘다가 보면 내 가족들을 챙기는 것도 버거울 수가 있다. 하물며 벌써 40년 이상이나 지난 옛 이야기를 끄집어내어야 할 겨를도 없을 것이다. 그런 경주는 지금에 와서는 아예 눌러 살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수많은 문화재가 늘 눈에 밟혀

 

경주에 그런 그리움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경주는 늘 머물고 싶은 곳이다. 신라의 고도 경주, 그리고 백제의 고도인 부여와 공주. 두 곳을 비교하자면 문화도 다르고 그들이 조성해 놓은 많은 문화재 역시 다르다. 하지만 내가 경주를 더 선호하는 것은 1천년 세월을 지켜 낸 신라이기 때문에, 그만큼 많은 문화유적이 오롯이 자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많은 문화재 중에서 경주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포석정이다. 포석정은 사적 제1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경주시 배동 454-3에 소재한 포석정은, 신라 왕궁의 별궁으로 알려진 곳이다. 굳이 이곳까지 와서 포석정이라는 석조 구조물을 만들어 놓은 것도, 알고 보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포석정은 경주 남산 서쪽 계곡에 있는 신라시대 연회장소로, 조성연대는 신라 제49대 헌강왕(875~886)때로 본다. 경주 남산은 높지 않은 산이지만 불교유적이 가장 많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신라는 당대의 수많은 문화재가 아직도 남아 있는 곳이다. 그런 곳에 자리한 포석정은 흥망성쇠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어무상심(御舞詳審)’ 혹은 어무산신(御舞山神)’의 춤을 추다 신라 제49대 헌강왕의 신비의 인물이다. 재위는 10년 남짓이지만 수많은 이야기가 전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이야기들은 인간이 아닌 신들과의 조우이다. 헌강왕 2년인 876년과 886년에 황룡사에서 백고좌강경을 설치하고 친히 가서 들었다. 헌강왕은 불력에 의한 국가의 재건과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였다.

 

 

 

879년에 왕이 나라 동쪽의 주·군을 순행했을 때, 어디서 왔는지 네 사람이 어가를 따르며 춤을 추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들을 산과 바다의 정령이라 하였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삼국유사에도 실려 있다. 헌강왕이 포석정에 갔을 때 남산신(남산의 산신)이 나타나서 춤을 추었는데, 이 춤을 어무상심’, 혹은 어무산신이라 한다.

 

헌강왕이 금강령에 갔을 때 북악신과 지신이 나와 춤을 추었다. 그 춤에서 지리다도파라 했는데, 이것은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미리 알고 도망해 도읍이 장차 파괴된다는 뜻이라 한다. 신라의 멸망을 예견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 외에 처용설화도 전한다. 왕이 동해안의 개운포에 놀러갔다가 동해 용왕의 아들이라고 하는 처용을 만나 데리고 왔다. 그리하여 그 유명한 <처용가(處容歌)>가 만들어졌다. 이 처용의 역사적 실체에 대해서 이슬람 상인이나 지방 호족의 자제로 보기도 한다. ‘만파식적에 관한 설화역시 헌강왕 때의 일이다.

 

()과 한()의 장소 포석정

 

중국의 명필 왕희지는 친구들과 함께 물 위에 술잔을 띄워 술잔이 자기 앞에 오는 동안 시를 읊어야 하며, 시를 짓지 못하면 벌로 술 3잔을 마셨다고 한다. 이런 잔치를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이라 했는데, 포석정은 이를 본 따서 만들었다는 것이다.포석정에는 현재 정자는 없고 풍류를 즐기던 물길만이 남아있다. 물길은 22m이며 높낮이의 차가 5.9이다. 좌우로 꺾어지거나 굽이치게 한 구조에서 나타나는 물길의 오묘한 흐름은 뱅뱅 돌기도 하고, 물의 양이나 띄우는 잔의 형태나 잔속에 담긴 술의 양에 따라 잔이 흐르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다고 한다.

 

 

 

경애왕 4년인 927년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아 최후를 맞이한 곳인 포석정. 그리고 신라 마지막 왕인 56대 경순왕이 935년에 즉위를 마쳤으니,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최후를 맞이한 지 8년 만에 신라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런 아픔이 있는 곳이지만 물이 흐르지 않는 포석정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금방이라도 저 편 남산 아래로 누군가 덩실거리며 춤을 추고 나타날 것만 같다.

 

5월 말 수원의 행사가 마무리가 되는 날 가방 하나를 등에 메고 길을 떠나야겠다. 경주로 달려가 그동안 보고 싶었던 경주를 낱낱이 돌아보고 싶다, 아마도 며칠간은 남산일대를 돌아치겠지만 말이다. 그 중에는 포석정을 빠트리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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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0()화성연구회(이사장 이낙천) 회원 30여 명과 함께 떠난 답사. 보령 성주사지와 남포읍성, 서산 부석사를 돌아오는 당일 코스로 길을 떠났다. 제일 먼저 들린 곳이 바로 백제 때의 절 오합사가 나중에 낭혜화상이 중창을 하면서 이름을 바꾸었다는 성주사지. 국보 1점과 보물 3, 그리고 지방문화재 3점이 있는 곳이다.

 

금당이란 절의 중심부요, 부처님을 모신 곳이다. 절에서는 가장 중요한 곳임은 부언할 필요가 없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성주사는 백제시대 사찰로, 백제멸망 직전에 붉은 말이 이 절에 나타나 밤낮으로 여섯 번이나 절을 돌면서 백제의 멸망을 미리 예시해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성주사는 백제 법왕이 왕자일 때인 599,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을 위해 건립한 사찰이라고 전한다.

 

 

숭암사 성주사 사적에 보면 옛 성주사의 규모가 얼마나 큰지 알 수가 있다. 불전 80, 행랑 800여 칸, 수고 7, 고사 50칸으로 거의 천여 칸의 거대한 규모를 가진 사찰이었다. 현재 발굴 후 잘 정비가 된 성주사지는, 9천여 평의 대지를 낮은 석축 담으로 둘러싸고 있다. 전날 눈이 내려 아직 눈이 남아있는 성주사지. 많은 문화재가 있지만, 그 중 가장 눈길을 붙드는 것은 바로 금당터였다.

 

금당터의 석불좌 설명이 이상해

 

성주사 금당은 백제가 멸망한 후인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되었다. 백제에서 가장 웅장한 가람이었던 성주사에 신라는 왜 금당을 새롭게 조성한 것일까? 통일신라시대에 금당을 조성했다면, 금당터를 오르는 돌계단도 이 시기에 만들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금당터에는 사면으로 계단을 조성하였는데, 그 중 중앙오층석탑 뒤로 오르는 계단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40호인 성주사지석계단(聖住寺址石階段)’이다.

 

계단은 잘 다듬은 널찍한 돌을 이용하여 5단으로 쌓아 올렸다. 중앙오층석탑에서 금당으로 오르는 계단은 남다르다. 정면이기 때문에 양쪽 소맷돌에 사장상을 조각해 앉혀놓았다. 이 사자상은 1986년에 도난을 당한 것을, 옛 사진을 토대로 다시 복원하였다고 한다. 사자상의 설명을 듣고 나서 계단을 올라 석불좌 앞에 모여섰다. 그런데 이곳에서 해설사의 안내가 영 미덥지가 않았다.

 

 

금당터는 사방이 트였던 것으로 보여

 

금당의 한 가운데는 석불좌가 남아있다. 넓게 석재를 이용해 2단으로 조성한 석불좌는 조형미기 뛰어나다. 큼지막하게 사각형으로 조성한 석불좌. 일반 석불좌처럼 높지가 않은 것은, 아마도 이 부분이 하층기단부이고, 위에는 상층기단부가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불좌는 장대석으로 네모나게 두르고 난 뒤, 그 위에 연꽃잎을 크게 조각한 앙련을 새긴 4장의 석재를 이용해 위 기단을 올렸다. 네 장의 석재를 가변부분을 둥그렇게 조형하였으며, 그 중심을 도드라지게 하였다. 아마도 이 부분에 상층기단인 좌대를 올렸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남은 석불좌만 보아도 훌륭한 석조각임을 알 수가 있다.

 

 

이 금당터 중앙에 있는 석불좌를 보면 이상한 점이 있다. 즉 석불좌 사방에 주초가 놓여있고, 북쪽으로 또 하나의 주초가 있다. 이렇게 석불좌와 주초가 가까이 있다는 것은 금당터 가까이만 전각을 지었다는 것이다. 높게 조성을 한 금당터의 사방에 계단이 있고, 중앙에만 주초가 있었다는 것은, 사방에서 이 금당터를 올라 예를 취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즉 금당터 사방이 트여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해설사의 해설이 못 미더워

 

그런데 정말 웃지 못 할 일이 생겼다. 금당터 중앙에 있는 석불좌를 설명하는데, 영 미덥지가 않다. 해설사의 말로는

 

이 석불좌 위에 신라시대에 조성한 철불이 있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철불을 조각내어 가져가버렸다. 그리고 이 석불좌는 깨진 것이다. 이 위에 철불이 있었는데, 그 흔적이 여기 이렇게 녹슨 흔적이 남아 있다는 설명이다.

 

 

석불좌가 깨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대개 석불좌는 거대한 돌을 구할 수 없을 때, 몇 조각으로 나누어 조성을 한다. 대개는 두 조각이나 네 조각으로 조성을 하는데, 깨진 석조각이 4조각으로 칼로 그은 듯 깨질 수가 있을까? 그리고 현재 남아있는 석불좌는 하단부이다. 그 위에 커다란 네모난 돌을 앉고 앙련을 하단부에 새겨진 조각의 반대형으로 조각을 한다.

 

철불이 있었다는 것은 그렇다 치고라도 석불좌가 깨졌다거나, 그 위에 바로 철불을 올려 그 흔적이 남았다는 것은 영 미덥지가 않다. 거기다가 국보인 낭혜화상 탑비를 70이 넘은 마을 어르신이 업고 다녔다는 설명에서는, 그저 입을 다물 수가 없다. 비 몸돌의 높이가 263cm, 너비 155cm, 두께 43cm나 되기 때문이다. 장정 몇 사람이 들어도 힘든 비를 노인네가 업고 다녔다는 설명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문화재 해설이란 정확한 역사를 알려주어야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이라는 단어를 써 가면서 하는 문화재 해설. 참 웃지도 못하겠다. 문화재 답사를 많이 하는 나로서는 가끔 이렇게 해설사들이 입증이 안된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하기에 내가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해설사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문화재 해설,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정확한 근거가 없이 하는 가정의 해설, 또는 본인의 생각만으로 추정하는 문화재 해설은 삼가는 것이 옳지 않을까? 문화재 해설이란 가장 정확한 내용, 가급적이면 역사적으로 입증이 된 내용을 관람을 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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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도 고성에 있는 건봉사의 능파교를 찾을 때는 꼭 날씨가 추웠다. 지난 118일부터 23일 일정으로 돌아 본 강원도. 그 첫날 건봉사를 찾은 날도 갑자기 날이 쌀쌀해졌다. 바람까지 불어 체감온도는 더 떨어졌는데도 불구하고, 통일전망대를 돌아본 후 건봉사로 향했다. 그곳에서 불이문을 건너 산영루로 들어가는 길에 만나는 다리가 바로 능파교이다.

 

금강산의 한 봉우리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절의 앞 계곡으로 맑은 물을 흘려보낸다. 그 위에 석재로 된 다리는 우리나라의 많은 홍예교 중에서도 아름답다고 소문이 나 있다. 보물 제1336호인 능파교’.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이 다리는,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38 건봉사 경내로 들어가는 다리이다.

 

 

다리가 있는 곳은 신라 법흥왕 7년인 520년에 아도스님이 창건을 해 원각사라고 이름을 붙였다는 절이다. 그 뒤 신라 말에 도선국사가 절 서쪽에 봉황새처럼 생긴 돌이 있다고 하여, 서봉사라고도 불렀다. 현재의 명칭인 건봉사는 고려 공민왕 7년인 1358년에 나옹스님이 붙인 이름이다.

 

여러 번 수난을 당한 능파교

 

118일 찾아간 고성에서 만난 다리. 능파교는 건봉사의 대웅전 지역과 극락전 지역을 연결하는 무지개 모양의 다리이다. 다리는 한 칸의 홍예를 조성한 것으로는, 그 규모가 상당히 크다. 폭이 3m에 길이는 14.3m에 이른다. 다리 중앙부의 높이는 5.4m이다.

 

능파교는 조선 숙종 34년인 1708년에 건립된 능파교신창기비(凌波橋新創記碑)가 남아있어, 축조된 시기 및 내력에 관해 자세히 알 수 있다. 비문에 따르면 숙종 30년인 1704년부터 숙종 33년인 1707년 사이에 처음으로 축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영조 21년인 1745년에 대홍수로 인해 붕괴가 된 것을, 영조 25년인 1749년에 중수하였다. 고종 17년인 1880년에 다시 무너져, 그 석재를 대웅전의 돌층계와 산영루를 고쳐 쌓는 데에 이용하기도 하였다.

 

2003년에는 능파교 홍예틀과 접하는 호안석 중 변형을 해체하여 원형을 찾아 보수를 하였다. 그러나 보수를 하던 중에 능파교가 훼손되어, 문화재 전문가의 도움으로 200510월에 원형 복원을 하여 오늘에 이른다.

 

 

뛰어난 조형미를 보이는 홍예교

 

능파교는 다리의 중앙부분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를 틀고, 그 좌우에는 장대석으로 쌓아서 다리를 구성하였다. 홍예는 하부 지름이 7.8m이고 높이는 기석의 하단에서 4.5m이므로, 실제 높이는 이보다 조금 더 높다.

 

고성지역을 답사하면서 찾아간 능파교. 날이 쌀쌀한데도 많은 사람들이 능파교를 건너 산영루 밑을 통과한다. 능파교 밑으로 흐르는 물은 맑기만 하다. 능파교의 교각 밑으로 들어가 본다. 밑에서 바라보니 능파교의 양편으로 삐죽이 고개를 내민 산영루의 처마가, 마치 능파교에 날개를 달아놓은 듯하다. 장대석으로 고르게 쌓은 홍예를 바라보고 있자니, 과거 석재를 이용한 조상들의 조형술에 감탄이 절로 터져 나온다. 어떻게 이렇게 반듯하니 돌을 쌓아올려 서로 버티는 힘을 이용할 수가 있었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그 다리를 지나 대웅전을 향하고 있지만, 그 많은 무게를 버틸 수 있도록 축조를 하였다니 그저 놀랍기만 하다. 다리 밑으로 흐르는 맑은 물에 손을 넣어본다. 폐부 깊숙이 한기가 전해진다. 한 여름에도 이곳은 물이 차가워 오래 물속에 있지를 못하는 곳이다. 그만큼 자연이 살아 숨 쉬는 곳이기도 하다.

 

 

자연을 벗어나지 않는 석조조형물

 

석재를 이용해 조성한 다리 하나가 갖는 의미. 그저 다리라는 것이 사람들이 건너기 위한 조형물이려니 생각을 하겠지만, 그 다리가 결코 자연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과거 우리의 모든 건축물은 결코 자연을 넘어선 적이 없다. 그것이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될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능파교를 건너본다. 그저 그 위에서 11월의 찬바람을 맞으며 한 없이 서 있고 싶다. 오랜 세월 그렇게 자리를 지켰을 능파교에 대한 예의를 차리고자 함이다. 사람들에게는 다리이겠지만 30년 세월 문화재를 찾아 전국을 돌아본 나에게는, 능파교는 다리가 아닌 그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내년 봄 산수유가 계곡에 흐드러지게 필 때, 다시 한 번 찾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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