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 벚꽃 만개한 당간지주와 삼층석탑을 찾아가다

 

그동안 문화재답사를 그렇게 오래 다녔으면서도 정작 꽃이 만개하는 봄철을 이용해 다닌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봄철에는 각종 행사가 많다보니 정작 문화재답사는 행사가 시작되기 전인 철 이른 3월이나 봄꽃이 다 지고난 후 돌아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지난 12일 모처럼 꽃이 만개한 안양 중초사지를 찾아갔다고 벚꽃이 만개한 당간지주와 삼층석탑의 모습을 보고 문화재답사도 꽃이 만개할 때가 제대로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경기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212-1에 소재하고 있는 중초사는 통일신라 흥덕왕 때의 사찰로 당시의 큰 절이었던 황룡사의 항창이 절주통으로서 이 당간지주의 불사에 참여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 절이다. 2012년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는 유유산업이 문을 닫았을 때인데 414일 찾아간 이곳은 김중업건축박물관으로 개관을 하여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었다.

 

 

중초사는 어떤 절이었을까?

 

중초사는 적지 않은 규모의 사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보물 제4호로 지정된 중초사지당간지주의 중초사지 당간지주명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보면 보력 2(신라 흥덕왕 1, 826) 세차 병오년 8월 초엿새 신축일에 중초사(中初寺) 동쪽 승악의 돌 하나가 둘로 갈라져 이를 얻었다. 같은 달 28일 두 무리가 일을 시작하여, 91일 이곳에 이르렀으며, 이듬 해 정미년(827) 230일에 모두 마쳤다. 이 때의 주통은 황룡사의 항창화상이다. 상화상은 진행법사이며, 정좌는 의설법사이고, 상좌는 연숭법사이다. 사사는 둘인데 묘범법사와 칙영법사이다. 전내유내는 둘인데 창악법사와 법지법사이다. 도상은 둘인데 지생법사와 진방법사이며, 작상은 수남법사이다고 적고 있다.

 

당시 중초사에는 다양한 직분을 갖고 있는 승려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는 국통 밑에 주통과 군통이 있었는데 중초사에 주통이 있었다는 것은 중초사가 작은 사찰이 아닌 위치에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에 절의 살림을 맡아하는 원주(정좌), 교육을 담당하는 교무(사사), 자금의 츨납 및 사무를 관장하는 재무(상좌) 등이 있었다는 것은 다양한 소임을 맡은 승려들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중초사에서 승악(현재의 관악산을 뜻하는 것으로 보임)에서 86일 돌을 취하여, 28일에 두 개의 돌을 두 무리가 나누어 중초사로 운반을 시작하기 시작하였으며 91일 중초사에 도착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중초사는 동문선(東文選),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흥지도서(興地圖書), 가람고(伽藍考)같은 문헌에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고려후기에 이미 폐사된 사찰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을 배경으로 한 당간지주 작품이네

 

보물 제4호인 당간지주와 함께 서 있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64호인 안양중초사지삼층석탑. 이 삼층석탑은 기단부에 1층의 몸돌만이 남아 있고, 그 위에는 지붕돌만 포개어져 있는 형태이다. 중초사터에 남아 있는 이 삼층석탑은 원래 있던 자리가 아니고, 1960년 옛 터에 유유산업의 공장이 들어서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운 것이다.

 

탑은 전체의 무게를 받치는 기단(基壇)1층으로 쌓고, 그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다. 탑신부는 2·3층 몸돌이 없어진 채 지붕돌만 3개 포개져 있다. 기단과 1층 몸돌의 4면에는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본떠 새겼다. 지붕돌은 매우 두꺼워 급한 경사를 이루고,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 양끝에서 희미하게 들려있으며, 밑면의 받침은 1·2층은 4, 3층은 3단을 두어 간략화 되었다.

 

 

주변에 꽃이 만개한 나무에서 벌써 꽃잎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 벚꽃과 함께 서있는 당간지주와 삼층석탑은 어느 방향에서 사진을 촬영하던지 예전과 다르다. 흡사 차디찬 석재가 생명을 얻은 듯하다. 이런 아름다운 모습을 그동안 담아내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한다. , 가을. 꽃이 피거나 단풍이 물들 때 문화재답사를 해야 제격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저 아름답다. 어느 곳에서 촬영을 하던지 벚꽃이 핀 가지가 조금만 들어가도 분위기가 다르다. 바븐 일정 중 잠시 시간을 내어 찾아간 안양 중초사지에서 만난 문화재 두 점. 기분 좋은 답사를 하면서 앞으로는 주변 환경을 먼저 생각해보아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가장 아름다운 문화재를 만나기 위함이다.

 

모든 백성을 편안하게 만든다는 정조의 뜻 담겨있어

 

정조대왕이 도성의 궁을 나서 부친인 사도세자의 능을 찾아가는 길은 두 가지 길이 있다. 그 하나는 현재의 용산에서 한강을 건넌 후 노량진과 동작 - 사당 - 과천을 가쳐 수원으로 오는 길이고, 또 하나는 현재의 노량진을 거쳐 시흥 - 안양을 지나 수원으로 향한 길이다. 그 당시 주로 행행을 하는 길은 사당 - 과천을 지나는 길이었지만 동작에서 사당을 거쳐 과천의 길은 워낙 가파른 고개가 있어 어가행렬이 많이 지체되고는 했다.

 

이런 이유로 정조대왕은 부친의 묘를 찾아가는 행행길을 한강 배다리를 지나 시흥행궁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안양을 지나 수원으로 행하는 길을 이용했다. 이 길에는 안양천이 있기 때문에 이곳을 지나기 위해서는 다리가 필요했다. 당시 능행길의 다리는 목조로 가설했다가 왕의 어가가 지나면 다시 철거하는 방법을 택했다.

 

효심이 남다른 정조대왕은 부친의 능을 찾아오기 위해 정조 19년인 1795년 당시 경기관찰사인 서유방에게 안양천에 석교를 놓을 것을 명했고, 서유방은 안양천에 3개월의 공사 끝에 7개의 홍예가 있는 석교를 완성했다. 정조는 이 다리를 만안교라고 이름을 붙였으며 백성을 어여삐 여긴 정조대왕은 이 만안교라는 이름을 모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다리라는 뜻으로 지었다고 전해진다.

 

 

모든 이들을 편안하게 하는 다리 만안교

 

12일 오후 안양으로 향했다. 안양의 문화재를 답사하기 위함이지만 정조대왕이 부친 사도세자의 능을 찾아오기 위해 안양천에 다리를 놓았다는 만안교(萬安橋)’를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되어 있는 만안교는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2679 삼막천 위에 소재하고 있다.

 

정조대왕은 이 만안교를 건너 수원 화성행궁으로 오곤 했는데 이 다리는 석조로 조성했지만 그 규모가 작지 않다. 만안교의 길이는 31.2m, 폭은 8m로 당시 정조대왕의 어가행렬이 말은 탄 기마병들이 지나기에 충분하도록 축조한 것이다. 현재 이 만안교는 1980냔 국도의 확장공사로 원위치에서 남쪽으로 460m 떨어진 안양교 사거리의 교차지점에 소재하고 있던 것을 이건한 것이다.

 

안안교 곁에는 서유방이 글을 짓고 조윤형이 글을 쓴 만안교비가 서 있다. 효심이 남다르던 정조대왕이 부친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하기 위해 지나던 길에 내를 건너기 위해 축조했다는 만안교. 다리 위에 올라서면 정조대왕의 효심이 느껴진다. 정조대왕은 부친의 묘를 얼마나 다니고 싶었으면 가교(假橋)인 목교가 아닌 단단한 셕교를 축조할 것을 명했을까?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무지개돌다리 만안교

 

만안교는 조선후기 대표적인 홍교(무지개다리)로 알려져 있다. 만안교의 주변을 돌면서 꼼꼼히 살펴본다. 물이 흐르는 방향의 하단부를 삼각형으로 조성한 돌을 유속방향으로 놓아 큰 물살에도 교각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조성하였다. 홍예를 받치고 있는 교각 역시 정교하게 조성해 짜임새가 독특하다.

 

상판에 놓은 석재도 큼직하게 마련해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도 버틸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런 하나하나가 정조대왕의 치밀함을 그대로 들어낸다. 화성을 축성할 때도 일일이 돌아보고 문제점을 해결하던 정조대왕이다. 백성을 아낀 정조대왕은 화성 축성 시 원래의 계획을 바꾸면서까지 백성의 안위를 먼저 살폈던 것이다.

 

 

그런 정조의 마음이 그대로 담겨있는 만안교. 봄날 찾아간 안양시 소재 만안교에서 다시 한 번 정조대왕의 마음을 읽는다. ‘만년동안 사용할 수 있는 다리혹은 모든 백성이 편안한 다리라는 만안교는 7칸의 홍예를 가진 아름다운 석교의 모습을 200년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국보와 보물이 가득한 용인 호암미술관

 

호암미술관은 수원에서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3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영동고속도로를 이용해 마성IC로 나가면 바로 미술관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즈음처럼 멀리 문화재답사를 나갈 수 없을 때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호암미술관을 찾아간다. 호암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는 많은 전시작품들은 일반인들이 접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좋은 전시작품과 아름다운 경치, 어찌 이곳을 자주 찾아가지 읺겠는가?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에버랜드로 562번길 38에 소재한 호암미술관은 삼성그룹 창업자인 호암 이병철 선생이 30여 년에 걸쳐 수집한 한국미술품을 바탕으로 1982422일에 개관한 사립미술관이다. 호암미술관은 모든 사람들에게 문화 창조의 꿈을 심어주고 민족문화의 산 교육장이 되는 장소이기를 원했던 창업자의 설립취지에 따라 조성되었다고 한다.

 

호암미술관 앞으로는 1997년 개원한 전통정원 희원이 자리하고 있다. 미술관 안 1층에 유명화가들의 작품과 2층에 전시되어 있는 민화와 국보와 보물 등은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하기에 난 안에 있는 소중한 문화재를 찬찬히 살펴보는 것도 좋아하지만 누구나 마음대로 사진촬영을 할 수 있는 희원에 서 있는 석탑과 석조조형물 등을 더 좋아한다. 카메라에 담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희원에 늘어선 석조물과 가을의 만남

 

지난주에 이어 이번 주까지 2주 연속 호암미술관을 찾았다. 가을 경치가 아름다운 이곳 정원을 둘러보면 답답했던 마음이 싹 가시기 때문이다. 미술관 입구에서 입장권을 구입하면 50% 할인이 된다. 요즈음은 문화재를 감상하기 위해 전시관이나 박물관 등을 찾아다니면서 나이 먹은 덕을 톡톡히 보고 산다.

 

전통정원이라는 희원은 들어가면서부터 기분이 좋아진다. 양편으로 늘어선 석인들이 마치 사열을 받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옛 전통문양을 떠서 만든 보화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면 여기저기 석탑들이 서 있다. 고려시대와 조선조에 조성된 이 석탑들은 문화재 지정이 되어있지 않지만 탑 그대로가 주변 단풍과 함께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하게 만든다.

 

이곳 전통정원인 희원에서 만나는 국보를 묘사한 탑도 눈길을 끈다. 국보 제101호 모조현묘탑은 2012년도에 경복궁내에 서 있는 실제탑을 촬영한 적이 있기 때문에 갈 때마다 정감이 가는 탑이다.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法泉寺址 智光國師塔)’이라는 이 탑은 고려시대의 승려 지광국사 해린(9841070)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수난의 세월을 지내온 문화재다.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법천사지에 서 있던 현묘탑은 1912년 일본 오사카로 밀반출이 되었다가, 3년 후인 1915년 반환되어 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가 현재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문지로 132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옮겨졌다. 하지만 안내판에는 경복궁에 위치하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어 정정을 해야 할 듯하다.

 

정원을 돌다보면 우리 전통정원의 정겨움을 느낄 수 있다. 더구나 아름답게 물든 단풍으로 인해 최고의 멋진 정원을 산책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아름다운 정원을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가을을 감상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그런 호암미술관이 가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호암미술관 앞으로는 삼만육천지라는 명칭을 갖고 있는 인공호수가 있다. 그곳에도 가을이 깊었다. 호암호수로 불리는 삼만육천지는 1970년대 자연농원 개발 시절에 만들어진 인공호수로 면적이 36000평이라 삼만육천지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삼만육천지 주변에 조성된 700m 길이의 벚꽃터널과 호숫가 벚꽃 산책로에는 왕벚나무를 비롯해 가지를 길게 늘어뜨린 능수버들 등 1만 그루나 식재되어 있다.

 

이곳 삼만육천지를 끼고 걷는 산책길은 가을을 느끼기에 최적이다. 그저 걷기만 해도 상쾌해진다. 이런 가까운 곳에 소중한 문화재와 아름다운 우리 정원을 감상할 수 있는 곳. 30분이면 찾아갈 수 있는 이곳은 지금 아름다운 가을을 마음껏 음미할 수 있다. 가을이 그립거든 이곳을 찾아가보라.

고성 정수암 산신각 점안식이 열리던 날

 

4월 초파일은 부처님 탄생일이다. 부처님 오신 날또는 석가탄신일(釋迦誕辰日)’이라고 하는 초파일은 불교 연중행사 가운데 가장 큰 명절로 여기며, 이 날은 기념법회를 비롯하여 연등놀이, 관등놀이, 방생, 탑돌이 등 각종 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초파일은 각 절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날이다.

 

각 사찰에서는 법당과 경내, 거리에 등을 내달고 경내에 수많은 등을 밝히는 등 공양 행사를 이어 온다. 이날은 육법공양을 행하는데 '육법(六法)'이란 깨달음과 관련된 6가지 공양물로 정신적인 상징을 의미하는 것이다. 육법공양물은 쌀, , , , 과일, 차 등으로 이러한 공양물을 부처께 바치는 의식이다.

 

4월 초파일에 다는 연등은 그 의미가 깊고 오래되었다. 4월 초파일 연등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고려사에서 볼 수 있는데, 고려 의종 때 백선연이 48일에 점등했다고 적고 있다. 당시에는 초파일 연등을 열면 3일 낮과 밤 동안 등을 켜놓고 미륵보살회를 행했다고 한다. 이러한 연등회는 조선 태종 15년인 1415년 이후로는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초파일 법회를 위해 찾아간 고성 정수암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산학리에 소재한 정수암(주지 진관스님)을 찾았다. 벌써 다녀온 지가 며칠이나 지났다. 지난 1일 찾아갔다가 3일에 돌아왔으니 4일이나 지난 셈이다. 다녀오고 나서 수원 화성연극제며 많은 행사로 인해 제때 글을 쓰지 못하고 말았다. 무슨 일이나 바로 글을 써야 감이 잡히는데, 단 하루라도 늦어지면 처음에 들었던 생각이 무뎌지기도 한다.

 

정수암을 찾아간 것은 지난해 조성한 마애불 때문이다. 지난해 정수암을 찾아가 아침에 문을 열고 나오다가 법당 옆 바위에 마애불을 보았다. 분명 바위였는데 그 바위에 마애불을 조성한 것이다. 물론 착각이다. 하지만 순간 저 바위에 마애불을 조성하라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어, 몇 사람과 의논 끝에 마애불을 조성한 것이다.

 

지난 해 마애불을 조성하면서 정수암은 큰 불사를 했다. 절 입구에 일광보살과 원광보살 상을 마련해 불이문(不二門)을 삼고, 인법당 뒤편에 큰 바위를 세워 산신각을 조성했다. 원래 계획은 마애불과 신신각을 부조로 각인하기로 마음먹었지만, 조성을 맡은 여주시에 거주하는 김원주 작가의 일정으로 인해 산신각은 부조로 조성하지 못하고 그림을 그렸다.

 

 

마을 여인들이 지켜 낸 산신각바위

 

원래 저 산신을 그린 바위가 지금보다 더 컸다고 하네요. 그런데 돌이 워낙 좋으니까 조경업자가 저 바위를 산 후 쪼개서 가져가려고 했나 봐요. 바위를 쪼갠다는 소식을 들은 마을 분들이 막았데요. 저 바위가 예전에는 마을 여인들이 위하는 바위였다는 거예요

 

정수암 주지 진관스님이 전하는 이야기로는 그 바위에 치성을 드리고 난 후 아들을 낳은 여인이 있어 마을에서 신령한 바위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런 바위를 쪼개 가져간다는 소식에 여인들이 반대를 하고 나섰다고 한다. 바위는 일부 쪼개서 가져갔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세운 면의 높이가 2m가 넘는다.

 

그 바위가 마을에서 위하는 산신바위예요. 그런데 스님이 주지로 오시고 나서 그 비위에 산신도 그림을 저렇게 멋지게 그려놓아 이제 제 모습을 찾은 것 같아 여간 좋은 것이 아닙니다

 

초파일에 절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공양할 비빔밥에 들어갈 나물을 다듬고 있던 신도 한 분이 하는 말이다. 정수암 신도들은 연세가 드신 분들이 많은 것도 특징이다. 초파일이 되면 고성군 산학리만 아니라 속초와 서울, 구리, 남양주, 수원, 전주 등 먼 곳에 거주하는 신도들까지 모두 찾아오기 때문에 100인분의 비빔밥을 준비한단다. 그동안 정수암은 초파일이라고 해도 50여명의 신도들이 찾아왔을 뿐이다.

 

그래도 올해는 연등을 100개 넘게 달았어요. 초파일에 찾아올 순 없어도 많은 분들이 등 값을 보내주셨거든요

 

모든 이들이 마음을 합한 산신각 점안식

 

오늘 부처님 오신 날에 다들 예불을 마치고 공양을 하셔야하는데 신신각 점안식까지 다 마치고나서 공양을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다들 괜찮으세요?“

 

초파일 예불을 마치고난 뒤 신도들이게 시간이 조금 걸려도 신신각 점안식을 마친 후 공양을 해도 되겠느냐고 묻자, 다들 그렇게 하겠다고 한다. 이날 정수암을 찾아 온 신도들은 어림잡아 70여명, 그 모든 사람들이 산신도가 그려진 바위 앞에 나아가 점안식에 동참을 한다. 연세가 드신 분들은, 그동안 산신바위를 대우하지 못해 마음이 불편했는데 정말 다행이라고 한다. 이제 산신바위가 제 모습을 찾았다는 것이다.

 

정수암 주지 진관스님의 인도로 점안식에 참석한 신도들은 모두 손을 오색실을 잡고 산신바위를 에워쌓았다. 점안식 의식을 마치고 난 뒤 한 신도가 하는 말에 공감을 한다.

 

부처님이 어디 큰 절에만 계시겠어요. 난 우리 절에 참 부처님이 계시다고 생각해요. 요즘 종교가 제 몫을 못하고 있는데, 이 작은 정수암은 날마다 작은 불사를 계속하고 있잖아요. 이 산신바위는 정말 영험한 바위예요. 이 금강산 자락에 자리한 절도 그렇고 저 바위도 그렇고, 지난해 조성한 마애불도 그렇고. 그런 것을 보면 부처님이 정말 이 절에 계시다는 생각이 들어요. 신도들이 하나같이 이웃을 먼저 생각하고 있으니 이 절에 부처님이 계신것이죠

 

종교는 사람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어야 한다. “신도들에게는 어떠한 부담도 주지 않겠다는 정수암 주지 진관스님. “인연이 닿으면 누군가 불사를 하러 오지 않겠느냐며 웃는다. 강원도 고성군 작은 암자 정수암은 늘 그렇게 좋은 인연으로 만나는 사람들이 들리는 곳이다.

 

정월 보름 전에 각 마을마다 제를 지내던 신표

 

우리민족은 음력 정월이나 10월 상달이 되면 마을마다 반드시 하고 넘어가는 의식이 있다. 바로 대동의 안녕과 가가호호의 안택을 기원하는 마을제사를 지낸 것이다. 장승제, 성황제, 거리제 등은 모두 마을의 안녕과 풍농과 풍어, 그리고 가내의 안과태평을 기원하던 우리민족의 공동체 의식이었다.

 

4일 수원박물관에서 입춘을 맞이해 시민들에게 춘축을 선사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수원박물관을 찾았다. 입구에서 차를 내려 박물관으로 오르다 보면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이 돌을 쌓은 누석탑인 성황당이다. 그리고 그 뒤편에는 5기의 목장승이 눈을 부라리고 서 있다. 부라린 눈이 아무리 보아도 무섭기는커녕 오히려 정감이 있는 모습이다.

 

그동안 수원박물관은 내 집처럼 드나들었지만 이렇게 성황당과 장승이 서 있었음에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전국을 다니면서 워낙 많은 성황당과 장승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입춘이라서 그런가? 푹한 날씨에도 미쳐 눈이 녹지 않은 잔디 위에 서 있는 탑과 성황당을 그냥 지나치기에는 정유년 벽두부터 너무 소란스럽다는 생각이다.

 

 

돌로 쌓은 성황당, 전국 곳곳에서 만날 수 있어

 

돌을 쌓아올려 누석탑으로 조성한 성황당은 가장 보편적인 형태이다. 성황당은 마을의 안녕과 길손의 안녕을 위해 길거리나 마을의 입구 등에 세우는데 지나는 길에 돌을 이곳에 올려놓고 안전한 행로를 기원하기도 한다. 전국을 여행하다보면 지금까지 가장 많이 남아있는 것이 바로 상황당과 장승이다.

 

성황당은 건물로 축조했을 때는 명칭이 달라진다. 성황당을 당산(堂山)’ 혹은 서낭이라고도 부르는데 경기도와 충청도 지방에서는 산신당· 산제당 혹은 서낭당이라고 부른다. 영남과 호남 지방에서는 주로 당산이라고 한다. 성황당은 돌탑이나 신목, 혹은 조그마한 집을 지어서 신표로 삼는다. 집을 지었을 때는 그 안에 당신(堂神)을 상징하는 신표를 놓거나, ‘성황지신이란 위패를 모셔 놓는다.

 

당산은 내륙지방과 해안지방의 부르는 명칭 또한 다르다. 내륙에서는 신당, 당집, 당산 등으로 부르지만, 해안이나 도서지방에서는 대개 용신당이라고 부른다. 이 당산에서는 매년 정월 초나 보름, 혹은 음력 10월 중에 길일을 택해 마을 주민들이 정성을 드린다. 당산제를 지낼 때는 집집마다 추렴을 하여 제물을 마련하는데, 이런 이유는 마을 사람 모두가 똑 같이 복을 받게 하기 위함이다.

 

 

이빨 드러낸 장승군, 오히려 반갑소

 

수원박물관 초입에 서 있는 5기의 목장승. 장승은 나무나 돌로 만들어 세운다. 나무를 깎아 세우면 목장승이라 하고, 돌을 다듬어 세우면 석장승이라 한다. 장승만 세우는 경우도 있지만, 솟대, 돌무더기, 서낭당, 신목, 선돌등과 함께 동제의 복합적인 형태로 표현이 되기도 한다. 장승은 그만큼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장승의 기원에 대한 정설은 아직 명확하지 않다. 대개는 고대의 남근숭배설(男根崇拜說)’과 사찰이나 토지의 경계표지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등이 있기도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정확한 것은 아니다. 일설에는 솟대나 선돌, 서낭당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등도 전해진다. 일부 장승 중에는 거리를 알려주는 로표장승도 존재한다.

 

 

목장승의 경우에는 복판에 글을 써서 표시하는데 대개는 천하대장군이나 지하대장군, 혹은 지하여장군, 축귀대장군 등으로 표현한다. 수원박물관 입구에 서 있는 장승은 모두 축귀대장군(逐鬼大將軍)’으로 앞에 방위표시를 하였다. 그 중에는 여장군도 서 있어 나라를 지키거나 마을을 지키는 데는 남녀구별이 없음을 알려준다.

 

새해가 시작된다는 입춘. 수원박물관 앞에서 만난 성황당과 목장승 앞에서서 고개를 숙인다. “정유년 한 해 이 나라가 안정을 되찾고 서민들이 마음 편하게 두 다리 쭉 펴고 사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길 바란다는 간절한 마음을 전한다. 모처럼 성황당과 장승 앞에 서 머리를 숙였으니 올해 꼭 이루어질 것이란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