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시 도곡리 석불좌상을 찾아가다

 

문화재란 있던 그 자리에 소재한다. 어느 것은 수천 년을 자리 한 번 옮기지 않고 지키고 있는 것들도 있다. 문화재가 조성 될 때는 역사적으로나 사회성, 혹은 지리적 여건 등 여러 가지를 종합해 조성한다. 하기에 문화재는 제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 가장 빛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수없이 많은 문화재들이 제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옮겨져 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문화재를 제대로 보존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문화재가 제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옮겨진 사연이야 다양하다. 하지만 꼭 이런저런 이유를 대가며 문화재를 딴 곳으로 옮겨야만 했을까? 허울 좋게 보존이라는 구실로 자리를 옮긴 많은 문화재들을 정작 조성한 자리가 아닌 딴 곳에서 찾아보아야 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우리가 갖는 슬픔인지도 모른다.

 

 

문화재 답사를 한지 30년 세월이 훌쩍 지났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문화재를 답사라는 길에서 만났다. 하지만 그런 문화재 답사라는 것이, 시간이 남고 돈이 많아 하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는 문화재 답사가 숙명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젊은시절, 우연히 만나게 된 문화재 한 점으로 인해 30년이 넘는 세월을 전국을 걸으며 문화재를 찾아다녔다.

 

이제 힘도 부치고 시간적 여유도 없다. 어찌보면 문화재답사를 젊은시절 객기로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만난 많은 문화재들, 나에게는 누군가 지켜내야 할 우리의 정신적인 유산이라는 생각에서이다. 아무리 경제가 발전하고 수많은 종류의 문화예술 활동을 한다고 하지만, 소리없이 그 자리를 오랜시간 지켜내고 있는 문화재를 등한시한 민족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왜 문화재를 지켜내야 하는 것인지 답이 된다.

 

 

알아보기 힘든 작은 안내판, 좀 더 크게 했더라면

 

지난 24일 오후, 여주시 금사면 도곡리 산 7에 소재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0호인 여주 도곡리 석불좌상을 찾아갔다. 문화재는 지나는 길에 몇 번이고 들려보고는 한다. 혹 그동안 훼손이 된 곳은 없는지, 아니면 문화재 주변에 무슨 이상은 없는지, 그런 것들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문화재를 지나는 길에 다시 찾아보는 것은 몇 년이 지난 뒤에 찾아간 문화재 한 점이 심하게 훼손되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도곡리 석불좌상은 마을길에서 산쪽으로 소로를 지나야 만날 수 있다. 몇 년 전인가 도곡리 석불좌상을 찾아갔을 때, 누군가 버리고 간 각종 제물과 기물 등으로 지저분하게 어지럽혀져 있는 모습을 보았다. 이번에도 또 누군가 주변을 훼손한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된다. 그런데 한 번 간 길은 절대 잊은 적이 없는 나로서도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길을 찾지 못한 것이다. 주변이 변해도 너무 변했다. 석불좌상을 찾아가는 진입로에는 그동안 볼 수 없었던 펜션들이 여기저기 길 양편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문화재를 찾아가는 길 안내표지가 길 한편에 조그맣게 서 있기 때문에 산을 오르는 길을 찾기조차 힘들다. 글씨라도 좀 큼지막하게 세웠거나 제대로 된 안내판을 길이 변하는 부분에 세웠다면 한결 수월했을 텐데. 아직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한 관계기관들의 인식은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석불좌상 앞에 무릎을 꿇다

 

몇 번이고 길을 찾아 헤매다가 찾은 작은 안내판 하나. 주변 환경이 변해 길을 찾기조차 어려웠지만 도곡리 석불좌상이 소재한 전각이 산 밑에 보인다. 진입로는 시멘트포장을 해 말끔히 정리하였다. 지난 번 찾아왔을 때보다 주변은 많이 정리가 되고 깨끗하다. 그것 하나만으로 안내판이 적다고 투덜대던 마음이 싹 가신다.

 

석불좌상을 모신 전각은 맞배지붕 기와로 조성하였다. 앞에는 배례석인 듯 넓적한 돌도 보인다. 무엇을 망설이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다. 이 나라에 서원할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래도 우선은 나라가 평안할 것을 먼저 서원한다. 뒤죽박죽이 되고 몇 갈래로 찢어진 나라. 온전히 하나로 봉합될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서원한다.

 

여주시 도곡리 석불좌상은 통일신라 말기작품으로 추정한다. 원적산 자락에 북동쪽을 향해 팔각대좌 위에 자리한 석불좌상. 결가부좌를 하고 있는 이 석불좌상은 전체적으로 알맞은 비례를 보이고 있다. 이곳에서 20m 정도 떨어진 북쪽에 절터가 있다는 점으로 보면 이 석불좌상이 제 자리에서 멀리 벗어난 것은 아니란 생각이다.

 

 

불상은 육계가 많이 마모가 되었지만 삼도는 뚜렷하다. 이 석불좌상은 특이한 수인을 하고 있다. 오른손은 가슴 부근에서 약지와 새끼손가락 두 개를 펴고, 왼손은 결가부좌한 다리위에 손바닥을 위로 하고 있다. 법의는 모두 통견으로 처리했다. 석불좌상을 모신 팔각대좌는 좌상에 비해 작은 편이라 조금은 불안해 보이기도 한다.

 

석불좌상 앞에 머리를 숙여 서원을 하고 난 뒤 석불좌상 뒤편으로 돌아가니 이상한 것이 보인다. 정기계측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부구간에 발생한 이격 및 균열현상에 대한 변화추이와 진행을 알아보기 위함이라는 안내문구가 있다. 천여 년이 훌쩍 지난 세월을 많은 세인들의 마음속 염원을 받아들이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석불좌상.

 

그런 석불좌상이 이격과 균열현상을 보이고 있는지를 알아본다는 안내에 마음이 편치않다. 얼마나 많은 우리의 문화재가 주변환경에 의해 수명을 달리하고 있는 것일까? 문화재답사를 계속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누군가 이 소중한 문화유산을 둘러보고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다. 단지 나도 그 중 한명일 뿐이고,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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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시 팔달구 우만동 248번지에 소재한 비구니의 요람 봉녕사. 봉녕사는 비구니 승가대가 있는 절이다. 봉녕사의 용화각에는 고려시대의 석불로 보이는 석조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이 석조삼존불은 대웅보전 뒤편 언덕에서 건물을 지으려고 터를 닦던 도중에 출토되었다고 한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1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석조삼존불상은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보살입상을 배치하고 있다. 불상과 연화대좌는 각각 하나의 석재로 구성이 되었는데 모래가 많이 섞인 화강암으로 조성을 하였다. 삼존불 모두가 뚜렷한 이목구비가 보이지 않는데 이는 오랜 시간 땅 속에 파묻혀 마모가 된 것으로 보인다.

 

 

마모가 심한 석조삼존불

 

삼존불의 중앙에 좌정하고 있는 본존불은 석조여래좌상으로 얼굴모습은 원만한 편이다. 그저 편안한 느낌을 받게 하는 본존불의 머리 부분은 파손되어 있고 눈, , 입 부분은 심하게 마모가 되어 희미하다. 법의는 왼쪽 어깨에만 걸치고 오른쪽 어깨가 노출된 우견편단으로, 법의의 주름도 상당히 도식화 되어있다.

 

오른손은 무릎에 놓고 왼손은 가슴에 대고 있는데 상당히 부자연스럽게 조각을 하였다. 석불의 밑을 받치고 있는 좌대인 연화대는 일석으로 2단으로 되어있으며 가운데가 잘록하고 아래 위가 넓게 조성하였다. 연화대 위편은 커다란 앙련을 조각하였는데 사이가 너무 벌어지게 잎이 조성되어 있어 매우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아래쪽 연화대에도 앙련이 흐릿하게 조성이 되어있으나 상당히 마모가 심하여 정확하지가 않다. 본존불은 전체적으로 비례가 맞지 않는 편이다. 얼굴은 네모나게 조성을 하였는데 양편의 귀는 어깨에 까지 늘어졌으며 목은 두꺼워 얼굴의 넓이와 목이 뚜렷하게 구별이 되지 않고 있다.

 

 

섬세한 연화문이 새겨져 있는 협시불

 

본존불의 좌우에 서 있는 협시불의 얼굴 형태는 원만한 편이나 각 부분은 마멸이 심하여 정확한 모습을 알아보기가 힘들다. 협시보살의 법의는 두 어깨를 모두 가린 통견으로 조성을 하였는데 조각 등은 섬세하지 못하다. 왼손은 가슴에 대고 오른손은 무릎 밑으로 내리고 있으며 원추형의 대좌에는 연화문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삼존불이 모두 평평한 느낌을 주는 영감 없는 조각 기법이나 각 부분의 형식과 표현 수법이 도식화 되어 있다는 점으로 보아 고려시대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삼존불 모두 전체적으로 표현기법 등이 동일해 한 사람의 장인에 의해서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삼존불 모두 정확한 형태를 알아보기는 어려운데 봉녕사에서도 대적광전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불자들이 찾아드는 곳이 바로 용화각이다.

 

용화각 안에 들어가 머리를 조아린다.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린다. 늘 새해가 되면 절 몇 곳을 빠트리지 않고 돌아보는 나이지만 그 중에서도 봉녕사는 반드시 들리는 곳 중 한곳이다. 삼존불을 모신 전각을 일러 용화각이라고 했던가? 용화세상은 종파도 없고 따로 다스릴 법도 필요치 않다고 한다. 즉 법 없는 세상을 일러 용화세상이라고 했다는데 난 이 용화각 안에 모셔진 석조삼존불 앞에 머리를 조아려 늘 그런 용화세상이 도래하기를 기원한다. 그 기원이 비록 이 생애에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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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시 죽산면 매산리 미륵입상을 만나다

 

미륵은 석가모니 다음에 세상에 현신할 부처님을 말한다. 미륵은 대개 부처와 보살의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안성시 죽산면 매산리에 가면 마을에서 미륵당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주변에는 담이 둘러있고 전각 안에 모셔진 미륵입상 1기가 서 있다.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미륵입상은 높이가 3.9m이다. 얼핏 이 미륵불을 보면 조금은 괴이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 미륵불은 전체적으로 균형이 맞지 않는다. 머리에는 사각형의 커다란 보개를 쓰고 있고 보개 밑으로 쓴 보관은 전체적인 균형에 비해 길게 만들어졌다. 보관에는 여러 가지 문양을 새겨 넣었다. 보개와 보관 이목구비가 비례에 잘 맞지 않아 괴이한 모습이다.

 

현재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매산리 석불입상은 고려 초기에 조성된 석불입상으로 추정한다. 고려 초기의 불상들의 형태가 일반적인 불상에 비해 크게 조형인 하였는데 매산리 미륵입상 역시 상당히 크게 조성한 석불입상이다. 좁은 어깨와 비례에 맞지 않는 조형, 머리에 쓴 보개 등으로 보아 고려 초기의 석불양식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부조화를 이룬 미륵입상, 그런데 영험하다고

 

옆으로 길게 찢어져 치켜 올라간 눈, 볼에 붙어 어깨까지 늘어진 귀, 코와 입 사이가 짧아 어딘가 불안한 듯한 이 미륵입상은 중생의 모든 두려움을 없앤다는 시무외인을 하고 있다. 오른손은 밖으로 왼손은 안으로 향했지만 그 손의 조각도 자연스럽지가 않다. 전체적으로 부조화를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그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

 

가을철은 여행을 하기에 최적의 날씨이다. 산과 들에 형형색색으로 단풍이 들어 사진촬영을 해도 무엇인가 남다른 멋을 표현할 수 있다. 매산리 미륵입상 역시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어 있다. 이 미륵당의 석불을 주변 사람들이 신성시 하는 것도 아마 이 미륵입상이 자비로운 모습을 띠우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아니면 조금은 괴이한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미륵입상을 찾았을 때 집안에 일이 있어 빌러왔다는 한 분이 이 미륵에 열심히 기원을 하면 다 좋아진다는 이야기를 한다. 구부정한 허리를 곧게 펴지도 못하면서 열심히 절을 하고 있는 모습에서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놓고 열심히 비손을 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간구하는 서원을 이루어준다는 미륵입상

 

전체적인 모습은 비록 조화를 이루고 있지 않지만 고려 초기 당시의 석불입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미륵당 석불입상. 그저 당시 사람들은 그 모습의 뛰어난 예술성보다는 다음 세상에 현신할 미륵을 기다리는 마음이 더 간절하지나 않았을까? 많은 문화재들이 하나같이 그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라면, 미륵당 석불입상 역시 소중한 문화재이다. 기실 문화재의 가치를 따져 국보, 보물, 지방문화재 등으로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 하다는 생각이다. 모든 문화재 하나하나에는 그 안에 담겨진 정신세계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 미륵당 부처님은 영험하세요.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이 부처님 덕을 많이 보고 살았죠. 간구를 하면 다 이루어지니까요. 그래서 이 부처님을 보러 사람들이 찾아오기도 하고요

 

우연이랄 수도 있다. 하지만 마음에 염원한 서원을 간구해서 이루어졌다는 데야 그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천년 세월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도 그런 서원을 이룬 사람들이 전하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나도 오늘 이 미륵입상 앞에서 망가질 대로 망가진 나라를 위해 손을 모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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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에게 있어 삼사순례(三寺巡禮)’란 하루 만에 절 세 곳을 돌아오는 일이다. 이는 자신이 지은 죄업을 소멸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또한 자신이 마음속에 서원하는 바를 이루고자 하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6일 오후 230분에 출발한 삼사순례는 먼 곳을 갈 수 없어 경기도 내의 절을 찾아보기로 했다.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바로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41호가 자리한 이천시 설성면 자석리 51번지에 소재한 용화사이다. 이곳은 예부터 미륵당이라고 전해지는 곳으로, 이천에서 장호원읍을 향해 가다보면 자석리로 들어가는 도로변에 작은 안내판이 하나 서 있다. 용화사는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가야 하는데 군부대 철조망을 끼고 길이 나있다.

 

군부대 철조망을 끼고 들어가면 예전 조림지인 듯한 숲길로 접어들게 된다. 산자락 밑에 자리하고 있는 용화사. 절 안이 너무 조용하다 절은 그리 크지 않지만 주차장에 차를 대고 보니 눈앞에 축대가 보이고 그 위에 서 있는 자석리 석불입상이 보인다. 대웅전 문이 잠겨 있는 것으로 보아 경내에는 사람이 없는 듯하다.

 

 

 

 

 

미륵세상을 꿈꾸며 머리를 조아리다

 

어차피 이 용화사를 찾은 것도 미륵불인 석불입상을 만나기 위함이 아니던가. 미륵은 후천세계의 부처님이다. 미륵불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든지 567천만 년이 지나면 사바세계에 출현한다는 부처님이다. ‘용화사(龍華寺)’라는 명칭도 미륵불의 세상에서 용화삼회설법에서 기인한 명칭이다.

 

미륵불이 출현하면 국토의 풍요로움과 안락함에 대해 설함으로써, 중생들이 죄를 짓지 않고 모든 번뇌의 업을 끊는다는 것이다. 미륵신앙은 삼국시대에 불교전래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널리 신봉되었으며, 경기도 일대에는 많은 미륵불의 존재가 확인되고 있다.

 

나라가 온통 메르스 공포에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석불입상 앞에 머리를 조아린 까닭도 바로 이런 고통스런 세월이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에서이다. 가진 자들이야 무엇을 걱정하랴. 하지만 민초들은 그저 두려울 수밖에 없다. 그런 두려움에서 하루 빨리 벗어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을 한다,

 

 

 

 

두 개의 석재로 조성한 고려 말기의 석불입상

 

자석리 석불입상은 두 개의 돌로 조성을 하였다. 머리에는 커다란 둥근 갓을 올렸으며 그 아래 얼굴과 가슴부분까지 한 개의 돌을 올리고, 그 아래 하반신 부분을 또 하나의 돌로 조성했다. 얼굴은 긴 타원형으로 이마에는 세상을 비춘다는 백호가 뚜렷하고 목에는 번뇌 업, 고난을 상징하는 삼도를 표현했다.

 

두 귀는 일반적인 석불입상에 비해 짧게 조형되었으며, 얼굴 크기에 비해 눈, , , 귀 등 모든 것이 작게 표현을 하고 있어 조화와 균형이 잘 맞지 않는다. 미륵의 법의는 통견으로 아래로 흘러내리게 했으며, 두 손과 함께 마멸이 심해 쉽게 눈에 띠지 않는다. 석불입상의 뒷면은 아무런 조각도 없이 평평하게 처리하였다.

 

 

 

 

이목구비의 조형과 몸체에 비해 좁은 어깨, 간략하게 표현한 옷 주름 등으로 보아 이 석불입상은 고려 후기의 불상 양식을 보여준다. 마음속으로 서원을 하고 난 뒤 석불입상을 찬찬히 돌아본다. 비록 커다란 돌을 이용해 조성한 석불입상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오랜 세월을 간구하지 않았을까?

 

석불입상 뒷면을 보니 누군가 몸체에 동전을 붙여놓았다. 흔히 속설에 동전을 바위나 석불의 몸체에 붙이면 서원하는 바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얼마나 마음속에 간구하는 바가 간절했으면 이렇게라도 위안을 얻으려고 했을까? 오후에 세 곳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자석리 석불입상 앞에 머리를 조아려 다시 한 번 간구를 한다. 이 험한 세월이 하루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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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따듯해지면 늘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그저 할 일없이 떠나는 것은 아니다. 오래도록 문화재 답사를 해오면서 이 계절이 되면 문화재를 만나고 싶기 때문이다. 요즈음 날씨가 문화재 답사를 하기 위해서는 최적의 기온이다. 덥지도 춥지도 않고, 산은 연두색과 초록색이 적당히 섞여 있으며 여기저기 꽃이 피어있기 때문이다.

 

수원시의 문화재를 하나하나 답사를 하고 글을 쓰면서 늘 서운한 것은 바로 불교문화유적 많지 않다는 점이다. 수원은 광교산과 여기산, 숙지산, 칠보산 등 주변이 산에 들러 쌓여 있으면서도 정작 불교와 관련된 문화재는 손에 꼽을 정도이다. 보물로 지정된 진각국사 탑비와 팔달문 동종, 봉령사 석조삼존불, 봉령사 불화, 청년암 영산회상도와 탱화 등이다.

 

이 외에 수원시 향토유적으로 지정 된 창성사지와, 수원박물관에 자리하고 있는 동래정씨 약사불 정도이다. 한때 광교산에는 89개의 사암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전하지만, 그에 비해 문화재가 별로 많지 않아 늘 아쉽다. 우리나라 문화재 중 85% 정도가 불교관련 문화재라는 것을 감안하면, 수원의 불교관련 문화재는 극소수라는 점이다.

 

 

 

동래정씨 약사불은 왜 문화재가 아니죠?

 

아는 지인 한사람과 수원박물관을 찾아가 문화재 촬영을 하고 있는데 질문을 한다.

다니다가 보면 이렇게 돌에 조각을 해 놓은 것들이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던데, 왜 이 동래정씨 약사불은 문화재 지정이 되지 않았어요?”

 

이런 질문을 받으면 일일이 설명을 해주어야 하는 것이 답사를 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늘 한번으로 답사를 마치는 것이 아니고, 그 문화재에 대해 속속들이 알 때까지 찾아다녀야 한다. 그래야 우리 문화재 답사를 하는 것에 대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왕이면 현장에 가서 직접 문화재를 보면서 설명을 해주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렇지 못할 때는 부득이 혼자라도 가까운 곳에 있는 문화재를 찾아가, 그 문화재와 비교를 할 수 있게 글을 쓰는 방법도 있다. 늘 이렇게 문화재를 하나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게 하는 일이 바로 내일이란 생각이다.

 

 

 

 

보물 제982호 장암리 마애보살반가상을 찾아가다

 

28, 길을 나섰다. 이천시 마장면 서이천로 577-5 (장암리)에는 고려 때 마애불인 보물 제982호 장암리 마애보살반가상이 있기 때문이다. 이 마애불은 큰 길에서 안으로 들어가 논길 한 옆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쪽 논을 마을 사람들은 넘어새말들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마애불이 조각되어 있는 큰 바위를 미륵바우라고 부른다,

 

이 장암리 마애보살반가상을 한 때는 태평흥국명 마애보살좌상이라고 불렀다. 넓적한 화강암에 새긴 이 보살상은 고려 경종 6년인 980년에 조성이 되었다. 마애불에 조성 연대가 새겨진 것은 흔치가 않다. 이 마애보살반가상은 바위 뒷면에 '太平興國 六年 辛巳 二月 十三日...'이라고 명문이 음각되어 있어서 그 조성연대가 확실한 경우이다

 

이렇듯 문화재는 그 조성연대가 확실하게 밝혀지면 그 가치가 더욱 높아진다. 이 반가상의 경우도 처음에는 그 조성연대 때문에 태평흥국명이라고 연대를 문화재명에 넣어 지정을 했다가, 후에 이천 장암리 마애보살반가상으로 정정을 한 경우이다.

 

장암리 마애불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다. 가운데는 화불을 새겼고, 오른손에는 연꽃을 들고 있다. 이런 형태로 보면 관음보살이다. 얼굴은 사각형에 가깝고 전체적으로 조형이 잘 맞지 않는 듯도 하다. 그런데 보관의 양편 끝에 작은 구멍이 보인다. 아마 이곳에 쇠막대 등을 집어넣은 후 그곳에 보관의 장식을 하였을 것 같다. 즉 보관을 아름답게 치장을 하기 위해, 막대에 구슬 등을 달았을 가능성이 있다.

 

 

 

 

고려 중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동래정씨 약사불

 

수원박물관 경내에서 만날 수 있는 동래정씨 약사불. 오래도록 동래 정씨들이 섬겨왔다는 마애불은, 중앙에 약사여래좌상을 두고 양편에 협시불을 조성했다. 일석에 삼존상을 조성하였는데 중앙 본존인 약사불은 연화대좌위에 좌상으로 새겨져 있고, 양쪽에는 협시상은 입상으로 조각하였다.

 

본존의 높이는 120cm 정도로 두광을 조성하고, 육계가 평평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마의 중앙에는 백호의 흔적이 보인다. 목에는 삼도를 조각하였으나 많이 마모가 되었다. 법의는 통견으로 표현을 하고 있다. 양편에 조각한 협시상은 입상으로, 높이가 100cm 정도이다. 흔히 동자상이 민머리인데 비해 이들 협시상은 머리에 관을 쓰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아마도 동자가 아닌 보살상으로 조성을 한 듯하다

 

같은 일석에 조성을 한 이천 장암리 마애보살반가상(보물)과 수원박물관 동래정씨 약사불(수원시 향토유적)은 조각을 한 바위의 크기나 상태, 그리고 조성연대 등을 알 수 있는가? 등의 차이가 있다. 문화재를 일일이 비교를 하면서 공부를 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가장 먼저 중요하게 알아야 할 것은 바로 조성연대의 정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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