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군 법흥사를 찾아 적멸보궁에 오르다

 

강원도 영월군 무릉도원면 무릉법흥로 1352(법흥리)에 소재한 법흥사. 예전에는 영월군 수주면이 무릉도원면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경계가 뛰어난 이곳을 무릉도원면이라는 명칭으로 바꾼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만큼 뛰어난 경계를 자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8일 삼사순례 여정 두 번째로 찾아간 법흥사.

 

법흥사는 통일신라 말기 9산 선문 중 사자산문의 중심도량인 흥령선원지의 옛 터이다. 흥령선원은 자장율사가 창건했으며 도윤국사와 징효국사 때 산문이 크게 번성하였다. 신라 진성여왕 4년인 891년 병화로 소실된 것을 고려 혜종 1년인 944년에 중건하였으나 또 다시 소실되어 천년 세월을 그 명맥만 이어오다가 1902년 법흥사로 개칭되었다.

 

 

법흥사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과 보물 제612호인 징효대사 보인탑비, 강원도지정 유형문화재 제72호인 징효대사 부도,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73호인 법흥사 부도,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09호인 법흥사 석분 등이 자리하고 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셨다는 부도가 벽 너머로 보이는 적멸보궁은 법흥사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삼사순례 두 번째로 찾아간 법흥사. 버스로 무릉도원을 굽이굽이 돌아 찾아간 법흥시 주차장에는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버스 몇 대와 승용차 등이 자리하고 있다. 주차장에서 금강문을 지나 먼저 징효대사 보인탑비와 부도를 돌아본다. 보물인 징효대사 보인탑비는 고려 혜종 1년인 944년에 세운 것이다.

 

 

법흥사 적멸보궁에 오르다.

 

그동안 법흥사를 몇 번인가 찾았다. 지난번에 들렸을 때보다 또 달라진 경내를 둘러본 후 돌로 바닥을 깐 길을 따라 적멸보궁으로 오른다. 그리 먼 거리는 아니지만 은근히 비탈진 길을 걸어 오르려니 이마에 땀이 흐른다. 길이 가팔라지는 곳에 마침 우물이 있다. 시원한 물로 갈증을 풀고 흙길로 조성된 산길을 따라 걷는다.

 

절 입구에서부터 들리는 정근은 화엄성중을 읊고 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셨으면 당연히 석가모니불로 정근을 해야지만 왜 화엄성중일까? 그렇게 절을 찾아다녔지만 아직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적멸보궁 앞에 도착하니 산비탈을 바라보고 축조된 적멸보궁은 날이 차서인가 어간문을 닫아놓고 좌우로 출입을 하고 있다.

 

 

적멸보궁 안에 들어가 예를 올려야겠지만 마음이 바쁘다. 보궁 뒤편에 있는 부도와 석분을 보려면 보궁과 석분 사이에 공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보궁 벽을 돌아 바로 부도 앞으로 가 두 손을 모은다. 더 가까이에서 부처님 진신사리의 기운을 느끼고 싶어서이다. 한낱 부족한 인간이라는 것이 이런데서 나타나는 것일까?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는다.

 

제발 이 어지러운 나라의 혼돈이 하루 빨리 끝날 수 있도록 기원합니다라는 간단한 발언을 쉴 새 없이 반복하면서 고개를 들지 못한다.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고 있는데 서민들의 삶이 막막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딜가나 못 살겠다는 소리만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인가 휴일을 이용해 적멸보궁을 찾아 온 사람들도 요즈음 들어 더 많아진 것 같다는 이야기다. 누구나 같은 생각일 것이다. 하루 빨리 이 국정농단의 어지러움이 끝나길 바라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적멸보궁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돌무덤과 부도

 

법흥사는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 중의 한 곳으로 대표적인 불교성지로 자리를 잡고 있다. 신라 때 자장율사가 당나라 청량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석가모니불의 진신사리와 가사를 전수받아 643년에 귀국하여 오대산 상원사, 태백산 정암사, 영축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 등에 사리를 봉안하고 마지막으로 이 절을 창건하여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고 한다.

 

당시 사명을 흥녕사(興寧寺)’라 하였다고 전하는데 적멸보궁 뒤에는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3호인 영월 법흥사 부도와 유형문화재 재109호인 토굴인 석분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석분은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도를 닦던 곳이라고 전하지만 그 형태로 보면 고려 때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석분은 낮은 언덕으로부터 내려오는 완만한 경사를 이용하여 흙으로 위를 덮고 봉토를 올리기 위하여 토굴 주변에 석축을 올렸다. 내부구조로 보면 고려시대에 축조 된 것으로 추정되며 내부의 높이는 160, 깊이 150, 너비 190이다. 석분 안을 들어갈 수 없어 실내의 형태를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지만 돌방 뒤편에는 고승의 유골을 모신 돌널이 있다고 한다.

 

부도탑 앞에는 누군가 촛불을 켜 놓았다. 우리민족에게 촛불이란 남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불을 밝히는 목적만아 아니라 촛불을 켜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간구를 하는 것이다. 하기에 촛불이란 바로 이루고자 하는 서원은 담아 신에게 도움을 받기를 서원하는 것이다. 전국에서 밝힌 수많은 촛불의 염원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도 그 때문이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5대 보궁. 그 중 한 곳인 영월군 무릉도원면 법흥사. 하루 만에 세 곳을 돌아야하는 바쁜 일정으로 인해 오래도록 손을 모을 수는 없지만 짧은 시간에 정신을 집중하여 간절함을 띄워 보낸다. “2017년 이 나라에 부디 평안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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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20년이 넘는 세월을 전국을 다니면서 수많은 문화재들을 만났다. 그렇게 만난 문화재들이 3,000점 가까이 되지만, 아직도 내가 갈 길은 멀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 전하고 있는 문화재 중 극히 일부만을 만났기 때문이다. 남들은 이런 나를 두고 미친 사람이라고 한다. 하긴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시간들이도 돈 써가면서 이런 일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누가 경비를 대주는 것도 아니다. 그저 수입의 대다수를 이렇게 문화재를 답사하고 소개를 하기 위해 써버린 세월이 벌써 20년이 훌쩍 지났다. 그동안 길거리에 뿌린 경비만 해도 집 몇 채 값이 날아갔다. 하지만 이 답사를 멈출 수가 없는 것은, 바로 답사에서 만나게 되는 소중한 문화재들이 눈에 밟히기 때문이다.

 

 

 

만날 수 없는 수많은 문화재들

 

숱한 문화재들이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건너가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그 안에는 국보급 문화재들이 수두룩하다. 그러나 그 오랜 시간동안 우리는 많은 문화재를 돌려받지 못한 체, 안타까움만 더하고 있다. 일부의 사람들은 양으로는 10%를 빼앗겼지만 질로는 90%를 도둑맞았다고 표현을 하고 있다.

 

어디 그뿐이래 국보급 문화재들이 열강에 수탈당해 아직도 제 땅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 절골에 소재한 보물 제17호 정토사법경대사 자등탑비를 보면 그 아픔이 더하다. 대사자등탑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강탈당하고, 그 비만 남아있기 때문이다.

 

보물 제17호 정토사법경대사 자등탑비는 충주호로 인해 수몰지역내 정토사지에 있던 것을, 1983년 발굴조사를 실시한 후 현 위치로 옮겨 놓은 것이다. 탑비는 커다란 지붕을 만들어 보호각을 삼고 있다. 정토사법경대사 자등탑비는 고려 태조 26년인 943년에 법경대사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서 세운 비이다.

 

 

탑비만 보아도 훌륭한 문화재

 

법경대사는 통일신라 헌강왕 5년인 879년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불교에 대한 공부를 하여 20세에 출가를 하였다. 906년에는 당으로 건너가 도건대사 밑에서 수행을 하다가, 고려 태조 7년인 924년에 귀국하여 국사로 추대되었으며 정토사를 창건하였다. 63세인 태조 24년인 941년에 입적을 하자, 생전의 업적에 따라 법경(法境)’이라는 호를 내렸다. 비는 그의 공덕을 칭송하기 위해 최언위가 글을 짓고, 당대의 명필 구족달이 썼다.

 

법경대사 자등탑비는 통일신라에서 고려초로 넘어가는 비분의 양식을 잘 따르고 있다. 받침인 거북이의 모습은 당시의 전통적인 형태인 용머리에 거북 몸을 갖고 있으며, 비위에 얹은 머릿돌에도 금방이라도 살아나올 듯한 용 조각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다. 비에는 볍경대사의 업적을 기록하였다.

 

충주호변에 자리한 동량면 하천리 마을에 자리한 법경대사 자등탑비를 보면서, 그 비 하나에도 아름다움을 만들어 낸 선조들의 미적 감각을 느낄 수 있다. 탑을 받치고 있는 거북의 머리인 용두는 여의주를 물고 금방이라도 승천을 할 것만 같다. 앞뒤의 발은 대지를 웅켜 잡듯 힘이 넘친다. 이러한 소중한 문화재를 보면서 문화적인 자긍심을 느낄 수 있지만, 정작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저 돌덩어리에 불과라다고 알고 있다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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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완주, 김제를 아우르는 모악산은 깨달음의 산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모악산의 금산사와 뒤편 대원사를 기점으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정진하였다. 진표율사를 비롯하여, 후백제의 견훤, 기축옥사의 정여립과, 한국 불교 최고의 기승으로 대원사에서 오랜 시간 정진을 한 진묵대사, 그리고 근세에 들어 전봉준, 증산 강일순, 보천교의 차경석과 원불교 소태산 등이 이곳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정진을 했다.

 

모악산은 고려사에 보면 금산(金山)’이라고 적고 있다. 이는 금산사에서 유래했다고도 하고, 사금이 많이 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일설에는 정상 근처의 낭떠러지를 형성하고 있는 바위가 어미가 아이를 안고 있는 형상이라고 하여, ‘엄뫼라고 부르던 것을 의역하여 금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언제부터 모악이라고 불렀는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인도의 불탑에서 유래한 석종

 

모악산에 자리한 금산사는 백제 법왕 2년인 600년에 창건된 절로, 통일신라 경덕왕 때 진표율사가 두 번째로 확장하여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금산사 경내 국보 미륵전의 우측에는 높은 축대 위에 5층 석탑과 나란히 위치한 종 모양의 석탑이 있다. 이 석종은 매우 넓은 2단의 기단 위에 사각형의 돌이 놓이고, 그 위에 탑이 세워졌다.

 

이러한 석종형 탑은 인도의 불탑에서 유래한 것으로, 통일신라 후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 탑의 외형이 범종과 비슷하다고 해서 석종이라 불린다. 이 방형의 석조로 구성한 방등계단은 바로 불교의식의 하나인 수계식을 거행하는 신성한 장소이다. 기단은 대석, 면석, 갑석으로 되어있고, ·하 기단 면석에는 불상과 신장상이 조각되어 있다.

 

 

 

 

기단의 각 면에는 불상과 수호신인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다. 특히 아래 기단 네 면에는 인물상이 새겨진 돌기둥이 남아, 돌난간이 있었던 자리임을 추측하게 한다. 석종의 탑신을 받치고 있는 넓적한 돌 네 귀에는, 사자머리를 새기고 중앙에는 연꽃무늬를 둘렀다. 판석 위에는 종 모양의 탑신이 서 있다.

 

9마리의 용이 끌어 올리는 석종

 

꼭대기인 상륜부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머리를 밖으로 향한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고, 그 위로 연꽃 모양을 새긴 2매의 돌과 둥근 석재를 올려 장식하였다. 이 방등계단은 기단에 조각을 둔 점과 돌난간을 두르고 사천왕상을 배치한 점 등으로 미루어, 진신 불사리를 모신 사리계단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 탑은 가장 오래된 석종으로 조형이 단정하고 조각이 화려한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석종은 방형으로 상·2단의 기단을 구비한 높이 2.27m이며, 외형이 석종 형태를 띠고 있으며, 수계의식을 집전하던 방등계단에 세워진 사리탑이다.

 

 

 

 

 

 

이 방등계단은 1918년에 발행된 Korean Buddism이라는 책자에 수록된 것을 보면, 미륵전 앞에서 바로 방등계단으로 오르는 계단이 나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928년도에 와타나베 아키라의 편집본인 금산사관적도보(金山寺觀跡圖譜)에 수록된 방등계단 일대를 보면, 지금은 보이지 않는 큰 나무들이 즐비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이때에 방등계단을 송대(松臺)라는 명칭으로 표시하고 있다.

 

부처를 상징하는 사리탑

 

이 방등계단과 불사리탑은 현재 보물 제26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방등계단을 따라 한 바퀴 돌다가 보니 적멸보궁이 보인다. 적멸보궁이란 방등계단에 놓인 탑을 참배하기 위해 만들어진 예배전이다. 이 적멸보궁에는 부처님이 모셔져 있지 않다. 그것은 적멸보궁의 유리벽 밖으로 보이는 탑 안에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그 탑이 부처님을 상징하는 것이기에, 법당 내에는 따로 부처님을 봉안하지 않는다.

 

 

 

모악산이기에 이 방등계단에서는 더 많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석종형 탑을 봉안했는지도 모른다. 수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당시의 선대들이 미처 얻어내지 못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많은 시간을 정진하는 사람들. 금산사의 방등계단은 오늘도 그 답을 알려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만 우리들 스스로가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기 때문에, 그 깨달음을 얻지 못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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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하나를 복원하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가 된다. 한 부분이 사라졌던 것을 제 모습으로 되돌리기 때문에 그만큼 많은 노력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419 일대에 자리하고 있는 고달사지. 사적 제382호인 고달사지에는 국보 고달사지 승탑을 비롯해 보물과 유형문화재 등이 자리하고 있다.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인 764년에 창건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창건 당시에는 봉황암이라는 불렸다는 고달사는 혜목산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 이 고달사지에 분포가 되어있는 발굴된 유적지를 돌아보아도 당시에 얼마나 큰 절이었는가를 가늠할 수 있다. 또한 신털이봉이라고 전해지는 곳에 쌓인 흙더미라는 작은 산을 보아도 이 곳에 얼마나 많은 사부대중이 생활을 했는가를 알 수가 있다.

 

 

고려시대에는 왕실의 비호를 받았다는 고달사. 고려 고종 20년에는 혜진대사가 주지로 취임을 했고, 원종 1년인 1260년에는 절을 크게 중창을 했다. 원종대사는 신라 경문왕 9년인 869년에 태어나, 고려 광종 9년인 958년에 90세로 입적하였다. 원종대사가 입적하자 광종은 신하를 보내어 그의 시호를 원종이라 하고 탑 이름을 혜진이라 내리었다.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갈 때의 귀부

 

대개 탑비 등에서 보이는 귀부의 머리는 시대에 따라 약간 차이가 난다. 보물 제6호로 지정 되어있는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의 귀부의 머리는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바로 거북이의 몸에 용의 머리를 하고 있는 형태이다.

 

 

받침돌인 귀부에 조각된 머리는 눈을 부릅떠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눈 꼬리가 길게 치켜 올라가 매우 험상궂은 모습이다. 눈은 부라리고 콧구멍에서는 금방이라도 불이 뿜어져 나올 것만 같다. 앞다리는 마치 땅을 박차고 나가려는 듯 힘이 있어 보이며, 발톱은 사실적으로 표현을 해 땅을 누르고 있는 듯하다. 마치 당장이라도 앞으로 나아갈 기세이다.

 

목은 길지 않아 머리가 등에 바짝 붙어 있는 듯하다. 등에는 2중의 6각형 귀부모양을 정연하게 조각되었으며, 중앙부로 가면서 한 단 높게 소용돌이치는 구름을 첨가하여, 비를 끼워두는 비좌를 돌출시켜 놓았다. 이 원종대사탑비에 기록된 비문에 의해 975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탑비의 거북의 머리가 험상궂은 용의 머리에 가깝고, 목은 짧고 두 눈방울이 둥그렇게 부라리고 앞을 바라보고 있는 점. 그리고 귀두의 표현이 격동적이며 구름무늬의 번잡한 장식 등으로 볼 때,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로 넘어가는 전형적인 시대적 특징을 지닌 귀부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깨어져 사라졌던 몸돌을 복원시켜

 

원종대사 탑비의 비문에는 원종대사의 가문과 출생, 행적과 고승으로서의 학덕 및 교화, 입적 등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고 한다. 이렇게 소중한 기록을 담아 놓은 비가 일찍이 무너져 비신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져 있으며, 이곳 절터에는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 있었다. 그런 귀부와 이수의 중간에 사라진 몸돌인 탑비가 이번에 복원이 된 것이다.

 

그동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었던 몸돌의 비문은 부러진 부분을 제외하고는 상태가 양호하여 글자의 판독이 가능했다고 한다. 탑비에는 원종대사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는데, 비문은 김정언이 짓고, 장단열이 전액을 썼다. 또한 비문은 해서로 바둑판같은 선이 그어진 네모 칸 안에 썼으며, 글자는 이정순이 새겼다.

 

 

이렇게 원종대사 탑비의 몸돌이 복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부러진 부분의 상태가 양호했다는 점이다. 다시 원형으로 복원이 되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원종대사탑비. 비록 그 색깔이 달라 조금은 어색한 점도 있지만, 이렇게 복원이 되어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감출 수가 없다.

 

830일 찾아간 고달사지. 이렇게 복원이 된 원종대사탑비를 돌아보니 눈물이 흐른다. 얼마나 많은 우리의 문화제들이 훼파가 되었나? 사고가 틀리다고 종교성향이 틀리다고, 거기다가 나라가 부실한 탓에 수많은 문화제들이 제 자리를 떠났다. 앞으로 훼손이 되어있던 더 많은 문화재들이 이렇게 제 모습을 찾아갔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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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린(1738(영조14)~1802(순조 2))은 조선의 문신으로 자는 원덕(元德), 호는 영호(潁湖) 교리 효수의 아들이다. 영조 42년인 1766년에 정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1768년 부교리를 거처 도승지, 충청도 관찰사에 이어 대사헌을 지냈다. 1781년에는 호조판서에 제수되었다.

 

정조 12년인 1788년에는 공시당상으로 국경무역을 관장하고, 1790년에는 왕의 명령으로 <증수무언록>을 번역했다. 그 뒤 선혜청 당상과 판의금 부사, 한성판윤, 수원부 유수 등을 지냈다. 순조 1년인 1801년에 집권한 벽파에 의해 경흥에 유배되어 이듬해에 유배지에서 죽었다.

 

화성박물관 앞에 늘어선 선정비

 

선정비란 백성들을 위한 좋은 정치를 베푼 지방 수령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으로, 송덕비 혹은 불망비라고 부른다. 수원시 팔달구 창룡대로 21에 소재한 수원화성박물관 경내에는 10여기의 선정비가 서 있다. 리 선정비는 중동 사거리를 비롯한 수원시내 곳곳에 서 있던 것을 이곳에 모아 놓은 것이다.

 

그런데 리 선정비를 보면 이상한 비가 하나 서 있다. 바로 화성 유수 서유린의 선정비이다. 1831년에 건립된 이 선정비는 1797년부터 1800년까지 화성 유수를 재임할 때 선정을 베푼 것을 기리는 비이다. 그런데 이 선정비의 받침돌에는 무수한 성혈이 보인다. 왜 이 비에만 성혈을 이렇게 파 놓은 것일까?

 

 

서유린의 선정비는 무엇인가 특별한 것이 있다?

 

서유린의 선정비 받침돌에는 사방으로 돌려 크고 작은 성혈이 20여 개나 보인다. 어떤 것은 깊게 파여져 있고, 또 어떤 것은 조금 파다가 만 것도 있다. 성혈이란 선사시대부터 전해오는 것으로 자신이 서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파놓은 기원성 표시라고 한다. 성혈은 커다란 바위나 선돌 등 다양한 곳에 나타나고 있다.

 

수원의 대문격인 장안문의 기단석에도 무수한 성혈이 보인다. 아마도 한양으로 향하는 관문인 장안문에 성혈을 파는 것으로 많은 기원을 한 것 같다. 하지만 왜 유독 많은 선정비 중에서 화성 유수 서유린의 선정비에만 많은 성혈을 판 것일까? 역사의 기록에서 서유린에 대한 내용을 찾아보았다. 정조와의 관계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정조와 서유린의 기록을 살펴보니

 

정조 17년인 1793년 수원을 화성으로 개칭하고, 수원부사를 유수 겸 장용외사 행궁정리사로 겸직을 시키고 채제공을 화성유수로 임명한다. 정조는 1794년에는 화성 성역을 착공하고, 정조 22년인 1798년에는 당시 화성유수인 서유린이 조세를 면죄해 줄 것을 아뢰자 이를 승낙한다.

 

1797924일 화성유수 서유린은 정조에게 시흥과 과천도 화성유수부에 속해야 한다고 건의를 한다. 용인과 진위, 안산은 화성에 속읍으로 있었기 때문에, 군사들이 화성 장용외영에 속해 있고 세금도 화성유수부로 납입됐다. 하지만 시흥과 과천은 총융청에 속해 있어 모든 세금을 총융청이 다스리는 남양부로 세금을 내야 했다.

 

 

지금의 화성시 남양동이 당시는 남양도호부라고 하는 화성유수부로부터 독립된 지방 고을이었다. 정조는 상대권력이 장악하고 있는 총융청의 병사들을 서유린의 주청에 의해 화성유수부로 편입을 시킨다. 이로써 화성 인근 5읍인 용인, 진위, 안산, 시흥, 과천이 화성유수부에 속하면서 이곳에 있는 부대 역시 장용외영으로 모두 속하게 됐다.

 

특히 용인과 진위, 안산의 3읍 협수군 12, 새로 이속된 시흥, 과천 속오군 5, 안산과 시흥 장초군 2, 용인, 진위, 안산 수어아병 8초 등, 도합 27초 병력을 확보해 기존의 화성유수부의 25초와 합쳐져 42초로 조선 최대의 정예부대가 됐다. 당시는 군제는 1초에 125명으로 이뤄졌으니 화성을 지키는 군사가 무려 5,250명에 이르는 막강한 병력을 갖게 된 것이다.

 

정조는 마지막으로 아버지 사도세자의 현륭원에 참배를 하고자 화성 행궁으로 행어를 한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뜨기 28일 전에 화성 유수 서유린을 부른다. 정조는 서유린에게 화성을 건설한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서유린이 대답을 하지 못하자 정조는 화성을 만든 목적을 설명한다.

 

정조는 농업의 활성화 등 다양한 정책들을 화성에서 만들어서, 실험하고 성공시켜 전국 8도에 보급해서 새로운 조선을 만들겠다고 생각을 말한다. 하지만 환궁을 한 정조는 28일 후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렇게 정조는 화성 유수인 서유린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음을 알 수 있다.

 

 

벽파의 눈에는 가시 같았을 서유린

 

이 외에도 사초에는 서유린과 정조의 대화가 상당수가 기록되어 있다. 이런 서유린이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 순조가 등극을 하자 벽파에 의해 귀향길에 올랐다. 화성유수는 정조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측근을 임명했을 것이다. 그런 점으로 보면 벽파의 눈에는 서유린이 가시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800년 정조가 화성 행궁에서 환궁을 한 뒤 세상을 뜨자, 순조 2년인 1802년 집권 벽파는 시파의 군사기반인 장용영 외영의 군제를 없애고, 대신 규모가 훨씬 축소된 총리영을 둔다. 이로써 정조와 함께 강한 국권의 상징인 장용외영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서유린의 선정비에 많은 성혈이 있음은 결코 우연히 아니란 생각이다.

 

1800년 정조가 죽고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자 벽파가 정국을 주도하면서 시파가 큰 탄압을 받았다. 벽파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며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과 혜경궁 홍씨의 동생인 홍낙임, 정조의 측근이었던 윤행임 등을 처형하였다.

 

하지만 시파의 김조순의 딸이 순조의 비로 간택이 되자 시파 탄압의 선봉이었던 이안묵을 유배시키는 것을 필두로, 김조순의 딸과 순조의 혼인을 반대했던 권유, 김노충 등 벽파 쪽의 수많은 선비들을 모조리 처형, 유배시켰다. 이로 인해 1807년 이경신의 옥사를 계기로 벽파는 지방으로 흩어져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화성유수 서유린의 선정비는 딴 비가 유수를 마친 이듬해나 수년 내에 조성을 한데 비해, 30년이란 세월이 지난 후에 선정비를 세운 것도 벽파의 눈치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서유린의 선정비 받침돌에 무수히 새겨진 성혈. 사람들은 서유린의 선정비를 세우고 정조가 드나들던 장안문에 많은 성혈을 판 것처럼, 정조가 운명을 할 때까지 화성유수로서 선정을 베푼 화성유수 서유린을 남다르게 생각하고 성혈을 판 것은 아니었을까?

 

아마도 무수히 많은 성혈을 그에 비 받침돌에 새기면서 화성유수 서유린의 충정을 기억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백성을 사랑한 정조와 그에게 신임을 받고 백성에게 선정을 베푼 서유린의 마음을 기억해 내고자 한 것이나 아니었을까? 말없는 선정비가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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