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문화재 제697호인 구 소화초등학교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大韓民國 登錄文化財)는 문화재청장이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지정문화재가 아닌 문화재 중에서 보존과 활용을 위한 조치가 특별히 필요하다고 느껴 문화재로 지정 등록한 문화재를 말한다. 등록문화재는 일제 강점기 이후 근대에 생성·건축된 유물 및 유적이 중점적으로 등재되어 있다.

 

우리 수원에는 모두 6점의 등록문화재가 있다. 등록문화재 제597호인 팔달구 교동 741에 소재한 구 수원문화원 건물과, 등록문화재 제598호로 지정되어 있는 팔달구 매산로 119(교동, 가족여성회관)에 소재한 구 수원시청사, 등록문화재 제688호인 팔달구 효원로 1(매산로3, 경기도청)에 소재한 경기도청사 구관, 그리고 등록문화재 제689호인 팔달구 고화로130번길 21(화서동, 경기도청어린이집)에 소재한 경기도지사 구 관사이다.

 

 

이 외에 등록문화재 제697호로 20171023일자로 지정된 팔달구 정조로 842(북수동, 북수동 천주교회)에 소재한 수원 구 소화(小花)초등학교와 등록문화재 제698호로 같은 날 지정된 팔달구 향교로 130(교동)에 소재한 수원 구 부국원 건물 등이다. 결국 수원시의 등록문화재 6점은 모두 팔달구에 자리하고 있다.

 

이렇듯 등록문화재가 팔달구에 소재하고 있는 이유는 현 팔달구가 과거 수원화성 팔달문을 중심으로 모든 상권 등이 밀집되어 있었고, 이곳에 일제의 금융기관 등과 관청 등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현 수원시에 지정된 등록문화재들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에 축조된 건물들이기 때문이다.

 

 

현 북수원성당 뽈리화랑이 등록문화재

 

아마 북수원성당 입구에 구 소화초등학교 건물이 등록문화재로 20171023일자로 지정되었다는 안내 현수막이 붙어있지 않다고 하면 이 성당 안에 문화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문화재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그저 무심히 화랑건물만 보고 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성당 정문을 들어서면 옛날 건물 한 채가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건물의 외곽을 돌로 마감처리 한 이 건물이 바로 1954년 미국 가톨릭복지협의회가 수원에 최초로 건립한 초등학교 교사로 축조한 구 소화초등학교 건물이다. 지금은 북수원성당에서 뽈리화랑이라는 전시공간으로 이용하고 있다.

 

3일 찾아간 북수원성당. 이 건물은 과거 북수원성당의 부속학교로서 성당 경내의 북쪽에 남향으로 길게 자리한다. 자를 이루면서 본 건물과 교육관이 이어져 있는 이 건물은 학교를 지을 때가 한국전쟁 중이라 자재가 부족하여 외벽을 돌로 쌓고 내부는 주변의 목재를 조달해서 지었다고 한다.

 

 

내부를 자세히 살필 수 없어 아쉽게 돌아서다

 

구 소화초등학교 건물은 그 전에 이곳에서 전시를 할 대 한 두 번 들린 적이 있다. 그 당시는 등록문화재로 지정이 되기 전이라 그렇게 눈여겨보지 않았던 건물이다. 3일 찾아간 뽈리화랑 1층 입구는 문이 닫혀있다. 2층 박공지붕으로 지어진 건물은 길게(긴 면 30,550m, 짧은 면 9,200m) 조성된 건물로 각 층에 3개 교실이 나란히 이어져 총 6개 교실이 있으며 편복도 형식이고 복도 한쪽 끝에 계단실이 있는 전형적인 학교 건물이다.

 

안을 들어갈 수 없어 건물의 외곽을 둘러보다보니 한편에 돌 가운데 구멍이 나 있는 석물 하나가 보인다. ‘수원성지 돌형구라는 설명이 붙어있는 이 돌은 수원화성 안 골동품 가게에서 발견이 된 것으로 정조대왕 시후 천주교 대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수원화성 안으로 연행된 천주교인들을 심문하던 돌형구라는 것이다.

 

이 구멍이 난 돌을 이용해 어떻게 천주교인들을 고문했는지는 자세한 설명이 없어 알 수 없지만 당시 각종 형구를 이용해 천주교도들을 박해했기 때문에 이 돌형구로 인해 많은 천주교인들이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우리 문화재를 찾아갔다가 만난 돌형구 한 점. 이런 돌 한 점이라도 우리역사의 한 부분을 알려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 또한 소중한 문화적 자원이란 생각이다. 다음에 구 소화초등학교를 찾아가면 그 안까지 꼼꼼하게 살펴보아야겠다. 우리 문화재는 소중하기 때문이다.

 

 

부여군 외산면 반교리는 요즈음 찾아드는 발길들이 잦아졌다고 한다. 커다란 카메라를 둘러메고 사람들이 삼삼오오 몰려든다는 것이다. 마을이 생긴 지가 오래되었지만, 요즈음처럼 사람들의 발길이 잦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겨울철이라 좀 뜸한 편이지만, 봄부터 가을까지 주말이 되면 꽤 몰려온다고 이야기를 한다.

 

반교마을에 이렇게 사람들이 찾아드는 것은, 바로 마을 집들이 쌓아놓은 돌담장 때문이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집집마다 길가에 쌓은 돌 축대며 담장이 보인다. 조선조에 쌓았다고 하니, 그 역사가 꽤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제일 추운 날 돌담장을 만나러 가다니

 

갑자기 날이 추워졌다. 움츠리고 밖으로 나가기도 싫은 날씨지만, 부여군의 많은 문화재들이 눈에 아른거린다. 몸살기운이 영 가시지를 않아 병원신세를 진 몸이지만, 그 역마살은 이런 날씨에도 사람을 밖으로 몰아내는가 보다. 참 세상에 이런 팔자도 드물 것이라고 투덜거리면서도, 발길은 어느새 반교마을을 향하고 있다.

 

부여를 출발하여 40번 도로를 이용해, 외산면 만수리 무량사를 찾아가다가 만날 수 있는 반교마을. 도로에서 마을 입구에 있는 다리를 건너면 돌담이 길을 따라 늘어서 있다. 등록문화재 제280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부여 반교마을 옛 담장이다. 이 담장들은 조선조에 축조가 되었다고 하니, 세월이 연륜이 묻어있는 담장이다.

 

물론 그 동안에 많은 보수를 하였겠으나, 그래도 옛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모습에서 반가움을 느낀다. 수많은 석탑과 석불을 만나러 다니는 것도 부족해, 이젠 돌담까지 이 추운 날 만나러 가느냐고 어느 분이 우스갯소리를 하신다. 정말 돌에 무엇이라도 홀린 것이 아니고서야, 이 추운 날 사서고생을 하다니.

 

 

 

 

 

호박돌로 쌓은 돌담장을 만나다

 

반교마을 옛 돌담장은 특별한 것은 아니다. 마을의 밭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막돌인 호박돌을 이용해 쌓은 담장이다. 호박돌이란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돌을 말한다. 이런 호박돌은 마을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가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 돌을 이용해 길을 따라 늘어선 담장이 아름다운 경치를 만든다.

 

담장은 밑의 폭이 90cm 정도이고, 위는 60cm 정도의 폭으로 위가 좁아져 안정감이 있다. 초입에는 옛 돌 축대가 무너질 것을 대비했는지, 시멘트로 발라 놓은 곳도 있다. 그 축대 역시 막돌을 이용해 쌓은 것이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니 돌로만 담을 쌓았다. 흙 한 덩이 이용하지 않고 돌로만 쌓아 올린 담이, 이렇게 견고하게 오랜 세월을 버틸 수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소통을 할 수 있는 높이의 담장

 

담장의 높이는 약간씩 다르지만, 길가에 쌓은 담장은 어른 키보다 조금 낮다. 담장 너머로 울안이 들여다보일 정도이다. 이렇게 담장을 어른들이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한 것은, 소통을 하기 위함이다. 양반가의 담장들이 폐쇄적이라면, 민초들의 담장은 누구나 얼굴을 마주할 수 있도록 낮게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우리 민가의 담장이 갖고 있는 멋이기도 하다.

 

손이 곱을 정도로 매서운 날씨다. 그래도 마을 안을 이리저리 돌아본다. 돌이 참 많이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괜한 걱정을 해본다. 그저 척척 올려놓은 듯한 돌들이 이렇게 오랜 시간을 버티고 있다니. 반교마을을 한 바퀴 돌아 나오면서, 저 담장에 넝쿨 꽃이라도 타고 올라가는 날, 다시 한 번 찾아오리라 마음을 먹는다. 겨울철 담장은 너무 차게만 느껴지기 때문이다.

 

 

안내판도 없이 광고물까지 걸어놓다니

 

수원에는 두 기의 등록문화재가 있다. 지난 해 문화재청의 심의를 거쳐 91일자로 등록문화재로 지정이 된 것은, 등록문화재 제597호인 구 수원문화원과 제598호 구 수원시청사이다. 수원시 팔달구 매산로 119에 소재한 이 등록문화재들은 현재 수원시가족여성회관의 건물로 사용중이다.

 

등록문화재 제597호인 구 수원문화원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건물로, 금융회사인 조선중앙무진회사 사옥으로 건립된 벽돌조 2층 건물이다. 광복 후 오랫동안 수원문화원 건물로 사용되었으며, 평면은 거의 정방형에 가까운 형태이다. 이 건물은 창호몰딩을 조적벽체보다 돌출시켜 입체적으로 구성하였다.

 

구 수원문화원 건물의 특징은 정면 창호에 꽃봉우리 모양을 장식했다는데 있다. 이 건물은 정면성을 강조하는 등, 규모는 크지 않지만 장식적요소가 많고 건축 기법이 우수한 건물로 가치가 있어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등록문화재 제598호로 지정된 구 수원시청사 건물은, 한국전쟁 이후 우리나라 건축물의 새로움을 추구하는 시기에 건립된 관공서 건물이다. 구 수원시청사 건물은 서양의 기능주의 건축에 영향을 받은 한국 근대 건축의 경향을 잘 보여주고 있는 건물로, 구 수원문화원과 함께 지난 해 91일자로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등록문화재는 우리 역사의 단면

 

등록문화재는 우리 사회의 진화 과정을 통해 오늘날의 모습을 설명해 주는 것으로, 2001년도에 처음 등록문화재 제도를 도입하였다. 등록문화재는 문화재청장이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지정문화재가 아닌 문화재중에서, 보존과 활용을 위한 조치가 특별히 필요하여 등록한 문화재를 말한다.

 

등록문화재는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기념이 되거나 상징적 가치가 큰 것으로, 지역의 역사, 문화적 배경을 이루며, 그 가치가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진 것을 지정한다, 또한 한 시대 조형의 모범이 되는 것이나, 건설기술이나 기능이 뛰어나고 의장 및 재료 등이 희소하여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큰 것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이다.

 

등록문화재의 지정은 사라질 위기에 처한 근대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이며, 건조물이나 시설물뿐만 아니라, 역사 유적, 생활문화 자산, 동산문화재 등으로 등록 대상을 확대하고 있는 추세이다. 수원시의 등록문화재는 당 시대의 건조물로서, 건축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안내판도 없이 광고물까지 거치해

 

구 수원문화원 건물과 구 수원시청사 건물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지 벌써 1년이 가까워온다. 하지만 아직도 건물 주변 어디를 둘러보아도 이 건물이 등록문화재인 것을 알리는 안내판 하나 서 있지 않다. 등록문화재란 보존가치가 큰 역사적인 건물을 지정하는 것이다.

 

문화재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 그 소중함을 일깨워주어야 한다. 문화재청에서 등록문화재로 지정을 하고, 보도 등을 통해 이 두 동의 건물이 등록문화재로 지정이 되었음을 알리긴 했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 내용을 알 수는 없다. 하기에 문화재에는 안내판을 세워 사람들에게 그 가치를 알려야 하는 것이다.

 

특히 <옥외광고물등관리법>에는 문화재보호법에 의한 문화재 및 문화재보호구역에는 광고를 제한하도록 되어있다. 또한 문화재는 원형보존을 중요시한다. 지정이 되기 전에 광고물 거치를 했다고 해도, 이제는 광고물 거치대를 철거해야 한다.

 

 

 

하지만 구 수원문화원 건물 정면 입구를 막아 게시를 한 광고물은, 이 건물이 등록문화재라는 것을 알고는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늘 이곳을 지나칠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아직도 등록문화재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는 것과 등록문화재에 게시한 광고물 때문이다.

 

문화재란 모든 사람들이 그 소중함을 알고 보호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더구나 등록문화재는 그 지역의 역사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일제강점기에 축조된 건물을 등록문화재로 지정을 해놓고, 제대로 보존을 하지 않는다면 광복 70주년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루 빨리 조치를 취하기를 바란다.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 110번지 삼일중학교 교정애는 경기도 기념물 제175호인 아담스 기념관이 있다.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인 1923625일에 지은 건물로 재단법인 삼일학원 소유로 되어있다. 이 삼일중학교 운동장 맨 앞에 자리하고 있는 건물은 미국 아담스 교회의 도움을 받아서 지은 건물로 아담스 기념관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삼일학원은 1903년 미국인 선교사 W.스웨어러(W.swearer:18711916, 한국명 서원보)15명의 소년들을 모아 시작한 교회부설학교이다. 처음에는 자체 건물 없이 중포산 기슭의 교회건물을 빌려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수원지방 감리사였던 목사 W.A 노블이 이 사정을 미국 아담스 교회에 알려 교인들로부터 건립기금 2만 엔을 기부 받아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이 최초의 삼일학원 학교 건물은 미국 아담스교회 선교부에서 설계하고, 공사는 중국인 왕영덕이 맡았다고 전해진다. 우진각 지붕의 2층 벽돌조 양옥으로 현관은 건물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지하층은 거칠게 다듬은 돌로 쌓았고 1층과 2층은 적벽돌로 벽체를 쌓았으며, 층간에 목조 마루틀을 설치하여 바닥을 꾸몄다. 지붕은 벽체위에 목조 트러스를 올리고 널판을 깔아 천연슬레이트를 올렸다.

 

 

192357일에 기공식 가져

 

아담스기념관은 192357일에 기공식을 가졌다. 그리고 그해 1212, 5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성대한 낙성식을 가졌다. 교회건물을 빌려 아이들을 가르칠 때는 70~80명 밖에 가르칠 수가 없었지만, 아담스 기념관이 건립됨에 따라 수백 명의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게 되었다.

 

이 아담스 기념관은 1940년대 고 최태영 기념관을 신축하여 교사로 사용하기 전까지 삼일학교의 교사로 사용하였다. 이후 아담스 기념관은 본관으로 사용하며 삼일학교를 상징하는 명물이 되었다. 현재는 솔로몬 도서관 등이 자리하고 있다.

 

11일 찾아간 아담스 기념관. 학업을 마친 후라 그런지 교정에는 아이들이 축구를 하고 있다. 문화재 촬영을 하겠다고 이야기를 하고 난 뒤, 아담스 기념관을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한다. 건물을 바라보고 우측 한 편에 ‘1923 삼일학교(三一學校)’라는 글이 쓰여 있는 석패가 보인다. 기단은 돌 위에 장대석을 가지런히 놓았다.

 

 

학생들도 문화재인 것을 모르고 있다니.

 

출입구가 건물을 바라보고 우측으로 치우쳐진 이 건물은 좌측의 일부는 붉은 벽돌로 쌓아 막아 놓았으며, 아래 위층에 세 칸으로 된 창문을 내었다. 우측 측면에는 네 칸의 창문을 내었다. 건물 뒤편은 모두 붉은 벽돌로 막혀있어서 장중한 느낌을 준다. 지은 지 90년이 지난 건물이지만 상당히 견고해 보인다.

 

한참 여기저기 사진을 찍고 있는데 여학생 하나가 쫓아와서 무엇을 찍는 것이냐고 묻는다. 아마 낯선 사람이 학교를 찍고 있으니 이상했는가 보다.

문화재 촬영하고 있어요.”

문화재가 어디 있어요? 학교를 찍으려면 전경을 찍어야죠.”

이 건물이 바로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있는 건물예요

정말요?”

 

 

학생을 데리고 건물 앞으로 가서 문화재 안내판을 가르쳐주니, 그때서야 알았다고 이야기를 한다. 학교 교정에 문화재자료로 지정이 된 건물이 있는데도, 중학교 3학년이라는 학생이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우리 문화재의 현실이 이런 정도였나 싶다. 3년을 학교에 다니고, 이 건물을 수도 없이 출입을 했을 텐데도 건물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니,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진다.

 

학교자랑에 여념이 없는 여학생을 뒤로하고 교정을 빠져나온다. 삼일상고로 반 배정을 받고 왔다는 여학생은 자신이 다니고 있는 학교가 최고라고 말한다. 그렇게 자신의 학교를 사랑할 줄 아는 만큼 문화재에 대한 관심도 높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앞으로 꼭 그런 학생이 되어주기를 기대한다.


전북 진안군 마령면 강정리 248-1에는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2층집이 있다. 현재 등록문화재 제191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집은, 한식 민가의 건축기술을 기반으로 한 2층 집이다. 근대에 지어진 농촌지역의 집으로는 드물게 보이는 2층집으로, 당시의 농촌 건축문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5월 3일 찾아간 진안군. 마령면 소재지를 지나 전주 방향으로 가다가 만난 강정리 길가에, 진안 전영표 가옥이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고택답사를 연재하는 나로서는 이런 안내판이 보이면 그보다 더 반가울 수가 없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 집을 찾는데, 영 고택다운 집이 보이지를 않는다. 마을 주민들에게 물러 겨우 집을 찾았다. 담장이 아니라면 그저 지나칠 듯한 집이다.


꽁꽁 닫힌 철문, 담 밖으로만 돌아

전영표 가옥은 일제강점기 지역의 민간인 목수에 의해 지어진 집으로, 당시 지방 목수들의 기능을 살펴 볼 수 있는 집이다. 당시에 이렇게 2층으로 집을 지을 수 있었다는 것은, 상당한 재력을 갖고 있음을 뜻한다. 담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니 원래는 기와지붕이었을 것이나, 현재는 슬레이트 지붕으로 이어 놓았다.

최근에 담장을 새로 조성한 듯한 이 집은, 전통 돌담에 철 대문을 달아놓아 보기에도 이상하다. 안을 마주하면 중앙 뒤쪽으로 이층으로 올린 안채가 서 있고, 우측에는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의 맞은편에는 헛간채가 서 있는데, 블록 담으로 꾸민 것으로 보아 나중에 다시 지은 듯하다.




이층은 유리창을 넓게 달아내

일제강점기에는 지역에도 2층집을 많이 지었다. 이런 유풍은 대도시나 지방의 작은 도시나 다를 바가 없었던 것 같다. 한식으로 짓기도 하고, 일본식의 건물도 상당수가 건축이 되었다. 이 집은 궁이나 사찰 등을 짓는 대목수가 지은 것이 아니라, 지역에 있는 일반 목수들이 지은 집으로 당시 목수들의 기능을 살펴 볼 수 있는 집이다.

진안 전영표 가옥은 1924년에 지은 것으로 추정이 된다. 이 집을 지은 건축주인 전영표는 집을 크게 지으면 안된다고 하였다고 하지만, 이집은 마을에서는 눈에 EL게 큰 집이다. 집 앞으로 가니 밭에서 일을 하고 있던 주민 한 분이, ‘문화재라고 하는데 담장만 새로 해서 멀쩡하지 볼 것이 없다’라고 하신다. 아마 그 분들이야 등록문화재라는 것이 얼마만한 가치를 갖고 있는지 모르는 듯하다.



안채는 정면에서 바라보면 좌측에 부엌을 내고 옆으로 안방을 드렸다. 중앙의 두 칸은 앞에 툇마루를 놓았으며, 우측으로는 반 칸 정도의 누마루를 깔았다.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으니 담장 밖으로 이리저리 다니면서, 집안을 살펴 볼 수밖에.

이층은 세 칸으로 되었으며 좌측 한 칸은 담벼락을 구성하고, 우측의 두 칸은 커다란 유리창을 달아냈다. 아마도 이렇게 커다란 유리창문을 앞뒤로 달아낸 것은, 주변의 경치를 보기 위함이었는가도 모르겠다.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안에 있는지 밖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

평범한 2층 집은 당시의 유행이었을 듯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전영표 가옥. 당시 지역 목수들의 기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집이라고는 하지만, 특별한 꾸밈은 보이지를 않는다. 다만 그 당시에 2층집들이 많이 지어졌고, 이런 시골의 소도시에서도 이런 집이 있는 것으로 볼 때 그 당시에 유행하던 가옥의 형태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안으로 들어가 꼼꼼히 살펴볼 수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안채 뒤편에 장독대가 있고, 사랑채의 앞으로는 작은 연못도 보인다. 건축주인 전영표는 당시 이런 집을 지을 정도의 재력가였던 것 같다. 정원에는 각종 꽃나무들이 아름답게 꽃을 피우고 있다. 기와 대신 올린 슬레이트가 조금은 부담을 주기는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