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고인돌이 있던 곳에서도 성돌을 채취했나?

 

쐐기란 커다란 바위나 돌을 쪼개기 위해 깊은 구멍을 낸 것을 말한다. 예전 화성을 축성할 때 커다란 바위를 쪼개 성돌로 이용하기 위해 바위에 줄을 지어 판 쐐기자국이 있다. 이렇게 쐐기구멍을 낸 후 그곳에 바짝 마른 밤나무와 참나무를 박고 물을 부어 놓으면 나무가 불어나면서 그 팽창하는 힘으로 돌을 쪼개낼 수 있었다. 지금처럼 큰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도 이렇게 바위를 절개해 낸 선인들의 지혜에 그저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다.

 

수원의 팔달산과 여기산, 숙지산 등에는 화성을 축성할 때 성돌을 조성하기 위해 큰 바위에 조성한 쐐기자국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모든 곳에서 바위를 쪼개 화성 축성장으로 옮겨 화성을 쌓았다. 그런데 광교박물관 뒤편에 있는 고인돌을 돌아보다가 그 고인돌 한 기의 받침돌에 쐐기자국이 있는 것을 보았다.

 

광교박물관 야외 측면에는 두 기의 고인돌이 있다. 그 중 박물관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고인돌은 이의동 작은 안골 마을 논 가운데 있던 것을 옮겨 온 것이다. 또 한 기는 광교박물관 주치장에서 박물관 입구로 들어가는 좌측에 자리하고 있다. 이 고인돌은 이의동 뒷골마을 언덕 경사면에 있던 것을 옮겨왔다고 한다.

 

쐐기자국이 선명한 고인돌

 

지석묘, 혹은 고인돌이라고 부르는 돌무덤은 우리나라 전역에 걸쳐 나타난다. 전 세계에 고인돌은 모두 6만 여기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그 중 3만 여기가 우리나라에 소재한다. 세계 고인돌의 절반이 우리나라에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전역에 소재한 고인돌 군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되기도 했다.

 

고인돌은 모두 3종류가 있으며 탁자식, 바둑판식, 개석식 등으로 그 유형을 구분한다. 탁자식은 평평한 굄돌을 세워서 땅위에 네모꼴의 방을 만들고 그 위에 덮개돌을 올려서 탁자처럼 조성한 것이다. 바둑판식은 땅 위에 3~6개의 받침돌이 덮개돌을 받치고 있으며, 지하의 무덤방은 돌놀, 돌덧널, 구덩 등의 형태가 있다. 개석식은 지상에는 커다란 덮개돌만 드러나 있으며 남방식 고인돌 혹은 무지석식 고인돌이라고 부른다.

 

수원에는 팔달산에 경기도 기념물 제125호로 지정된 팔달산 고인돌군과 수원박물관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금곡동 고인돌, 그리고 광교박물관 야외에 전시된 이의동에서 옮겨온 고인돌 등이 소재하고 있다. 이 세 곳의 특징은 모두 물과 가까이 있다는 점이다. 즉 청동기시대 인류의 주거지는 물이 있는 곳이었을 것이고, 고인돌도 물이 흐르는 주면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런데 이 이의동 뒷골마을 언덕 경사면에서 옮겨왔다는 지석묘의 덮개석 옆에 놓인 받침돌에 쐐기 흔적이 보인다. 이 돌이 나중에 고인돌의 형태를 조성하기 위해 딴 곳에서 가져왔다고 할 수 없는 것이 덮개석과 재질이 흡사하다는 점이다. 하기에 이 고인돌의 쐐기자국은 의문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쐐기자국의 진위 밝혀낼 수 있을까?

 

8일 오후, 광교박물관 2층에 자리한 사운 이종학 선생의 자료를 찾아보기위해 방문한 광교박물관 야외에서 만난 고인돌. 위편에는 무수한 성혈의 흔적이 있는 이 고인돌 한 기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 덮개석 옆에 놓인 돌에 쐐기흔적. 이 흔적이 쐐기흔적이 맞는 것인지, 아니면 후일 누군가에 의해 조성이 된 것인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자료를 정리하면서도 그 쐐기흔적 하나로 인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내일은 박물관 관계자들에게 고인돌 쐐기자국에 대해 질문을 해봐야 할 듯하다. 역사란 밝혀내는 것이라고 했던가? 우연히 찾아본 고인돌 쐐기자극 하나가 밤잠을 이루지 못하게 만들 듯하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져 답사를 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다. 14일 오후 찬바람이 불어 옷깃 안으로 싸한 바람이 스며드는 날 오산시 외삼미동에 소재한 경기도기념물 제211호인 고인돌을 찾아 나섰다.

 

지석묘, 혹은 고인돌이라고 부르는 돌무덤은 우리나라 전역에 걸쳐 나타난다. 전 세계에 고인돌은 모두 6만 여기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그 중 3만 여기가 우리나라에 소재한다. 세계 고인돌의 절반이 우리나라에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전역에 소재한 고인돌 군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되기도 했다.

 

고인돌은 모두 3종류가 있으며 탁자식, 바둑판식, 개석식 등으로 구 유형을 구분한다. 탁자식은 평평한 굄돌을 세워서 땅위에 네모꼴의 방을 만들고 그 위에 덮개돌을 올려서 탁자식으로 조성한 것이다. 바둑판식은 땅 위에 3~6개의 받침돌이 덮개돌을 받치고 있으며, 지하의 무덤방은 돌놀, 돌덧널, 구덩 등의 형태가 있다. 개석식은 지상에는 커다란 덮개돌만 드러나 있으며 남방식 고인돌 혹은 무지석식 고인돌이라고 부른다.

 

 

 

오산 외심미동의 고인돌

 

오산시 외삼미동 384에 소재하고 있는 경기도 기념물 제211호 고인돌. 이 지석묘는 주변을 정리해 주변이 말끔하게 정리가 되어있다. 고인돌이 소재한 앞에는 차들이 주차할 수 있도록 주차시설까지 갖추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위한 편의까지 제공하고 있다. 한 기의 고인돌이 소재한 곳치고는 주변 환경이 제대로 관리가 되어있는 곳이다.

 

외삼미동 고인돌은 확인결과 청동기 시대 후기에 속하는 유적으로 북방식과 남방식이 혼재되어 있는 희귀한 예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 고인돌을 거북바위또는 장수바위리고 부른다고 한다. 이 고인돌은 시민들의 요구에 의하여 한양대 박물관장 겸 경기도 문화재 위원이었던 김병모 교수가 현지에서 조사를 하여 밝혀졌으며 경기도기념물로 지정이 되었다.

 

 

굄돌이 누워있는 형태의 고인돌

 

외삼미동 고인돌의 덮개돌은 화강편마암으로 크기는 260×230×90cm 정도이다. 고인돌의 덮개돌은 중앙을 손질한 듯 마치 거북등과 같은 형태로 되어있다. 덮개돌의 위에는 지름 6~7cm 정도의 성혈이 15개 정도가 있다. 이 고인돌의 특징은 바로 덮개석을 받치고 있는 굄돌이다. 덮개석을 받치고 있는 굄돌이 누워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굄돌은 사방에 세워 묘실을 만드는 것이 일반적인 고인돌의 형태이다. 그러나 외삼미동의 고인돌은 굄돌이 누여져 있는 형태이다. 이러한 모습의 고인돌의 형태인 황구지천의 상류인 화성 병점과 수기리 유적에서도 조사가 된 바 있다. 굄돌을 세우지 않고 누운 채로 그냥 사용하였다는 것은 고인돌의 이른 형태였을 것으로도 보인다. 이 고인돌의 남쪽 옆에는 개석식 고인돌의 덮개석으로 보이는 넓적한 돌이 놓여있다.

 

 

주변 경관 잘 정리된 외삼미동 고인돌

 

외삼미동 고인돌은 경수도로에서 통탄 방향으로 나가다가 북오산IC 입구를 지나 조금 더 가면 우측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이곳 입구에 외삼미동 고인돌이 있다는 안내판이 보인다. 우측 길로 접어들면 지하차도가 나온다. 지하차도를 벗어나면 바로 좌측에 커다란 소나무 몇 그루가 서 있고 그곳에 고인돌이 자리한다.

 

고인돌 주변은 정리가 잘 되어있고 한편으로는 고인돌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안내판이 서 있다. 오산은 몇 곳에서 고인돌이 발견된 곳으로 이 지역이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집단으로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고인돌군은 대개 사람들이 살기 좋은 환경이 조성되어 있는 곳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고인돌 군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오산이라는 지역이 예부터 사람살기 좋은 곳이었다는 것을 뜻한다.

 

오산 인근인 수원, 화성, 용인 등에도 골고루 고인돌 군이 조성되어있어 이 지역은 우리나라에서도 사람들이 살기 좋은 환경이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산시 외삼미동에 소재한 청동기 시대 고인돌. 앞으로 지역의 문화유산에 좀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오산을 자랑할 만한 것이 있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난 그저 웃는다. 오산을 자랑하라고 하면 한 시간 넘게 자랑을 할 수가 있다. 그 중에서도 내가 빠트리지 않는 것은 백제 때부터 우리고장을 지켜온 독산성을 든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적을 물리친 지혜가 서린 세마대 또한 마다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 다음을 궁금해 한다. 그 크지 않은 도시 오산에 무슨 자랑꺼리가 있겠는가? 하는 표정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오산을 모르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한다. 한 마디로 한양을 가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남대문의 문턱을 이야기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오산은 자랑거리가 넘쳐나는 곳이다. 그런 오산을 사람들은 자랑을 하지 못한다. 왜 그런 것일까?

 

 

 

 

오산은 이미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다.

 

고인돌 공원. 오산시 금암동 산 53번지 일대에 조상한 고인돌 공원은 단순한 공원이 아니다. ‘오산 금암리 지석묘군인 이곳 일대는, 이미 선사시대부터 인근에 사람들이 모여 살던 취락이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금암리 지석묘군 인근에는 고층 아파트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그 한편 야산을 끼고 조성된 고인돌 공원이다.

 

이곳을 공인돌 공원이라고 명칭을 붙여 사람들이 우리 선사유적과 함께 힐링의 공간으로 삼고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이곳은 선사유적지이다. 공원이기 보다는 사적 등으로 지정을 했어야 마땅한 곳이다. 하지만 주변 아파트에 거주하는 시민들이 이곳에서 건강과 여가를 즐길 수 있다고 하면, 그 또한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찾아와 높지 않은 산을 돌아보면서 마음껏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고, 거기다가 옛날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곳. 더구나 우리나라 고인돌에 대한 자세한 설명까지 곁들여 있어 이곳에서 문화재 사랑과 우리 옛 풍속을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이곳처럼 자랑할 만한 곳은 그리 많지가 않다는 생각이다.

 

 

 

개석식 고인돌 9기가 널린 곳

 

고인돌 공원에는 현재 개석식 고인돌 9기가 소재하고 있다. 하지만 주변을 돌아보면 고인돌 형태로 보이는 돌들이 있어, 앞으로 더 정밀발굴이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경기도 기념물 제112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금암리 지석묘군은 전형적인 바둑판식 고인돌이다.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의 형태인 고인돌은 좌우에 길고 넓은 받침돌을 세우고 앞뒤로 조금 좁은 받침돌을 세운 후 그 위에 평평한 덮개돌을 얹는 탁자식과, 땅 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후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이 있다. 오산시 금암동에 위치한 9기의 고인돌은 바둑판식 고인돌이다. 땅 위로는 커다란 바위만 노출이 되어있어 흔히 개석식 고인돌이라 부른다.

 

 

금암리 고인돌의 형태를 보면, 덮개돌은 땅 위에 드러나 있지만 하부구조는 흙속에 묻혀 있어 형태이다. 그렇기에 그 아랫부분은 자세하게 알 수 없다. 금암리 고인돌 가운데 규모가 큰 것은 덮개돌의 길이가 6m 정도이다. 이곳에 있는 고인돌 중 제2호 고인돌의 덮개돌의 윗면에 성혈이 있다고 한다.

 

성혈이란 오랜 세월 동안 우리민족의 신앙적인 형태의 하나로 전해진 것이며, 바위에 돌을 이용해 구멍을 파는 것이다. 금암리 고인돌 2호에 파인 성혈은 파인 모양으로 보아 쇠붙이를 이용하여 만들어진 것 같다고 한다. 성혈은 풍년을 빌거나 기자속(祈子俗)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만들었다고 하지만 정확하게는 알려져 있지 않다.

 

 

 

 

난 이곳을 자랑하고 싶다

 

26일 지난 밤 내린 비가 그친 후 금암동 고인돌 공원을 찾았다. 하늘엔 뭉게구름이 덮여있는데, 공원 안에는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 근처 어디 유아원에서 바람을 쐬러 온 모양이다. 고인돌 공원 안쪽에 커다란 할아버지 바위와 할머니 바위가 나란히 서 있고, 그 뒤편에 몇 기의 개석식 고인돌이 보인다.

 

2호 지석묘 상단에 성혈이 있다고 하여 꼼꼼하게 살펴보았지만, 그동안 풍우에 씻긴 듯 식별할 수가 없다. 4호 고인돌을 촬영을 하고 산길로 접어들었다. 높게 자란 숲으로 인해 햇볕이 들어오지 않아, 숲길에는 시원한 바람마저 분다. 아이와 어머니가 손을 잡고 산길을 내려오는 모습에서, 이런 것이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 생각한다.

 

숲길 가에도 지석묘와 같은 돌 한 기가 놓여있다. 근처에 표지판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직 확인이 된 것은 아닌 듯하다. 산길을 걷다가 숲속에 놓인 쉼터 안에 다리를 뻗는다. 초가을 오전 하늘이 유난히 푸르다. 도심 인근에 아파트촌과 학교, 그리고 숲에 쌓인 고인돌 공원. 어찌 이 좋은 곳을 자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공원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그냥 공원이 아니라 역사와 문화가 공존을 하고 있다. 이런 공원을 돌아볼 수 있다는 것이 참 즐거운 일이다. 15일 일찍 오산을 찾았다. 꼭 둘러보아야 할 곳이 있기 때문이다. 일을 보고 난 후 오산시 금암동 산 53번지 일대에 조성한 오산금암리 지석묘군을 찾아보았다.

 

이 고인돌이 있는 금암동 일대는 주변에 여기저기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앞으로는 시원한 도로가 뚫려있지만, 아파트까지 인 듯 길이 막혀있다.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공원 안으로 들어섰다. ‘고인돌 공원이라고 명명한 공원은 주변정리가 잘 되어있어, 누구나 돌아보기 좋게 조성을 하였다.

 

아무 때나 아이와 함께 이곳을 나와 한 바퀴 돌아보고 갑니다. 공기도 좋고 아이에게 잘 모르는 것이지만 자료를 보고라도 설명을 해 줄 수가 있어서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곳이기도 하죠. 우선은 역사적인 곳이 마을에 있다는 것도 즐겁고요.”

뒤편 휴먼시아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다는 이아무개(, 38)씨가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손을 잡고 걷다가 하는 말이다.

 

 

개석식 고인돌 9기가 널린 곳

 

경기도 기념물 제112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금암리지석묘군은 전형적인 바둑판식 고인돌이다.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의 형태인 고인돌은 좌우에 길고 넓은 받침돌을 세우고 앞뒤로 조금 좁은 받침돌을 세운 후 그 위에 평평한 덮개돌을 얹는 탁자식과, 땅 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후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이 있다.

 

오산시 금암동에 위치한 9기의 고인돌은 바둑판식 고인돌이다. 땅 위로는 커다란 바위만 노출이 되어있어 흔히 개석식 고인돌이라 부른다. 고인돌의 덮개돌은 땅 위에 드러나 있지만 하부구조는 흙속에 묻혀 있어 자세하게 알 수 없다. 금암리 고인돌 가운데 규모가 큰 것은 덮개돌의 길이가 6m 정도이다.

 

 

이곳에 있는 고인돌 중 제2호 고인돌의 덮개돌의 윗면에 성혈이 있다고 한다. 성혈이란 오랜 세월 동안 우리민족의 신앙적인 형태의 하나로 전해진 것이며, 돌에 돌을 이용해 구멍을 파는 것이다. 금암리 고인돌 2호에 파인 성혈은 파인 모양으로 보아 쇠붙이를 이용하여 만들어진 것 같다고 한다. 성혈은 풍년을 빌거나 기자속(祈子俗)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만들었다고 하지만 정확하게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아름다운 공원으로 조성한 고인돌공원

 

고인돌을 촬영하려면 안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낮은 목책으로 경계를 구분해 놓아 밖에서만 촬영을 하기로 했다. 어차피 개석식 고인돌이라 안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제대로 촬영을 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고작 외형만 촬영을 할 것을 안으로 들어가 공원은 산책하는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요즈음 사람들을 그저 기본적인 예의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이런 공원을 와도 카메라 하나를 둘러메고 안으로 들어가 무슨 큰일이나 치르는 양 덮개돌 주변을 왔다갔다 하면서 사진을 찍어대는 사람들을 보면 도대체 이해가 가질 않는다. 꼭 저렇게 촬영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공원을 한 바퀴 돌아본다. 3년 전인가 이곳을 왔을 때는 모두 11기의 고인돌과 개석식 고인돌로 추정된다는 덮개석이 있었는데, 이번에 돌아보니 9기의 고인돌이 있다고 소개를 하고 있다. 잘 꾸며진 산책로와 여기저기 만들어진 정자, 그리고 수로와 시 한편을 읽을 수 있도록 꾸며놓은 경관 등 참 좋은 공원이란 생각이 든다.

 

역사와 문화가 공존하는 오산 금암동 고인돌공원. 이렇게 아이들과 함께 배울 수 있는 공원 하나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오늘 이 공원이 참 좋다는 생각을 한다. 지석묘군을 돌아보다가 만난 할아버지바위와 할머니바위, 혹 이 바위로 인해 금암리가 된 것은 아니었을까? 뒤돌아서면서 초가을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본다.(오마이뉴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20131월 첫 번째 답사는 강원도 최북단의 고성군 현내면으로 정했다. 이곳은 아름다운 화진포를 비롯하여 김일성별장과 전 이승만, 이기붕의 별장 등이 있는 곳이다. 또한 이곳에는 인근에 건봉사를 비롯해, 여러 가지 문화재들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 중 둘째 날인 16일 오전에 찾아간 곳은, 바로 화진포 일대에 자리하고 있는 고인들 들이다.

 

강원도 고성군 화진포 일대에는 5기의 고인돌이 있다. 북방식 고인돌인 이 지석묘들은 문화재로 지정을 받지 못했지만, 그 규모가 크고 이 일대에서 많은 선사시대 유물이 발견이 된 것으로 보아 대단위의 주민들이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까지의 선사유적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모두 5기의 고인돌이 분포 해

 

화진포 일대에는 패총과 마제석기 등 유물이 주변 곳곳에 산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은 고대 집단 주거지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에 산재한 지석묘를 찾아보기 위해 화진포 콘도 지역 안으로 들어갔다. 첫 번째 만난 지석묘는 건물 출입문에서 30m거리에 있는, 이른바 '장평리 지석묘'라고 부르는 고인돌을 처음으로 만났다.

 

이 지석묘의 덮개돌은 긴 각진 타원형인데 동남쪽 일부가 파손되었다. 덮개돌의 길이는 2.5m×2,4m 정도이고 두께는 30~40cm 정도이다. 남북방향으로 자리를 하고 있는 이 지석묘는 석실의 장축인 동벽과 서벽 그리고 단벽인 남벽은 각각 1매의 판석으로 되어 있고, 북벽은 소실되었다. 남벽의 지석은 1m정도만 남아있고 북벽의 지석은 소실되어 없어졌다.

 

 

바닥에서 덮개돌까지의 높이는 약 50cm 정도이다. 석실 동쪽의 높이는 15cm밖에 되지 않고 고인돌 동쪽 바로 옆에 있는 나무뿌리에 돌이 박혀 있는 상태로 지상에 노출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이 지석묘는 묘실이 지하에 있다가 모래가 없어지면서 석실 지상에 노출되어 보이는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 석실 바닥과 주변 지역에는 천석(자갈돌)들이 산재하였다.

 

이승만 별장 기념관 주변에 3기가 있어

 

화진포 앞에서 만난 안내판에는 모두 5기의 고인돌이 있는 곳으로 표시가 되어있다. 그 하나는 앞서 언급한 화진포 콘도 옆에 1. 그리고 이승만 별장 기념관 위편 도로 양편에 3, 그리고 마지막 1기는 화포리에 자리하고 있다. 두 번째로 3기가 있는 이승만 별장 기념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장소를 확인하고도 정확하게 어디에 지석묘가 있는지를 알 수 없어, 이승만 별장 기념관 앞에 있는 매표소에 가서 고인돌이 어디에 있는가를 물어보았다. 그런데 돌아오는 답변이 의외였다.

 

가끔 사람들이 고인돌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는데 정확한 위치를 모르겠어요. 그분들도 찾아보다가 없다고 하고 그냥 돌아가셨거든요

 

어디에도 이곳에 고인돌이 있다는 안내판 하나가 없다. 할 수 없이 주변을 뒤져보는 수밖에. 도로를 따라 위로 오르는데 커다란 돌이 보인다. 얼핏 보아도 고인돌의 윗돌이다. 차에서 내려 올라가 보았더니 두 기의 고인돌이 자리하고 있다. 또 한 기는 길 건너편 비탈 위에 자리하고 있다. 안내판의 설명대로 그대로 자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곳에 고인돌을 찾지 못했을까? 아마도 여름철이라면 풀이 자라 고인돌이 가려져 있었을 수도 있다. 1월에는 다행히 풀이 마르고 쓰러져 있어 고인돌이 들어나 있는 것이다. 세 기의 고인돌은 모두 북방식의 고인돌로 그 규모가 상당히 크다.

 

비지정문화재는 이렇게 관리해도 되나?

 

매표소를 지나 길 좌측 위에 있는 두 기를 돌아보고 건너편 비탈 위에 있는 고인돌로 향했다. 길 좌측에 있는 고인돌은 밑에 굄돌이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에 비해 비탈 위에 고인돌은 그보다는 굄돌이 제대로 되어있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인가? 소주병과 쓰레기들이 주변에 널려있다.

 

 

고인돌 사이에는 불을 놓은 흔적 같은 것도 보인다. 도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누가 이곳에 와서 술을 따라놓고 치성이라도 들인 것일까? 아니면 술을 먹으며 날이 추우니까 군불이라도 지핀 것일까? 고성군 지역은 유난히 선사유적인 지석묘가 많이 분포되어 있는 곳이다.

 

그런데 이 화진포 주변 다섯 기의 고인돌이 제대로 관리가 되어있지 않다. 문화재로 지정된 것만이 소중한 것이 아니다. 이 지역의 문화를 연구하는데 있어 소중한 자료인 고인돌이 이렇게 함부로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 부아가 치민다. 이제라도 이 옛것의 소중함을 사람들에게 일깨 울 수 있는 안내판을 설치하고, 조금 더 많은 신경을 써야할 것만 같다. 첫 번 째 답사에서 만난 불쾌함은 오래도록 가시지 않을 것만 같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