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답사의 끝은 대부도 어촌민속박물관

 

예전처럼 12일이나 23일 등 일정으로 답사를 다니지 못하면서 그동안 찾아보지 못했던 수원 인근의 볼만한 곳을 찾아다닌 지 벌써 6개월 가까이 되었다. 매주 하루 쉬는 날을 이용해 길을 나서는 답사이기 때문에 먼 곳으로 갈 수 없어 인근을 돌아보면서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작은 행복을 느끼고는 한다.

 

30년 세월을 답사를 하면서 수많은 자료가 쌓여있지만 정작 남들이 큰 관심을 쏟지 않는 우리문화재 등을 주로 취재했기 때문에 나에게는 중요한 자료지만 내 손을 떠나고 나면 그리 큰 가치가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요즈음이야 수원 인근을 다니기 때문에 기사를 쓰고 나면 꼭 필요한 사진만 남겨두곤 삭제를 시켜버린다. 너무 자료가 쌓이다보니 보관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지난 24, 남들은 크리스마스이브라고 들떠있을 때 난 카메라 한 대를 들고 길을 나섰다. 그동안 수십 차례 그 앞을 지나면서도 들어가 보지 못한 안산어촌민속박물관을 찾아보기 위함이다. 말 그대로 예전 선감도 일대의 어민들의 생활풍속을 발굴, 보존, 전시해 놓은 박물관이기 때문에 과거 우리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수원은 바다와 접해있지 않지만 예전 수원부지도(1872년 조선왕조가 8도와 그 군현별로 제작한 조선후기 지방지도 중 경기도 수원부 지도로서 현재의 경기도 수원시 일대)를 보면 서해를 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화성시가 수원부였기 때문에 당연히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기도 했다는 점이다.

 

 

대부도 초입 탄도를 바라보는 어촌민속박물관

 

안산어촌민속박물관은 수원에서 한 시간 거리에 소재한다. 수원을 출발해 화성시 전곡항을 지나 탄도방조제를 건너 안산시 대부도 입구 탄도교차로에서 좌회전을 받아 들어가면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 717에 소재한다. 앞으로는 탄도가 바라다보이고 주변에는 탄도항 노을팬션캠핑장이 자리한다.

 

안산어촌민속박물관은 안산시가 경기도 어촌관광종합개발사업과 연계하여 건립한 민속박물관이다. 2006311일 개관한 안산어촌민속박물관은 2007216일 제1종 전문박물관으로 등록되었으며, 2008122안산어촌민속박물관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찾아간 날이 평일에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이라서인지 박물관안에는 찾아온 관람객들이 보이지 않는다.

 

입구 매표소에서 65세 이상은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고 증명서를 보여 달라고 한다. 요즈음 어딜 가나 주민등록증을 내보이며 무료관람이 가능하다. 한편으로는 그까짓 2,000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수도 없이 돌아다니는 나로서는 일 년 동안 그 돈이 모이면 적지 않다. 그동안 답사를 다니면서 지불한 입장료와 주차료만 해도 엄청나기 때문이다.

 

 

서해안 생태계와 민속을 돌아볼 수 있는 곳

 

입구서부터 대형 수족관 안에 많은 어종들을 만난다, 모두 3개의 전시실로 구분되어 있는 어촌민속박물관은 지금은 우리가 만나기 힘든 해안가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호감이 가는 곳이다. 각종 조개류를 채취하는 기구부터 어망과 근처를 다니며 패류를 모아들이기 위한 운송수단 등 모든 것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이층으로 올라가면 시화호 주변에 서식했던 공룡들의 발자국 화석과 옛 서해안 바닷가의 가옥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과거 우리네 살림살이를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곳을 찾아온 길이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다. 지금이야 교통의 발달로 먼 길로 자유롭게 나다닐 수 있지만 예전 어민들은 물때를 모르면 작업할 수 없었다. 특히 밀물과 썰물의 차가 있는 서해안에서는 그런 간조시간이 상당히 중요하다. 그런 것까지 세세하게 관찰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어촌민속박물관이다.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눈이라도 내리려는 듯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하다. 초겨울의 날씨는 종잡을 수가 없다. 아침도 먹지 않고 출발한 여정이라 인근을 들러본다. 탄도로 들어가는 길에(현재는 산책로가 나 있다) 사람들이 바람을 못 이겨 그런지 휘청거리며 걷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바다는 우리의 마지막 자원이라고 한다. 옛날 우리네 조상들은 물이 있는 곳에 집단거주 하였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우리나라는 자연스럽게 어촌문화가 형성되고 아직까지도 그런 어촌문화가 지속되고 있다. 기회가 된다면 우리의 생활에서 만나는 물과 연관이 되는 곳을 모두 돌아보고 싶은 마음 굴뚝같다.

 

우리나라의 많은 문화재 중에서 탑, 범종 등 불교 문화재를 보면, 비천인이라는 조각이 보인다. 비천인은 범종이나 석탑, 부도나 법당의 단청 등에 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흔히 비천, 비천인, 천인 등으로 불리는 이 선인은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며, 부처님의 내력을 칭송하는 천인의 일종이다.

하늘거리는 의상을 입고 양 팔뚝에 표대 또는 박대라고 하는 긴 띠를 걸치고, 하늘을 나는 듯한 모습으로 표현이 된 비천. 아름다운 모습으로 등장하는 비천은 인도의 신화에서 나오는 건달바와 긴나라에서 유래한다. 건달바는 술과 고기를 먹지 않고, 오직 향을 살라 몸에서 향기를 발산한다고 하여 ‘향음신(香音神)’으로 불린다. 이 비천의 유래가 되는 건달바는 악(樂), 악음(樂音), 미(美), 미음(美音)의 왕이다. 긴나라 역시 천신으로 팔부신중의 하나로 천악신과 가악신이다.

국보 제35호 구례 화엄사 사사자삼충석탑

아름다운 비천의 최고는 무엇인가?

손목에 두른 표대가 머리 위에서 나부끼며 허공을 나르는 이동수단이 된 비천. 중국 등으로 전해진 아름다운 비천이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삼국시대인 4세기 말이다. 한국에 전해진 이 비천은 나름대로의 미적 감각을 통해 좀 더 여성스러운 모습으로 표현이 되었다. 우리나라에 전해진 비천의 초기 흔적은 고구려 고분 등에서 그 모습이 보이며, 상원사 동종에서 그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신라 성덕왕 24년인 725년에 제작된 국보 제36호 상원사 동종에는 종 몸체의 넓은 띠와 사각형의 유곽을 구슬 장식으로 테두리를 하고, 그 안쪽에 덩굴을 새긴 다음 드문드문 몇 구의 공후와 생 등을 연주하는 주악상을 두었다. 네 곳의 유곽 안에는 연꽃 모양의 유두를 9개씩 두고, 그 밑으로 마주보는 두 곳에는 구름 위에서 무릎을 꿇고 하늘을 날며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상을 새겼다.

국보 제35호 사사자삼층석탑 기단에 새겨진 비천인상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에 새긴 비천인

문화재 답사를 시작한지 30년이 지났다. 그렇게 단순히 ‘좋다’ ‘아름답다’라고 생각하던 문화재들이 언제부터인가 마음속의 눈으로 읽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생명이 없던 돌과 쇠붙이 등에 온기가 느껴졌다. 조금씩 다가오는 아름다움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무엇이 달라졌는가는 모르지만, 마음으로 대화를 시작한 것이다.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비천인상

구례 화엄사 각황전 뒤편에 자리한 효대에는 국보 제35호인 사사자삼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그 삼층석탑의 기단에는 주악천인과 공양상이 한 면에 3구씩 모두 12명의 천인이 새겨져 있다. 신라 선덕여왕 14년인 645년 자장율사가 조성한 것으로 알려진 이 삼층석탑은, 부처님의 진신사리 73과가 봉안되어 있는 적멸보궁이기도 하다.

화엄사를 찾아가는 것은 바로 이 사사자삼층석탑에 새겨진 비천인 때문이다. 그 아름다움에 빠져 벌써 몇 번을 화엄사로 향했다. 절 안을 한 바퀴 돌아본 다음에는 효대에 올라 한참을 보내고는 한다. 기단에 새겨진 비천인의 모습. 표대를 날리며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며,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물을 두 손으로 받치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벅차다.


 


 

춤을 추고 있는 비천인상

단지 어떤 기대감이 아니다. 한참이나 그 천인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도 어느새 손목에 표대를 감고 하늘을 날기도 한다. 남들은 이렇게 삼층석탑 앞에 앉아 자리를 뜰 줄 모르는 나를 보고,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에 빠져 그곳을 떠나기가 싫을 뿐이다. 어찌 저 아름다움을 찌들어버린 세상에 견줄 것인가?

악기를 부는 천인의 표대는 바람에 날려 하늘로 오르고, 두 손에 공손이 받친 공양물은 부처의 덕을 칭송한다. 그 고마움에 화답이라도 하듯 춤을 추고 있는 천인들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하늘로 솟구쳐 오를 것만 같다. 어찌 돌에 새겨진 조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아름다움을 글로 표현하려는 것이 바보스러움이다. 그 아름다움에 빠져 들로 산으로 돌아다니는 발길. 어찌 보면 나도 천인이 되고 싶은가 보다.

공양물을 올리고 있는 천인상

 

발굴자료 등 알릴 수 있는 전시공간 필요해

 

수원시 향토유적 제8호는 수원시 팔달구 화서동 688-4에 소재한다. 화서2동 주민센터 바로 앞에 자리하고 있는 꽃뫼 제사유적지는 수원시가 문화재 지정을 받지 못했지만 보호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인정되기 때문에 향토유적으로 지정한 것이다. 각 지자체마다 지역의 비지정 문화재 중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을 보존하는 방법이 바로 향토유적 지정이다.

 

꽃뫼 제사유적지는 수원 서북부 서호천 근처의 낮은 구릉에 위치하고 있다. 이 유적지는 택지개발지구로 예정되면서 1995년 수원대학교 박물관의 지표조사를 통해 알려지게 되었으며 1997년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유적에 관한 성격이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제사유적지란 이곳이 아주 오래전부터 마을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곳의 발굴조사에서 발견된 유구로는 석축과 토광묘, 옹관묘 등이었고, 유물은 토기류와 백자, 청자, 분청사기 등 자기류, 청동숟가락, 상평통보, 쇠칼, 각종 제시용구 등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유적지는 초기 철기시대인 BC300~0로 철기 전기부터 조선조까지 제사를 지냈던 흔적으로 보인다고 한다.

 

9일 오후 화서2동 주민센터 앞에 있는 꽃뫼 제사유적지를 찾아갔다. 쌀쌀한 날씨지만 이곳에서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 궁금했기 때문이다. 제사유적지임을 알리는 안내판 뒤로 낮은 구릉이 있고, 그 중심으로 오르는 비탈에 펜스가 쳐있다. 유적지치고는 상당히 좁은 면적이다.

 

 

낮은 구릉에 자리한 꽃뫼 제사유적지

 

유적지로 지정해 펜스를 쳐 놓은 곳을 한 바퀴 돌아본다. 이곳이 초기 철기시대의 제시유적지라고 하면 인근에 마을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예전에 마을의 형성에는 반드시 물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앞으로 흐르는 서호천을 끼고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발견이 되었다는 안내판 하나만 있을 뿐 그 어느 것도 찾을 수 없다.

 

구릉 중심에는 커다란 참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그 줄기 안에 누군가 보도블록을 끼어 놓았다. 도대체 나무에 왜 이렇게 몹쓸 짓을 한 것일까? 철책 안까지 들어가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을 치우지 않고 방치했다는 것은 이곳을 향토유적으로 지정만 해놓았지 아무도 관리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초기철기시대는 원삼국시대로 서기전 100년경부터 서기 300년경까지의 약 400년간의 기간을 이른다. 이 시대는 서기전 100년경 한반도 북부 및 중국 동북지방 일원에서 고대국가 고구려가 일어나고 한반도 서북부에 낙랑군이 설치된 시기이다. 남부에서 도구용 이 시기에 청동기가 소멸하고 철기가 본격 생산되는 가운데 삼한 소국들이 성립되는 시기였다.

 

이 시기에 나타나는 문화적 특징으로는 청동기의 실용성 소멸과 철기생산의 보급 및 확대, 농경(벼농사)의 발전, 지석묘의 소멸과 석곽묘의 발달 등이다. 이 시기는 한반도에 원삼국이 삼국시대로 본격적으로 변화하는 시기를 말하며 문물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고 마을의 구심점이 되는 제의가 이루어지는 시기이다.

 

 

제사유적지라고 알릴만한 자료 없어

 

과거 민족은 농사가 시작되기 전과 농사를 마친 후 하늘에 감사하는 의식을 가졌다. 흔히 맞이굿이라고 부르는 이 제사는 온 마을의 사람들이 모여 3일간 주야로 쉬지 않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음식을 나누는 답지저앙 수족상응의 형태를 즐겼다고 한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三國志 魏志 東夷傳) 고구려편에 以十月祭天, 國中大會, 名曰東盟(시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국중대회를 여는데, 이를 '동맹'이라고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이 시대의 고구려의 동맹이나 예의 무천, 부여의 영고 등은 모두 하늘에 감사하며 사람들이 어울려 춤추고 즐겼다는 것이다.

 

이곳 꽃뫼 제사유적지가 당시 하늘에 감사하던 제를 지내던 곳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이곳에서 발굴된 것들을 사진자료나마 보여줄 수 있는 안내판이 마련되어야 한다. 어떤 것들이 발굴당시 발견되었는지 알 수 있는 자료가 없다보니 단지 이런 것들이 발견되었고 이곳이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다는 것 외에는 알 길이 없다.

 

초기철기시대부터 조선조까지 제사가 이루어졌다는 꽃뫼 제사유적지.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 등을 진열해 놓을 수 있는 작은 전시관 하나라도 마련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단순히 제시유적지라는 소개만으로는 이곳이 문화재적 가치가 중요한 곳임을 알리기 부족하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을 이곳이 사람들이 살던 군락지임을 알리는 제사유적지의 가치는 상당하기 때문이다.

 

등록문화재 제697호인 구 소화초등학교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大韓民國 登錄文化財)는 문화재청장이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지정문화재가 아닌 문화재 중에서 보존과 활용을 위한 조치가 특별히 필요하다고 느껴 문화재로 지정 등록한 문화재를 말한다. 등록문화재는 일제 강점기 이후 근대에 생성·건축된 유물 및 유적이 중점적으로 등재되어 있다.

 

우리 수원에는 모두 6점의 등록문화재가 있다. 등록문화재 제597호인 팔달구 교동 741에 소재한 구 수원문화원 건물과, 등록문화재 제598호로 지정되어 있는 팔달구 매산로 119(교동, 가족여성회관)에 소재한 구 수원시청사, 등록문화재 제688호인 팔달구 효원로 1(매산로3, 경기도청)에 소재한 경기도청사 구관, 그리고 등록문화재 제689호인 팔달구 고화로130번길 21(화서동, 경기도청어린이집)에 소재한 경기도지사 구 관사이다.

 

 

이 외에 등록문화재 제697호로 20171023일자로 지정된 팔달구 정조로 842(북수동, 북수동 천주교회)에 소재한 수원 구 소화(小花)초등학교와 등록문화재 제698호로 같은 날 지정된 팔달구 향교로 130(교동)에 소재한 수원 구 부국원 건물 등이다. 결국 수원시의 등록문화재 6점은 모두 팔달구에 자리하고 있다.

 

이렇듯 등록문화재가 팔달구에 소재하고 있는 이유는 현 팔달구가 과거 수원화성 팔달문을 중심으로 모든 상권 등이 밀집되어 있었고, 이곳에 일제의 금융기관 등과 관청 등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현 수원시에 지정된 등록문화재들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에 축조된 건물들이기 때문이다.

 

 

현 북수원성당 뽈리화랑이 등록문화재

 

아마 북수원성당 입구에 구 소화초등학교 건물이 등록문화재로 20171023일자로 지정되었다는 안내 현수막이 붙어있지 않다고 하면 이 성당 안에 문화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문화재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그저 무심히 화랑건물만 보고 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성당 정문을 들어서면 옛날 건물 한 채가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건물의 외곽을 돌로 마감처리 한 이 건물이 바로 1954년 미국 가톨릭복지협의회가 수원에 최초로 건립한 초등학교 교사로 축조한 구 소화초등학교 건물이다. 지금은 북수원성당에서 뽈리화랑이라는 전시공간으로 이용하고 있다.

 

3일 찾아간 북수원성당. 이 건물은 과거 북수원성당의 부속학교로서 성당 경내의 북쪽에 남향으로 길게 자리한다. 자를 이루면서 본 건물과 교육관이 이어져 있는 이 건물은 학교를 지을 때가 한국전쟁 중이라 자재가 부족하여 외벽을 돌로 쌓고 내부는 주변의 목재를 조달해서 지었다고 한다.

 

 

내부를 자세히 살필 수 없어 아쉽게 돌아서다

 

구 소화초등학교 건물은 그 전에 이곳에서 전시를 할 대 한 두 번 들린 적이 있다. 그 당시는 등록문화재로 지정이 되기 전이라 그렇게 눈여겨보지 않았던 건물이다. 3일 찾아간 뽈리화랑 1층 입구는 문이 닫혀있다. 2층 박공지붕으로 지어진 건물은 길게(긴 면 30,550m, 짧은 면 9,200m) 조성된 건물로 각 층에 3개 교실이 나란히 이어져 총 6개 교실이 있으며 편복도 형식이고 복도 한쪽 끝에 계단실이 있는 전형적인 학교 건물이다.

 

안을 들어갈 수 없어 건물의 외곽을 둘러보다보니 한편에 돌 가운데 구멍이 나 있는 석물 하나가 보인다. ‘수원성지 돌형구라는 설명이 붙어있는 이 돌은 수원화성 안 골동품 가게에서 발견이 된 것으로 정조대왕 시후 천주교 대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수원화성 안으로 연행된 천주교인들을 심문하던 돌형구라는 것이다.

 

이 구멍이 난 돌을 이용해 어떻게 천주교인들을 고문했는지는 자세한 설명이 없어 알 수 없지만 당시 각종 형구를 이용해 천주교도들을 박해했기 때문에 이 돌형구로 인해 많은 천주교인들이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우리 문화재를 찾아갔다가 만난 돌형구 한 점. 이런 돌 한 점이라도 우리역사의 한 부분을 알려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 또한 소중한 문화적 자원이란 생각이다. 다음에 구 소화초등학교를 찾아가면 그 안까지 꼼꼼하게 살펴보아야겠다. 우리 문화재는 소중하기 때문이다.

 

용인시 이동면 서리 백자요지까지 찾아가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상갈로 6(상갈동)에 소재한 경기도박물관. 한 때는 이곳을 매주 드나들던 때도 있었다. 모 무형문화재 단체를 관리하면서 이곳 공연마당에서 매주 공연을 이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랬던 곳을 일부러 찾아간다는 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은 그만큼 사는 것이 바쁜지, 아니면 문화재에 대한 열망이 식어서인지 모르겠다.

 

지난 22일 경기도박물관을 찾았지만 아침부터 비가 내린 날이라 카메라를 소지하고 찾아가질 못했다. 날이 궂으면 민감하게 반응하는 카메라 때문에 아무래도 행동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6일 다시 찾아간 경기도박물관. 이곳을 찾아가면 평소 내가 좋아하던 장승이며 탑비, 고인돌, 초상 등 많은 문화유적의 진본 및 모형을 만날 수 있어 즐겁다.

 

하지만 이번에 경기도박물관은 찾은 것은 용인시 서리 백자요지에 관한 내용을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물론 나는 도자에 대해서 잘 모른다. 하지만 주변에 많은 지인들이 도공들이고 그들에게 들은 것들이 있기 때문에 공부도 할 겸 경기도박물관과 용인시 이동면 중덕로7(서리 산23-1)에 소재한 사적 제329호 용인서리 백자가마요지를 돌아보기 위해서이다.

 

 

광교산 창성사지가 가마터를 돌아보게 된 이유

 

예전에는 곳곳에 가마터가 있었다. 사찰 등에서는 사찰 한편에 가마를 만들어 그곳에서 직접 기와 등을 구워내 절을 짓는데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동안 여기저기 다니면서 꽤 많은 가마터를 만나고 다녔지만 그 중 가장 큰 가마터가 바로 용인시 이동면에 소재한 서리백자요지라는 것이다.

 

사실 가마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86년 수원시 향토유적 제4호로 지정됐다가 31년 만에 경기도 기념물로 승격된 장안구 상광교동 산41에 소재한 창성사지를 돌이보고 난 후부터이다. 이곳을 찾아갔을 때 유난히 많은 와편과 도자조각들을 보면서이다. 수원시는 한신대박물관과 함께 2014년부터 2016년까지 창성사지 발굴조사를 했으며 지난해 12월 수원화성박물관에서 고고학과 문헌을 통해 본 수원 창성사지의 역사적 가치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한 바 있다. 이 자리에서 연구원들은 고려말 진각국사 천희의 탑비가 있었던 터를 확인했고 중심 건물과 부속 건물터, 고급 청자와 백자 등 많은 유물을 발굴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더욱 경기도박물관 2층 전시실에서 만난 서리백자요지의 모형을 보고나서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는 직접 가마터를 돌아보고 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것이다. 서리가마는 벽돌로 된 가마와 진흙으로 지은 가마가 확인되었는데, 벽돌가마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밝혀진 것이고 진흙가마는 길이 83m의 대형가마로 출입구가 27개나 확인되었다고 한다.

 

더욱 이 가마터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가마터로는 가장 큰 대형가마이고 서리 백자요지를 찾아가면 옛 가마모형을 알아볼 수 있다는 말에 한 번에 돌아보리라 미음 먹고 길을 나선 것이다. 날은 바람이 불고 쌀쌀한데 가마터를 찾아가는 길도 쉽지 않았다. 몇 번이고 남의 집 울타리 안으로 들어갔다가 지청구를 듣기도 했다.

 

 

광교산에도 가마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용인은 일찍부터 요업이 발달한 지역으로 <세종실록지리지>에 영인에 도기소와 자기소가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려시대 전기부터 조선시대 말기까지의 가마터 72기가 용인시 전역에 걸쳐 분포하고 있었으며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에는 19개소의 가마터가 분포하고 있는데 서리일대의 중덕 가마터와 호암미술관 근처의 상반 가마터 등 여러 곳의 가마터가 발견되어 이 지역이 고려시대 백자 생산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이 가마터의 출토물로는 백자가 주종을 이루고 있지만 초기의 해무리굽 청자완층이 발견되어 이곳에서 고려청자의 생산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가마터의 발견으로 인해 고려청자가 10세기 후반에 생산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 가마터가 놓였던 자리에는 많은 자기편들이 보인다.

 

우리나라 청자와 백자를 주도했던 용인시. 하지만 현재 용인은 우리 도자사에 기록될 만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세계도자축제 등에서는 빠져있어 안타깝다. 수원 창성사지에서도 많은 고급 청자와 백자 등이 발굴되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89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하는 이곳 광교산 어디엔가 가마터가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내년 날이 풀리기를 기다려 광교산 일대를 돌며 가마터를 한 번 찾아보아야겠다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