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 정수암 산신각 점안식이 열리던 날

 

4월 초파일은 부처님 탄생일이다. 부처님 오신 날또는 석가탄신일(釋迦誕辰日)’이라고 하는 초파일은 불교 연중행사 가운데 가장 큰 명절로 여기며, 이 날은 기념법회를 비롯하여 연등놀이, 관등놀이, 방생, 탑돌이 등 각종 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초파일은 각 절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날이다.

 

각 사찰에서는 법당과 경내, 거리에 등을 내달고 경내에 수많은 등을 밝히는 등 공양 행사를 이어 온다. 이날은 육법공양을 행하는데 '육법(六法)'이란 깨달음과 관련된 6가지 공양물로 정신적인 상징을 의미하는 것이다. 육법공양물은 쌀, , , , 과일, 차 등으로 이러한 공양물을 부처께 바치는 의식이다.

 

4월 초파일에 다는 연등은 그 의미가 깊고 오래되었다. 4월 초파일 연등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고려사에서 볼 수 있는데, 고려 의종 때 백선연이 48일에 점등했다고 적고 있다. 당시에는 초파일 연등을 열면 3일 낮과 밤 동안 등을 켜놓고 미륵보살회를 행했다고 한다. 이러한 연등회는 조선 태종 15년인 1415년 이후로는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초파일 법회를 위해 찾아간 고성 정수암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산학리에 소재한 정수암(주지 진관스님)을 찾았다. 벌써 다녀온 지가 며칠이나 지났다. 지난 1일 찾아갔다가 3일에 돌아왔으니 4일이나 지난 셈이다. 다녀오고 나서 수원 화성연극제며 많은 행사로 인해 제때 글을 쓰지 못하고 말았다. 무슨 일이나 바로 글을 써야 감이 잡히는데, 단 하루라도 늦어지면 처음에 들었던 생각이 무뎌지기도 한다.

 

정수암을 찾아간 것은 지난해 조성한 마애불 때문이다. 지난해 정수암을 찾아가 아침에 문을 열고 나오다가 법당 옆 바위에 마애불을 보았다. 분명 바위였는데 그 바위에 마애불을 조성한 것이다. 물론 착각이다. 하지만 순간 저 바위에 마애불을 조성하라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어, 몇 사람과 의논 끝에 마애불을 조성한 것이다.

 

지난 해 마애불을 조성하면서 정수암은 큰 불사를 했다. 절 입구에 일광보살과 원광보살 상을 마련해 불이문(不二門)을 삼고, 인법당 뒤편에 큰 바위를 세워 산신각을 조성했다. 원래 계획은 마애불과 신신각을 부조로 각인하기로 마음먹었지만, 조성을 맡은 여주시에 거주하는 김원주 작가의 일정으로 인해 산신각은 부조로 조성하지 못하고 그림을 그렸다.

 

 

마을 여인들이 지켜 낸 산신각바위

 

원래 저 산신을 그린 바위가 지금보다 더 컸다고 하네요. 그런데 돌이 워낙 좋으니까 조경업자가 저 바위를 산 후 쪼개서 가져가려고 했나 봐요. 바위를 쪼갠다는 소식을 들은 마을 분들이 막았데요. 저 바위가 예전에는 마을 여인들이 위하는 바위였다는 거예요

 

정수암 주지 진관스님이 전하는 이야기로는 그 바위에 치성을 드리고 난 후 아들을 낳은 여인이 있어 마을에서 신령한 바위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런 바위를 쪼개 가져간다는 소식에 여인들이 반대를 하고 나섰다고 한다. 바위는 일부 쪼개서 가져갔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세운 면의 높이가 2m가 넘는다.

 

그 바위가 마을에서 위하는 산신바위예요. 그런데 스님이 주지로 오시고 나서 그 비위에 산신도 그림을 저렇게 멋지게 그려놓아 이제 제 모습을 찾은 것 같아 여간 좋은 것이 아닙니다

 

초파일에 절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공양할 비빔밥에 들어갈 나물을 다듬고 있던 신도 한 분이 하는 말이다. 정수암 신도들은 연세가 드신 분들이 많은 것도 특징이다. 초파일이 되면 고성군 산학리만 아니라 속초와 서울, 구리, 남양주, 수원, 전주 등 먼 곳에 거주하는 신도들까지 모두 찾아오기 때문에 100인분의 비빔밥을 준비한단다. 그동안 정수암은 초파일이라고 해도 50여명의 신도들이 찾아왔을 뿐이다.

 

그래도 올해는 연등을 100개 넘게 달았어요. 초파일에 찾아올 순 없어도 많은 분들이 등 값을 보내주셨거든요

 

모든 이들이 마음을 합한 산신각 점안식

 

오늘 부처님 오신 날에 다들 예불을 마치고 공양을 하셔야하는데 신신각 점안식까지 다 마치고나서 공양을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다들 괜찮으세요?“

 

초파일 예불을 마치고난 뒤 신도들이게 시간이 조금 걸려도 신신각 점안식을 마친 후 공양을 해도 되겠느냐고 묻자, 다들 그렇게 하겠다고 한다. 이날 정수암을 찾아 온 신도들은 어림잡아 70여명, 그 모든 사람들이 산신도가 그려진 바위 앞에 나아가 점안식에 동참을 한다. 연세가 드신 분들은, 그동안 산신바위를 대우하지 못해 마음이 불편했는데 정말 다행이라고 한다. 이제 산신바위가 제 모습을 찾았다는 것이다.

 

정수암 주지 진관스님의 인도로 점안식에 참석한 신도들은 모두 손을 오색실을 잡고 산신바위를 에워쌓았다. 점안식 의식을 마치고 난 뒤 한 신도가 하는 말에 공감을 한다.

 

부처님이 어디 큰 절에만 계시겠어요. 난 우리 절에 참 부처님이 계시다고 생각해요. 요즘 종교가 제 몫을 못하고 있는데, 이 작은 정수암은 날마다 작은 불사를 계속하고 있잖아요. 이 산신바위는 정말 영험한 바위예요. 이 금강산 자락에 자리한 절도 그렇고 저 바위도 그렇고, 지난해 조성한 마애불도 그렇고. 그런 것을 보면 부처님이 정말 이 절에 계시다는 생각이 들어요. 신도들이 하나같이 이웃을 먼저 생각하고 있으니 이 절에 부처님이 계신것이죠

 

종교는 사람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어야 한다. “신도들에게는 어떠한 부담도 주지 않겠다는 정수암 주지 진관스님. “인연이 닿으면 누군가 불사를 하러 오지 않겠느냐며 웃는다. 강원도 고성군 작은 암자 정수암은 늘 그렇게 좋은 인연으로 만나는 사람들이 들리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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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시 도곡리 석불좌상을 찾아가다

 

문화재란 있던 그 자리에 소재한다. 어느 것은 수천 년을 자리 한 번 옮기지 않고 지키고 있는 것들도 있다. 문화재가 조성 될 때는 역사적으로나 사회성, 혹은 지리적 여건 등 여러 가지를 종합해 조성한다. 하기에 문화재는 제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 가장 빛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수없이 많은 문화재들이 제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옮겨져 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문화재를 제대로 보존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문화재가 제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옮겨진 사연이야 다양하다. 하지만 꼭 이런저런 이유를 대가며 문화재를 딴 곳으로 옮겨야만 했을까? 허울 좋게 보존이라는 구실로 자리를 옮긴 많은 문화재들을 정작 조성한 자리가 아닌 딴 곳에서 찾아보아야 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우리가 갖는 슬픔인지도 모른다.

 

 

문화재 답사를 한지 30년 세월이 훌쩍 지났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문화재를 답사라는 길에서 만났다. 하지만 그런 문화재 답사라는 것이, 시간이 남고 돈이 많아 하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는 문화재 답사가 숙명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젊은시절, 우연히 만나게 된 문화재 한 점으로 인해 30년이 넘는 세월을 전국을 걸으며 문화재를 찾아다녔다.

 

이제 힘도 부치고 시간적 여유도 없다. 어찌보면 문화재답사를 젊은시절 객기로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만난 많은 문화재들, 나에게는 누군가 지켜내야 할 우리의 정신적인 유산이라는 생각에서이다. 아무리 경제가 발전하고 수많은 종류의 문화예술 활동을 한다고 하지만, 소리없이 그 자리를 오랜시간 지켜내고 있는 문화재를 등한시한 민족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왜 문화재를 지켜내야 하는 것인지 답이 된다.

 

 

알아보기 힘든 작은 안내판, 좀 더 크게 했더라면

 

지난 24일 오후, 여주시 금사면 도곡리 산 7에 소재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0호인 여주 도곡리 석불좌상을 찾아갔다. 문화재는 지나는 길에 몇 번이고 들려보고는 한다. 혹 그동안 훼손이 된 곳은 없는지, 아니면 문화재 주변에 무슨 이상은 없는지, 그런 것들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문화재를 지나는 길에 다시 찾아보는 것은 몇 년이 지난 뒤에 찾아간 문화재 한 점이 심하게 훼손되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도곡리 석불좌상은 마을길에서 산쪽으로 소로를 지나야 만날 수 있다. 몇 년 전인가 도곡리 석불좌상을 찾아갔을 때, 누군가 버리고 간 각종 제물과 기물 등으로 지저분하게 어지럽혀져 있는 모습을 보았다. 이번에도 또 누군가 주변을 훼손한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된다. 그런데 한 번 간 길은 절대 잊은 적이 없는 나로서도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길을 찾지 못한 것이다. 주변이 변해도 너무 변했다. 석불좌상을 찾아가는 진입로에는 그동안 볼 수 없었던 펜션들이 여기저기 길 양편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문화재를 찾아가는 길 안내표지가 길 한편에 조그맣게 서 있기 때문에 산을 오르는 길을 찾기조차 힘들다. 글씨라도 좀 큼지막하게 세웠거나 제대로 된 안내판을 길이 변하는 부분에 세웠다면 한결 수월했을 텐데. 아직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한 관계기관들의 인식은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석불좌상 앞에 무릎을 꿇다

 

몇 번이고 길을 찾아 헤매다가 찾은 작은 안내판 하나. 주변 환경이 변해 길을 찾기조차 어려웠지만 도곡리 석불좌상이 소재한 전각이 산 밑에 보인다. 진입로는 시멘트포장을 해 말끔히 정리하였다. 지난 번 찾아왔을 때보다 주변은 많이 정리가 되고 깨끗하다. 그것 하나만으로 안내판이 적다고 투덜대던 마음이 싹 가신다.

 

석불좌상을 모신 전각은 맞배지붕 기와로 조성하였다. 앞에는 배례석인 듯 넓적한 돌도 보인다. 무엇을 망설이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다. 이 나라에 서원할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래도 우선은 나라가 평안할 것을 먼저 서원한다. 뒤죽박죽이 되고 몇 갈래로 찢어진 나라. 온전히 하나로 봉합될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서원한다.

 

여주시 도곡리 석불좌상은 통일신라 말기작품으로 추정한다. 원적산 자락에 북동쪽을 향해 팔각대좌 위에 자리한 석불좌상. 결가부좌를 하고 있는 이 석불좌상은 전체적으로 알맞은 비례를 보이고 있다. 이곳에서 20m 정도 떨어진 북쪽에 절터가 있다는 점으로 보면 이 석불좌상이 제 자리에서 멀리 벗어난 것은 아니란 생각이다.

 

 

불상은 육계가 많이 마모가 되었지만 삼도는 뚜렷하다. 이 석불좌상은 특이한 수인을 하고 있다. 오른손은 가슴 부근에서 약지와 새끼손가락 두 개를 펴고, 왼손은 결가부좌한 다리위에 손바닥을 위로 하고 있다. 법의는 모두 통견으로 처리했다. 석불좌상을 모신 팔각대좌는 좌상에 비해 작은 편이라 조금은 불안해 보이기도 한다.

 

석불좌상 앞에 머리를 숙여 서원을 하고 난 뒤 석불좌상 뒤편으로 돌아가니 이상한 것이 보인다. 정기계측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부구간에 발생한 이격 및 균열현상에 대한 변화추이와 진행을 알아보기 위함이라는 안내문구가 있다. 천여 년이 훌쩍 지난 세월을 많은 세인들의 마음속 염원을 받아들이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석불좌상.

 

그런 석불좌상이 이격과 균열현상을 보이고 있는지를 알아본다는 안내에 마음이 편치않다. 얼마나 많은 우리의 문화재가 주변환경에 의해 수명을 달리하고 있는 것일까? 문화재답사를 계속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누군가 이 소중한 문화유산을 둘러보고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다. 단지 나도 그 중 한명일 뿐이고,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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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보름 전에 각 마을마다 제를 지내던 신표

 

우리민족은 음력 정월이나 10월 상달이 되면 마을마다 반드시 하고 넘어가는 의식이 있다. 바로 대동의 안녕과 가가호호의 안택을 기원하는 마을제사를 지낸 것이다. 장승제, 성황제, 거리제 등은 모두 마을의 안녕과 풍농과 풍어, 그리고 가내의 안과태평을 기원하던 우리민족의 공동체 의식이었다.

 

4일 수원박물관에서 입춘을 맞이해 시민들에게 춘축을 선사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수원박물관을 찾았다. 입구에서 차를 내려 박물관으로 오르다 보면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이 돌을 쌓은 누석탑인 성황당이다. 그리고 그 뒤편에는 5기의 목장승이 눈을 부라리고 서 있다. 부라린 눈이 아무리 보아도 무섭기는커녕 오히려 정감이 있는 모습이다.

 

그동안 수원박물관은 내 집처럼 드나들었지만 이렇게 성황당과 장승이 서 있었음에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전국을 다니면서 워낙 많은 성황당과 장승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입춘이라서 그런가? 푹한 날씨에도 미쳐 눈이 녹지 않은 잔디 위에 서 있는 탑과 성황당을 그냥 지나치기에는 정유년 벽두부터 너무 소란스럽다는 생각이다.

 

 

돌로 쌓은 성황당, 전국 곳곳에서 만날 수 있어

 

돌을 쌓아올려 누석탑으로 조성한 성황당은 가장 보편적인 형태이다. 성황당은 마을의 안녕과 길손의 안녕을 위해 길거리나 마을의 입구 등에 세우는데 지나는 길에 돌을 이곳에 올려놓고 안전한 행로를 기원하기도 한다. 전국을 여행하다보면 지금까지 가장 많이 남아있는 것이 바로 상황당과 장승이다.

 

성황당은 건물로 축조했을 때는 명칭이 달라진다. 성황당을 당산(堂山)’ 혹은 서낭이라고도 부르는데 경기도와 충청도 지방에서는 산신당· 산제당 혹은 서낭당이라고 부른다. 영남과 호남 지방에서는 주로 당산이라고 한다. 성황당은 돌탑이나 신목, 혹은 조그마한 집을 지어서 신표로 삼는다. 집을 지었을 때는 그 안에 당신(堂神)을 상징하는 신표를 놓거나, ‘성황지신이란 위패를 모셔 놓는다.

 

당산은 내륙지방과 해안지방의 부르는 명칭 또한 다르다. 내륙에서는 신당, 당집, 당산 등으로 부르지만, 해안이나 도서지방에서는 대개 용신당이라고 부른다. 이 당산에서는 매년 정월 초나 보름, 혹은 음력 10월 중에 길일을 택해 마을 주민들이 정성을 드린다. 당산제를 지낼 때는 집집마다 추렴을 하여 제물을 마련하는데, 이런 이유는 마을 사람 모두가 똑 같이 복을 받게 하기 위함이다.

 

 

이빨 드러낸 장승군, 오히려 반갑소

 

수원박물관 초입에 서 있는 5기의 목장승. 장승은 나무나 돌로 만들어 세운다. 나무를 깎아 세우면 목장승이라 하고, 돌을 다듬어 세우면 석장승이라 한다. 장승만 세우는 경우도 있지만, 솟대, 돌무더기, 서낭당, 신목, 선돌등과 함께 동제의 복합적인 형태로 표현이 되기도 한다. 장승은 그만큼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장승의 기원에 대한 정설은 아직 명확하지 않다. 대개는 고대의 남근숭배설(男根崇拜說)’과 사찰이나 토지의 경계표지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등이 있기도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정확한 것은 아니다. 일설에는 솟대나 선돌, 서낭당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등도 전해진다. 일부 장승 중에는 거리를 알려주는 로표장승도 존재한다.

 

 

목장승의 경우에는 복판에 글을 써서 표시하는데 대개는 천하대장군이나 지하대장군, 혹은 지하여장군, 축귀대장군 등으로 표현한다. 수원박물관 입구에 서 있는 장승은 모두 축귀대장군(逐鬼大將軍)’으로 앞에 방위표시를 하였다. 그 중에는 여장군도 서 있어 나라를 지키거나 마을을 지키는 데는 남녀구별이 없음을 알려준다.

 

새해가 시작된다는 입춘. 수원박물관 앞에서 만난 성황당과 목장승 앞에서서 고개를 숙인다. “정유년 한 해 이 나라가 안정을 되찾고 서민들이 마음 편하게 두 다리 쭉 펴고 사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길 바란다는 간절한 마음을 전한다. 모처럼 성황당과 장승 앞에 서 머리를 숙였으니 올해 꼭 이루어질 것이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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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시 팔달구 우만동 248번지에 소재한 비구니의 요람 봉녕사. 봉녕사는 비구니 승가대가 있는 절이다. 봉녕사의 용화각에는 고려시대의 석불로 보이는 석조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이 석조삼존불은 대웅보전 뒤편 언덕에서 건물을 지으려고 터를 닦던 도중에 출토되었다고 한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1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석조삼존불상은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보살입상을 배치하고 있다. 불상과 연화대좌는 각각 하나의 석재로 구성이 되었는데 모래가 많이 섞인 화강암으로 조성을 하였다. 삼존불 모두가 뚜렷한 이목구비가 보이지 않는데 이는 오랜 시간 땅 속에 파묻혀 마모가 된 것으로 보인다.

 

 

마모가 심한 석조삼존불

 

삼존불의 중앙에 좌정하고 있는 본존불은 석조여래좌상으로 얼굴모습은 원만한 편이다. 그저 편안한 느낌을 받게 하는 본존불의 머리 부분은 파손되어 있고 눈, , 입 부분은 심하게 마모가 되어 희미하다. 법의는 왼쪽 어깨에만 걸치고 오른쪽 어깨가 노출된 우견편단으로, 법의의 주름도 상당히 도식화 되어있다.

 

오른손은 무릎에 놓고 왼손은 가슴에 대고 있는데 상당히 부자연스럽게 조각을 하였다. 석불의 밑을 받치고 있는 좌대인 연화대는 일석으로 2단으로 되어있으며 가운데가 잘록하고 아래 위가 넓게 조성하였다. 연화대 위편은 커다란 앙련을 조각하였는데 사이가 너무 벌어지게 잎이 조성되어 있어 매우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아래쪽 연화대에도 앙련이 흐릿하게 조성이 되어있으나 상당히 마모가 심하여 정확하지가 않다. 본존불은 전체적으로 비례가 맞지 않는 편이다. 얼굴은 네모나게 조성을 하였는데 양편의 귀는 어깨에 까지 늘어졌으며 목은 두꺼워 얼굴의 넓이와 목이 뚜렷하게 구별이 되지 않고 있다.

 

 

섬세한 연화문이 새겨져 있는 협시불

 

본존불의 좌우에 서 있는 협시불의 얼굴 형태는 원만한 편이나 각 부분은 마멸이 심하여 정확한 모습을 알아보기가 힘들다. 협시보살의 법의는 두 어깨를 모두 가린 통견으로 조성을 하였는데 조각 등은 섬세하지 못하다. 왼손은 가슴에 대고 오른손은 무릎 밑으로 내리고 있으며 원추형의 대좌에는 연화문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삼존불이 모두 평평한 느낌을 주는 영감 없는 조각 기법이나 각 부분의 형식과 표현 수법이 도식화 되어 있다는 점으로 보아 고려시대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삼존불 모두 전체적으로 표현기법 등이 동일해 한 사람의 장인에 의해서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삼존불 모두 정확한 형태를 알아보기는 어려운데 봉녕사에서도 대적광전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불자들이 찾아드는 곳이 바로 용화각이다.

 

용화각 안에 들어가 머리를 조아린다.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린다. 늘 새해가 되면 절 몇 곳을 빠트리지 않고 돌아보는 나이지만 그 중에서도 봉녕사는 반드시 들리는 곳 중 한곳이다. 삼존불을 모신 전각을 일러 용화각이라고 했던가? 용화세상은 종파도 없고 따로 다스릴 법도 필요치 않다고 한다. 즉 법 없는 세상을 일러 용화세상이라고 했다는데 난 이 용화각 안에 모셔진 석조삼존불 앞에 머리를 조아려 늘 그런 용화세상이 도래하기를 기원한다. 그 기원이 비록 이 생애에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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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군 법흥사를 찾아 적멸보궁에 오르다

 

강원도 영월군 무릉도원면 무릉법흥로 1352(법흥리)에 소재한 법흥사. 예전에는 영월군 수주면이 무릉도원면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경계가 뛰어난 이곳을 무릉도원면이라는 명칭으로 바꾼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만큼 뛰어난 경계를 자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8일 삼사순례 여정 두 번째로 찾아간 법흥사.

 

법흥사는 통일신라 말기 9산 선문 중 사자산문의 중심도량인 흥령선원지의 옛 터이다. 흥령선원은 자장율사가 창건했으며 도윤국사와 징효국사 때 산문이 크게 번성하였다. 신라 진성여왕 4년인 891년 병화로 소실된 것을 고려 혜종 1년인 944년에 중건하였으나 또 다시 소실되어 천년 세월을 그 명맥만 이어오다가 1902년 법흥사로 개칭되었다.

 

 

법흥사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과 보물 제612호인 징효대사 보인탑비, 강원도지정 유형문화재 제72호인 징효대사 부도,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73호인 법흥사 부도,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09호인 법흥사 석분 등이 자리하고 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셨다는 부도가 벽 너머로 보이는 적멸보궁은 법흥사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삼사순례 두 번째로 찾아간 법흥사. 버스로 무릉도원을 굽이굽이 돌아 찾아간 법흥시 주차장에는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버스 몇 대와 승용차 등이 자리하고 있다. 주차장에서 금강문을 지나 먼저 징효대사 보인탑비와 부도를 돌아본다. 보물인 징효대사 보인탑비는 고려 혜종 1년인 944년에 세운 것이다.

 

 

법흥사 적멸보궁에 오르다.

 

그동안 법흥사를 몇 번인가 찾았다. 지난번에 들렸을 때보다 또 달라진 경내를 둘러본 후 돌로 바닥을 깐 길을 따라 적멸보궁으로 오른다. 그리 먼 거리는 아니지만 은근히 비탈진 길을 걸어 오르려니 이마에 땀이 흐른다. 길이 가팔라지는 곳에 마침 우물이 있다. 시원한 물로 갈증을 풀고 흙길로 조성된 산길을 따라 걷는다.

 

절 입구에서부터 들리는 정근은 화엄성중을 읊고 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셨으면 당연히 석가모니불로 정근을 해야지만 왜 화엄성중일까? 그렇게 절을 찾아다녔지만 아직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적멸보궁 앞에 도착하니 산비탈을 바라보고 축조된 적멸보궁은 날이 차서인가 어간문을 닫아놓고 좌우로 출입을 하고 있다.

 

 

적멸보궁 안에 들어가 예를 올려야겠지만 마음이 바쁘다. 보궁 뒤편에 있는 부도와 석분을 보려면 보궁과 석분 사이에 공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보궁 벽을 돌아 바로 부도 앞으로 가 두 손을 모은다. 더 가까이에서 부처님 진신사리의 기운을 느끼고 싶어서이다. 한낱 부족한 인간이라는 것이 이런데서 나타나는 것일까?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는다.

 

제발 이 어지러운 나라의 혼돈이 하루 빨리 끝날 수 있도록 기원합니다라는 간단한 발언을 쉴 새 없이 반복하면서 고개를 들지 못한다.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고 있는데 서민들의 삶이 막막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딜가나 못 살겠다는 소리만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인가 휴일을 이용해 적멸보궁을 찾아 온 사람들도 요즈음 들어 더 많아진 것 같다는 이야기다. 누구나 같은 생각일 것이다. 하루 빨리 이 국정농단의 어지러움이 끝나길 바라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적멸보궁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돌무덤과 부도

 

법흥사는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 중의 한 곳으로 대표적인 불교성지로 자리를 잡고 있다. 신라 때 자장율사가 당나라 청량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석가모니불의 진신사리와 가사를 전수받아 643년에 귀국하여 오대산 상원사, 태백산 정암사, 영축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 등에 사리를 봉안하고 마지막으로 이 절을 창건하여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고 한다.

 

당시 사명을 흥녕사(興寧寺)’라 하였다고 전하는데 적멸보궁 뒤에는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3호인 영월 법흥사 부도와 유형문화재 재109호인 토굴인 석분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석분은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도를 닦던 곳이라고 전하지만 그 형태로 보면 고려 때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석분은 낮은 언덕으로부터 내려오는 완만한 경사를 이용하여 흙으로 위를 덮고 봉토를 올리기 위하여 토굴 주변에 석축을 올렸다. 내부구조로 보면 고려시대에 축조 된 것으로 추정되며 내부의 높이는 160, 깊이 150, 너비 190이다. 석분 안을 들어갈 수 없어 실내의 형태를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지만 돌방 뒤편에는 고승의 유골을 모신 돌널이 있다고 한다.

 

부도탑 앞에는 누군가 촛불을 켜 놓았다. 우리민족에게 촛불이란 남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불을 밝히는 목적만아 아니라 촛불을 켜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간구를 하는 것이다. 하기에 촛불이란 바로 이루고자 하는 서원은 담아 신에게 도움을 받기를 서원하는 것이다. 전국에서 밝힌 수많은 촛불의 염원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도 그 때문이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5대 보궁. 그 중 한 곳인 영월군 무릉도원면 법흥사. 하루 만에 세 곳을 돌아야하는 바쁜 일정으로 인해 오래도록 손을 모을 수는 없지만 짧은 시간에 정신을 집중하여 간절함을 띄워 보낸다. “2017년 이 나라에 부디 평안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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