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보름 전에 각 마을마다 제를 지내던 신표

 

우리민족은 음력 정월이나 10월 상달이 되면 마을마다 반드시 하고 넘어가는 의식이 있다. 바로 대동의 안녕과 가가호호의 안택을 기원하는 마을제사를 지낸 것이다. 장승제, 성황제, 거리제 등은 모두 마을의 안녕과 풍농과 풍어, 그리고 가내의 안과태평을 기원하던 우리민족의 공동체 의식이었다.

 

4일 수원박물관에서 입춘을 맞이해 시민들에게 춘축을 선사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수원박물관을 찾았다. 입구에서 차를 내려 박물관으로 오르다 보면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이 돌을 쌓은 누석탑인 성황당이다. 그리고 그 뒤편에는 5기의 목장승이 눈을 부라리고 서 있다. 부라린 눈이 아무리 보아도 무섭기는커녕 오히려 정감이 있는 모습이다.

 

그동안 수원박물관은 내 집처럼 드나들었지만 이렇게 성황당과 장승이 서 있었음에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전국을 다니면서 워낙 많은 성황당과 장승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입춘이라서 그런가? 푹한 날씨에도 미쳐 눈이 녹지 않은 잔디 위에 서 있는 탑과 성황당을 그냥 지나치기에는 정유년 벽두부터 너무 소란스럽다는 생각이다.

 

 

돌로 쌓은 성황당, 전국 곳곳에서 만날 수 있어

 

돌을 쌓아올려 누석탑으로 조성한 성황당은 가장 보편적인 형태이다. 성황당은 마을의 안녕과 길손의 안녕을 위해 길거리나 마을의 입구 등에 세우는데 지나는 길에 돌을 이곳에 올려놓고 안전한 행로를 기원하기도 한다. 전국을 여행하다보면 지금까지 가장 많이 남아있는 것이 바로 상황당과 장승이다.

 

성황당은 건물로 축조했을 때는 명칭이 달라진다. 성황당을 당산(堂山)’ 혹은 서낭이라고도 부르는데 경기도와 충청도 지방에서는 산신당· 산제당 혹은 서낭당이라고 부른다. 영남과 호남 지방에서는 주로 당산이라고 한다. 성황당은 돌탑이나 신목, 혹은 조그마한 집을 지어서 신표로 삼는다. 집을 지었을 때는 그 안에 당신(堂神)을 상징하는 신표를 놓거나, ‘성황지신이란 위패를 모셔 놓는다.

 

당산은 내륙지방과 해안지방의 부르는 명칭 또한 다르다. 내륙에서는 신당, 당집, 당산 등으로 부르지만, 해안이나 도서지방에서는 대개 용신당이라고 부른다. 이 당산에서는 매년 정월 초나 보름, 혹은 음력 10월 중에 길일을 택해 마을 주민들이 정성을 드린다. 당산제를 지낼 때는 집집마다 추렴을 하여 제물을 마련하는데, 이런 이유는 마을 사람 모두가 똑 같이 복을 받게 하기 위함이다.

 

 

이빨 드러낸 장승군, 오히려 반갑소

 

수원박물관 초입에 서 있는 5기의 목장승. 장승은 나무나 돌로 만들어 세운다. 나무를 깎아 세우면 목장승이라 하고, 돌을 다듬어 세우면 석장승이라 한다. 장승만 세우는 경우도 있지만, 솟대, 돌무더기, 서낭당, 신목, 선돌등과 함께 동제의 복합적인 형태로 표현이 되기도 한다. 장승은 그만큼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장승의 기원에 대한 정설은 아직 명확하지 않다. 대개는 고대의 남근숭배설(男根崇拜說)’과 사찰이나 토지의 경계표지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등이 있기도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정확한 것은 아니다. 일설에는 솟대나 선돌, 서낭당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등도 전해진다. 일부 장승 중에는 거리를 알려주는 로표장승도 존재한다.

 

 

목장승의 경우에는 복판에 글을 써서 표시하는데 대개는 천하대장군이나 지하대장군, 혹은 지하여장군, 축귀대장군 등으로 표현한다. 수원박물관 입구에 서 있는 장승은 모두 축귀대장군(逐鬼大將軍)’으로 앞에 방위표시를 하였다. 그 중에는 여장군도 서 있어 나라를 지키거나 마을을 지키는 데는 남녀구별이 없음을 알려준다.

 

새해가 시작된다는 입춘. 수원박물관 앞에서 만난 성황당과 목장승 앞에서서 고개를 숙인다. “정유년 한 해 이 나라가 안정을 되찾고 서민들이 마음 편하게 두 다리 쭉 펴고 사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길 바란다는 간절한 마음을 전한다. 모처럼 성황당과 장승 앞에 서 머리를 숙였으니 올해 꼭 이루어질 것이란 생각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수원시 팔달구 우만동 248번지에 소재한 비구니의 요람 봉녕사. 봉녕사는 비구니 승가대가 있는 절이다. 봉녕사의 용화각에는 고려시대의 석불로 보이는 석조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이 석조삼존불은 대웅보전 뒤편 언덕에서 건물을 지으려고 터를 닦던 도중에 출토되었다고 한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1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석조삼존불상은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보살입상을 배치하고 있다. 불상과 연화대좌는 각각 하나의 석재로 구성이 되었는데 모래가 많이 섞인 화강암으로 조성을 하였다. 삼존불 모두가 뚜렷한 이목구비가 보이지 않는데 이는 오랜 시간 땅 속에 파묻혀 마모가 된 것으로 보인다.

 

 

마모가 심한 석조삼존불

 

삼존불의 중앙에 좌정하고 있는 본존불은 석조여래좌상으로 얼굴모습은 원만한 편이다. 그저 편안한 느낌을 받게 하는 본존불의 머리 부분은 파손되어 있고 눈, , 입 부분은 심하게 마모가 되어 희미하다. 법의는 왼쪽 어깨에만 걸치고 오른쪽 어깨가 노출된 우견편단으로, 법의의 주름도 상당히 도식화 되어있다.

 

오른손은 무릎에 놓고 왼손은 가슴에 대고 있는데 상당히 부자연스럽게 조각을 하였다. 석불의 밑을 받치고 있는 좌대인 연화대는 일석으로 2단으로 되어있으며 가운데가 잘록하고 아래 위가 넓게 조성하였다. 연화대 위편은 커다란 앙련을 조각하였는데 사이가 너무 벌어지게 잎이 조성되어 있어 매우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아래쪽 연화대에도 앙련이 흐릿하게 조성이 되어있으나 상당히 마모가 심하여 정확하지가 않다. 본존불은 전체적으로 비례가 맞지 않는 편이다. 얼굴은 네모나게 조성을 하였는데 양편의 귀는 어깨에 까지 늘어졌으며 목은 두꺼워 얼굴의 넓이와 목이 뚜렷하게 구별이 되지 않고 있다.

 

 

섬세한 연화문이 새겨져 있는 협시불

 

본존불의 좌우에 서 있는 협시불의 얼굴 형태는 원만한 편이나 각 부분은 마멸이 심하여 정확한 모습을 알아보기가 힘들다. 협시보살의 법의는 두 어깨를 모두 가린 통견으로 조성을 하였는데 조각 등은 섬세하지 못하다. 왼손은 가슴에 대고 오른손은 무릎 밑으로 내리고 있으며 원추형의 대좌에는 연화문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삼존불이 모두 평평한 느낌을 주는 영감 없는 조각 기법이나 각 부분의 형식과 표현 수법이 도식화 되어 있다는 점으로 보아 고려시대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삼존불 모두 전체적으로 표현기법 등이 동일해 한 사람의 장인에 의해서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삼존불 모두 정확한 형태를 알아보기는 어려운데 봉녕사에서도 대적광전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불자들이 찾아드는 곳이 바로 용화각이다.

 

용화각 안에 들어가 머리를 조아린다.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린다. 늘 새해가 되면 절 몇 곳을 빠트리지 않고 돌아보는 나이지만 그 중에서도 봉녕사는 반드시 들리는 곳 중 한곳이다. 삼존불을 모신 전각을 일러 용화각이라고 했던가? 용화세상은 종파도 없고 따로 다스릴 법도 필요치 않다고 한다. 즉 법 없는 세상을 일러 용화세상이라고 했다는데 난 이 용화각 안에 모셔진 석조삼존불 앞에 머리를 조아려 늘 그런 용화세상이 도래하기를 기원한다. 그 기원이 비록 이 생애에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영월군 법흥사를 찾아 적멸보궁에 오르다

 

강원도 영월군 무릉도원면 무릉법흥로 1352(법흥리)에 소재한 법흥사. 예전에는 영월군 수주면이 무릉도원면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경계가 뛰어난 이곳을 무릉도원면이라는 명칭으로 바꾼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만큼 뛰어난 경계를 자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8일 삼사순례 여정 두 번째로 찾아간 법흥사.

 

법흥사는 통일신라 말기 9산 선문 중 사자산문의 중심도량인 흥령선원지의 옛 터이다. 흥령선원은 자장율사가 창건했으며 도윤국사와 징효국사 때 산문이 크게 번성하였다. 신라 진성여왕 4년인 891년 병화로 소실된 것을 고려 혜종 1년인 944년에 중건하였으나 또 다시 소실되어 천년 세월을 그 명맥만 이어오다가 1902년 법흥사로 개칭되었다.

 

 

법흥사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과 보물 제612호인 징효대사 보인탑비, 강원도지정 유형문화재 제72호인 징효대사 부도,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73호인 법흥사 부도,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09호인 법흥사 석분 등이 자리하고 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셨다는 부도가 벽 너머로 보이는 적멸보궁은 법흥사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삼사순례 두 번째로 찾아간 법흥사. 버스로 무릉도원을 굽이굽이 돌아 찾아간 법흥시 주차장에는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버스 몇 대와 승용차 등이 자리하고 있다. 주차장에서 금강문을 지나 먼저 징효대사 보인탑비와 부도를 돌아본다. 보물인 징효대사 보인탑비는 고려 혜종 1년인 944년에 세운 것이다.

 

 

법흥사 적멸보궁에 오르다.

 

그동안 법흥사를 몇 번인가 찾았다. 지난번에 들렸을 때보다 또 달라진 경내를 둘러본 후 돌로 바닥을 깐 길을 따라 적멸보궁으로 오른다. 그리 먼 거리는 아니지만 은근히 비탈진 길을 걸어 오르려니 이마에 땀이 흐른다. 길이 가팔라지는 곳에 마침 우물이 있다. 시원한 물로 갈증을 풀고 흙길로 조성된 산길을 따라 걷는다.

 

절 입구에서부터 들리는 정근은 화엄성중을 읊고 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셨으면 당연히 석가모니불로 정근을 해야지만 왜 화엄성중일까? 그렇게 절을 찾아다녔지만 아직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적멸보궁 앞에 도착하니 산비탈을 바라보고 축조된 적멸보궁은 날이 차서인가 어간문을 닫아놓고 좌우로 출입을 하고 있다.

 

 

적멸보궁 안에 들어가 예를 올려야겠지만 마음이 바쁘다. 보궁 뒤편에 있는 부도와 석분을 보려면 보궁과 석분 사이에 공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보궁 벽을 돌아 바로 부도 앞으로 가 두 손을 모은다. 더 가까이에서 부처님 진신사리의 기운을 느끼고 싶어서이다. 한낱 부족한 인간이라는 것이 이런데서 나타나는 것일까?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는다.

 

제발 이 어지러운 나라의 혼돈이 하루 빨리 끝날 수 있도록 기원합니다라는 간단한 발언을 쉴 새 없이 반복하면서 고개를 들지 못한다.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고 있는데 서민들의 삶이 막막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딜가나 못 살겠다는 소리만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인가 휴일을 이용해 적멸보궁을 찾아 온 사람들도 요즈음 들어 더 많아진 것 같다는 이야기다. 누구나 같은 생각일 것이다. 하루 빨리 이 국정농단의 어지러움이 끝나길 바라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적멸보궁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돌무덤과 부도

 

법흥사는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 중의 한 곳으로 대표적인 불교성지로 자리를 잡고 있다. 신라 때 자장율사가 당나라 청량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석가모니불의 진신사리와 가사를 전수받아 643년에 귀국하여 오대산 상원사, 태백산 정암사, 영축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 등에 사리를 봉안하고 마지막으로 이 절을 창건하여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고 한다.

 

당시 사명을 흥녕사(興寧寺)’라 하였다고 전하는데 적멸보궁 뒤에는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3호인 영월 법흥사 부도와 유형문화재 재109호인 토굴인 석분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석분은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도를 닦던 곳이라고 전하지만 그 형태로 보면 고려 때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석분은 낮은 언덕으로부터 내려오는 완만한 경사를 이용하여 흙으로 위를 덮고 봉토를 올리기 위하여 토굴 주변에 석축을 올렸다. 내부구조로 보면 고려시대에 축조 된 것으로 추정되며 내부의 높이는 160, 깊이 150, 너비 190이다. 석분 안을 들어갈 수 없어 실내의 형태를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지만 돌방 뒤편에는 고승의 유골을 모신 돌널이 있다고 한다.

 

부도탑 앞에는 누군가 촛불을 켜 놓았다. 우리민족에게 촛불이란 남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불을 밝히는 목적만아 아니라 촛불을 켜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간구를 하는 것이다. 하기에 촛불이란 바로 이루고자 하는 서원은 담아 신에게 도움을 받기를 서원하는 것이다. 전국에서 밝힌 수많은 촛불의 염원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도 그 때문이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5대 보궁. 그 중 한 곳인 영월군 무릉도원면 법흥사. 하루 만에 세 곳을 돌아야하는 바쁜 일정으로 인해 오래도록 손을 모을 수는 없지만 짧은 시간에 정신을 집중하여 간절함을 띄워 보낸다. “2017년 이 나라에 부디 평안이 있기를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인제군 합강리 중앙단에서 한 맺힌 원혼을 위로하다

 

여단(厲壇)’이란 별여제(別厲祭)를 지내는 단을 말한다. 여단은 일반적인 제를 지내는 곳과는 다르다. 고을의 수령이 세상을 살다가 화를 당하고 세상을 떠난 원귀들을 달래기 위해 제를 지내던 곳을 말한다. ‘여단제(厲壇祭)’는 아이를 낳다 죽은 해탈귀, 총각처녀가 결혼을 하지 못하고 죽은 몽달귀와 각시귀, 칼에 맞아 죽은 검사귀, 물에 빠져 죽은 익사귀, 불에 타 죽은 화사귀, 어려서 죽은 동자귀 등 각종 귀신들을 달래는 제를 지내는 곳이다.

 

우리나라 각 고을에는 여단이 있었다. 조선조까지 이어지던 여단제는 각 고을의 수령들이 매년 청명, 음력 715, 101일 등 세 차례 이 여단에 나가 많은 한을 품고 죽은 원혼들을 달래는 제를 지냄으로써 고을이 안녕하고 백성이 편안하기를 빌었다. 현재 여단제는 사라졌지만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곳이 바로 강원도 인제군 합강리 산221-13에 소재한 중앙단이다.

 

 

중앙단은 인제에서 44번 국도를 따라 양양 속초로 나가는 방향에 소재하고 있다. 원통을 벗어나는 우측 소양강변에 마련한 이 여단을 중앙단이라 하는데 한편에는 합강정이 자리하고 있고 여단과 그 뒤편에 합강 미륵불이 소재하고 있다. 인제 중앙단은 조선초기부터 19세기 말까지 제를 지내던 곳으로 2001724일 복원되었다.

 

지난 4, 12일 동안 강원도 여행을 하면서 들린 중앙단.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여단의 흔적을 찾아 여러 곳을 다녔다. 그동안 여단터 등은 여러 곳에서 만날 수 있었지만 여단을 복원해 놓은 곳은 쉽게 만날 수 없었다. 그런 여단의 모습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인제군이다. 1901년 경 소실되어 터만 남아있었던 중앙단은 가로와 세로 6.51m, 높이 77.5cm의 정방현 사각형 형태의 화강석으로 조성 복원하였다.

 

 

각 고을의 수령이 모여 여단제를 지낸 인제 중앙단

 

인제 합강정 옆에 위치한 중앙단은 조선시대 각도의 중앙에서 전염병 등으로 억울하게 죽은 원혼들을 위해 제를 지내던 곳이다. 조선시대의 여단제는 국가에서 자연신에게 지내는 제사로 정종 2년인 1400년에 지방의 주현까지 행해졌으며 임금이 직접 제를 봉행하던 여제단은 궁성 밖 북교와 동교, 서교에 설치되었다.

 

각 지방의 여단은 주로 관아 북쪽의 민가에서 멀리 떨어진 구릉지에 자리를 마련하고 있으며 1년에 세 차례 정기적으로 지내던 여단제 말고도 역병이 돌거나 가뭄이 심할 때는 시기와 장소를 별도로 택해 고을의 수령이 직접 여단에 나가 제를 모시고는 했다. 인제 중앙단의 경우에는 <증보문헌비고><인제읍지>등에 그 기록이 보이고 있다.

 

 

<증보문한비고>에 의하면 영조 18년인 1742년에 왕명에 의하여 별여제가 각도의 중앙인 강원도 인제, 경상도 상주, 충청도 공주, 전라도 광주 등에서 시행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 보이는 영조 18년의 여단은 1843년에 발간 된 <인제읍지> 단묘조에 기록된 합강정 뒷쪽에 있는 중앙단이 바로 영조 때 전국에서 열린 여단제의 중앙단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외에도 1941년에 발간된 <강원도지><관동읍지>의 기록에 중앙단은 강원도의 중앙인 합강정 뒤쪽에 설치되어 1843년 전후까지 동서의 수령들이 모여 강원도의 별여제를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단이란 그저 일반적은 제사터가 아닌 원혼들을 위로하는 제사를 고을의 수령이 지냈다는 것에 그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합강정과 합강미륵불이 한 자리에

 

이곳 여단주변에는 합강정이 자리하고 있다. 합강정은 숙종 2년인 1676년 이세억 현감 재직시 건립된 중층누각이다. 합강정이라는 정자의 이름은 앞으로 흐르는 강이 동쪽의 오대산과 방태산 등에서 흐르는 내린천과 설악산과 서화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인북천이 홍진포의 용소에서 합류하여 흐르기 때문에 합강이라 했으며 그런 아름다운 지세를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자리한다 하여 합강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676년 인제읍민을 동원하여 건립한 합강정은 화재 등으로 소실된 것을 영조 32년인 1756년 현감 김선재가 디시 중수하였다. 1760년에 간행 된 <여지도서>에는 합강정은 십자각 형태의 누각으로 다섯칸이다라는 기록이 있어 1865년 재 중수 시에는 정자를 중수하면서 6칸으로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이후 한국동란 시 폭격에 의해 소실된 것을 1971년 합강 나루터 능선 위에 다시 지었으나 1996년 국도확장 공사로 철거된 것을 199862일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 2층 누각으로 복원한 것이다. 합강정에서 강쪽에 자리하고 있는 합강미륵불은 전형적인 지역 장인에 의해 조성된 미륵불이다. 누군가 미륵불 앞에 사탕봉지를 꽂아 둔 것으로 보아 이곳은 아직도 사람들이 찾아와 공을 들이고 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화재 답사를 다니다가 이렇게 한 자리에서 몇 기의 지정, 비지정문화재를 만나게 되면 그 날은 요즘말로 대박났다는 생각이다. 물론 그 문화재 하나하나를 자세히 기록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사로 연관을 짓고 있는 문화재들이기에 함께 소개를 한다. 합강정 옆에 복원된 원혼들을 위한 여단인 중앙단. 그곳을 들려 머리를 숙인다. 여단제를 지내지 않아 나라가 시끄러운 것일까? 그 앞에 서서 수많은 원혼들을 위한 간절한 마음을 합강에 띄워 보낸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보물 삼층석탑과 보물 영산전을 돌아보다

 

양산시 하북면에 소재한 통도사를 흔히 불지종가국지대찰 영축총림 통도사라고 칭한다. 구만큼 사세(寺勢)가 대단하다는 말이다. 통도사에는 국보와 보물, 그리고 많은 지정 문화재들이 있다. 통도사는 흔히 상로전, 중로전, 하로전으로 구분하는데 입구인 일주문부터가 하로전에 해당한다.

 

하로전은 보물 제1826호인 영산전, 보물 제1471호 삼층석탑, 경남 유형문화재 재197호 약사전, 경남 유형문화재 194호 극락보전, 경남 유형문화재 제250호 천왕문과 일주문, 호혈석 등이 이 하로전에 속해있다. 그 중 보물 삼층석탑 뒤편으로는 보물 영산전이 자리하고 있다. 삼층석탑은 통일신라 때 작품으로 보이며 영산전은 하로전의 중심 건물이다.

 

영산전은 숙종 39년인 1713년 봄에 화재로 인해 영산전과 천왕문이 소실되었는데 이듬해인 171433명의 목수와 천오 등 15명의 화승이 참여하여 중건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암막새 명문에는 강희 53甲年1714년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영산전이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던 것을 1714년 복원하였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실내벽화도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영산전

 

영산전은 정면 3, 측면 3칸의 다포계 맞배지붕 형식이다. 기단의 정면 중앙과 양 측면 앞쪽에는 계단이 놓여 있고 창호는 정면과 배면에만 두고 양 측면은 창호 없이 벽으로 폐쇄하였다. 정면에는 매칸 사분합 정자살문을 두고 배면에는 두 짝의 띠살문으로 달아냈다. 공포는 정면은 각 칸마다 3구를 배치하고 있으나 배면에는 2구가 놓은 것이 영산전의 특징적이다.

 

통도사 영산전과 같이 정면 각 칸에 3구씩의 공포를 두는 것은 매우 드문 사례이다. 통도사의 많은 전각들은 단청이 거의 지워져 있다. 오랜 시간동안 단청을 입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산전의 단청은 1715년에 총안스님이 단청을 시작해 1716년에 모든 공사를 마무리 지었다고 한다. 이런 기록으로 보면 영산전의 단청은 300년 전에 한번 올렸을 뿐이다.

 

단청이 퇴색하여 맨 건축목자재의 질감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영산전. 이렇게 단청이 지워진 것이 오히려 통도사를 더 고풍스럽고 무게있게 만들고 있다. 실내촬영을 금지한다는 안내판 때문에 실내에도 보물로 지정된 52점의 벽화(보물 제1711) 등이 있지만 촬영을 하지 않았다. 문화재는 누군가가 아니라 모두가 보존에 최선을 다해야 하기 때문이다.

 

 

신라 말의 삼층석탑은 보물 제1471호로 지정

 

영산전 앞에 놓인 보물 제1471호 삼층석탑은 원래 자리에서 1.5m 정도 이동을 했다. 이는 삼층석탑을 에워싸듯 놓인 영산전과 약사전, 극락전의 중심축에 맞추기 위함이라고 한다. 통일 신라의 작품으로 일려진 삼층석탑은 2층의 기단을 세우고 그 위에 삼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로 1987년 해체 수리 당시 자리를 옮겼다고 한다.

 

지난 1128. 벌써 통도사흫 다녀온 지 10일 가까이 지났다. 통도사를 찾아간 날은 휴일이라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탑 주변으로 몰려들어 사진촬영을 하기가 난감하다. 그렇다고 관람을 하거나 동행한 가족이나 지인들과 사진촬영을 하고 있는데 비켜달라고 할 수도 없다. 짧은 시간에 촬영할 곳은 많은데 무작정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순간순간 사람들이 삼층석탑 주변에서 떨어졌을 때 급하게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다.

 

 

내가 사진작가라면 도저히 찍을 수 없는 분위기거나 아니면 사람들과 어우러진 탑을 촬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사진작가가 아니기 때문에 탑의 온전한 형태만 전달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모든 문화재를 촬영할 때 항상 갖고 있는 생각이 한 부분씩이라도 더 자세히 소개를 하야한다고 늘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물 제1471호인 통도사 삼층석탑은 일반적인 석탑의 형태이다. 이 석탑을 신라 말이나 고려 초에 조형한 작품으로 보는 까닭은 석탑의 형태는 신라말기의 보편적인 탑 형식으로 조성을 했는데 기단석에 안상이 조각되어 있다는 점이다. 안상은 흔히 고려조의 탑에 나타나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석탑의 몸돌과 옥개석은 모두 한 장씩의 돌로 조형을 했으며 옥개석의 받침은 각층마다 4단으로 조성하였다. 천년이 지난 세월을 자리를 지키고 있는 통도사 삼층석탑. 그 앞에 서서 두 손을 모은 까닭은 국정농단으로 망가져버린 이 나라가 바로 서기를 바라는 간절함 때문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