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전국의 고택답사를 하면서 어림잡아 150집 정도를 돌아다녔다. 아직도 찾아갈 곳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고, 더 좋은 집들이 남아있어 발길을 재촉해야겠다는 생각이다. 요즈음 들어 우리 고택에 대해 글을 쓰는 분들이 많아, 고택이 갖고 있는 비밀 몇 가지를 적어본다.

 

사람들은 흔히 안채의 안방이나 건넌방 등의 문이 작다거나, 왜 사랑채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문을 딴 곳으로 내었는가 등을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우리 고택에는 집을 지을 때, 그 모든 것이 과학적이고 윤리적인데서 비롯했다고 하면 조금은 의아해 할 것이다. 전북 장수군 산서면 오산리에 소재한 전북민속문화재 제22호인 권희문 가옥을 예로, 한옥의 숨은 비밀을 찾아본다.

 

 

조선시대 상류가옥인 권희문 가옥

 

장수 권희문 가옥은 권희문의 선조들이 조선조 영조 49년인 1773년부터 100년 정도에 걸쳐 지은 집이다. 조선시대 지방의 상류가옥의 건물로 안채, 사랑채, 아래채, 문간채, 바깥채, 서쪽채 등과 나뭇간채 등 많은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도 권희문 가옥은 넓은 대지에 많은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어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이 권희문 가옥의 안채에서는 상지삼년계축이월이십묘시주사시상량이라는 상량문으로 보아, 1866년도에 건립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채는 전라북도 지방의 가옥 중에서는 보기 힘든 자형 집이다. 고패집으로 지어진 권희문 가옥의 안채는 중문을 들어서면서 바로 부엌의 벽이 보이고, 안방과 윗방을 드렸다. 그 위에 꺾인 부분에는 세 칸 대청과 한 칸 건넌방이 있으며, 대청 한 칸을 사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앞뜰에 나무를 심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은 대개 안채의 넓은 앞마당을 비워놓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모른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의 공간을 비워놓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환기 때문이다. 안채의 뒤편에는 대개 후원을 조성한다. 그리고 많은 나무들을 심어 놓기도 한다. 이렇게 앞쪽에는 비워두고, 뒤편으로는 나무를 심어 놓는 이유는 바람의 소통 때문이다.

 

즉 여름이 되면 아무것도 심지 않은 앞마당의 열기가 상당하다. 이럴 때 대청 문을 열어 놓으면, 뒤편 숲에 있는 찬바람이 대청을 통해 앞마당으로 들어오게 된다. 뜨거운 열기는 위로 오르게 되기 때문에, 자연 뒤편에 있는 시원한 바람을 끌어오게 된다. 그러면 집안이 모두 시원하다. 이런 과학적인 논리를 이용한 것이다.

 

 

안채 안방의 뒤에 놓는 쪽마루의 용도도 바로 이런 논리를 이용해, 좀 더 시원하게 여름을 나기 위한 방법이다. 또한 안채 앞마당에 정원 같은 것을 조성하면, 겨울에 내린 눈을 말끔히 치울 수 없어 찬 기운이 오래가게 된다. 눈을 말끔히 치우자면 정원 등이 없어야 하기 때문에, 안채와 사랑채 사이의 공간을 비워두는 것이다.

 

안채 안방의 작은 방문은 왜일까?

 

안채의 안방 문을 보면 윗방의 방문보다 작다. 그리고 방문의 아래쪽을 나무로 문양을 내어 꾸며놓았다. 이런 형태를 보고 사람들은 어른이 주거하는 안방이기 때문에, 예를 갖추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라는 뜻이다라는 말을 한다. 물론 그도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안방문을 작게 만드는 것 역시 기후에 따른 대처방법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바람은 겨울 동안에는 대륙의 차가운 공기가 남하하여 한파를 몰고 오고, 여름에는 해양의 무더운 공기로 여름 내내 폭서가 지속된다. 이러한 계절의 온도 때문에 방문을 작게 하고 그 턱을 높이는 것이다. 즉 겨울에 찬바람을 가급적 적게 받도록 하고, 방안의 열기를 보호하자는데 있다.

 

하기에 이렇게 구성이 된 안방의 문은 사람들이 출입을 하지 않는다. 부엌 쪽에 안방을 두고, 그 위에 대청과 연결되는 윗방을 만드는 것도 기온과 관계가 지어진다. 즉 겨울에는 따듯하게 안방의 실내기온을 보호하고, 여름이면 대청과 연결된 윗방의 문을 열어 바람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건한 사랑채는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장소로도 쓰여

 

권희문 가옥의 사랑채는 숭정기원후계사삼월초십일묘시립주미시상량을해오일중수라는 상량문이 있다. 이 내용으로 보면 1773년 세워지고, 1875년에 다시 중수를 하였다는 것이다. 이 사랑채는 안채가 세워진 뒤에 다른 곳에서 옮겨왔다고 전한다. 따라서 상량문에 쓰인 중수연대인 1875년은 사랑채를 이건한 해일 것으로 생각된다.

 

사랑채에는 '의왕서'라 쓴 편액이 걸려 있다. ‘산 높고 물이 맑은 곳에 곁들인다.’라는 뜻이다. 이 사랑채는 예전에는 과객들의 숙소와 아픈 사람을 지료하는 곳으로 사용을 하였다고 한다. 아마도 지방의 상류가정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병을 치료하고 지나던 사람들을 묵게 하였던 것이란 생각이다.

 

 

사랑채 뒷문이 딴 곳으로 행한 이유는?

 

사랑채에서 안채로 이동하는 공간에는 쪽문을 내어 놓거나, 아니면 사랑채 뒤편에 문을 낸다. 이러한 문은 사랑채에서 주로 거주하는 바깥주인이 안채로 이동하는 동선을 고려한 것이다. 그런데 사랑채에서 안채 쪽으로 낸 문은 바로 안채를 바라다 볼 수 없도록 한다. 뒤편에 방향이 다른 문을 낸 작은 마루를 놓거나, 아니면 툇마루를 벽으로 막아 사용을 한다.

이렇게 사랑채에서 안채를 직접 바라다 볼 수 없도록 한 것은, 우리사회의 오랜 유교적 습속 때문이다. 우리 고택은 그저 생활을 하기 위해 지은 것이 아니다. 지역마다 나름대로의 풍토에 맞게 집을 지었으며, 용도에 따라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이런 점을 알고 찾아간다면, 좀 더 고택답사의 묘미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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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를 다니면서 가장 마음이 푸근해 지는 것은 고택이나 절집 등에서 만나게 되는 장독대이다. 물론 절집보다야 고택에서 만나는 장독대, 그것도 사람의 온기가 서린 집안에서 만나게 되는 장독대야말로, 따듯한 어머니의 품을 느끼게 된다.

 

집집마다 집 뒤편으로 돌아가면 윤기를 내며 가지런한 모습으로 놓여있는 장독대. 지금이야 아파트들을 선호하면서 이런 정취어린 모습들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옛 것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우리 어머니들은, 아파트 베란다 한편에도 윤이 나게 잘 닦은 독 두 어 개쯤은 갖고 계신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위는 경북 영덕 의병장 신돌석장군 생가지 장독 아래는 경주 김호장군의 생가지 장독


장독대를 보면 집안의 가풍을 알아

 

장독대는 집 뒤편이나, 안채의 옆에 단을 쌓고 그 위에 가지런히 독을 늘어놓는다. 장독대에는 간장을 비롯한 된장과 고추장, 김치나 장아찌 등 우리의 식생활을 윤택하게 할 식품들을 보관하는 곳이다. 하기에 장독대가 갖는 의미는 그 무엇보다 크다고 하겠다. 사람들은 어느 집을 찾아갔을 때 이 장독대가 윤기가 반지르르하게 나면, 그 집안의 주부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고 한다.

 

장독은 어머니의 마음이다. 그리고 온 가족의 안위가 장독대에서 만들어진다. 아이가 아프면 장독대 앞에 상을 놓고 맑은 정화수 한 그릇을 떠놓고, 자성으로 비손을 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있다. 또한 자손들이 만 길을 떠나거나 큰일을 앞에 두고 있을 때도, 일이 잘 되게 해달라고 지성으로 비는 일도 이 장독대에서 다 이루어졌다.

 

 

 

 

위는 논산 명재고택 사랑채 앞 장독들, 가운데는 서천 이하복 가옥의 장독대, 아래는 음성 감곡 서정우 가옥의 장독


장독은 단순히 찬거리를 보관하는 곳이 아니다.

 

왜 장독대에서 그런 일들을 한 것일까? 어머니들은 왜 집안에 일이 생기면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 놓고 촛불을 켠 후, 지성으로 비손을 한 것일까? 그것은 장독대가 갖고 있는 직능 때문이다. 장독대는 집안에서 가장 신성한 곳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장독대에는 집안 식구가 먹고사는 찬거리의 맛을 내는 것도 이 장독 안에 들어있는 고추장, 된장, 간장과 각종 반찬 등이다.

 

 

 

 

위는 전남 무안 나상렬 가옥의 장독, 가운데는 충북 괴산 청천리 고가의 장독, 아래는 함양 지곡 오담고택의 장독


하지만 이 찬거리들인 장들은 단지 반찬의 맛을 내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 장들은 바로 ‘축사(逐邪)’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하기에 이 장독대는 집안에서 주부들과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신성한 곳 중 한 곳이다. 이러한 장독대는 한국인의 사고 속에는, 어머니의 마음이 담겨져 있는 정 깊은 곳이다.

 

이러한 장독대가 점차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장독대에 깃들었던 어머니의 마음과 정도 함께 사라져가는 것만 같다. 어머니의 따스한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장독대. 그리고 집안의 모든 간구하는 일이 이루어지던 소중한 곳이었던 곳. 이 봄, 어머니의 마음이 가득 담겨있던 아름답고 정이 넘치는 장독대를 찾아, 길을 나서는 것도 새봄을 맞이하고 느끼는 한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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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은 건물 대지의 경계선이나 설치물의 주위에 두른 구조물을 말한다. 담은 순우리말이며, 한자로는 원(垣)·장(墻)·원장(垣墻)·장원(墻垣)·장옥(墻屋), 우리말과 한자가 합쳐진 말로는 담장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린다. 그중 경미한 재료로 만들어지거나 안이 보이게 만들어진 것을 울·울타리·바자울[笆子籬]·울짱·책(柵)·장리(牆籬)라 한다. 반대로 성벽·성곽과 같이 대규모인 것도 있다. 담의 기능에는 공간의 구획, 외부로부터의 침입이나 들여다보는 것의 방지, 화재 등의 위험방지, 위엄과 존엄성을 나타내는 것 등 여러 가지 기능이 있다.(출처 / 다음 백과사전)

 

담은 그 종류가 다양하다, 생나무를 심는 생울이 있는가 하면, 싸리나무 등을 엮어 막아놓은 울타리가 있다. 진흙에 짚을 썰어넣어 이겨서 만든 흙담도 있고, 널판지로 계를 두른 판장과 판담이 있기도 하다. 그 외에도 돌담, 영롱담, 꽃담 등 담은 그 재료 등으로 담장의 구분하고 있음을 본다.

 

 

담장의 용도는 과연 경계이고 차단일까?

 

그러나 정말로 이 담이 경계를 막고 설치물을 보호하기 위함일까? 담장이 이웃과의 경계를 가르는 용도로 쓰이는 것일까? 난 그렇지 않다고 생각을 한다. 담은 경계를 나누는 것이 아니고 이름이다. 그리고 외부와의 차단을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의 결성을 위한 보호적인 차원의 상징이라고 생각한다. 먹을 것을 담장 너머로 전해주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그것이 차단이라면 이해가 안된다. 우리의 담은 바로 나눔이요, 소통이다.

 

 

 

민초들의 담과 가진자들의 담은 극과 극이다

 

우리 민가의 담을 보면 막힘이 아니다. 문이라고 해보아야 싸리를 엮어만든 문이다. 그리고 담장이라고 해보아야 어른 키의 목밑이다. 누구나 안을 들여다 볼 수가 있다. 옆집과의 경계도 마찬가지다. 보호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서로 상통을 하기 위한 수단이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사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민가의 담장이다. 사대부가의 높은 벽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

 

그렇다면 왜 우리 민가의 담은 이렇게 낮은 것일까? 그래야만 할 이유가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소통이다. 사대부가들이 숨길 것이 많다면 민초들은 숨길 것이 없다. 어느 집이나 터놓고 돌아다녀도 잊어버릴만한 것도 별로 없다. 그러다보니 담을 높게 두를 이유도 없고, 안이 안 보이게 문을 만들어야 할 이유도 없다.

 

 

 

그저 바람 정도만 막아주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저 허전함만 가리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것은 같은 민초들끼리는 서로 피가 통하기 때문이다. 숨기고 감추고 속이는 그러한 담장이 아니라, 소통하고 열고 보여주는 그런 것이 바로 민초들의 담장이다.

 

역사는 늘 담으로 사람들을 구분했다

 

민가의 담을 보면 끝이 없다. 그저 이집에서 저집으로, 또 그 다음집으로 담이 연결이 된다. 낮은 처마 밑으로 두른 담장은 그보다 많이 낮게 만든다. 나를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나를 숨길 것도 없고 은밀히 숨어서 할 일도 없다. 그런데 이런 담장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즉 담은 어느 시대에서나 소통과 단절로 대두된다.

 

 

 

소통은 민초들이요, 단절은 가진자들이다. 가진자들은 보여주기를 꺼린다. 그리고 늘 은밀히 안에 틀어박혀 궁리를 한다. 대개는 그 안에서 서로 목소리를 죽여 몹쓸 짓을 연구한다. 그리고 더 많은 몹쓸 짓을 생각해 낸다.

 

민초들의 담장은 스스로 낮춘다. 스스로가 부끄러움이 없다는 생각이다. 그저 있는 대로 행하고 먹고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진자들은 항상 숨기려고만 든다. 그러한 검은 사고들이 담장을 높게 만들었다. 그리고 스스로 그것이 위엄이라고 생각들을 했기 때문이다. 소통과 보여줌, 숨김과 차단. 이것은 긴 세월 속에서 변하지 않고 전해진 우리 담장의 철학이다.

 

 

 

담은 공유를 하는 것이다

 

가진자들은 늘 소통하고 보여주는 민초들을 바라보면서 자신들은 감추고 가리는 것이 많았다. 그러면서도 늘 자신들은 서민을 위해서 산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들이 사는 집의 담을 낮추고, 마음의 담을 낮추지 않고는, 절대로 낮은 담을 사이에 두고 사는 민초들에게 가까이 다가설 수가 없다. 담장의 철학은 사람들을 일깨우지만 그들은 그 속내조차 모르고 산다.

 

우리의 담장이 주는 철학. 내가 쌓은 담은 안편에서는 우리 담이 되지만 밖으로는 상대의 담이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 담장의 마음이다. 하나의 담장이 서로를 소통하게 만드는 것이다. 높은 담을 가진 자들. 이제 스스로 그 높은 담을 깨고 나오지 않으면, 그들과는 절대로 담을 공유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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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답사를 하다가 보면 기이한 것들을 만나게 된다. 가끔은 해학적이기도 하고, 또 어떤 것은 가슴이 따듯해지기도 한다. 이런 것들을 통해 과거 우리네 선인들의 숨결을 기억해 낼 수가 있다. 어디를 가거나 눈을 크게 뜨고 찾아보는 것은 바로 이런 것들이 있는가해서이기도 하다.

하나하나 살펴보면 우리네의 사대부가와 민초들의 삶이, 그렇게 각박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도 나름대로 없는 사람들을 위해 베풀 줄 아는 지난날의 사대부가의 심성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각박한 세상살이에서 이런 것들을 보고 배울 수는 없는 것인지.



마을 사람들의 애환을 듣는 ‘소리통’

전남 보성군 득량면 오봉리에 자리하고 있는 중요민속문화재 제159호인 이용욱 가옥은 강골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에 자리잡은 집이다. 비교적 넓은 평야에 인접하여 있고, 해안과도 가까운 지역이어서 풍수지리상 터가 좋은 곳이다. 안채, 사랑채, 곳간채, 문간채로 구성되어 있는 집이다.

이 집의 대문을 들어서 사랑채로 향하는 우측 담장에 보면 담장에 작은 구멍 하나가 보인다. 그 밖으로는 마을의 공동우물이 있다. 집의 구조를 둘러보면 이 우물을 일부러 이렇게 밖으로 빼내 담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이 작은 구멍을 ‘소리통’이라고 한다. 우물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마을의 온갖 이야기가 다 흘러나온다.

소리통을 통해 그러한 마을의 애경사를 듣고, 적당히 조치를 취했다는 것이다. 소리통은 마을 주민들과 사대부가의 보이지 않는 소통의 창구 역할을 한 것이다. 부단하게 떠벌리지 않고도, 마을 사람들의 아픈 곳을 만져줄 수 있는 소리통. 그래서 이 소리통이 이 시대에 더 필요한 것은 아닐까?


배고픈 이들을 먼저 생각한 ‘타인능해’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소재한 중요민속문화재 제8호인 운조루. 운조루는 조선 중기에 지은 집으로 영조 52년인 1776년에 삼수부사를 지낸 유이주가 지었다고 한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곳은 산과 연못으로 둘러싸여 있어 <금환락지>라 하는 명당자리라고 한다. 55칸의 목조와가인 운조루는 사랑채, 안채, 행랑채, 사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운조루의 대문을 들어서면 길게 자리를 한 행랑채의 좌측 끝에 ‘가빈터’ 혹은 ‘초빈터’라는 곳이 있다. 이것은 운조루에서 상이 나면 3일장을 지낸 후 이 곳에서 3개월 동안 시신을 안치했다가 출상을 하는 곳이다.

이렇게 조상에 대한 예를 극진히 모신 운조루에는 ‘타인능해’라는 나무로 만든 통과, 역시 나무로 만든 쌀통이 있다. 타인능해는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 언제라도 찾아와 통 안에 든 쌀을 가져가라는 것이다. 가진 자들이 더 취하기 위해 기를 쓰는 모습들을 보면서, 이 타인능해에 담긴 마음을 알려주고 싶다.

이 외에도 고택을 답사하면서 만나는 많은 것들. 그 특이한 것들을 돌아보면 더 없이 즐거움을 느낄 수가 있다.


양평 창대리 고가의 '기와박공'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창대리에 있는 경기도 민속자료 제7호인 창대리 고가는 지은 지가 200년이 되었다. 이 집에는 맞배집의 양편 지붕에서 내린 박공에 기와로 와편을 넣어 아름답게 꾸며 놓았다. 어떻게 기와를 잘라 박공을 와편박공으로 만들 수가 있는 것인지. 보기만 해도 옛 선조들의 미적감각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익산 조혜영 가옥의 '꽃담'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21호인 익산 조혜영 가옥은 함라읍에 소재한다. 이 마을은 담장이 등록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는 곳이다. 조혜영 가옥은 1920년을 전후해 건축이 되었다고 한다. 여러 채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나, 현재는 안채와 별채, 그리고 모습이 바뀐 문간채만 남아있다. 이 조혜영 가옥에는 꽃담이 있다. 십장생 굴뚝의 문양을 본따 조형을 한 것으로 보이는 이 꽃담으로 인해 더욱 돋보이는 집이다.


남원 덕치리 초가의 '동학날리'

남원시 주천면 덕치리에는 전북민속문화재 제35호로 지정된 덕치리 초가가 있다. 이 집은 짚으로 지붕을 한 것이 아니고 억새인 띠풀로 지붕을 이른 집이다. 이 집에서는 보기드문 여러 가지를 만날 수 있어 즐거운 곳이다. 대문에 붙은 광 안에는 동학란 때 선조가 사용을 한 목창이 보관되어 있다. 창에는 흰 글씨로 ‘동학날리’라고 써 놓았다.

이 외에도 고택에서 만나보는 여러 가지 즐거움은 무수하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음이 안타깝다. 집은 그냥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다. 그 안에는 사람들의 심성과, 우리의 온갖 역사가 함께하고 있다. 그래서 옛집이 더욱 소중한 것이다. 언젠가는 집을 설명하는 것이 아닌, 집안에 있는 이런 이야기를 엮은 책 한권을 내고 깊다. 우리 후손들이 우리 문화에 대한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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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뚝 이야기, 알고 보면 흥미롭다. 옛 고택 답사를 하면서 옛 집에서 보는 것들이 비단 굴뚝만 흥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굴뚝도 굴뚝이지만 옛 집에는, 집집마다 나름대로의 볼거리들이 많이 때문이다. 그런 것들은 다음으로 미루고, 우선은 굴뚝 이야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굴뚝이 그냥 연기를 빼는 용도로만 사용이 되었을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란 생각이다. 굴뚝을 보면 나름대로의 형태에서 그 지역적 특색이나, 집 주인의 성품, 심지어는 그 집안의 가세를 짐작할 수도 있다. 왜 굴뚝에서도 그런 특색이 있다고 보이는 것일까? 물론 추론일 수도 있겠지만, 그 나름대로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위는 강원도 고성 왕곡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담장굴뚝이다. 아래는 속초 김근수 가옥의 담장 안에 연도를 뺀 굴뚝이다, 아마도 심한 바람을 이겨낼 수 있도록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지역에 따른 굴뚝의 형태

굴뚝은 여러 가지 기능을 한다고 앞서 설명을 한 적이 있다. 그러한 굴뚝은 강원도 동해안 등 3 ~ 4월 심한 바람이 부는 곳에서는 굴뚝을 별도로 조형을 하는 것이 아니고, 대개는 담장 안에 연도를 이어 굴뚝을 만든다. 굴뚝도 상당히 견고하게 쌓는 편이다. 아마도 그러한 것들은 바람으로 인해 굴뚝이 넘어가지 않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위는 경기 양평의 이항로 생가의 굴뚝이다. 가운데는 전북 고창의 인촌생가의 낮은 굴뚝이며, 아래는 익산 가람 이병기 생가의 굴뚝이다. 내룍이라 그런지 굴뚝이 낮게 조성이 되었다.


서해안 인접 지역 역시 상당히 견고한 굴뚝을 조성한다. 이곳도 바람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와는 달리 내륙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굴뚝들이 나타난다. 지역으로 보면 경상도 지방의 굴뚝이 화려하고 크다. 이렇게 화려하게 굴뚝을 조성하는 것은, 이 지역의 고택들이 상당히 넓고, 큰 편에 속하기 때문이다. 즉 굴뚝이 클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가 집 자체가 크기 때문이다.

경기도 지역과 충청남도 지역의 굴뚝들은 대개가 낮다. 집이 넓다고 해서 굴뚝을 높게 만들지를 않는다. 이런 것은 그 지역의 특징이다. 이렇게 낮은 굴뚝을 조성한 것은, 일기가 비교적 순탄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위는 서천의 이하복 가옥의 굴뚝이다. 아래는 부여 민칠식 가옥의 굴뚝이다. 큰 집에 비해 낮은 굴뚝을 조형했다. 


가세에 따른 굴뚝의 형태

집안의 가세를 보려면 광을 보라고 했다. 오래도록 권력을 잡았던 집인데도 불구하고, 곳간채가 작은 집이 있는가 하면, 안채나 사랑채는 그리 크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곳간채가 상당히 큰 집들이 있다. 이런 경우 그 집의 굴뚝을 보면 상당히 높게 축조가 되었다. 바로 부의 상징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만 같다.



위는 강원도 강릉 지역이 대표적인 선교장의 굴뚝이다. 가운데는 경남 거창의 정온 생가의 굴뚝이며, 아래는 함양 오담고택의 굴뚝이다. 굴뚝이 높게 조형되었다.


또 오랜 세월동안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드나 든 집들을 보아도 굴뚝이 높이 솟아있다. 그만큼 많은 불을 땠다는 것이다. 많은 양을 불을 때려면 아무래도 낮은 굴뚝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굴뚝의 형태는 단순히 불을 때고 그 연기를 뿜어대기 위한 용도만으로 사용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동안 200여 채 이상의 고택을 답사하면서 나름대로 분석을 해보면, 굴뚝 하나에도 그 집안의 내력이 함께 자리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위는 서산 김기현 가옥의 굴뚝이며 아래 좌측은 전주 학인당의 굴뚝이고, 우측은 충북 괴산 청천리 고가의 굴뚝이다. 굴뚝이 높고 화려하게 조성이 되었다.


집안에서 음식을 조리하고 난방을 하기 위한 조형물인 굴뚝. 아마도 지금까지 보아온 고택의 몇 배를 더 답사를 하고나면, 나름대로 ‘굴뚝의 미학’ 정도 한 권쯤은 쓸 수 있지는 않으려는지. 그래서 고택답사의 발길은 늘 바빠진다.(연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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