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서신면 정용래 가옥을 돌아보다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오얏리길 56(궁평리)에는 중요민속문화재 제125호인 화성 정용래 가옥이 자리하고 있다. 정용래 가옥은 초가집으로 1800년대 말에 지은 집이다. ''자형 안채와 ''자형 사랑채와 행랑채가 모여 경기도의 전형적인 튼 ''자형의 평면구조를 보이고 있다.

 

요즈음은 주말만 되면 답사를 나간다. 그동안 무엇이 그리 바쁜지 제대로 답사를 하지 못해 늘 몸이 굼실거리는 것이 사는 재미도 잃어버린 듯하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주말에는 가까운 곳이라도 빠트리지 않고 돌아보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한 번 답사를 나서면 7~8곳을 돌아오는 빡센 일정을 소화하는 것도 그동안 게으름을 반성하는 뜻에서이다.

 

화성시는 일개 지역치고는 많은 문화재가 소재한다. 그래서 한 바퀴 도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몇 주에 걸쳐 돌아보기로 한 곳이다. 7일 이른 시간 화성으로 향했다. 이번 답사는 화성시 서신면을 중점적으로 답사하리라 마음을 먹고 이른 시간에 길을 나선 것이다. 답사를 즐기면서 하라고 했지만 하루 만에 여러 곳을 돌아보려면 자연 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없다.

 

 

 

 

초가도 이 정도면 대갓집 부럽지 않소

 

서신면 궁평리에 자리하고 있는 정용래 가옥은 산쪽으로 자리를 하고 있는 중요민속문화재 제124호인 기와집인 정용채 가옥과 이웃하고 있다. 위쪽 정용채 가옥은 기와집이고 아래쪽 정용래 가옥은 초가집으로 조성되어 있어 한 곳에서 기와와 초가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정용래 가옥은 항상 갈 때마다 문이 잠겨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집 앞으로는 소로가 나 있고 대문 앞에는 보호수인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있다. 수령이 꽤 된 이 느티나무가 정용래 가옥과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집 주변을 몇 바퀴 돌면서 밖에서 촬영을 하자니 산비탈까지 올라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안마당이며 대문의 왼쪽에 사랑채가 있고 오른쪽에 행랑채가 세로로 길게 자리 잡고 있는 정용래 가옥은 초가이긴 하지만 구성이 잘 되어 있어 어느 대갓집이 부럽지 않다.

 

 

 

 

집 앞 도로에서는 안채와 마주하고 있는 사랑채가 보인다.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면 굴뚝이 나란히 두 개가 서 있는 것이 이곳 사랑은 부엌이 사랑과 안사랑으로 구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안채는 사랑채가 마주보이는 곳에 대청과 건넌방을 두고 꺾이는 왼쪽 아래로 찻방과 안방, 부엌을 두었다.

 

대청의 뒷벽에는 왼쪽으로 뒷창을 내고 오른쪽으로 벽장을 만들어서 조상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사용하고 있는 정용래 가옥. 이는 사당을 따로 두지 않는 민가에서 통상 쓰는 수법이다. 바깥마당은 사랑방 앞으로 터져 있으며 왼편에 헛간채가 있다. 정용래 가옥은 전체적으로 민가의 격식과 쓰임새를 갖추었던 부유한 농민의 집으로 추정된다.

 

 

 

 

볼썽사나운 문화재 안내판, 문화재명 바꾼 지가 언제인데

 

대문이 잠겨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으니 그저 집 주변만 이리저리 돌아볼 수밖에 없다. 그래도 집의 모습을 이곳저곳 꼼꼼히 촬영을 마치고나서 문화재 안내판을 보려고 했더니 이게 무슨 일인가? 안내판은 색이 다 흐려져 글씨를 알아보기조차 힘들다. 거기다가 중요민속문화재로 문화재 명칭이 바뀐 지가 꽤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중요민속자료라는 안내판과 안내 석물에 적혀 있다.

 

화성시 몇 곳을 돌아보아도 마찬가지이다. 문화재 명칭이 바뀐 것을 교체를 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문화재를 찾아다니기도 하는데 이렇게 문화재명칭 하나 제대로 적은 안내판을 세워놓지 않으면 어쩌자는 것인가? 문화재는 민족의 자랑이다. 중요민속문화재는 국가에서 지정한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중요민속문화재라고 해도 관리는 해당 지자체에서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화성시 모든 곳의 민속문화재는 민속자료라고 쓴 안내판을 교체하지 않고 있다.

 

  

 

 

문화재 답사를 하는 이유는 문화재를 온전히 보존하기 위한 작은 정성이다. 문화재의 잘, 잘못을 따지자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보존을 위해 노력을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쁜 것을 지적하기 보다는 좋은 것을 칭찬해주고 문제가 있는 것은 시정을 요구하려고 노력한다. 작은 힘이나마 후손들에게 온전한 우리의 문화유산을 물려주기 위함이다. 문화재 안내판을 정정하고 깨끗한 글씨로 교체한다고 해서 화성시의 재정이 휘청거리는 것도 아니다. 다만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란 생각이다. 화성시 문화재 담당부서에서는 관내의 문화재 안내판을 조속한 시일 내에 일제정비를 해주기 바란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여주시 향토유적 이인영 생가 관리 엉망

 

한 마디로 부끄럽다. 외지인들이 와서 이곳을 찾기라도 한다면 무슨 망신인가? 더구나 요즈음 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우리나라를 찾아와 지역 문화재 관람을 다니고 있다. 각 지역마다 중국인 요우커를 비롯해 외국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많은 노력들을 하고 있다. 그들이 지역에 들어와 쓰고 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아 문화재를 이용한 지자체의 수 입 늘리기도 지역경제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여주는 문화재가 많은 곳이다. 남한강 가에 자리 잡고 있는 신륵사를 비롯해 북내면 상교리 고달사지 등 불교유적은 물론,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세종대왕릉과 효종대왕릉, 그리고 그 외에도 여기저기 많은 문화재들이 산재해 있는 곳이다. 이 문화재를 잘 이용하면 적지 않은 관광수입을 올릴 수 있는 곳이 바로 여주시이다.

 

1, 여주에서 430일부터 시작한 도자기축제를 돌아볼 겸 여주로 향했다. 휴일인데도 예년보다 많은 사람이 찾아오지 않아서인가? 아니면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오전 11) 축제장 안은 그렇게 사람들로 붐비지는 않는다. 매장 안에는 물건을 진열해 놓고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는 관계자들만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상교리 이인영 생가지를 찾아가다

 

도자기축제장을 돌아본 후 북내면 상교리로 향했다. 문화재 답사를 하러 다니다가 보면 꼭 짚고 넘어가는 것이 있다. 인근에 있는 문화재를 한 번 돌아보는 것이다. 혹 문화재가 누군가에 의해 훼손이라도 되었을까하는 우려에서다.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생긴 버릇이다.

 

여주시 북내면 상교1119-16에는 여주시 향토유적 제17(2011117일 지정)인 의병장 이인영의 생가가 소재한다. 이인영은 여주사람으로 고종 4년인 1867년 여주 북내면 상교리에서 태어났다. 이인영의 생가 앞에는 의병대장 중남 이인영 기념비가 서 있다. 이인영은 원수부 13도 의병총대장을 지낸 인물이다.

 

이인영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유인석, 이강년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강원도 춘천과 양구 사이에서 일본군과 싸우고 유인석의 제천전투에 참여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 후 부친의 병환으로 인해 의병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가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을 계기로 의병이 재기하자, 그 해 9월 원주에서 의병원수부를 설치하고 관동창의대장에 올랐다.

 

 

 

190711월 전 병력을 24진으로 하는 13도 의병연합부대를 편성한 이인영은 원수부 13도 의병총대장에 추대되었다. 군사장에 허위, 관동총대장에 민긍호 등을 선정한 뒤, 일거에 서울로 진격하여 통감부를 격파하고 조약을 무효로 만들어 국권을 회복하고자 의결했다. 그러나 각 도의 의병 중에는 제 날짜에 도착을 하지 못한 자가 많았고, 기밀을 알아차린 일본군이 먼저 공격을 해옴에 따라 다시 여주까지 퇴각을 하였다.

 

여주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패한 이인영은 대치를 하고 있던 1908128일 문경에 거주하던 부친의 사망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인영은 "충은 효이고, 효는 충이다"라는 신념을 갖고 후사를 군사장인 허위에게 맡기고 본가로 급히 내려갔다. 부친의 장례를 치른 후에는 재기하지 않고 있다가 결국 일본 헌병에 잡혀 순국을 하였다.

 

 

 

폐허가 된 이인영 생가지 정말 부끄럽다

 

요즈음은 문화가 대세라고 한다. 한류열품을 타고 지자체는 물론 각 문화예술단체들도 문화콘텐츠를 개발하여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이런 점으로 보면 이인영의 생가는 민족적 자긍심을 일깨울 수 있는 교육 자료로 최고의 가치를 갖는다. 특히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이인영이 이야기는 귀감이 될 수 있는 교육적 가치를 갖는다.

 

1일 찾아간 상교리 이인영 생가. 한 마디로 창피하다. 남들이 볼까 얼굴이 화끈거린다. 향토유적으로 지정을 했으면 당연히 관리도 해야 한다. 하지만 생가지는 주차장이 되어있었다. 생가지 이인영 기념비 안쪽으로는 차량을 주차해 놓았고, 생가지의 초가지붕은 짚이 바람에 들고 일어서 까치집이 되었다.

 

 

 

대청마루에는 짐승의 분뇨가 굴러다니고 있고 부엌문을 열어보니 누군가 이곳에서 잠이라도 자려고 했는지 접이식 침대까지 한 구석에 놓여있다. 먼지는 수북이 쌓여있고 초가 이엉은 언제 갈았는지 짚은 시커멓게 변했다. 거기다가 바람에 날려 들고 일어나 볼썽사납게 되었다. 한 마디로 관리가 전혀 되어있지 않다.

 

국기지정문화재나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문화재 관리는 훌륭하다. 하지만 정작 지역의 인물로 모든 사람의 귀감이 될 수 있는 이인영의 생가지는 그야말로 꼴불견이다. 어찌 지역 향토유적 관리를 이렇게 소홀히 할 수 있단 말인가? 여주시는 조속한 시일 내에 이인영 생가지를 재정비를 해야 한다. 이런 꼴을 보일 것 같으면 아예 이인영생가지 안내판을 없애야하지 않을까? 이런 모습을 관광객들에게 보일 수는 없으니 말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문화재답사 30년 이제는 방송사에서도 청탁이

 

문화재답사 30. 말이 30년이지 그동안 숱한 고생을 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분야인 것을 우리 문화재의 소중함을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시작한 일이다. 날이 추운 겨울에도 쉬어본 적이 없다. 억수장마가 쏟아지는 날에도 난 길 위를 걷고 있었다.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을 우리 문화재를 찾아보기 위함이었다.

 

그동안 길거리에 뿌린 경비만 해도 엄청나다. 고생을 해서 주머니에 돈이 들어오면 바로 짐 하나 챙겨들고 길을 나섰다. 전국을 몇 바퀴를 돌았는지 모른다. 하루에 먼 거리를 걷기도 부지기수였다. 길도 없는 산길에서 길을 잃어 헤매기도 했고, 비가 오는 날 상여막에서 잠을 청해야 하는 날도 있었다.

 

그렇게 하나하나 쌓인 자료들이 방안 가득하다. 그 자료들을 보면서 늘 생각하는 것이 도대체 왜 내기 이 짓을 해야 할까라는 자문을 한다. 하지만 내가 아니면 누가할까? 라는 대답 때문에 30년을 길에 서 있었다. 그 수많은 문화재가 온전히 보존되고 있는지, 혹 누구에게 훼파는 되지 않았는지 그것이 늘 궁금하기 때문이다.

 

 

 

 

방송사에서 걸려온 전화

 

하주성 기자님이세요?”

, 그렇습니다.”

저는 KBS TV 여유만만의 작가인데요. 혹 남양주 화길옹주님이 사시던 궁집에 대한 자료 좀 받을 수 있을까 해서 전화드렸습니다

화길옹주 고택은 왜요?”

저희 프로그램에 공주에 관한 이야기가 주제인데요. 화길옹주님 고택을 촬영할 수가 없어서요.”

 

궁집은 화길옹주가 살던 집이다. 조선조 제21대 영조의 막내딸이자, 정조대왕의 막내고모인 화길옹주가 살던 집은 남양주시 평내동 426-1에 소재하는 중요민속문화재 제130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영조의 막내딸 화길옹주가 능성위 구민화에게 시집을 가자 영조가 옹주를 위하여 지어준 집이다.

 

이 궁집을 돌아보면 영조가 막내딸 화길옹주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것을 알 것 같다. 하긴 영조에게 아들은 유일하게 사도세자 한 명 뿐이었다. 이 궁집은 나라에서 재목과 목수 등을 보내어 집을 지었다고 해서 궁집이라고 부르고 있다. 당시 공주는 50칸 이상의 집을 지으면 안된다고 했다. 이 집은 그러한 법도에 따라 칸수를 꽉 채운 집이다.

 

 

 

 

보수공사로 인해 관람이 금지된 궁집

 

날이 덥다. 조금만 걸어도 땀이 흐른다. 안내판을 보고 땀을 흘리며 찾아간 궁집 입구는 철문이 굳게 잠겨 있다. 작은 쪽지에 적혀있는 전화번호로 전화를 했더니, 인터넷에 다 나와 있으니 인터넷을 보라는 것이다. 신문사에서 왔다고 해도 마찬가지 대답이다. 하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훼손을 하는 바람에 아예 개방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몇 번을 더 이야기를 하고서야 열어주는 철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궁집은 집 자체의 치목이나 석재 등이 뛰어나다. 영조가 막내딸을 위해 지어준 집이고, 화길옹주가 출가하여 세상을 뜰 때까지(1765~1772) 이곳에 거쳐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아마도 이 집은 1765년경에 지어졌을 것이다. 250년 정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집임을 알 수 있다.

 

 

 

 

치목과 석재 등을 직접 내려 보낸 영조

 

궁집은 조선시대 전형적인 양반집의 형태이다.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로 구성이 된 이 집은 안채를 자 형으로 꾸몄다. 안채는 부엌이 4, 3칸에 앞퇴를 한 칸 더 놓았다. 정침 좌우의 날개는 방과 곳간을 드렸고, 남행랑에는 곳간과 중문이 있다. 중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광이 있고, 그 앞에 안마당을 가로 질러 우측 날개채에 부엌과 건넌방이 있다.

 

정면으로는 가운데 안방을 두고 양편에는 대청과 부엌을 두었다. 안방 앞에서 대청까지는 툇마루를 놓아 동선을 이어주고 있다. 좌측 날개채에는 아랫방과 광이 있고, 사랑으로 연결이 되어있다. 사랑채는 안채의 서남쪽에 자리를 하고 있으며, 자 형으로 방 두 칸 이외에는 모두 누마루를 깔았다.

 

서남쪽 끝에는 돌출을 시켜 누정인 누마루 한 칸이 있다. 날아갈 듯한 처마를 가진 이 누정은 장초석으로 주추를 놓고 그 위에 누마루를 깐 형태이다. 기단 역시 잘 다듬은 장대석을 이용해 집의 품위를 높인 듯하다. 사랑채의 북쪽에는 기단을 높이 쌓았는데 그 위에 우물을 있다. 이 우물은 안채 큰 부엌의 뒷문 쪽이기도 하다.

 

 

 

 

격조 높은 화길옹주의 궁집

 

화길옹주가 살았다는 이 궁집은 한 마디로 그 어느 집보다 격조가 있는 집이다. 양반가의 큰 집을 수도 없이 보아왔지만 그리 크지 않은 집 구조를 갖고 이렇게 쓰임새 있게 지은 집 구조는 그리 흔치가 않다. 그 중에서도 사랑채 뒤편 장대석을 이용해 3단으로 쌓은 축대 위에 마련한 우물과 배수시설은 가히 일품이다.

 

우물에서 물이 흐르는 것을 석재로 물이 빠지는 배수시설을 만들고, 그 흐르는 물을 땅 속으로 흐르게 하여 배수구가 사랑채 뒤편으로 빠지게 하였다. 낮은 야산을 등지고 있는 궁집의 건조함을 막기 위함으로 보인다. 그 스스로가 임수(臨水)’가 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곳에서 한 세상을 살다간 화길옹주. 방송에서 자막으로 소개가 된 문화재전문기자라는 명칭. 30년 동안 오로지 우리 문화재의 온전한 보존을 위해 땀을 흘리다보니 이젠 방송사에서조차 도움을 청해온다. 적어도 30년은 한 자리에서 노력을 해야 한다는 옛 스승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덥거나 춥거나 눈이 오거니 비기 내리거나 스승님의 말씀 한 마디가 지금껏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인덕만년훈(人德萬年薰)’의 교훈을 알려준 집

 

27,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매일 인근에서만 돌다가 모처럼 길을 나섰다. 가까운 곳이라도 바람을 쐬러가자는 생각에서이다. 멀리 가지 않아도 주변에 문화재는 늘 있기 마련이다. 이천시 백사면 내촌리 222-14에 소재한 김좌근 고택. 경기도 민속자료 제12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고택은 99칸 집으로 유명했던 옛집이다.

 

99, 예전 우리나라의 권력의 상징이었다. 100칸을 지으면 궁궐이라고 하여 사대부들이 가장 크게 지을 수 있는 집이 바로 99칸이다. 지금은 안채와 별채만 남아있지만 원래 사랑채와 행랑채, 담장 등 주변이 모두 김좌근 고택이었다는 것이다. 연꽃 봉우리가 맺혀 올라오고 있는 연못까지 이 집이었다고 하니 그 위용을 알만하다.

 

저 연못도 저 옛날 집에 따른 것이었지. 저 집 앞에 논이 대문채, 행랑채, 사랑채 등이 있던 곳이었어. 이 연못도 그 집 연못이었고, 그런데 그 집에서 건물도 팔아버려 딴 대로 가져갔다고 하지. 연못은 마을에 팔았어.”

 

 

 

 

 

옛 고택의 그림을 그려보다

 

연못 앞에서 한 낮의 더위를 피하고 계시던 마을 어르신이 들려주는 이야기다. 연못과 현재 남아있는 고택 사이에 논이, 꽤 거리가 먼데 그 안에 건물들이 들어차 있었다는 생각을 하니 그 집이 얼마나 대단한 집이었나를 가늠할 수 있다. 예전 우리의 고택을 보면 대개 배산임수(背山臨水 : 뒤로는 산을 두고 앞으로는 내를 둔다)’ 형태로 짓는다.

 

이 김좌근 고택은 앞으로 내가 흐르지 않아 연못을 파서 내를 대신한 것으로 보인다. 천천히 걸으면서 집의 형태를 살핀다. 자 형태로 지어진 안채와 그 옆에 정자방을 들인 별채가 나란히 서 있다. 안채 앞에는 주춧돌이 일렬로 놓여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 곳이 사랑채가 있던 자리가 아니었나 싶다.

 

김좌근은 영의정을 세 번이나 지낸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안동김씨 세도의 중심인물로 순원왕후의 남동생이자 익종의 외삼촌이다.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중추적 역할을 한 인물로, 이 고택은 김좌근의 아들이자 고종 때 어영대장을 지낸 김병기가 부친의 묘지관리를 위해 지은 집으로 알려져 있다.

 

 

 

 

 

남아있는 집만 보아도 당시의 세력을 알만 해

 

묘지를 관리하기 위해 지은 집이 99칸이었다고 한다. 조선조 후기 당시 안동김씨의 세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집만 보아도 알만하다. 이 집은 어르신들이 기억을 하고 있는 이야기만 들어도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사랑채와 행랑채가 두 겹으로 안채를 싸고 있었다는 것이다. 조선조 말 사대부가의 전통적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는 김좌근 고택.

 

후손들이 관리가 어렵다고 신흥재벌에게 집을 팔았는데, 사랑채와 행랑채를 뜯어 이건을 하던 중 회사가 부도가 나는 바람에 그나마 안채와 별채가 남아있다는 것이다. 원래 구조는 대문과 중문을 지나 안채로 통하도록 되어 있었다고 한다. 안채는 자로 중문과 연결된 사랑채가 있었다는 것이다.

 

집을 한 바퀴 돌아본다. 지금은 별채와 안채 사이에 작은 일각문을 통해 들어가도록 되어 있지만, 예전에는 별채와 안채가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어 땅을 밟지 않고 이동할 수 있었다고 한다. 건물은 새로 보수를 한 듯 기와며 벽들이 말끔하게 정리가 되어있지만, 예전 모습을 그려보기에는 그리 어렵지가 않다.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다

 

별채 뒤편으로 연도를 통해 쌓은 굴뚝이며, 안채로 들어가면 튓마루를 건물 전체를 연결해 놓은 것만 보아도 이 집이 과거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세 번이나 영의정을 지낸 김좌근의 묘를 관리하기 위해 아들 김병기가 지었다는 99칸 집. 당시 안동 김씨들의 세도가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알 수 있는 집이다.

 

집을 한 바퀴 돌아보고 난 뒤 안채를 돌아 나오니 곁에 모아놓은 장초석들이 보인다. 아마도 이 집의 일부를 이건해 갈 때 남겨놓은 듯하다. 그런 장초석이며 집 여기저기 놓인 석물들을 보아 사랑채와 행랑채가 그대로 남았다면 얼마나 대단한 집이었을까를 생각해 본다. 세월은 무상하다고 했던가?

 

김좌근 고택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세도는 언젠가는 끝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옛 선인들은 인덕만년훈(人德萬年薰)’이라 했던가? 즉 사람이 덕을 쌓고 베풀면 그 향기가 천년만년 후대에 퍼지므로 살아생전 덕을 쌓으라는 가르침이다. 아마도 지금과 같은 형태로 남아있는 이 집도 그나마 주변 사람들에게 덕을 쌓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팔작지붕으로 지어진 중층 누각 멋지다

 

장안동 문화시설. 2013 ‘생태교통 수원2013’ 당시 화서문 안쪽에 빈집들을 철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허름한 집 한 채를 남겨둔 채 그 옆에 간이 정자가 하나 들어섰다. 그리고 지난 해부터 공사를 시작하더니, 장안동 문화시설 첫 번째 집이 드디어 그 면모를 드러냈다. 화서문을 배경으로 지어놓은 한옥 한 채가 보기에도 멋지다.

 

이곳 문화시설은 2016년까지 모두 네 채가 들어설 예정이다. 아직 용도를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이 첫 번째 한옥은 관광안내소 역할을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전통 한옥으로 지어놓은 이 집은 중층 누각으로 지었다. 21일 오후 흡사 어느 대갓집 모형을 본떠 지은 것 같은 한옥을 찬찬히 들러보았다.

 

 

 

팔작지붕에 중층 누각인 한옥

 

정면 다섯 칸 측면 세 칸으로 지어진 이 집은 화서문 방향으로 세 칸을 들였다. 문이 닫혀있어 안을 제대로 볼 수는 없지만 아마도 집의 구조상 마루방으로 꾸민 듯하다. 문 앞에는 장대석으로 댓돌을 놓았으며 문은 전면과 측면을 모두 전통창호로 마감을 하였다. 뒤편으로는 반은 창호로 반은 벽을 들여 전통 가옥의 형태를 따랐다.

 

중층으로 된 곳은 아래층은 방으로 꾸민 듯하다. 중간에는 아름답게 지붕으로 이어졌으며 한 칸을 올린 중층은 난간까지 달아내 멋을 더했다. 다락방의 형태로 꾸며진 이 집은 정자와 같은 용도를 사용을 할 듯하다. 아래는 집을 밖으로 한 칸을 내어 달았으며 주추는 장초석을 놓아 허공에 띄워놓았다.

 

크지 않은 한옥이지만 화서문 가까이 지어 놓은 건물로서는 꽤 운치가 있다. 아직 주변이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아 그 전체적인 모습을 그리기에는 부족하지만, 문화시설이 다 지어진다면 또 하나의 명물이 될 듯하다. 이렇게 한 채가 완성이 되어 모습을 드러내고 나니 남은 문화시설 전체가 더욱 궁금해진다.

 

 

 

 

화성 안 건물 한옥으로 바꾸는 작업 계속해야

 

벌써 몇 년 동안 전국을 다니면서 우리 고택을 답사하고 글을 썼다. 그렇게 150채가 넘는 한옥기사를 연재하면서 늘 안타까운 것은 한국민속촌 안에서 볼 수 있는 수원의 한옥이다. 민속촌 안에서도 가장 큰 한옥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이 집은 행궁동에서 이건했다고 한다. 그 집을 볼 때마다 저 고택이 행궁동 제자리에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또한 낙안읍성, 경주 안강마을, 강원도 고성 왕곡마을, 충남 아산 외암리 민속마을 등 한옥 마을을 찾아갈 때마다 마음이 영 편치가 않다. 만일 화성 안의 집들이 예전처럼 기와나 초가로 된 집들이었다면, 수원 화성은 세계적인 도시가 되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동안 화성 안에 새로운 건물들이 한옥으로 지어졌다. 전통예절관과 음식체험관 등이다 장안문을 지나가면서 보이는 이 한옥을 바라볼 때마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번에 장안동 문화시설도 또 하나의 성안 볼거리가 될 것으로 생각 든다. 앞으로 화성 성곽 안의 집들은 한옥으로만 지을 수 있도록 하면 어떨까?

 

나 혼자의 생각이지만 하나 둘 늘어가는 한옥들을 보면서 이제는 한옥 이외의 집들이 화성 안에 무분별하게 지어지는 그런 일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