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충청남도 기념물 제68호로 지정된 명당

 

명당이란 풍수지리설에서 이상적 환경으로서의 길지(吉地)를 일컫는 말이다. 사람들은 명당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집터가 명당이기 때문에 그 집안의 자손들이 출세를 했다거나 조상의 묘를 명당에 써 후손들이 고거에 급제하고 입신양명하여 자손이 번성하고 집안에 재물이 많이 쌓였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고로 살아서는 좋은 환경을 갖춘 집에서 살기를 원하고, 죽어서는 땅의 기운을 얻어 영원히 살기를 원했다. 이런 사람들의 사고가 논리화된 것이 바로 풍수지리설이다. 풍수는 그만큼 자신은 물론 후손들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명당을 찾아 헤매기도 하고 명당을 차지하기 위해 애를 쓰기도 했다.

 

그런 명당에 대한 집착은 비단 나라의 큰 인물들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명당을 선호하고 자신의 집을 명당에 세우기를 원했다.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한다리길 39(유계리)에 소재한 충청남도 기념물 제68호인 정순왕후 생가는 조선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17451805)가 출생한 곳으로 왕비가 되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다.

 

 

정순왕후는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서씨가 죽자 영조 35(1759) 왕비에 책봉되었다. 집은 조선 효종 때 승지와 예조참의 등을 지낸 학주 김홍욱이 효종과 친분이 있었는데, 그가 노부를 모시고 있음을 알고 아버지인 김적에게 왕이 내린 집으로 효종 시절인 16491659년 사이에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건물은 자형 평면을 갖춘 집으로, 앞면 5·옆면 2칸 규모 건물 좌우에 각각 3칸씩 덧달아 자형 구조를 하고 있다. 남쪽에는 앞면 5·옆면 1칸의 별채를 배치하였는데 자형 평면을 하고 있다. 가옥의 후원과 안채를 둘러싼 담장은 자연석으로 쌓았으며 대문은 평문이다. 정순왕후 생가를 찾아갔던 때는 시간이 괘 흘렀다. 봄꽃이 피기 시작하는 4월초였으니 말이다.

 

 

서산시 김기흥 전 민선시장 소유

 

정순왕후가 태어났다는 서산 정순왕후 생가. 잡 앞에는 수령 400여년이 지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이 나무는 정순왕후가 어린 시절 꿈을 키워주던 나무라도 한다. 현재 보호스로 지정되어 있는 느티나무를 마주하고 솟을 대문이 서 있다. 마침 앞마당에는 정순왕후의 16대손인 민선 1, 2기 서산시장을 지냈던 김기흥 전 시장이 마당에 늘어놓은 화분을 손질하고 있다.

 

이 앞쪽이 다 이집 땅이었어요. 지금은 다 딴 용도로 사용하고 이 터만 남았지만요

꽃을 손질하고 있던 김기흥 전 시장은 자신이 이 집에서 16대를 살아온 후손이라고 말하면서 집은을 돌아보아도 좋다고 승낙을 한다. 솟을 대문을 마주하고 사랑채가 서 있고 측면에 난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면 안채를 만날 수 있다.

 

 

자 집으로 꾸며진 안채와 사랑채가 잇대어 잇어 전체적은 규모는 자 형의 가옥이다. 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다락방이 있고 그 밑에 아궁이가 있다. 부엌을 지나 안방이 자리하고 있고 세 컨 대청이 중앙에 있다. 집의 규모는 크지 않으나 상당히 아늑하고 운치가 있는 집이다. 이곳이 명당터라는 것은 후손들이 입신양명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고 이곳을 아는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정순왕후의 본관은 경주이다. 정순왕후 조선 영조 21년인 1745 11월 여주에서 태어났으며 부친은 오흥부원군 김한구이고, 어머니는 원주 원씨 원명직의 딸 원풍부부인이다. 김한구의 가문은 효종시대 관찰사를 지낸 김홍욱의 후손으로 충청도 서산에 세거하였다.

 

정순왕후는 정성왕후의 사망 뒤인 영조35년인 1735에 영조의 계비로 간택되었다. 서산에 세거하면서 산림 가문답게 관직에 진출하지 않고 있었던 정순왕후의 친족들은 국혼 후 정순왕후의 오빠인 김귀주를 필두로 정계로 진출하여 활발하게 활동을 한다. 정치적으로는 노론 벽파였으며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는 남당을 이루어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의 북당과 대립할 정도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서진, 한지민 등이 출연한 MBC 77부작 대하드라마 이산을 보면 정순왕후는 이상 정조와 많은 갈등을 빚는 것으로 나타난다. 정조는 수원 화성을 축성하고 강한 왕권과 백성의 편안함을 생각하면서 가장 민주적인 방법으로 모두를 포용했던 현군이다. 그런 이산에서 보이듯 정순왕후는 그저 영조의 계비로만 살았던 것은 아니다. 정조의 승하후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대왕대비가 된 정순왕후는 수렴청정을 할 정도로 여장부다운 기질을 갖고 있었다. 그런 정순왕후가 궁으로 거처를 옮기기 전까지 살았다는 서산 정순왕후 생가. 마당 한 가운데 자라고 있는 향나무 한 그루가 그 때이 역사를 이야기해 줄 수 있을 듯하다.

 

중요민속문화재 제199호 서산 김기현가옥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에 소재한 중요민속문화재 제199호 김기현 가옥은 살아있는 집이다. 현지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서산버스터미널에서 해미행 시내버스를 이용하여, 중간 유계리 입구에서 하차 도보로 5분정도가 소요된다.

 

승용차로 찾아가려면 서해안고속도로 해미I.C 해미 유계리 입구 서산 김기현가옥을 이용하거나, 경부고속도로 천안I.C 아산 예산 덕산 해미 유계리입구 서산 김기현가옥으로 찾아갈 수가 있다.

 

 

전체적으로 자 형의 고택

 

서산 김기현가옥은 한다리라 부르는 평지 마을의 낮은 야산을 배경으로, 동향한 전통 목조 한와가로 건축의 기법과 목부재의 상태, 가옥의 배치 등으로 보아 19세기 중엽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원래 이집은 태안에 살던 이씨가 건립했는데, 풍수지리설에 이씨가 살터가 아니고 김씨가 살아야 할 터라고 하여, 경주김씨인 김기현의 선조가 이 가옥을 사서 살게 되었다고 한다. 가옥은 자형의 안채와 자형의 사랑채가 어우러져 전체적으로 자형의 평면을 이룬 가옥이다.

 

 

평야마을에 자리잡아 북동향하고 있는 기와집으로, 지은 연대를 알 수 있는 기록은 없으나 건축양식으로 볼 때 19세기 중반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자형의 행랑채 안쪽으로 ''자형의 안채가 있고, 안채의 동쪽 옆에 사랑채가 ''자형으로 연결되어 있다.

 

행랑채는 7칸 규모로 왼쪽 끝에 바깥대문이 설치되어 있고, 부엌과 광,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향한 안채는 중문을 들어서서 안마당의 오른쪽에 있다. 이는 대부분의 중, 상류주택이 몸채를 안마당 건너편에 두는 것과는 달리, 한편에 안채를 두었다는 것이 이 집의 색다른 구조이다. 아마도 이는 일조를 고려한 것이 아닌가 생각든다.

 

 

차양지붕이 특징인 김기현 가옥

 

사랑채는 안채보다 간결한 구조를 한 3칸 집으로, 사랑채 남쪽에 단 차양지붕이 돋보인다. 차양지붕은 사랑채 1칸 앞에 팔모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자 모양의 맞배지붕을 얹은 것이다. 앞면에는 겹처마를, 뒷면에는 홑처마를 달아 앞쪽을 더 길게 처리하였다.

 

안채의 뒷뜰에는 3칸의 초가집이 있는데 일종의 공부방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비교적 지을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집으로, 공간의 짜임새가 빈틈없이 구성되었으며 호도나무나 감나무 등이 어우러져 소담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김기현 가옥은 정말 사람이 살고 싶은 그런 집이었다. 보기만 해도 여기저기 소박함이 배어나오는 그런 집이었다.

 

 

전국의 많은 고택들을 돌아보았지만 서산 김기현 가옥만큼 정갈한 집은 그리 많지가 않았던 것 같다. 안채며 사랑채의 구성이나 행랑채의 소박함. 그리고 팔모기둥 위에 놓은 차양지붕 등. 올 가을에 단풍이 들 무렵 다시 한 번 찾아보고 싶은 곳이다.

 

충남 보령시 청라면 장현리 688에 소재한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91신경섭 가옥(申慶燮 家屋)’ 조선 후기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이 집은 사랑채 중간에 마루를 두어서 대청으로 사용하고 있다. 나무의 결과 단청의 색은 지금까지도 잘 보존되어 있는 집이다. 대문채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며, 신석붕의 효자문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신경섭 가옥을 들려온 것은 꽤 나 시간이 지났다. 은행의 열매가 떨어져 냄새가 코를 진동할 때였으니. 문화재 답사를 마치면 바로 글을 써야 감을 잊지 않지만, 한꺼번에 많은 문화재를 답사하고 나면, 그렇게 바로 글을 적는다는 것이 쉽지가 않다. 그러다 보면 가끔 이렇게 철지난 글을 적어야할 때가 있다.

 

 

자 형의 사랑채가 돋보이는 집

 

신경섭 가옥을 찾았을 때 후원 담장 한편이 트여있다. 앞으로 돌아가니 대문인 듯 효자정려가 걸려있는 문은 잠겨 있다. 담 밖을 돌면서 집을 돌아보아야겠다고 생각을 하는데 마을 어르신 한 분이 지나가시다가 저 편으로 돌면 문이 열려 있으니, 그쪽으로 돌아가 보라고 하신다. 그럴 때면 정말 안내를 해 준 분이 그리 고마울 수가 없다.

 

신경섭 가옥은 조선후기에 지어진 집으로 자 형의 사랑채와 안채가 -자 형으로 자리를 하고 있어, 전체적으로 보면 자 형으로 구성이 된 충청도의 양반가옥이다. 이 가옥은 안채에 안방, 건넌방, 대청, 고방, 부엌을 들였고, 사랑채의 상량문에는 승정기원후사계묘라고 적고 있어, 1842년에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사랑채의 한편 끝에는 높임 누마루 방을 두어 정자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정자 곁으로 돌아가니 후원 앞마당이 눈에 들어온다. 아마도 이 누마루 정자 방에서 바라보는 후원을 바라보는 정취가 일품이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사랑채와 안채 중간에는 돌우물이 자리하고 있어, 자칫 무료한 안마당의 멋을 더해주고 있다.

 

양반가옥의 기품을 지키는 집

 

효자정려가 걸려있는 대문은 사랑채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동선을 마련한 듯하다. 열려있는 또 한편의 문은 들어가면서 좌측에 4칸의 광채를 달아냈고, 우측으로는 5칸의 안채가 있다. 안채는 부엌과 안방, 대청, 건넌방의 순으로 조성을 했는데, 건넌방의 앞에는 높임마루를 두었다.

 

 

안채 부엌의 앞에로는 돌우물을 마련해, 부엌을 사용하는 주부들의 이용에 편리할 수 있도록 동선에 신경을 쓴 듯하다. 안채 뒤편에는 장독대를 두었으며, 마당 가운데에는 작은 화원을 마련하였다. 집은 그리 크지는 않지만 양반가옥의 기품을 그대로 보여주는 집이다. 신경섭 가옥을 찾았던 날이 106일 보령시 답사 때였으니 벌써 두 달이 훌쩍 지났다.

 

, 쪽문으로 출입을 했을까?

 

집안을 한 바퀴 돌면서 사진을 찍고 밖으로 나와 굴뚝을 찍고 있는데, 곁에 작은 쪽문 하나가 보인다. 마침 문이 열려있기에 안을 들여다보니, 그 안에 또 하나의 쪽문이 있다. 문에는 모정문(母情門)’이라고 쓴 작은 나무패가 걸려있다. 어머니의 정을 그리는 문일까? 그 문으로 들어가면 사랑채가 되는데, 왜 이렇게 문의 명칭을 정한 것일까?

 

 

이렇게 작은 문 하나에는 많은 사연이 있을 듯도 한데, 물을 사람이 없으니 그 또한 안타까운 일이다. 아마도 그 모정문 밖에 효자정려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문으로 사랑채로 드나들면서 어머니의 깊은 사랑을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고택을 찾아다니면서 아직도 궁금한 것이 많기만 하다. 그래서 더 많은 곳을 돌아보아야겠다고 생각하지만.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88번지 외암 민속마을 안에 자리한, 중요민속문화재 제195호 참판댁. 이 집의 건축연대는 19세기 말로 추정되며, 구한말 규장각 직학사와 참판을 지낸 퇴호 이정렬 공이 고종황제로부터 하사 받은 집이라고 전하고 있다. 현재 이 집에서는 충남 무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아산 연엽주를 전통방식에 의해 제조하고 있다.

 

연엽주는 연잎을 곁들어 쌀과 찹쌀 누룩을 이용해 빚는 술로, 연꽃잎을 넣어 독특한 향기를 내므로 연엽주라고 한다. 연엽주는 외암리 마을에 살고 있는 예안 이씨 가문에서 익혀 내려온 양조기술에 의해서 제조된 술이다. 외암리마을 참판 이정렬의 4대조인 이원집(1829∼1879)이 쓴『치농(治農)』이라는 필사본에, 연엽주의 제조방법이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은 이 방법에 따라 술을 제조하고 있다.

 

 

큰집과 작은집으로 배치된 참판댁

 

이 집을 '참판댁'으로 부르는 이유는 집을 지은 이정렬이 참판을 지냈기 때문이다. 이 집은 큰집과 작은집으로 구분하여 배치되어 있다. 큰 집은 열 칸의 ㄱ자형 안채와, -자형으로 이뤄진 다섯 칸의 사랑채가 있다. 그리고 -자형 여덟 칸의 문간채가 사랑채 앞에 마주하고 자리를 하고 있다.

 

작은집은 여섯 칸으로 된 ㄱ자형 안채와, 일곱 칸으로 된 ㄱ자형 사랑채로 구성이 되어 있다. 큰집의 평면 구성은 대체적으로 중부방식을 따랐지만, 작은집 사랑채는 대청이 한쪽으로 배치되는 남도풍이 가미되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다섯 칸의 사랑채를 마주하고 있는 큰 집 대청 툇마루 위에 걸려있는 <퇴호거사>란 편액을 볼 수 있다. 퇴호 이정렬은 이사종의 11세손으로 그의 할머니가 명성황후의 이모인 관계로 명성황후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명성황후가 시해를 당하자 이정렬은 벼슬을 버리고 외암리로 낙향했고, 그 때 고종황제가 현재의 집을 하사하였다고 전해진다. '퇴호(退湖)'란 호도 고종황제가 내린 아호임을 편액에는 적고 있다.

 

 

대문의 진입로에 돌담을 쌓은 참판댁

 

큰집 솟을대문의 대문간 앞으로는 양편에 돌담을 둘러쌓았다. 이 돌담이 솟을대문의 앙편 날개와 같이 비스듬히 펼쳐져 있으며, 이 돌담은 문간채의 끝을 향해 타원형으로 쌓여져 있다. 그리고 그 돌담 안에는 돌로 아래를 쌓고, 위를 옹기로 마감을 한 멋진 굴뚝이 서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돌담과 옹기굴뚝, 그리고 솟을대문이 어우러지면서 하나의 멋진 공간을 연출한다.

 

사랑채를 보면서 우측 끝을 돌면 일각문으로 만든 중문이 있다. 중문에 붙여 낸 광채와 사랑채는 역 ㄴ자 형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안채는 ㄱ자형으로 자리를 잡아 튼 ㅁ자 형의 구성을 이룬다. 막돌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지은 안채는 두 칸의 부엌과 안방이 있고, 윗방에서 꺾어 두 칸 대청이 있다. 그리고 건넌방을 두었는데, 앞으로는 툇마루를 꺾어놓아 연결을 하였다. 중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만들고 작은 화단을 꾸며 놓았다. 전체적으로 보면 화려하지는 않지만, 소탈하게 꾸며져 있어 편안한 느낌을 주는 집이다.

 

 

종부에게만 전해지는 연엽주 제조법

 

참판댁의 종부로만 제조방법이 전해진다는 연엽주는 원래는 집안의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가양주다. 이 술을 퇴호 이정렬이 고종황제에게 진상을 하면서 유명해졌다고 한다. 연엽주는 퇴호의 4대조인 이원집이 처음으로 재조를 한 이후, 종부에게로만 전승이 되어왔다고 한다. 가양주로 빚는 술이기 때문에 그만큼 많은 금기사항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술을 빚을 때는 목욕재계 후, 의복을 단정히 하고 수건으로 입과 머리를 감싸야 한다. 술독을 옮길 때도 손이 없는 방위를 택하는 등, 마을에서 제를 지낼 때 제관이 지켜야하는 금기사항을 그대로 지켜야 한다.

 

연엽주를 가양주로 제조하는 외암마을 참판댁. 술이 익는 냄새라도 맡을까하여 부엌 앞까지 서성거렸지만, 굳게 닫힌 집안의 문은 열릴 기미가 없다. 집안을 한 바퀴 돌아 밖으로 나오면서 보는 솟을대문 앙 옆 돌담이, 이번 나들이 길에서는 더욱 정겨워 보인다.


수안보에서 충주로 3번 도로를 타고 나오다가 보면, 우측 길 밑에 고택이 있다. 충주시 살미면 용천리 428-1에 소재한 충북유형문화재 제87호인 최함월 고택은, 안채와 행랑채, 서재, 광채, 정자, 사당으로 구분이 되어 있다. 조선 숙종 때의 문장가인 함월 최응성이 거처하던 곳으로, 원래는 살미면 무릉리에 소재하고 있었다. 1983년도에 충주댐의 건설로 인해 인근의 많은 고택들이 자리를 옮길 때, 이 가옥도 현 위치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최응성은 조선중기의 문인으로 자는 인보(仁甫), 호는 함월(涵月)이다. 아우 최응건과 함께 권상하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집 앞에 정자를 짓고 학문에 힘썼다. 권상하는 이를 칭찬하며 정자 이름을 '함월정'이라 하였는데, 이 정자의 이름을 따서 최응성이 호를 함월이라 했다고 한다.

 

정자 함월정과 안마당의 강돌 우물이 아름다운 집


 

 

고택의 앞에는 연못 뒤에 작은 정자가 서 있다. '함월정(涵月亭)'이란 현판이 걸린 이 정자는, 최응성이 학문에 전념하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정자는 정면과 측면이 한 칸 정도로 꾸몄으며, 가운에 방을 드리고, 주변에는 툇마루를 놓았다. 방은 3면에 창호를 내고 한 벽만 담으로 쌓았다. 작은 정자지만 앞에 판 연못과 함께 어우러져 운치가 있어 보인다. 이 정자의 특이함은 바로 주춧돌이다. 밑은 사각형으로 하고, 그 위에 둥그렇게 제작을 해 기둥을 놓았다. 삼면의 창호는 모두 네 짝 문으로 마감을 하였다.

 

이 정자와 함께 최함월 고가를 멋지게 장식하고 있는 것은, 안마당에 있는 우물이다. 둥근 우물은 위로 올라 온 부분에 강돌을 붙여 아름다움을 더했다. 고택 자체가 조선조 중기의 건물로 독창적인 면이 돋보이고 있는 데는, 이러한 정자와 우물이 일조를 하고 있다.

 

함월의 서재인 염선재와 행랑채

 

 

염선재는 사랑의 구실을 하고 있는 곳이다. 정면 네 칸, 측면 세 칸의 이 함월재는 대문 좌측에 l 자로 형성되어 있다. 팔작지붕으로 꾸민 함월재는 밖을 향해 툇마루를 놓고, 좌측에는 뒤편 툇마루로 들어가는 문을 냈으며, 한 칸의 방을 두 짝 문과 한 짝 문으로 꾸며놓았다. 뒤편으로도 툇마루를 놓았다.

 

대문을 통해서 안으로 들어가면, 좌측에 조성된 염선재. 앞쪽으로는 마루를 놓았으며, 마루 뒤편에도 방을 드리고, 끝에 두 칸의 방을 드렸다. 두 칸의 방 앞에도 좁은 툇마루가 길게 놓여있어, 이동을 편하게 하였다. 집의 구조는 땅을 밟지 않고, 염선재 어디든지 갈 수 있도록 꾸며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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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을 열면 바람벽이 있고, 그 옆으로 문을 내어 대문을 열고 닫기 수월하게 하였다. 집안 식구들의 이동하는 동선을, 최대한으로 줄여놓은 주인의 마음이 보인다. 행랑채는 대문을 포함하여 모두 다섯 칸으로 꾸몄다. 행랑채는 안채의 대청과 마주하고 있으며, 방과 광, 부엌 등으로 꾸며놓았다. 바깥 담장 역할을 하고 있는 행랑채는 광은 판자벽으로 마감을 하였으며, 한 칸짜리 방 세 개를 나란히 놓았다.

 

ㄱ 자형의 안채는 충북지방의 일반적 형태

 

 

 

안채는 충북지방의 일반적 평면형식인 ㄱ자형 집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 중앙 부분에 두 칸의 넓은 대청을 만들고 있는데, 겨울을 나기 위해 그중 반을 막아놓았다. 안채를 바라보고 좌측으로는 건넌방과 칸 반의 부엌, 그리고 두 칸의 고방을 두었다. 부엌의 위쪽은 다락을 내었으며, 밑으로는 까치구멍을 냈다.

 

부엌문은 투박한 판자문으로 구성하였으며, 고방의 문도 역시 투박하다. 부엌문보다 더 크게 만든 고방의 문은, 물건을 넣고 뺄 때 편안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고방 문 옆에는 이단으로 낸 폭 넓은 끼치구멍이 있는데, 이도 막아 놓았다. 대청을 건너 꺾이는 부분에는 윗방과 안방, 그리고 부엌을 드렸다.

 

대청에서 안방으로 들어가는 문 옆에는 또 하나의 문을 벽 중간에 내어 놓았다. 그리고 부엌 위에는 다락을 꾸몄는데, 이곳에도 통풍을 위한 작은 창호를 내었다. 다락의 밑으로는 기둥에 붙여 또 하나의 문을 내고 있다. 안채와 행랑채, 그리고 서재인 사랑채는 큰 ㅁ자 형으로 놓여 있다. 평범한 듯 하면서도 나름대로 특징을 갖는 함월 고택이다.

 

판자벽을 두른 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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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담을 외곽으로 두른 최함월 고택은, 안채 안방 부엌의 뒤편에 판자벽으로 두른 광채가 있다. 광채는 ㄱ자 형으로 하였는데, 전체를 판자벽으로 마감하였다. 문은 꺾인 양편에 한 곳씩 내었으며, 자연석의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올렸다. 이 광채를 지나면 일각문이 있고, 그 일각문을 통하여 함월정과 사당으로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함월정과 안마당의 우물이 아름다운 집. 최함월 고택은 평범한 가운데서도, 아름다움을 찾으려고 애를 쓴 흔적이 보인다. 그리고 유학자의 집안처럼 군더더기가 없다. 충청도 양반가의 틀이 되는 최함월 고택. 함월정 앞 연못에 꽃이 피는 계절이 오면, 집이 더욱 아름답게 변해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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