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가 다니지 않는 길을 꽉 메운 한옥마을을 찾은 사람들

 

수원 행궁동 일원과 전주 한옥마을 무엇이 다른가?

 

살다가 인생이 재미가 없거나 삶에 지쳤거든 주말에 전주한옥마을을 찾아가세요. 그곳에서 지난날의 나를 돌아보며 새롭게 생활을 시작하세요. 그저 길가 아무 곳에나 앉아 지나는 사람들만 보고 있어도 힘이 솟아오릅니다.”

 

27일과 282일 동안 전주 한옥마을을 돌아보고 난 후, 나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 그곳은 이미 그저 한옥마을이 아니었다. 한 해에 한옥마을을 찾아오는 관광객이 일천만명. 그 중 80%가 외지인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한 도시도 아닌 풍남동과 교동이라는 작은 마을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 많은 관광객들로 인해 벌어들이는 경제 효과는 도대체 얼마나 되는 것일까?

 

한 점포에서 하루에 올린 매상이 수천만원을 넘었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처음에는 설마하며 웃었는데 정작 한옥마을에 찾아와 보니 그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어요. 보세요, 이 길가에 사람들을. 이들이 모두 대여한 한복을 입고 거리를 돌아다니잖아요. 4시간에 만원이라고 하는데 한복만 대여해서 하루에 300만원의 매상을 올린집도 있다고 하네요

 

이목대에서 내려다 본 한옥마을의 지붕들 

 

한옥마을에서 만난 이아무개(, 44). 경기도 부천에서 왔다는 이씨는 자신도 두 딸과 함께 한옥마을에 와서 1박을 했지만 이런 정도로 사람들이 몰려들 줄은 몰랐다고 한다. 주말에 한옥마을 중요도로는 차량통제를 하고 있어 그야말로 관광객들의 지상낙원으로 변한다. 길거리마다 즐비하게 자리 잡은 각종 먹을거리 또한 다양한 종류가 있다.

 

우리 아이도 이곳으로 수학여행을 왔는데 23일 동안 여행경비 18민원을 학교에 내고 아이가 개인적으로 사용할 돈 10만원을 주었으니까, 이곳에서 사용하고 온 돈이 숙식비를 포함해 30만원 가까운 돈을 쓴 것이죠. 일 년이면 이곳으로 수학여행을 오는 학생들이 도대체 몇 명이나 될까요? 정말 이 한 마을에서 어마어마한 경제수익을 올리고 있는 것이죠

 

한옥마을을 찾은 학생들이 한복으로 치장하고 즐기고 있다

  남녀 젊은이들이 한복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고

 

한옥마을 전체가 흥겨운 놀이판

 

이틀 동안 돌아본 한옥마을은 우리들이 알던 세상과는 별천지였다. 흡사 조선시대로 회귀를 한 것 같은 분위기이다. 거리에는 한복을 차려입은 젊은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로 거리도 젊어진다. 나이가 느긋한 어른들은 찻집에 앉아 차 한 잔을 마시면서 그런 아이들의 모습에 웃음을 띠운다. 여기저기 풍악소리가 울리는 한옥마을은 그저 이곳에 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된다.

 

5년 전에 나도 이곳 인근에서 몇 년인가를 살며 거의 날마다 이곳을 찾았다. 그런데 그 5넌 전은 이곳에 있지 않았다. 당시의 한옥마을은 관광객이 찾아오기는 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은 아니었다. 어떻게 길지 않은 시간에 이렇게 많은 변화를 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점점 늘어나고 있는 한옥들로 인해 범위가 넓어지고 있는 마을을 돌아보면서 이곳에 사는 주민들의 위대한 승리라는 것에 감탄을 한다. 한 마디로 한옥마을 전체가 놀이판이 된 것이다.

 

한옥마을에는 한복대여점이 곳곳에 있어 누구나 한복을 입고 즐길 수 있다

  수학여행을 온 여학생들이 경기전 안에서 사진을 찍겠다고 하자 '대박'이라며 포즈를 취해주었다

 

마침 한옥마을에서는 제34회 전국대사습대회 학생전국대회가 28일부터 29일까지 열리는 기간이다. 이목대, 경기전, 풍남문광장 등 한옥마을 일원 가는 곳마다 소리를 하고 춤을 추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거기다가 길거리 곳곳에 대사습유랑단이라 쓴 윗옷을 걸친 젊은이들이 공연을 하고 있다. 연주를 하는 학생들은 가장 편한 자세로 앉아 연주를 하고, 지나던 관광객들도 가장 편한 자세로 구경을 한다.

 

이 넓지 않은 공간 여기저기서 춤을 추고 연주를 하고 소리를 한다. 음악소리가 나서 따라가 보면 신명나게 순서를 기다리는 대사습 참가학생들의 연습하는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훌륭한 공연이 된다. ‘국악의 도시 전주’, 그 말이 이렇게 실감이 날 수 없다. ‘노다가세 노다나가세라는 부제를 둔 대사습놀이는 그저 사람들이 절로 놀 수 있게 만들고 있다. 전주 한옥마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보여주는 것이다.

 

전주학생대사습에 참가한 학생이 이목대 국악경연대회에 참가하기 전 대금연습을 하고 있다

  학생대사습 무용경연에 참가한 한 학생이 승무춤을 연습하고 있다

 

수원 행궁동과 전주 한옥마을 이것이 다르다

 

수원 화성 안 행궁동에도 요즈음 한옥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개인의 집을 한옥으로 개조하는 것은 보기가 힘들다. 수원시에서 매입한 토지나 건물들을 한옥으로 개조를 하고 있는 중이다. 전주 한옥마을은 날마다 한옥으로 개조공사를 하고 있는 집들을 볼 수 있다. 벌써 700여동이나 되는 한옥들이 들어섰고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추세라는 것이다.

 

전주 한옥마을 건너 전주읍성 풍남문 일대에는 전주남부시장이 있다. 수원 화성 팔달문 밖에는 9곳의 인정시장이 있다. 전주남부시장은 지난해에 글로벌 명품시장으로 지장이 되었고, 수원 남문시장(팔달문 밖 9곳의 통합시장)은 올해 글로벌 명품시장으로 협약식을 맺었다. 수원과 전주 닮아도 너무 많이 닮았다. 하지만 그 양상은 전혀 비교할 바가 아니다.

 

전주 한옥마을과 남부시장은 이미 전국 최고라고 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거기에 비해 수원 행궁동과 남문시장은 이제 변화를 시작했다. 과연 이 두 곳을 비교는 할 수 있을까? ‘절대불가란 없다. 노력해서 안 될 것은 없다. 하지만 문제는 의식과 노력이 차이이다. 그렇게 만들어야겠다고 수많은 노력을 한 곳과 주어진 일을 처리한다는 의식의 차이이다.

 

수원 화성 행궁동 안에 한옥이 좀 더 많이 늘어선 거리가 있었다면 가능했을까? 그렇지 않다. 주민들의 의식의 변화가 없다면 아무리 많은 한옥이 있다고 해도 전주한옥마을을 따라잡을 수 없다. ‘우는 아이 젖 주기식으로는 변화를 기대하기 힘들다. 지금이라도 일대 혁신이 일어나지 않는 한 전주 한옥마을을 따라잡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옥마을 어디서나 길을 다니면서 먹을 것을 먹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한옥마을은 스스로 변화를 했다. 그들은 한옥마을을 살리기 위해 한옥을 늘리고 자신의 점포 앞을 개방했다. 지나던 사람들이 여기저기 쉴만한 공간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지나가던 관광객 누구라도 들어가 잠시 쉬겠다고 하면 흔쾌히 허락을 하고 시원한 물이라도 한 잔 내온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하나라도 구해야 한다. 전주 한옥마을을 찾아왔다가 떠나는 사람마다 손에 쇼핑백이 들려있는 이유이다.

 

수원에서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을까? 단 몇 집을 돌아다녀보아도 목소리가 높아진다. 장사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런 의식과 개념의 차이를 극복하지 않는다면 전주 한옥마을은 그저 꿈같은 곳이다. 그들의 변화는 먼저 지신을 버리고 모두의 이익을 앞장세웠기 때문에 가능했다.

 

주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일을 찾았다. 정신의 변화를 먼저 시작한 것이다. “수원 행궁동은 절대 전주 한옥마을을 따라갈 수 없다하지만 늦은 것이란 없다. 이제라도 전문가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상의하고 변화를 시도한다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전문가 집단이 탁상공론을 하는 자들이라면 기대할 바가 없다. 현장에서 직접 뛰어 본 전문가들이라야 변화가 가능하다. 탁상공론으로 인해 망쳐진 환경과 계획을 수도없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언제쯤이면 전주 한옥마을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직은 비교할 수 없다. 그래서 전주한옥마을이 다시 찾고 싶은 곳이다.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변화가 언제일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도 꿈까지 깨지는 않을 생각이다. 노력하면 이루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인구 125만의 전국 지자체 중 최고의 도시 수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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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서신면 정용래 가옥을 돌아보다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오얏리길 56(궁평리)에는 중요민속문화재 제125호인 화성 정용래 가옥이 자리하고 있다. 정용래 가옥은 초가집으로 1800년대 말에 지은 집이다. ''자형 안채와 ''자형 사랑채와 행랑채가 모여 경기도의 전형적인 튼 ''자형의 평면구조를 보이고 있다.

 

요즈음은 주말만 되면 답사를 나간다. 그동안 무엇이 그리 바쁜지 제대로 답사를 하지 못해 늘 몸이 굼실거리는 것이 사는 재미도 잃어버린 듯하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주말에는 가까운 곳이라도 빠트리지 않고 돌아보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한 번 답사를 나서면 7~8곳을 돌아오는 빡센 일정을 소화하는 것도 그동안 게으름을 반성하는 뜻에서이다.

 

화성시는 일개 지역치고는 많은 문화재가 소재한다. 그래서 한 바퀴 도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몇 주에 걸쳐 돌아보기로 한 곳이다. 7일 이른 시간 화성으로 향했다. 이번 답사는 화성시 서신면을 중점적으로 답사하리라 마음을 먹고 이른 시간에 길을 나선 것이다. 답사를 즐기면서 하라고 했지만 하루 만에 여러 곳을 돌아보려면 자연 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없다.

 

 

 

 

초가도 이 정도면 대갓집 부럽지 않소

 

서신면 궁평리에 자리하고 있는 정용래 가옥은 산쪽으로 자리를 하고 있는 중요민속문화재 제124호인 기와집인 정용채 가옥과 이웃하고 있다. 위쪽 정용채 가옥은 기와집이고 아래쪽 정용래 가옥은 초가집으로 조성되어 있어 한 곳에서 기와와 초가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정용래 가옥은 항상 갈 때마다 문이 잠겨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집 앞으로는 소로가 나 있고 대문 앞에는 보호수인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있다. 수령이 꽤 된 이 느티나무가 정용래 가옥과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집 주변을 몇 바퀴 돌면서 밖에서 촬영을 하자니 산비탈까지 올라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안마당이며 대문의 왼쪽에 사랑채가 있고 오른쪽에 행랑채가 세로로 길게 자리 잡고 있는 정용래 가옥은 초가이긴 하지만 구성이 잘 되어 있어 어느 대갓집이 부럽지 않다.

 

 

 

 

집 앞 도로에서는 안채와 마주하고 있는 사랑채가 보인다.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면 굴뚝이 나란히 두 개가 서 있는 것이 이곳 사랑은 부엌이 사랑과 안사랑으로 구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안채는 사랑채가 마주보이는 곳에 대청과 건넌방을 두고 꺾이는 왼쪽 아래로 찻방과 안방, 부엌을 두었다.

 

대청의 뒷벽에는 왼쪽으로 뒷창을 내고 오른쪽으로 벽장을 만들어서 조상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사용하고 있는 정용래 가옥. 이는 사당을 따로 두지 않는 민가에서 통상 쓰는 수법이다. 바깥마당은 사랑방 앞으로 터져 있으며 왼편에 헛간채가 있다. 정용래 가옥은 전체적으로 민가의 격식과 쓰임새를 갖추었던 부유한 농민의 집으로 추정된다.

 

 

 

 

볼썽사나운 문화재 안내판, 문화재명 바꾼 지가 언제인데

 

대문이 잠겨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으니 그저 집 주변만 이리저리 돌아볼 수밖에 없다. 그래도 집의 모습을 이곳저곳 꼼꼼히 촬영을 마치고나서 문화재 안내판을 보려고 했더니 이게 무슨 일인가? 안내판은 색이 다 흐려져 글씨를 알아보기조차 힘들다. 거기다가 중요민속문화재로 문화재 명칭이 바뀐 지가 꽤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중요민속자료라는 안내판과 안내 석물에 적혀 있다.

 

화성시 몇 곳을 돌아보아도 마찬가지이다. 문화재 명칭이 바뀐 것을 교체를 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문화재를 찾아다니기도 하는데 이렇게 문화재명칭 하나 제대로 적은 안내판을 세워놓지 않으면 어쩌자는 것인가? 문화재는 민족의 자랑이다. 중요민속문화재는 국가에서 지정한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중요민속문화재라고 해도 관리는 해당 지자체에서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화성시 모든 곳의 민속문화재는 민속자료라고 쓴 안내판을 교체하지 않고 있다.

 

  

 

 

문화재 답사를 하는 이유는 문화재를 온전히 보존하기 위한 작은 정성이다. 문화재의 잘, 잘못을 따지자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보존을 위해 노력을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쁜 것을 지적하기 보다는 좋은 것을 칭찬해주고 문제가 있는 것은 시정을 요구하려고 노력한다. 작은 힘이나마 후손들에게 온전한 우리의 문화유산을 물려주기 위함이다. 문화재 안내판을 정정하고 깨끗한 글씨로 교체한다고 해서 화성시의 재정이 휘청거리는 것도 아니다. 다만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란 생각이다. 화성시 문화재 담당부서에서는 관내의 문화재 안내판을 조속한 시일 내에 일제정비를 해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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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시 향토유적 이인영 생가 관리 엉망

 

한 마디로 부끄럽다. 외지인들이 와서 이곳을 찾기라도 한다면 무슨 망신인가? 더구나 요즈음 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우리나라를 찾아와 지역 문화재 관람을 다니고 있다. 각 지역마다 중국인 요우커를 비롯해 외국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많은 노력들을 하고 있다. 그들이 지역에 들어와 쓰고 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아 문화재를 이용한 지자체의 수 입 늘리기도 지역경제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여주는 문화재가 많은 곳이다. 남한강 가에 자리 잡고 있는 신륵사를 비롯해 북내면 상교리 고달사지 등 불교유적은 물론,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세종대왕릉과 효종대왕릉, 그리고 그 외에도 여기저기 많은 문화재들이 산재해 있는 곳이다. 이 문화재를 잘 이용하면 적지 않은 관광수입을 올릴 수 있는 곳이 바로 여주시이다.

 

1, 여주에서 430일부터 시작한 도자기축제를 돌아볼 겸 여주로 향했다. 휴일인데도 예년보다 많은 사람이 찾아오지 않아서인가? 아니면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오전 11) 축제장 안은 그렇게 사람들로 붐비지는 않는다. 매장 안에는 물건을 진열해 놓고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는 관계자들만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상교리 이인영 생가지를 찾아가다

 

도자기축제장을 돌아본 후 북내면 상교리로 향했다. 문화재 답사를 하러 다니다가 보면 꼭 짚고 넘어가는 것이 있다. 인근에 있는 문화재를 한 번 돌아보는 것이다. 혹 문화재가 누군가에 의해 훼손이라도 되었을까하는 우려에서다.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생긴 버릇이다.

 

여주시 북내면 상교1119-16에는 여주시 향토유적 제17(2011117일 지정)인 의병장 이인영의 생가가 소재한다. 이인영은 여주사람으로 고종 4년인 1867년 여주 북내면 상교리에서 태어났다. 이인영의 생가 앞에는 의병대장 중남 이인영 기념비가 서 있다. 이인영은 원수부 13도 의병총대장을 지낸 인물이다.

 

이인영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유인석, 이강년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강원도 춘천과 양구 사이에서 일본군과 싸우고 유인석의 제천전투에 참여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 후 부친의 병환으로 인해 의병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가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을 계기로 의병이 재기하자, 그 해 9월 원주에서 의병원수부를 설치하고 관동창의대장에 올랐다.

 

 

 

190711월 전 병력을 24진으로 하는 13도 의병연합부대를 편성한 이인영은 원수부 13도 의병총대장에 추대되었다. 군사장에 허위, 관동총대장에 민긍호 등을 선정한 뒤, 일거에 서울로 진격하여 통감부를 격파하고 조약을 무효로 만들어 국권을 회복하고자 의결했다. 그러나 각 도의 의병 중에는 제 날짜에 도착을 하지 못한 자가 많았고, 기밀을 알아차린 일본군이 먼저 공격을 해옴에 따라 다시 여주까지 퇴각을 하였다.

 

여주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패한 이인영은 대치를 하고 있던 1908128일 문경에 거주하던 부친의 사망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인영은 "충은 효이고, 효는 충이다"라는 신념을 갖고 후사를 군사장인 허위에게 맡기고 본가로 급히 내려갔다. 부친의 장례를 치른 후에는 재기하지 않고 있다가 결국 일본 헌병에 잡혀 순국을 하였다.

 

 

 

폐허가 된 이인영 생가지 정말 부끄럽다

 

요즈음은 문화가 대세라고 한다. 한류열품을 타고 지자체는 물론 각 문화예술단체들도 문화콘텐츠를 개발하여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이런 점으로 보면 이인영의 생가는 민족적 자긍심을 일깨울 수 있는 교육 자료로 최고의 가치를 갖는다. 특히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이인영이 이야기는 귀감이 될 수 있는 교육적 가치를 갖는다.

 

1일 찾아간 상교리 이인영 생가. 한 마디로 창피하다. 남들이 볼까 얼굴이 화끈거린다. 향토유적으로 지정을 했으면 당연히 관리도 해야 한다. 하지만 생가지는 주차장이 되어있었다. 생가지 이인영 기념비 안쪽으로는 차량을 주차해 놓았고, 생가지의 초가지붕은 짚이 바람에 들고 일어서 까치집이 되었다.

 

 

 

대청마루에는 짐승의 분뇨가 굴러다니고 있고 부엌문을 열어보니 누군가 이곳에서 잠이라도 자려고 했는지 접이식 침대까지 한 구석에 놓여있다. 먼지는 수북이 쌓여있고 초가 이엉은 언제 갈았는지 짚은 시커멓게 변했다. 거기다가 바람에 날려 들고 일어나 볼썽사납게 되었다. 한 마디로 관리가 전혀 되어있지 않다.

 

국기지정문화재나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문화재 관리는 훌륭하다. 하지만 정작 지역의 인물로 모든 사람의 귀감이 될 수 있는 이인영의 생가지는 그야말로 꼴불견이다. 어찌 지역 향토유적 관리를 이렇게 소홀히 할 수 있단 말인가? 여주시는 조속한 시일 내에 이인영 생가지를 재정비를 해야 한다. 이런 꼴을 보일 것 같으면 아예 이인영생가지 안내판을 없애야하지 않을까? 이런 모습을 관광객들에게 보일 수는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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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시 수지면 호곡리에 소재한 중요민속문화재 149호인 몽심재는, 층이 진 대지에 지은 집으로 지형을 잘 이용해 한옥의 멋을 극대화한 집이다. 몽심재는 조선 말기 박동식이 처음으로 지었는데, 현재는 그의 7세손인 박인기가 살고 있다. 몽심재는 산을 등지고, 앞으로는 낮은 구릉이 자리를 하고 있다.

 

몽심재를 찾아간 날 아침부터 날이 차갑다. 올 들어 가장 추운 날이라는 12월의 날씨에 찾아간 곳 몽심재. 한옥은 목조건물이라 불에는 약할 수밖에 없다. 몽심재의 건물 구성은 층이 진 산자락을 적절하게 이용하였다. 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있고,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도 높게 자리를 하고 있다. 건물마다 층이 진 것도 몽심재의 특징이다.

 

 

 

대문에 누정이 있는 몽심재

 

몽심재는 산자락에 집을 지어, 층을 지어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그 맨 아래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대문채이다. 대문채는 밖에서 보면 그저 평범한 반가의 솟을대문처럼 보인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면 돌계단 위에 넓은 터가 있고, 그 우측으로는 여러 글씨를 음각을 한 커다란 바위가 자리를 잡고 있다.

 

우측 한편에는 연못을 파 흐르는 물을 담아두었다. 아무래도 비탈이 진 집의 구조상, 많은 물이 이 연못으로 흘러들 것만 같다. 그 돌로 주변을 쌓은 연못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멋진 풍광을 자랑하고 있다. 멋이 있는 경치가 있으면 그것을 그냥 놓고 볼 선조들이 아니다. 몽심재를 지은 박동식 역시 풍취를 아는 분이였는지. 대문채 끝에 개방된 누정을 만들어 연못과 산의 경치를 감상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런 마음의 여유를 얻는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사랑채보다 높은 중문채

 

넓은 터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돌로 쌓은 축대가 있고, 그 위에 사랑채를 두었다. 사랑채가 바로 몽심재이다. 비탈진 곳에 집을 짓다보니, 사랑채의 돌 축대가 상당히 높게 자리하고 있다. 크고 작은 멋대로 생긴 돌들이 보이는 조화감, 이것도 몽심재의 또 다른 멋이 아닐까? 그저 몽심재 여기저기를 돌다가 보면, 보면 볼수록 기분이 좋아지는 집이다.

 

사랑은 바라보면서 좌측 방을 난간을 두른 누정을 삼고, 좌우측 툇마루는 앞으로 돌출을 하였다. 그리고 댓돌이 있는 곳은 안으로 집어넣었다. 다섯 칸의 사랑채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앞으로 펼쳐지는 대밭으로 된 구릉과, 대문채의 연못 등을 관람할 수 있도록 꾸며진 집이다.

 

사랑채 우측으로는 중문이 있다. 이 집의 중문은 사랑채보다 높게 자리하고 있다.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사랑채 옆으로 높게 자리를 한 중문이 보인다. 이렇듯 모든 건물이 산자락을 따라 층계식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자연을 그대로 이용하여 건물을 지은 몽심재의 아름다움이다.

 

 

 

안채 안방의 부엌이 뒤쪽에 있다니

 

몽심재의 안채는 자형이다. 안채 역시 부엌과 방이 높이가 다르다. 그래서인가 안채 한편을 외양간으로 사용할 정도로 차이가 있다. 안채의 건넌방에 붙은 부엌위로는 다락을 두었는데, 마치 이층집을 연상케 한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안방에 불을 떼는 부엌이 보이지를 않는다.

 

마침 사람이 있기에 안방의 부엌이 어디 있는가를 물어보았다. 뒤편으로 돌아가 보란다, 뒤편에는 광채와 산자락에 만든 넓은 밭이 보인다. 그런데 그 한편에 툇마루를 둔 안방의 뒤쪽이 있다. 그곳에 부엌이 자리를 하고 있다. 안방의 부엌이 집 뒤에 자리를 하고 있다니. 수많은 고택 답사를 하면서도 이런 구조는 본 일이 없다.

 

주변 경관과 함께 고풍스런 멋을 보이고 있는 남원 몽심재. 과연 풍류를 아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 지어진 집이라는 생각이다. 이런 집에서 한 철을 묵을 수만 있다면. 괜한 생각을 하면서 대문을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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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답사 30년 이제는 방송사에서도 청탁이

 

문화재답사 30. 말이 30년이지 그동안 숱한 고생을 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분야인 것을 우리 문화재의 소중함을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시작한 일이다. 날이 추운 겨울에도 쉬어본 적이 없다. 억수장마가 쏟아지는 날에도 난 길 위를 걷고 있었다.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을 우리 문화재를 찾아보기 위함이었다.

 

그동안 길거리에 뿌린 경비만 해도 엄청나다. 고생을 해서 주머니에 돈이 들어오면 바로 짐 하나 챙겨들고 길을 나섰다. 전국을 몇 바퀴를 돌았는지 모른다. 하루에 먼 거리를 걷기도 부지기수였다. 길도 없는 산길에서 길을 잃어 헤매기도 했고, 비가 오는 날 상여막에서 잠을 청해야 하는 날도 있었다.

 

그렇게 하나하나 쌓인 자료들이 방안 가득하다. 그 자료들을 보면서 늘 생각하는 것이 도대체 왜 내기 이 짓을 해야 할까라는 자문을 한다. 하지만 내가 아니면 누가할까? 라는 대답 때문에 30년을 길에 서 있었다. 그 수많은 문화재가 온전히 보존되고 있는지, 혹 누구에게 훼파는 되지 않았는지 그것이 늘 궁금하기 때문이다.

 

 

 

 

방송사에서 걸려온 전화

 

하주성 기자님이세요?”

, 그렇습니다.”

저는 KBS TV 여유만만의 작가인데요. 혹 남양주 화길옹주님이 사시던 궁집에 대한 자료 좀 받을 수 있을까 해서 전화드렸습니다

화길옹주 고택은 왜요?”

저희 프로그램에 공주에 관한 이야기가 주제인데요. 화길옹주님 고택을 촬영할 수가 없어서요.”

 

궁집은 화길옹주가 살던 집이다. 조선조 제21대 영조의 막내딸이자, 정조대왕의 막내고모인 화길옹주가 살던 집은 남양주시 평내동 426-1에 소재하는 중요민속문화재 제130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영조의 막내딸 화길옹주가 능성위 구민화에게 시집을 가자 영조가 옹주를 위하여 지어준 집이다.

 

이 궁집을 돌아보면 영조가 막내딸 화길옹주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것을 알 것 같다. 하긴 영조에게 아들은 유일하게 사도세자 한 명 뿐이었다. 이 궁집은 나라에서 재목과 목수 등을 보내어 집을 지었다고 해서 궁집이라고 부르고 있다. 당시 공주는 50칸 이상의 집을 지으면 안된다고 했다. 이 집은 그러한 법도에 따라 칸수를 꽉 채운 집이다.

 

 

 

 

보수공사로 인해 관람이 금지된 궁집

 

날이 덥다. 조금만 걸어도 땀이 흐른다. 안내판을 보고 땀을 흘리며 찾아간 궁집 입구는 철문이 굳게 잠겨 있다. 작은 쪽지에 적혀있는 전화번호로 전화를 했더니, 인터넷에 다 나와 있으니 인터넷을 보라는 것이다. 신문사에서 왔다고 해도 마찬가지 대답이다. 하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훼손을 하는 바람에 아예 개방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몇 번을 더 이야기를 하고서야 열어주는 철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궁집은 집 자체의 치목이나 석재 등이 뛰어나다. 영조가 막내딸을 위해 지어준 집이고, 화길옹주가 출가하여 세상을 뜰 때까지(1765~1772) 이곳에 거쳐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아마도 이 집은 1765년경에 지어졌을 것이다. 250년 정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집임을 알 수 있다.

 

 

 

 

치목과 석재 등을 직접 내려 보낸 영조

 

궁집은 조선시대 전형적인 양반집의 형태이다.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로 구성이 된 이 집은 안채를 자 형으로 꾸몄다. 안채는 부엌이 4, 3칸에 앞퇴를 한 칸 더 놓았다. 정침 좌우의 날개는 방과 곳간을 드렸고, 남행랑에는 곳간과 중문이 있다. 중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광이 있고, 그 앞에 안마당을 가로 질러 우측 날개채에 부엌과 건넌방이 있다.

 

정면으로는 가운데 안방을 두고 양편에는 대청과 부엌을 두었다. 안방 앞에서 대청까지는 툇마루를 놓아 동선을 이어주고 있다. 좌측 날개채에는 아랫방과 광이 있고, 사랑으로 연결이 되어있다. 사랑채는 안채의 서남쪽에 자리를 하고 있으며, 자 형으로 방 두 칸 이외에는 모두 누마루를 깔았다.

 

서남쪽 끝에는 돌출을 시켜 누정인 누마루 한 칸이 있다. 날아갈 듯한 처마를 가진 이 누정은 장초석으로 주추를 놓고 그 위에 누마루를 깐 형태이다. 기단 역시 잘 다듬은 장대석을 이용해 집의 품위를 높인 듯하다. 사랑채의 북쪽에는 기단을 높이 쌓았는데 그 위에 우물을 있다. 이 우물은 안채 큰 부엌의 뒷문 쪽이기도 하다.

 

 

 

 

격조 높은 화길옹주의 궁집

 

화길옹주가 살았다는 이 궁집은 한 마디로 그 어느 집보다 격조가 있는 집이다. 양반가의 큰 집을 수도 없이 보아왔지만 그리 크지 않은 집 구조를 갖고 이렇게 쓰임새 있게 지은 집 구조는 그리 흔치가 않다. 그 중에서도 사랑채 뒤편 장대석을 이용해 3단으로 쌓은 축대 위에 마련한 우물과 배수시설은 가히 일품이다.

 

우물에서 물이 흐르는 것을 석재로 물이 빠지는 배수시설을 만들고, 그 흐르는 물을 땅 속으로 흐르게 하여 배수구가 사랑채 뒤편으로 빠지게 하였다. 낮은 야산을 등지고 있는 궁집의 건조함을 막기 위함으로 보인다. 그 스스로가 임수(臨水)’가 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곳에서 한 세상을 살다간 화길옹주. 방송에서 자막으로 소개가 된 문화재전문기자라는 명칭. 30년 동안 오로지 우리 문화재의 온전한 보존을 위해 땀을 흘리다보니 이젠 방송사에서조차 도움을 청해온다. 적어도 30년은 한 자리에서 노력을 해야 한다는 옛 스승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덥거나 춥거나 눈이 오거니 비기 내리거나 스승님의 말씀 한 마디가 지금껏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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