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밥 따는 저 처자야 내 품 안에 잠들어 다오

이 정도면 은밀한 소리이다. 어느 세월에 농사를 짓는 머슴 녀석이 장가라도 갈 수 있으리오. 그러니 농사를 짓다말고 이런 소리 한 자락이라도 불러 젖혀 허전한 마음을 달래보려고 했을 것이다. 요즈음처럼 먹고살기조차 힘들다고 할 때는 이런 소리로 마음의 위로를 달래줄 수 있으니 말이다.

 

상주함창 공갈못에 연밥 따는 저 처자야

연밥 줄밥 내 따줄게 내 품안에 잠들어다오

 

여기서 공갈못이라고 하는 것은 공검지를 말한다. 공검지는 상주시 공검면 양정리에 있던 저수지를 말한다. 고려 명종 25년인 1195년 상주사록(尙州史錄) 최정빈이 예로부터 있었던 제방을 그대로 수축했다고 전해진다. 공검지의 길이는 860보이며, 저수지의 둘레가 16,647(5km)나 되는 큰 저수지였다고 상산지에 적고 있다. 속설에는 저승에 가도 공갈못을 구경하지 못한 사람은 이승으로 되돌려 보낸다.’고 할 정도로 유명했던 못이다.

 

 

 

함창읍지에는 이 못의 서반에는 몇 리에 걸쳐 연꽃이 피어 있어, 마치 중국의 전당호를 방불케 하는 풍취를 지녔다고 적고 있다. 공갈못에 물이차면 그 깊이가 다섯 길이나 되었다고 하니, 그 규모가 짐작할 만하다.

 

이 공검지를 공갈못이라고 부르는 내력이 있다. 홍귀달의 공검지기(恭儉池記)에 의하면, 공검지라는 이름은 공검이라는 사람이 제방을 쌓은데서 비롯했다는 것이다. 전해지는 전설에 의하면 공검지를 쌓을 때, 둑이 자꾸만 무너져 내렸단다. 그래서 공갈이라는 아이를 넣고 둑을 쌓았는데, 어떤 이유에선지 둑이 무너지지를 않아 그때부터 공갈못이라고 했다는 다소 허황된 매아설화가 전해진다.

 

 

 

우리소리의 은밀함은 단연 수준급

 

머슴녀석의 은근한 소리, 그런데 이런 말에 그 처자가 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 처자는 바로 대응을 한다. 그 대응이 또한 일품이다.

 

잠들기는 어렵지 않으나

연밥 따기가 늦어지네.

연밥따기 늦어져도

잠자주기는 어렵지 않네

 

이정도면 극치를 넘나들고 있다. 머슴 녀석을 이리저리 떠보는 수단이 여간이 아니다. 이와 유사한 소리는 얼마든지 있다. 이런 은밀한 소리를 하는 것은, 모두가 힘든 노동에서 조금이라도 힘을 덜기 위해서다.

 

저기 가는 저 할머니 딸이나 있거든 날 사위삼소

사위야 때 묵은 손님이나 내 딸이 어려서 못 삼겠네

아이고 어머니 그 말씀 마오 참새는 작아도 알을 낳고

제비는 작아도 강남을 가고요 굴새는 작아도 굴을 파오

 

이정도면 누가 따를 것인가? 농사 소리를 하면서도 이렇게 은밀함이 있었다. 그저 세월이 지나는 것이 무료한 것도 아니다. 뼈 빠지게 고생을 해도 이놈저놈에게 다 뺏기고 나면 남는 것이 없다. 그러니 소리라도 이렇게 해보아야 답답한 속이 풀릴 것이다. 이런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 예전에는 양반이라고 빼앗아 가고 지금은 일 년 내내 어렵게 지은 농사를 수매가를 낮춰 고통을 당하게 한다. 힘들게 밭농사를 지으면 중간 상인들만 배를 불린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요 민초들을 잘 살게 해주겠다고 떠벌린 사람들이 한 짓이다.

 

 

 

지금은 치유의 소리를 다시 찾을 때

 

그런 마음에 상처를 모두 치유하던 소리다. 그래서 우리 소리는 그 안에 무한한 힘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 이런 소리까지 잃어버렸다. 하기에 더 깊은 상처가 남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저기 가는 저 아가씨 냉수나 한 그릇 떠다나 주오

언제 보았던 님이라고 냉수를 한 그릇 떠달라오

처음 보면 초면이요 다음 보면 구면일세

초면구면 다 제쳐놓고 냉수나 한 그릇 떠다나 주오

 

상처가 깊으면 모든 것이 다 하기가 싫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점차 농토를 밭으로 만들어 도지를 준다고 한다. 인삼 재배를 하는 사람들에게 도지를 주면 농사를 지을 때처럼 속을 썩일 일도 없다는 것이다. 이래저래 아픈 상처만 안고 살아가야 하는 농민들. 예전의 정겨운 소리를 다시 찾을 수는 없는 것일까?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소리의 소재가 되는 여유를 다시 찾기만 바랄뿐이다.

 

이제 음력으로 새해가 시작되었다. 입춘이 되면 농사를 지을 준비들을 해야 한다. 올 해는 모든 농사를 짓는 분들이 제발 이렇게 마음 아픈 일이 사라지고, 정겨운 소리 한마디쯤 부를 수 있는 여유가 생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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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 군자봉 서낭굿(사진 시흥문화원)

 

18일과 19일 종합운동장 일원에서 열려

 

2일 동안 흥겨운 한마당 놀이판이 벌어진다. 18()19(), 오산시 종합운동장 일원에서 열리는 재20회 경기도 민속예술제는 풍성한 먹거리와 볼거리, 즐길거리를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 경기도 민속예술제는 경기도 31개 시군에 전해지는 각종 민속놀이와 민요, 풍물 등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또한 문화예술 체험부스에서는 직접 두드리고 불어보고 체험하는 전통악기는 물론, 다양한 전래놀이를 직접 행해보는 전해놀이 체험 한마당도 운영한다. 다양한 체험부스에는 닥종이 인형체험, 퀼트가방 만들기, 헤어밴드, 모자체험, 우산에 그림그리기 등 아이와 함께 즐길 수 있는 놀이도 다양하게 마련된다. 또한 각종 먹거리 부스도 함께 운영한다.

 

18일 오전 9시 안산둔배미 배치기소리로 시작하는 경연은 1일차인 18일에 14개 시, 군이 2일차인 19일에는 16개 시군이 자신들의 명예를 걸고 격돌한다. 이번 민속예술제는 민속놀이 19개 팀, 농악 6개 팀, 민속극 2개 팀, 민요 2개 팀, 기타 1 팀 등 30개 팀이 다양한 민속예술을 보여준다.

 

 

 

18() 경연순서

순서

시간

지역

출연작품명

경연구분

1

9:00~9:30

안산

안산 둔배미

배치기 소리

민속놀이

2

9:30~10:00

과천

과천 선소리 산타령

민요

3

10:00~10:30

부천

석천농기고두마리

민속놀이

4

13:00~13:30

성남

이무술 집 터 다지는 소리

민속놀이

5

13:30~14:00

여주

이포 나루굿

민속놀이

6

14:00~14:30

파주

교하기세울농악

농악

7

14:30~15:00

화성

화성두레농악 판제

농악

8

15:00~15:30

광명

철산 쇠머리 디딜방아 액막이 놀이

민속놀이

9

15:30~16:00

의정부

유현리기우제

민속놀이

10

16:00~16:30

포천

포천 가노 농악

농악

11

16:30~17:00

하남

남한산나무꾼 길싸움 놀이

민속놀이

12

17:00~17:30

김포

대명항 배 띄우는 소리

민속놀이

13

17:30~18:00

구리

구리 구지농악

농악

14

18:000~18:30

안성

안성 청룡 바우덕이 지경다지기

민속놀이

 

 

 

19() 경연순서

순서

시간

지역

출연작품명

경연구분

1

9:00~9:30

용인

포곡읍에 전해 내려오는 용인이씨 장례행렬

민속놀이

2

9:30~10:00

오산

오산외미거북진놀이

민속놀이

3

10:00~10:30

군포

풍년 아리랑

민속극

4

10:30~11:00

양평

양평나물놀이와 목도소리

민속놀이

5

11:00~11:30

동두천

탑동상여소리

민속놀이

6

11:30~12:00

남양주

삼봉두레풍물

농악

7

12:30~13:00

양주

양주들노래

민속놀이

8

13:00~13:30

시흥

군자봉성황제 유가

민속극

9

13:30~14:00

수원

수원 두레

농악

10

14:00~14:30

광주

남한산성 취고수악대

민속놀이

11

14:30~15:00

연천

임진강참게줄당기기

민속놀이

12

15:00~15:30

이천

용면리 용줄다리기

민속놀이

13

15:30~16:00

안양

안양만안답5 놀이

민속놀이

14

16:00~16:30

가평

잣돌이의 꿈

생업

15

16:30~17:00

고양

진밭 농사놀이 소고춤과 농요

민요, 무용

16

17:00~17:30

평택

파일난장 등대굿 놀이

민속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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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다. 그만큼 한 우물을 파기기 쉽지가 않다는 이야기이다. 어린 나이인 15살이면 중학교 2학년이다. 그 나이에 소리를 시작했다. 그리고 벌써 남들이 중년이라고 하는 42살이 되었다. 27년을 그렇게 소리에 매달려 살았다. 벌써 강산이 세 번째 바뀌고 있는 셈이다.

 

소리꾼 김보연은 경기소리를 하는 여인이다. 어린 나이에 소리를 시작하게 된 것은 어머니와 고모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튼실한 불교신자인 어머니께서 다니는 절의 주지스님이 아이를 소리 등을 하는 예능방면으로 내보내라고 했다는 것이다.

 

어머니께서 절에 가시면 스님들이 제 사주를 보고 음악과 같은 예술계통으로 공부를 시키라고 하셨대요. 그런데 제가 중학교를 다닐 때 고모님이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인 경기민요 김혜란 선생님께 소리를 배우고 계셨어요. 고모님 소개로 김혜란 선생님 문하에 들어가 소리공부를 시작했죠.”

 

 

 

27년간 다듬은 농익은 소리가 일품

 

29일 만난 소리꾼 김보연. 늘 무대에 서는 사람이기에 화려할 것이라고 생각을 하기 쉽다. 하지만 그저 이웃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그런 편한 모습이다. 27년이란 세월동안 갈고 닦은 기량은 이미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칭찬을 한다. 한 마디로 소리가 농익었다고 표현들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는 소리를 하는 것이 즐거워요. 아마 천성적으로 소리를 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예요. 무대에 올라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소리를 하고 박수를 받을 때는 희열을 느끼고는 하죠. 요즈음은 제가 소리를 가르치면서 저에게 수업을 받는 분들이 소리를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인생의 변화가 왔다고 말을 하면 그때가 제일 보람이 있죠.”

 

세상을 살아가면서 힘들고 지친 사람들이 소리를 배우고 난 후 인생이 달라졌다고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힘들고 지쳤을 때 소리를 하면서 위로를 받게 되고, 소리 속에서 인생의 진한 맛을 느낄 수 있다고. 그래서 요즈음은 자신이 무대에 서서 박수를 받는 것보다, 오히려 제자들이 힘이 된다고 하는 소리를 듣는 것이 더욱 값지게 느껴진다고 한다.

 

 

 

3번의 개인발표회와 음반 출반해

 

소리꾼들은 자신만의 음악세계가 필요하다. 경기민요는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기 때문에 원형의 보존이 필요하다. 하기에 소리꾼들은 날마다 쉬지 않고 학습을 하고 발표를 한다. 하지만 그렇게 기본의 소리만을 지키고 있으면 대중화에 어려움이 따른다. 요즈음은 젊은 국악인들이 퓨전국악이라는 것을 새롭게 창출해 많은 사람들과 공유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는 그동안 세 번의 개인공연을 했어요. 이제 또 다른 무대를 보여주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고요. 그동안 음반도 출반을 했는데 반응이 좋아요. 김혜란 선생님께서 우리음악연구회를 통해 지역에서 전해지고 있는 소리를 편곡 등을 통해 새롭게 재조명을 하고 계세요. 우리음악연구회 공연 때 무대에 올라 소리를 하면서 제가 나아갈 길을 찾은 것이죠.”

 

어야디야 차

어여

칠산바다에 고기도 많고

우리네 주머니 돈도 많다 어야디야 차

어여

어야디야 차

이짝저짝 막걸리 장사야

한 잔을 먹어도 톡톡히 돌려라

어여 어여 어야디야 차

 

충청남도 태안의 고기푸는 소리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꾼 김보연의 소리는, 현장에서 듣던 소리와는 남다르다. MBC 한국민요대전 충남편의 진행을 맡았던 나로서는 귀에 익었던 이 소리가 남다르다. 구순한 어부들이 하는 소리보다는 한결 정결해진 느낌이다. 선소리를 하고 있는 김보연의 소리에 빠져들고 만다.

 

 

 

나만의 색깔이 있는 소리를 하고 싶어요.”

 

그동안 우리음악연구회를 통해 많은 지역의 소리들을 하면서 생각을 했어요. 전통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서야 할 때가 되었다고요. 그래서 저는 이제 저만의 소리세계를 찾는데 노력을 하고 있어요. 그동안 우리 소리를 지켜 오신 많은 지역의 소리꾼들이 남기고 간 소리를 이 시대에 맞게 재구성을 하는 작업이죠.”

 

김보연은 국악인들의 등용문이라는 전주대사습에서 차상을 받았고, 경기국악제 민요부문 명창부에서 대통령상을 받았다. 이미 그녀의 소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있으며, 명창 김혜란 선생의 문하에서 갈고 닦은 학습이 이제는 정점으로 치닫고 있다고들 평을 한다. “앞으로 무엇이 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김보연의 대답은 한 마디로 국악의 대중화를 이루는데 열정을 바치겠다고 한다.

 

왜 우리나라는 외국의 소리들에 그렇게 후한 점수를 주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들의 정서에는 우리소리가 맞는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선생님께서 심혈을 기울이고 계신 우리음악연구회의 일 중에, 각 지역의 소리를 찾아서 무대에 올리는 작업과 더불어 우리 소리의 대중화를 위해 모두가 좋아하는 소리를 창출해 내야죠. 그것이 제가 이루어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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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네 풍습에 보면 정월에 많은 놀이가 전해지고 있다. 각 마을마다 전승되던 그 많은 놀이문화가 세월이 흐르면서 거의 소멸 직전에 놓여있어 안타까움을 주지만, 그래도 아직은 이곳 저곳을 찾아다니면 꽤 볼만한 놀이가 현장에서 연희되고 있다.

 

정월 초하루엔 차례를 지낸 후 세배를 하고 이웃을 찾아다니면서 어른들을 뵙고 덕담을 듣는 재미와 함께 각종 놀이를 즐기곤 했다. 사실은 아주 어릴 적에야 덕담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 보다는 안주머니 깊숙한 곳에서 꺼내어 주는 세뱃돈이 탐이 나 세배 후 내어주는 떡국도 마다하고 한집이라도 더 다니려고 바람난 수캐처럼 온 마을을 휘젓고 다녔다.

 

한데 요즘 아이들은 그런 놀이문화보다는 세뱃돈을 들고 먼저 피시(PC)방으로 달려간다고 하니 참으로 세상이 많이 변했다는 느낌이다. 우리 전승민속 중 80%는 정월에 몰려있다. 이것은 새해를 맞이하면서 일 년 동안 모든 일이 잘 되기를 염원하는 기원적(祈願的) 사고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동의 놀이인 줄다리기

 

초하루를 분주하게 보낸 뒤 이튿날은 귀신날이라고 하여서 하루를 근신한다. 초사흘부터 시작되는 각종 민속놀이는 날이 갈수록 그 열기를 더해 정월 보름을 기해 그 절정에 달한다. 지신밟기를 비롯해 정월 열나흘날이 되면 마을마다 동제(洞祭)를 지내고, 개인들은 물가를 찾아 일년의 안전을 위한 치성을 드리면서 방생을 한다. 그런가하면 액송(厄送)의 연을 날리기도 하고, 마을의 가장 큰 행사로 펼쳐지는 줄다리기를 하기도 한다.

 

줄다리기는 기원적 사고를 띠우고 있는 민속놀이로 마을마다 그 규모나 줄을 다리는 내적사상, 그리고 줄을 당긴 후에 갖는 의미가 조금씩 다르다. 물론 풍농(豊農)이나 풍어(豊漁)에 대한 기원과, 일 년의 초복축사(招福逐邪)를 의미하는 뜻은 공통적이다.

 

그러나 줄을 당기고 나면 팔, 다리가 튼튼해져 각종 질병에서 벗어날 수 있다거나, 줄을 당기고 난 후 그 줄을 잘라다가 대문에 매달면 액을 쫓을 수 있다거나, 또 줄을 가마솥에 넣고 푹 삶아 물을 마시면 위장병이 낳는다거나 하는 속설은 지역마다 다르다. 어느 지역에선 줄을 당긴 후 그 줄을 태워 비료로 쓰기도 하고, 보를 막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줄다리기가 끝난 후 마을 입구에 있는 장승에 줄을 감아 마을에 드는 액을 막기도 한다.

 

이렇듯 다양하게 표출되는 줄다리기는 마을의 크고 작음에 따라 그 줄의 형태나 크기가 다르다. 그저 외줄로 당기는 곳이 있는가 하면 쌍줄이라는 암줄과 숫줄로 구분이 되기도 한다. 충남 당진 기지시줄다리기나 충북 음성 등에서는 줄의 크기도 대단하려니와 수천 명이 달라붙어 줄을 당겨 장관을 연출하기도 한다.

 

정월 초부터 꼬기 시작하는 줄

 

우리 경기도에서도 마을마다 줄을 당겼으며, 아직도 많은 마을에서 줄다리기가 전승되고 있어 전통을 지키려는 마을 주민들의 애정을 읽을 수 있다. 성남시 판교 너더리(널다리) 줄다리기는 그러한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전승돼 온 너더리 줄다리기는 정월 초부터 줄을 꼬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가로대를 세우고 그 위로 줄을 걸어 선소리에 맞추어 소리를 받아가면서 신명나게 춤을 추며 줄을 꼬아 나간다.

 

평원 광야 넓은 들에 우로 중에서 절로 자란

(드리세 드리세 동아줄을 드리세)

육척 칠척 길고 긴 짚을 거꾸로 잡고 추리고 추려

(드리세 드리세 동아줄을 드리세)

고이고이 추린 후에 동아줄을 드려보세

(드리세 드리세 동아줄을 드리세)

동으로 열발 서로 열발 남으로 열발 북으로 열발

(드리세 드리세 동아줄을 드리세)

동서남북 길게길게 사오십발 드린 후에

(드리세 드리세 동아줄을 드리세)

 

흔히 동아줄 드리는 소리라고 하는 줄을 꼬는 소리는 먼저 지주대를 세우고 그 위에 가로대를 얹은 다음 짚을 걸어 여러 명이 서로 엇갈리면서 줄을 꼬아 나가면서 부르는 소리다. 선소리꾼이 북을 치면서 소리를 주면, 줄을 꼬는 사람들이 드리세 드리세 동아줄을 드리세로 소리를 받는다.

 

작업을 하는 소리이니 작업의 피로를 잊기 위해 장단도 경쾌하고 소리도 활기차다. 줄다리기에 사용하는 짚단은 많은 양이 필요하고 줄을 꼬는데 만도 며칠씩이나 걸리는 작업이다. 자연히 작업의 피로를 잊기 위해서는 소리가 필요했을 것이고, 이왕이면 경쾌하고 빠른 장단이 필요해 생겨난 현장성이 강한 소리다.

 

우리 소리는 모두 작업환경이나 장소 등에 따라서 그 창출의 조건을 갖게 된다. 줄꼬는 소리 또한 장시간 작업을 하다 보니 피로를 잊기 위해 다분히 오락적인 요소를 갖게된다. 여러 명이 소리를 주고받으면서 춤을 추어가며 줄을 꼬다보면 단순 작업에서 오는 지루함과 피로를 잊게 되는 것이다.

 

또한 작업을 할 때 막걸리라도 한잔 들이키면 흥에 겨워 춤이 절로 나오게 된다. 처음에는 느린 장단으로 소리를 하다가 흥이 올라 막바지에 다다르면 잦은 장단을 몰아치면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방법으로 소리를 이끌어 간다. 소리를 메기는 선소리꾼이 얼마나 소리를 잘 주느냐에 따라서 작업의 성과가 달라지는 것이 우리 소리나 작업의 특징이다.

 

2002226(음력 정월 15) 오후 6시부터 성남시 판교동에서는 마을 주민 500여명이 모여 마을의 안녕과 풍농, 가내의 안과태평(安過太平)을 위한 줄다리기가 진행됐다. 오래 전부터 전해지던 너더리 줄다리기는 1984년 이후 중단되었던 것을 지난해부터 마을 주민들이 재현시켜 정월 대보름을 기해 마을의 한마당 축제로 승화시켰다. 마을에는 수령 600여년 된 회나무가 있는데 이 곳에서 먼저 동제를 지낸 후 줄을 당긴다.

 

 

마을 토박이인 정인철옹(73, 판교동 242)에 따르면 과거에는 줄다리기를 하기 전에 주막거리인 이 곳에 남사당패들이 들어와 줄을 타고 한바탕 판굿을 했다면서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마을 어른들 이야기로는 암줄과 숫줄이 각각 5060m나 되는 거대한 줄을 썼으며, 줄다리기를 한번 하고나면 마을에 양식이 고갈 되었을 정도로 대단한 마을의 축제였다고 한다.

 

오후 7시가 넘어서 선소리꾼인 방영기씨(45, 성남시 분당구 이매동 361)의 선소리에 맞추어 주민들이 소리를 받으면서 줄을 드리는 모습을 시연한 다음 줄 고사를 지내고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판교파출소앞 구 도로를 막고 횃불을 밝힌 채 벌어진 줄다리기는 500여 주민들의 함성과 마을 풍물단, 판교농협 주부농악대의 풍장이 한데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었다. 3회를 반복해 여성 쪽인 암줄이 이겨야 풍년이 들고 마을이 편안하다고 하는 속설을 지닌 너더리 줄다리기는 올해도 여성 쪽이 이겼다. 이는 여성이 다산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2시간여에 걸친 너더리 줄다리기가 끝났다. 그 안에 녹아있는 우리 옛소리 한 도막의 의미는 남다르다. 잊혀져 가는 우리 것을 지키기 위해 열정을 가져왔던 마을 주민들의 노력과는 달리 이제 판교 재개발로 인해 현장을 잃게 된 줄다리기와, 그 줄꼬는 소리를 다시 듣게 될 수 있을 지 의문이다. 마을이 개발되고 현대화되면서 우리네 소중한 마을 민속과 소리가 퇴색되어 가고 있음이 못내 가슴 아프게 느껴졌다.

 

·사진 하주성(경기일보 2002311일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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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 세모시 곱게 차려입고

안성 청룡으로 사당질 가세

 

우리네 삶이 암울했던 시절에 나옴직한 소리다. 한산 세모시를 곱게 차려입고 안성 청룡으로 사당질을 간단다.

 

안성 청룡이란 서운면에 있는 고찰 청룡사를 일컫는 말이다. 왜 하필이면 안성 청룡이었을까? 그 곳은 옛부터 남사당패들의 근거지였다. 칠사당패라고 불리던 남사당패들이 청룡사 밑에 자리를 잡고 봄이 되면 길을 떠났다가 겨울이 되면 다시 돌아와 그 곳에서 한겨울 동안 기예를 익힌 후 다시 길을 떠나는 일을 반복했다. 이 곳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안성남사당패는 그 기예가 출중하기도 했지만 남사당의 원류로 알려져 있다.

 

남사당패의 시원(始原)은 신라 때부터 전해진 예인집단(藝人集團)이라고 한다. 과거 살기가 암울하던 시절, 많은 기예인들이 이 곳으로 몰려와 집단으로 취락을 이루면서 청룡사 일대는 남사당패와 끊을 수 없는 인연을 맺게된다. 그들이 이 곳에 거주를 한 것은 안성장이 가까이 있고, 정월과 각 절기에 절 집을 찾는 이들을 위해 마당놀이를 통하여 최소한의 생활대책이 되었기 때문이다. 청룡사나 천안 광덕사 등 남사당패들이 절 주변을 택했던 것도 절 중창에 참여를 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삶을 영위할 목적이 앞섰을 것이라는 추측도 든다.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민가보다는 절집 근처가 삶에 도움이 되었으리라는 생각이다.

 

남사당패의 조직을 보면 맨 위에 꼭두쇠가 있고, 그 밑에 곰뱅이·뜬쇠·가열·삐리·저승패·등짐꾼 등으로 4050명이 한패거리를 이룬다. 꼭두쇠는 패거리의 우두머리로 대내외적인 책임을 지며, 꼭두쇠의 능력에 따라 식구가 모이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한다. 곰뱅이쇠는 패거리의 기획을 맡아본다. 곰뱅이란 남사당패의 은어로 허가란 뜻이다. 어느 마을에 들어갔을 때 놀이 마당을 열어도 좋다는 승낙을 받는 일을 맡아보는 사람을 말한다. 곰뱅이쇠가 둘일 경우 하나는 가장 중요한 문제인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 글()곰뱅이쇠다.

 

 

다음으로는 뜬쇠가 있다. 뜬쇠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파트장이나 수석의 역할을 한다. 뜬쇠는 14명 내외로 구성이 되며 상공운님(상쇠징수님(수징고장수님(수장고북수님(수북호적수·벅구님(소고상동무님·회덕님(선소리꾼버나쇠·얼른쇠(요술쟁이살판쇠(땅재주꾼어름산이(줄꾼덧뵈기쇠·덜미쇠 등 각 부분의 우두머리를 말한다. 뜬쇠의 밑에는 몇 사람의 기능을 익힌 가열이 있으며, 밑으로 초임자인 삐리를 둔다. 저승패는 나이가 먹어 기능을 상실한 사람들을 일컫는다. 꼭두쇠는 패거리에 의해 선출되며 기능을 발휘할 수 없거나 잘못이 있어 신임을 잃으면 바꾸게 된다. 협의를 통한 다수결의 방식을 통해 선출되며 일정한 임기는 없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소고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줄 위에 오르니 돈 쏟아진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바람결에 잘도 떠나가네

 

안성 남사당패의 꼭두쇠 바우덕이가 얼마나 대단하였는가를 알 수 있는 소리다. 꼭두쇠 바우덕이(본명이 김암덕(金岩德)이라 전함)는 능력이 있는 꼭두쇠로 그가 이끌던 남사당패를 개다리패라고 불렀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꼭두쇠였던 그는 남사당패를 최고의 기예 집단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그 뒤를 이은 복만이패(꼭두쇠는 안성출신 김복만)1935년 당시 가장 활발하게 한수 이북을 누빈 유랑집단이었다. 복만이패를 이은 원육덕패(여주출신)는 해체된 복만이패 사람들을 규합하였으며 1939년 멀리 북간도까지 들어가서 활동하다가 해체되었다. 복만이패가 해체될 때 유일하게 안성을 기점으로 활동하던 이원보패를 마지막으로 유랑집단으로서의 기능이 상실되었다.

 

8살의 어린 나이에 이원보패에서 상무동으로 남사당의 길을 걷기 시작한 김기복옹(74, 안성시 보개면 남풍리 1124). 마을의 두레에서도 그의 기량은 뛰어났다.

 

어려서 남사당패에 가담해서 돌아다니다 보니 학교도 늦게 졸업을 했어요. 17세가 되어서야 초등학교를 졸업했는데 당시 쇠가 치고 싶어서 빈 도시락을 젓가락으로 두드려가면서 장단을 익혔죠

 

끼를 주체할 수 없어 농사를 지으면서도 어디서 걸립패가 떴다 하면 그 길로 집을 나서곤 했다. 20여세가 되면서 꼭두쇠의 기질을 갖고있던 김옹은 안성 풍물팀을 이끌고 이승만대통령 취임식에 참가하기도 했다.

 

농사를 지으면서도 농사일보다는 쇠를 치고 걸립을 다니는 일이 더 좋았으니까요”. 그렇게 조직한 안성남사당 풍물놀이팀이 1988년에는 전주대사습에서 농악부분 최우수상을 받았고, 다음해인 1989년에는 제30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이 해 김옹은 남사당 풍물놀이팀 상쇠로 참가하여 개인연기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결국 안성남사당의 맥은 조선조 말의 바우덕이로부터 시작하여 김복만-원육덕-이원보-김기복으로 이어지면서 해체와 결성을 반복하면서 끈질기게 맥을 이어왔다.

 

여기도 하나 저하 저기도 또 하나

(여기도 하나 저하 저기도 또 하나)

여보시오 농부님네 이 내 한 말을 들어보소

(여기도 하나 저하 저기도 또 하나)

여기도 한 방인데 신발을 벗고서 들어오소

(여기도 하나 저하 저기도 또 하나)

 

모판에서 모를 뽑아내 논에 옮겨 심을 때 부르는 모심기소리다. 2030여명이 한 줄로 길게 늘어서 선소리꾼의 메김소리를 받으면서 모를 심어 나간다. 뒤로 이동을 하면서 모를 심어나가는 농사꾼들의 마음이 그대로 반영된다. 논에 들어갈 때는 신을 벗고 들어간다고 한다. 그 곳이 삶을 영위하는 곳이기에 논도 방이라는 것이다. 방에 들어가려면 당연히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하지 않는가. 농사를 짓는 농사꾼들의 마음이 그 소리 안에 그대로 배어있는 대목이다. 그렇게 마음을 가져야 삼배출의 소득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정성이 가득 깃들어 있음을 일 수 있다.

 

농사를 지으면서도 먼저 남사당을 생각하는 김기복옹. 그는 오늘도 전수회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에 여념이 없다.

기계로 짓는 농사말고 다랑이 논이 한 서마지기 정도가 있는데 시간이 되면 아이들과 함께 직접 손 모를 심으면서 함께 소리를 하고 싶어요

 

아이들에게 산 체험을 알려주기 위해서 직접 신발을 벗고 논에 들어가 길게 늘어서서 소리를 주고받으면서 모심기를 해보고 싶단다. 그것이 정녕 우리네 생활에서 배어 나오는 멋을 알 수 있고, 그러한 마음이 아니면 남사당놀이를 하기가 어렵단다.

남사당은 정말 어려운 기예를 갖고 있어요, 그만큼 마음가짐이 되어있지 않으면 배울 수가 없습니다

 

서운중학교 학생들을 가르쳐야 한다면서 황망히 길을 나서는 김옹에게서는 진한 토장 내음이 난다. 그 쇠가락에 남사당의 장인 정신이 배어있다고 하면, 그의 소리에는 짙은 농사꾼의 애환이 서려있다. ‘여기도 한 방이니 신발을 벗고 들어오라는 그의 소리처럼, 진정한 꾼으로서의 노옹의 삶이 오늘도 바우덕이 묘 앞길을 따라 먼 길을 떠나던 옛 남사당패들의 행렬처럼 긴 여운을 남긴다.

 

200241일자 경기일보 / ·사진/ 하주성(민속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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