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안곡서원과 은행나무는 무슨 관계일까?

 

명현들의 위패 모신 전각엔 그 흔한 현판 하나 달지 않았다. 홍살문을 지나 서원 솟을대문 앞에 이르니 우측에 안내판이 보인다. 안곡서원은 조선조 현종 7년인 1666년 남양 현감으로 부임한 민기중이 지방 유림들의 공의를 받아들여 기묘명현인 도원재 박세희의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안곡사를 창건한데서 비롯한다.

 

도원재 박세희는 조선조 성종 22년인 1491년에 태어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박세희의 본관은 상주이고 자는 이회, 호는 도원재이다. 할아버지는 미창이고 아버지는 군자감부정 사화이며, 어머니는 연기현감을 지낸 신복담의 딸이다.

 

박세희는 중종 9년인 1514년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1515년에 홍문관수찬을 지냈다. 1517년에 정언에 임명된 후 이조좌랑과 충청도도사, 장령, 홍문관응교를 역임한 후 1519년에 사간이 되었다. 같은 해 좌부승지가 되었으나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의 일파로 몰려 상주로 유배되었다가 강계에 이배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액을 받은 안곡서원

 

안곡사는 현 위치에 있었다고 한다. 화성시 서신면 장안리 585번지에 소재한 안곡사는 마을 안쪽에 수령 400여 년의 커다란 은행나무가 한그루 서 있고 그 맞은편 산자락에 자리한다. 처음에는 향사를 위해 마련한 안곡사에는 현종 9년인 1668년 박세희의 백형으로 향리에 은거하면서 학자와 효자로 일생을 보낸 송촌 박세훈(1488~1553)을 배향하였다.

 

처음에는 향사의 기능을 갖고 있던 안곡사는 경종 1년인 1721안곡(安谷)’이라는 사액을 받으면서 선현 배향과 함께 후학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인 서원의 기능을 함께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고종 8년인 1871년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75년 사우를 복원하였다. 안곡서원은 현재 화성시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되었다.

 

이른 시간부터 화성 곳곳을 다니다가 보니 어쩌다 안곡서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멀리서 바라본 은행나무의 위용에 끌려 들어갔다가 만나게 된 안곡서원이다. 서원이나 향교는 특별한 일이 아니면 문을 닫아놓기 때문에 걱정을 하고 찾아갔는데 다행히 문이 열려있다. 이럴 경우 괜히 반갑기도 하고 관리를 하는 사람에게 인사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다.

 

 

 

 

조촐한 강당, 이곳에서 묵고 싶다.

 

솟을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앞에 강당이 자리한다. 세 칸 팔작지붕으로 된 강당은 계단 위 선영을 모신 재실을 마주하고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강당의 뒷벽을 바라보아야 한다. 몇 단의 돌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앉은 강당. 크지 않은 강당은 문을 열고 안을 보니 한 편에 게판이 걸려있다.

 

이곳에서 제향을 지내기는 하는 것일까? 강당 안은 그리 많은 서생들이 모였을 것 같지는 않다. 농번기라 사람들을 만나기조차 힘든 시골마을에서 누구에게 질문을 할 수도 없다. 다만 이렇게 조용한 강당 안에서 며칠이고 묵으면서 그동안 미루어 놓았던 책이라도 실컷 잃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누군가 마음이 맞는 지인과 함께 밤새 세상을 논하고 싶은 그런 강당의 형태이다.

 

강당 앞에서 계단 위를 바라보니 재실의 문도 열려있다. 안으로 들어가 잠시 머리를 조아린 후 문을 열어보니 안으로 다 걸려있다. 어떻게 닫은 것일까? 문 밖에는 그 흔한 잠을통 하나 걸려있지 않은데 말이다. 재실 안 모습이 궁금하지만 여기까지 들어온 것만도 고마울 수밖에. 강당으로 내려오려다가 건너편을 바라보니 은행나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이 은행나무 안곡서원과 어떤 관계가 있나?

 

은행나무를 바라보면서 생각을 한다. 전국의 향교와 서원을 다니다가 보면 반드시 주변 가까운 곳에 은행나무가 한두 그루 씩 서 있었다. 그렇다면 안곡서원과 마주하고 있는 이 은행나무 역시 서원과 관계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안곡사를 처음으로 신축한 것은 1666년으로 350년이 되었다.

 

은행나무의 수령은 400여년이 지났다고 한다. 그렇다면 안곡사를 지을 때 이 은행나무를 함께 식재한 것은 아니었을까? 주변에 수소문을 해보았지만 아는 사람이 없다. 괜한 생각하나가 머리를 아프게 만든다. 하지만 현재 안곡서원의 경우 옛 모습이라고 할 수는 없다. 더욱 사액서원이라고 하면 현재의 모습보다는 더 넓었을 것이다.

 

저 은행나무와 안곡서원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혹 저 은행나무가 서 있는 장소까지 안곡서원이 미친 것은 아니었을까? 사액서원이었다는 설명이 더욱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든다. 다음 일정 때문에 더 오래 지체할 수가 없어 장안리 일대를 더 돌아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다음 화성시 답사를 나갈 때는 다시 한 번 이곳에 들려 안곡서원과 은행나무에 대해 좀 더 알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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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시 궐1147에 소재한 오산시 궐리사는 논산의 노성 궐리사와 함께 우리나라 2대 궐리사 중 한 곳이다. 조선 후기의 사당형식을 보여주고 있는 오산시 궐리사는 경기도 기념물 제14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조선 전기 문신이자 공자의 64대 손인 공서린(14831541) 선생이 후학지도를 위해 세운 곳이다.

 

공서린 선생은 중종 2년인 1507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공조참의, 대사헌 등을 지냈다. 선생이 후학을 지도할 때 은행나무에 북을 달아 놓고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도록 깨우쳤는데, 그가 죽자 은행나무도 말라죽었다고 전한다. 그 뒤 정조가 화산에서 바라보니 많은 새들이 슬피 울며 은행나무 곁으로 모여들었고, 이를 괴이하게 여긴 임금이 가까이 가서 보니 죽은 은행나무에서 새싹이 돋고 있었다고 한다.

 

정조 17년인 1792년 이곳을 공자가 살던 노나라의 마을 이름을 따라 궐리로 바꾸고 사당을 세운 후 궐리사라고 했다. 고종 8년인 1871년에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00년 다시 세우고 1981년 강당을 세웠으며 1993년 중국 산동성에서 기증 받은 공자의 석고상을 모셨다.

 

 

 

 

동학서묘의 전형적 서원 건축양식

 

91일 오후 궐리사를 찾았다. 아침 일찍 들려보았으나 문을 열지 않아 오후에 다시 찾아간 것이다. 솟을삼문의 우측 문을 통해 들어가고 좌측 문을 통해 나오는 이 궐리사는 향교나 서원의 전형적인 출입방식을 택하고 있다. 계단을 올라서면 좌측에 수령 500년이 지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공서린 선생이 죽자 나무도 함께 죽었다가 회생을 했다는 이 은행나무는 보기 드물게 생육이 좋아 문화재로 지정해도 충분할 정도이다. 은행나무를 비켜서 공자문화전시관을 좌측에 두고 계단을 올랐다. 문을 들어서면 중앙에 공자의 석상이 모셔져 있고, 우측으로는 공자를 모신 사당인 성묘(聖廟)가 자리하고 있다.

 

 

 

 

사당은 정면3·측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성묘 한편으로는 석전제를 지낼 때 사용하는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가 마련되어 있다. 성묘의 동쪽으로는 학문을 배우는 공간인 강당 건물이 있어 동학서묘의 전형적인 서원 건축 양식을 보이고 있다. 성묘에는 공자의 영정을 모셔놓고 매년 음력 3월과 9월 정묘일에 춘추로 석전대제를 거행한다.

 

담장 너머로 아래 서 있는 은행나무를 내려다본다. 그 나무가 한 해에 수길 씩 자라났다고 하는데, 공서린이 죽고 난 뒤 200년이 지나 다시 싹이 돋아 자란나무로 보기에는 너무 생육이 좋게 자랐다. 궐리사를 보호하는 나무라고 하는 이 은행나무는, 근처 어디에서 보아도 보일 정도로 나무가 위엄이 있어 보인다.

 

 

 

 

다양한 행사를 하고 있는 문화의 산실 궐리사

 

궐리사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2호인 <궐리사성적도>가 전하고 있다. 대한제국시대 조성한 이 성적도는, 공자의 생애를 그림으로 새긴 목판으로 공자의 76대손인 한국인 공재헌이 1904년 중국 산동성에 가서 구한 것을 본떠 만들었다. 하지만 이것을 간행한 이유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목판은 피나무로 되어 있고 모두 60장인데, 크기는 가로 70, 세로 32이다.

 

궐리사는 지역 문화를 이끌어가는 곳이다. 성묘를 벗어나 우측으로 가면 중층누각으로 조성한 행단이 있다. 행단 안에서는 남녀 몇 사람이 무슨 공연을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인지 목소리를 맞추고 있다. 잠시 주변을 돌아보다가 은행나무 주변을 보니, 들어갈 때는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앉아 쉬고 있다.

 

 

 

 

 

오산시 궐리사는 각종 문화행사와 교육 등을 주관하고 있다. 가을이 무르익어 가는 계절에 궐리사에서 열리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별 헤는 밤 시낭송 콘서트(4일 오후 7)’을 찾아가 힐링을 제대로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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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은 과거 선비들이 모여서 학문을 닦고, 서원의 뒤편에 모셔진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서원 중 선액서원이란 임금이 친히 서원의 현판을 써서 하사한 곳을 말한다. 선액서원인 필암서원은 현재 사적 제242호로 지정이 되어 있으며, 전남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 377번지에 소재한다.

 

필암서원은 선조 23년인 1590년에, 하서 김인후(15101560)를 추모하기 위해서 그의 고향인 기산리에 세워졌다. 그 후 1597년 정유재란으로 불타 없어졌으나, 인조 24년인 1624년에 다시 지었다. 효종 10년인 1659년에 사액서원이 되었고, 현종 3년인 1662년에는 현종이 필암서원이라고 쓴 현판을 직접 하사해 선액서원이 되었으며, 1627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동춘과 우암의 글씨가 걸린 곳

 

서원이나 향교 등은 공부하는 곳을 앞쪽에 두고, 제사지내는 곳을 뒤쪽에 배치한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로 꾸며진다. 필암서원은 휴식처가 되는 확연루를 입구에 두고, 학습을 연마하던 청절당, 그 뒤에 학생들이 생활하는 공간인 동재와 서재가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 북쪽으로는 문과 담으로 별도의 공간을 만들어 사당을 두고 제사를 지냈다.

 

청절당의 처마 밑에는 윤봉구가 쓴 필암서원이란 현판이 걸려있고, 대청마루에는 동춘 송준길이 쓴 현판이 달려있다. 또한 확연루의 현판은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다. 사당의 동쪽에는 경장각이 있는데, 보물로 지정된 서책이나 문서 등이 보관되어 있다. 이들 자료는 주로 18세기20세기 초부터 전래된 것이다. 서책의 내용은 당시 지방교육과 제도 및 사회, 경제상, 그리고 학자들의 생활상 등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필암서원을 돌아보다

 

필암서원에는 많은 전각이 있다. 입구에 서 있는 수령 200년의 은행나무는 현재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있다. 은행나무를 비켜서면 확연루가 보인다. 확연루는 필암서원 입구의 문루로, 귀퉁이에 조각된 귀공포는 엄숙하면서도 고졸한 맛을 풍긴다. 편액은 우암 송시열의 글씨이다. 강당인 청절당은 중앙은 세 칸 대청으로 꾸미고, 좌우에 협실을 두었다.

 

모두 다섯 칸인 청절당은 옛 진원현의 객사건물을 옮겨왔다고 한다. 청절당이란 말은 우암 송시열이 쓴 신도비문 중 청풍대절(淸風大節)’이라는 글을 인용하였으며, 편액은 동춘당 송준길의 글씨이다.

 

 

 

 

세 칸으로 지어진 경장각은 인종이 하사하신 묵죽도의 판각을 보관하고 있는 곳이다. 편액은 정조대왕의 어필이다. 필암서원의 사당인 우동사는 북쪽에 하서 김인후 선생, 동쪽에 고암 양자징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편액은 주자의 글씨를 집자하였다고 한다.

 

이 외에도 필암서원의 경내에 있는 옛 전각들은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건물인 진사청을 비롯하여, 관리인이 살던 한장사, 동재유생이 기거하던 진덕재와 서재유생이 기거하던 숭의재 등이 있다.

 

 

 

 

찬찬히 살피다가 보면 30여분 정도가 소요가 되는 필암서원. 옛 흔적을 느낄 수 있는 필암서원은 입구에 서 있는 확연루를 들어서면서부터 여느 서원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중층 누각으로 지어진 확연루는 입구 오른쪽에 누각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누각 안에는 편액들이 걸려있으며, 누각에서 보면 안쪽의 서원 건물과 바깥의 시원한 정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지난 해 522일 장성을 찾았을 때 들렸던 필암서원. 아직도 그 당시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마도 선액서원이기 때문인가 보다. 당시의 명필들이 글을 남기기를 즐겨했던 필암서원. 확연루 앞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을 들일 때 다시 한 번 찾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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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와 서원, 모두 예전 교육기관이다. 개인이 운영을 하는 교육기관이냐, 아니면 국가에서 하는 기관이냐의 차이라고 보면 간단하다. 향교는 조선시대 지방에 설치한 국립 교육기관으로 유교문화 위에서 설립, 운영된 교육기관이다. 당시 국가가 유교문화이념을 수용하기 위해 중앙의 성균관과 연계시키면서 지방에 세운 교육기관인 향교는 지방의 수령이 책임을 맡았으며 중앙의 재정적 지원도 받았다.

 

이와는 달리 서원은 조선 시대 선비들이 모여 학문을 강론하거나, 석학이나 충절로 죽은 사람을 제사하던 곳이다. 서원은 조선시대에 성리학의 연구와 교육을 목적으로 지방에 세운 사학(私學)의 명칭으로, 서원은 국가의 지원을 받지 않고 지역에서 선비들이 자의적인 모임을 이어가기 위해 구성원들을 모아 꾸려나가던 곳이다.

 

 

서원은 지방사림세역의 구심점

 

조선 초기의 교육제도는 중앙에 있는 성균관과 사부학당, 그리고 지방의 향교를 중심으로 한 관학이 교육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고려 말부터 대두하기 시작한 소규모 서재의 사학도 인정되었으며 국가에서 그러한 사학을 장려하기도 했다.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은 중종 38년인 1543년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웠다.

 

우리나라의 서원은 16세기 후반부터 세워지기 시작했다. 서원은 고려 말 조선 초에 존재하던 서재의 전통을 잇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재의 성격이 단순히 유자의 안거강학의 장소였던 데 반해, 서원은 안거강학의 기능뿐만 아니라 선현을 봉사하는 사묘를 가지고 있었다. 서원은 지방사림세력의 구심점이 되었을 뿐 아니라, 중앙 정치세력의 제지 기반으로서의 기능도 갖고 있었다.

 

 

 

모처럼 대성전 문을 개방한 수원향교

 

수원시 팔달구 향교로 107-9 (교동)에 소재한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호인 수원 항교. 향교는 일년 중 춘추에 벌어지는 석전제 등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대성전의 문을 개방하지 않는다. 대개의 향교가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구성으로 되어있는 향교는 명륜당 앞 외삼문과, 명륜당 뒤 대성전으로 오르는 내삼문이 있다.

 

향교는 매년 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上丁日)에 문묘에서 공자를 비롯하여, 신위를 모시고 있는 41018현을 제사지내는 의식을 치루는 일 이외는 대성전을 거의 개방하지 않는다. 그런 수원 향교가 모처럼 향교를 개방해 일반인들도 대성전 등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수원 향교는 원래 화성군 봉담면 와우리에 있었다. 정조 19년인 1795년경 정조의 명에 의해 현 위치로 옮겨 세우고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원 향교 역시 앞쪽으로 교육 공간인 명륜당을 두고, 뒤편으로 계단위로 올라 제사 공간인 대성전을 둔 전학후묘의 배치를 하였다.

 

 

향교의 기본 형식을 충실히 따른 수원 향교

 

외삼문을 들어서면 강학의 공간인 명륜당이 자리한다. 명륜당은 정면 5, 측면 2칸 규모로 팔작지붕이다. 정면 가운데 3칸은 문을 달았으며 양쪽 2칸은 막혀 있다. 양편의 두 칸이 막힌 것은 이 곳은 온돌방으로 마련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명륜당 뒤편 좌우측으로는 동재와 서재가 마련되어 있다.

 

명륜당 뒤편에 높게 계단을 놓고 그 위에 내삼문이 마련되어 있다. 모두 세 칸으로 된 삼문은 대성전에 출입을 할 때는 우측 문으로 들어가고, 대성전에서 제향을 마치고 나올 때는 좌측 문을 이용한다. 수원 행교 대성전은 정면 5, 측면 3칸 규모이다. 좌우에 마련한 동무와 서무는 정면 3, 측면 2칸 규모로, 공자와 그의 제자 등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모처럼 문을 개방해 돌아볼 수 있었던 수원 향교.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 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하지만 우리 지역의 문화재로서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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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제(告由祭)’란 개인의 집이나 나라에서, 큰일을 치를 때나 치른 뒤에 그 사정을 신명이나 사당에 모신 조상에게 고하는 제사를 말한다. 11일 오전 10시 경기도 문화재 자료 제 1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수원 향교에서는 100여 명의 향교 남녀 관계자들이 모인 가운데, 민선 6기를 열어갈 염태영 수원지장의 고유제가 열렸다.

 

염태영 시장의 고유제를 주관하기 위해 수원향교의 관련자 70여 명과 일반인 들 100여 명이 수원시 팔달구 항교로 137번길 43(교동)에 모였다. 건과 도포를 입은 유림들은 고유재가 시작되기 전 먼저 성균관으로 올랐다. 이곳에서 사배를 한 후, 대성전으로 올라 문을 열고 제관을 맞아들이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다.

 

수원 향교 명륜당 뒤편 대성전을 오르는 게단 밑에 모인 향교 관계자들은 염태영 시장이 도착을 하자, 대성전으로 오르는 계단의 우측문을 사용한다. 향교의 모든 의식은 반드시 우측문으로 들어가서 좌측문으로 나오는 것이 원칙이다. 사람들은 일렬로 줄을 지어 우측문으로 대성전 아래 단에 도열을 했다.

 

 

앞으로 4년 동안 수원을 변화시키겠다.

 

고유제를 지내기 전에 미리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인사말을 한 염태영 시장은

지난 5기 때 이곳을 들렸다가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과 약속을 하고 혼이 난 적이 있다. 이제 4년 만에 다시 이 자리에 서게 됐다 오늘 이 자리이서 나는 수원을 변화시키겠다는 다짐을 하겠다. 사람 중심의 도시 수원, 사람이 먼저인 도시 수원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고유제를 시작하기 전 마음을 전했다.

 

유림들과 관계자들이 모두 대성전을 행해 4배를 한 후 염태영 시장은 손을 씻은 후 대성전으로 올랐다 이 곳 대성전에 모셔 놓은 공자의 신 위 앞에서 향을 사른 후 고유축을 낭독했다. 그런 다음 대성전이 서편 문으로 나와 제단 아래서 4배를 하는 것으로 모든 행사는 끝이 났다.

 

수원향교는 원래 화성시 봉담면 와우리에 소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조 13년인 1789년 수원읍치가 지금의 수원시로 이전되면서, 팔달산 남쪽 기슭에 자리를 잡았다. 향교의 전형적 베치 형태인 전학후묘의 형태로 구성한 수원향교는 이곳의 지형을 고려하여 건물마다 장대석으로 층을 쌓아 건물을 짓게 하였다.

 

현재 수원향교에는 공자와 맹자를 비롯해 우리나라의 성현 18위를 함께 봉안하고 있다. 수원 향교는 1795년에는 성 밖에 조성하였으니 정조가 친히 이곳까지 행차한 유서 깊은 건물이기도 하다.

 

 

고유제 성신사에서 지내는 것이 맞다.

 

염태영 수원시장은 71일 민선 제6기가 새롭게 출발하던 날 아침 일찍 현충탑에 참배를 한 후 화성 행궁 화령전으로 찾아갔다. 화령전은 정조의 어진을 모셔놓은 곳으로 이곳에서 6기 시장으로서 책무를 시작할 것을 알리는 고유제 의식을 가졌다. 그리고 11일 오전 수원향교에서 공맹과 우리나라 선영들에게 고유를 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반드시 짚고 가야할 일이 하나 있다. 염태영시장은 반드시 팔달산에 있는 성신사를 찾아가 팔달산 성신에게 고유제를 지내야 옳다고 생각한다. 팔달산은 수원의 안산이다. 수원은 모든 기운은 팔달산에서 시작이 되며, 팔달산의 중심은 바로 화성의 성신을 모셔놓은 성신사이다.

 

정조대왕은 화성 성역이 완료되는 시기에 맞추어 특별지시를 내렸다. 바로 성신사를 지으라는 것이었다. 성신사는 화성을 지키는 신이기는 하지만, 당시로 보면 수원전역을 보호하는 신이기도 하다. 팔달산 중턱 서장대 아래 성신사를 축조했다는 것은, 그만큼 이 성신사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정조대왕은 우리고장을 바다처럼 평안하고, 강물처럼 맑게 하소서라며 화성과 화성 백성들을 사랑하는 축문을 직접 지어 하사를 하기도 했다. 성신사는 정조 20년인 1796711일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약 한달 만에 완공이 되었다. 사당이 완성된 후에는 화성 성신의 위패를 만들고 길일을 기려, 1796919일에 사당 안 정면에 봉안하였다

 

이런 점으로 본다면 정작 수원시장으로 업무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고유제를 지내야 할 곳은 바로 성신사라야 한다는 생각이다. 성신사는 정조대왕의 지시에 의해 팔달산 중턱에 신령을 모신 진정한 화성의 사당이기 때문이다. 성신사는 그야말로 수원과 화성, 그 모든 곳의 안녕을 관장하는 화성의 성신이 좌정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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