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정리된 능침,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힐링

 

가을은 남성의 계절이라고 했던가? 적어도 나에게 가을이란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다. 늘 답사를 다니는 나로서는 그 이상의 계절이라는 의미는 무의미하다. 다만 많이 걸어도 땀이 덜 흐른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가을은 바람직한 계절이다. 그런 계절을 이용하지 않는다면 나만 손해라는 생각이다.

 

매주 목요일마다 돌아보는 인근지역 답사. 얼마 안 있으면 수원화성문화재도 열리고, 정조대왕의 능행차가 서울서부터 시흥, 수원, 화성까지 이어지며 전 구간에서 시연된다고 한다. 정조대왕과 사도세자의 능까지 이어질 능행치 생각에 가까운 곳에 소재한 사적 제195호인 효종대왕능을 찾았다. 효종대왕능은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에 소재한 세종대왕능인 영능(英陵) 옆에 자리하고 있다. 세종대왕능은 세종대왕과 소현왕후의 합장능이고 영능(寧陵)은 제17대 효종과 그 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능이다.

 

 

벌써 한 이태는 지났을 듯하다. 여주에 잠시 거주하고 있을 때는 오가는 길에 늘 들렸던 곳이다. 2년 만에 찾아간 효종대왕능도 주변이 변했다. 재실 바로 앞에 있던 주차장이 멀찌감치 떨어져 나왔고, 앞에는 매표소가 자리하고 있다. 좁던 주차장도 여러 대의 차를 주차할 수 있도록 공간을 넓혔다.

 

그동안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입장료만 해도 상당한 금액을 지출했다. 대개의 문화재가 입장료를 받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경노우대라고 하여 웬만한 곳은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돈을 내지 않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나도 나이를 먹었다는 점이 괜히 씁쓸해진다. 아직도 돌아볼 곳이 지천이기 때문이다.

 

 

보물로 지정된 효종대왕능 재실

 

효종대왕능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 바로 재실이다. 효종대왕능의 재실은 보물 153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일제치하와 6,25 한국동란을 거치면서 많은 능의 재실들이 소실되기도 했는데 효종대왕능의 재실은 원형 그대로를 보관하고 있는 곳이다. 이곳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다. 재실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전각에서 보이는 담장 밖 굴뚝이 효종대왕능 재실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유는 바로 재실 외벽을 심벽으로 조성하고 그 심벽 안으로 연도를 냈기 때문이다. 재실 외벽 곳곳에 기와 몇 장을 포개놓은 곳이 보인다. 이 기와가 바로 굴뚝 역할을 하는 것이다. 능침 어디를 보아도 이런 조성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이 하나 만으로도 사람을 들뜨게 한다.

 

재실 담장 안에는 수백년 묵은 회양목 한 그루가 서있다. 바로 천연기념물 495호로 지정된 회양목이다. 일반적으로 회양목이 거목이 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효종대왕능 재실 회양목은 크기도 크거니와 수령이 이미 300년 이상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 앞에는 보기에도 엄청난 거목들이 담장과 함께 늘어서 있어 전각의 멋을 더하고 있다.

 

 

북벌을 꿈꾼 효종대왕

 

숲이 우거진 길을 따라 능침으로 오르다보면 좌측으로 작은 내를 건너가는 길이 나온다. ‘왕의 숲길이라는 이 길은 세종대왕의 능과 연결이 되는 숲길이다. 그저 타박타박 걸어가면 좋을 이 길은 주변에 물이 흐르고 나무들이 우거져 있다. 숲을 걷는 것 하나만으로도 힐잉이 되는 길이다.

 

앞에 홍살문이 보이고 그 뒤로 정자각과 능침이 보인다. 효종대왕능의 정자각은 최근에 해체보수 하였다. 정자각을 앞에 두고 좌측에는 2006년에 발굴조사 후 복원한 수라간이, 우측에는 수복방이 있다. 그 앞을 보면 참도에 놓인 금천교를 건너게 된다. 효종대왕능의 금천교는 홍살문 안에 자리하고 있어 색다르다. 대개 능원의 금천교들이 홍살문 밖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대군시절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에 볼모로 잡혀가 8년간 생활한 효종대왕. 그곳에서 살면서 효종은 늘 북벌을 마음먹었다. 효종의 북벌의지는 정예화 된 포병 10만명을 길러 기회가 있을 때 오랑캐들을 공격할 것이며 이 일은 10년 안에 추진할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하기에 효종대왕은 재위기간 동안 늘 북벌을 꿈꾸면서 전란으로 피폐해진 민심을 달래는데 노력하였다.

 

효종대왕은 군사훈련을 강화하고 경제적으로는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또한 상평통보를 널리 쓰이게 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효종대왕의 머릿속에는 강한 나라를 만들어 북벌을 하겠다는 의지로 꽉 차 있었다. 하지만 41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북벌의 의지는 계획으로만 남게 되었다.

 

가을초입에 찾아간 여주 효종대왕능. 곳곳에 보수공사를 하느라 조금은 관람에 불편하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보수를 하지 않으면 영원히 못 볼 수도 있는 것이 바로 문화재이다. 잠시의 불편을 참는 것은 우리의 후손들에게 영원히 물려주기 위함이다. 이 가을이 가기 전 더 많은 곳을 돌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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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가 해골의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은 곳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산32번지에는 사적 제217호인 '당성(唐城)'이 자리하고 있다. 이 당성이 소재하고 있는 남양 지역은 신라 경덕왕 때는 '당은군'이라 불린 중국과의 교통 요지였다. 신라 후기에는 이곳에 '당성진'을 설치하여 청해진과 함께 신라 해군의 근거지로 삼은 중요한 곳이었다.

 

당성은 계곡을 둘러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성은 남북으로 기다란 네모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다. 현재 당성은 동문과 남문, 북문 터와 우물터, 건물터가 남아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당성은 현재 발굴 중이다. 10일 오후 찾아간 당성. 입구에서부터 한양대학교 문화재연구소에서 4차 발굴중이라 출입을 통제한다는 가드라인이 쳐져있다.

 

 

당성은 화성 남양반도의 서신, 송산, 마도면의 3개면이 교차되는 중심부 가까이 위치한 구봉산에 자리하고 있다. 동남향으로 경사진 계곡을 이용하여 성루를 돌려 축성을 하였다. 전장이 1.148m 정도가 되는 이 당성은 처음에는 백제의 영역이었다가 한때 고구려의 영토로 당성군이라 불렀다.

 

후일 신라가 이 지역을 점령하게 되자 당항성이라 했다. 바다를 건너 중국과 통하는 길목의 역할을 하던 곳이다. 당성은 그 쌓은 시기를 달리하는 3중의 성벽으로 구성되었다. 처음 이 당성의 성벽은 테뫼식으로 쌓은 토축 산성이며 구봉산에서 봉화산으로 뻗는 남서능선 정상부에 600m의 테뫼식 산성으로 6~8세기 신라유물이 상당수 발견되었다.

 

 

들어갈 수 없는 당성 자료만 훑어보다가 돌아와

 

지난 해 몇 차례 당성을 답사하였기에 당선의 형태는 눈에 선하다. 현재는 발굴을 위해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 당성사적비와 성이 보이는 곳까지 들어가면서 발굴관계기관의 발굴보고서로 대신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동안 몇 번을 돌아본 곳이기 때문에 그 형태를 가늠할 수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문화재란 한 번의 답사로 알 수가 없다. 한곳에 서 있는 유형문화재이지만 항상 새로운 것이 발견되기도 한다. 성곽의 경우 회를 거듭하는 발굴로 인해 새로운 것들이 속속 알려지고 있어 끊임없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 30년 넘는 세월 전국을 스 없이 돌아보면서 문화재를 답사한 나로서는 그 하나하나가 소중하다는 것을 느끼기에 기회만 되면 몇 번이고 다시 찾아가고는 한다.

 

낮에 잠깐 뿌린 비로 숲속은 습하다. 거기다가 땀 냄새를 맡은 산모기까지 달라붙어 사람을 귀찮게 한다. 답사를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역시 사람에게 집요하게 따라붙는 산모기 떼와 각종 벌레들이다. 무더위에 옷으로 감싸고 오르지만 달라붙는 모기떼를 감당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당성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원효

 

원효(617-686)대사는 신라 진평왕 39년인 617년에 압량군 불지촌(현 경산군 압량면 신월동)에서 태어났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가 원효를 잉태할 때 유성이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으며, 그를 낳을 때는 오색의 구름이 땅을 덮었다고 한다. 원효의 아명은 서동이었다.

 

원효대사의 행적 가운데서 각별히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두 차례에 걸쳐 당으로의 유학을 시도했던 원효대사가 스스로 크게 깨닫고 발길을 돌린 일이 그것이다. 원효대사는 45세에 두 번째로 의상대사와 함께 이번에는 해로로 해서 당으로 가기 위해 백제 땅이었던 당항성 아래에 도착하였다. 당항성 아래 항구에 당도했을 때 이미 어둠이 깔리고 갑자기 거친 비바람을 만나 한 땅막에서 자게 되었다.

 

아침에 깨어났을 때 그곳은 땅막이 아닌 옛 무덤 속임을 알았지만 비가 그치지 않아 하룻밤을 더 자게 되었다. 원효대사는 거기서 깨들음을 얻는다. '마음이 일어나면 갖가지 법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땅막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래서 원효는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만법은 오직 인식일 뿐이다. 마음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할 것이 있으랴.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다"하며 다시 서라벌로 발길을 돌렸다. 원효대사의 이 같은 깨달음은 후대 사람들에게 알려진 무덤 속에서 해골을 담긴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원효대사가 깨달음을 얻는 당항성(신라시대의 이름) 인근 당막(=무덤)은 바로 당성 인근 현 신흥사 인근이었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그 일대는 과거 무덤들이 발견된 곳이기 때문이다. 10일 오후 빗방울이 떨어지는 날 찾아간 당성. 그동안 전국의 성 40여 곳을 답사했지만 그 중 기억에 남는 한 곳이다. 언제 기회가 된다면 그동안 돌아본 성을 정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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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철 융릉 숲, 걸어만 가도 절로 힐링

 

융릉은 사도세자의 능침이다. 1762년 윤 521일 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뒤주 속에 갇혀 숨진 사도세자는, 그해 723일 현재의 동대문구 휘경동인 양주 배봉산 아래 언덕에 안장되었다. 아들을 죽인 것을 후회한 영조는 세자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에서 사도라는 시호를 내리고, 묘호를 수은묘라고 하였다.

 

7일 오후, 사도세자가 묻혀있는 융릉을 찾았다. 올해 수원화성문화재가 열리면 정조의 능행차를 서울서부터 시작해 화성 융건릉까지 이어간다고 한다. 그런 능행차를 융릉은 어떤 모습으로 맞이할 것인가 궁금해 미리 융릉을 찾아본 것이다. 장마철이라 그런지 습한 날씨로 인해 조그만 걸어도 온 몸이 끈적거린다.

 

 

정조는 1776년 자신이 왕으로 즉위하자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장헌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수은묘를 원으로 격상시켜 영우원으로 고쳐 부른다. 정조 13년인 1789년에는 무덤을 화성시 안녕동의 현재 위치로 옮기고 현륭원으로 격상하였다. 그 뒤 순조 15년인 18151215일 혜경궁 홍씨가 춘추 81세로 승하하자 순조 16년인 181633일 현륭원에 합장하였다.

 

그 뒤 고종은 황제로 즉위한지 3년이 되는 광무 3년인 18991112, 장헌세자를 왕으로 추존하여 묘호를 장종으로 올렸기에 융릉이라고 능호를 정하였으며, 곧이어 1219일에는 황제로 추존하여 장조의황제라 하였으며, 혜경궁 홍씨도 헌경의황후로 추존 되었다.

 

 

사도세자가 잠든 융릉을 걷다

 

융건릉 입구 매표소에서 2인용 표를 한 장 구해 안으로 들어섰다. 맨 먼저 찾아본 곳은 바로 재실이다. 재실은 융건릉 제향 때 제관 등이 미리 도착하여 몸과 마음을 정하게 하여 제를 준비하는 곳이다. 평소에는 능참봉 등 능을 관리하는 관리가 이곳에 묵으면서 능역을 돌보는 역할을 맡아한다. 이곳 융건릉의 재실에는 재실 외에도 향을 보관하는 안향청, 제례업부를 주관하는 진사청,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와 행랑채 등이 있다.

 

재실의 안마당에는 천연기념물 제 504호인 화성융릉 개비자나무가 자라고 있다. 개비자나무는 남해안의 따듯한 곳에서 자라는 비자나무보다 추운 중부지방까지 분포하고 있다. 개비자나무는 여러 포기가 한꺼번에 모여 자라며 머리빗 모양의 잎이 비()자 모양으로 뻗고 주홍빛 열매가 달린다.

 

재실을 벗어나 우측길로 들어서면 소나무들이 유난히 많은 숲길이 나타난다. 그 숲길은 자연적인 흙길로 조성되어 있으며 까치와 청솔모 등이 융릉을 찾은 나그네를 반긴다. 여기저기 마련되어 있는 의자는 쉬어가라며 손짓하고 있는데, 경사진 흙길을 내려가 좌측으로 난 길을 걸어 곤신지를 찾았다.

 

 

곤신방에 마련한 원형 연못 곤신지

 

곤신지는 원형 연못으로 융릉이 천장된 이듬해인 1790년에 조성된 연못이다. 곤신지는 융릉의 남서방향을 뜻하는 곤신방에 조성한 연못으로, 묘지에서 처음 보인다는 물을 뜻하는 생방으로, 이곳이 길지이기에 조성했다고 한다. 곤신지는 비가 내려서인가 물이 탁하다. 그 물 속에 유영을 하는 물고기들은 이 여름철을 꽤나 즐기는 듯하다. 온몸이 끈적거리는 날 유난히 물고기들의 활동이 활기차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융릉 방향으로 향한다. 까치 몇 마리가 앞장서 뛰어간다. 마치 경쟁이라도 하자는 것 같다. 한 무리의 아낙네들이 지나간다. 이런 날씨에도 융릉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고 있다. 홍전문을 지난다. 홍전문은 영혼이 출입하는 문으로 홍살문, 혹은 신문(神門)이라고도 한다.

 

 

정자각 뒤편 저만큼 장조의황제(사도세자)와 헌경의황후(혜경궁 홍씨)의 합장릉이 보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아름답다는 능침 가까이 갈 수 없다. 역대 왕들의 능침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능침을 돌아볼 수 있는 소로가 모두 폐쇄되었다. 먼발치에서만 볼 수 있는 융릉.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의 능이지만 아들 정조의 뜻에 따라 왕의 능침과 같은 모형으로 조성했다는 아름다운 능침.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한다. 능침을 찾아 온 나그네에게 자신의 슬픈 사연을 하소연이라도 하는 것일까? 잔뜩 흐린 하늘에서는 금방이라도 굵은 빗줄기가 쏟아져 내릴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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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의 침입을 막기위해 쌓은 면천읍성

성(城)을 쌓는 형태는 일반적으로 세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는 산성(山城)이다. 산의 봉우리를 감싸고 있는 산성은 적과의 전투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산 위쪽에 축성하는 성으로 우리나라에는 많은 산성이 소재한다.

 

둘째는 평산성(平山城)이다. 평산성은 산과 평지에 연이어져 있는 성을 말한다. 사적 제3호인 수원 화성은 대표적인 평산성이다. 그리고 셋째는 읍성(邑城)이다. 읍성은 고을의 평지에 쌓는 성으로 읍치나 적의 방비를 위한 성이다. 이렇게 각기 특징있게 쌓은 성들은 그 성들이 자리하고 있는 곳의 행정이나 지역의 방어 등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지난 4일 당진시와 보령시를 답사하면서 가장 먼저 들린 곳은 면천읍성이다. 4일 오후 보령 대천해수욕장을 찾아가다가 들린 면천읍성.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군자길 3 일원에 소재한 면천읍성은 충청남도 기념물 제9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세종 21년인 1439년 11월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성이다.

 

이 면천읍성을 꼭 들려보아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면천읍성이 1794년에 축성을 시작하여 1796년에 완성한 세계문화유산이요 사적 제3호인 수원화성과 무엇이 다른 점인가를 알아보기 위함이다. 수원화성보다 357년이나 앞서 쌓은 면천읍성과 수원화성이 얼마나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까? 하기에 면천읍성 중에서 최근에 복원한 읍성 남문을 택했다.

 

 

수원화성은 강한 국권의 상징

 

사적 제3호, 그리고 세계문화유산. 사적 안에 또 4기의 보물(팔달문, 화서문, 서북공심돈, 방화수류정)을 간직한 곳, 화성은 서쪽으로는 팔달산을 끼고, 동쪽으로는 낮은 구릉의 평지를 따라 쌓은 평산성이다. 정조는 그의 아버지 장헌세자(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에서 화성으로 수도를 옮길 계획을 세우고, 정조 18년인 1794년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1796년에 완성하였다.

 

실학자인 유형원과 정약용이 성을 설계하고, 거중기 등의 신기재를 이용하여 과학적이고 실용적으로 쌓은 성이 바로 화성이다. 화성은 다른 성곽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동문인 창룡문, 북문인 장안문, 서문인 화서문, 남문인 팔달문의 4대문을 비롯한 각종 방어시설들과 조선에서 가장 무예가 뛰어난 장용외영의 군사들이 주둔하고 있는 돌과 벽돌을 혼합해 쌓은 난공불락의 성이다.

 

이 화성을 매일 바라보면서 살아온 나로서는 면천읍성이 궁금할 수밖에 없다. 성을 잘 안다는 지인에게서 “면천읍성을 찾아가면 화성의 원형을 보는 듯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하기에 일부러 답사 여정을 당진시 면천을 거쳐 보령시를 찾아가는 길목을 택했다. 당진시는 2009년부터 면천읍성 복원사업을 시작해 2014년에 남문지와 원기루 등을 완공하였다고 한다.

 

화성의 옛 모습을 면천읍성에서 그려내다

 

수원화성은 규장각 문신인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1793년에 저술한 <성화주략>을 지침서로 하여 축성하였다.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하여 1796년 9월에 완공을 하였다. 화성의 모든 것은 <화성성역의궤>에 낱낱이 기록하고 있다.

 

세계문화유산이자 사적 제3호인 수원 화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다.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砲)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이 있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6개 시설물(남공심돈, 남암문,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42개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다.

 

 

4일 찾아간 면천읍성은 현재 성벽의 둘레가 1,336m인데 성을 쌓을 당시 치성과 옹성을 합하면 전체길이 1,564m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면천읍성은 현재 옹성 1개소, 문지 4개소를 비롯하여 치성 3개소가 확인되었으나, 원래 치성이 7개소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남문 옆으로는 수로가 나 있다.

 

면천읍성의 남문은 옹성형태로 되어있다. 남문인 원기루 앞으로 옹성을 쌓아 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옹성은 한편을 터놓았으며 성문을 깨기 위해 문 앞으로 몰려든 적을 섬멸하는 기능을 갖고 있는 방어책이다. 수원화성은 4대문에 모두 옹성이 설치되어 있으며, 장안문(북문)과 팔달문(남문)은 중앙에 문을 내고 양편에 적대를 설치하였다.

 

그와는 달리 창룡문(동문)과 화서문(서문)은 면천읍성의 남문과 같이 한편을 터놓았다. 하지만 그 안으로 공성무기를 끌고 들어와 성문을 깨야하는데, 그것은 불가능하다. 옹성 안이 좁아 그 안에서 공성무기에 힘을 더할 수 없으며, 옹성 위에 있는 병사들의 공격으로 옹성 안에 들어간 적들은 몰살당하기 십상 때문이다.

 

벌써 다녀온 지 보름이 지났지만 아직도 면천읍성 남문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올해는 가급적이면 더 많은 시간을 내어 그동안 보고 싶었던 문화재들을 찾아보아야겠다. 문화재란 늘 보듬고 바라다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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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여행에서 만난 엣 읍성지

 

날이 풀리면서 진작 떠나고 싶었던 여행길을 재촉했다. 이번 여행은 3일과 412일로 충청남도 보령시를 돌아보기 위한 여정이다. 주말 아침 이른 시간에 수원을 출발해 오후 1시가 넘어 도착한 당진 면천읍성. 제대로 갔으면 더 이른 시간에 도착했겠지만 가는 길에 광천전통시장을 돌아보느라 예정시간보다 늦었다.

 

면천읍성은 충청남도 기념물 제91호로 당진군 면천면 군자길 3 일원에 소재한다. 면천읍성은 세종 21년인 143911월에 왜구의 침입을 막기위해 쌓은 평지읍성이다. 성은 산성과, 평산성, 읍성 등으로 구분을 짓는데 면천읍성은 평지읍성이다.

 

조선후기까지 면천의 군사 및 행정의 중심지였던 면천읍성은 성벽은 자연석을 다듬어 쌓았으며 외부는 돌로, 내부는 돌을 채운 후 흙으로 덮어 쌓았다. 현재 성벽의 둘레는 1,336m인데 성을 쌓을 당시에는 치성과 옹성을 합해 1,564m정도로 추정한다. 현재 면천읍성은 옹성 1개소, 문지 4개소를 포함하여 치성 3개소가 확인되었으나 원래 치성은 모두 7개소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최근 복원된 듯한 읍성의 남문

 

면천읍성을 꼭 들려보고 싶었던 것은 이 읍성의 복원된 남문을 보기 위함이다. 수원의 화성과 같은 형태로 축성된 남문은 옹성을 쌓고 한편을 터놓은 것이 마치 화성의 창룡문이나 화서문에서 보이는 듯한 축성방법을 택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산재한 많은 성을 돌아보면서 비교하는 것은 화성과 얼마나 같은지, 혹 다른지를 알아보기 때문이다.

 

면천읍성의 남문은 옹성을 쌓아 왜구의 공성무기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도록 하였으며, 남문 옆에는 상에서 밖으로 물이 흘러나가는 수로가 있다. 면천읍성은 18세기 이후 성의 기능을 상실한 성으로 누각은 다 부수어지고 옹성을 따라 집을 지었던 것을, 2009년 이후 면천읍성 정비사업으로 남문의 누각인 원기루 등을 복원하여 2014년에 완료한 것이다.

 

복원한 면천읍성의 남문을 돌아본다. 남문 안으로는 바로 집들이 들어차 있으며 성을 복원한 양편으로도 밭과 집들이 놓여 있다. 원기루를 비롯한 남문은 비교적 옛 형태를 따라 복원을 마쳤으며 옹성과 읍성 위에 여장도 옛 형태를 따랐다고 한다. 우리 수원 화성과는 견줄 바가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성의 일부분이 복원되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할 따름이다.

 

 

보령성곽을 돌아보다

 

보령은 현 보령시 주포면 일대의 명칭이다. 이곳은 보령성곽과 보령향교 등이 소재한 것으로 보아 조선조 때는 이곳이 보령시의 중심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 충남 문화재자료 제146호인 보령성곽은 고려 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쌓은 봉당성(혹은 고남산성)이 자리한 곳에서, 동쪽으로 400m 정도 떨어진 곳에 세종 12년인 1430년 이미 있던 성을 보강하여 새로 쌓은 성이다.

 

보령성곽은 현재 임진왜란과 한말 의병전쟁 등을 거치면서 모두 파손되고 남문인 해산루 옆으로 남쪽 성벽 70m와 북쪽 성벽 360m, 한 개소의 치성 등이 남아있다. 원래 보령성은 길이 630m에 높이 3.5m, 적대 8개소와 문루 3개소, 우물 3개소 등이 있었다고 한다.

 

 

여행길에 만난 성을 돌아보면서 항상 감사하다고 느끼는 것은 수원 화성과 같은 성을 보지 못한다는 점이다. 잘 다듬어진 돌로 쌓은 화성, 그 위에 수많은 구조물 등이 남아있는 화성을 돌아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다. 문화재는 그 안에 내포된 사고가 있다. 어느 성이 되었거나 그 곳의 역사와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점으로 볼 때 우리는 화성이라는 세계문화유산을 갖고 있지만 정작 그 소중함에 대해서 잘 모르는 듯하다. 전국 곳곳에 산재한 성을 돌아보면 화성이 얼마나 대단한 성인가를 알 수 있다. 화성을 온전히 보존한다는 것은 그래서 더 필요한 것이다. 여행길에서 만난 당진 면천읍성과 보령 주포면의 보령성곽. 올해는 시간이 날 때마다 전국의 성을 돌아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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