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가 현릉원 참배 시 묵어간 ‘안산행궁’

 

날이 덥다. 6월 초의 날씨치고는 벌써 한 여름 무더위를 방불케 한다. 5일 이른 시간에 답사를 시작하려고 했으니 무슨 일이 그렇게 생기는 것인지, 12시가 다 되어서 안산으로 향했다. 안산시 상록구 수암동 산26-4 일대에 소재한 경기도기념물 제127호인 안산읍성 및 관아지를 돌아보기 위해서이다.

 

안산에 들려 몇 곳을 먼저 들려보고 난 후 찾아간 안산읍성 관아지. 햇볕이 따가워 조금만 움직여도 등에서 땀이 흐른다. 안산읍성은 수암봉의 능선을 이용하여 평지를 감싸도록 쌓은 전형적인 평산성이다. 평산성이란 평지와 산을 연결해 성을 쌓은 형태를 말한다. 안산읍성은 조선 초기 서해안으로 침범하는 왜구를 막기 위한 성으로 축성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안산객사를 돌아보고 난 후 인신읍성 둘레길을 따라 걸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한 낮의 더위에 걷는다는 것이 무리겠지만 그래도 마음먹고 찾아온 곳이 아니던가? 안산읍성의 길이는 772m이고 서쪽과 북쪽은 바깥쪽이 매우 가파른 경사를 이루고 있다. 안산읍성 둘레길로 접어들기 전에 먼저 안산객사를 돌아보았다.

 

 

 

정조대왕이 묵어 간 안산객사

 

객사란 정청을 중앙에 마련하고 좌우에 공무를 보기 위해 길을 나선 관원들이 묵을 수 있는 좌우익사를 둔다. 정청은 임금을 상징하는 나무패인 전패를 모셔놓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지방관이 충성을 맹세하는 곳이다. 객사의 정청은 고을의 수령이 집무를 보는 동헌보다 격이 높아 관아시설 중 가장 화려하게 꾸민다.

 

안산객사는 정조 21년인 1797년 8월 16일 정조대왕이 현릉원 참배시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어갔기 때문에 ‘안산행궁’으로도 불린다. 안산객사의 정청은 맞배지붕으로 좌우익사보다 한 단 높게 조성하였으며 좌우익사는 팔작지붕으로 온돌과 마루를 놓았다. 좌우익사는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조성하였다.

 

 

 

안산객사는 2010년에 복원하였으며 객사 앞에는 수령 500년의 커다란 느티나무가 자라고 있다. 안산읍성지 주변에는 오래된 나무들이 많이 자라고 있어 이곳이 역사적으로 오래 된 곳임을 알 수 있다. 객사 뒤편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 680년 정도인 은행나무가 서 있다. 나무의 높이는 20m 정도에 둘레가 6m나 되는 거목이다.

 

이 은행나무는 연성군 김정경의 거처가 안산읍성 안에 있었으며 김정경 장군이 1,400년경에 자신이 살고 있던 주거지 주변에 은행나무 세 그루를 심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현재는 한 그루만이 남아있다. 이 은행나무는 1970년 경 고사할 위기에 처했으나 외과수술 등을 시술해 잘 자라고 있다. 이 나무의 북서쪽에는 김정경의 시저터가 자리하고 있다.

 

 

 

흔적만 남은 안산읍성 복원 서둘러야

 

안산읍성은 서해안으로 출몰하는 왜적을 막아내는 주요 방어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성의 남쪽에는 문터가 있고 객사 주변에도 옛 주추며 성돌인 듯한 돌들이 여기저기 눈에 띤다. 길을 따라 북쪽으로 걸어 오르니 북문지가 나온다. 다시 서쪽으로 난 오르막을 오르니 북서쪽 꼭대기 평평한 터에 주춧돌과 같은 돌이 놓여있는 것으로 보아 장대(주변보다 높게 쌓아올린 장수의 지휘대)가 있던 자리로 보인다.

 

읍성을 돌아보면서 성곽의 형태를 찾아보려고 했으나 풀이 워낙 무성하게 자라고 길을 찾을 수가 없다. 다만 군데군데 돌무더기들이 쌓여있어 안산읍성이 가파른 자연적인 조건을 이용해 석축과 토축을 겸한 평산성이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그리 넓지 않은 안산읍성 둘레길이지만 날이 워낙 무덥고 풀들이 많이 자라고 있어 한 바퀴를 꼼꼼히 돌아본다는 것은 무리일 듯하다.

 

 

 

서쪽방향을 여기저기 살피면서 돌아보았지만 딱히 석축산성의 형태라고 할 만한 곳을 찾을 수가 없다. 워낙 숲이 우거졌기 때문이다. 한 때는 행궁으로 이용되었을 정도였던 안산읍성. 그 중심에 있던 객사는 복원되었지만 뒤편 관아지를 비롯한 성곽의 복원이 하루빨리 이루어졌으면 한다. 우선은 토성이라도 알아볼 수 있도록 주변 정리부터 제대로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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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장군 묘, 삶처럼 초라한 주변에 한숨만 나와

 

<부계기문>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일찍이 권남에게 딸이 있어 사위를 고르는데 남이가 청혼했다. 권남이 점쟁이에게 남이의 운을 점치게 했더니 점쟁이는 이 사람은 반드시 젊은 나이에 죽을 것이니 좋지 못하다라고 답했다. 권남은 자산의 딸의 수명을 보게 했다. 점장이는 이 여자도 명이 매우 짧고 또 자식도 없으니 그 복만 누리고 화는 보지 않을 것이므로 (남이를)사위로 삼아도 무방하다라고 대답했다. 권람은 그 말에 따라 두 사람을 결혼시켰다. 남이는 17세에 무과에 장원하여 임금의 사랑을 독차지 했으며 26(일설에는 28세라고도 한다)에 병조 판서로 있다가 사형을 당했는데, 권남의 딸은 벌써 수년 전에 먼저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남이는 귀신도 두려워하는 존재였다는 것이다. 무속에서는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죽은 그의 원혼이 크나큰 위력을 발휘한다고 생각하여 신령으로 받들기도 한다. 그것은 남이가 권남의 딸이 귀신의 조화로 인해 죽게 되었을 때 귀신을 몰아내고 권남의 딸을 살려 자신의 처로 삼았기 때문에 남이의 화분만 보아도 귀신들이 쫓겨 간다는 속설 때문이다.

 

 

 

젊은 나이에 역모에 몰려 능지처참 당해

 

이렇게 귀신까지도 두려워하는 남이(1443~1468)장군은 조선조 세조대의 인물로 의령남씨 의산군 남휘의 손자이자 권람의 사위로 세조 3년인 1457년 무과에 급제했다. 그의 나이 17세였다. 남이는 세조의 총애를 받아 여러 무직을 역임하였다. 평소 강직하고 굽힐 줄 모르는 성품을 지녔던 남이는 함경도에서 이시애의 난이 일어났을 때 난을 평정했다.

 

이어서 파저강 일대의 건주위 여진족 정벌에 참여하여 추장 이만주 부자를 사살함으로써 세조 12년에 26세의 젊은 나이로 병조판서에 올랐다. 그런 남이를 신진세력의 약진을 두려워한 한명회와 신숙주 등이 눈에 가시로 여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세조가 승하하고 예종이 등극하자마자 남이는 병조 판서에서 겸사복장으로 좌천되는 수난을 당한다.

 

그로부터 불과 한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남이는 유자광이 남이가 역모를 도모한다는 고변으로 26세에 능지처참 당해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한다. 너무나 뛰어났기에 억울하게 죽은 남이는 350여 년이 지난 순조 18년인 1818년에 남이의 후손인 우의정 남공철의 청으로 관직과 작위가 복구되었다.

 

 

 

한 맺힌 세상을 떠난 남이의 묘를 찾아가다

 

23일 아침 서둘러 길을 나섰다. 화성시에 소재한 몇 곳의 문화재를 돌아보기 위해서이다. 주말이라 가는 길이 막혀 일부러 차량의 통행이 뜸한 지방도를 택했다. 나뭇잎들이 연두색에서 초록색으로 변해가는 주변 경계가 마음을 차분하게 만든다.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 산 145에 소재한 경기도 기념물 제13호인 남이장군의 묘로 들어가는 입구는 좁은 농로를 지나야 한다.

 

입구에 서 있는 안내판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동네 앞쪽에 남이장군 묘란 간판과 입구를 안내하는 석비가 서 있다. 그런데 그 석물 주변을 보는 순간 울화가 치민다. 문화재 진입로 앞에 검은 폐비닐이 가득 쌓여있다. 남이장군 묘로 들어가는 길 좌우편은 밭주인들이 세운 펜스로 막혀있고 좁은 통로만 겨우 남겨 놓았다.

 

정리가 안된 주변도 언짢은데 안으로 들어가 봉분으로 올라가는 길을 보니 난감하다. 도대체 명색이 문화재인데 이런 꼴로 찾아오는 사람들을 맞이하다니. 젊은 나이에 무고하게 역적으로 몰려 비명에 세상을 떠난 것도 억울한데 죽어서까지 이렇게 푸대접을 받고 있다는 것에 한숨부터 터져 나온다.

 

 

 

 

허술한 문화재 관리, 이대로 좋은가?

 

봉분을 행해 오르는 길은 더 엉망이다. 물길인지 계단인지 구별도 되지 않는 오르막길은 쓰러진 나뭇가지가 길을 막고 있다. 돌계단을 쌓은 것 같은 중간에 돌이 물에 쓸려 내려간 것인지 아니면 물길로 만들어 놓은 것인지 구별이 안되는 오르막길은 문화재 주변을 조성한 경관으로서는 한 마디로 너무 소홀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남이장군과 부인의 묘가 나란히 서 있는 봉분은 뒤쪽을 둔덕(사성)으로 둘러쌓았으며 호석으로 잘 단장을 하였다. 석물은 월두형 묘비와 상석, 무덤을 수호하기 위해 세운 문인석 한 쌍과 망주석 한 쌍이 각각 서 있다. 조촐하게 마련되어 있는 남이장군 묘. 조선시대 9명의 충무공 중 한 명인 남이장군의 묘 앞에서 잠시 머리를 숙인다.

 

 

함께 동행한 아우가 주변에 난 꽃 한 가지를 꺾더니 상석 위에 올려놓고 머리를 숙인다. 한 때 역사의 인물이었던 남이장군의 죽음을 슬퍼하는 예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보다는 입구부터 엉망인 장군의 묘를 보고 있다는 것이 죄스럽기 때문이기도 하다. 언제쯤이면 이 남이장군 묘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올 수 있을까? 사람들로 북적이는 남이섬을 떠올리며 더욱 죄스런 마음을 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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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사라져 버린 안내판. 도저히 문화재를 찾아 들어가는 길이 어디인지 구별도 되지 않게 들어선 다세대 주택들. 요즈음 들어 갑자기 문화재 주변이 바뀌면서 점점 답사가 어려워진다. 길이 바뀔 때마다 안내판을 부착해 놓았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근처를 배회하기 일쑤이다.

 

용인시 처인구 역북동 산 3-12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6호 채제공 선생 뇌문비가 자리하고 있고, 그 위편에는 역북동 산 5번지에 경기도 기념물 제17호인 채제공 선생 묘가 자리하고 있다. 16일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에 서둘러 길을 나섰다. 몇 번이고 찾아보고 싶었던 채제공 선생의 유적을 만나보기 위해서였다.

 

큰 길 입구에는 안내판이 서 있어 그나마 초입 길을 찾아 들어가는 것 까지는 수월하다. 그런데 정작 안으로 들어가니 좁은 길만 남겨놓고 이리저리 건물들이 들어차 있어 난감하다. 거기다가 안내판도 사라져버렸다. 휴대폰을 이용해 겨우 길을 찾아들어 골목 안쪽 산 밑에 자리하고 있는 유적지로 올랐다.

 

 

 

화성의 모든 설계 및 경영을 지휘한 채제공

 

채제공 선생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자는 백규 호는 번암, 시호는 문숙이다. 평강 채씨인 선생은 충주에서 태어나 영조 19년인 1743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채제공 선생은 화성 성역의 주역이었다. 선생의 묘를 찾아가 보아야겠다는 생각도 선생의 화성 성역에 대한 남다른 식견과 정조대왕과의 깊은 인연 때문이다.

 

선생은 영조 34년인 1758년 도승지 시절, 사도세자의 폐위에 죽음을 무릅쓰고 반대를 하였으며 정조가 왕세손으로 대리청정한 뒤에는 호조판서 등으로 중용되었다. 채제공 선생은 정조의 특명을 받아 절의 노비를 폐하는 <사노비절목(寺奴婢節目)>을 마련하여 후에 순조 1년인 1801년에 사노비 혁파를 가능하게 하였다.

 

 

 

홍국영의 몰락과 더불어 관직에서 물러나기도 한 채제공 선생은 정조 12년인 1788년 국왕의 명으로 우의정에 올랐으며, 정조 14년 천주교의 박해가 시작되자 천주교 신봉의 묵인을 주장하였다. 정조 17년인 1793년 영의정이 된 후 10여 년간은 천주교의 박해가 없었다. 그 후 정조의 큰 꿈을 실현시킬 수원화성 축성의 모든 설계 및 경영을 지휘하여 가장 짧은 공기 안에 화성 축성을 완공하였다.

 

정조의 채제공 선생에 대한 믿음은 남다르다. 정조가 즉위한 후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책임자들을 벌할 때 채제공 선생은 형조판서로 옥사를 처리하였다. 정조 23년인 1793년 별세하니 정조는 친히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선생의 묘 아래 쪽에 자리하고 있는 뇌문비가 바로 정조가 보낸 뇌문이다. 500여 마디의 글로 지어진 이 뇌문비의 글은 체재공의 명복을 신에게 비는 일종의 제문이다.

 

 

 

채제공 선생의 공적을 기린 뇌문비(誄文碑)

 

뇌문비는 정조가 채제공 선생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글이다. 팔작지붕의 전각 안에 자리한 뇌문비는 영, 정조 시대의 명신인 채제공(1720~1799) 선생의 장례에 정조가 직접 지어 보낸 뇌문을 새긴 비이다. 오석에 해서로 적은 이 뇌문비는 화강암으로 된 직사각형의 비좌와 팔작지붕형의 지붕돌을 올려놓았다.

 

비문의 내용은 채제공의 공적을 기리고 애도를 표현한 글로 조정에 노성(老成)이 없다면 국가를 어찌 보존하랴. 또한 어버이에게 효도를 한다는 소문이 자자하니 경 같은 이는 매우 드물도다라고 적혀있다. 비문 말미에는 기미삽월이십육일이라는 명문으로 보아 이 비문은 정조 23년인 1799326일에 지어 새긴 것임을 알 수 있다.

 

뇌문비를 보존하기 위한 전각을 돌아보고 난 뒤 산 위편에 있는 채제공 선생의 묘소에 올랐다. 일국의 재상으로 수많은 일을 해결한 채제공 선생의 묘소는 의외로 단출하다. 묘역에는 봉분과 상석, 망주석이 있고 석양이 한 쌍 배열되어 있다. 채제공 선생의 봉분 앞에는 묘표가 없는데, 이는 묘소 아래 뇌문비가 자리하기 때문이다.

 

 

 

묘소 앞에 서서 잠시 머리를 숙인다. 환란의 시대에 두 임금을 보좌하며 할 일을 다 하고 간 채제공 선생. 선생의 삶처럼 봉분도 화려하지 않다. 봉문 앞에서면 앞으로 펼쳐진 대자연의 능선이 보인다. 선생의 꿈이 펼쳐진 것일까? 다만 그 대자연에 너무나 많은 건물들이 들어서 자연의 풍광을 막아버린 것이 죄스럽기만 하다. 선생의 묘소 한편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들이 4월의 햇살에 잎을 반짝인다. 잠시 심호흡을 하고 묘소에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일대를 풍미하던 채제공 선생. 만일 선생이 없었다면 지금 수원 화성의 축성이 가능했을까? 바보같은 생각이지만 선생이 계셨기에 오늘 우리가 화성을 만날 수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선생의 묘소에 하직인사를 하고 뒤돌아선다. 오를 때 이마에 맺혔던 땀방울이 시원한 바람에 사그라진다. 그 바람이 선생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모든 사람을 포용했던 선생의 마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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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성 진위논란 잠재울 결정적 증거로 밝혀져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산32번지에는 사적 제217호인 '당성(唐城)'이 자리하고 있다. 이 당성이 소재하고 있는 남양 지역은, 신라 경덕왕 때는 '당은군'이라 불린 중국과의 교통 요지였다. 신라 후기에는 이곳에 '당성진'을 설치하여 청해진과 함께 신라 해군의 근거지로 삼은 중요한 곳이었다.

 

당성은 계곡을 둘러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성은 남북으로 기다란 네모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다. 현재 당성은 동문과 남문, 북문 터와 우물터, 건물터가 남아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당성은 현재 복원 중이다. 성을 한 바퀴 돌다가 보니 세 곳 정도로 나누어서 복원을 하고 있는 듯하다.

 

 

 

당성은 화성 남양반도의 서신, 송산, 마도면의 3개면이 교차되는 중심부 가까이 위치한 구봉산에 자리하고 있다. 동남향으로 경사진 계곡을 이용하여 석루를 돌려 축성을 하였다. 전장이 1.148m 정도가 되는 이 당성은, 처음에는 백제의 영역이었다가, 한때 고구려의 영토로 당성군이라 불렀다.

 

후일 신라가 이 지역을 점령하게 되자 당항성이라 했다. 바다를 건너 중국과 통하는 길목의 역할을 하던 곳이다. 당성은 그 쌓은 시기를 달리하는 3중의 성벽으로 구성되었다. 처음 이 당성의 성벽은 테뫼식으로 쌓은 토축 산성이었다, 그 길이는 336m이다.

 

 

 

이러한 당성 일대를 한양대 문화재연구소가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 '화성 당성 3차 발굴조사'를 시행한 결과 삼국시대 축조된 1차 성벽, 망해루, 집수시설, 연못지 등 유구와 유물 1천여 점을 발견했다고 14일 밝혔다. 이반 발굴조사에서는 ''()자가 새겨진 기와 등 유물 1천여 점이 출토됐다.

 

이러한 당성을 학계 일각에서는 해당 성이 진짜 당성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부족하다며 진위 논란이 일기도 했다. 연구소는 "이번에 출토된 ''자문이 찍힌 기와는 당성의 역사적 사실을 확실하게 입증하는 대단히 희귀한 자료"라면서 "삼국시대에서부터 이 성이 당성으로 불렸을 가능성을 확인해준다"고 설명했다.

 

 

 

앞으로 당성에 관한 연구는 더 많이 이루어져야하겠지만 연구소 관계자는 이번 발굴유물로 인해 당성이 힌국 내 실크로드의 관문이었음을 확실하게 해준다.”면서 실크로드 세계문화유산 지정 구간 안에 포함시킬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 것으로 평가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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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마대(洗馬臺)’, 명칭 그대로라면 말을 씻긴 곳이다. 선조 26년인 1593년 임진왜란 당시 수만의 왜군이 이곳 독산성으로 몰려들자, 전라도 관찰사 겸 순변사인 권율장군은 말을 끌어다 그 위에 쌀을 부었다. 성 안에는 물이 귀해 군사들이 마실 물도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물 대산 쌀로 물처럼 보이게 한 것이다.

 

권율장군은 전라도에 주둔하고 있던 병사 2만여 명을 데리고 이곳 독산성에 주둔하면서 왜군이 물러가게 하여 성을 지켰다는 것이다. 그러한 설이 전해오자 말을 씻긴 곳을 세마대라고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독산성의 지리를 보아 말을 씻긴 이곳은 아마 성내에 군사들을 지휘하던 전각이 자리했던 곳이었을 것이다.

 

 

 

 

깊어가는 가을에 오른 세마대

 

오산 독산성과 세마대지는 사적 제140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독산성의 둘레는 3,240m이고 문이 4곳에 있다. 독산성 안에는 물이 부족한 것이 큰 결점이었다. 이런 결점 때문에 이 곳 에는 세마대(洗馬臺)의 전설이 생긴 것이다.

 

가을이 깊어가는 1022일 오후 늦게 독산성에 올랐다. 낮은 성곽에 난 문을 지나 산성 가장 높은 곳으로 오르니, 떨어진 낙엽들이 발밑에서 바스락하며 부서지는 소리가 난다. 아마 이런 소리 때문에 사람들은 가을 산을 찾는 것은 아닌지. 천천히 걸어 세마대에 오른다. 세마대는 독산성 안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권율장군이 근왕병 2만을 이끌고 독산성으로 오른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임진왜란 중 전사를 살펴보면 삼도의 근왕병 5만이 이광을 주축으로 하여 용인에 집결한다. 713(음력 65) 이광과 운선각 등이 이끄는 남도근왕군이 이곳 용인전투에서 1600명의 일본군에게 대패를 하고 만다.

 

 

 

 

삼도근왕병 독산성에 모였을까?

 

1592426일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소서행장이 이끄는 왜병에게 명장 신립이 이끄는 군사들이 패하고 신립이 전사하자, 전라도 관찰사 이광과 전라도 방어사 곽영, 충청도 순찰사 윤선각, 경상도 순찰사 김수 등이 전라, 충청, 경상도에서 모은 군사 5만 명을 이끌고 이광을 중심으로 삼도근왕병이라 칭했다.

 

이광은 병마절도사 최원을 전라도를 지키라 명하고, 자신은 4만의 관군을 이끌고 충청도 임천역에 도착한다. 전라도 방어사 곽영은 2만여 명의 관군을 이끌고 광주목사 권율을 중위장으로 삼아 여산대로를 지나 금강을 건넜다. 경상도 관찰사 김수가 이끄는 군사들과, 충청도 관찰사 윤선각이 이끄는 수만의 군사도 합세했다.

 

이 모든 군사가 선조 25년인 1592526일 평택 진위에 모이니 삼도에서 모인 군사들의 위세가 등등했다. 이들은 63일 독산성으로 옮겨 주둔한다. 64일 첫 전투에서 적을 물리치고 승리를 하게 되는데, 이 전투는 경상도 순찰사 김수와 경상도 병사 50여 명이 이끌어낸 승리였다.

 

광주목사 권율은 이광에게 사기를 축적하면서 조정의 명을 따를 것을 고하자 이광은 권율의 계책을 따르지 않고 선봉장 이지시와 전라도 방어사 곽영, 방어사 백광언의 군사 1천여 명과 합세해 65일 왜군을 공격했다가 백광언과 이지시, 그의 동생 이지례가 왜군의 조총에 맞아 전사한다.

 

 

 

 

독산성 전투는 언제 있었나?

 

다음날인 66(양력 713) 권율은 다시 신중하게 전투를 치를 것을 이광에게 전했으나 이광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밥을 지어 먹을 때 왜군이 산골짜기를 따라 급습해 크게 패해 이광과 김수, 곽영은 도망을 치고, 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권율의 휘하 군사만이 온전히 남을 수 있었다.

 

이런 기록으로 보면 권율장군의 군사들은 독산성에서 나오지 않고 용인전투에도 참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용인전투에서 패전을 한 이광의 삼도근왕병 중 전라도에서 올라와 독산성에 머문 군사들이 2만여 명이라는 것은 전라도 방어사 곽영과 권율이 이끌고 온 군사들의 숫자와 일치한다.

 

임진왜란 전투 중 권율은 선조 25년인 159278일 이치전투에서 왜군을 격퇴한다. 그리고 선조 26년인 1593212일 행주대첩을 벌인다. 또한 96일과 7일에는 소사에서 왜군을 격파한다. 시기적으로 권율이 전라도 군사들을 이끌고 계속해서 인근 충청도와 경기도를 다니면서 전투를 벌여 승리를 하게 된다.

 

 

 

 

임진왜란 중 과연 독산성에서 머물렀던 권율장군과 그 휘하 근왕병들은 언제 있었나? 또 그들은 어떤 전투를 누구와 벌인 것일까? 적은 장수는 누구였으며 그들은 어느 경로를 통해 독산성으로 오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들은 독산성에서 얼마나 피해를 입었나? 그리고 그들은 어디로 향했나?

 

역시교과서 국정화 문제로 인해 시끄러운 나라를 보면서, 이제 우리지역의 역사도 제대로 정리가 되어야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전해오는 이야기가 아닌, 독산성과 권율에 대한 제대로의 역사가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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