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 남포 최치원 유적과 성주사지를 향유

 

보령시 남포면 월전리 813-8에 소재한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45호 최고운 유적. 고운은 최치원을 일컫는 말이다. 벌써 대천을 다녀온 지 10일이 훌쩍 지났다. 요즈음은 여행을 다녀오고 나면, 자료 정리를 하는 데만 며칠이 걸리고는 한다. 자료정리를 하고나면 바로 글을 써야하는데 이젠 옛날 같지 않아 마음이 그렇게 바쁘지 않다. 이것도 나이가 먹은 탓이려니 하지만, 스스로가 생각해도 게으름을 떨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보령(대천) 여행을 하면서 첫날 찾아간 곳이 바로 남포면에 소재한 최고운 유적이다. 이곳은 보리섬이라고 하는 백도였다고 한다. 1995년 님포방조제를 건설하고 난 후 육지와 연결된 이곳은 통일신라 말기 최치원이 선유한 곳이라고 전해진다. 최치원(857~ ?)은 당에 유학을 하고 돌아왔지만 신분제약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관직에 미련을 버리고 전국을 유람하였는데 경치가 아름다운 이곳을 선유했다고 한다.

 

 

보리섬은 지금은 육지와 연결이 되어있지만 과거에는 백도라고 하는 섬이었다고 한다. 현재는 백도 전체가 육지와 연결이 되어 포구가 없다면 섬이라는 느낌도 들지 않을 정도이다. 보리섬은 작은 산봉우리가 솟아있고 병풍처럼 둘러쳐진 바위가 있다. 예전 물이 이곳에 들어왔다고 하면 절경 중 절경이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써서 이름을 날렸다는 최치원이 쓴 한시가 암벽에 적혀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석양 무렵 찾아간 보리섬. 3월의 꽃샘바람이 부는 날 찾아간 보리섬은 최치원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대신 북녘을 향하는 철새무리들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최치원은 이곳 보리섬과 성주면 성주사지를 왕래했다고 하는데 그 옛날 어떻게 그 먼 길을 다녔을까?

 

 

성주사지를 돌아보다.

 

전하는 말에는 최치원이 보리섬과 성주사지를 왕래하면서 향유했다고 전한다. 이튿날 아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2 외에 소재한 사적 제307호 성주사지를 찾았다. 성주사지는 신라시대의 절로 신라시대 낭혜화상이 다시 세운 선종사찰이다. 그동안 상주사지를 몇 번이고 답사를 했지만 최치원이 이곳을 다니면서 선유했다는 말에 너른 사지가 새롭게 보인다.

 

“최치원은 보리섬에서 이곳까지 어떻게 이동을 한 것일까?” 차로 이동을 해도 족히 20분은 걸리는 길이다. 이곳을 최치원은 무엇을 이용해 다닌 것일까? 성주사지는 백제 법왕 때에 처음 세워진 절로 당시는 오합사(烏合寺)였다. 통일신라 때는 선문구산 중 하나인 성주사는 1금당 1탑식으로 세워진 절이다.

 

성주사는 당시에도 외곽은 돌담을 쌓아 경계를 삼았으며, 넓이는 8,800평이나 되는 너른 경내를 갖고 있는 절이었다. 현재 성주사지에는 국보 제8호인 낭혜화상탑비가 서 있으며 이 탑비는 신라 진성여왕 2년인 890년에 세운 것으로 낭혜화상이 세상을 떠난 지 2년 뒤에 세운 것이다.

 

현재 4기의 탑과 석등 등이 전하는 성주사지

 

3월 5일 찾아간 성주사지. 예전에는 주차장에서 사지로 들어가는 돌담이 트인 곳이 있었으니 돌담을 막아놓았다. 아마도 예전 성주사지의 돌담을 재현하느라 터진 곳을 막은 것으로 보인다. 현재 상주사지에는 국보 제8호인 낭혜화상탑비를 비롯하여 보물 제47호 서삼층석탑, 보물 제20호 중앙탑,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6호 동삼층석탑 등이 서 있다. 이 3기의 석탑은 모두 다른 곳에서 옮겨 온 것으로 밝혀졌다.

 

3기의 석탑 앞으로는 신라시대에 조성한 금당으로 오르는 돌계단이 있다. 이 돌계단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재140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계단 양편에 돌사자를 조각하여 세웠다. 하지만 이 사자상은 1986년 도난당하고 현재 것은 사진을 기초로 복원한 것이다. 금당터 앞에는 보물 제19호 보령 성주사지 오층석탑이 서 있다. 이 오층석탑은 성주사의 불탑으로 조성된 것이다.

 

오층석탑 앞에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3호인 성주사지 석등이 서있다. 통일신라 말기에 세운 이 석등은 파괴되었던 것을 근래 수습한 것이다. 이 외에도 성주사지에는 미륵불 한 기가 서 있으며 그동안 발굴조사에서 발견 된 삼천불전지 기단석 해체부지와 낭헤화상탑비 옆에 놓인 와편과 석물 등이 있다.

 

최치원은 이 먼 거리를 어떻게 다닌 것일까?

 

성주사는 본래 백제 법왕이 왕자 시절인 599년에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지은 절이라고 한다. 당시 이름은 오합사(烏合寺)라고 불렀다는데, 오합사 이야기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에도 언급하고 있고, 발굴조사 때 나온 기와 명문에도 오합사 글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

 

성주사는 임진왜란 때 전부 소실이 되었으며 오늘날 폐사지만 남아있다. 8,800여 평에 달하는 넓고 평평한 성주사 터에는 금당 터 앞에 5층 석탑과 석등이 남아있다. 사지 뒤편 중앙에 남아있는 낭혜화상탑비 하나만으로도 이 성주사지의 중요성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낭혜화상 무염은 신라 29대 태종무열왕의 8대손으로 성은 김씨, 호는 무량, 혹은 무주이다.

 

최치원은 성주사지에 소재한 낭혜화상백월광탑비문(朗慧和尙白月光塔碑文)을 지었다. 아마 보리섬에서 이곳 성주사지를 왕래하며 풍광을 즐겼다고 전하는 이야기도, 이 비문을 짓기 위해 성주사를 찾았음을 뜻한다. 이곳 성주사에서 보리섬의 풍광을 즐기기 위해 먼 길을 다녔을 최치원, 당시 이곳의 풍광이 얼마나 아름다웠기에 그 먼 길을 다녔던 것일까?

 

지금은 육지가 되어 옛 풍광을 찾아볼 수 없지만 현재 남아있는 병풍과 같은 바위만 보아도 당시의 모습을 조금은 유추해 볼 수 있다. 봄바람이 불고 꽃이 피는 계절이 되면 시간을 내어 이 보리섬에서 성주사까지 최치원이 걸었던 길을 찾아 걸어보고 싶다. 그 가운데 또 다른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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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바람 속에 오른 정선 정암사 적멸보궁과 탑

 

지난 8일이었으니 벌써 정유년 정초 삼사순례를 다녀온 지 20일 가까이 지났다.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이 그리 바쁜 것일까? 해가 짧다보니 선뜻 하루해가 떨어진다. 이일저일 바쁘다는 핑계를 대보지만 날짜가 많이 지나고 나면 처음에 만났던 감흥이 떨어져 글을 쓰기가 버겁다. 겨우 사진촬영을 한 자료를 들여다보면서 그날의 기억을 떠올린다.

 

원주 구룡사를 거쳐 영월 법흥사. 그리고 해가 질 녘에 도착한 세 번째 절, 정선 정암사. 그동안 몇 번이고 찾아갔던 곳이지만 2~3년 보지 않은 사이 경내에 못 보던 전각들이 보인다. 시간이 늦어 여기저기 다닐 틈이 없다. 버스에서 내려 일주문을 들어서면서부터 마음이 바쁘다. 적멸보궁 앞으로 가다 만나는 자장율사의 주장자.

 

주장자는 1300년전 자장율사가 정암사를 창건하고 평소 자신이 짚고 다니던 주장자를 꽂아 신표로 삼았다는 주목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가지 일부가 회생한 후 성장하여 완벽한 나무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고 하는데 그 추운 날에도 싱싱하게 자라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그 앞에 합장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적멸보궁을 들려 수마노탑으로 오르다

 

정암사 적멸보궁, 자연석 기단 위에 정면 3,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세운 적멸보궁에는 부처님을 모시지 않았다. 뒤편 언덕에 세운 수마노탑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어 그 탑이 부처님이 되기 때문이다. 적멸보궁 앞에 서서 잠시 머리를 조아리고 손을 모은다. 혼탁한 나라가 바로 서게 해달라고 마음으로 정성을 다한 후 내를 건너 수마노탑으로 향한다.

 

보물 제410호로 지정 되어있는 정암사 수마노탑. 돌을 벽돌처럼 잘라 쌓은 이 탑은 7층으로 조성하였다. 기단부는 화강암 6단으로 쌓고 그 위에 돌 벽돌은 2단으로 올려 탑을 받치고 있다. 수마노탑을 구성하고 있는 벽돌은 회록색을 띠는 석회암이다. 1층 몸돌의 남면 중앙에는 화강암으로 문틀을 마련하고 1석으로 문고리를 단 문짝을 만들었다.

 

수마노탑의 모서리는 악간 치켜 올라 있으며 모서리마다 종을 매달았다. 탑의 정상부인 상륜부는 청동으로 조형하였는데 수마노탑의 상륜부는 거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 수마노탑은 <사적기>에 신라 자장율사가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조선조에 들어 숙종 26년인 1700, 정조 2년인 1778, 고종 11년인 1874년 등 여러 차례 보수하였다.

 

 

아픈지도 모르고 배례석에 무릎을 꿇다.

 

정암사에 전하는 말이 의하면 수마노탑은 신라 선덕여왕 14년인 서기 645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절이라고 한다. 자장율사가 당나라 산서성에 있는 운제사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석가모니의 정골사리 등을 받아 선덕여왕 12년이 돌아와 14년에 금탑, 은탑, 수마노탑을 세웠다는 것이다.

 

수마노탑은 돌아오는 자장율사를 서해 용왕이 용궁으로 모시고 가 건네준 마노석으로 쌓은 탑이라고 한다. ‘수마노탑이라는 명칭도 마노석을 잘라 탑을 쌓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수마노탑과 함께 세운 금탑과 은탑은 후세 사람들이 귀한 보물에 탐심을 낼 것을 우려하여 비장하였다고 한다.

 

만일 금탑과 은탑이 함께 서 있었다고 하면 수마노탑의 가치는 몇 배 이상일 것이다. 문화재를 등급으로 표시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겠지만 전설 속으로만 남아있는 금, 은탑으로 인해 수마노탑의 건립연대마져 정확치 않다는 것도 마음이 아프다. 굳이 문화재 안내판에 고려 때의 탑이라고 우길 필요가 있었을까? 탑은 그 전하는 말 그대로 믿고 그대로 마음속으로 염원하면 되는 것을.

 

높지는 않지만 가파른 언덕을 오른다. 두 곳의 절을 들려오느라 이미 한 겨울의 짧은 해가 넘어갈 시간이다. 마음만 바빠 숨이 차오르는 것도 잊고 탑 앞으로 오른다. 탑 앞에 베례석이 놓여있다. 배례석에 무릎을 꿇고 마음속으로 간절한 바람을 기원한다. 이 혼탁한 세상에 광화문의 아픔이 더 이상 계속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다. 날도 추워지는데 그 많은 사람들이 왜 그리 주말마다 아픔을 계속해야 하는 것일까?

 

하루 만에 세 곳의 절을 돌아오는 삼사순례. 이른 아침 출발해 해가 떨어지는 시간까지 쉬지 않고 돌아본 여정의 막을 내린다. 어둠이 내리는 길을 돌아오면서 바쁘게 움직였던 하루를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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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사, 법흥사, 정암사 등 삼사를 하루에 돌아

 

정유년에는 모든 사람들이 많이 힘들 거예요. 닭띠 해에 수많은 닭들이 살처분되는 것을 보아도 좋은 일은 아니죠. 그래서 올해는 고찰을 많이 찾아다니면서 많은 덕을 쌓아야 해요. 정유년 한 해를 잘 보내야 할 것 같아요. 살아가기 아주 힘든 한해 일겁니다

 

8일 아침 이른 시간에 버스 안에서 고성주씨가 한 말이다. 경기안택굿보존회 회장이기도 한 고성주씨는 자신의 단골판을 갖고 있는 몇 안되는 만신이다. 그 단골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행사로 매년 몇 차례씩 삼사순례를 돌아온다. 그렇게 한 번씩 다녀올 때마다 단골들이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되고 일이 수월하게 풀린다는 것이다.

 

오전 730분 버스에 오른 순례자 일행은 원주 치악산 구룡사를 먼저 들린 후 영월 법흥사, 정선 정암사까지 세 곳의 절을 하루에 돌아오는 여정이다. 차로 이동을 한다고 하지만 해가 짧은 음력 섣달에 하루에 세 곳이란 만만한 여정이 아니다. 원래 세 곳의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을 돌기로 했지만 짧은 겨울 해 때문에 처음에 예정한 상원사 대신 구룡사를 먼저 들린 후 법흥사와 정암사를 돌기로 한 것이다.

 

의상대사와 아홉 마리의 용이 도술시합을 했다는 구룡사

 

원주시 소초면 학곡리 1029에 소재한 구룡사는 매표소에서 걸어 들어가는 900m의 금송길이 일품이다. 이 길은 차가 다니는 길과 절을 찾아드는 보행자들이 걸을 수 있는 길을 따로 내놓았다. 치악산에서 흐르는 맑은 물이 흐르는 개울가 한편으로 길을 낸 보행자도로를 따라 걷다보면 절로 가슴이 트이는 듯하다.

 

구룡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의 말사로 치악산 국립공원 안에 자리하고 있다. 구룡사는 신라 문무왕 8년인 668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구룡사는 라말려초 도선국사의 비보사찰 중 한곳이었으며 풍수지리적으로는 천년이 지난 신령한 거북이 연꽃을 토하고 있고 아홉 마리의 용이 구름을 풀어놓은 천하의 명당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구룡사는 거북 구()와 용 용()자를 사명에 사용하고 있다.

 

 

구룡사로 향하는 길이 금강소나무길이라는 것은 매표소를 지나 바로 좌측에 놓인 문화재 안내판을 보고 확인할 수 있다. 이곳에 강원도 기념물 제30호인 황장금표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황장금표(黃腸禁標)란 황장목을 보호하기 위해 일반인들에게 벌채를 금지하는 표시고 작은 바위에 왕장금표라고 선각을 해놓았다.

 

치악산에는 목재로 사용할 수 있는 질 좋은 황장목들이 자라고 있어 이런 황장목을 보호하기 위해 바위에 금표라는 글자를 새겨 벌채를 막은 것이다. 이 황장금표는 조선시대에 세운 것으로 건축자재로 사용하기 적당한 목재의 확보를 위해 황장목을 채벌하지 못하도록 전국의 황장목 생육지에는 많은 금표석이 서 있다.

 

 

대웅전 뜰에서 내려다본 풍광 압권

 

금강송 길을 걷다보면 구룡사의 넓은 뜰이 나온다. 주차장으로도 사용하고 있는 이곳은 중층전각으로 세운 사천왕문을 통과해 대웅전으로 오르게 되어있다. 시천왕문을 들어서면 대웅전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고 그 위에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45호인 보광루가 자리하고 있다. 이 보광루 아래를 지나야 대웅전 앞뜰에 설 수 있다.

 

보광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익공집이다, 맞배지붕으로 조성한 이 보광루는 배흘림기둥으로 누각을 올린 누각층은 대웅전을 향해 개방을 시켰다. 천장은 우물반자로 누마루는 우물마루로 꾸민 이 보광루 마루에는 한 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멍석에 깔려 있었다고 전한다. 그 외에 구룡사에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4호인 대웅전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매표소에서 사천왕문까지 걷는 1km 정도의 구룡사 진입로는 가히 절경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심신이 즐거워진다. 대웅전 앞에서 바라다보는 치악산의 경치 또한 이름답다. 잎이 떨어진 나무들의 앙상한 가지조차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곳. 능선의 굴곡이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감상하는 듯한 구룡사는 그런 멋들어진 경관을 품고 있는 절이다.

 

올 봄 만물이 소생하고 나뭇잎들이 연두색 잎을 달기 시작하면 꼭 한 번 다시 찾아와야겠다. 계곡을 흐르는 맑은 물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은 금강송. 그 기운을 받으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계곡 위로 낸 목책길을 걸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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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출은 만나지 못했어도 마음의 문을 열어

 

나에게는 버릇이 하나 있다. 지금까지 세상을 살아오면서 수도 없이 많은 고난도 겪어보았고 때로는 좌절하기도 했지만 그 때마다 나를 일으킨 것은 바로 여행이다. 항상 내 생활에 변화가 있을 때는 그저 간단한 차림으로 여행을 떠나곤 했는데, 그렇게 여행에서 새로운 마음다짐을 하고 새 힘을 얻어 돌아오곤 했다.

 

그렇다고 장황하게 무슨 일을 벌이는 것은 아니다. 그저 조용한 곳에 가서 2~3일 쉬면서 새로운 일을 맡아하게 될 사안을 정리하고 혼돈한 머리를 좀 쉬고자 할 뿐이다. 하기에 난 내 신변에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바닷가로 여행을 떠난다. 바람에 일렁이는 파도와 떠오르는 아침 해를 만나기 위함이다.

 

 

4일 오전 수원을 떠나 고성으로 향했다. 고성군 현내면 산학리 정수암 주지인 진관스님과 연락한 후 그곳에서 2~3일 묵으면서 2017년 내가 새롭게 해야 할 일에 대해 정리를 하고 지난날을 생각하면서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엇을 잘못했는가를 찾아보고 그 잘못을 반성하기 위함이다.

 

사람은 늘 반성하면서 살아간다고 했던가? 완전한 사람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늘 실수를 반복하게 된다. 다만 그런 실수를 재차 반복하지 않기 위한 마음의 다짐을 하기 위함이기 때문에 나에게 여행이란 중요할 수밖에 없다. 4시간을 더 달려 찾아간 정수암. 수원과는 달리 그곳은 눈이 쌓여 차조차 마음대로 오를 수 없었다.

 

 

지난해에 조성한 마애불과 조우하다.

 

정수암은 일 년에 두세 차례 찾아가는 곳이다. 그저 그곳에 가서 하는 일이라고는 딱히 없다. 법당에 들어가 참배를 하고나면 이곳저곳을 돌며 좋은 공기를 쏘이면서 스님과 이야기도 하고 인근 도시를 돌며 좋은 음식을 먹곤 하는 것이 고작이다. 해가지면 스님은 요사로 난 법당 한편에 묵을 수 있는 방으로 들어가 혼자 조용히 생각을 한다.

 

일 년이란 시간을 재직했던 곳을 그만두었다. 새로운 곳으로 자리를 옮겨야 하기 때문이다. 2017년 한 달 동안 맡은 일을 처리하고 나면 2월부터는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해야 한다. 물론 내가 맡은 일이라는 것은 취재를 하고 기사를 쓰는 일이다. 늘 그런 일을 해왔지만 올해 맡은 일은 그동안과는 일과는 사뭇 다르다. 더 많은 생각을 해야 하고 그동안 만났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법당을 나와 지난해 조성한 마애불을 찾아보았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서원하는 바가 있어 힘들여 조성한 마애불인데 아직 완성을 하지 못했다. 마애불 조성을 맡아하던 아우가 채 완성하지 못하고 외국으로 떠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힘들여 조성한 마애불이지만 아직 완성을 하지 못한 것을 바라보면 영 마음이 편치가 않다. 올해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마무리를 지어야겠다는 생각이다.

 

 

새로운 일은 새로운 마음으로 대응해야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끊고 맺는 것이 분명해야 한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중하게 여겨야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 중에는 남을 이용하고 난 후 더 이상 자신에게 득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떠나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 주변에는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

 

절을 한 바퀴 돌아본다. 눈이 쌓인 절의 경관이 지난해 여름보다는 다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달라지고 있는 풍광에 적응해야 한다. 산신각이며 절 입구에 세운 일광월광보살 불이문 등. 전통을 지키지 않은 절이지만 금강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어느 것보다 정신수양을 하기에 좋은 곳이다. 이곳 고성 현내면 산학리를 찾는 까닭은 바로 이런 변화 때문이다.

 

자리가 바뀌고 환경이 바뀌면 적응을 빨리해야 한다. 적응시간이 길면 그만큼 힘들기 때문이다. 12일로 찾아간 고성 정수암. 그곳에서 새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할 기운을 얻는다. 환경이 바뀔 때마다 떠나는 여행. 올해 첫 여행이지만 이곳에서 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기운을 얻어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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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아침 일직 수원을 출발했다. 경남 양산 통도사로 향하는 버스 안에는 팔달구 지동에 소재한 경기안택굿보존회(회장 고성주) 회원 30여명이 승차했다. 이들은 양산 통도사로 2016년 정기 삼사순례를 떠난 길이다. 길을 떠난 지 두어 시간이 더 지나 추풍령 휴게소에 도착하니 눈이 쌓이고 상고대가 아름답게 햇살에 반짝인다.

 

그 전날 수원에도 첫눈이 내렸지만 날이 푹한 터에 모두 녹아버렸는데 지대가 높은 추풍령에는 눈이 남아 아름다운 설경을 보여주고 있다. 모처럼 떠난 여행에서 첫 눈이 아름다운 모습을 만난다는 것만 해도 즐거운 일이다. 그리고 몇 시간을 달렸을까? 양산 통도사 입구 주차장에 차를 대고 통도사를 향하는 무풍한송로(舞風寒松路)’로 접어들었다.

 

 

무풍한송로는 그야말로 걷기에 딱 좋은 길이다, 내를 건너 반대편에는 차를 이용해 통도사로 들어가는 길이 있지만 어찌 통도사까지 먼 길을 달려와 이 좋은 길을 놓아두고 차를 이용한다는 것일까? 그저 심호흡을 한 번씩 할 때마다 솔향이 폐부 깊숙이 들어오는 듯하다. 바쁠 것도 없다. 수백 년 넘은 소나무들이 자리하고 있는 이 소나무길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무풍한송로는 걸어서 20~30분 정도가 소요된다. 물론 걷는 속도에 따라 차이가 나겠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걸어 통도사로 향한다. 천천히 걷다보면 중간에 시원한 물도 마실 수 있고 정자도 있어 피곤한 발을 쉴 수도 있다. 또한 이곳 정서와는 어울리지 않지만 차와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공간도 있다. 맑은 통도사 계곡물과 노송, 그리고 차 한 잔 얼마나 어울리는 단어들인가?

 

                     

 

수원 노송지대 제대로 보존될 수 있을까?

 

통도사 무풍한송로를 걸으며 우리 수원의 노송지대가 생각난다. 경기도 기념물 제19호로 1973710일에 지정된 파장동 노송지대. 이곳 노송지대에 식재되어 있는 소나무들은 정조의 효심을 가득 담고 있다. 파장동에서 길게 지지대비로 향하는 약 5km 정도의 이 길은 예전 정조대왕이 능침에 모신 아버지 장헌세자(사도세자)를 만나러 다니는 길목이었다.

 

정조대왕은 아버지 장헌세자의 원침인 현릉원 식목관에게 내탕금 1천량을 하사하여 이 길에 소나무 500주와 능수버들 40주를 심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수령 200여년을 넘는 소나무들이 줄을 지어 있는 노송지대는 정조대왕의 효행의 길이다. 2차선 도로를 따라 자라고 있는 소나무들은 하나같이 오랜 수령을 자랑하 듯 기묘한 형상을 하고 있다.

 

이 노송지대가 변했다. 노송지대 사이로 난 차도를 한편으로 옮겨 차량들의 매연으로부터 소나무를 보호하기 위한 보존방법을 택한 것이다. 많은 정조의 효를 상징하는 노송들이 이제는 차량의 매연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할 따름이다. 얼마나 그 오랜 세월을 차량의 매연으로 인해 많은 피해를 당한 것일까?

 

 

노송지대통도사 무풍한송로와 같이 만들어야

 

통도사 무풍한송로는 내 건너편으로 차도를 내었다. 소나무들이 가장 싫어한다는 차량의 매연을 피하기 위함이다. 곳곳에는 부도탑이며 석등, 불자들이 세운 각각의 다양한 탑들이 즐비하다. 물론 이 탑들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이곳이 사찰경내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길을 걸으면서 곰곰 행각해본다. 우리 수원의 노송지대도 이렇게 사람이 걷기 좋은 숲길로 조성할 수 있을까?

 

노송지대 안에 무분별하게 난립된 무허가 건물들을 정리하고 곳곳에 정조대왕에 관한 글이며 시비를 세운다면 이 또한 아름다운 숲길이 되지 않을까? 모든 사람들이 낙엽을 밟으며 심호흡을 하면서 걸을 수 있는 곳. 그리고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즐겨 걸어 다닐 수 있는 길을 만들 수는 없는 것일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노송지대는 또 다른 깊은 뜻을 갖고 있다. 즉 정조의 효심이 어린 길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 길을 통도사 무풍한송로와 같이 조성할 수만 있으면 수도권의 더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을 수 있는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다. 통도사 무풍한송로를 걸으면서 우리 수원의 노송지대도 많은 사람들이 즐겨 걸을 수 있는 노송 숲길이 될 수 있도록 조성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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