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이 널려 있는 충남서산 보원사지

 

1년이 넘도록 문화재답사 다운 답사를 하지 못했다. 모처럼 나선 문화재답사길. 그동안 한이라도 맺힌 듯 돌아치면서 만난 곳이 바로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에 소재한 사적 제316서산보원사지였다. 벌써 이곳을 들렸던 지가 15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가까이 가보니 주변이 상당히 변해있다.

 

난 이곳을 찾아가면 마음이 들뜬다. 사적지 한 곳에 보물만 5기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변에 이런저런 것들이 들어와 자릴 잡고 있지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보물 제103호인 신라 때 조성된 당간지주다. 보원사지는 백제시대에 창건된 절로 통일신라와 고려 때 크게 융성하였고 왕사, 국사를 지낸 법인국사의 탑문이 묻힌 곳이다.

 

 

보원사지 발굴당시에 신라와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대형 철불 2구가 발견되었으며 1967년도에는 백제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금동여래입상이 출토되는 등 매우 융성했던 사찰임을 알 수 있다. 보원사 주변에는 100개소의 암자와 1,000여 명의 승려가 있었다고 전하는 것만 보아도 당시 보원사지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다.

 

현재 보원사지에는 백제계의 양식에 통일신라와 고려의 석탑양식을 갖춘 보물 제104호 오층석탑과 통 돌을 장방형으로 파내어 조성한 한국최대의 석조(보물 제102), 975(광종26) 법인국사가 입적하자 광종의 지시로 세운 보물 제105호 보승탑, 법인국사의 생애가 기록된 보물 제106호 법인국사 보승탑비, 사찰에 행사가 있을 때 괘불을 걸었던 당간지주 등 보물만 5점이 사지에 자리하고 있다.

 

 

 

한옆에 모아놓은 석물과 와편 등 수북해

 

보원사지로 접어들면 높이 4.2m의 당간지주가 앞에 서 있다. 통일신라 때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이 당간지주는 자리도 옮기지 않고 제 자리라고 한다. 절의 행사가 잇을 때 악귀를 쫓기 위해 당이라는 깃발을 걸어놓을 때 사용하는 당간지주는 지주의 안쪽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바깥쪽에만 양편 가장자리에 돌대를 돋을새김 하였다.

 

당간지주 우측으로 보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석조가 보인다. 밋밋한 장방형으로 파낸 이 석조는 물을 담아두는 용기로 아래편에 구멍을 내어 물이 빠져나가게 만들었다. 통일신라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이 석조는 현재 남아있는 석조 중 가장 큰 것으로 사지에 남아있는 고려 때의 보승탑 등을 볼 때 고려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조에서 금당방향으로 작은 내가 흐르고 있다. 15년 전에는 이 내에 올갱이가 많이 서식하고 있어 그것을 잡는 재미도 쏠쏠했다. 스님들의 포행길인 듯한 나무로 만든 다리를 건너면 와편과 석조물들이 정리되어있다. 아마 이곳을 발굴하면서 나온 듯한데 그 양이 상당하다. 지난날 보원사지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만하다.

 

전에는 금당 터도 발굴되지 않았는데 이번에 찾아가보니 금당 터까지 발굴되었다. 금당 터 뒤편에는 부처가 앉았던 좌대가 보이고 그 앞에 탑이 서 있다. 보물 제104호인 오층석탑은 전형적인 통일신라~고려초기의 석탑양식을 보이고 있다. 이 탑은 아래 기단부에 사자상을 새기고 위층 기단에는 8부 중상을 새겼는데 탑이 안정감이 있고 수려하다.

 

 

기분 좋은 답사, 이제부터 시작이야

 

하루 만에 참 많은 곳을 돌았다. 금당 터 뒤편에 높이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자리한 보물 제106호보원사지 법인국사탑비와 제105호 법인국사탑. 두 기 모두 보불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에 보원사지에는 보물만 5기가 자리하고 있다. 천년 세월을 그렇게 한 자리에 서 있는 보원사지의 석조물들. 시간이 가도 꼼꼼히 다져볼 수밖에 없다.

 

법인국사탑은 법인국사의 사리를 모셔놓았던 탑이다. 975년에 건립된 이 부도탑은 나라의 장인인 국공에 의해 조성되었다. 팔각원당형의 형태로 조성된 부도탑은 경기도와 강원도 등에서 흔히 만날 수 없는 특이한 형태로 조성되었으며 중대석의 조각이 특히 뛰어나다. 이 부도탑은 상대석에 난간을 두른 것이 특이하다.

 

 

부도탑이 서있는 축대위에 올라서 앞을 내다본다. 시원하게 정비된 보원사지는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그리고 더 많은 자료들을 발굴해 전시해놓았다. 예전에는 없던 절이 들어와 한 옆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 대단한 보원사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런 문화재 옆에 세울 것 같으면 제대로 격식을 맞춰 마련할 수 없는 것일까?

 

문화재 답사를 하다보면 사지마다 한편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절들. 문화재를 보호하는 차원에서는 바람직하다고 하겠지만 제대로 절을 지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어설프게 지은 절로 인해 오히려 소중한 문화재의 품격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앞으로 그동안 잊고 있었던 답사에 박차를 가해야겠다. 얼마나 더 다닐 수 있을지 마음이 조급해진다.

대원군 부친 남연군 무덤으로 폐사된 고려 절 가야사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에는 북쪽을 향해 서 있는 석불 한 기가 자리한다.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182호인 이 석불은 고려 때의 것으로 보이는데 전체적으로 돌기둥 형태를 이루고 있다. 미륵불로 불리는 이 석불입상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보관에 소불을 새긴 것으로 보아 관세음보살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석불입상의 얼굴은 길쭉하며 양 볼에 두툼하게 살이 올라있으며 좌편견단의 법의는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다. 이 석불입상은 양팔을 몸에 붙이고 오른손은 가슴까지 들고 왼손은 손등이 봉게 해 배에 대고 있다. 이런 유형의 불상은 충청도 지방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형태이다.

 

이 석불입상은 대원군 이하응의 부친인 남연군묘에서 동북방향으로 150m 정도 떨어진 계곡에 자리하고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불상은 원래 인근에 자리한 가야사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대원군이 부친의 묘를 쓰기 위해 가야사를 없애자 등을 돌렸다고 한다. 얼마나 그 행위가 불편했으면 돌부처도 등을 돌렸을까?

 

 

고려 때부터 전해진 가야사, 석재만 남아

 

덕산면 상가리에는 고려 때부터 존재했다는 가야사지가 있다. 가야사지 추청불전지인 이곳은 옛 가야사의 석재가 한 곳에 쌓여있다. 가야사는 고려시대부터 있던 절이었으나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부친 남연군 이구의 묘를 이장하면서 폐사시킨 절로 알려져 있다. 가야사지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150호로 지정되어 있다.

 

예산군은 가야사지의 보수 및 복원을 위해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총 3차례의 문화재 발굴 조사를 벌여 중정을 중심으로 하는 8동의 건물지와 석조불상 8, 청동불두 1, 가량갑사라 쓴 명문기와 등을 발견했다. 3차 발굴 시에는 남연군묘의 제각시설을 확인하여 남연군묘의 제각이 가야사지를 일부 파괴하고 제각을 지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가야사지 한편에는 가야사지 발굴당시 찾아낸 석물들이 놓여있다. 이곳 가야사지의 중전(中殿)을 비롯한 불전지는 규모 18.2m × 14.2m의 대형 건물지로 확인되었다. 한편에 모아놓은 석물들은 이곳에 옛 가야사라는 절터임을 확인해 주고 있다. 가야사지는 예산군과 서산시 경계 가야산 한편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던 절로 이곳 가야동이라 불리는 곳에는 99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가야사를 부수고 마련한 남연군묘

 

이곳이 명당이라고 절을 없애고 묘를 썼다는 대원군 이하응. 가야사지에서 계단을 따라 오르면 둔덕 위에 마련한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부친 님연군 이구의 무덤이 소재하고 있다. 충청남도 기념물 제80호로 지정된 남연군의 묘는 높은 언덕에 반구형 무덤이 자리하고 있으며 봉분 앞으로는 석물들을 세웠다.

 

이구의 묘는 원래 경기도 연천군 남송정에 있었으나 대원군 이하응이 지관 정만인에게 부탁하여 명당을 알아본 결과 이 자리가 ‘2대에 걸쳐 왕이 나올 자리라는 말에 1846년 부친의 묘를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묘를 옮기고 난 뒤 7년 후 차남 명복을 낳았는데 철종이 후사가 없어 가까운 종손인 명복이 12세로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고종이다. 지관의 말대로 이곳은 2대에 걸쳐 왕이 나온 자리가 맞지만 그 2대를 끝으로 조선이 역사에서 사라졌으니 어째 지관은 2대에 걸쳐 왕이 나올 자리만 알고 나라가 사라질 것은 몰랐을까?

 

돌부처도 돌아선 남연군묘. 묘 아래편으로는 남연군을 운송한 궁중식 상여인 남은들상여를 보관한 전각이 있다. 남은들상여는 중요민속문화재 제3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장강 위에 구름차일을 친 용봉상여로 4귀에는 용모양이 금박이 있다. 님은들상여의 진품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하고 있으며 보호각에 있는 상여는 모조품이다.

 

 

 

주변에 관련되는 문화재를 돌아보면서 입안이 씁쓸해진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민초들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 것이거늘 어째 자신의 영욕을 위해 권력을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잘 꾸며놓은 남연군묘 앞에서 내려다 본 가야사지. 역사 속에서 숱한 사찰들이 사라졌지만 한 개인을 위해 사라진 가야사의 이야기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만 같다.

 

포천시와 동두천, 양주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왕방산. 해발 737m의 왕방산은 광주산맥의 서쪽 지맥인 천보산맥 북쪽 끝에 자리하고 있다. ‘왕방산이란 명칭은 왕이 친히 이곳을 들렸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왕방산 정상 부근에 자리를 잡고 있는 전통사찰 제92호인 왕산사. 왕산사는 봉선사본말사약지에 의하면 877년 신라 헌강왕 3년 도선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창건과 함께 왕이 친히 방문하여 격려해 주었으므로, 산 이름을 왕방산(王方山)’이라 하고 절 이름은 왕산사(王山寺)’라 했다고 이 약지는 전하고 있다. 헌강왕이 도선국사의 높은 덕을 흠모해 자주 궁으로 모셨던 역사적 사실을 고려해 볼 때. 이 같은 약지는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

 

 

또 다른 일설은 태조와 관계가 있어

 

또 다른 일설에는 조선을 세운 태조가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함흥으로 가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태조를 모시러 갔던 대신들이 돌아오지 않는 일이 잦아져 함흥차사라는 말이 생기기도 했다. 무학대사가 직접 가 설득해 모셔오던 중, 왕자의 난이 일어났음을 감지하고 발길을 돌려 이 절에 머물렀다고 하여 왕방사라 불렸다고 전하기도 한다.

 

신라 때 도선국사는 전국을 다니면서 풍수지리를 보아, 그곳에 맞는 지맥을 찾아 절을 창건했다. 왕방산을 찾아와 절을 창건한 것도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하지만 왕산사에 대한 내력이 정확하게 전하지를 않아, 왜 이곳에 절을 지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약지에도 이러한 내용은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왕방사가 어떻게 유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1572년 조선 선조 5년에 청암과 백운 두 스님이 고쳐지었고, 1627년 인조7년에는 청산과 무영 두 스님이 중창하고는 왕산사라 하였다고 전한다.

 

 

명당 중에 명당 왕산사

 

 

해방직후 금강산에서 수도하던 청매화상이 중생구제의 뜻을 품고 제방으로 보임을 다니다가 이 지역을 지나면서 이 터가 매우 수려함을 보고 들어오니 고색창연한 빈터에 천년석불만이 지하에 묻혀있다는 현몽을 받고, 1947년에 초가삼간을 짓고 보덕사라 이름을 하였다고 한다. 뒤를 이어 화정화상이 주지로 부임하여 20년 동안 가람수호와 수도정진에 힘써 오늘의 사세를 이루고 있으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이다.

 

왕산사는 명당 중 명당이라고 한다. 왕산사 터의 지세를 보면 백두대간에서 시작해 동쪽으로는 오봉산 금강산 향로봉으로 이어졌다. 서쪽으로는 한북정맥이 백암산, 대성산, 백운산, 운악산, 국사봉, 왕방산으로 이어지면서, 마치 용트림을 하듯 이어져 한강과 임진강 사이의 합수지점에 이르러 장명산이 한북정맥의 끝을 맺는다.

 

바로 이러한 사이에 왕방산 왕산사가 자리하고 있다. 아마도 이곳에 헌강왕이 직접 찾아왔다는 것도 도선국사의 청에 의해서였을 것이라고 생각이 든다. 이곳이 명당 중 명당이라면, 이곳에 왕이 날만한 길지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실제로 궁예는 가까운 철원을 도읍으로 정하려고 했던 것을 보아도 그럴만한 가능성이 있다.

 

도읍터로 제격이지나 않았을까?

 

왕산사에는 대웅전과 지장전, 삼성각, 요사채 등의 전각이 있고, 산 위쪽으로는 석불이 자리하고 있다. 왕산사를 찾던 날 경내에서 만나 뵌 스님은 절 안에 문화재로 지정받을 만한 것들이 있다. 보여줄 수는 없지만, 오래 묵은 석불들이 있어 문화재 지정을 서두르고 있다고 하면서 이곳은 물이 마르지 않는 곳이다. 산에서 내려오는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 큰물을 이룬다.”고 했다.

 

아마도 그 문화재 지정을 앞두고 있는 서책이나 석불 등에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왕방사 앞으로 내려다보이는 포천 시가지를 보면서 명당임에는 틀임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

 

절을 떠나는데 두 마리의 절개가 배웅을 하 듯 따라나선다. 한 마리는 할머니라고 스님께서 설명을 하신다. 벌써 10년이 지났다는 것이다. 이렇게 높은 절에 개가 많은 것은 멧돼지 임금이 왕방산에 산다.’고 마을에 전하는 이야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평택 현덕면 덕목리 소재 심복사의 아름다운 화장실

 

평택시 현덕면 덕목라에 소재한 심복사(深福寺)’.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보물 제565호인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을 모시고 있어 유명한 절이다. 이 비로자나불좌상은 파주 문산포에 거주하던 천문을(千文乙)이라는 어부가 덕목리 앞바다에서 고기잡이 중에 건진 것이라고 한다. 어부는 이 불상을 모실 곳을 물색하던 중 현 심복사 자리에 오자 갑자기 석불이 무거워져 옮길 수 없어 현재의 터에 절을 짓고 복을 많이 받는 절이라는 뜻을 가진 심복사(深福寺)’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내가 심복사를 찾아간 것은 보물인 비로자나불좌상을 보고자 한 것이 아니다. 3년 전인가 이곳을 찾았을 때 만났던 심복사 해우소 때문이다. 해우소란 절에서 사용하는 화장실의 명칭이다. 해우소는 근심을 풀어내는 곳이란 뜻을 갖고 있으며 우리 수원시에는 화장실 변기를 닮은 해우재가 있어 세계적인 화장실 공원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런 수원에 거주하다보니 자연 어디를 가나 해우소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많은 절을 찾아다니면서 문화재답사를 하다가 해우소에 들려 일을 보았는데 그 종 몇 곳의 해우소는 정말 나중에 책으로 한권 엮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절에서 만난 화장실인 해우소가 문화재로 지정은 되지 않았다고 해도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인간의 가장 중요한 신진대사를 위해 꼭 필요한 곳이기 때문이다.

 

 

비움의 미학’, 해우소

 

심복사 해우소를 처음 본 것은 20151월이다, 정말 뼈 속까지 엄습하던 추위가 찾아온 날이었다. 당시 이 해우소는 축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건물을 구성한 목재들이 모두 색조차 바라지 않았고, 해우소에 들어가면 강한 송진 냄새를 풍기기도 했다. 그런 심복사 해우소가 아름다운 화장실로 지정받았다는 소식에 29일 아침 할일도 마다한 체 한 달음에 달려간 것이다.

 

우리나라 사찰의 전통 해우소는 대개 복층으로 짓는다. 입구는 높은 곳에 마련하고, 밑으로 축대를 쌓아 배설물을 저장하는 공간을 구성한다. 심복사 해우소도 전통 방식을 따라 지었다. 밖으로 나와 보면 커다란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려놓았다. 나무의 틀 역시 전통방식으로 짜 맞추어 모양새가 좋다. 뒤편으로 돌아가서 해우소를 보면 복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아래층 중앙에 문을 내었다.

 

비움의 미학이라는 해우소는 이 아래 칸에 조성한 문으로 안에 쌓인 배설물을 밖으로 끄집어내어 낙엽이나 재 등과 섞어 유기농비료를 생산하는 것이다. 결국 먹고 버리는 것이지만 다시 인간에게 필요한 먹거리를 생산하는데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 그 어느 것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는 말을 실감나게 만든다. 심복사 해우소 역시 그런 전통방식을 따른 것이다.

 

 

앞으로 전통 해우소 이야기 계속하고 싶어

 

피안(彼岸)’이란 진리를 깨닫고 도달할 수 있는 이상적 경지를 나타내는 말이다. 심복사 해우소는 입구를 반으로 갈라 들어서면서 우측은 여자용, 좌측은 남자용이다. 그런데 이 해우소는 칸막이 높이가 사람의 가슴 높이정도이기 때문에 사람이 일을 보기 위해 이곳을 들어가면 곁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다 보인다.

 

여자용은 네 칸 2줄로 모두 8칸이고, 남자용은 세 칸 2줄로 모두 6칸이다. 물론 중앙에는 칸막이가 있지만 이 칸막이 역시 성인이 일어서면 옆의 용변을 보는 사람이 다 들여다보일 정도이다. 왜 이렇게 남들이 다 볼 수 있도록 만든 것일까? 아마도 인간이 모든 것을 가리려고만 하는 것이 불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은 아닐까?

 

심복사 해우소에 앉아서 밖을 내다보면 벽면이 살창으로 되어 있어 밖이 훤히 내다보인다. 날씨가 추워져 찬바람을 막기 위해 비닐로 바람을 막고 있지만 그래도 보일 것은 다 보인다. 그곳에 앉아 볼일을 보면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저 밖이 피안의 세계라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닐까? 비닐로 막았다고 하지만 오래 앉아있을 수가 없다. 그저 그곳에 앉아 앞으로 시간이 날 때마다 전국의 전통해우소를 찾아다니며 해우소 이야기나 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뿐이다.

 

이제 가을이 막바지에 들었다. 지난 6일이 한 겨울이 시작한다는 입동(立冬)이다. 입동이 되면 사람들은 김장준비를 한다. 올해는 배추 값이 폭락해 벌써부터 배추가격으로 인해 농촌에서 곤란을 겪는다는 소식이 들린다. 하지만 배추 값이 떨어진 만큼 고춧가루 값이 뛰어 김장을 하는 집에서는 지난해보다 조금 저렴한 가격에 김장을 할 수 있다고 한다.

 

나야 집에서 김장을 할 필요가 없으니 그저 이곳저곳에서 보내주는 한 통씩 갖다 주는 김치로 한 겨울을 나고는 한다. 수원이 사람살기 좋은 곳이라는 것은 이렇게 나누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기 때문이다. 혼자 먹는 김치가 왜 그렇게 많아야 되느냐고 하겠지만 우리네들은 김장을 한 겨울 양식이라고 할 정도로 겨울철 반찬으로는 꼭 필요하다.

 

이천은 설봉호 주변에 많은 볼거리들이 몰려있다. 설봉호의 경치는 가을이 되면 압권이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온다. 너른 주차장은 언제나 차들로 들이찬다. 이곳 설봉호 주변에는 설봉산성을 비롯해 보물 제822호로 지정된 영월암 마애여래입상이 산자락 바위면에 부조로 조성되어 있는 고찰 영월암 등이 자리한다.

 

또한 설봉서원을 비롯해 관고리 오층석탑 등 설봉호수 주변을 돌면서 즐길만한 것이 상당수 자리하고 있다. 이천은 봄이되면 백사면 도립리의 산수유가 유명하다. 도립리 산수유축제는 전국 각처에서 사람들이 모여든다. 더구나 산수유마을 인근에 천연기념물인 이천 백송과 반룡송이라 이름붙인 소나무가 자라고 있어 연중 사람들의 발길이 그치지 않는 곳이다.

 

 

가을에 찾아간 설봉호 단풍 아름다워

 

설봉호 주차장 옆으로 오를 수 있는 영월암은 경사가 심한 곳이라 차로 오르기도 쉽지가 않다. 하지만 영월암을 오르다가 보면 이천시가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영월암은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625-702)가 창건하여, ‘북악사(北岳寺)’라 칭하고 산 이름도 북악(北岳)이라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실증적 사실여부를 확인하기 어렵다.

 

주차장에서 영월암까지의 거리는 1.5km 정도이다. 크지 않은 영월암에는 이천시 향토유적 제3호로 지정된 석조광배 및 연화좌대가 있다. 이는 통일 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작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럼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영월암은 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창건한 절로 추정하고 있다. 그만큼 유서 깊은 고찰이다. 차를 갖고 이곳 설봉호수를 찾아갔다고 하면 꼭 한 번 영월암에 올라볼 것을 추천하고 싶다.

 

설봉호는 이천시 관고동에 있는 저수지로 설봉저수지 혹은 관고저수지로도 불린다. 면적은 99,174평방미터이며 둘레 1.05km 수심은 99m이다. 설봉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천시의 관광명소 중 하나로 손꼽히는 곳이다. 관개 및 관광개발을 목적으로 1969년 농림부 및 경기도의 저수지 조성 승인을 받아 1970년 완공되었다.

 

 

80m의 고사분수가 시원하게 물줄기를 쏘아 올리는 주변으로 무지개가 아름답게 펼쳐지며 호수 주변으로 세계 유명작가들의 조각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설봉국제조각공원이 조성돼 있다. 저수지를 따라 둘려진 순환도로는 산책코스로 이용되고 있으며 주변이 유원지화 되어 다양한 즐길거리가 관광객들을 맞이한다. 이천의 진산인 설봉산과 인접해 있으며, 향토유적 제14호인 영월암, 설봉서원지, 영무정 등을 둘러볼 수 있다.

 

설봉호는 가을이 되면 아름다운 단풍을 보기위해 사람들이 몰려온다. 설봉호 주변으로 난 산책로를 따라 노랗고 붉은 은행나무와 단풍나무가 사람들을 유혹한다. 이곳의 단풍은 색이 진해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설봉호를 따라 한 바퀴 돌면 왜 사람들이 가을이 되면 이곳을 찾아오는지 이해가 간다.

 

 

고려 초기에 조성한 거대마애불

 

높이 9.6m의 거대한 이 마애불은 마애여래불로 명칭을 붙였지만, 민머리 등으로 보아 마애조사상으로 보인다. 둥근 얼굴에 눈, 코와 입을 큼지막하게 새겼다. 두툼한 입술에 넙적한 코, 지그시 감은 눈과 커다랗게 양편에 걸린 귀. 그저 투박하기만 한 이 마애불에서 친근한 이웃집 어른을 만난 듯하다. 두 손은 가슴에 모아 모두 엄지와 약지를 맞대고 있다. 오른손은 손바닥을 바깥으로, 왼손을 안으로 향했다.

 

얼굴과 두 손만 부조로 조성을 했다는 것도 특이하지만, 우편견단의 형식으로 조성한 법의는 몸 전체를 감싸며 유연한 사선으로 흘러내린다. 이러한 옷의 주름이나 팔꿈치가 직각으로 굽혀진 것은 고려시대 마애불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 마애불은 그 형태로 보아 조사상이나 나한상으로 보기도 한다.

 

천 년 세월을 온갖 풍상에 저리도 의연하게 서 있는 마애불. 머리 부분은 암벽의 상단에 조각이 되어 올려다보면 몸에 비해 조금은 작은 듯도 하다. 전체적인 균형은 조금 비례가 맞지 않은 듯하지만, 저 단단한 암벽을 쪼개고 갈아 내어 저런 걸작을 만들었다는 것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