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시와 동두천, 양주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왕방산. 해발 737m의 왕방산은 광주산맥의 서쪽 지맥인 천보산맥 북쪽 끝에 자리하고 있다. ‘왕방산이란 명칭은 왕이 친히 이곳을 들렸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왕방산 정상 부근에 자리를 잡고 있는 전통사찰 제92호인 왕산사. 왕산사는 봉선사본말사약지에 의하면 877년 신라 헌강왕 3년 도선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창건과 함께 왕이 친히 방문하여 격려해 주었으므로, 산 이름을 왕방산(王方山)’이라 하고 절 이름은 왕산사(王山寺)’라 했다고 이 약지는 전하고 있다. 헌강왕이 도선국사의 높은 덕을 흠모해 자주 궁으로 모셨던 역사적 사실을 고려해 볼 때. 이 같은 약지는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

 

 

또 다른 일설은 태조와 관계가 있어

 

또 다른 일설에는 조선을 세운 태조가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함흥으로 가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태조를 모시러 갔던 대신들이 돌아오지 않는 일이 잦아져 함흥차사라는 말이 생기기도 했다. 무학대사가 직접 가 설득해 모셔오던 중, 왕자의 난이 일어났음을 감지하고 발길을 돌려 이 절에 머물렀다고 하여 왕방사라 불렸다고 전하기도 한다.

 

신라 때 도선국사는 전국을 다니면서 풍수지리를 보아, 그곳에 맞는 지맥을 찾아 절을 창건했다. 왕방산을 찾아와 절을 창건한 것도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하지만 왕산사에 대한 내력이 정확하게 전하지를 않아, 왜 이곳에 절을 지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약지에도 이러한 내용은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왕방사가 어떻게 유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1572년 조선 선조 5년에 청암과 백운 두 스님이 고쳐지었고, 1627년 인조7년에는 청산과 무영 두 스님이 중창하고는 왕산사라 하였다고 전한다.

 

 

명당 중에 명당 왕산사

 

 

해방직후 금강산에서 수도하던 청매화상이 중생구제의 뜻을 품고 제방으로 보임을 다니다가 이 지역을 지나면서 이 터가 매우 수려함을 보고 들어오니 고색창연한 빈터에 천년석불만이 지하에 묻혀있다는 현몽을 받고, 1947년에 초가삼간을 짓고 보덕사라 이름을 하였다고 한다. 뒤를 이어 화정화상이 주지로 부임하여 20년 동안 가람수호와 수도정진에 힘써 오늘의 사세를 이루고 있으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이다.

 

왕산사는 명당 중 명당이라고 한다. 왕산사 터의 지세를 보면 백두대간에서 시작해 동쪽으로는 오봉산 금강산 향로봉으로 이어졌다. 서쪽으로는 한북정맥이 백암산, 대성산, 백운산, 운악산, 국사봉, 왕방산으로 이어지면서, 마치 용트림을 하듯 이어져 한강과 임진강 사이의 합수지점에 이르러 장명산이 한북정맥의 끝을 맺는다.

 

바로 이러한 사이에 왕방산 왕산사가 자리하고 있다. 아마도 이곳에 헌강왕이 직접 찾아왔다는 것도 도선국사의 청에 의해서였을 것이라고 생각이 든다. 이곳이 명당 중 명당이라면, 이곳에 왕이 날만한 길지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실제로 궁예는 가까운 철원을 도읍으로 정하려고 했던 것을 보아도 그럴만한 가능성이 있다.

 

도읍터로 제격이지나 않았을까?

 

왕산사에는 대웅전과 지장전, 삼성각, 요사채 등의 전각이 있고, 산 위쪽으로는 석불이 자리하고 있다. 왕산사를 찾던 날 경내에서 만나 뵌 스님은 절 안에 문화재로 지정받을 만한 것들이 있다. 보여줄 수는 없지만, 오래 묵은 석불들이 있어 문화재 지정을 서두르고 있다고 하면서 이곳은 물이 마르지 않는 곳이다. 산에서 내려오는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 큰물을 이룬다.”고 했다.

 

아마도 그 문화재 지정을 앞두고 있는 서책이나 석불 등에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왕방사 앞으로 내려다보이는 포천 시가지를 보면서 명당임에는 틀임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

 

절을 떠나는데 두 마리의 절개가 배웅을 하 듯 따라나선다. 한 마리는 할머니라고 스님께서 설명을 하신다. 벌써 10년이 지났다는 것이다. 이렇게 높은 절에 개가 많은 것은 멧돼지 임금이 왕방산에 산다.’고 마을에 전하는 이야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평택 현덕면 덕목리 소재 심복사의 아름다운 화장실

 

평택시 현덕면 덕목라에 소재한 심복사(深福寺)’.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보물 제565호인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을 모시고 있어 유명한 절이다. 이 비로자나불좌상은 파주 문산포에 거주하던 천문을(千文乙)이라는 어부가 덕목리 앞바다에서 고기잡이 중에 건진 것이라고 한다. 어부는 이 불상을 모실 곳을 물색하던 중 현 심복사 자리에 오자 갑자기 석불이 무거워져 옮길 수 없어 현재의 터에 절을 짓고 복을 많이 받는 절이라는 뜻을 가진 심복사(深福寺)’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내가 심복사를 찾아간 것은 보물인 비로자나불좌상을 보고자 한 것이 아니다. 3년 전인가 이곳을 찾았을 때 만났던 심복사 해우소 때문이다. 해우소란 절에서 사용하는 화장실의 명칭이다. 해우소는 근심을 풀어내는 곳이란 뜻을 갖고 있으며 우리 수원시에는 화장실 변기를 닮은 해우재가 있어 세계적인 화장실 공원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런 수원에 거주하다보니 자연 어디를 가나 해우소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많은 절을 찾아다니면서 문화재답사를 하다가 해우소에 들려 일을 보았는데 그 종 몇 곳의 해우소는 정말 나중에 책으로 한권 엮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절에서 만난 화장실인 해우소가 문화재로 지정은 되지 않았다고 해도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인간의 가장 중요한 신진대사를 위해 꼭 필요한 곳이기 때문이다.

 

 

비움의 미학’, 해우소

 

심복사 해우소를 처음 본 것은 20151월이다, 정말 뼈 속까지 엄습하던 추위가 찾아온 날이었다. 당시 이 해우소는 축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건물을 구성한 목재들이 모두 색조차 바라지 않았고, 해우소에 들어가면 강한 송진 냄새를 풍기기도 했다. 그런 심복사 해우소가 아름다운 화장실로 지정받았다는 소식에 29일 아침 할일도 마다한 체 한 달음에 달려간 것이다.

 

우리나라 사찰의 전통 해우소는 대개 복층으로 짓는다. 입구는 높은 곳에 마련하고, 밑으로 축대를 쌓아 배설물을 저장하는 공간을 구성한다. 심복사 해우소도 전통 방식을 따라 지었다. 밖으로 나와 보면 커다란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려놓았다. 나무의 틀 역시 전통방식으로 짜 맞추어 모양새가 좋다. 뒤편으로 돌아가서 해우소를 보면 복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아래층 중앙에 문을 내었다.

 

비움의 미학이라는 해우소는 이 아래 칸에 조성한 문으로 안에 쌓인 배설물을 밖으로 끄집어내어 낙엽이나 재 등과 섞어 유기농비료를 생산하는 것이다. 결국 먹고 버리는 것이지만 다시 인간에게 필요한 먹거리를 생산하는데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 그 어느 것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는 말을 실감나게 만든다. 심복사 해우소 역시 그런 전통방식을 따른 것이다.

 

 

앞으로 전통 해우소 이야기 계속하고 싶어

 

피안(彼岸)’이란 진리를 깨닫고 도달할 수 있는 이상적 경지를 나타내는 말이다. 심복사 해우소는 입구를 반으로 갈라 들어서면서 우측은 여자용, 좌측은 남자용이다. 그런데 이 해우소는 칸막이 높이가 사람의 가슴 높이정도이기 때문에 사람이 일을 보기 위해 이곳을 들어가면 곁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다 보인다.

 

여자용은 네 칸 2줄로 모두 8칸이고, 남자용은 세 칸 2줄로 모두 6칸이다. 물론 중앙에는 칸막이가 있지만 이 칸막이 역시 성인이 일어서면 옆의 용변을 보는 사람이 다 들여다보일 정도이다. 왜 이렇게 남들이 다 볼 수 있도록 만든 것일까? 아마도 인간이 모든 것을 가리려고만 하는 것이 불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은 아닐까?

 

심복사 해우소에 앉아서 밖을 내다보면 벽면이 살창으로 되어 있어 밖이 훤히 내다보인다. 날씨가 추워져 찬바람을 막기 위해 비닐로 바람을 막고 있지만 그래도 보일 것은 다 보인다. 그곳에 앉아 볼일을 보면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저 밖이 피안의 세계라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닐까? 비닐로 막았다고 하지만 오래 앉아있을 수가 없다. 그저 그곳에 앉아 앞으로 시간이 날 때마다 전국의 전통해우소를 찾아다니며 해우소 이야기나 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뿐이다.

 

이제 가을이 막바지에 들었다. 지난 6일이 한 겨울이 시작한다는 입동(立冬)이다. 입동이 되면 사람들은 김장준비를 한다. 올해는 배추 값이 폭락해 벌써부터 배추가격으로 인해 농촌에서 곤란을 겪는다는 소식이 들린다. 하지만 배추 값이 떨어진 만큼 고춧가루 값이 뛰어 김장을 하는 집에서는 지난해보다 조금 저렴한 가격에 김장을 할 수 있다고 한다.

 

나야 집에서 김장을 할 필요가 없으니 그저 이곳저곳에서 보내주는 한 통씩 갖다 주는 김치로 한 겨울을 나고는 한다. 수원이 사람살기 좋은 곳이라는 것은 이렇게 나누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기 때문이다. 혼자 먹는 김치가 왜 그렇게 많아야 되느냐고 하겠지만 우리네들은 김장을 한 겨울 양식이라고 할 정도로 겨울철 반찬으로는 꼭 필요하다.

 

이천은 설봉호 주변에 많은 볼거리들이 몰려있다. 설봉호의 경치는 가을이 되면 압권이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온다. 너른 주차장은 언제나 차들로 들이찬다. 이곳 설봉호 주변에는 설봉산성을 비롯해 보물 제822호로 지정된 영월암 마애여래입상이 산자락 바위면에 부조로 조성되어 있는 고찰 영월암 등이 자리한다.

 

또한 설봉서원을 비롯해 관고리 오층석탑 등 설봉호수 주변을 돌면서 즐길만한 것이 상당수 자리하고 있다. 이천은 봄이되면 백사면 도립리의 산수유가 유명하다. 도립리 산수유축제는 전국 각처에서 사람들이 모여든다. 더구나 산수유마을 인근에 천연기념물인 이천 백송과 반룡송이라 이름붙인 소나무가 자라고 있어 연중 사람들의 발길이 그치지 않는 곳이다.

 

 

가을에 찾아간 설봉호 단풍 아름다워

 

설봉호 주차장 옆으로 오를 수 있는 영월암은 경사가 심한 곳이라 차로 오르기도 쉽지가 않다. 하지만 영월암을 오르다가 보면 이천시가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영월암은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625-702)가 창건하여, ‘북악사(北岳寺)’라 칭하고 산 이름도 북악(北岳)이라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실증적 사실여부를 확인하기 어렵다.

 

주차장에서 영월암까지의 거리는 1.5km 정도이다. 크지 않은 영월암에는 이천시 향토유적 제3호로 지정된 석조광배 및 연화좌대가 있다. 이는 통일 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작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럼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영월암은 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창건한 절로 추정하고 있다. 그만큼 유서 깊은 고찰이다. 차를 갖고 이곳 설봉호수를 찾아갔다고 하면 꼭 한 번 영월암에 올라볼 것을 추천하고 싶다.

 

설봉호는 이천시 관고동에 있는 저수지로 설봉저수지 혹은 관고저수지로도 불린다. 면적은 99,174평방미터이며 둘레 1.05km 수심은 99m이다. 설봉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천시의 관광명소 중 하나로 손꼽히는 곳이다. 관개 및 관광개발을 목적으로 1969년 농림부 및 경기도의 저수지 조성 승인을 받아 1970년 완공되었다.

 

 

80m의 고사분수가 시원하게 물줄기를 쏘아 올리는 주변으로 무지개가 아름답게 펼쳐지며 호수 주변으로 세계 유명작가들의 조각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설봉국제조각공원이 조성돼 있다. 저수지를 따라 둘려진 순환도로는 산책코스로 이용되고 있으며 주변이 유원지화 되어 다양한 즐길거리가 관광객들을 맞이한다. 이천의 진산인 설봉산과 인접해 있으며, 향토유적 제14호인 영월암, 설봉서원지, 영무정 등을 둘러볼 수 있다.

 

설봉호는 가을이 되면 아름다운 단풍을 보기위해 사람들이 몰려온다. 설봉호 주변으로 난 산책로를 따라 노랗고 붉은 은행나무와 단풍나무가 사람들을 유혹한다. 이곳의 단풍은 색이 진해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설봉호를 따라 한 바퀴 돌면 왜 사람들이 가을이 되면 이곳을 찾아오는지 이해가 간다.

 

 

고려 초기에 조성한 거대마애불

 

높이 9.6m의 거대한 이 마애불은 마애여래불로 명칭을 붙였지만, 민머리 등으로 보아 마애조사상으로 보인다. 둥근 얼굴에 눈, 코와 입을 큼지막하게 새겼다. 두툼한 입술에 넙적한 코, 지그시 감은 눈과 커다랗게 양편에 걸린 귀. 그저 투박하기만 한 이 마애불에서 친근한 이웃집 어른을 만난 듯하다. 두 손은 가슴에 모아 모두 엄지와 약지를 맞대고 있다. 오른손은 손바닥을 바깥으로, 왼손을 안으로 향했다.

 

얼굴과 두 손만 부조로 조성을 했다는 것도 특이하지만, 우편견단의 형식으로 조성한 법의는 몸 전체를 감싸며 유연한 사선으로 흘러내린다. 이러한 옷의 주름이나 팔꿈치가 직각으로 굽혀진 것은 고려시대 마애불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 마애불은 그 형태로 보아 조사상이나 나한상으로 보기도 한다.

 

천 년 세월을 온갖 풍상에 저리도 의연하게 서 있는 마애불. 머리 부분은 암벽의 상단에 조각이 되어 올려다보면 몸에 비해 조금은 작은 듯도 하다. 전체적인 균형은 조금 비례가 맞지 않은 듯하지만, 저 단단한 암벽을 쪼개고 갈아 내어 저런 걸작을 만들었다는 것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보령 남포 최치원 유적과 성주사지를 향유

 

보령시 남포면 월전리 813-8에 소재한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45호 최고운 유적. 고운은 최치원을 일컫는 말이다. 벌써 대천을 다녀온 지 10일이 훌쩍 지났다. 요즈음은 여행을 다녀오고 나면, 자료 정리를 하는 데만 며칠이 걸리고는 한다. 자료정리를 하고나면 바로 글을 써야하는데 이젠 옛날 같지 않아 마음이 그렇게 바쁘지 않다. 이것도 나이가 먹은 탓이려니 하지만, 스스로가 생각해도 게으름을 떨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보령(대천) 여행을 하면서 첫날 찾아간 곳이 바로 남포면에 소재한 최고운 유적이다. 이곳은 보리섬이라고 하는 백도였다고 한다. 1995년 님포방조제를 건설하고 난 후 육지와 연결된 이곳은 통일신라 말기 최치원이 선유한 곳이라고 전해진다. 최치원(857~ ?)은 당에 유학을 하고 돌아왔지만 신분제약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관직에 미련을 버리고 전국을 유람하였는데 경치가 아름다운 이곳을 선유했다고 한다.

 

 

보리섬은 지금은 육지와 연결이 되어있지만 과거에는 백도라고 하는 섬이었다고 한다. 현재는 백도 전체가 육지와 연결이 되어 포구가 없다면 섬이라는 느낌도 들지 않을 정도이다. 보리섬은 작은 산봉우리가 솟아있고 병풍처럼 둘러쳐진 바위가 있다. 예전 물이 이곳에 들어왔다고 하면 절경 중 절경이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써서 이름을 날렸다는 최치원이 쓴 한시가 암벽에 적혀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석양 무렵 찾아간 보리섬. 3월의 꽃샘바람이 부는 날 찾아간 보리섬은 최치원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대신 북녘을 향하는 철새무리들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최치원은 이곳 보리섬과 성주면 성주사지를 왕래했다고 하는데 그 옛날 어떻게 그 먼 길을 다녔을까?

 

 

성주사지를 돌아보다.

 

전하는 말에는 최치원이 보리섬과 성주사지를 왕래하면서 향유했다고 전한다. 이튿날 아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2 외에 소재한 사적 제307호 성주사지를 찾았다. 성주사지는 신라시대의 절로 신라시대 낭혜화상이 다시 세운 선종사찰이다. 그동안 상주사지를 몇 번이고 답사를 했지만 최치원이 이곳을 다니면서 선유했다는 말에 너른 사지가 새롭게 보인다.

 

“최치원은 보리섬에서 이곳까지 어떻게 이동을 한 것일까?” 차로 이동을 해도 족히 20분은 걸리는 길이다. 이곳을 최치원은 무엇을 이용해 다닌 것일까? 성주사지는 백제 법왕 때에 처음 세워진 절로 당시는 오합사(烏合寺)였다. 통일신라 때는 선문구산 중 하나인 성주사는 1금당 1탑식으로 세워진 절이다.

 

성주사는 당시에도 외곽은 돌담을 쌓아 경계를 삼았으며, 넓이는 8,800평이나 되는 너른 경내를 갖고 있는 절이었다. 현재 성주사지에는 국보 제8호인 낭혜화상탑비가 서 있으며 이 탑비는 신라 진성여왕 2년인 890년에 세운 것으로 낭혜화상이 세상을 떠난 지 2년 뒤에 세운 것이다.

 

현재 4기의 탑과 석등 등이 전하는 성주사지

 

3월 5일 찾아간 성주사지. 예전에는 주차장에서 사지로 들어가는 돌담이 트인 곳이 있었으니 돌담을 막아놓았다. 아마도 예전 성주사지의 돌담을 재현하느라 터진 곳을 막은 것으로 보인다. 현재 상주사지에는 국보 제8호인 낭혜화상탑비를 비롯하여 보물 제47호 서삼층석탑, 보물 제20호 중앙탑,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6호 동삼층석탑 등이 서 있다. 이 3기의 석탑은 모두 다른 곳에서 옮겨 온 것으로 밝혀졌다.

 

3기의 석탑 앞으로는 신라시대에 조성한 금당으로 오르는 돌계단이 있다. 이 돌계단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재140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계단 양편에 돌사자를 조각하여 세웠다. 하지만 이 사자상은 1986년 도난당하고 현재 것은 사진을 기초로 복원한 것이다. 금당터 앞에는 보물 제19호 보령 성주사지 오층석탑이 서 있다. 이 오층석탑은 성주사의 불탑으로 조성된 것이다.

 

오층석탑 앞에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3호인 성주사지 석등이 서있다. 통일신라 말기에 세운 이 석등은 파괴되었던 것을 근래 수습한 것이다. 이 외에도 성주사지에는 미륵불 한 기가 서 있으며 그동안 발굴조사에서 발견 된 삼천불전지 기단석 해체부지와 낭헤화상탑비 옆에 놓인 와편과 석물 등이 있다.

 

최치원은 이 먼 거리를 어떻게 다닌 것일까?

 

성주사는 본래 백제 법왕이 왕자 시절인 599년에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지은 절이라고 한다. 당시 이름은 오합사(烏合寺)라고 불렀다는데, 오합사 이야기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에도 언급하고 있고, 발굴조사 때 나온 기와 명문에도 오합사 글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

 

성주사는 임진왜란 때 전부 소실이 되었으며 오늘날 폐사지만 남아있다. 8,800여 평에 달하는 넓고 평평한 성주사 터에는 금당 터 앞에 5층 석탑과 석등이 남아있다. 사지 뒤편 중앙에 남아있는 낭혜화상탑비 하나만으로도 이 성주사지의 중요성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낭혜화상 무염은 신라 29대 태종무열왕의 8대손으로 성은 김씨, 호는 무량, 혹은 무주이다.

 

최치원은 성주사지에 소재한 낭혜화상백월광탑비문(朗慧和尙白月光塔碑文)을 지었다. 아마 보리섬에서 이곳 성주사지를 왕래하며 풍광을 즐겼다고 전하는 이야기도, 이 비문을 짓기 위해 성주사를 찾았음을 뜻한다. 이곳 성주사에서 보리섬의 풍광을 즐기기 위해 먼 길을 다녔을 최치원, 당시 이곳의 풍광이 얼마나 아름다웠기에 그 먼 길을 다녔던 것일까?

 

지금은 육지가 되어 옛 풍광을 찾아볼 수 없지만 현재 남아있는 병풍과 같은 바위만 보아도 당시의 모습을 조금은 유추해 볼 수 있다. 봄바람이 불고 꽃이 피는 계절이 되면 시간을 내어 이 보리섬에서 성주사까지 최치원이 걸었던 길을 찾아 걸어보고 싶다. 그 가운데 또 다른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이다.

 

찬바람 속에 오른 정선 정암사 적멸보궁과 탑

 

지난 8일이었으니 벌써 정유년 정초 삼사순례를 다녀온 지 20일 가까이 지났다.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이 그리 바쁜 것일까? 해가 짧다보니 선뜻 하루해가 떨어진다. 이일저일 바쁘다는 핑계를 대보지만 날짜가 많이 지나고 나면 처음에 만났던 감흥이 떨어져 글을 쓰기가 버겁다. 겨우 사진촬영을 한 자료를 들여다보면서 그날의 기억을 떠올린다.

 

원주 구룡사를 거쳐 영월 법흥사. 그리고 해가 질 녘에 도착한 세 번째 절, 정선 정암사. 그동안 몇 번이고 찾아갔던 곳이지만 2~3년 보지 않은 사이 경내에 못 보던 전각들이 보인다. 시간이 늦어 여기저기 다닐 틈이 없다. 버스에서 내려 일주문을 들어서면서부터 마음이 바쁘다. 적멸보궁 앞으로 가다 만나는 자장율사의 주장자.

 

주장자는 1300년전 자장율사가 정암사를 창건하고 평소 자신이 짚고 다니던 주장자를 꽂아 신표로 삼았다는 주목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가지 일부가 회생한 후 성장하여 완벽한 나무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고 하는데 그 추운 날에도 싱싱하게 자라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그 앞에 합장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적멸보궁을 들려 수마노탑으로 오르다

 

정암사 적멸보궁, 자연석 기단 위에 정면 3,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세운 적멸보궁에는 부처님을 모시지 않았다. 뒤편 언덕에 세운 수마노탑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어 그 탑이 부처님이 되기 때문이다. 적멸보궁 앞에 서서 잠시 머리를 조아리고 손을 모은다. 혼탁한 나라가 바로 서게 해달라고 마음으로 정성을 다한 후 내를 건너 수마노탑으로 향한다.

 

보물 제410호로 지정 되어있는 정암사 수마노탑. 돌을 벽돌처럼 잘라 쌓은 이 탑은 7층으로 조성하였다. 기단부는 화강암 6단으로 쌓고 그 위에 돌 벽돌은 2단으로 올려 탑을 받치고 있다. 수마노탑을 구성하고 있는 벽돌은 회록색을 띠는 석회암이다. 1층 몸돌의 남면 중앙에는 화강암으로 문틀을 마련하고 1석으로 문고리를 단 문짝을 만들었다.

 

수마노탑의 모서리는 악간 치켜 올라 있으며 모서리마다 종을 매달았다. 탑의 정상부인 상륜부는 청동으로 조형하였는데 수마노탑의 상륜부는 거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 수마노탑은 <사적기>에 신라 자장율사가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조선조에 들어 숙종 26년인 1700, 정조 2년인 1778, 고종 11년인 1874년 등 여러 차례 보수하였다.

 

 

아픈지도 모르고 배례석에 무릎을 꿇다.

 

정암사에 전하는 말이 의하면 수마노탑은 신라 선덕여왕 14년인 서기 645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절이라고 한다. 자장율사가 당나라 산서성에 있는 운제사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석가모니의 정골사리 등을 받아 선덕여왕 12년이 돌아와 14년에 금탑, 은탑, 수마노탑을 세웠다는 것이다.

 

수마노탑은 돌아오는 자장율사를 서해 용왕이 용궁으로 모시고 가 건네준 마노석으로 쌓은 탑이라고 한다. ‘수마노탑이라는 명칭도 마노석을 잘라 탑을 쌓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수마노탑과 함께 세운 금탑과 은탑은 후세 사람들이 귀한 보물에 탐심을 낼 것을 우려하여 비장하였다고 한다.

 

만일 금탑과 은탑이 함께 서 있었다고 하면 수마노탑의 가치는 몇 배 이상일 것이다. 문화재를 등급으로 표시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겠지만 전설 속으로만 남아있는 금, 은탑으로 인해 수마노탑의 건립연대마져 정확치 않다는 것도 마음이 아프다. 굳이 문화재 안내판에 고려 때의 탑이라고 우길 필요가 있었을까? 탑은 그 전하는 말 그대로 믿고 그대로 마음속으로 염원하면 되는 것을.

 

높지는 않지만 가파른 언덕을 오른다. 두 곳의 절을 들려오느라 이미 한 겨울의 짧은 해가 넘어갈 시간이다. 마음만 바빠 숨이 차오르는 것도 잊고 탑 앞으로 오른다. 탑 앞에 베례석이 놓여있다. 배례석에 무릎을 꿇고 마음속으로 간절한 바람을 기원한다. 이 혼탁한 세상에 광화문의 아픔이 더 이상 계속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다. 날도 추워지는데 그 많은 사람들이 왜 그리 주말마다 아픔을 계속해야 하는 것일까?

 

하루 만에 세 곳의 절을 돌아오는 삼사순례. 이른 아침 출발해 해가 떨어지는 시간까지 쉬지 않고 돌아본 여정의 막을 내린다. 어둠이 내리는 길을 돌아오면서 바쁘게 움직였던 하루를 정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