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이다. 올해 그토록 폭염으로 인해 많은 고통을 당했지만 그래도 계절은 어김없이 지나가고 아침저녁으로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아제 얼마 안 있으면 산과 들의 단풍이 멋에 겨워 넘실거릴 계절이다. 이런 계절에 떠나는 가을여행. 역시 가을은 여행의 계절이다. 이 풍족한 계절에 찾아가는 문화역사기행은 우리를 또 다른 세계로 안내한다.

 

풍요의 계절 가을. 사람들은 가을은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라고 한다. 그저 가방 하나 둘러메고 길을 떠나도 좋은 계절이 아닌가? 이 가을에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그렇게 찾아가고 싶은 많은 곳 중, 그레도 역사가 있고 문화가 함께 한다면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겠는가? 고찰(古刹)이라도 좋고 고택(古宅)인들 관계있으랴. 역사가 있고 문화가 있고, 이야기가 있으면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계절을 따라 찾아가는 가을문화역사기행, 그 첫 번째는 여주시 신륵사로 정했다.

 

경기도 여주시에 소재한 고찰 신륵사를 사람들은 벽절이라고 부른다. 신륵사를 이렇게 부르는 것은 경내에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전탑이 있기 때문이다. 신륵사는 많은 문화재를 소유하고 있는 고찰로도 유명하지만, 판소리 중고제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명창 염계달이 이곳에서 득음을 하고 경기도 판소리인 경제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신륵사 경내에는 전탑 외에도 많은 문화재들이 자리하고 있다. 그 중 남한강을 굽어보고 있는 바위 위에 심하게 마모가 된 체 서 있는 석탑 한기가 있다. 옆에는 강월헌이 자리하고 있어 남한강과 함께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한다. 이 삼층석탑은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나옹화상을 화장한 자리

 

기록에는 고려 말에 나옹화상을 신륵사 경내 남한강 가에서 화장했다고 한다. 이 삼층석탑이 서 있는 곳이 바로 나옹화상을 화장한 자리로 추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석탑은 대웅전 앞에 많이 세우는데, 이렇게 동떨어진 강가에 서 있기 때문에 기록에 보이는 화장을 한 장소로 보고 있는 것이다.

 

석탑은 비바람에 심하게 마모되었다. 화강암을 깎아 조성한 이 삼층석탑은 현재 3층의 몸돌은 멸실된 상태이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3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탑은 기단부를 한 장의 넓적한 돌로 조성하고, 그 밑으로는 자연 암반이 자리하고 있다. 아마도 이런 강가의 암반에서 나옹화상을 떠나보냈는가 보다.

 

나옹화상 혜근(13201376)은 고려 말의 고승이다. 성은 아()씨였으며. 속명은 원혜이다. 호는 나옹, 또는 강월헌(江月軒)이다. 이곳 신륵사에서 강월헌(원래의 강월헌은 수해로 인해 사라졌다)에 기거하였다. 여주 신륵사 앞을 흐르는 남한강에는 용이 살았는데, 나옹화상이 그 용을 굴레를 씌워 제압하였다고 하여 신륵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신륵사에서 나옹화상이 설법을 하면 귀신도 참여를 하였다고, 정두경의 고시 신륵사에 적고 있다. 그 정도로 나옹화상은 뛰어난 법력을 지녔는가 보다. 유명한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네라는 글도 나옹화상이 지은 것이다. 이렇듯 고려 말의 고승인 나옹화상이 입적 한 후 화장을 한 장소에 세웠을 것으로 추정하는 삼층석탑이다.

 

아마도 그 탑의 화려하지 않은 모습이 나옹화상의 성정을 닮은 것은 아니었을까? 4대강 개발이라는 허명아래 파헤쳐진 남한강을 보면서, 나옹화상이 살아있었다면 어떤 글을 지었을까? 라는 생각을 한다. 9월에 찾아간 신륵사 삼층석탑 앞에서 깊은 상념에 잠긴다. 아름답던 남한강이 몸살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여주 신륵사. 봉미산 신륵사라고 이름을 붙인 이 고찰은 신륵사라는 이름보다 벽절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곳이다. 남한강 변에 자리 잡은 신륵사 일주문에는 '봉미산 신륵사'라는 현판이 걸려있는데, 이는 이 고찰이 자리한 절이 봉의 꼬리라는 것이다. 그 봉의 머리는 바로 강원도 오대산이다.

 

여강 · 금모래은모래. 이젠 다 옛 이름이 되다

 

신륵사 조사전 뒤에 보면 산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신륵사 서북쪽으로 난 이 계단을 오르면 보물인 보제존자의 석종과 석등, 비 등이 자리하고 있다. 이 세 가지 모두가 보물로 지정이 되어있다. 철책으로 조성된 보호대 안에 자리한 보물 제231호인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 앞 석등>이란 명칭을 갖고 있는 석등은 조각기법이 뛰어나고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석등은 대개 절의 전각 앞이나 부도탑 등의 앞에 세운다. 아마 두 곳 모두 불을 밝힌다는 뜻을 갖고 있나보다. 더욱 보제존자의 사리를 모신 석종 앞에 있는 이 석등은 영원한 안식처로서의 부처의 세계로 가는 길을 밝힌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다.

 

남한강이 흐르면서 여주를 지나면 이름을 여강이라고 했다. ‘()’란 곱다는 뜻이다. 그만큼 여주를 가로 질러 흐르는 남한강은 아름다운 강이다. 그 강을 정비를 한다고 꽤나 자연스럽지 못하게 만들어 놓았다. 직강으로 조성을 하면서 한편에는 돌 축대를 쌓아 놓았다. 그런다고 밑에서 오르지 못하는 물고기들이 올라와 산란을 할 수 있을까?

 

도대체 강은 흐르고 싶은 데로 흐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 많은 생명들은 다 이 혼란함 속에서 어디로 간 것일까? 생명이 살 수 없는 강에서 우리 후손들은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강의 속살을 파내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골재들이 눈앞에 거대한 공룡처럼 보인다.

 

 

명창 염계달이 피를 토하던 강월헌

 

예전 판소리의 명창들은 스스로의 소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였다. 흔히 <독공>이라 하는 이 소리공부는 동굴 속이나, 혹은 폭포에서 수년에서 10년이란 긴 시간을 소리에만 전념하는 것이다. 때로는 피를 토하고 병이 걸리기도 하지만, 오직 명창의 반열에 들겠다는 의지 하나만으로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도 노력을 했다고 한다. 고 박동진 명창은 생전에 "여주 벽절이란 곳에서 염계달 선생님이 득음을 하셨는데, 잠이 오면 대들보와 상투를 끈으로 연결하고 소리를 했지. 명창은 그렇게 노력을 하지 않으면 태어나지가 않아"라는 이야길 하셨다.

 

17세에 길에서 장끼전을 주워 벽절 신륵사를 향한 염계달. 낮에는 절에서 불목하니 노릇을 하면서 밤이 되면 소리공부를 시작했다.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런 날들이었을까? 그렇게 하기를 10. 당당히 명창의 반열에 오른 염계달 명창. 남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한 강월헌. 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예전의 정자는 아니다. 홍수로 무너져 내린 것을 다시 지었다. 신륵사 경내 남한강가, 그리고 벽절이란 이름을 만들어 낸 보물 다층전탑 아래 자리를 잡고 있다.

 

염계달 명창은 조선조 정종 때부터 철종 때까지 활동을 한 명창이다. 판소리에 경기도 소리조인 경드름을 새롭게 창출해냈다. 판소리 명창들이 '추천목'으로 지목하는 곡도 바로 염계달 명창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염계달 명창은 바로 경기 충청의 소리제인 중고제 중에서 경제중고제의 시조가 되는 셈이다.

 

이러한 염계달 명창이 하루 일과를 끝내고, 홀로 소리공부를 했을 것으로 보이는 강월헌. 그 위에 오르면 남한강의 물살에 해가 비추인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는데, 10년 세월 피를 토하는 독공으로 득음을 한 것이다.

 

"염계달 선생은 낮에는 일을 하고 밤이면 소리공부를 했기 때문에 10년이 걸렸을 것이여. 부여 무량사에서 득음을 하신 우리 선생님 김창진 명창도 10년 만에 득음을 했거든."

고 박동진 선생님의 생전 말씀이 귓가에 맴돈다. 강월헌에 올라 남한강을 내려다본다. 지난 역사를 가장 많이 알고 있다는 강. 그 강이 좋은 것은 슬픈 역사나 기쁜 역사가 모든 것을 다 알고도 말이 없다는 것이다.

 

 

왜 소리는 강을 끼고 만들어질까? 문화는 왜 강을 중심으로 창출이 될까? 그저 학자들의 논리만으로는 그 속 깊은 해답이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강을 중심으로 마을을 형성하고, 그 강으로 인해 아픔을 당하면서도 강과 함께 살았다. 자연을 거스르는 것이 아닌, 자연과 동화되는 법을 배웠다.

 

판소리는 자연이라고 한다. 자연이 아니면 인간의 신체적 조건만 갖고는 그 해답이 나오질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강으로 산으로, 그리고 동굴로, 폭포로 찾아다니면서 스스로 자연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 전설처럼만 여겨지는 소리꾼들의 그 득음과정이 그렇다.

 

이곳이 염계달이란 명창이 있었던 곳이라는 사실도, 그리고 판소리의 한 류파가 생겨난 곳이라는 아무런 표시 하나가 없다. 강월헌은 그저 벽절 신륵사 경내 전탑 아래에 남한강을 굽어보며 언제나 그랬듯이 그렇게 서 있다. 나옹선사의 당호에서 따온 명칭인 강월헌(江月軒). 그리고 조선조의 명창 염계달이 소리를 하던 곳. 그 곳을 눈여겨본다.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여름이 되면 피서를 떠난다고 하지만 막상 가볍게 길을 떠나기가 쉽지 않다. 우선을 며칠 나들이를 하면서 들어가는 비용도 만만찮지만 오고가는 길이 꽉 막혀 피서를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화를 불러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멀리가지 않고 수원인근에서 피서를 즐기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수원을 벗어나 하루 동안 시원한 숲과 계곡을 즐길 수 있는 곳. 그런 곳은 상당히 많이 있다. 그런 곳에 대한 정보가 부족할 뿐이다. 누구나 그런 곳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한다. 더욱 경비도 많이 필요 없다. 그저 주유비와 식사비 정도 들여 피서를 제대로 할 수 있는 곳. 천년전통사찰을 찾아가면 그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 굳이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숲에서 느끼는 시원한 바람과 계곡을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고 즐길 수 있는 곳을 소개한다. 수원에서 불과 한 시간 30분 정도에 있는 곳이다.

 

전통사찰은 대개 산 속에 자리하고 있거나 평지에 있다고 해도 산을 기고 있기 마련이다. 어느 곳을 가던지 숲이 있고 물이 있다. 계곡이 없다면 주변에 있는 물가를 찾아가면 된다. 아침에 수원을 출발하면 오고가는 길에 맛있는 음식까지 곁들일 수 있으니 이 또한 좋은 일 아닌가? 경비를 줄여 즐길 수 있는 곳을 소개한다.

 

천년고찰 양평 사나사 계곡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 304에 소재한 사나사. 양평 용문산 계곡을 끼고 자리한 천년고찰인 사나사는 많은 수난을 당했다. 신라 경명왕 7년인 923년에 고승 대경대사가 제자 용문과 함께 창건한 후, 5층 석탑과 노사나불상을 조성하여 봉안하고 절 이름을 사나사로 하였다고 전한다. 사나사는 조선조 선조 25년인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선조 41년인 1608년에 단월 한방손이 재건하였다.

 

영조 51년인 1773년에는 양평군내 유지들이 뜻을 모아 당산계를 조직하고 향답을 사찰에 시주하여, 불량답을 마련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경내에 비를 세웠다. 순종 원년인 1907년에는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는 의병들의 근거지라 하여 사찰을 모두 불태웠다. 그 뒤 1909년에 계헌이 큰방 15칸을 복구하였으며, 1937년에 주지 맹현우 화상이 큰방과 조사전 등을 지었다. 그러나 1950년에 일어난 6.25사변으로 인해 또 한 번 사나사는 전소가 되었다. 1956년에 주지 김두준과 함문성이 협력하여 대웅전, 산신각, 큰 방을 재건하고 함씨각을 지었다.

 

사나사 계곡은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에 소재하며 폭이 넓고 물이 깨끗하며 수량이 풍부한 계곡으로 용문산에 위치한다. 사나사 계곡에 백운봉에서 흐르는 물이 절 옆으로 흐르기 때문에 쉼터와 맑은 물, 숲이 한데 어우러져 수원인근에서 찾아가기가 편하다. 하루 만에 다녀올 수 있는 피서지로 추천한다.

 

 

숲이 아름다운 곳 안산 대부도 쌍계사

 

흔히 쌍계사하면 하동 쌍계사를 떠올리지만, 그 외에 여러 곳에 쌍계사라는 사명을 가진 사찰들이 있다. 안산시 대부북동 1058에 소재한 쌍계사는 1660년 경 취촉대사가 이곳을 지나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다섯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서 물이 나와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안산시 대부북동 1058에 소재한 쌍계사, 사찰에 보관된 <정수암성조기(淨水庵成造記)>에 의하면 1689년 죽헌비구가 정수암을 중창하여 없어진 후, 1745년 그 자리에 다시 사찰을 세워 1750년부터 쌍계사라 불렸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사찰 내에서 만력4(萬曆四年 : 1576)에 제작된 기와가 발견되어, 16세기 후반부터 이 지역에 사찰이 운영되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연일 폭염주의보와 경보가 내리고 온열환자들이 사고를 당한다고 하는 날 찾아간 안산 대부도 쌍계사.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와는 판이하게 달라진 절의 모습에 눈이 크게 떠진다. 그동안 보지 못하던 전각이 세 채나 새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새로 지은 명부전과 용왕각, 극락보전, 삼성각을 둘러 전통사찰 자연학습장이라 쓴 숲으로 들어선다. 우거진 송림사이로 작은 오솔길 하나가 보인다. 곳곳에 인생살이에 도움이 될 만한 글들아 걸려있다. 그 길을 읽으면서 걷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폭염이라는데 숲속 오솔길엔 그래도 시원한 바람 한 점 스치고 지나간다.

 

애착을 없애는 일에 게으르지 말며

벙어리도 되지말라

학문을 닦고 마음을 안정시켜

이치를 분명히 알며 자제하고 노력해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숏타니파타에 나오는 글귀이다. 이런 글귀 하나를 오솔길에서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신선하다. 난 이 폭염이라는 무더위를 이렇게 조용한 사찰을 찾아 그곳의 바람으로 무더위를 식힌다. 쌍계사는 물이 없지만 대부도에 소재하고 있기 때문에 인근에 바닷가로 난 산책로를 걸으면 시원한 바닷바람을 마음껏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가장 오랜 은행나무가 서 있는 양평 용문사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 625에 소재한 용문사. 이곳은 천연기념물로 지정 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가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천연기념물 제30호인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용문사는 신라 신덕왕 2년인 913년에 대경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또 다른 일설에는 경순왕(927~935재위)이 친히 행차하여 창사 하였다고도 한다. 이런 연대로 보면 은행나무는 용문사 창건 당시에 심었음을 알 수 있으며, 신덕왕 때 창건했다는 설이 정확하게 일치한다.

 

용문사는 고려 우왕 4년인 1378에 지천대사가 개풍 경천사의 대장경을 옮겨 봉안하였고, 조선 태조 4년인 1395년에 조안화상이 중창하였다. 조선조 세종 29년인 1447년에는 수양대군이 모후 소헌왕후 심씨를 위하여 보전을 다시 지었고, 세조 3년인 1457에는 왕명으로 중수하였다. 성종 11년인 1480년에 처안스님이 중수한 뒤 고종 30년인 1893년에 봉성 대사가 중창하였으나, 순종원년인 1907년에 의병의 근거지로 사용되자 일본군이 불태웠다.

 

1909년 취운스님이 큰방을 중건한 뒤, 1938년 태욱스님이 대웅전, 어실각, 노전, 칠성각, 기념각, 요사등을 중건하였다. 1982년부터 지금까지 대웅전, 삼성각, 범종각, 지장전, 관음전, 요사채, 일주문, 다원 등을 새로 중건하고 불사리탑, 미륵불을 조성하였다. 경내에는 권근이 지은 보물 제531호 정지국사부도 및 비와, 지방유형문화재 제172호 금동관음보살좌상, 천연기념물 제30호인 용문사 은행나무가 있다.

 

용문산에 자리하고 있는 용문사는 절을 두고 잠시만 숲으로 길을 들어서면 시원한 물이 흐른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걸어 올라가는 숲길도 일품이지만 무더운 여름철 찾아들어간 곳에서 만나는 시원한 계곡물에 발이라도 담그면 폐부 속까지 시원함을 느낀다. 인근에는 용계계곡 등 맑은 물과 숲이 어우러지는 곳이 있어 여름철 피서객들이 찾아오기도 한다.

 

안산시 대부도 고찰 쌍계사를 찾아 오솔길을 거닐다

 

안산시 대부북동 1058에 소재한 쌍계사, 사찰에 보관된 <정수암성조기(淨水庵成造記)>에 의하면 1689년 죽헌비구가 정수암을 중창하여 없어진 후, 1745년 그 자리에 다시 사찰을 세워 1750년부터 쌍계사라 불렸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사찰 내에서 만력4(萬曆四年 : 1576)에 제작된 기와가 발견되어, 16세기 후반부터 이 지역에 사찰이 운영되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쌍계사 극락보전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81호인 쌍계사목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극락보전에 봉안된 목조여래좌상은 높이 92cm로 좁은 어깨에 머리를 앞으로 숙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머리에는 소라모양의 나발이 촘촘하고, 지혜를 상징하는 육계가 높이 솟아 있다.

 

이 목조여래좌상은 이마 위에는 타원형의 중앙계주와 정수리에 원통형의 정상계주가 있다. 타원형의 얼굴은 이마가 넓고 귀가 어깨 위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게 늘어져 있으며, 눈두덩이와 양미간이 각이 져 조선후기 제작된 불상의 전형적인 얼굴을 하고 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여래좌상

 

두터운 법의자락은 오른쪽 어깨에 짧게 늘어져 반전하고, 팔꿈치와 배를 지나 일부 대의자락이 왼쪽 어깨로 넘어가게 조형하였다. 왼쪽 어깨의 법의자락은 수직으로 내려와 반대쪽 법의자락과 겹쳐져 유려한 U자형을 이룬다. 하반신을 덮은 법의자락은 중앙의 S자형 주름을 중심으로 좌우로 짧게 늘어져 있다.

 

법의 안쪽에는 복견의를 입고, 가슴을 가린 승각기를 끈으로 묶어 윗부분에 5개의 앙연형 주름이 있다. 불상의 뒷면은 법의자락이 목 주위와 등을 V자형으로 덮어 조선후기 불상의 후면에 나타난 표현과 차이를 가진다. 따로 제작한 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댄 아미타수인이지만, 이와 같은 손의 자세는 조선후기 제작된 아미타불을 비롯한 약사불과 지장보살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대좌는 연꽃이 위를 향한 앙연의 연화좌와 삼단을 이룬 팔각대좌가 한 쌍을 이루고, 팔각대좌 중단에 하늘을 날고 있는 용과 천인이 화려하게 투각되어 있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목조여래좌상은 고개를 앞으로 숙인 모습을 하고 있어 특이하다. 아마도 바세계의 중생을 돌보기 위해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4년 만에 달라진 쌍계사를 찾아가다

 

201435일 이곳을 들렸으니 벌써 4년이 훌쩍 지났다. 연일 폭염주의보와 경보가 내리고 온열환자들이 사고를 당한다고 하는 날 찾아간 안산 대부도 쌍계사.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와는 판이하게 달라진 절의 모습에 눈이 크게 떠진다. 그동안 보지 못하던 전각이 세 채나 새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새로 지은 명부전과 용왕각, 극락보전, 삼성각을 둘러 전통사찰 자연학습장이라 쓴 숲으로 들어선다. 우거진 송림사이로 작은 오솔길 하나가 보인다. 곳곳에 인생살이에 도움이 될 만한 글들아 걸려있다. 그 길을 읽으면서 걷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폭염이라는데 숲속 오솔길엔 그래도 시원한 바람 한 점 스치고 지나간다.

 

애착을 없애는 일에 게으르지 말며

벙어리도 되지말라

학문을 닦고 마음을 안정시켜

이치를 분명히 알며 자제하고 노력해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숏타니파타에 나오는 글귀이다. 이런 글귀 하나를 오솔길에서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신선하다. 좋은 글은 늘 마음속에 새겨두는 버릇이 있어서인가? 한 잔 사진으로 남겨놓는다. 산다는 것이 어디 마음먹은 대로 될 것인가? 하지만 난 이 폭염이라는 무더위를 이렇게 조용한 사찰을 찾아 그곳의 바람으로 잠재운다.

 

보물이 널려 있는 충남서산 보원사지

 

1년이 넘도록 문화재답사 다운 답사를 하지 못했다. 모처럼 나선 문화재답사길. 그동안 한이라도 맺힌 듯 돌아치면서 만난 곳이 바로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에 소재한 사적 제316서산보원사지였다. 벌써 이곳을 들렸던 지가 15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가까이 가보니 주변이 상당히 변해있다.

 

난 이곳을 찾아가면 마음이 들뜬다. 사적지 한 곳에 보물만 5기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변에 이런저런 것들이 들어와 자릴 잡고 있지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보물 제103호인 신라 때 조성된 당간지주다. 보원사지는 백제시대에 창건된 절로 통일신라와 고려 때 크게 융성하였고 왕사, 국사를 지낸 법인국사의 탑문이 묻힌 곳이다.

 

 

보원사지 발굴당시에 신라와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대형 철불 2구가 발견되었으며 1967년도에는 백제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금동여래입상이 출토되는 등 매우 융성했던 사찰임을 알 수 있다. 보원사 주변에는 100개소의 암자와 1,000여 명의 승려가 있었다고 전하는 것만 보아도 당시 보원사지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다.

 

현재 보원사지에는 백제계의 양식에 통일신라와 고려의 석탑양식을 갖춘 보물 제104호 오층석탑과 통 돌을 장방형으로 파내어 조성한 한국최대의 석조(보물 제102), 975(광종26) 법인국사가 입적하자 광종의 지시로 세운 보물 제105호 보승탑, 법인국사의 생애가 기록된 보물 제106호 법인국사 보승탑비, 사찰에 행사가 있을 때 괘불을 걸었던 당간지주 등 보물만 5점이 사지에 자리하고 있다.

 

 

 

한옆에 모아놓은 석물과 와편 등 수북해

 

보원사지로 접어들면 높이 4.2m의 당간지주가 앞에 서 있다. 통일신라 때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이 당간지주는 자리도 옮기지 않고 제 자리라고 한다. 절의 행사가 잇을 때 악귀를 쫓기 위해 당이라는 깃발을 걸어놓을 때 사용하는 당간지주는 지주의 안쪽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바깥쪽에만 양편 가장자리에 돌대를 돋을새김 하였다.

 

당간지주 우측으로 보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석조가 보인다. 밋밋한 장방형으로 파낸 이 석조는 물을 담아두는 용기로 아래편에 구멍을 내어 물이 빠져나가게 만들었다. 통일신라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이 석조는 현재 남아있는 석조 중 가장 큰 것으로 사지에 남아있는 고려 때의 보승탑 등을 볼 때 고려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조에서 금당방향으로 작은 내가 흐르고 있다. 15년 전에는 이 내에 올갱이가 많이 서식하고 있어 그것을 잡는 재미도 쏠쏠했다. 스님들의 포행길인 듯한 나무로 만든 다리를 건너면 와편과 석조물들이 정리되어있다. 아마 이곳을 발굴하면서 나온 듯한데 그 양이 상당하다. 지난날 보원사지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만하다.

 

전에는 금당 터도 발굴되지 않았는데 이번에 찾아가보니 금당 터까지 발굴되었다. 금당 터 뒤편에는 부처가 앉았던 좌대가 보이고 그 앞에 탑이 서 있다. 보물 제104호인 오층석탑은 전형적인 통일신라~고려초기의 석탑양식을 보이고 있다. 이 탑은 아래 기단부에 사자상을 새기고 위층 기단에는 8부 중상을 새겼는데 탑이 안정감이 있고 수려하다.

 

 

기분 좋은 답사, 이제부터 시작이야

 

하루 만에 참 많은 곳을 돌았다. 금당 터 뒤편에 높이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자리한 보물 제106호보원사지 법인국사탑비와 제105호 법인국사탑. 두 기 모두 보불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에 보원사지에는 보물만 5기가 자리하고 있다. 천년 세월을 그렇게 한 자리에 서 있는 보원사지의 석조물들. 시간이 가도 꼼꼼히 다져볼 수밖에 없다.

 

법인국사탑은 법인국사의 사리를 모셔놓았던 탑이다. 975년에 건립된 이 부도탑은 나라의 장인인 국공에 의해 조성되었다. 팔각원당형의 형태로 조성된 부도탑은 경기도와 강원도 등에서 흔히 만날 수 없는 특이한 형태로 조성되었으며 중대석의 조각이 특히 뛰어나다. 이 부도탑은 상대석에 난간을 두른 것이 특이하다.

 

 

부도탑이 서있는 축대위에 올라서 앞을 내다본다. 시원하게 정비된 보원사지는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그리고 더 많은 자료들을 발굴해 전시해놓았다. 예전에는 없던 절이 들어와 한 옆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 대단한 보원사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런 문화재 옆에 세울 것 같으면 제대로 격식을 맞춰 마련할 수 없는 것일까?

 

문화재 답사를 하다보면 사지마다 한편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절들. 문화재를 보호하는 차원에서는 바람직하다고 하겠지만 제대로 절을 지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어설프게 지은 절로 인해 오히려 소중한 문화재의 품격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앞으로 그동안 잊고 있었던 답사에 박차를 가해야겠다. 얼마나 더 다닐 수 있을지 마음이 조급해진다.

대원군 부친 남연군 무덤으로 폐사된 고려 절 가야사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에는 북쪽을 향해 서 있는 석불 한 기가 자리한다.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182호인 이 석불은 고려 때의 것으로 보이는데 전체적으로 돌기둥 형태를 이루고 있다. 미륵불로 불리는 이 석불입상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보관에 소불을 새긴 것으로 보아 관세음보살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석불입상의 얼굴은 길쭉하며 양 볼에 두툼하게 살이 올라있으며 좌편견단의 법의는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다. 이 석불입상은 양팔을 몸에 붙이고 오른손은 가슴까지 들고 왼손은 손등이 봉게 해 배에 대고 있다. 이런 유형의 불상은 충청도 지방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형태이다.

 

이 석불입상은 대원군 이하응의 부친인 남연군묘에서 동북방향으로 150m 정도 떨어진 계곡에 자리하고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불상은 원래 인근에 자리한 가야사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대원군이 부친의 묘를 쓰기 위해 가야사를 없애자 등을 돌렸다고 한다. 얼마나 그 행위가 불편했으면 돌부처도 등을 돌렸을까?

 

 

고려 때부터 전해진 가야사, 석재만 남아

 

덕산면 상가리에는 고려 때부터 존재했다는 가야사지가 있다. 가야사지 추청불전지인 이곳은 옛 가야사의 석재가 한 곳에 쌓여있다. 가야사는 고려시대부터 있던 절이었으나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부친 남연군 이구의 묘를 이장하면서 폐사시킨 절로 알려져 있다. 가야사지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150호로 지정되어 있다.

 

예산군은 가야사지의 보수 및 복원을 위해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총 3차례의 문화재 발굴 조사를 벌여 중정을 중심으로 하는 8동의 건물지와 석조불상 8, 청동불두 1, 가량갑사라 쓴 명문기와 등을 발견했다. 3차 발굴 시에는 남연군묘의 제각시설을 확인하여 남연군묘의 제각이 가야사지를 일부 파괴하고 제각을 지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가야사지 한편에는 가야사지 발굴당시 찾아낸 석물들이 놓여있다. 이곳 가야사지의 중전(中殿)을 비롯한 불전지는 규모 18.2m × 14.2m의 대형 건물지로 확인되었다. 한편에 모아놓은 석물들은 이곳에 옛 가야사라는 절터임을 확인해 주고 있다. 가야사지는 예산군과 서산시 경계 가야산 한편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던 절로 이곳 가야동이라 불리는 곳에는 99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가야사를 부수고 마련한 남연군묘

 

이곳이 명당이라고 절을 없애고 묘를 썼다는 대원군 이하응. 가야사지에서 계단을 따라 오르면 둔덕 위에 마련한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부친 님연군 이구의 무덤이 소재하고 있다. 충청남도 기념물 제80호로 지정된 남연군의 묘는 높은 언덕에 반구형 무덤이 자리하고 있으며 봉분 앞으로는 석물들을 세웠다.

 

이구의 묘는 원래 경기도 연천군 남송정에 있었으나 대원군 이하응이 지관 정만인에게 부탁하여 명당을 알아본 결과 이 자리가 ‘2대에 걸쳐 왕이 나올 자리라는 말에 1846년 부친의 묘를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묘를 옮기고 난 뒤 7년 후 차남 명복을 낳았는데 철종이 후사가 없어 가까운 종손인 명복이 12세로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고종이다. 지관의 말대로 이곳은 2대에 걸쳐 왕이 나온 자리가 맞지만 그 2대를 끝으로 조선이 역사에서 사라졌으니 어째 지관은 2대에 걸쳐 왕이 나올 자리만 알고 나라가 사라질 것은 몰랐을까?

 

돌부처도 돌아선 남연군묘. 묘 아래편으로는 남연군을 운송한 궁중식 상여인 남은들상여를 보관한 전각이 있다. 남은들상여는 중요민속문화재 제3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장강 위에 구름차일을 친 용봉상여로 4귀에는 용모양이 금박이 있다. 님은들상여의 진품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하고 있으며 보호각에 있는 상여는 모조품이다.

 

 

 

주변에 관련되는 문화재를 돌아보면서 입안이 씁쓸해진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민초들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 것이거늘 어째 자신의 영욕을 위해 권력을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잘 꾸며놓은 남연군묘 앞에서 내려다 본 가야사지. 역사 속에서 숱한 사찰들이 사라졌지만 한 개인을 위해 사라진 가야사의 이야기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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