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은 조선 정조 18년인 1794에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정조 20년인 1796에 완성한 성곽이다. 수원화성은 <화성성역의궤>에 따라 과학적인 방법으로 성을 쌓았으며 지형지물을 적절히 이용하여 쌓은 성으로, 한국의 성곽을 대표하는 뛰어난 유적이다.

 

수원화성의 4대문 가운데 북문은 장안문이다. ‘장안(長安)’이란 수도를 상징하는 말이다. 이 장안문은 수원화성의 정문이라고 할 수 있다.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과 북문인 장안문은 남북을 가로지르는 길목에 서 있는 문으로 그 건축구조가 특이하다.

 

남문과 북문의 윗부분의 중앙으로는 통행할 수 있도록 용도를 내었다. 옹성의 벽은 양 옆면에 총안과 현안을 둔 요철형여장(凸形女墻)’을 쌓았다. 옹성의 중앙에는 성문과 맞추어 홍예문을 설치하고 그 위에 5개의 원형구멍을 낸 오성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양 대문 모두 안쪽으로 정면과 측면이 각각 한 칸인 누각을 세웠다.

 

 

정조의 백성사랑의 근본인 장안문

 

정조는 왜 화성의 북문을 장안문이라고 이름 붙였을까? 1794228, 화성유수부의 북쪽, 장안문을 축조하기 위한 자리에서 이유경은 북문 성곽 터에 제단을 쌓고 고유제를 올렸다. 원래 장안문을 세울 자리는 현재 장안문의 자리가 아니었다. 처음에 정약용이 계획한 화성의 길이는, 3,600보인 4.2km였기 때문이다.

 

1794114일 화성의 공사현장으로 내려 온 정조는 백성들이 살고 있는 민가에 깃발이 꽂힌 것을 보았다. 정조가 그 이유를 채제공에게 물었더니 화성을 축조하기 위해 백성들이 이주를 할 곳이라는 대답이다. 정조는 즉시 이곳으로 이주를 해온 백성들이 또 이주를 하는 불편을 겪지 않게 성벽을 구부렸다 폈다 반복해 백성들의 민가를 다치지 않게 민가 밖으로 성을 쌓으라고 하였다.

 

그래서 성벽의 길이가 길어졌다. 이곳을 보면 성이 몇 번 굴곡져 장안문과 북수문인 화홍문 등이 자리하고 있다. 이산 정조의 백성사랑은 이렇게 끔직했다. 이 장안문이 조선의 중심이 되게 해달라는 제문을 보더라도 정조는 화성을 조선의 중심부에 두고 싶어 했음을 알 수가 있다.

 

 

수원 화성 장안문에 성혈이 있다고?

 

장안문은 우리나라 성곽의 문중에서는 가장 큰 성문이다. 정조가 장안문을 이렇게 크게 만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장안이라는 말은 나라의 도읍을 의미한다. 아마도 화성에서 여생을 보내려고 했던 정조로서는 이곳 화성을 도읍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나 아니었을까? 그런 장안문은 참으로 견고한 성문이다.

 

장안문은 4대문 가운데 가장 아픔이 많은 문이다. 6,25 한국전쟁 때 장안문은 반파가 되었다. 현재 성문에는 무수한 파편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려온다. 폭격을 받았는데도 반파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장안문이 견고하다는 뜻도 된다. 정조 당시의 화력으로는 아마 적들이 장안문 인근에도 근접하지 못했을 것이다.

 

옛 선사시대 사람들은 자신의 염원을 이루기 위해 돌을 갈아내어 성혈을 팠다. 성혈은 주로 커다란 바위에 파기도 했지만, 고인돌이나 선돌 등에 많이 나타난다. 아직 성혈에 대한 구체적인 해답은 없다. 하지만 돌로 돌을 갈아낸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만큼 성혈 하나를 만들기 위해 대단한 노력을 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성혈을 몇 개씩 파여져 있기도 하다.

 

장안문의 안쪽에 보면 성문을 견고하게 하기 위한 받침돌인 기단이 있다. 성 안에서 성문을 바라보고 좌측 기단에 보면 10여 개가 넘는 성혈이 있다. 화성이 축성 된 후 사람들은 장안문에 와서 기단석에 성혈을 판 것이다. 화성의 4대문 가운데도 가장 큰 장안문, 그리고 그 성문을 받치고 있는 기단석. 그곳에 성혈을 판 이유는 무엇일까?

 

누구는 그 장안문처럼 웅장하고 단단한 아들을 점지해 달라고 빌었을 테고, 또 누군가는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길을 떠난 서방이나 아들이 꼭 장원급제하기를 염원해서 성혈을 파기도 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장안문, 그리고 그 문을 받치고 있는 든든한 기단석. 그곳에 성혈을 파면서 얼마나 속으로 많이 기원을 했을 것인가? 오늘 장안문은 옛 위용을 간직한 채 그렇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화성성역의궤에 보이는 어처구니 사라지고 취두만 남아

 

궁궐에는 어처구니라는 것이 있다. 흔히 서유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궁궐의 지붕 위에 올라 앉아 있는 것이다. 서역을 갔다 온 삼장법사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이 언제 우리의 궁궐로 온 것일까? 이 궁궐 처마에 올라타고 있는 잡상을 어처구니라고 한다.

 

국어사전에서 어처구니를 찾아보면 '상상 밖으로 엄청나게 큰 사람이나 사물'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올 때도 '어처구니가 없다'라고 한다. 이때의 어처구니는 요철도 구멍도 없이 꽉 막혀 도통 통하지가 않는다는 말의 뜻을 갖고 있다.

 

'어처구니'는 한자어의 요철공(凹凸孔)에서 유래된 것이다. 즉 들어가고 나옴의 요철과 구멍의 합성어로 된 말인데 이것이 변하여 요철이 '어처'가 되고 공이 '구녕'이 되었다가 다시 '구니'로 되었다는 것이다. 말의 변화야 어찌되었건 앞뒤가 꽉 막힌\혀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이나 어이없는 일을 당했을 때 사람들은 '어처구니가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지붕 위에 잡상도 이런 이유가?

 

이 어처구니가 궁궐의 지붕 위에 있는 잡상이다. 지붕위에 어처구니를 올리는 이유는 이러하다. 궁궐을 지을 때 기와를 올리는데 기왓장의 측면에 계단식의 홈이 한 줄 파여 있다. 이것은 빗물이 새지 않도록 정밀하게 맞물려지도록 하는데 이것을 '어처'라고 하는 것이다. 이 어처가 없다면 기와의 줄을 맞추기가 쉽지가 않다. 즉 어처구니는 이 어처공이라는 말이 된다.

 

이 어처를 막기 위한 것이 바로 흙으로 구워 만든 동물이다. 흔히 잡상이라고 하는 어처구니는 올리는데 순서가 있다. 새가 입을 벌리고 있는 형태는 취두라 하고, 새 꼬리 모양은 치미, 망새라고 부른다. 용두는 취두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내림마루 끝에 있으며, 그 밑 추녀마루에 잡상을 올린다.

 

잡상이 서 있는 순서를 보면 대당사부라는 삼장법사가 맨 앞에 무릎에 손을 짚고 서 있다. 그 뒤로는 손행자(孫行者)라 불리는 손오공, 저팔계(猪八戒), 사화상(沙和尙=사오정), 마화상(麻和尙), 삼살보살(三煞菩薩), 이구룡(二口龍), 천산갑(穿山甲), 이귀박(二鬼朴), 나토두(羅土頭)의 순이다. 이 장식들은 잡귀들이 건물에 범접하지 못하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

 

이 중에서 마화상은 말의 형상을 하고 있는 잡상이다. 삼살보살은 세 살, 겁살, 재살 등 살이 끼어서 불길한 재앙이다. 이것을 막고 있는 잡상이다. 천산갑은 인도, 중국 등지에 분포된 포유동물의 일종이다. 머리 뒤통수에 뿔이 돋아있다고 하는데 이 동물이 잡귀들을 물리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잡상들은 언제부터 처마에 올라가 있을까? 기와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고조선 말기라고 한다. 고분벽화 등에 그림에도 잡상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삼국시대나 고려의 와편에도 잡상이 나타났다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 것을 보면 그 이후가 될 것 같다. 잡상은 아무집이나 올리는 것이 아니다. 궁이나 그와 관련된 건조물에만 올린다. 적게는 3개에서부터 많게는 11개까지 올린다.

 

 

창룡문과 화서문의 어처구니는 어디로 갔을까?

 

일본인 세키노 다다시 등 일본인 학자들이 1902년부터 1932년까지 조선을 답사하며 문화유적을 조사하였는데 당시에 찍은 사진에 보면 화서문의 지붕에 어처구니가 보이지 않는다. 그 전 1907년 독일인 헤르만산더의 사진기록에 당시 촬영한 사진에는 화서문의 현판이 기울어져 있고 지붕 위에 잡상(어처구니)도 보이지 않는다.

 

1940년 일본인 채색 목판화가 가와세 하스이가 그린 목판화의 화서문 역시 지붕 위에 어처구니를 그리지 않았다. 이런 점으로 본다면 화서문 위의 어처구니는 1900년대 초 전에 사라졌다는 것을 일 수 있다. 화성성역의궤에 보면 화서문과 창룡문의 지붕 처마 끝에 각각 4구의 어처구니가 자리하고 있다.

화성성역의궤 팔달문 외도에 보면 1층 누각과 2층 누각 처마 끝에 각각 4기의 어처구니가 보인다. 현재 팔달문에는 어처구니가 서 있다. 하지만 동문인 창룡문과 서문인 화서문에 어처구니는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사하진 것일까? 더구나 화서문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소중한 문화재인데 어처구니가 없어 정조대왕 때의 원형과 다르다. , 서문의 어처구니를 복원해야 하지 않을까?

 

보물이 널려 있는 충남서산 보원사지

 

1년이 넘도록 문화재답사 다운 답사를 하지 못했다. 모처럼 나선 문화재답사길. 그동안 한이라도 맺힌 듯 돌아치면서 만난 곳이 바로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에 소재한 사적 제316서산보원사지였다. 벌써 이곳을 들렸던 지가 15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가까이 가보니 주변이 상당히 변해있다.

 

난 이곳을 찾아가면 마음이 들뜬다. 사적지 한 곳에 보물만 5기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변에 이런저런 것들이 들어와 자릴 잡고 있지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보물 제103호인 신라 때 조성된 당간지주다. 보원사지는 백제시대에 창건된 절로 통일신라와 고려 때 크게 융성하였고 왕사, 국사를 지낸 법인국사의 탑문이 묻힌 곳이다.

 

 

보원사지 발굴당시에 신라와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대형 철불 2구가 발견되었으며 1967년도에는 백제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금동여래입상이 출토되는 등 매우 융성했던 사찰임을 알 수 있다. 보원사 주변에는 100개소의 암자와 1,000여 명의 승려가 있었다고 전하는 것만 보아도 당시 보원사지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다.

 

현재 보원사지에는 백제계의 양식에 통일신라와 고려의 석탑양식을 갖춘 보물 제104호 오층석탑과 통 돌을 장방형으로 파내어 조성한 한국최대의 석조(보물 제102), 975(광종26) 법인국사가 입적하자 광종의 지시로 세운 보물 제105호 보승탑, 법인국사의 생애가 기록된 보물 제106호 법인국사 보승탑비, 사찰에 행사가 있을 때 괘불을 걸었던 당간지주 등 보물만 5점이 사지에 자리하고 있다.

 

 

 

한옆에 모아놓은 석물과 와편 등 수북해

 

보원사지로 접어들면 높이 4.2m의 당간지주가 앞에 서 있다. 통일신라 때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이 당간지주는 자리도 옮기지 않고 제 자리라고 한다. 절의 행사가 잇을 때 악귀를 쫓기 위해 당이라는 깃발을 걸어놓을 때 사용하는 당간지주는 지주의 안쪽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바깥쪽에만 양편 가장자리에 돌대를 돋을새김 하였다.

 

당간지주 우측으로 보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석조가 보인다. 밋밋한 장방형으로 파낸 이 석조는 물을 담아두는 용기로 아래편에 구멍을 내어 물이 빠져나가게 만들었다. 통일신라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이 석조는 현재 남아있는 석조 중 가장 큰 것으로 사지에 남아있는 고려 때의 보승탑 등을 볼 때 고려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조에서 금당방향으로 작은 내가 흐르고 있다. 15년 전에는 이 내에 올갱이가 많이 서식하고 있어 그것을 잡는 재미도 쏠쏠했다. 스님들의 포행길인 듯한 나무로 만든 다리를 건너면 와편과 석조물들이 정리되어있다. 아마 이곳을 발굴하면서 나온 듯한데 그 양이 상당하다. 지난날 보원사지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만하다.

 

전에는 금당 터도 발굴되지 않았는데 이번에 찾아가보니 금당 터까지 발굴되었다. 금당 터 뒤편에는 부처가 앉았던 좌대가 보이고 그 앞에 탑이 서 있다. 보물 제104호인 오층석탑은 전형적인 통일신라~고려초기의 석탑양식을 보이고 있다. 이 탑은 아래 기단부에 사자상을 새기고 위층 기단에는 8부 중상을 새겼는데 탑이 안정감이 있고 수려하다.

 

 

기분 좋은 답사, 이제부터 시작이야

 

하루 만에 참 많은 곳을 돌았다. 금당 터 뒤편에 높이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자리한 보물 제106호보원사지 법인국사탑비와 제105호 법인국사탑. 두 기 모두 보불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에 보원사지에는 보물만 5기가 자리하고 있다. 천년 세월을 그렇게 한 자리에 서 있는 보원사지의 석조물들. 시간이 가도 꼼꼼히 다져볼 수밖에 없다.

 

법인국사탑은 법인국사의 사리를 모셔놓았던 탑이다. 975년에 건립된 이 부도탑은 나라의 장인인 국공에 의해 조성되었다. 팔각원당형의 형태로 조성된 부도탑은 경기도와 강원도 등에서 흔히 만날 수 없는 특이한 형태로 조성되었으며 중대석의 조각이 특히 뛰어나다. 이 부도탑은 상대석에 난간을 두른 것이 특이하다.

 

 

부도탑이 서있는 축대위에 올라서 앞을 내다본다. 시원하게 정비된 보원사지는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그리고 더 많은 자료들을 발굴해 전시해놓았다. 예전에는 없던 절이 들어와 한 옆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 대단한 보원사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런 문화재 옆에 세울 것 같으면 제대로 격식을 맞춰 마련할 수 없는 것일까?

 

문화재 답사를 하다보면 사지마다 한편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절들. 문화재를 보호하는 차원에서는 바람직하다고 하겠지만 제대로 절을 지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어설프게 지은 절로 인해 오히려 소중한 문화재의 품격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앞으로 그동안 잊고 있었던 답사에 박차를 가해야겠다. 얼마나 더 다닐 수 있을지 마음이 조급해진다.

대원군 부친 남연군 무덤으로 폐사된 고려 절 가야사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에는 북쪽을 향해 서 있는 석불 한 기가 자리한다.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182호인 이 석불은 고려 때의 것으로 보이는데 전체적으로 돌기둥 형태를 이루고 있다. 미륵불로 불리는 이 석불입상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보관에 소불을 새긴 것으로 보아 관세음보살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석불입상의 얼굴은 길쭉하며 양 볼에 두툼하게 살이 올라있으며 좌편견단의 법의는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다. 이 석불입상은 양팔을 몸에 붙이고 오른손은 가슴까지 들고 왼손은 손등이 봉게 해 배에 대고 있다. 이런 유형의 불상은 충청도 지방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형태이다.

 

이 석불입상은 대원군 이하응의 부친인 남연군묘에서 동북방향으로 150m 정도 떨어진 계곡에 자리하고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불상은 원래 인근에 자리한 가야사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대원군이 부친의 묘를 쓰기 위해 가야사를 없애자 등을 돌렸다고 한다. 얼마나 그 행위가 불편했으면 돌부처도 등을 돌렸을까?

 

 

고려 때부터 전해진 가야사, 석재만 남아

 

덕산면 상가리에는 고려 때부터 존재했다는 가야사지가 있다. 가야사지 추청불전지인 이곳은 옛 가야사의 석재가 한 곳에 쌓여있다. 가야사는 고려시대부터 있던 절이었으나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부친 남연군 이구의 묘를 이장하면서 폐사시킨 절로 알려져 있다. 가야사지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150호로 지정되어 있다.

 

예산군은 가야사지의 보수 및 복원을 위해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총 3차례의 문화재 발굴 조사를 벌여 중정을 중심으로 하는 8동의 건물지와 석조불상 8, 청동불두 1, 가량갑사라 쓴 명문기와 등을 발견했다. 3차 발굴 시에는 남연군묘의 제각시설을 확인하여 남연군묘의 제각이 가야사지를 일부 파괴하고 제각을 지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가야사지 한편에는 가야사지 발굴당시 찾아낸 석물들이 놓여있다. 이곳 가야사지의 중전(中殿)을 비롯한 불전지는 규모 18.2m × 14.2m의 대형 건물지로 확인되었다. 한편에 모아놓은 석물들은 이곳에 옛 가야사라는 절터임을 확인해 주고 있다. 가야사지는 예산군과 서산시 경계 가야산 한편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던 절로 이곳 가야동이라 불리는 곳에는 99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가야사를 부수고 마련한 남연군묘

 

이곳이 명당이라고 절을 없애고 묘를 썼다는 대원군 이하응. 가야사지에서 계단을 따라 오르면 둔덕 위에 마련한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부친 님연군 이구의 무덤이 소재하고 있다. 충청남도 기념물 제80호로 지정된 남연군의 묘는 높은 언덕에 반구형 무덤이 자리하고 있으며 봉분 앞으로는 석물들을 세웠다.

 

이구의 묘는 원래 경기도 연천군 남송정에 있었으나 대원군 이하응이 지관 정만인에게 부탁하여 명당을 알아본 결과 이 자리가 ‘2대에 걸쳐 왕이 나올 자리라는 말에 1846년 부친의 묘를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묘를 옮기고 난 뒤 7년 후 차남 명복을 낳았는데 철종이 후사가 없어 가까운 종손인 명복이 12세로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고종이다. 지관의 말대로 이곳은 2대에 걸쳐 왕이 나온 자리가 맞지만 그 2대를 끝으로 조선이 역사에서 사라졌으니 어째 지관은 2대에 걸쳐 왕이 나올 자리만 알고 나라가 사라질 것은 몰랐을까?

 

돌부처도 돌아선 남연군묘. 묘 아래편으로는 남연군을 운송한 궁중식 상여인 남은들상여를 보관한 전각이 있다. 남은들상여는 중요민속문화재 제3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장강 위에 구름차일을 친 용봉상여로 4귀에는 용모양이 금박이 있다. 님은들상여의 진품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하고 있으며 보호각에 있는 상여는 모조품이다.

 

 

 

주변에 관련되는 문화재를 돌아보면서 입안이 씁쓸해진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민초들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 것이거늘 어째 자신의 영욕을 위해 권력을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잘 꾸며놓은 남연군묘 앞에서 내려다 본 가야사지. 역사 속에서 숱한 사찰들이 사라졌지만 한 개인을 위해 사라진 가야사의 이야기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만 같다.

 

헐떡이며 태봉 마루에 서 있는 명종의 태실을 오르다

 

지금 저 꼭대기를 올라가자는 겁니까? 점심 먹고 이제 10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저곳을 어떻게 오릅니까? 아무리 위에 올라가면 경치가 좋다고 해도 저는 절대 못 올라갑니다. 경사도 장난이 아니구먼?”

 

5일 오후 서산시 문화재답사를 하면서 들린 곳은 서산시 운산면 문수골길 94-8(태봉리)에 소재한 명종의 태실 및 비가 서 있는 태봉 아래 주차장이다. 위로 보이는 태봉은 밥을 먹고 난 후 바로 오르기에는 버겁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곳 높이야 그리 높은 것은 아니지만 소화도 되기 전에 오르라고 하면 힘들 것 같다.

 

 

태봉이나 태재라는 명칭을 갖고 있는 곳은 왕이나 왕실 자손의 태를 모셔 두는 작은 석실을 말한다. 마을이름까지도 태봉리리고 한다. 그 산 위에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21호로 지정된 명종의 태실 및 비가 있다. 산 밑에서도 태실 앞에 세운 비의 윗부분이 보일정도이다. 하지만 그곳을 올라야 한다는 데는 쉽게 발을 내딛기가 어렵다.

 

이곳에 태를 묻은 명종(1545~1567)은 중종의 둘째 아들이다. 중종이 죽고 큰 아들인 인종이 즉위하였으나 재위 8개월 만에 죽자 당시 12세의 어린나이로 즉위를 한 명종 대신 어머니인 문정황후가 왕이 나이가 어리다는 구실로 대리청정을 하였다. 명종은 왕위에 있을 당시 왜의 잦은 침략을 당했고 임꺽정이 혼란한 틈을 타 경기도와 황해도 일대를 휩쓸고 다니기도 했다.

 

 

중종 33년인 1538년에 건립된 명종 태실

 

명종 태실은 중종 33년인 1538년에 건립되었다. 정말이지 오르기 싫은 태봉의 가파른 길을 몇 번이고 숨을 몰아쉬면서 겨우 올랐다. 태봉 정상부근까지 가파른 비탈을 따라 오르면 위에는 소방도로가 나 있어 걷기에 편해진다. 산 아래편에는 대밭이 있었는데 이곳 소방도로를 따라 산죽이 양편으로 자라고 있다.

 

태봉 위는 약 40평 정도의 넓이로 조성하였다. 방형의 대좌 위에 태를 넣은 태함을 석종형 부도의 태실로 마련했으며, 그 위에 8각의 옥개석을 놓고 보주형의 석재로 마감하였다. 석종형 부도 전체 높이는 273, 태실의 높이는 90이며, 각 변이 약 2m8각 난간으로 둘러져 있어 현존하는 태실 중 가장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태실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 앞에는 3기의 비가 서 있다. 하나의 비에 대군춘령아지씨태실(大君瑃齡阿只氏胎室)’이라 음각되어 있는데 글씨가 지워져 알아보기 힘들다. 이 비는 1538년인 중종 33년에 세운 비이다. 이 비는 태실을 조성하면서 세웠다.

 

그 옆에 주상전하태실(主上殿下胎室)’이라 음각되어 있는 비는 명종 1년인 1546년에 명종이 즉위하자 국왕의 태실을 봉안해야 하기 때문에 건립된 비이다. 이 비는 귀부와 이수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또 한기의 비는 종전의 비석이 전부 손상된 까닭에 숙종 37년인 1711년에 왕자전하태실비(王子殿下胎室碑)’라는 글씨를 각인하여 세웠다. 이 비는 등이 4엽화문으로 장식된 귀부 대좌 위에 용과 구름무늬로 새긴 이수로 조형하였다.

 

 

저 앞에 보이는 곳이 안면도라고 해요

 

명종태실. 태실의 석종형 부도 앞에서 먼 곳을 바라본다. 이곳에 오르기가 그렇게 싫었던 것도 사실은 힘이 든 이유도 있었지만, ‘눈물의 왕이라고 불린 명종의 태실 앞에 선다는 것이 썩 마음이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154576일 명종이 즉위했으니 나이 12세였다. 너무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모후인 문정황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이때부터 명종은 그저 허울분인 왕이었다. 수렴청정을 하면서 정사에 비판적인 인사들은 가차없이 내치는 대비 문정황후로 인해 결국 을사사화까지 일어났지만 명종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어머니 문정황후의 그늘에 가려 성인이 되어 친정을 하면서도 자신의 뜻대로 정사를 살피지 못했다. 명종은 어머니 문정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친정을 시작했지만 2년 후인 명종 22(1567) 6,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저 앞에 보이는 곳이 안면도라고 해요. 날이 좋으면 더 멀리까지 보인다네요

답사에 동행한 지인이 하는 말이다. 세상살이에 마음이 울적할 때면 이곳에 올라 멀리 서쪽을 바라보면 속이 트인다고 말하는 지인. 하지만 난 이곳에 오르면 마음이 답답해진다. 평생을 어머니 문전황후의 그늘에 가려 마음껏 왕으로서 친정을 펼치지 못한 명종. 그리고 젊은 나이인 34세를 일기로 왕위를 이을 후사도 두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명종. 그의 생에를 알기에 이곳을 오르면 역사의 아픔이 느껴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