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 야경 즐기는 수원야행, 8·9월 두 차례 열려

 

지난해 여름 처음 열려 20만 명이 넘는 관람객의 발길을 이끌었던 밤빛 품은 성곽도시, 수원야행(夜行)’이 다시 돌아온다. 올해는 두 차례 열린다.

첫 번째 야행은 810~11행궁 그리고 골목길, 이야기 속을 걷다를 주제로, 두 번째 야행은 97~8수원화성, 아름다움을 보다를 주제로 진행된다.

수원야행은 문화재청이 주관하는 문화재 야행의 하나로 선선한 밤에 수원화성 곳곳의 아름다운 야경을 감상하며 역사·문화를 체험하는 프로그램이다. 문화재 야행은 문화재가 밀집된 전국 곳곳에서 야간형 문화 향유·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이다.

 

화성행궁·화령전·행궁길·신풍동 일원에서 열리는 첫 번째 수원야행은 빛으로 장식된 골목길을 걸으며 문화재가 품은 역사를 느껴보는 감성체험이 주를 이룬다.

수원야행은 저녁 6시부터 11시까지 8()를 소주제로 한 문화재 체험프로그램으로 이뤄진다. 8야는 야경(夜景야화(夜畵야로(夜路야사(夜史야설(夜設야식(夜食야시(夜市야숙(夜宿)이다.

 

야경(밤에 보는 문화재)은 화성행궁·화령전, 수원전통문화관·수원한옥기술전시관·수원아이파크미술관·수원화성박물관 등 문화시설을 늦은 밤(11)까지 관람하는 것이다.

올해는 무형문화재도 만날 수 있다. 화성행궁 중양문에서 경기도무형문화재 제14호 소목장 김순기 장인의 창호(窓戶) 전시가 열리고, 유여택·낙남헌에서는 경기도무형문화재 제8호 승무·살풀이춤 신현숙 전수교육조교의 살풀이와 신칼대신무를 볼 수 있다. 화성행궁 광장에서는 경기도무형문화재 제57호 불화장 이연욱 장인과 함께 화성행궁 단청을 그려보는 전통체험마당이 열린다.

 

 

수원 야행의 가장 큰 볼거리인 야화(夜畵, 밤에 보는 그림)는 화성행궁과 문화시설을 캔버스 삼아 빛으로 작품을 만드는 미디어아트(매체 예술)이다.

행궁, 빛으로 물들다66색 미디어아트 작품을 행궁 내 6곳의 공간에서 미디어 파사드(건물 외벽에 LED 조명을 비춰 영상을 표현하는 기법)로 펼쳐 보이는 것이다(행궁 야간특별관람권 소지자만 입장 가능). 이외에도 행궁광장에서는 증강현실, 터치 프로젝션 맵핑(대상물 표면에 빛으로 이뤄진 영상을 투사) 등 첨단 미디어기술을 활용한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야로(夜路, 밤에 걷는 거리)는 화성어차, 수원화성 자전거 택시, 플라잉 수원 등 수원화성을 구석구석 감상할 수 있는 탈거리를 연장 운행하는 것이다.

야사(夜史, 밤에 듣는 역사 이야기)는 문화관광해설사 설명을 들으며 화성행궁 야경을 감상하고, 수원야행 프로그램을 관람하는 행궁, 골목길 이야기 속을 걷다등으로 이뤄진다.

 

야설(夜設, 밤에 보는 공연)은 수원화성 곳곳에서 수원의 역사를 주제로 펼쳐지는 다채로운 공연이다. 화성행궁 광장 내 산대무대에서 무예 24기 특별 야간 공연 장용영의 후예들’, 전통연희 수원야행 산대놀음이 상연되고, 젊은 예술인들은 거리 곳곳에서 음악·댄스·마술 등 다채로운 공연을 펼친다. ‘오주석 서재에서는 수원시립공연단의 클래식 공연이 열린다.

 

야식(夜食, 밤에 먹는 음식)은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다. 수원야행 기간 행궁동·북수동 일원 골목길, 거리에서 지역 상인들이 다채로운 먹거리를 판매한다.

야시(夜市, 밤 시장)는 예술체험을 하고, 물건을 살 수 있는 장터이고, 야숙(夜宿)은 수원화성 내 한옥 게스트하우스 등에서 숙박하면서 야행을 즐기는 것이다.

 

 

수원야행 기간에 행사가 열리는 행궁동 일원은 차없는 거리로 운영된다. 될 수 있으면 대중교통으로 행사장에 오는 게 좋다. 첫 번째 야행 기간에는 오후 5시부터 11시까지 수원제일감리교회행궁동주민센터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행궁광장입구화성행궁주차장남문로데오 청소년문화공연장에 이르는 구간을 통제한다.

수원야행 세부 프로그램은 수원문화재단 홈페이지(http://www.swcf.or.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수원시 관계자는 다채로운 문화체험 프로그램으로 이뤄진 수원야행은 관광객들에게 문화재 야행의 진수를 선사할 것이라며 많은 이가 방문해 수원화성의 멋진 야경을 즐기길 바란다고 말했다.

 

여름이 되면 피서를 떠난다고 하지만 막상 가볍게 길을 떠나기가 쉽지 않다. 우선을 며칠 나들이를 하면서 들어가는 비용도 만만찮지만 오고가는 길이 꽉 막혀 피서를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화를 불러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멀리가지 않고 수원인근에서 피서를 즐기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수원을 벗어나 하루 동안 시원한 숲과 계곡을 즐길 수 있는 곳. 그런 곳은 상당히 많이 있다. 그런 곳에 대한 정보가 부족할 뿐이다. 누구나 그런 곳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한다. 더욱 경비도 많이 필요 없다. 그저 주유비와 식사비 정도 들여 피서를 제대로 할 수 있는 곳. 천년전통사찰을 찾아가면 그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 굳이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숲에서 느끼는 시원한 바람과 계곡을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고 즐길 수 있는 곳을 소개한다. 수원에서 불과 한 시간 30분 정도에 있는 곳이다.

 

전통사찰은 대개 산 속에 자리하고 있거나 평지에 있다고 해도 산을 기고 있기 마련이다. 어느 곳을 가던지 숲이 있고 물이 있다. 계곡이 없다면 주변에 있는 물가를 찾아가면 된다. 아침에 수원을 출발하면 오고가는 길에 맛있는 음식까지 곁들일 수 있으니 이 또한 좋은 일 아닌가? 경비를 줄여 즐길 수 있는 곳을 소개한다.

 

천년고찰 양평 사나사 계곡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 304에 소재한 사나사. 양평 용문산 계곡을 끼고 자리한 천년고찰인 사나사는 많은 수난을 당했다. 신라 경명왕 7년인 923년에 고승 대경대사가 제자 용문과 함께 창건한 후, 5층 석탑과 노사나불상을 조성하여 봉안하고 절 이름을 사나사로 하였다고 전한다. 사나사는 조선조 선조 25년인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선조 41년인 1608년에 단월 한방손이 재건하였다.

 

영조 51년인 1773년에는 양평군내 유지들이 뜻을 모아 당산계를 조직하고 향답을 사찰에 시주하여, 불량답을 마련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경내에 비를 세웠다. 순종 원년인 1907년에는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는 의병들의 근거지라 하여 사찰을 모두 불태웠다. 그 뒤 1909년에 계헌이 큰방 15칸을 복구하였으며, 1937년에 주지 맹현우 화상이 큰방과 조사전 등을 지었다. 그러나 1950년에 일어난 6.25사변으로 인해 또 한 번 사나사는 전소가 되었다. 1956년에 주지 김두준과 함문성이 협력하여 대웅전, 산신각, 큰 방을 재건하고 함씨각을 지었다.

 

사나사 계곡은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에 소재하며 폭이 넓고 물이 깨끗하며 수량이 풍부한 계곡으로 용문산에 위치한다. 사나사 계곡에 백운봉에서 흐르는 물이 절 옆으로 흐르기 때문에 쉼터와 맑은 물, 숲이 한데 어우러져 수원인근에서 찾아가기가 편하다. 하루 만에 다녀올 수 있는 피서지로 추천한다.

 

 

숲이 아름다운 곳 안산 대부도 쌍계사

 

흔히 쌍계사하면 하동 쌍계사를 떠올리지만, 그 외에 여러 곳에 쌍계사라는 사명을 가진 사찰들이 있다. 안산시 대부북동 1058에 소재한 쌍계사는 1660년 경 취촉대사가 이곳을 지나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다섯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서 물이 나와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안산시 대부북동 1058에 소재한 쌍계사, 사찰에 보관된 <정수암성조기(淨水庵成造記)>에 의하면 1689년 죽헌비구가 정수암을 중창하여 없어진 후, 1745년 그 자리에 다시 사찰을 세워 1750년부터 쌍계사라 불렸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사찰 내에서 만력4(萬曆四年 : 1576)에 제작된 기와가 발견되어, 16세기 후반부터 이 지역에 사찰이 운영되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연일 폭염주의보와 경보가 내리고 온열환자들이 사고를 당한다고 하는 날 찾아간 안산 대부도 쌍계사.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와는 판이하게 달라진 절의 모습에 눈이 크게 떠진다. 그동안 보지 못하던 전각이 세 채나 새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새로 지은 명부전과 용왕각, 극락보전, 삼성각을 둘러 전통사찰 자연학습장이라 쓴 숲으로 들어선다. 우거진 송림사이로 작은 오솔길 하나가 보인다. 곳곳에 인생살이에 도움이 될 만한 글들아 걸려있다. 그 길을 읽으면서 걷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폭염이라는데 숲속 오솔길엔 그래도 시원한 바람 한 점 스치고 지나간다.

 

애착을 없애는 일에 게으르지 말며

벙어리도 되지말라

학문을 닦고 마음을 안정시켜

이치를 분명히 알며 자제하고 노력해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숏타니파타에 나오는 글귀이다. 이런 글귀 하나를 오솔길에서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신선하다. 난 이 폭염이라는 무더위를 이렇게 조용한 사찰을 찾아 그곳의 바람으로 무더위를 식힌다. 쌍계사는 물이 없지만 대부도에 소재하고 있기 때문에 인근에 바닷가로 난 산책로를 걸으면 시원한 바닷바람을 마음껏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가장 오랜 은행나무가 서 있는 양평 용문사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 625에 소재한 용문사. 이곳은 천연기념물로 지정 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가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천연기념물 제30호인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용문사는 신라 신덕왕 2년인 913년에 대경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또 다른 일설에는 경순왕(927~935재위)이 친히 행차하여 창사 하였다고도 한다. 이런 연대로 보면 은행나무는 용문사 창건 당시에 심었음을 알 수 있으며, 신덕왕 때 창건했다는 설이 정확하게 일치한다.

 

용문사는 고려 우왕 4년인 1378에 지천대사가 개풍 경천사의 대장경을 옮겨 봉안하였고, 조선 태조 4년인 1395년에 조안화상이 중창하였다. 조선조 세종 29년인 1447년에는 수양대군이 모후 소헌왕후 심씨를 위하여 보전을 다시 지었고, 세조 3년인 1457에는 왕명으로 중수하였다. 성종 11년인 1480년에 처안스님이 중수한 뒤 고종 30년인 1893년에 봉성 대사가 중창하였으나, 순종원년인 1907년에 의병의 근거지로 사용되자 일본군이 불태웠다.

 

1909년 취운스님이 큰방을 중건한 뒤, 1938년 태욱스님이 대웅전, 어실각, 노전, 칠성각, 기념각, 요사등을 중건하였다. 1982년부터 지금까지 대웅전, 삼성각, 범종각, 지장전, 관음전, 요사채, 일주문, 다원 등을 새로 중건하고 불사리탑, 미륵불을 조성하였다. 경내에는 권근이 지은 보물 제531호 정지국사부도 및 비와, 지방유형문화재 제172호 금동관음보살좌상, 천연기념물 제30호인 용문사 은행나무가 있다.

 

용문산에 자리하고 있는 용문사는 절을 두고 잠시만 숲으로 길을 들어서면 시원한 물이 흐른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걸어 올라가는 숲길도 일품이지만 무더운 여름철 찾아들어간 곳에서 만나는 시원한 계곡물에 발이라도 담그면 폐부 속까지 시원함을 느낀다. 인근에는 용계계곡 등 맑은 물과 숲이 어우러지는 곳이 있어 여름철 피서객들이 찾아오기도 한다.

 

안산시 대부도 고찰 쌍계사를 찾아 오솔길을 거닐다

 

안산시 대부북동 1058에 소재한 쌍계사, 사찰에 보관된 <정수암성조기(淨水庵成造記)>에 의하면 1689년 죽헌비구가 정수암을 중창하여 없어진 후, 1745년 그 자리에 다시 사찰을 세워 1750년부터 쌍계사라 불렸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사찰 내에서 만력4(萬曆四年 : 1576)에 제작된 기와가 발견되어, 16세기 후반부터 이 지역에 사찰이 운영되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쌍계사 극락보전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81호인 쌍계사목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극락보전에 봉안된 목조여래좌상은 높이 92cm로 좁은 어깨에 머리를 앞으로 숙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머리에는 소라모양의 나발이 촘촘하고, 지혜를 상징하는 육계가 높이 솟아 있다.

 

이 목조여래좌상은 이마 위에는 타원형의 중앙계주와 정수리에 원통형의 정상계주가 있다. 타원형의 얼굴은 이마가 넓고 귀가 어깨 위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게 늘어져 있으며, 눈두덩이와 양미간이 각이 져 조선후기 제작된 불상의 전형적인 얼굴을 하고 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여래좌상

 

두터운 법의자락은 오른쪽 어깨에 짧게 늘어져 반전하고, 팔꿈치와 배를 지나 일부 대의자락이 왼쪽 어깨로 넘어가게 조형하였다. 왼쪽 어깨의 법의자락은 수직으로 내려와 반대쪽 법의자락과 겹쳐져 유려한 U자형을 이룬다. 하반신을 덮은 법의자락은 중앙의 S자형 주름을 중심으로 좌우로 짧게 늘어져 있다.

 

법의 안쪽에는 복견의를 입고, 가슴을 가린 승각기를 끈으로 묶어 윗부분에 5개의 앙연형 주름이 있다. 불상의 뒷면은 법의자락이 목 주위와 등을 V자형으로 덮어 조선후기 불상의 후면에 나타난 표현과 차이를 가진다. 따로 제작한 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댄 아미타수인이지만, 이와 같은 손의 자세는 조선후기 제작된 아미타불을 비롯한 약사불과 지장보살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대좌는 연꽃이 위를 향한 앙연의 연화좌와 삼단을 이룬 팔각대좌가 한 쌍을 이루고, 팔각대좌 중단에 하늘을 날고 있는 용과 천인이 화려하게 투각되어 있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목조여래좌상은 고개를 앞으로 숙인 모습을 하고 있어 특이하다. 아마도 바세계의 중생을 돌보기 위해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4년 만에 달라진 쌍계사를 찾아가다

 

201435일 이곳을 들렸으니 벌써 4년이 훌쩍 지났다. 연일 폭염주의보와 경보가 내리고 온열환자들이 사고를 당한다고 하는 날 찾아간 안산 대부도 쌍계사.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와는 판이하게 달라진 절의 모습에 눈이 크게 떠진다. 그동안 보지 못하던 전각이 세 채나 새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새로 지은 명부전과 용왕각, 극락보전, 삼성각을 둘러 전통사찰 자연학습장이라 쓴 숲으로 들어선다. 우거진 송림사이로 작은 오솔길 하나가 보인다. 곳곳에 인생살이에 도움이 될 만한 글들아 걸려있다. 그 길을 읽으면서 걷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폭염이라는데 숲속 오솔길엔 그래도 시원한 바람 한 점 스치고 지나간다.

 

애착을 없애는 일에 게으르지 말며

벙어리도 되지말라

학문을 닦고 마음을 안정시켜

이치를 분명히 알며 자제하고 노력해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숏타니파타에 나오는 글귀이다. 이런 글귀 하나를 오솔길에서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신선하다. 좋은 글은 늘 마음속에 새겨두는 버릇이 있어서인가? 한 잔 사진으로 남겨놓는다. 산다는 것이 어디 마음먹은 대로 될 것인가? 하지만 난 이 폭염이라는 무더위를 이렇게 조용한 사찰을 찾아 그곳의 바람으로 잠재운다.

 

현재 수원화성에는 공심돈이 두 곳이 소재한다. 두 곳에 남아있는 공심돈은 모두 북쪽 가까이에 자리를 하고 있다. 팔달문을 보호하기 위한 남공심돈은 일제에 의해 파괴가 되어 아직도 복원이 되지 않고 있다. 1907'헤르만 산더'의 사진자료(국립민속박물관 소장)에 보면 남공심돈은 팔달문에서 동쪽으로 곧게 뻗어난 성곽이 북쪽을 향해 꺾일 때, 그곳에 자리하면서 남수문과 팔달문을 보호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남공심돈과 남수문 사이에 남암문이 있었다고 한다. 남안문은 일종의 시구문이다. 화성 안에서 형벌을 받고 참수당한 죄인이나 성안 백성이 죽으면 이 남암문을 통해 성 밖으로 내보냈다고 한다. 그런 시구문 역할을 하는 남암문도 사라진 채 복원이 되지 않고 있다. 팔달문 앙 편 끊어진 곳에 자리했던 남공심돈, 남암문, 은구는 찾을 수가 없다.

 

공심돈은 성곽 주변을 감시하여 적의 접근 여부를 살피고, 적의 공격 시 방어시설로 활용되던 곳이다. 공심돈은 내부를 빈 공간으로 만든 것으로 수원화성에 중에서 높게 조성해 먼 곳을 관찰할 수 있고 적의 동태를 살피기 쉬운 지형에 세워져 있다. 공심돈의 내부는 여러 층으로 되어 있어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에 유리하고 정면과 밑으로 뚫려 있는 총안과 현안 등을 통해 적을 공격할 수 있다.

 

남공심돈은 남암문의 동치 위에 있다. 그 제도는 모두 서북공심돈과 같으나 약간 작다. 치의 동남 두 면에 각각 현안 둘을 내고 위에 평평한 여장을 설치하였다. 면마다 두 개의 총안을 뚫어놓았다. 장 내 3면에는 각각 3척쯤에 공간을 두어 군사들이 기예를 발휘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한 가운데 돈을 벽돌로 쌓고 그 가운데는 비웠다.

 

남암문은 팔달문 동쪽 793척 도는 곳에 있으며 남쪽을 향해 역간 후미진 곳이 있다. 과에는 사잇문을 후미진 곳에 드어 적들이 그 길을 아라지 못하게 하고 사람, 가축, , 양식을 모드 이 암문을 이용해 성 안으로 들여왔다. 암문은 흙으로 문을 막으면 성과 같이 되어 폐쇄할 수 있도록 대비하여 임기웅변을 할 수가 있었다.

 

 

남암문의 위 덮개판을 대고 관 위에는 회를 더 붙여 안과 밖을 여장으로 끼워 쌓았다. 밖은 비예(성 위에 쌓은 낮은 담)만을 설치하고 누는 세우지 않았다. 다만 흙을 채우고 잔디를 덮어 성 위의 길과 통하게 하였다. 문선(문짝) 안은 쇠로서 빗장을 설치하였는데 정문과 같게 하였다.

 

수원화성의 시설물 중에서 만날 수 없는 남공심돈과 남암문, 그리고 은구 등. 이 모든 것이 완전히 복원을 마쳐야 수원화성이 완전해 질 수 있다. 수원시에는 앞으로 이 사라진 시설물을 모두 복원하고 팔달문 양편과 끊어진 화성을 잇는다고 한다. 완전한 수원화성의 모습을 하루 빨리 만나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경기도기념물 제161호 화성 만년제를 찾아가다

 

정조는 수원화성을 축성하면서 수원화성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네 개의 호수를 파고 방죽을 축조하였다. 정조18년인 1794년에 극심한 가뭄이 들자, 정조는 수원화성 축성공사를 중지하고 가뭄에 대비한 구휼책을 세웠다. 정조는 농가의 이로움과 수원화성 운영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만석거(萬石渠)’를 조성하기에 이른다. 만석거는 당대 최신식 수문과 수갑을 설치하였으며, 여기에 모인 물을 농업용수로 이용하여 대규모 농장인 대유둔을 설치하였다.

 

정조 22년인 1798년에 수원화성 남쪽에 사도세자 묘역인 화산 현륭원(顯隆園) 앞의 만년제(萬年堤)’를 축조하고, 정조 23년인 1799년 서쪽에 축조한 것이 수원시 서둔동의 축만제(祝萬堤, 西湖)’이다. 다만 동편에 마련한 저수지 지동(池洞)’ 혹은 지곡(池谷)’이라는 이름만 남기고 그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정조는 이렇게 수원화성을 축성하면서 수원화성 외곽 사방에 저수지를 조성했다. 이들 저수지들은 수원화성을 축성하면서 장용위를 설치하게 되자 장용위 사관병졸들의 급료나 기타 경비에 충당하기 위한 화성둔전(華城屯田)’에 물을 대려고 판 것이었다. 둔전이란 군사들이 전쟁이 나면 싸움터로 나가지만 평상시에는 농사를 지었는데 그들이 짓던 농토를 이르는 말이다.

 

 

만년을 부유하게 만들 수 있는 저수지

 

만석거는 그 물로 농사를 지어 쌀 만석을 생산한다는 뜻을 갖고 있고, 만년제는 그 물로 농사를 지어 만년을 풍요롭게 살 수 있도록 만들겠다는 뜻을 갖고 있다

지난 해 화성 융건릉을 답사할 때 만난 한 어른이 설명하던 이야기다. 그런 이야기는 수원 만석거에서도 자주 들어온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만년제의 물을 이용해 인근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만년을 배부르게 살 수 있게 하기 위해 마련했다는 만년제. 화성시 안녕동 152에 소재한 만년제는 정조가 경기도 양주군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영우원(永祐園)을 화산 아래로 옮기고 화산 북쪽에 있던 기존의 수원읍을 현재의 수화원성으로 옮겨 이곳에 강한 국권을 상징하는 신도시인 수원화성을 축성하면서 마련하였다.

 

정조는 현륭원(顯隆園)과 수원 신읍의 경영을 위한 경제적 기반 확보와 백성들의 생활 안정을 목적으로 수원 화성 주변에 둔전의 설치와 관개용수를 위한 제방을 쌓는 일, 그리고 화성과 그 주변에 상권을 개설한 상권보호, 나무심기 등 여러 가지 정책적인 일을 추진해 나갔다.

 

 

꼭꼭 숨어있는 만년제, 밖으로만 겉돌아

 

수원의 만석거나 축만제인 서호 등은 사람들에게 개방을 해 누구나 그 주변을 돌아볼 수 있다. 두 곳 모두 산책로를 개설하고 사람들이 모여들어 즐길 수 있도록 공원화시켰다. 벌써 몇 번인가 찾아가보려 했던 만년제이기에 30일 오후, 마음을 단단히 먹고 만년제를 찾아 나섰다. 한 때 엉뚱한 곳을 만년제라고 일렀기에 내비게이션은 엉뚱한 곳의 저수지를 알려준다. 안내간판이 크지 않아 몇 번을 주변을 배회하고 화성시 문화재 담당자와 통화를 하고 난 후 찾아간 만년제.

 

만년제를 조성할 때 인근의 풍수까지 고려해 저수지를 조상했다고 한다. 만년제는 2007년부터 4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를 실시해 은구, 하수문지, 괴성(연못 안에 있는 인공 섬), 말뚝 열 등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발굴한 결과 동서남북 측의 규모, 괴성이라는 독특한 지형, 상수문과 하수문이 있었다는 기록이 일성록과 일치해 이 제방을 만년제로 확정했다는 것이다. 정조는 179823일 만년제 공사를 앞두고 만년제 공사는 소중한 것이다. 위로는 원침(사도세자 묘)을 위하고 아래로는 민생을 위함이다(萬年堤役所重上爲園寢下爲民生)”라고 했다.

 

정조의 수원화성축성과 강한 국권과 백성이 부유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마련한 화성 주변 네 곳의 저수시설. 펜스로 봉쇄되어 있는 만년제를 찾아 나섰다가 정작 제대로 된 만년제 구경은 하지 못하고 주변에 차를 세워놓았다가 지나는 운전자들로부터 호된 꾸중만 들었다. 문회유적 한편에 주차공간이라도 만들어 놓던지 만년제를 들어가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도록 했으면 좋았을 것을. 그러나 만년제 제방 주변은 모두 펜스로 막혀있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철책문은 커다란 열쇠로 잠겨있어 아쉬움만 더한 체 돌아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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