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한국국보대관>을 길에서 만나다

 

사람들은 자신이 정말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은 책이 있을까? 살다보면 책이 소중하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런 책을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다면 그 책을 어떻게 해서라도 구입하려고 노력은 할까? 나는 당연히 그래야한다고 대답한다. 그 책이 정말 소중하다고 느낀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구입할 것이다.

 

정말 소중한 책 한권을 구했다. 그것도 책방이 아니라 우연히 길에서 책을 만났으니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정말 대단한 우연이다. 아마 문화재에 미쳐 30년 가까운 시간을 많은 닐과 경비를 들여가며 전국을 돌아다녔더니 신께서 이런 소중한 책을 나에게 주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참 길고도 긴 시간이었다. 말이 30여년이지, 그 시간동안 전국을 걸으며 찾아본 문화재가 얼마나 될까? 아마 지금 같아서는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을 것만 같다. 이제는 힘이 부치기 때문이다. 그렇게 문화재를 찾아다니면서 문제가 있는 것은 바로 시정을 요구하는 기사를 올렸다. 그 중 많은 문화재의 문제점들이 시정이 되어 가는 것을 보면서 나름 뿌듯하기도 했다.

 

 

<한국국보대관>을 길에서 만나다

 

15일 남문시장을 지나다가 우연히 누군가 헌책을 들고 오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그 맨 위에 낡고 더렵혀진 책 한권이 눈이 간다. <한국국보대관>이라는 책 표지 때문이다.

그 책 어디서 구했어요?”

, 소장하고 있던 것인데 짐을 옮기려고요

그 책 저한테 파실 수 있어요?”

제가 소장하려는 것인데요

제가 꼭 필요해서 그런데 저한테 파시죠

이 책, 꼭 필요하세요. 그럼 그냥 가져가세요

 

그냥 가져가란다. 세상을 살다보면 이런 일도 생긴다. 이 책의 가치는 아는 사람만 알 수 있다. 더구나 나처럼 문화재를 찾아 전국을 찾아다닌 사람에게는 더 없이 소중한 책이다. 그런 책을 그냥 가져가란다. 본인도 그 책의 소중함을 알고 소장하겠다고 한 책이다. 그런 소중한 책을 그냥 가져가라는데 이보다 감사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고 한 다음 책을 받아들었다. 꽤 묵직한 책이다. 책을 받는 순간 가슴이 쿵쾅거린다. 이 책안에 어떤 내용이 있는 것일까? 국보대관이라고 했으니 내가 찾아보지 못한 많은 것들이 있지 않을까? 책을 들고 바로 집으로 향했다. 책 내용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책 속에서 옛 화성을 만나다

 

<한국국보대관> 내용에는 국보만이 아니라 국보급 문화재와 명승, 천연기념물까지 수록이 되어있다. 서울을 비롯하여 각 도의 국보급 문화재들이 지자체별로 소개가 되어있다. 수원편을 찾아보았다. 수원화성이 소개되어있다. 그런데 이 책의 발간연대와 발간한 곳 등을 찾아볼 수가 없다. 다만 수원화성 중 방화수류정 봉돈, 장안문과 여러 곳이 수록되어 있는데 수원화성을 복원하기 전 모습이다.

 

정말 소중한 자료구나혼자 뇌까리며 책을 뒤적여본다. 책 뒤편에 특집 해외전시국보리고 부록이 붙어있다. 그 내용을 보니 단기 4290820일 미해군함정 AF57호로 해외에 자랑할 우리 문화재 국보 185점을 적재하여 부산항을 출발 922일 미국에 도착하였다라는 내용이 있다.

 

단기 4290년은 서기 1957이다. 그런 내용으로 볼 때 이 책은 1960년쯤 발간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수원화성이 복원되기 이전에 제작된 책이니 벌써 60년 가까이 되었다. 햇수로 따진다면 꽤 오래된 책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전국에 산재한 국보급 문화재를 설명과 함께 소재파악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책에는 고적 제14(현재 사적 3)라고 수원화성을 소개하고 있으며 방화수류정, 연무대, 팔달문, 장안문, 화서문, 화홍문, 봉돈 등을 소개하고 있다. 그중 봉돈은 허물어진 채로, 장안문은 문 위 누각이 사라진 채로 소개되어 있다. 우연히 길에서 만난 소중한 책 한권. 당분간은 이 책을 보면서 우리문화재에 대한 공부를 해야 할 듯하다. 낡고 더렵혀진 책이지만 나에겐 정말 소중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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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분홍 영산홍, 푸른 수양버들과 어우러진 절경

 

봄이되면 화성 성벽 외곽으로 식재해 놓은 영산홍이 아름답게 꽃을 피운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그 영산홍과 어우러진 화성을 보기위해 일부러 한 바퀴 돌아보고는 한다. 그 중 가장 아름다운 곳은 역시 방화수류정이다.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 151번지에 소재한 보물 제1709호 방화수류정은 화성 네 곳의 보물 중 한 곳이다.

 

방화수류정은 조선 정조 18년인 1794년에 완공되었으며, 화성의 동북각루이다. 방화수류정은 전시를 위해 화성에 축조한 건물이지만 정자의 기능을 함께 갖고 있는 간물로 석재와 목재, 전돌을 사용해 축조하였다. 방화수류정은 송나라 정명도의 시 운담풍경오천(雲淡風經午天), 방화류과전천(訪花隨柳過前川)”에서 따왔으며, 편액은 조윤형(曺允亨1725~1799)의 글씨이다.

 

 

화성은 아름답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화성 가운데도 제일 뛰어난 한 곳을 꼽으라고 한다면 난 주저없이 방화수류정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각 지역마다 제일루라는 누각이 있다. 호남제일루는 남원 광한루요, 영남제일루라고 하면 밀양 영남루를 꼽는다. 관동제일루는 삼척의 죽서루이다.

 

조선조 숙종대왕은 관동팔경 중 한 곳인 울진의 망양정을 '관동제일루'로 칭송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가장 아름다운 누각을 지역마다 제일루(第一樓)라 칭하고 있다. 난 방화수류정을 화성제일루라 부르기를 망설이지 않는다. 그만큼 방화수류정은 아름답기 때문이다. 425일 오후에 찾아간 방화수류정, 영산홍과 어우러진 방화수류정을 보고도 제일루라 칭하지 않는다고 하면 도대체 어느 곳을 제일루라 칭할 것인가?

 

 

군사적 목적으로 꾸민 방화수류정

 

방화수류정은 평면은 자형을 기본으로 하고, 북측과 동측은 형으로 돌출되게 조영하여 사방을 볼 수 있도록 꾸몄다. 조선 정조대왕의 강한 국권을 바탕으로 축성한 수원 화성의 시설물 중 한 곳인 방화수류정은 조선 헌종 14년인 1848년에 중수하였고, 일제강점기 이후 여러 차례 부분적으로 수리를 한 것으로 전해진다.

 

방화수류정이라는 명칭은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닌다'라는 말이다. 독특한 건축미가 돋보이는 방화수류정은 201133일에 보물 제1709호로 지정되었다.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닐기에 적합해 방화수류정이라 했던가? 주변이 온통 희고, 붉은 영산홍에 쌓이고 용연 주변으로는 연두색 잎을 자랑하는 능수버들가지가 늘어졌다.

 

17941019일 완공한 방화수류정은 그 아래 용연과 더불어 화성의 건축물 중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화성의 백미'라고 칭찬을 하는 방화수류정. 방화수류정은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그 형태가 달라 보인다. 어느 방향에서 보든지 절경인 방화수류정은 주변감시를 하고 군사들이 쉬기도 하는 기능을 함께 갖고 있다.

 

 

난 이곳을 화성제일루라 부른다.

 

독특한 평면과 지붕 형태의 특이성 등을 토대로 18세기 뛰어난 건축기술을 보여주는 방화수류정. 평일인데도 방화수류정 누각 위에는 사람들이 모여 봄날의 정취를 마음껏 즐기고 있다. 그 누구라서 이렇게 아름다운 풍광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방화수류정 위에서 바라보는 주변의 경관 또한 일품이다.

 

이 계절이 되면 화성을 돌아보면서 방화수류정 앞에 도달하면 가슴이 뛴다. 올해는 또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으로 사람의 눈을 현혹할까? 성벽 밑으로는 용연을 마련하고 주변에 나무를 심어 운치를 더한 방화수류정, 옆으로 흐르는 내 위에 화홍문을 세워 그 주변 경관과 함께 아름다움을 도왔다.

 

방화수류정 옆으로 흐르는 수원천을 몇 사람인가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 수원천 산책로를 걷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무엇이 저리 바쁠꼬?”라는 생각을 한다. 저 사람들 눈에는 봄날 방화수류정의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는 것일까? 영산홍과 어우러져 한껏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고 있는 방화수류정. 그 운치를 보고 화성제일루라 스스로 칭한 것에 어깨를 들썩한다. 그 이름이 지금 시기의 방화수류정에 딱 어울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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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선관 날개 사라지고 주병 센서는 작동 안해

 

지동교 옆 팔달문 홍보관 앞에 자리하고 있던 불취무귀(不醉無歸)상이 자리를 옮겼다. 남문시장 남수문 앞 도로가 새롭게 정비를 시작하면서, 그동안 도로공사 정비구역 안에 자리를 하고 있던 불취무귀상 주변에는 각종 공사 잔해물 등이 쌓여있어 볼썽사납더니 20일 오후 자리를 옮긴 것이다.

 

이번에 새로 자리를 옮긴 장소는 팔달문 홍보관 입구에 서 있던 소나무를 옮기고, 그 자리를 정비한 후 자리를 옮긴 것이다. 팔달문 홍보관 앞에는 도로정비를 마친 후 정조대왕의 불취무귀상이 서 있던 자리 옆에 글로벌 명품남문시장을 상징하는 구조물이 들어설 예정이다. 하기에 화성어차의 운행과 전통시장의 혼잡한 통행에 불편을 줄 것을 염려해 자리를 이전한 것이다.

 

그동안 불취무귀상은 여러 가지로 논란의 대상이었다. 우선 불취무귀상이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동쪽이나 남쪽을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데, 그 동안은 딴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설치를 하지 못했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그런 불취무귀상을 어디로 옮길 것인가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했지만 결국 팔달문 홍보관 입구 쪽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익선관 날개 바로 떼어 가

 

정조대왕의 불취무귀상을 조성한 후 바로 문제가 생겼다. 누군가 정조대왕이 쓰고 있는 익선관의 뒤편 매미날개를 잘라간 것이다. 익선관은 매미날개를 단 관모로, 임금이 쓰는 익선관은 매미 날개 한 쌍이 위로 솟게 달려있다. 일반 신하들이 사용하는 관모의 날개는 양 옆으로 뻗고 있다.

 

임금이 쓰는 익선관에 매미날개를 다는 이유는 선비의 갓끈과 같이 늘어진 것을 연상케 하기 때문에 선정을 베풀라는 뜻이며, 매미는 이슬이나 나무의 진을 먹고 살기 때문에 맑음을 의미한다. 또한 매미는 농부가 가꾼 열매나 곡식을 해치지 않아 염치가 있고, 다른 곤충과는 달리 집을 짓지 않으므로 검소하다. 그리고 늦가을이 되면 생을 마감하므로 무엇에 대한 탐이 없어 물러날 때를 알고 있으니 신의가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매미의 오덕(, , , , )을 닮으라는 의미로 익선관의 뒤편에 매미의 날개를 단 것이다. 하지만 이 정조대왕의 익선과 뒤편 매미날개는 불취무귀상을 조성하고 난 뒤 바로 누군가 꺾어 가버렸다는 것이다. 동으로 된 불취무귀상이기 때문에 가져간 것 같다고 팔달문 상인회 담당자는 이야기를 한다.

 

정조대왕이 들고 있는 주병 센서도 고장 나

 

정조대왕의 불취무귀상은 술병을 들고 있다. 정조대왕의 한 말 중 불취무귀(不醉無歸)’, ‘취하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다는 뜻이다. 이 말은 화성을 축성한 정조대왕이 한 말이다. 정조대왕이 수원 화성 축성 기술자들을 모아 놓고 회식하는 자리에서 기술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한 말이다.

 

정조대왕이 화성 축성 기술자들을 모아놓고 한 이 말은 술에 취하라는 뜻이 아니다. 백성을 사랑하는 정조대왕은 술에 취해 집에 돌아가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로, 모두가 태평성세를 누리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 주겠다는 뜻이었다. 그런 불취무귀상에 대왕이 들고 있는 술병은 사람들이 손을 대면 센서가 작동해 그 앞에 놓인 잔에 물이 흘러 차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센서가 작동을 하지 않아 그냥 술병과 술잔을 늘어놓은 의미없는 상으로 변해버렸다. 이번에 자리를 옮긴 정조대왕의 불취무귀상. 익선관의 매미날개와 술병의 센서를 보수했으면 하는 생각이다. 정조대왕의 백성을 사랑하는 의미가 더 이상 퇴색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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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의 침입을 막기위해 쌓은 면천읍성

성(城)을 쌓는 형태는 일반적으로 세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는 산성(山城)이다. 산의 봉우리를 감싸고 있는 산성은 적과의 전투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산 위쪽에 축성하는 성으로 우리나라에는 많은 산성이 소재한다.

 

둘째는 평산성(平山城)이다. 평산성은 산과 평지에 연이어져 있는 성을 말한다. 사적 제3호인 수원 화성은 대표적인 평산성이다. 그리고 셋째는 읍성(邑城)이다. 읍성은 고을의 평지에 쌓는 성으로 읍치나 적의 방비를 위한 성이다. 이렇게 각기 특징있게 쌓은 성들은 그 성들이 자리하고 있는 곳의 행정이나 지역의 방어 등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지난 4일 당진시와 보령시를 답사하면서 가장 먼저 들린 곳은 면천읍성이다. 4일 오후 보령 대천해수욕장을 찾아가다가 들린 면천읍성.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군자길 3 일원에 소재한 면천읍성은 충청남도 기념물 제9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세종 21년인 1439년 11월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성이다.

 

이 면천읍성을 꼭 들려보아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면천읍성이 1794년에 축성을 시작하여 1796년에 완성한 세계문화유산이요 사적 제3호인 수원화성과 무엇이 다른 점인가를 알아보기 위함이다. 수원화성보다 357년이나 앞서 쌓은 면천읍성과 수원화성이 얼마나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까? 하기에 면천읍성 중에서 최근에 복원한 읍성 남문을 택했다.

 

 

수원화성은 강한 국권의 상징

 

사적 제3호, 그리고 세계문화유산. 사적 안에 또 4기의 보물(팔달문, 화서문, 서북공심돈, 방화수류정)을 간직한 곳, 화성은 서쪽으로는 팔달산을 끼고, 동쪽으로는 낮은 구릉의 평지를 따라 쌓은 평산성이다. 정조는 그의 아버지 장헌세자(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에서 화성으로 수도를 옮길 계획을 세우고, 정조 18년인 1794년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1796년에 완성하였다.

 

실학자인 유형원과 정약용이 성을 설계하고, 거중기 등의 신기재를 이용하여 과학적이고 실용적으로 쌓은 성이 바로 화성이다. 화성은 다른 성곽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동문인 창룡문, 북문인 장안문, 서문인 화서문, 남문인 팔달문의 4대문을 비롯한 각종 방어시설들과 조선에서 가장 무예가 뛰어난 장용외영의 군사들이 주둔하고 있는 돌과 벽돌을 혼합해 쌓은 난공불락의 성이다.

 

이 화성을 매일 바라보면서 살아온 나로서는 면천읍성이 궁금할 수밖에 없다. 성을 잘 안다는 지인에게서 “면천읍성을 찾아가면 화성의 원형을 보는 듯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하기에 일부러 답사 여정을 당진시 면천을 거쳐 보령시를 찾아가는 길목을 택했다. 당진시는 2009년부터 면천읍성 복원사업을 시작해 2014년에 남문지와 원기루 등을 완공하였다고 한다.

 

화성의 옛 모습을 면천읍성에서 그려내다

 

수원화성은 규장각 문신인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1793년에 저술한 <성화주략>을 지침서로 하여 축성하였다.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하여 1796년 9월에 완공을 하였다. 화성의 모든 것은 <화성성역의궤>에 낱낱이 기록하고 있다.

 

세계문화유산이자 사적 제3호인 수원 화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다.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砲)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이 있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6개 시설물(남공심돈, 남암문,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42개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다.

 

 

4일 찾아간 면천읍성은 현재 성벽의 둘레가 1,336m인데 성을 쌓을 당시 치성과 옹성을 합하면 전체길이 1,564m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면천읍성은 현재 옹성 1개소, 문지 4개소를 비롯하여 치성 3개소가 확인되었으나, 원래 치성이 7개소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남문 옆으로는 수로가 나 있다.

 

면천읍성의 남문은 옹성형태로 되어있다. 남문인 원기루 앞으로 옹성을 쌓아 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옹성은 한편을 터놓았으며 성문을 깨기 위해 문 앞으로 몰려든 적을 섬멸하는 기능을 갖고 있는 방어책이다. 수원화성은 4대문에 모두 옹성이 설치되어 있으며, 장안문(북문)과 팔달문(남문)은 중앙에 문을 내고 양편에 적대를 설치하였다.

 

그와는 달리 창룡문(동문)과 화서문(서문)은 면천읍성의 남문과 같이 한편을 터놓았다. 하지만 그 안으로 공성무기를 끌고 들어와 성문을 깨야하는데, 그것은 불가능하다. 옹성 안이 좁아 그 안에서 공성무기에 힘을 더할 수 없으며, 옹성 위에 있는 병사들의 공격으로 옹성 안에 들어간 적들은 몰살당하기 십상 때문이다.

 

벌써 다녀온 지 보름이 지났지만 아직도 면천읍성 남문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올해는 가급적이면 더 많은 시간을 내어 그동안 보고 싶었던 문화재들을 찾아보아야겠다. 문화재란 늘 보듬고 바라다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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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동 문화재보호구역 정리 시 화성 돌 찾아야

 

지동시장 주차장 위로부터 창룡문 일대까지가 문화재보호구역으로 고지가 되었다. 2013년 문화재청은 4월에 관보에 문화재법 제27조 및 제34조 규정에 따라, 수원시 팔달구 지동 270-66번지 등 167필지 13,520를 사적 제3수원 화성의 보호구역으로 추가 지정하는 사항을, 같은 법 시행령 제11조 제4항의 규정에 따라 예고했었다.

 

공고안대로 문화재청이 지동 일대를 사적 보호구역으로 정하고 정비를 하게 되는 곳은, 동삼치를 조금 지나 창룡대로(지동에서 창룡문 방향으로)의 좌측 도로 인접부분부터, 성곽까지 일대가 헐리게 된 것이다. 2015년부터 화성사업소는 이 일대의 건물들을 매입하고 주민들이 떠난 공가 등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현재는 2차년도 사업을 시행중이며 앞으로 순차적으로 문화재보호구역 안에 가옥들의 매입을 마치게 되면 바로 중장비를 동원하여 철거를 하게 된다. 이 곳은 화성 성곽으로부터 경사가 진 곳으로 대개의 집들은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주거지를 축조한 가옥들이다. 보존지역을 정비하면서 창룡문로 평지를 뺀 남은 가옥들은 대부분 축대가 남아있다.

 

 

화성 성 돌로 보이는 돌들 찾아내야

 

문제는 이 문화재보호구역 안에 거주공간에 쌓아놓은 축대들이다. 거주공간을 정리하고 남은 축대에는 화성 성 돌과 같은 색을 띠고 있는 돌들이 보인다는 점이다. 과거 이 지역에 집을 지을 때 수원 화성의 성 돌을 빼다가 주추며 축대를 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곳에 축대를 쌓고 집을 지은 사람들 대부분이 지역 원주민이기 보다는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비용절감을 위해서 화성의 돌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전에 이 동네 집을 새로 지을 때 성 돌을 빼다가 축대를 쌓은 집들이 많았다고 해요. 이번에 문화재 보존구역을 정리할 때 화성의 성 돌을 한 곳으로 보아 보존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 돌은 그냥 돌이 아니고 정조대왕의 정신이 깃든 돌이잖아요

 

언젠가 이곳이 문화재보존구역으로 고지가 되고난 후 만난 지역 관계자 한 사람은 화성의 성 돌을 빼다가 축대를 쌓은 것은 이곳 일대를 정비할 때 한 곳으로 모아 보존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 화성은 정조대왕의 강한 국권을 상징하는 성이기 때문에 그 성 돌의 의미가 남다르다는 것이다.

 

만약 이 돌들을 그냥 묻어버린다거나 혹은 이곳 돌들을 딴 곳으로 옮긴다고 하면 안될 것 같아요. 축대로 사용된 돌을 하나하나 조사를 해야 할 것 같아요. 220년 전 정조대왕이 화성을 축성할 때 그 의미를 생각한다면 말이죠. 그 성 돌들이 그냥 한꺼번에 어디로 사라진다고 하면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의 일부가 사라지는 것이잖아요

 

 

문화재보존구역 한 편에 화성 석재 모았으면

 

지난해부터 문화재보존구역으로 거주민이 떠난 집들을 차례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집이 헐린 자리에는 남은 축대 등이 보인다. 그 중에는 색이 다른 돌들도 있다. 얼핏 보아도 화성의 성 돌과 같은 색을 띠우고 있다. 축대 군데군데 끼어있는 색다른 돌. 모두가 화성의 성 돌이 아니라고 해도 일일이 점검은 해보아야 한다.

 

지역에 거주하고 계신 어른들도 예전에 이곳으로 사람들이 들어와 집을 짓고 축대를 쌓을 때 화성의 돌을 많이 갖다 사용했다는 말을 했다. 당시는 문화재에 개념도 없을뿐더러 수원화성이 문화재 지정이 되기 이전이고, 지금과 같이 문화재관리도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문화재보존구역으로 고지를 하고나서 주민들이 떠난 자리. 그 자리에 남아있는 축대 등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렇게 남아있는 축대 등을 조사해 화성의 성 돌이 있다면 그 돌들을 한 곳에 모아두어야 하지 않을까? 그 역시 문화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조대왕의 뜻이 그 돌 하나하나에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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