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선관 날개 사라지고 주병 센서는 작동 안해

 

지동교 옆 팔달문 홍보관 앞에 자리하고 있던 불취무귀(不醉無歸)상이 자리를 옮겼다. 남문시장 남수문 앞 도로가 새롭게 정비를 시작하면서, 그동안 도로공사 정비구역 안에 자리를 하고 있던 불취무귀상 주변에는 각종 공사 잔해물 등이 쌓여있어 볼썽사납더니 20일 오후 자리를 옮긴 것이다.

 

이번에 새로 자리를 옮긴 장소는 팔달문 홍보관 입구에 서 있던 소나무를 옮기고, 그 자리를 정비한 후 자리를 옮긴 것이다. 팔달문 홍보관 앞에는 도로정비를 마친 후 정조대왕의 불취무귀상이 서 있던 자리 옆에 글로벌 명품남문시장을 상징하는 구조물이 들어설 예정이다. 하기에 화성어차의 운행과 전통시장의 혼잡한 통행에 불편을 줄 것을 염려해 자리를 이전한 것이다.

 

그동안 불취무귀상은 여러 가지로 논란의 대상이었다. 우선 불취무귀상이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동쪽이나 남쪽을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데, 그 동안은 딴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설치를 하지 못했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그런 불취무귀상을 어디로 옮길 것인가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했지만 결국 팔달문 홍보관 입구 쪽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익선관 날개 바로 떼어 가

 

정조대왕의 불취무귀상을 조성한 후 바로 문제가 생겼다. 누군가 정조대왕이 쓰고 있는 익선관의 뒤편 매미날개를 잘라간 것이다. 익선관은 매미날개를 단 관모로, 임금이 쓰는 익선관은 매미 날개 한 쌍이 위로 솟게 달려있다. 일반 신하들이 사용하는 관모의 날개는 양 옆으로 뻗고 있다.

 

임금이 쓰는 익선관에 매미날개를 다는 이유는 선비의 갓끈과 같이 늘어진 것을 연상케 하기 때문에 선정을 베풀라는 뜻이며, 매미는 이슬이나 나무의 진을 먹고 살기 때문에 맑음을 의미한다. 또한 매미는 농부가 가꾼 열매나 곡식을 해치지 않아 염치가 있고, 다른 곤충과는 달리 집을 짓지 않으므로 검소하다. 그리고 늦가을이 되면 생을 마감하므로 무엇에 대한 탐이 없어 물러날 때를 알고 있으니 신의가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매미의 오덕(, , , , )을 닮으라는 의미로 익선관의 뒤편에 매미의 날개를 단 것이다. 하지만 이 정조대왕의 익선과 뒤편 매미날개는 불취무귀상을 조성하고 난 뒤 바로 누군가 꺾어 가버렸다는 것이다. 동으로 된 불취무귀상이기 때문에 가져간 것 같다고 팔달문 상인회 담당자는 이야기를 한다.

 

정조대왕이 들고 있는 주병 센서도 고장 나

 

정조대왕의 불취무귀상은 술병을 들고 있다. 정조대왕의 한 말 중 불취무귀(不醉無歸)’, ‘취하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다는 뜻이다. 이 말은 화성을 축성한 정조대왕이 한 말이다. 정조대왕이 수원 화성 축성 기술자들을 모아 놓고 회식하는 자리에서 기술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한 말이다.

 

정조대왕이 화성 축성 기술자들을 모아놓고 한 이 말은 술에 취하라는 뜻이 아니다. 백성을 사랑하는 정조대왕은 술에 취해 집에 돌아가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로, 모두가 태평성세를 누리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 주겠다는 뜻이었다. 그런 불취무귀상에 대왕이 들고 있는 술병은 사람들이 손을 대면 센서가 작동해 그 앞에 놓인 잔에 물이 흘러 차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센서가 작동을 하지 않아 그냥 술병과 술잔을 늘어놓은 의미없는 상으로 변해버렸다. 이번에 자리를 옮긴 정조대왕의 불취무귀상. 익선관의 매미날개와 술병의 센서를 보수했으면 하는 생각이다. 정조대왕의 백성을 사랑하는 의미가 더 이상 퇴색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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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의 침입을 막기위해 쌓은 면천읍성

성(城)을 쌓는 형태는 일반적으로 세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는 산성(山城)이다. 산의 봉우리를 감싸고 있는 산성은 적과의 전투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산 위쪽에 축성하는 성으로 우리나라에는 많은 산성이 소재한다.

 

둘째는 평산성(平山城)이다. 평산성은 산과 평지에 연이어져 있는 성을 말한다. 사적 제3호인 수원 화성은 대표적인 평산성이다. 그리고 셋째는 읍성(邑城)이다. 읍성은 고을의 평지에 쌓는 성으로 읍치나 적의 방비를 위한 성이다. 이렇게 각기 특징있게 쌓은 성들은 그 성들이 자리하고 있는 곳의 행정이나 지역의 방어 등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지난 4일 당진시와 보령시를 답사하면서 가장 먼저 들린 곳은 면천읍성이다. 4일 오후 보령 대천해수욕장을 찾아가다가 들린 면천읍성.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군자길 3 일원에 소재한 면천읍성은 충청남도 기념물 제9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세종 21년인 1439년 11월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성이다.

 

이 면천읍성을 꼭 들려보아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면천읍성이 1794년에 축성을 시작하여 1796년에 완성한 세계문화유산이요 사적 제3호인 수원화성과 무엇이 다른 점인가를 알아보기 위함이다. 수원화성보다 357년이나 앞서 쌓은 면천읍성과 수원화성이 얼마나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까? 하기에 면천읍성 중에서 최근에 복원한 읍성 남문을 택했다.

 

 

수원화성은 강한 국권의 상징

 

사적 제3호, 그리고 세계문화유산. 사적 안에 또 4기의 보물(팔달문, 화서문, 서북공심돈, 방화수류정)을 간직한 곳, 화성은 서쪽으로는 팔달산을 끼고, 동쪽으로는 낮은 구릉의 평지를 따라 쌓은 평산성이다. 정조는 그의 아버지 장헌세자(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에서 화성으로 수도를 옮길 계획을 세우고, 정조 18년인 1794년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1796년에 완성하였다.

 

실학자인 유형원과 정약용이 성을 설계하고, 거중기 등의 신기재를 이용하여 과학적이고 실용적으로 쌓은 성이 바로 화성이다. 화성은 다른 성곽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동문인 창룡문, 북문인 장안문, 서문인 화서문, 남문인 팔달문의 4대문을 비롯한 각종 방어시설들과 조선에서 가장 무예가 뛰어난 장용외영의 군사들이 주둔하고 있는 돌과 벽돌을 혼합해 쌓은 난공불락의 성이다.

 

이 화성을 매일 바라보면서 살아온 나로서는 면천읍성이 궁금할 수밖에 없다. 성을 잘 안다는 지인에게서 “면천읍성을 찾아가면 화성의 원형을 보는 듯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하기에 일부러 답사 여정을 당진시 면천을 거쳐 보령시를 찾아가는 길목을 택했다. 당진시는 2009년부터 면천읍성 복원사업을 시작해 2014년에 남문지와 원기루 등을 완공하였다고 한다.

 

화성의 옛 모습을 면천읍성에서 그려내다

 

수원화성은 규장각 문신인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1793년에 저술한 <성화주략>을 지침서로 하여 축성하였다.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하여 1796년 9월에 완공을 하였다. 화성의 모든 것은 <화성성역의궤>에 낱낱이 기록하고 있다.

 

세계문화유산이자 사적 제3호인 수원 화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다.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砲)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이 있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6개 시설물(남공심돈, 남암문,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42개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다.

 

 

4일 찾아간 면천읍성은 현재 성벽의 둘레가 1,336m인데 성을 쌓을 당시 치성과 옹성을 합하면 전체길이 1,564m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면천읍성은 현재 옹성 1개소, 문지 4개소를 비롯하여 치성 3개소가 확인되었으나, 원래 치성이 7개소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남문 옆으로는 수로가 나 있다.

 

면천읍성의 남문은 옹성형태로 되어있다. 남문인 원기루 앞으로 옹성을 쌓아 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옹성은 한편을 터놓았으며 성문을 깨기 위해 문 앞으로 몰려든 적을 섬멸하는 기능을 갖고 있는 방어책이다. 수원화성은 4대문에 모두 옹성이 설치되어 있으며, 장안문(북문)과 팔달문(남문)은 중앙에 문을 내고 양편에 적대를 설치하였다.

 

그와는 달리 창룡문(동문)과 화서문(서문)은 면천읍성의 남문과 같이 한편을 터놓았다. 하지만 그 안으로 공성무기를 끌고 들어와 성문을 깨야하는데, 그것은 불가능하다. 옹성 안이 좁아 그 안에서 공성무기에 힘을 더할 수 없으며, 옹성 위에 있는 병사들의 공격으로 옹성 안에 들어간 적들은 몰살당하기 십상 때문이다.

 

벌써 다녀온 지 보름이 지났지만 아직도 면천읍성 남문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올해는 가급적이면 더 많은 시간을 내어 그동안 보고 싶었던 문화재들을 찾아보아야겠다. 문화재란 늘 보듬고 바라다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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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동 문화재보호구역 정리 시 화성 돌 찾아야

 

지동시장 주차장 위로부터 창룡문 일대까지가 문화재보호구역으로 고지가 되었다. 2013년 문화재청은 4월에 관보에 문화재법 제27조 및 제34조 규정에 따라, 수원시 팔달구 지동 270-66번지 등 167필지 13,520를 사적 제3수원 화성의 보호구역으로 추가 지정하는 사항을, 같은 법 시행령 제11조 제4항의 규정에 따라 예고했었다.

 

공고안대로 문화재청이 지동 일대를 사적 보호구역으로 정하고 정비를 하게 되는 곳은, 동삼치를 조금 지나 창룡대로(지동에서 창룡문 방향으로)의 좌측 도로 인접부분부터, 성곽까지 일대가 헐리게 된 것이다. 2015년부터 화성사업소는 이 일대의 건물들을 매입하고 주민들이 떠난 공가 등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현재는 2차년도 사업을 시행중이며 앞으로 순차적으로 문화재보호구역 안에 가옥들의 매입을 마치게 되면 바로 중장비를 동원하여 철거를 하게 된다. 이 곳은 화성 성곽으로부터 경사가 진 곳으로 대개의 집들은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주거지를 축조한 가옥들이다. 보존지역을 정비하면서 창룡문로 평지를 뺀 남은 가옥들은 대부분 축대가 남아있다.

 

 

화성 성 돌로 보이는 돌들 찾아내야

 

문제는 이 문화재보호구역 안에 거주공간에 쌓아놓은 축대들이다. 거주공간을 정리하고 남은 축대에는 화성 성 돌과 같은 색을 띠고 있는 돌들이 보인다는 점이다. 과거 이 지역에 집을 지을 때 수원 화성의 성 돌을 빼다가 주추며 축대를 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곳에 축대를 쌓고 집을 지은 사람들 대부분이 지역 원주민이기 보다는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비용절감을 위해서 화성의 돌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전에 이 동네 집을 새로 지을 때 성 돌을 빼다가 축대를 쌓은 집들이 많았다고 해요. 이번에 문화재 보존구역을 정리할 때 화성의 성 돌을 한 곳으로 보아 보존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 돌은 그냥 돌이 아니고 정조대왕의 정신이 깃든 돌이잖아요

 

언젠가 이곳이 문화재보존구역으로 고지가 되고난 후 만난 지역 관계자 한 사람은 화성의 성 돌을 빼다가 축대를 쌓은 것은 이곳 일대를 정비할 때 한 곳으로 모아 보존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 화성은 정조대왕의 강한 국권을 상징하는 성이기 때문에 그 성 돌의 의미가 남다르다는 것이다.

 

만약 이 돌들을 그냥 묻어버린다거나 혹은 이곳 돌들을 딴 곳으로 옮긴다고 하면 안될 것 같아요. 축대로 사용된 돌을 하나하나 조사를 해야 할 것 같아요. 220년 전 정조대왕이 화성을 축성할 때 그 의미를 생각한다면 말이죠. 그 성 돌들이 그냥 한꺼번에 어디로 사라진다고 하면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의 일부가 사라지는 것이잖아요

 

 

문화재보존구역 한 편에 화성 석재 모았으면

 

지난해부터 문화재보존구역으로 거주민이 떠난 집들을 차례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집이 헐린 자리에는 남은 축대 등이 보인다. 그 중에는 색이 다른 돌들도 있다. 얼핏 보아도 화성의 성 돌과 같은 색을 띠우고 있다. 축대 군데군데 끼어있는 색다른 돌. 모두가 화성의 성 돌이 아니라고 해도 일일이 점검은 해보아야 한다.

 

지역에 거주하고 계신 어른들도 예전에 이곳으로 사람들이 들어와 집을 짓고 축대를 쌓을 때 화성의 돌을 많이 갖다 사용했다는 말을 했다. 당시는 문화재에 개념도 없을뿐더러 수원화성이 문화재 지정이 되기 이전이고, 지금과 같이 문화재관리도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문화재보존구역으로 고지를 하고나서 주민들이 떠난 자리. 그 자리에 남아있는 축대 등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렇게 남아있는 축대 등을 조사해 화성의 성 돌이 있다면 그 돌들을 한 곳에 모아두어야 하지 않을까? 그 역시 문화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조대왕의 뜻이 그 돌 하나하나에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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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 남포 최치원 유적과 성주사지를 향유

 

보령시 남포면 월전리 813-8에 소재한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45호 최고운 유적. 고운은 최치원을 일컫는 말이다. 벌써 대천을 다녀온 지 10일이 훌쩍 지났다. 요즈음은 여행을 다녀오고 나면, 자료 정리를 하는 데만 며칠이 걸리고는 한다. 자료정리를 하고나면 바로 글을 써야하는데 이젠 옛날 같지 않아 마음이 그렇게 바쁘지 않다. 이것도 나이가 먹은 탓이려니 하지만, 스스로가 생각해도 게으름을 떨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보령(대천) 여행을 하면서 첫날 찾아간 곳이 바로 남포면에 소재한 최고운 유적이다. 이곳은 보리섬이라고 하는 백도였다고 한다. 1995년 님포방조제를 건설하고 난 후 육지와 연결된 이곳은 통일신라 말기 최치원이 선유한 곳이라고 전해진다. 최치원(857~ ?)은 당에 유학을 하고 돌아왔지만 신분제약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관직에 미련을 버리고 전국을 유람하였는데 경치가 아름다운 이곳을 선유했다고 한다.

 

 

보리섬은 지금은 육지와 연결이 되어있지만 과거에는 백도라고 하는 섬이었다고 한다. 현재는 백도 전체가 육지와 연결이 되어 포구가 없다면 섬이라는 느낌도 들지 않을 정도이다. 보리섬은 작은 산봉우리가 솟아있고 병풍처럼 둘러쳐진 바위가 있다. 예전 물이 이곳에 들어왔다고 하면 절경 중 절경이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써서 이름을 날렸다는 최치원이 쓴 한시가 암벽에 적혀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석양 무렵 찾아간 보리섬. 3월의 꽃샘바람이 부는 날 찾아간 보리섬은 최치원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대신 북녘을 향하는 철새무리들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최치원은 이곳 보리섬과 성주면 성주사지를 왕래했다고 하는데 그 옛날 어떻게 그 먼 길을 다녔을까?

 

 

성주사지를 돌아보다.

 

전하는 말에는 최치원이 보리섬과 성주사지를 왕래하면서 향유했다고 전한다. 이튿날 아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2 외에 소재한 사적 제307호 성주사지를 찾았다. 성주사지는 신라시대의 절로 신라시대 낭혜화상이 다시 세운 선종사찰이다. 그동안 상주사지를 몇 번이고 답사를 했지만 최치원이 이곳을 다니면서 선유했다는 말에 너른 사지가 새롭게 보인다.

 

“최치원은 보리섬에서 이곳까지 어떻게 이동을 한 것일까?” 차로 이동을 해도 족히 20분은 걸리는 길이다. 이곳을 최치원은 무엇을 이용해 다닌 것일까? 성주사지는 백제 법왕 때에 처음 세워진 절로 당시는 오합사(烏合寺)였다. 통일신라 때는 선문구산 중 하나인 성주사는 1금당 1탑식으로 세워진 절이다.

 

성주사는 당시에도 외곽은 돌담을 쌓아 경계를 삼았으며, 넓이는 8,800평이나 되는 너른 경내를 갖고 있는 절이었다. 현재 성주사지에는 국보 제8호인 낭혜화상탑비가 서 있으며 이 탑비는 신라 진성여왕 2년인 890년에 세운 것으로 낭혜화상이 세상을 떠난 지 2년 뒤에 세운 것이다.

 

현재 4기의 탑과 석등 등이 전하는 성주사지

 

3월 5일 찾아간 성주사지. 예전에는 주차장에서 사지로 들어가는 돌담이 트인 곳이 있었으니 돌담을 막아놓았다. 아마도 예전 성주사지의 돌담을 재현하느라 터진 곳을 막은 것으로 보인다. 현재 상주사지에는 국보 제8호인 낭혜화상탑비를 비롯하여 보물 제47호 서삼층석탑, 보물 제20호 중앙탑,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6호 동삼층석탑 등이 서 있다. 이 3기의 석탑은 모두 다른 곳에서 옮겨 온 것으로 밝혀졌다.

 

3기의 석탑 앞으로는 신라시대에 조성한 금당으로 오르는 돌계단이 있다. 이 돌계단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재140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계단 양편에 돌사자를 조각하여 세웠다. 하지만 이 사자상은 1986년 도난당하고 현재 것은 사진을 기초로 복원한 것이다. 금당터 앞에는 보물 제19호 보령 성주사지 오층석탑이 서 있다. 이 오층석탑은 성주사의 불탑으로 조성된 것이다.

 

오층석탑 앞에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3호인 성주사지 석등이 서있다. 통일신라 말기에 세운 이 석등은 파괴되었던 것을 근래 수습한 것이다. 이 외에도 성주사지에는 미륵불 한 기가 서 있으며 그동안 발굴조사에서 발견 된 삼천불전지 기단석 해체부지와 낭헤화상탑비 옆에 놓인 와편과 석물 등이 있다.

 

최치원은 이 먼 거리를 어떻게 다닌 것일까?

 

성주사는 본래 백제 법왕이 왕자 시절인 599년에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지은 절이라고 한다. 당시 이름은 오합사(烏合寺)라고 불렀다는데, 오합사 이야기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에도 언급하고 있고, 발굴조사 때 나온 기와 명문에도 오합사 글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

 

성주사는 임진왜란 때 전부 소실이 되었으며 오늘날 폐사지만 남아있다. 8,800여 평에 달하는 넓고 평평한 성주사 터에는 금당 터 앞에 5층 석탑과 석등이 남아있다. 사지 뒤편 중앙에 남아있는 낭혜화상탑비 하나만으로도 이 성주사지의 중요성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낭혜화상 무염은 신라 29대 태종무열왕의 8대손으로 성은 김씨, 호는 무량, 혹은 무주이다.

 

최치원은 성주사지에 소재한 낭혜화상백월광탑비문(朗慧和尙白月光塔碑文)을 지었다. 아마 보리섬에서 이곳 성주사지를 왕래하며 풍광을 즐겼다고 전하는 이야기도, 이 비문을 짓기 위해 성주사를 찾았음을 뜻한다. 이곳 성주사에서 보리섬의 풍광을 즐기기 위해 먼 길을 다녔을 최치원, 당시 이곳의 풍광이 얼마나 아름다웠기에 그 먼 길을 다녔던 것일까?

 

지금은 육지가 되어 옛 풍광을 찾아볼 수 없지만 현재 남아있는 병풍과 같은 바위만 보아도 당시의 모습을 조금은 유추해 볼 수 있다. 봄바람이 불고 꽃이 피는 계절이 되면 시간을 내어 이 보리섬에서 성주사까지 최치원이 걸었던 길을 찾아 걸어보고 싶다. 그 가운데 또 다른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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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여행에서 만난 엣 읍성지

 

날이 풀리면서 진작 떠나고 싶었던 여행길을 재촉했다. 이번 여행은 3일과 412일로 충청남도 보령시를 돌아보기 위한 여정이다. 주말 아침 이른 시간에 수원을 출발해 오후 1시가 넘어 도착한 당진 면천읍성. 제대로 갔으면 더 이른 시간에 도착했겠지만 가는 길에 광천전통시장을 돌아보느라 예정시간보다 늦었다.

 

면천읍성은 충청남도 기념물 제91호로 당진군 면천면 군자길 3 일원에 소재한다. 면천읍성은 세종 21년인 143911월에 왜구의 침입을 막기위해 쌓은 평지읍성이다. 성은 산성과, 평산성, 읍성 등으로 구분을 짓는데 면천읍성은 평지읍성이다.

 

조선후기까지 면천의 군사 및 행정의 중심지였던 면천읍성은 성벽은 자연석을 다듬어 쌓았으며 외부는 돌로, 내부는 돌을 채운 후 흙으로 덮어 쌓았다. 현재 성벽의 둘레는 1,336m인데 성을 쌓을 당시에는 치성과 옹성을 합해 1,564m정도로 추정한다. 현재 면천읍성은 옹성 1개소, 문지 4개소를 포함하여 치성 3개소가 확인되었으나 원래 치성은 모두 7개소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최근 복원된 듯한 읍성의 남문

 

면천읍성을 꼭 들려보고 싶었던 것은 이 읍성의 복원된 남문을 보기 위함이다. 수원의 화성과 같은 형태로 축성된 남문은 옹성을 쌓고 한편을 터놓은 것이 마치 화성의 창룡문이나 화서문에서 보이는 듯한 축성방법을 택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산재한 많은 성을 돌아보면서 비교하는 것은 화성과 얼마나 같은지, 혹 다른지를 알아보기 때문이다.

 

면천읍성의 남문은 옹성을 쌓아 왜구의 공성무기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도록 하였으며, 남문 옆에는 상에서 밖으로 물이 흘러나가는 수로가 있다. 면천읍성은 18세기 이후 성의 기능을 상실한 성으로 누각은 다 부수어지고 옹성을 따라 집을 지었던 것을, 2009년 이후 면천읍성 정비사업으로 남문의 누각인 원기루 등을 복원하여 2014년에 완료한 것이다.

 

복원한 면천읍성의 남문을 돌아본다. 남문 안으로는 바로 집들이 들어차 있으며 성을 복원한 양편으로도 밭과 집들이 놓여 있다. 원기루를 비롯한 남문은 비교적 옛 형태를 따라 복원을 마쳤으며 옹성과 읍성 위에 여장도 옛 형태를 따랐다고 한다. 우리 수원 화성과는 견줄 바가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성의 일부분이 복원되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할 따름이다.

 

 

보령성곽을 돌아보다

 

보령은 현 보령시 주포면 일대의 명칭이다. 이곳은 보령성곽과 보령향교 등이 소재한 것으로 보아 조선조 때는 이곳이 보령시의 중심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 충남 문화재자료 제146호인 보령성곽은 고려 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쌓은 봉당성(혹은 고남산성)이 자리한 곳에서, 동쪽으로 400m 정도 떨어진 곳에 세종 12년인 1430년 이미 있던 성을 보강하여 새로 쌓은 성이다.

 

보령성곽은 현재 임진왜란과 한말 의병전쟁 등을 거치면서 모두 파손되고 남문인 해산루 옆으로 남쪽 성벽 70m와 북쪽 성벽 360m, 한 개소의 치성 등이 남아있다. 원래 보령성은 길이 630m에 높이 3.5m, 적대 8개소와 문루 3개소, 우물 3개소 등이 있었다고 한다.

 

 

여행길에 만난 성을 돌아보면서 항상 감사하다고 느끼는 것은 수원 화성과 같은 성을 보지 못한다는 점이다. 잘 다듬어진 돌로 쌓은 화성, 그 위에 수많은 구조물 등이 남아있는 화성을 돌아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다. 문화재는 그 안에 내포된 사고가 있다. 어느 성이 되었거나 그 곳의 역사와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점으로 볼 때 우리는 화성이라는 세계문화유산을 갖고 있지만 정작 그 소중함에 대해서 잘 모르는 듯하다. 전국 곳곳에 산재한 성을 돌아보면 화성이 얼마나 대단한 성인가를 알 수 있다. 화성을 온전히 보존한다는 것은 그래서 더 필요한 것이다. 여행길에서 만난 당진 면천읍성과 보령 주포면의 보령성곽. 올해는 시간이 날 때마다 전국의 성을 돌아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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