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정리된 능침,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힐링

 

가을은 남성의 계절이라고 했던가? 적어도 나에게 가을이란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다. 늘 답사를 다니는 나로서는 그 이상의 계절이라는 의미는 무의미하다. 다만 많이 걸어도 땀이 덜 흐른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가을은 바람직한 계절이다. 그런 계절을 이용하지 않는다면 나만 손해라는 생각이다.

 

매주 목요일마다 돌아보는 인근지역 답사. 얼마 안 있으면 수원화성문화재도 열리고, 정조대왕의 능행차가 서울서부터 시흥, 수원, 화성까지 이어지며 전 구간에서 시연된다고 한다. 정조대왕과 사도세자의 능까지 이어질 능행치 생각에 가까운 곳에 소재한 사적 제195호인 효종대왕능을 찾았다. 효종대왕능은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에 소재한 세종대왕능인 영능(英陵) 옆에 자리하고 있다. 세종대왕능은 세종대왕과 소현왕후의 합장능이고 영능(寧陵)은 제17대 효종과 그 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능이다.

 

 

벌써 한 이태는 지났을 듯하다. 여주에 잠시 거주하고 있을 때는 오가는 길에 늘 들렸던 곳이다. 2년 만에 찾아간 효종대왕능도 주변이 변했다. 재실 바로 앞에 있던 주차장이 멀찌감치 떨어져 나왔고, 앞에는 매표소가 자리하고 있다. 좁던 주차장도 여러 대의 차를 주차할 수 있도록 공간을 넓혔다.

 

그동안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입장료만 해도 상당한 금액을 지출했다. 대개의 문화재가 입장료를 받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경노우대라고 하여 웬만한 곳은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돈을 내지 않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나도 나이를 먹었다는 점이 괜히 씁쓸해진다. 아직도 돌아볼 곳이 지천이기 때문이다.

 

 

보물로 지정된 효종대왕능 재실

 

효종대왕능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 바로 재실이다. 효종대왕능의 재실은 보물 153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일제치하와 6,25 한국동란을 거치면서 많은 능의 재실들이 소실되기도 했는데 효종대왕능의 재실은 원형 그대로를 보관하고 있는 곳이다. 이곳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다. 재실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전각에서 보이는 담장 밖 굴뚝이 효종대왕능 재실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유는 바로 재실 외벽을 심벽으로 조성하고 그 심벽 안으로 연도를 냈기 때문이다. 재실 외벽 곳곳에 기와 몇 장을 포개놓은 곳이 보인다. 이 기와가 바로 굴뚝 역할을 하는 것이다. 능침 어디를 보아도 이런 조성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이 하나 만으로도 사람을 들뜨게 한다.

 

재실 담장 안에는 수백년 묵은 회양목 한 그루가 서있다. 바로 천연기념물 495호로 지정된 회양목이다. 일반적으로 회양목이 거목이 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효종대왕능 재실 회양목은 크기도 크거니와 수령이 이미 300년 이상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 앞에는 보기에도 엄청난 거목들이 담장과 함께 늘어서 있어 전각의 멋을 더하고 있다.

 

 

북벌을 꿈꾼 효종대왕

 

숲이 우거진 길을 따라 능침으로 오르다보면 좌측으로 작은 내를 건너가는 길이 나온다. ‘왕의 숲길이라는 이 길은 세종대왕의 능과 연결이 되는 숲길이다. 그저 타박타박 걸어가면 좋을 이 길은 주변에 물이 흐르고 나무들이 우거져 있다. 숲을 걷는 것 하나만으로도 힐잉이 되는 길이다.

 

앞에 홍살문이 보이고 그 뒤로 정자각과 능침이 보인다. 효종대왕능의 정자각은 최근에 해체보수 하였다. 정자각을 앞에 두고 좌측에는 2006년에 발굴조사 후 복원한 수라간이, 우측에는 수복방이 있다. 그 앞을 보면 참도에 놓인 금천교를 건너게 된다. 효종대왕능의 금천교는 홍살문 안에 자리하고 있어 색다르다. 대개 능원의 금천교들이 홍살문 밖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대군시절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에 볼모로 잡혀가 8년간 생활한 효종대왕. 그곳에서 살면서 효종은 늘 북벌을 마음먹었다. 효종의 북벌의지는 정예화 된 포병 10만명을 길러 기회가 있을 때 오랑캐들을 공격할 것이며 이 일은 10년 안에 추진할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하기에 효종대왕은 재위기간 동안 늘 북벌을 꿈꾸면서 전란으로 피폐해진 민심을 달래는데 노력하였다.

 

효종대왕은 군사훈련을 강화하고 경제적으로는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또한 상평통보를 널리 쓰이게 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효종대왕의 머릿속에는 강한 나라를 만들어 북벌을 하겠다는 의지로 꽉 차 있었다. 하지만 41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북벌의 의지는 계획으로만 남게 되었다.

 

가을초입에 찾아간 여주 효종대왕능. 곳곳에 보수공사를 하느라 조금은 관람에 불편하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보수를 하지 않으면 영원히 못 볼 수도 있는 것이 바로 문화재이다. 잠시의 불편을 참는 것은 우리의 후손들에게 영원히 물려주기 위함이다. 이 가을이 가기 전 더 많은 곳을 돌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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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가 해골의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은 곳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산32번지에는 사적 제217호인 '당성(唐城)'이 자리하고 있다. 이 당성이 소재하고 있는 남양 지역은 신라 경덕왕 때는 '당은군'이라 불린 중국과의 교통 요지였다. 신라 후기에는 이곳에 '당성진'을 설치하여 청해진과 함께 신라 해군의 근거지로 삼은 중요한 곳이었다.

 

당성은 계곡을 둘러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성은 남북으로 기다란 네모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다. 현재 당성은 동문과 남문, 북문 터와 우물터, 건물터가 남아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당성은 현재 발굴 중이다. 10일 오후 찾아간 당성. 입구에서부터 한양대학교 문화재연구소에서 4차 발굴중이라 출입을 통제한다는 가드라인이 쳐져있다.

 

 

당성은 화성 남양반도의 서신, 송산, 마도면의 3개면이 교차되는 중심부 가까이 위치한 구봉산에 자리하고 있다. 동남향으로 경사진 계곡을 이용하여 성루를 돌려 축성을 하였다. 전장이 1.148m 정도가 되는 이 당성은 처음에는 백제의 영역이었다가 한때 고구려의 영토로 당성군이라 불렀다.

 

후일 신라가 이 지역을 점령하게 되자 당항성이라 했다. 바다를 건너 중국과 통하는 길목의 역할을 하던 곳이다. 당성은 그 쌓은 시기를 달리하는 3중의 성벽으로 구성되었다. 처음 이 당성의 성벽은 테뫼식으로 쌓은 토축 산성이며 구봉산에서 봉화산으로 뻗는 남서능선 정상부에 600m의 테뫼식 산성으로 6~8세기 신라유물이 상당수 발견되었다.

 

 

들어갈 수 없는 당성 자료만 훑어보다가 돌아와

 

지난 해 몇 차례 당성을 답사하였기에 당선의 형태는 눈에 선하다. 현재는 발굴을 위해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 당성사적비와 성이 보이는 곳까지 들어가면서 발굴관계기관의 발굴보고서로 대신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동안 몇 번을 돌아본 곳이기 때문에 그 형태를 가늠할 수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문화재란 한 번의 답사로 알 수가 없다. 한곳에 서 있는 유형문화재이지만 항상 새로운 것이 발견되기도 한다. 성곽의 경우 회를 거듭하는 발굴로 인해 새로운 것들이 속속 알려지고 있어 끊임없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 30년 넘는 세월 전국을 스 없이 돌아보면서 문화재를 답사한 나로서는 그 하나하나가 소중하다는 것을 느끼기에 기회만 되면 몇 번이고 다시 찾아가고는 한다.

 

낮에 잠깐 뿌린 비로 숲속은 습하다. 거기다가 땀 냄새를 맡은 산모기까지 달라붙어 사람을 귀찮게 한다. 답사를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역시 사람에게 집요하게 따라붙는 산모기 떼와 각종 벌레들이다. 무더위에 옷으로 감싸고 오르지만 달라붙는 모기떼를 감당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당성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원효

 

원효(617-686)대사는 신라 진평왕 39년인 617년에 압량군 불지촌(현 경산군 압량면 신월동)에서 태어났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가 원효를 잉태할 때 유성이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으며, 그를 낳을 때는 오색의 구름이 땅을 덮었다고 한다. 원효의 아명은 서동이었다.

 

원효대사의 행적 가운데서 각별히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두 차례에 걸쳐 당으로의 유학을 시도했던 원효대사가 스스로 크게 깨닫고 발길을 돌린 일이 그것이다. 원효대사는 45세에 두 번째로 의상대사와 함께 이번에는 해로로 해서 당으로 가기 위해 백제 땅이었던 당항성 아래에 도착하였다. 당항성 아래 항구에 당도했을 때 이미 어둠이 깔리고 갑자기 거친 비바람을 만나 한 땅막에서 자게 되었다.

 

아침에 깨어났을 때 그곳은 땅막이 아닌 옛 무덤 속임을 알았지만 비가 그치지 않아 하룻밤을 더 자게 되었다. 원효대사는 거기서 깨들음을 얻는다. '마음이 일어나면 갖가지 법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땅막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래서 원효는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만법은 오직 인식일 뿐이다. 마음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할 것이 있으랴.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다"하며 다시 서라벌로 발길을 돌렸다. 원효대사의 이 같은 깨달음은 후대 사람들에게 알려진 무덤 속에서 해골을 담긴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원효대사가 깨달음을 얻는 당항성(신라시대의 이름) 인근 당막(=무덤)은 바로 당성 인근 현 신흥사 인근이었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그 일대는 과거 무덤들이 발견된 곳이기 때문이다. 10일 오후 빗방울이 떨어지는 날 찾아간 당성. 그동안 전국의 성 40여 곳을 답사했지만 그 중 기억에 남는 한 곳이다. 언제 기회가 된다면 그동안 돌아본 성을 정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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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소리가 정겨운 수원천을 자랑하는 사람들

 

수원천은 광교산에서 발원한다. 광교산에서 여러 갈래로 내려오는 물줄기를 유도하여 용연(龍淵)의 곁을 지나게 하였다. 화성에는 750보 거리의 남북을 관통하는 수원천(水原川)이 정비되어 있는데, 화성성역 당시에는 대천(大川)이라고 칭하였다. 축성 당시에는 매년 반복되는 범람이 문제였던 수원천을, 정조 18년인 17943월 수원천을 깊이 파는 준천(濬川)작업을 하였다.

 

광교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을 광교대천(光敎大川)’이라고 했는데, 용연을 침범하지 않게 제방을 따라 화홍문으로 들어오는 물길을 대천(大川)’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북수문인 화홍문의 7간 수문으로 유입된 수원천을 너비는 20여 보(23.5m), 깊이는 반장에서 1(1.5m에서 3m) 정도로 정비를 하였다고 하였으니 지금보다 상당히 넓고 깊은 하천이었던 것이다.

 

 

예전 제가 어렸을 때는 수원천에서 목욕도 하고 여름철 피서를 하기도 했죠. 그러나 수원천 복개 후 사람들의 삶이 많이 달라졌어요. 한 마디로 자연을 인위적인 복개라는 것에 빼앗겨 버린 것이죠. 지금은 복원을 시켜 놓았지만 예전 복개 전에 비하면 아직 제대로 된 수원천을 되찾기에는 더 시간이 필요할 듯합니다

 

201610월 지동교에서 열린 수원천 복원 관련 사진전을 보고 있던 김아무개(, 당시 77)옹은 예전 수원천이 그립다고 한다. 그나마 이렇게라도 복원을 했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하면서 자연은 후손에게서 빌려온 것이다라는 말이 새삼 피부에 와 닿는다고 한다. 수원천을 복원시키지 못했다면 두고두고 후손들을 볼 면목이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장맛비로 인해 맑은 물이 흐르는 수원천

 

수원천의 발원이 시작하는 광교산은 본래 광악산(光嶽山)이었는데 928년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을 평정하고 광악산 행궁에 머물면서 군사들을 위로하고 있을 때, 산 정상에서 광채가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이 산은 부처가 가르침을 내리는 산이라 하여 산 이름을 광교(光敎)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그 산에서 시작해 흐르는 물줄기가 바로 수원천이다.

 

26일 오후 영동교에서부터 수원천 옆길을 따라 수원천을 살피면서 걸어보았다. 며칠 전 많은 비가 내려 수원천변 산책로 가까이까지 물이 차오르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은근히 걱정이 되어서이다. 다행히 물이 줄어 지난 6월 녹조현상이 보이던 수원천이 정상적인 맑은 하천의 상태로 돌아와 무엇보다 안심이 된다.

 

수원천은 생명이란 생각을 늘 하고 살아가는 나에게는 수원천이 수원화성 한 복판을 흐르고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자랑스럽다. 정조대왕이 화성을 축성하면서 물길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한때는 복개를 한 수원천 주변으로 잡다한 판잣집들이 널려있기도 했지만, 깨끗하게 정비가 된 이후 산책로까지 조성하자 수원천은 다시 생명의 하천으로 돌아온 것이다.

 

 

여름피서 난 수원천에서 합니다

 

영동교를 지나 영동시장과 못골종합시장을 연결하는 다리 밑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물가에 앉아 더위를 피하고 있다. 올 장마는 마른장마가 들 것이라는 기상청의 예보와는 달리 국지성 소나기가 내려 한때 물이 불어났던 수원천이 원 상태로 돌아가자 수원천을 찾아 더위를 피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다.

 

지동교 아래편에는 아이들이 수원천에 발을 담그고 물장구를 치고 있다. 그 모습만 보아도 수원천이 시민들에게 얼마나 좋은 하천인가를 알 수 있다. 여름이 되면 무더위를 피해 광교산 계곡부터 사람들로 인해 빈틈이 없는 곳이 바로 수원천이다. 남수문 수벽에서 낙차 큰 물줄기가 쏟아져 내려 하천을 가득 메우고 흐르는 물이 한 낮의 더위를 가시게 만든다.

 

올해는 비가 많이 내려 피서를 가기 위해 고생을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수원천의 물도 맑아지고 물이 이렇게 풍성하게 흐르고 있으니 지동교 다리 밑에 자리를 깔고 피서를 해야 할 듯하네요. 피서 간다고 고생하느니 차라리 수원천에서 피서를 하면서 그 비용으로 주변에 널린 먹거리를 먹는 것이 정말 좋은 피서죠

 

인근 팔달문 시장 관계자는 경비를 들여가며 피서를 간다고 고생을 하는 것보다 차라리 수원천에서 여름 피서를 즐기겠다고 한다. 예전 어릴 적 수원천에서 멱을 감으며 놀던 때를 생각하며 시원한 물소리까지 들을 수 있으니 이보다 좋은 피서가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다. 수원시민의 휴식처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수원천. 올 여름 피서는 나도 이곳을 선택해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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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철 융릉 숲, 걸어만 가도 절로 힐링

 

융릉은 사도세자의 능침이다. 1762년 윤 521일 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뒤주 속에 갇혀 숨진 사도세자는, 그해 723일 현재의 동대문구 휘경동인 양주 배봉산 아래 언덕에 안장되었다. 아들을 죽인 것을 후회한 영조는 세자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에서 사도라는 시호를 내리고, 묘호를 수은묘라고 하였다.

 

7일 오후, 사도세자가 묻혀있는 융릉을 찾았다. 올해 수원화성문화재가 열리면 정조의 능행차를 서울서부터 시작해 화성 융건릉까지 이어간다고 한다. 그런 능행차를 융릉은 어떤 모습으로 맞이할 것인가 궁금해 미리 융릉을 찾아본 것이다. 장마철이라 그런지 습한 날씨로 인해 조그만 걸어도 온 몸이 끈적거린다.

 

 

정조는 1776년 자신이 왕으로 즉위하자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장헌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수은묘를 원으로 격상시켜 영우원으로 고쳐 부른다. 정조 13년인 1789년에는 무덤을 화성시 안녕동의 현재 위치로 옮기고 현륭원으로 격상하였다. 그 뒤 순조 15년인 18151215일 혜경궁 홍씨가 춘추 81세로 승하하자 순조 16년인 181633일 현륭원에 합장하였다.

 

그 뒤 고종은 황제로 즉위한지 3년이 되는 광무 3년인 18991112, 장헌세자를 왕으로 추존하여 묘호를 장종으로 올렸기에 융릉이라고 능호를 정하였으며, 곧이어 1219일에는 황제로 추존하여 장조의황제라 하였으며, 혜경궁 홍씨도 헌경의황후로 추존 되었다.

 

 

사도세자가 잠든 융릉을 걷다

 

융건릉 입구 매표소에서 2인용 표를 한 장 구해 안으로 들어섰다. 맨 먼저 찾아본 곳은 바로 재실이다. 재실은 융건릉 제향 때 제관 등이 미리 도착하여 몸과 마음을 정하게 하여 제를 준비하는 곳이다. 평소에는 능참봉 등 능을 관리하는 관리가 이곳에 묵으면서 능역을 돌보는 역할을 맡아한다. 이곳 융건릉의 재실에는 재실 외에도 향을 보관하는 안향청, 제례업부를 주관하는 진사청,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와 행랑채 등이 있다.

 

재실의 안마당에는 천연기념물 제 504호인 화성융릉 개비자나무가 자라고 있다. 개비자나무는 남해안의 따듯한 곳에서 자라는 비자나무보다 추운 중부지방까지 분포하고 있다. 개비자나무는 여러 포기가 한꺼번에 모여 자라며 머리빗 모양의 잎이 비()자 모양으로 뻗고 주홍빛 열매가 달린다.

 

재실을 벗어나 우측길로 들어서면 소나무들이 유난히 많은 숲길이 나타난다. 그 숲길은 자연적인 흙길로 조성되어 있으며 까치와 청솔모 등이 융릉을 찾은 나그네를 반긴다. 여기저기 마련되어 있는 의자는 쉬어가라며 손짓하고 있는데, 경사진 흙길을 내려가 좌측으로 난 길을 걸어 곤신지를 찾았다.

 

 

곤신방에 마련한 원형 연못 곤신지

 

곤신지는 원형 연못으로 융릉이 천장된 이듬해인 1790년에 조성된 연못이다. 곤신지는 융릉의 남서방향을 뜻하는 곤신방에 조성한 연못으로, 묘지에서 처음 보인다는 물을 뜻하는 생방으로, 이곳이 길지이기에 조성했다고 한다. 곤신지는 비가 내려서인가 물이 탁하다. 그 물 속에 유영을 하는 물고기들은 이 여름철을 꽤나 즐기는 듯하다. 온몸이 끈적거리는 날 유난히 물고기들의 활동이 활기차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융릉 방향으로 향한다. 까치 몇 마리가 앞장서 뛰어간다. 마치 경쟁이라도 하자는 것 같다. 한 무리의 아낙네들이 지나간다. 이런 날씨에도 융릉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고 있다. 홍전문을 지난다. 홍전문은 영혼이 출입하는 문으로 홍살문, 혹은 신문(神門)이라고도 한다.

 

 

정자각 뒤편 저만큼 장조의황제(사도세자)와 헌경의황후(혜경궁 홍씨)의 합장릉이 보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아름답다는 능침 가까이 갈 수 없다. 역대 왕들의 능침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능침을 돌아볼 수 있는 소로가 모두 폐쇄되었다. 먼발치에서만 볼 수 있는 융릉.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의 능이지만 아들 정조의 뜻에 따라 왕의 능침과 같은 모형으로 조성했다는 아름다운 능침.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한다. 능침을 찾아 온 나그네에게 자신의 슬픈 사연을 하소연이라도 하는 것일까? 잔뜩 흐린 하늘에서는 금방이라도 굵은 빗줄기가 쏟아져 내릴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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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24, 권선동 한림도서관 야외에서 펼쳐지다

 

관무재(觀武才)란 조선시대 왕의 특별한 명령이 있을 때 시행한 무과시험의 하나이다. 관무재를 실시할 때는 한량과 군관을 비롯하여 조관 출신 등, 모두에게 응시자격이 주어졌다. 관무재는 조선조 선조 5년인 1572년부터 시작해 모두 22회에 걸쳐 실시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관무재의 시험은 초시와 복시가 있었는데, 복시의 경우 중앙에서는 왕이 직접 참석하여 춘당대에서 시험했다.

 

이와는 달리 지방에서는 의정부 관원 1인이 시험관이 되었다. 시험을 치른 결과 성적이 우수한 자가 한량일 경우 수령이나 변장에 임명했고, 군관일 경우에는 품계를 높여주거나 상을 주었다고 한다. 그런 관무재의 형태를 쉽게 알 수 있는 수원시립 무예24기 시범단의 관무재공연이 21일 권선동 한림도서관 야외에서 펼쳐졌다.

 

621일은 낮의 길이가 가장 길다는 하지이다. 30도를 웃도는 날씨에 오후 4시라고 해도 초여름 날씨치고는 상당히 뜨거운 날이다. 한림도서관 야외에는 그늘을 만들기 위해 부스를 쳤지만, 그 안에 들어가도 흐르는 땀은 어쩔 수 없다. 이런 날씨에도 인근 아파트에 거주하는 시민들이 아이들과 함께 나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관무재라는 용어도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무예24기 시범단이 수원에 있다는 것은 들었는데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오늘 아이를 데리고 나왔어요. 아이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이 더운 날 맨 앞에 앉아 열심히 보고 있네요

 

 

문화콘텐츠 아이템으로 활용가치 있어

 

인근 아이파크 아파트에 거주한다는 이아무개(, 38)씨는 평소 무술 같은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아 모르고 있었다고 하면서, “이렇게 좋은 공연이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고 한다. 관무재 공연을 보고 있던 한 시민은 이 좋은 아이템을 갖고 문화상품으로 만들면 좋겠다면서 전문가들을 모아 문화콘텐츠 아이템으로 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관무재는 그동안 시립무예24기 시범단에 의해 몇 번 공연이 된바 있다. 하지만 관무재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하나만 갖고도 훌륭한 문화상품의 아이템이 될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그만큼 수원시의 문화콘텐츠의 실용화가 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의 역사적 공연물을 갖고 13천여명의 관람객을 모아들이는 중국의 송성가무단의 공연이야기를 들으면서 수원의 문화적 인식이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다.

 

 

중국 항주의 송성가무쇼는 송나라 때의 전설과 역사를 표현한 공연으로, 이제는 세계 3대 공연 중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이 쇼의 영어 제목은 ‘The Romance of the Song Dynasty’이다. 약 천 년 전 송조의 고도 항쪼우를 중심으로 한 신화와 전설, 자연 그리고 애틋한 사랑 이야기와 치열했던 전쟁 등을 4개의 단막극으로 연출한 작품이다.

 

<宋城千古情>이란 이 가무쇼는 그 규모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이 관객을 압도한다. 450명의 출연진이 한번에 3,000명이 관람할 수 있는 대형극장에서, 일 년 내 공연하는데도 연일 좌석이 만석이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중국인들이 즐겨하는 관광 상품이다. 이런 세계적인 공연상품을 보면 그 나라의 역사와 인물 등을 주제로 제작된다. 물론 공연장은 필수이다.

 

 

관무재’, 수원을 대표하는 문화콘텐츠로 활용해야

 

21일 오후, 뜨거운 날씨에도 한림도서관 야외에 모인 시민들은 박수를 치며 즐거워한다. 더위보다 관무재를 관람하는 것이 더 의미있다는 시민 장아무개(, 44)씨는 훌륭한 공연물이리면서 이런 좋은 콘텐츠를 활용해 수원의 관광상품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수원을 상징하는 공연물로 손색이 없다는 것이다.

 

관무재는 극적인 요소와 무예24, 그리고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관광상품이다. 수원을 주제로 하는 스토리텔링으로도 손색이 없다. 수원과 별상관이 없는 해괴망측한 공연물을 보여줄 것이 아니라. 이렇게 수원을 상징할 수 있는 문화상품이 개발되어야 한다. 하나의 공연물만 갖고도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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