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읍 단현리 60-7 일대에 고려 때부터 조성이 된 나루. 한 때는 소금배가 드나들기도 해서 강원도 지역으로 오가는 상인들이 줄을 잇던 곳이다. ‘부라우나루’는 여주읍 단현리 부라우마을과 남한강 건너편의 강천면 가야리 지역을 연결하던 나루이다. 나루 주변에는 붉은 기운을 띤 바위들이 있어 ‘단암(丹岩)’ 이라고 부른데서 ‘부라우’라는 명칭이 생겼다고 한다.


나루는 마을에서 약 25m의 나지막한 고개 너머 급경사를 이룬 강가에 위치하고 있다. 강가로 돌출한 바위가 거센 물결을 막아주지만 홍수가 나면 나루터 주변에 가까이 있던 가옥들이 침수 피해를 입었다고도 한다. 이 마을로 들어서는 고갯마루에는 민참판댁 외가가 있었다고 하는데, 인근의 능현리는 명성황후의 생가가 있는 여흥 민씨의 집성촌이었다.


절경이었던 부라우나루, 쓸쓸한 바람만

 

6월 16일 무더운 날 찾아간 부라우 나루터. 강가 바위 위에는 육모정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까지도 주춧돌이 있었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정자 주변 암벽에는 ‘단암(丹嵓)’ 이라고 새긴 각석이 남아 있다. 이곳을 기점으로 남한강을 오가는 나룻배는 단현리 부라우마을에서 관리하였는데, 길이는 15m 내외로 약 40명이 승선할 수 있었다고 한다.

 

 


부라우나루는 1975년경부터 사용을 하지 않았다. 부라우나루는 주로 여주군 강천면 주민들이 여주장을 이용하기 위해 부라우나루를 건넜고, 단현리 부근 주민들은 남한강 건너 강천면에서 땔나무 채취를 하기 위해 나루를 이용하였다고 한다. 또한 소장수들이 원주장에서 소를 구입하여 부라우나루를 건너 여주장으로 이동하였다고 한다.


단현리 부라우마을의 고갯마루에는 99칸의 민참판댁이 있었다고 전한다. 민참판댁 옛터에서 조금만 걸으면 남한강이 나오는데, 강가의 바위 절벽위에 침석정지의 흔적이 남아 있다. 바위 위에는 침석정의 기둥자리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육각형 홈이 3개가 남아 있다. 이곳 남한강의 마을사람들은 ‘단강(丹江)’이라고 부른다. 아마도 단암 때문인 듯하다.

 

 


슬픔은 안은 부라우나루에서 펼쳐진 나루굿


정자를 짓고 남한강의 흐르는 물을 바라보면서, 어떤 생각들을 했을까? 잊혀진 정자 자리에 앉아 시름을 놓아본다. 이 여울져 흐르는 물길이 사람들의 생명도 앗아간 아픔이 있는 곳이다. 1966년 8월 25일 오후 5시 30분 경 부라우나루터 상류 50m 지점 멍석바위 앞에서 여주읍에서 장을 보고 가던 강천면 가야리 지역주민 29명이 탄 나룻배가 침몰하여 17명이 구조되고 12명이 실종되는 참사가 발생했었다.


이 슬픔이 가시지 않아서일까? 여주에서 활동하는 풍물패 다스림(단장 김미진)과 도공 김원주가 한마당 나루굿을 펼쳤다. 풍물패가 한바탕 요란하게 풍물을 울려 산천의 신에게 제를 시작함을 알린 후, 마을의 주민이 나와서 오래 묵은 느티나무 앞에서 간단한 제상을 차려놓고 목신제를 거행하였다.

 

 

 


그리고 나서 김원주의 행위예술이 시작되었다. 황토 물을 온몸에 바르고 검은 비닐 천을 갖고 죽은 모든 생명을 다시 살리는 몸짓이었다.


“저 항아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인간들로 인해 오염된 검은 비닐이 그 안에 들어있죠. 그것을 황토로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이 우주만물의 모든 것을 살리자는 것이죠. 삶과 죽음, 그리고 다시 태어남 이런 것들을 몸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황토를 강물에 풀어 물을 정화시키고, 검은 비닐처럼 더럽혀진 인간의 마음을 씻어내는 것입니다. 그 다음 그 더럽던 비닐로 희망의 꽃을 만들고, 그 뿌리는 인간이 되는 것이죠. 결국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인간이 파괴하였기에, 이제는 인간들이 책임을 지고 다시 살려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게 슬픔을 안고 있는 부라우나루굿은 끝을 맺었다. 하지만 부라우나루는 아직도 슬픔을 안고 있다. 남한강의 절경으로 꼽히는 이곳이 마음대로 드나들 수가 없다는 것이다. 부라우나루의 슬픔은 언제나 풀릴 것인지. 강물을 따라 물길을 잡아가는 풍물패의 소리가 유난히 슬프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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