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원군에서 역모로 몰려 사약을 받고, 그 뒤 부관참시까지 당하는 수모를 당했다면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라고 밖에는 할 수가 없다. 영욕의 세월이란 그런 것인가 보다. 딸이 왕후가 되어 부원군이라는 칭호를 듣던 김제남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연안으로 자는 공언이다. 1602년 둘째 딸이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로 뽑히자, 연흥부원군으로 책봉이 되었다.

 

‘역사는 사람을 만든다.’ 하지만 헛된 꿈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사람이 역사를 만든다는 착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 역사가 사람을 만든 주인공을 만날 수가 있는 곳이 있다.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2차선 도로 길가 안쪽에 있는 신도비는, 그러한 슬픈 역사의 주인공을 말하고 있다.

  

슬픈 역사의 주인공 김제남

 

원주 법흥사지로 들어가는 길목 오른편에는 높이 35m에 둘레 6m, 수령 500년인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가 서 있다. 그리고 그 옆에 쓸쓸히 서 있는 신도비 1기가 자리를 한다. 현재는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1호로 지정이 된 김제남의 신도비다.

 

 

신도비란 묘역에 세우는 일종의 비석이다. 그러나 아무나 신도비를 세울 수는 없다. 임금이나 2품 이상의 벼슬을 지내야만 세울 수가 있는 것이다. 대개 무덤 동남쪽에 세우는 이 신도비는 그 품계가 아니라고 해도, 저명한 공신이나 유학자의 경우에는 왕명에 의해서 세우기도 했다.

 

역사가 그를 놓아두지 않았다

 

‘권불십년(權不十年)’ 이라 했던가. 1602년 연흥부원군으로 책봉이 되고, 광해군 5년인 1613년에는 이이첨 등에 의해 인목왕후의 소생인 영창대군을 세자로 추대하려 했다는 모함을 받아, 사약을 받고 세 아들과 함께 죽음을 당했다. 1616년에는 인목왕후의 폐모론이 일자, 다시 부관참시를 당하는 불운을 겪었다.

 

‘부관참시(剖棺斬屍)’는 이미 사망한 사람이 죽은 후에 큰 죄가 드러났을 때 처하는 극형으로, 무덤에서 관을 꺼내어 시신을 참수하는 것으로 사람을 두 번 죽이는 형벌이 아니던가. 그리고 ‘인간만세 새옹지마’라는 말이 있듯,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후인 1623년, 인조반정 으로 관작이 복구되고, 왕명으로 사당이 세워졌으며 영의정으로 추증이 되었다. 그래서 역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지, 결코 사람이 역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머리를 뒤로 돌린 귀두, 세상이 보기 싫었을까?

 

김제남의 신도비는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구조이다. 받침돌의 거북머리가 비를 바라보듯 뒤를 향하고 있으며, 머릿돌에는 구름 속을 헤치는 용의 모습이 가득 새겨 있다. 많은 신도비를 보았으나, 거북의 머리가 비문를 바라보듯 고개를 뒤로 돌리고 있는 것은 보질 못했다.

 

그런데 왜 이 신도비의 거북이는 머리를 돌리고 있을까? 그것은 아마 우리 후대들에게 주는 교훈인지 모르겠다. 즉 개구리 올챙이 시절을 잊어버리지 말고, 지나온 어려움의 발자취를 돌아보라는 뜻인가 보다. 그것이 아니라면 세상의 모든 영화를 고개를 돌리고, 보지 말라는 뜻은 아닐까?

 

이 신도비를 보면서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신도비가 우리에게 주는 역사의 교훈이 너무나도 이 시대에 걸 맞는 듯도 하다. 2차선 도로 길 건너에 있는 사당인 의민사는 1923년 세워졌으나, 그 후 두 차례에 걸쳐 소실이 되었다. 현재의 사우는 1965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김제남의 신도비가 주는 역사의 교훈, 우리는 그 의미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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