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에는 ‘태실, ’태봉‘ ’태재’ 등의 이름을 가진 곳이 상당히 많이 있다. 이는 모두 왕족의 태를 묻은 곳이 있다는 이야기다. 왕자가 태어나면 태실도감을 설치하고 길일을 택해 ‘안태사.를 보내 태를 묻게 했다. 『경국대전』에 예전에 보면 지방은 관찰사가 왕과 왕비, 왕세자의 태실을 모두 살피게 되어 있다.

영조 22년인 1746년에 펴낸 조선 후기의 법전인『속대전』에는 태왕태실의 경계는 300보, 왕세자의 태실은 200보로 정해, 이 경계 안으로는 일반인의 출입을 금한다고 되어있다. 태실은 대개 한 사람의 것을 묻지만, 사적 제444호인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의 성주세종대왕 자태실은 모두 19기의 태실이 몰려 있는 곳도 있다.


태실은 어떻게 꾸미나?

태실은 대개 산의 봉우리 근처에 자리를 잡는다. 그러나 전주 경기전 안에 있는 예종대왕의 태실 및 비는, 일반 평지에 자리를 하고 있어 의아스럽게 생각을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 태실은 원래 이곳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현재의 자리에서 멀리 떨어진, 완주군 구이면 원덕리 구이초등학교 뒷산 정상부근에 있던 것이다.

이 자리에 있던 태실이 어떻게 해서 경기전 안으로 옮겨온 것일까? 태실은 태항아리라는 태를 담은 석실을 만들게 되어있다. 기단석을 놓고 그 위에 무늬를 새긴 앙련을 올려놓는다. 그 위에는 둥근 모양의 중동석을 놓고 개첨석을 올린다. 머리에 해당하는 덮개석은 복련과 보주로 구별된다.




이와 같이 땅 위에 있는 것과 달리 지하에는 기단석 밑으로 토석을 깔고 그 밑에는 개석을 놓는다. 태를 담은 태항아리는 돌로 만들고 그 안에 석함을 놓는다. 전체적으로는 땅 밑에서부터 태항아리, 석함, 개석, 토석, 기단석, 앙련, 중동석, 개첨석, 복련, 보주 등의 순서로 위로 올리게 되어 있다.

일제에 의해 파 해쳐진 예종대왕 태실

완주군 구이면에 있던 예종대왕의 태실은 선조 11년인 1578년에 태실을 만들었고, 영조 10년인 1734년에 고쳐지었다. 이렇게 태실을 고쳐지을 때는 예조의 당상관 및 감역관이 감독을 하는 자리에서만 가능했다. 이러한 예종대왕의 태실은 1928년 조선총독부가 태실에 있는 태항아리를 가져가면서 파괴가 되었다.

1920년대 우리문화말살정책을 편 일제는 숱한 우리의 문화재를 일본으로 가져가면서, 태실에 보관 중이던 태항아리도 가져간 것으로 보인다. 그 후 1970년에 태항아리를 잃고 폐허가 되어있던 예종대왕의 태실 및 비를 경기전 안으로 옮겨 복원하고, 전북 민속자료 제26호로 지정하였다.



그나마 석물은 보존이 잘 되어있어

다행인 것은 태항아리를 일본인들이 가져갔다고 하지만, 태실과 비의 석물들은 잘 보존이 되어있었다는 것이다. 예종대왕의 태실은 팔각형의 돌난간을 두르고, 그 안에 기단석을 놓았다. 그리고 배가 불룩한 둥근 중동석을 놓고 지붕돌을 덮은 형태이다. 태실 한편에는 비가 서 있는데 이 비에는 예종대왕의 태실이라 적혀있으며, 뒷면에는 건립년대를 적고 있다. 뒷면에 적힌 연대를 보면, 이 태실이 ‘만력 6년 10월 초 2일’에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선조 11년인 1578년이다.

비는 받침석을 거북이로 했는데 특별한 조각을 하지는 않았다. 다만 비의 덮개석에는 뿔이 없는 용을 새겨 넣은 것이 특이하다. 이틀 후 8월 29일은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날이다. 일제에 의해 수많은 우리 문화재가 훼손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숱한 문화재들이 있는데, 이 땅에 있는 문화재조차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는 현장을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다. 그보다는 먼저 소중한 우리의 문화재가 제대로 알려질 수 있도록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중매체에 혈안이 되어있는 국적 없는 문화를 선호하는 우리민족의 우둔함이 더욱 가슴을 찢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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