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대왕의 혜안으로 수원은 축복받은 땅

 

전국에 뒤늦은 장맛비가 쏟아지면서 뉴스에서는 도심 하천을 건너던 노인이 숨졌으며 곳곳에서 교량이 유실되는 등 피해가 잇따랐다고 보도했다. 3일 기상청 발표에 따르면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과 강원 영서지방 등에 3일 새벽 시간당 최대 60가 넘는 장대비가 쏟아져 크고 작은 사고가 이어졌다고 한다.

 

3일 오후 화성 남수문을 나가보았다. 그동안 남수문 앞 수벽에는 물이 흐르지 않고 수원천에는 녹조가 심하게 끼어있었는데, 이틀 동안 내린 장맛비로 인해 말끔히 씻겨나갔다. 남수문 앞 수벽에는 수문마다 물이 차 넘쳐나고 녹조는 찾아볼 수 없다. 많은 물이 지저분한 녹조를 하류로 내려 보낸 것이다.

그동안 비가 오지 않아 답답하던 수원천이 모처럼 살아있는 하천답다. 아래로 내려가면 냄새가 풍기던 수원천도 늘어난 수량으로 인해 말끔해진 모습이다. 수원은 큰 비가와도 물난리가 나지 않는 도시이다. 많은 비가와도 큰 물난리가 없다는 것은 축복이다. 조금만 비가 쏟아져도 여기저기 물난리가 났다는 소식이 들려오는데 수원은 그런 큰 물난리 소식은 듣지 못한다.

 

 

정조대왕의 업적을 치하하다

 

알고 보면 수원에 큰 물난리가 나지 않는 것은 정조대왕의 치산치수(治山治水) 때문이다. 옛 성군은 치산치수를 잘해야 했다. 산에는 나무가 푸르고 강과 하천에는 맑은 물이 흘러야 한다. 하기에 치산치수는 천하지대본이고 치산치수를 잘해 물을 잘 다스려야 성군이라고 일컫는다. 풍족한 물로 인해 가뭄이 들지 않아야 농사는 풍년이 들고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는다.

 

정조대왕은 화성(華城)이라는 신도시를 건설하면서 성을 축성하고 난 후 가장 먼저 치산치수에 힘을 썼다. 만석거는 179531일 둑을 쌓기 시작하여 518일에 완성되었다. 진목정 아래로 흐르는 물을 방죽을 쌓아 물을 채워 갑문(閘門)을 설치했다. 물을 주변 논에 댈 때는 널판을 열어 물의 양을 조절할 수 있도록 하였다. 화성의 북문인 장안문 밖에서부터 새로 개간한 곳을 대유평(大有坪)이라 하여 주변 백성이 충분히 먹을 수 있는 곡식을 생산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정조 19년인 1795년 당시 우리나라 전역에 가뭄이 들었다. 전국적으로 가뭄으로 인해 농사를 망쳤지만 수원은 달랐다. 만석거를 이용해 농사를 지은 대유둔 벌판은 대풍년이 든 것이다. 정조대왕은 만석거의 축조로 인해 농사가 풍년이 들자 안녕리에 만년제를 쌓고, 화성 서쪽에 축만제를 건설하라고 지시했다

 

정조대왕의 명에 의해 화성 서편에 만석거보다 3배 정도 큰 축만제가 건설되었다. 축만제는 화성의 서쪽 여기산 아래 축조한 저수지로 정조23년인 1799년 내탕금 3만 냥을 들여 축조된 관개시설로 수문 2곳을 갖추었다. 서호로도 불리는 축만제는 천년만년 쌀 만석(萬石)의 생산을 축원하는 뜻을 가지고 있다.

 

 

가뭄과 물난리 없는 수원은 축복의 땅

 

남수문으로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를 바라보면서 수원은 축복받은 땅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미 조선시대에 정조대왕이 조성한 수리관개시설로 인해 큰 걱정하지 않고 농사를 지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 그와 연결된 하천들이 있기 때문에 배수가 잘 된다. 결국 정조대왕의 치산치수로 인해 아직도 덕을 보고 있는 셈이다.

 

사람들은 정조대왕이 화성을 축성한 이유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정조대왕의 많은 업적 중 하나일 뿐이다. 백성을 자식같이 사랑한 정조대왕은 자신이 죽고 난 후에도 자손들이 이 땅에서 오래도록 굶주리지 않고 배부르게 살아가기를 원했다. 남문 일대에 내탕금을 주어 개설한 성밖시장 또한 정조대왕의 애민정신에서 비롯한 것이다.

 

장맛비에 여기저기 물난리가 나고 재산피해는 물론 인명피해까지 났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우리는 정조대왕에 대해 더 많은 것은 알아야한다는 생각이다. 단지 강한 국권과 백성이 굶주리지 않기만을 바란 것이 아니라 치산치수의 본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미 220년 전 정조대왕은 후손들이 살아갈 땅을 풍요롭게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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