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돌근, 그는 갔어도 장단, 피리소리 생생히 남아

 

경기도의 소리를 보면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만큼 많은 풍류의 소리들이 있어 우리는 경기소리를 이야기할 때, 한 가지만을 들어서 이것이 경기도의 소리다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경기도에서 경기인들에 의해 창출된 많은 소리들은 각기 그 특징이 있다. 경상도의 소리가 남성적이고 투박하며, 전라도의 소리가 여성적이고 섬세한 면이 있고 한을 표출한다고 한다.

 

경기도의 소리는 그 모든 것을 다 포용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전라도의 소리처럼 구슬픈 한을 갖지는 않는다. 한을 표현할 때도 어찌 보면 한의 소리 같지 않은 가운데 진한 한을 표현한다. 하기에 사람들은 경기도의 소리는 그 깊이를 가늠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만큼 많은 소리가 있고 다양한 형태로 표현이 되기 때문이다.

 

경기도당굿은 그 안에 많은 소리가 있다. 도당굿에서 나타나는 소리는 흔히 경기, 충청간의 판소리인 중고제(中高制)의 음률로 되어 있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 소리가 생긴 내력으로 본다면 중고제가 경기도의 굿 소리를 인용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판소리의 창출이 무가에서 기인했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경기도에서 불리는 무가에 중고제의 원형이 경기도의 굿에 있다고 하겠다. 그 중에서 가장 먼저 불러지는 소리가 바로 청배(請拜)’. 청배란 신격을 청해서 모셔온다는 뜻이다. 오니섭채라는 장단을 치면서 소리를 하는 화랭이들은, 바로 도당굿에서 춤과 소리, 음악을 담당하는 만능 예술인들이다.

 

 

굿에서 제일 먼저 부르는 소리 청배

 

도포를 입고 갓을 정갈하게 쓰고 장단을 치면서 하는 소리, 청배는 각 부분의 첫머리에 불려진다. 이는 가계로 전해지는 기, 예능을 전수받은 세습계열의 화랭이들은 강신이 되지 않으므로, 먼저 그 거리의 신격들을 청원 해 굿청에서 흠향을 하도록 소리로 모셔드리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하기에 경기도당굿에서 청배는 매우 중요한 부분에 속하고, 그 소리 또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흔히 청배는 부정청배, 시루청배, 제석청배, 군웅청배 등이 불러지고 있다.

 

공심은 제례주요 남산이 본이로구나

집터를 골라 잡으시니 삼십상천 서른 지어내려

허궁천 비비천 삼하도리천 열시왕을 마련하고

청개 여자하고 지벽이 여축하여

산천에 올라 좌우를 살펴보니 일월성신이 되옵시고

중탁자 하위내려 산천초목이 되오실 때

복덕씨는 나무를 마련하시고 수인씨는 물을 마련하시고

화덕씨는 불을 마련하시고 신농씨는 농사법을 마련하실 때

높은 데는 밭을 풀고 깊은 데는 논을 풀어

구백곡식 씨를 던져 만인간 먹게 마련하실 적이로구나

 

살아생전 오직 도당굿의 전승과 보전에 애써 오신 많은 분들이 불러오던 부정청배의 한 대목이다. 그 화랭이들의 소리와 음악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던 방돌근 선생은, 경기도 평택시 이충동 동령마을을 고향으로 두고 있다.

 

 

어려서부터 집안의 남자들이 수명이 짧은 것을 걱정한 할머니가 험한 이름을 지으면 명이 길어진다고 해서 이름을 돌근(乭根)’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마치기도 전에 경기시나위 남양제의 대가인 장유순 산생 밑에서 시나위를 익혔다. 장유순 선생의 가문은 화성시 남양면을 비롯한 인근에서 떨치던 세습무가였다.

 

장유순 선생은 아침마다 방돌근을 찾아와 당신이 갖고 있던 재주를 다 물려주었다고 한다. 큰 선생 밑에서 큰 제자가 나는 법이다. 장유순 선생에게 남양제 시나위를 물려받은 방돌근은 도대방의 가문인 오산을 근거지로 이루어진 이씨 세습무가의 마지막 화랭이라고 하는 이용우 산생에게서 그 어렵다고 하는 도당굿의 장단을 전수받았다. 당시는 꼭 장단을 치려는 것이 아니고, 함께 일을 다니면서 이것저것 알려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린 나이인 19세부터 이용우, 정팔봉, 오필선, 이덕만 선생 등 내로라하는 경기도 세습무가의 화랭이들 틈에서 함께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내온 세월이 40년이 훌쩍 지나버렸다고 한다. 한 때는 전국을 유랑하기도 했다. 국극단을 쫓아 이곳저곳을 다니다가 몸이 약해지기도 했고, 때론 힘든 일을 당하기도 했지만 피리와 장단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정부에서 각 지역의 굿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기 시작하면서 수원으로 돌아와 다시 굿판에 섰다.

 

 

경기무속음악의 대가 방돌근 선생

 

방돌근 선생의 이야기를 쓰자고 하면 아마 석 달 열흘은 써야할 것 같다. 그만큼 이 세계에서 살아 온 사람들의 가슴은 한으로 멍이 든단다. 그 한이 소리가 되고, 그 한이 장단이 된다는 것이 선생님들의 말씀이셨다. ‘장단 잘 치고 피리 잘 부는 사람방돌근 선생을 칭하는 보편적인 용어이다. 그의 장단은 그 어렵다는 도당굿 장단을 손자락 안에서 화려하게 구사를 한다. 피리시나위를 듣다가 보면 가벼운 듯 무겁고, 무거운 듯 깊게 가라앉지를 않는다.

 

선생에게서 물려받은 소리를 전수생들에게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익혀주던 생전의 모습에서 그의 인간적인 따스함을 엿볼 수가 있었다. 장단을 알려줄 때도 선생들에게서 당신이 받은 것을 하나라도 더 알려주기 위해서, 몇 번이고 반복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정이 많고 사려가 깊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생애 첫 발표회 앞두고 세상을 떠나

 

2001517. 생애 첫 발표회를 4일 앞두고 방돌근 선생은 세상을 떠났다. 방돌근 선생이 세상을 뜬 후 세인들은 이제 경기도의 음악은 끝났다라는 말로 아쉬움을 표했다. 그러나 세상을 뜨기 일 년 전부터 방돌근 선생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모든 기량을 제자들에게 물려주었다. 날마다 집으로 불러들여 혼신을 다해 전수를 시키는 모습을 생각해 보면, 자신이 갈 길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의 경기 시나위는 당시 제자인 김현주(, 피리. 당시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부수석), 안재숙(, 해금. 당시 국악고등학교 교사), 김현숙(, 대금. 당시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단원), 김흥수(, 피리. 옛소리 국악원장)에게로 전해졌다.

/ 하주성

경기일보 · 경기문화재단 공동기획(20021229일자 경기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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